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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곧 닭이 울더라

작성자권순태목사|작성시간17.01.29|조회수370 목록 댓글 0

성경: 마태복음 26:74-75제목: 곧 닭이 울더라

일시: 2017. 1. 29(설 신년예배 닭의 해)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독일에 살면서 가장 많이 쓰는 단어가 슐디궁과 당케쇈일 것이다. 사실 어디에 살든지 그 단어들이 가장 많이 쓰이는데 이유는 소통을 주기 때문이다. 대화가 통하려면 슐디궁과 당케를 잘해야 한다. 슐디궁은 마음의 빗장을 여는 것이다. 상대방이 들어올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주는 것이다. 슐디궁은 관계의 첫출발이 된다. 한편 땡큐는 상대방을 높이는 것이다. 그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소통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이 자기를 낮추고 상대방을 높이는 쏘리와 땡큐이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보라.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기도할 때 기도의 소통이 있었던 것이다. 소통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이 선포하신 첫 메시지도 “회개하라”였다.

 

II.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오늘 말씀에 베드로는 통곡의 눈물을 흘렸다. 그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었다. 회개의 눈물을 흘리기 위해서는 먼저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그냥 막 울 수는 없다. “생각나는 것”이 있어야 한다. 베드로는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란 예수님의 말씀이었다. 쏘리를 위해서 진리가 있어야 한다. 그냥 마구 쏘리가 아니다. 그 쏘리의 근거는 진리여야 한다. “알았다 알았어 내가 잘못했다 아이 참...” 이런 식으로 귀찮아서 하는 쏘리가 아니다. 나아가 쏘리의 근거가 엉뚱하면 더 쏘리한 것이다. 잘못을 알지 못하면 더 맞아야 돼. 미안하다고 하면서 근거가 없으면 안 된다. 내가 잘못했다고 할 때 그 근거가 있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이 난 것이다. 빛을 비추어 볼 때 비로소 내가 드러난다. 그래서 회개는 말씀과 진리를 더 많이 알고 더 가까이 갔을 때 나오는 것이다. 회개의 근거가 바로 진리가 되는 것이다. 진리가 있을 때 아무 말 안 해도 회개가 저절로 나오는 것이다. 내가 얼마나 추하고 보잘 것 없는 존재인지 숨고 싶은 것이다.


베드로가 밤이 맟도록 수고하였으나 아무런 고기를 잡지 못했다. 주님이 베드로의 배를 강대상 삼아 말씀을 전하시고 베드로에게 말한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5:4). 그때 베드로는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게 된다. 결과는 어떠한가? 그물이 찢어지고 배가 가라앉을 정도로 주체 못 할 양의 고기가 잡혔다. 그때 베드로의 즉각적인 반응은 무엇인가?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입니다”라고 한 것이다. 좀 엉뚱하지 않는가? 주님이 베드로에게 너 죄인이야 그래서 재주 없어 물고기가 잡히지 않은거야 라고 말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고기가 어디 있는지 잘 아는 주님과 함께 있으면 좋은 것 아닌가? 그는 진리되신 주님을 보았을 때 쏘리였던 것이다.


이사야가 성전에 갔다. 거기서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바로 나온 것이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였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서면 다른 게 없다. 그냥 수치스럽게 된다. 할 말을 다 잊어 버릴 것이다. 얼어 붙을 것이다. 감히 거짓말할 생각을 하지 못할 것이다. 청문회에서 다들 모른다고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어찌할 수 없을 것이다.

말씀을 더 알 때 우리는 회개하게 된다. 그래서 나쁜 죄만이 죄가 아니라 기도하지 않고 용서하지 않고 사랑해 주지 못하고 시간을 내어 주지 못하고(형제의 헐벗는 것을 보고도) 말씀을 몰랐으면 좋았을텐데 더 알게 됨으로.


