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목사님 설교

엘리야와 가뭄

작성자권순태목사|작성시간17.07.24|조회수1,528 목록 댓글 0

성경: 열왕기상 17:1

제목: 엘리야와 가뭄

일시: 2017. 7. 23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 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야고보서 5:17,18). 그렇다. 오늘 본문의 주인공 엘리야는 가뭄의 사람이요 비의 사람이다. 비가 오지 않게 하고 비가 오게 하고는 그의 기도에 달려 있었다. 진실로 엘리야는 기도의 사람이었다. 엘리야 스토리의 하이라이트는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 더불어 갈멜산에서 기도의 대결을 펼친 일이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엘리야에게 불로써 응답하시고 물로써 응답하셨다.

 

II. 갈멜산의 기도의 승부를 가르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가? 극심한 가뭄이었다. 엘리야가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 갈멜산 기도대결을 펼치기 이전에 간절히 기도한 것이 있었다. 가뭄을 달라는 것이었다. “내 말이 없으면 수 년 동안 비도 이슬도 있지 아니하리라.” 즉 엘리야가 비를 오지 못하도록 하나님께 간청하여 스톱시킨 것이다. 야고보서 5장 17절에 “엘리야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 즉 삼년 육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라고 언급된 것처럼 그는 비가 오지 않기를 위해서 기도했다. 가뭄이 들어 사람들이 목이 마르고 산천이 바짝 바르게 되기를 바랬다. 그렇게 가뭄을 선포하고 엘리야는 깊이 숨어 버렸다. 이후에 아합왕이 엘리야를 만났을 때 그를 이렇게 부른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왕상 18:17). 엘리야가 기도했기에 비가 오지 않음으로 이스라엘백성들은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가뭄으로 고통받는 것을 보고 즐겼는가? 정말 아합왕의 말처럼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사람이었는가? 사실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사람은 아합이었다. 엘리야는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왕상18:18).


그러기에 엄격히 가뭄은 아합왕과 엘리야의 합작품이다. 아합이 하나님을 버리고 바알을 따랐기에 가뭄이 왔다. 그런 의미에서 가뭄은 이스라엘 백성을 파멸로 이끌어가는 고통의 가뭄이다. 하지만 엘리야가 가뭄을 하나님께 청했을 때, 그 가뭄은 이스라엘백성들을 괴롭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치유의 가뭄이었다.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기도해야 했다.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도 믿었지만 농업을 주관하는 가나안의 신 바알도 믿고 있었다. 가나안 원주민들에게 최고의 신은 “엘”이었다. 그의 부인은 아세라로서 풍요와 다산의 신이었다. 엘 밑에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바알, 얌, 그리고 못이었다. 바알은 엘의 후계자로서 모든 신을 다스리는 신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주라 했다. 바알은 비, 바람, 폭풍의 신으로 농사를 주관했으며 천둥을 바알의 음성이라고 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무의미하게 고생시키려 했던 것이 아니다. 아합왕의 아내 이사벨이 이스라엘백성에게 소개한 바알과 아세라 신을 떼어버리도록 하기 위해 기근을 준 것이다. 엘리야는 하나님의 말씀에 메말라 있는 이스라엘을 보았다. 그들은 하나님이 아닌 바알이라고 하는 엉뚱한 곳에서 답을 찾고자 했다. 바알에게 비를 달라고 했던 것이다. 그래서 엘리야는 비가 오지 않기를 간구했다. 그렇게 비가 오지 않도록 함으로 백성들이 참으로 진리에 목말라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하고 싶었다. 그들이 갈증이 나는 것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갈멜산의 기도대결에서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고 이스라엘백성들을 책망했다. 머뭇거리는 사람에게는 확실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그래서 비를 준다고 생각하는 바알에게 확실히 실망하고 그를 의지하지 않도록 비가 오지 않게 해야 했다.