아내와 처음만난 소타나 커피샾은 조명이 흐릿했다. 그 속에서는 잡티도 안보이고 그저 이목구비 뚜렷한 윤곽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다시 또 만날 때는 점점 더 알게 된다. 버섯찌게 식당이 생각난다. 그리고 더 밝은 곳으로 나아가게 되고 마침내 결혼을 하게 되니 아침에 밝은 불빛 아래 화장기 없는 민낯을 보게 된다. 진리의 룩스가 더 밝아질수록 단점과 실체가 나오게 된다. 빛이 우리를 조명하게 되면 우리 자신을 더욱 잘 알게 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님이라는 빛을 보았을 때 자신이 죄인임을 알았던 것이다. 생각나는 말씀이 있었기에 자신을 비추어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회개는 생각날 진리 선포된 말씀이 있어야 나올 수 있다. 그래서 생각날 것이 있도록 하기 위해서 계속 선포되어야 한다. 네가 나를 세 번 부인하리라. 제자들이 믿든지 말든지 알아 듣든지 말든지 주님은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날 것을 말씀하셨다. 계속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선포해야 한다. 안 해도 말이다. 그래야 “원래 사랑해야 하는데”라는 생각을 한다. 겸손하라고 끝까지 말해야 한다. 아직 겸손할 게 하나도 없어도 말이다. 겸손해야 하는데 안 해도 말이다. 그래야 “원래 내가 자랑하면 안 되는데”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헌신할 기회가 되든 되지 않든 헌신에 대해서 그렇게 말해야 한다. 그래야 안 해도 “이래서는 안 되는데...” 주일성수도 마찬가지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호텔이 아니라 예배드릴 곳을 찾아 놓고 가라고 한다. 잔소리 같다. 귀가 따갑게 듣게 된다. 그래야 예배를 드리지 않아도 마음속이 불편해야 한다. 진리는 사실 불편한 것이다. 그래서 1년 말씀을 계획하면서 십일조, 헌신, 주일성수 등 해야 할 말씀을 꼭 몇 번은 하고 있고 하려고 노력한다. 전혀 그런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마음은 평안할 것이지만 “생각나는 것”은 하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선포되어야 한다. 전혀 그렇지 않은 때도 말이다. 주님께서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31절)라고 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33)라고 한다. 그때 주님이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34절)고 한다. 베드로는 뭐라고 답하는가?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35)라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말해두고 있을 뿐이다. 생각날 것이 있도록 말이다. 이미 선포된 주님의 말씀을 이후에 깨닫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그런 소리가 귀에 들어오는가? 깨달아지는가? 아니다. 진리를 선포하면서도 잘 들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않는다. 그러나 말해두는 것이다. 들어두라는 것이다. 그래야 나중에 생각이 나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때가 있다는 것이다. 나중에 생각나는 것이 되려면 미리 말해야 하지 않는가! 미리 말하지 않으면 생각날 것이 없다.

 

III. “생각나게 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

요즘 대한민국에서 가장 유행하는 말은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라는 말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 볼 생각도 하지 않고 기억을 없애고 싶어 한다. 대한민국이 기억상실증에 걸린 것 같다. 베드로는 주님을 세 번 부인하게 된다. 처음에 종자가 ”너도 갈릴리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라고 하니 “뭔소리여”가 답이다. 두 번째 같은 질문에는 “나는 잘 모립니다”가 답이다. 세 번째는 자기 선생 예수를 저주하면서 맹세하길 ”나는 억울합니다 만난 적도 없고 들은 적도 없습니다“라고 하는 것이다. 주와 함께 죽겠다던 그 천하의 베드로는 어디 갔나 싶다. 이렇게 세 번을 부인하니 곧 닭이 울었다.


그때 베드로는 주님의 말씀이 기억나고 곧바로 깨달음이 왔다. 자기가 얼마나 나약하고 부족한 사람인가 하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아 이런 결코 그런 일은 없을 것이라고 해 놓고 내가 부인했구나. 이 비겁한 것, 이 겁쟁이, 이 배신자...” 이렇게 자책했을 것이다. 닭의 울음소리 자체가 진리는 아니다. 닭 울음소리는 진리를 깨닫게 하고 자신을 돌아보게 하는 것이다. 진리가 그저 내 안에 있어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고 이리 저리 굴러다닌다. 그러다가 닭울음소리가 들릴 때 비로소 진리가 깨달아지는 것이다.

김영삼대통령이 아주 멋진 말을 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 그는 독재의 밤이 깊어도 민주화는 온다는 정치적인 의미로 말을 했다. 밤이 아무리 깊어도 새벽은 온다는 것이고 진리는 부정과 비진리에 대해 결국 승리할 것이라는 것이다. 닭의 목을 왜 비트는가? 닭을 죽여서 “일어나라 꼬끼오”소리를 내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다. 닭의 목을 비트는 이유는 진리의 말씀을 감각하지 못하게 하고 깨닫지 못하게 하기 위함이다. 닭울음 소리가 없어 깨달을 수 없으면 해가 중천에 떴는데도 잠을 잘 수 있다. “새벽”은 빛이고 진리이다. 그것은 생각나는 내용이다. 그리고 새벽 즉 빛과 진리가 왔다고 소리치는 것이 닭울음이다. 닭울음소리는 생각나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새벽도 중요하지만 새벽이 왔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닭은 새벽의 전령이다.


닭울음소리를 들어본 적이 있는가? 필리핀에서 아침에 일어나면 가장 먼저 듣는 것이 닭의 소리다. 시끄러워 못 잔다. 왜 그렇게 닭이 많은가? 투계용으로 닭을 키우고 있기 때문이다. 닭싸움을 할 때는 닭 다리에 작은 칼날(타리;Tari)을 달아서 싸움을 붙인다. 푸다닥 거리고 공중에서 한판 붙을 때 그것으로 둘 중 하나는 피를 뿌리고 쓰러진다. 그렇게 하나가 죽거나 한 쪽 닭주인이 하얀 손수건을 던지면 경기는 끝난다. 과거에는 투계가 필리핀 전통 스포츠였지만 지금은 판돈이 많이 걸린 대중 도박 스포츠로 발전했다. 현재 필리핀에는 약 10,000여개 상설 투계장이 있다. 대부분은 토요일과 주일에 경기를 갖는다. 큰 경기장에는 수 천 명의 관중이 모이고 TV로 생중계되는 월드 슬래셔 컵 (World Slasher Cup) 경기에서 우승을 하게 되면 우승자는 한화로 3억원 정도의 상금을 받는다. 그래서 닭 주인들은 자신의 닭을 재산 목록 1호로 삼고 각종 좋은 보약을 챙겨서 먹인다. 우승한 닭 값은 집 한 채 값보다 비싸다. 그러니 골목마다 닭들을 키우는데 아침을 깨운다.


닭은 자는 사람들을 깨우는 것이다. 밤이 지나고 새벽이 올 때 여전히 사람들은 잠을 자지만 닭이 울 때 비로소 “아 동이 텄구나”라고 깨닫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의 말씀을 다 알고 있었지만 닭이 울 때에 비로소 그 말씀을 진짜 알게 되었다. 세 번 부인할 거라는 말씀은 있었지만 닭이 울므로 진정한 자기 자신을 깨달았다. 우리는 닭이 울기 전까지 스스로를 안다고 하지만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베드로는 “결코 주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다. 그때 주님은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하신다. 그때 베드로는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 라고 했다. 베드로는 자신을 안다고 했지만 사실은 몰랐다. 그러나 주님은 베드로 자신보다 베드로를 더 잘 아셨다. 주님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신다. 우리는 옳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닭이 울 때 우리가 틀렸음을 안다. 우리는 후회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나 닭이 울 때 나도 울고 후회한다.

닭은 새벽의 전령이라고 했는데 어른들은 우리의 전령이 된다. 우리가 아직 가지 않은 길을 가 보면서 우리에게 계속 인생의 인포메이션을 주고 있다. 아들 딸 젊은이들 내가 살아보니 이래야겠어 저래야겠어라고 한다. 그때 인터넷에 익숙하고 세계의 모든 잡스러운 지식을 다 가지고 있는 우리는 “알아요 나도 알아요”라고 한다.


어른들로부터 들은 많은 이야기 있지만 그 가운데 “아들 눈 좋을 때 책 많이 읽어라”는 말이 기억난다. 그때 “책을 가까이 하고 지식을 넓히라는 말이구나”라고 생각하고 “알아요 나도 알아요”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진짜 알게 된 것이 언제인지 아는가? 약 10년 전 어느 날 갑자기 노안이 왔을 때이다. 천천히 온 것이 아니라,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안 보이는 것이다. 그러면서 놀래서 실명하려는가보다 해서 한국의 지인에게 물어보니 “목사님 그거 노안입니다 다 그때 오는 것입니다”라고 한다. 노안이 온 이제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이다. 아는 게 아니라 진짜 알게 되는 것이다.

나이가 들어가면서 깨달음이 계속 오기에 나이 별로 엄마에 대한 말이 달라진다고 한다. 진리는 이미 있었지만 무감각해져 있었기에 들리지 않다가 세월이 가면서 닭의 울음소리가 깨닫게 한다는 것이다.

4살 - 엄마는 뭐든지 다 알아

8살 - 엄마는 정말 아는 게 많아.

12살 - 엄마가 뭐든지 다 아는 건 아냐.

14살 - 엄마는 아무것도 몰라.

16살 - 엄마가 뭔데

18살 - 엄마는 너무 구닥다리야

25살 - 엄마 말이 옳았을지도 몰라.

35살 - 결정하기 전에 엄마한테 우선 물어보자

45살 - 엄마라면 어떻게 했을까?

70살 - 엄마한테 물어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베드로는 진리를 이해했다. 하지만 수용을 하지 못했다. Understand는 했지만 Accept는 아니했다. 머리에 있는 진리의 이해가 가슴으로 받아들여지기 위해서는 바로 닭 울음소리가 필요한 것이다. 바로 닭이 울때에 베드로는 “아”하면서 탄식했던 것이다. 깨달음이 왔던 것이다.

 

IV. 설명절로 한국은 분주하다. 이렇게 한 해를 다시 시작할 수 있어서 좋다. 재 다짐하는 좋은 기회이다. 올해는 닭의 해이다. 한해가 소통하고 형통하고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는가? 첫출발은 언제나 회개이다.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는 회개의 역사가 있어야 한다. 내 귀에 닭의 소리가 들려야 한다. 세상은 무디어져 있다. 슐디궁하는 사람이 없다. 회개가 없다. 그러기에 소통이 되지 않고 진도가 나가지 않는다. 교회는 빛과 소금과 같이 진리를 선포하고 또한 진리를 깨닫게 해 주어야 한다. “생각나는 것”이 있게 하고 “생각나게 하는” 교회 첨탑위의 닭이 필요하다.

아무쪼록 새해 설을 맞으면서 베드로의 닭의 울음소리가 세상을 향해 그리고 나를 향해 더 이상 잠자지 못할 정도로 시끄럽게 깨울 수 있기를 축원드린다. 무감각한 우리가 진리를 감각하고 내 자신이 누구인지를 깨닫게 되는 한해가 되기를 축원드린다. 우리 가족 안에서 내 직장 안에서 대한민국 조국 안에서 우리 교회 안에서 각자에게 닭 울음소리가 있어 소통의 은혜가 있기를 축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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