하나님이 바닥으로 우리를 이끄실 때는 머뭇거리지 않게 하기 위함이다. 애매한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이다.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고 그의 아내 사라가 더 이상 아기를 갖지 못하게 만든 지경에 이르게 한 다음 약속의 자녀 이삭을 준 것은 그 가정을 힘들게 하려 함이 아니라, 약속의 자녀임을 뚜렷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함이다. 늘 그랬다. 만나를 주셔도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한달이 지나 다 떨어지게 만든 다음이었다. 물을 주실 때에도 목이 마르도록 내버려 두신 다음이다.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뭄을 맛보게 한 다음 엘리야는 다시 비가 오기를 간구했다. 비를 주시는 분이 바알이 아니라 하나님임을 알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야고보5:18). 엘리야가 가뭄을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하나님께 목말라 있으라는 것이다. 이스라엘 백성이 목말라 있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비를 주지 않아서 목마르게 만든 것이다. 그런 다음 비를 초청한 이유는 무엇인가? 비를 내리는 분이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었다.

 

III. 엘리야의 관심은 무엇인가? 백성들의 갈증해소와 행복과 형통함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 있느냐 하는 것이었다. 엘리야는 이스라엘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갖도록 아합왕이 결코 환영하지 않을 선포도 내리고 있다. 가뭄의 선포 말이다. 엘리야는 백성들이 고통을 받는다 해도 하나님과의 관계를 바로 세우기 위해 가뭄을 초청하고 있다. 엘리야에게 있어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고 갈증이 해소되는 그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주님과의 관계였다. 엘리야는 바알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 가만히 둘 수가 없었다. 엘리야는 아주 단호했다. 그는 하나님의 종이지 백성들의 종이 아니었다. 백성들의 고생스런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깨어질지 바로 설지가 더욱 중요했다. 비가 오고 안 오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농사가 잘되고 안 되고가 문제가 아니었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였다. 그 관계 때문에 비를 오지 않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도 하고 비가 내리기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기도 한 것이다.


잠언 30장의 아굴의 기도를 들어보라. 기도문 중에 가장 멋진 기도가 아굴의 기도이다. 그의 중심은 삶의 일들이 아니라, 주님과의 관계였다. “나를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나를 먹이시옵소서.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둑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8-9) 가난과 부가 기준이 아니다. 배고픔과 배부름이 기준이 아니다. 아굴의 관심은 하나님과의 관계이다.

차원이 다르다. 땅의 차원이 아니라 하늘의 차원이다. 이스라엘백성의 차원이면 비를 달라 해를 달라고 했을 것이다. 엘리야의 기도는 차원이 다른 기도였다. 바로 내 앞에 있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었다. 백성들이 고통 받는 것이 좀 안타깝기는 했겠지만 결국 그들을 위해서 차원이 다른 기도를 했다. 엘리야는 백성들의 필요에 따라 이것 주세요 저것 주세요 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차원에서 구했던 것이다. 권목사는 목회자이다. 목회자는 모든 것을 목회차원에서 해석하고 목회차원에서 일을 한다. 목회차원이라 함은 목회자가 교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행하는 일들이 교우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아름다운 관계를 맺기를 기대하고 소망하는 것이다.


요즘 깻잎 농사를 한참 한다. 옆 건물 공사가 옆에 진행 중인데 여전히 올해에는 농사를 지을 수 있어서 깻잎을 70그루 정도 추가로 더 심었다. 제가 깻잎을 너무 좋아해서? 아니다. 농사짓는 것이 재미있어서? 아니다. 땅과 친하게 지내면 건강해지니? 아니다. 목회차원이다. 잎사귀가 커지고 풍성해지고 여름철 교회식구들이 그릴을 할 때 나에게 깻잎 부탁을 할 것이다. 바로 그때를 위해서이다. 그것이 큰 기쁨이다.

아주 오래전에 프라하에서 악기상을 하고 있는 어느 집사님에게서 설주 바이올린을 샀다. 그분을 믿어서? 아니다. 꼭 바이올린을 사야했기에? 아니다. 돈이 많아서? 아니다. 목사가 행하는 모든 것이 다 목회차원이다. 프라하에 가면 늘 이용하는 민박집이 있었다. 다른 곳에 가고 싶어도 박상욱목사님 교인이 운영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비록 빈데가 나오기도 했지만 목회를 돕기 위해 의리를 지키기도 했다. 프라하에 가면 꼭 만나라고 하는 식당에 가곤했다. 목회차원이다. 공항에 나가기도 하고 이사를 해 주기도 하고 함께 식사를 하기도 하고 하우스마이스터처럼 교회를 가꾸기도 하고 고치기도 한다. 무슨 일을 하든지 제가 하는 일은 목회차원이다. 그러기에 목회는 삶이다.


목회차원으로 하면 “목사님 불순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다. “아하 교회 나오게 하려고 하는 것이구나”라고 하면서. 그러면 교회 안 나오게 하고 예수 소개 안 시키는 것이 순수하고 깨끗한 것이냐? 아쌀하게 돕고 끝나는? 사람들은 권목사가 주일날 예배드릴 때는 순수히 예배를 드리는 Pastor von koreanische Gemeinde고 다른 때는 Herr Kwon 으로 남기를 원치 않는다. 주 중에는 권순태씨가 되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권순태목사이다. 만일 주일 강단에서 전하는 말씀과 삶에서 목사의 모습과 티가 나지 않으면 이중인격자라 할 것이다. 오히려 순수하지 못하게 볼 것이다.


순수하지 못한 일이 있기는 하다. 일주일에 두 번씩 축구를 한다. 주일날 오후에도 한다. 수요일 밤에도 한다. 대부분 함께 하는 선수들이 중국친구들, 쫑꾸어 펑요우이다. 왜 내가 하는 것 같은가? 중국친구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는가? 그래야 하는데 아니다. 유일하게 목회차원에서 안하는 것이 있다면 그게 축구이다. 회개할 일이다. 목회차원에서 하지 않는 것이 있다. 축구이다. 내가 좋아서 한다. 아직도 찔리는 것이 있다면 중국교회 홍립민목사님 사모님이 내게 “권목사가 주일 오후에 축구를 하니까 중국친구들이 교회 안나오잖아요”라고 하셨다. 얼마나 미안하든지... 어떠한가? 아주 순수한가? 권목사가 아주 순수하게 운동을 하는 것이냐는 것이다. 진정 순수한 것은 목회차원에서 하나님과 연결시키고 예수 그리스도를 소개시키는 것이 순수한 것이다.


모든 삶이 목회차원이기에 목사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시험 들었어요 그래서 교회 안 나올래요” 그러나 가장 기초적인 것이다. 그것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예수 안 믿을래요”라는 말일 것이다. 그러기에 목회차원에서 하면 손해도 보아야 한다. 그러기에 목회차원에서 하면 인내도 해야 한다. 가끔 목사님 왜 간단히 이렇게 하시지 혹은 저렇게 하시지라고 하기도 한다. 누군 그거 모르는가? 목회차원에서 보기에 눈에 보이는대로 할 수 없고 생각나는 대로 할 수 없고 감정대로 할 수 없는 것이다. 엘리야는 선지자 차원에서 하나님의 의견을 가지고 온 사람이다. 가뭄과 비를 위해 간절히 기도한 엘리야는 백성들이 고생하는 것을 즐기는 새디스트가 아니라 차원이 다른 하나님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

 

IV. 수학캠프를 한다. 차원이 수학을 잘하는 것인가? 아니다. 세상 속에서 우뚝 솟는 하나님을 아는 청소년들로 만드는 것이다. 이 일을 위해서 한국에서 김철중목사님 내외가 오시고 민재형제가 왔다. 그리고 다음 주 문화재사업을 하시는 정기정 장로님 내외가 교회를 이곳 저곳 손보기 위해서 오신다. 수학을 가리키는 차원이 아니다. 교회를 고치고 쉔하게 하는 차원이 아니다. 땅의 일들을 하늘의 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차원을 바꾸어 버리는 것이다. 차원을 달리하라. 가장 떨리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잘 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관심이다.

컬럼에 쓴 것과 같이 차원을 높이는 교우들이 되기를 축원드린다. 내가 하고 있는 것이 악기요 성악이요 미술이요 그 어떤 전공분야든지 간에 1차원을 지나 2차원으로 2차원에서 3차원으로 높아져야 한다. 우리가 마지막 닿게 되는 차원은 하늘의 차원이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고전10:31).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