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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님 설교

완전한 사람은 있는가? 없다. 그러나 있다.

작성자권순태목사|작성시간17.12.10|조회수1,401 목록 댓글 0

성경: 고린도후서 5:14-17

제목: 완전한 사람이 되는 방법

일시: 2017. 12. 10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사람이 먼저다”라는 말은 문재인대통령의 선거 슬로건이었다. 무슨 일이든 제대로 된 사람만 결정되면 일은 저절로 이루어지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사회 어떠한 곳이든 좋은 사람, 능력 있는 사람, 쓸 만한 사람을 찾는다. 회사에서 사람을 뽑을 때도 최고의 인재를 뽑으려고 인사팀이 가동된다. 최선의 적임자를 뽑기 위해 여러 번의 과정을 거친다. 서류를 보고 인터뷰를 하고 프로붸짜이트를 가지면서 완전한 사람을 찾는다. 배우자를 찾을 때도 적어도 내가 볼 때 완전한 사람 즉 내 이상형을 찾는다. 목회자를 선정할 때도 말씀도 잘 전하고 성격도 좋고 능력도 있고 재능도 많고 경험도 많은 이러한 완벽한 사람을 초청하려고 한다.

 

II. 완전한 사람은 없다.

벌써 “완전한 사람”, “이상적인 사람”이라는 단어가 들어갈 때부터 불편했을 것이다. 일단 첫 질문에서 걸리게 될 것이다. 완전하고 이상적인 그러한 인간이 있는가? 가끔 학벌도 좋고 능력도 있고 외모도 좋고 집안도 좋고 성품도 좋아서 완전해 보이는 것 같은 사람도 있다. 그러나 막상 한번 경험해 보라. 과연 그러한가? 그저 그렇게 보일 뿐 실제적인 내면은 우리를 실망시킬 것이다. 

유토피아(utopia)라는 말이 있다. 영국의 사상가 토머스 모어가 1516년 썼던 그의 저작<유토피아>에서 유래되었다. 그리스어의 ou(없다)와 topos(장소)를 조합한 말로서 "어디에도 없는 장소"라는 뜻으로 '현실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이상적인 사회'를 일컫는 말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땅에서는 완벽한 것이라고는 없다. 결혼을 한 지체들이 이렇게 있지만 완벽한 배우자는 없다. 완벽한 배우자를 만난다면 그는 나를 필요로 하지 않을 것이다. 완벽한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는 순간 불완전한 조합이 될 것이다(아담과 하와가 불완전한 사람들로 하나가 되지 않았는가? 아담 없는 하와는 갈비 한근이고 하와 없는 아담은 갈비 없는 장애인이다). 완전한 교회와 사회를 만나려고 해 보라. 없을 뿐만 아니라, 완전하다고 하는 곳에 내가 들어간다면 그 순간 그 곳은 불완전해진다. 왜냐하면 불완전한 내가 불순물이 되어 오염시켜버리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불완전한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오늘 성경 본문에서 보면 인간이 원래 어떠한 존재인지를 말해주고 있다. 사람은 원래 죽어야 할 존재였다. “한 사람이 모든 사람을 대신하여 죽었은즉...”(14절). 사람은 자기를 만드신 조물주를 위해 살지 않고 자기 자신을 위해 살던 존재이다. “다시는 그들 자신을 위하여 살지 않고...”(15절). 인간은 죄와 사망에 결박된 육신의 사람이었다. “어떤 사람도 육신을 따라 알지 아니하노라”(16). 인간이 그렇다. 인간은 언제 완전하게 되는가? 착각하지 말라. 흠도 없고 실수도 없게 되는 그 순간이 완전한 인간이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침내 “실수”를 할 때이다. 실수가 있을 때 비로소 인간이 되는 것이다. 물론 인간이 되려고 의도적으로 실수를 할 필요는 없다. 실수를 하는 그런 불완전한 모습이 바로 인간의 본 모습이라는 것이다. 아주 아이러니한 표현이지만 완전할 때는 완전한 인간이 아니고 실수가 있고 결점이 있을 때 비로소 완벽한 인간이 된다. 약점이 보일 때 인간이 되는 것이다. 인간은 피와 눈물이 있을 때이다. “역시 너도 사람이구나.”


나는 시간을 잘 맞춘다. 그래서 아내가 내게 붙여준 별명이 있다. 종종 다른 사람에게 나를 “기계인간”이라고 소개한다. 기계처럼 정확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내는 아주 많이 인간인 것 같다. 사정이 생기고 본의 아니게 어쩔 수 없이 약속을 어길 수도 있는 것이 인간이다. 인간이 피도 눈물도 있어서 편견도 있고 봐주는 것도 있고 흔들리기도 하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다면 인간이 아니다.

여기에 "인간미"가 있다. 인간미가 있다는 것은 약하다고 하는 것이고 실수가 있는 것이다. 그 약함과 실수가 있으니 진정한 인간의 모습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피도 눈물도 없고 약함과 실수가 없으면 칼트하다. 그 사람에게 비집고 들어갈 여유가 없다. 약한 인간적인 모습이 보이면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생긴다. 도와주고 싶은 모성애를 자극한다. 실수는 사람들에게 내게 들어오라는 문을 여는 것이다. 실수는 다른 이들을 끌어내는 능력이 있다.


실수가 있으니 재미있다. 실수는 사람들을 즐겁게 한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얼마나 그 실수 같은 답이 순진하고 귀여웠는지 모른다. 지저분하고 정리되지 않는 큰딸의 책상을 보고 “왜 연필이 굴러다녀?”라고 하니 “동그라니까...” 작은 딸과 전철안에서 아이스크림 그림이 그려져 있고 엑스로 되어 있는 것을 보고 “왜 아이스크림을 먹지 말아야 하지?”라고 질문했을 때 그 황당한 답변, “다른 사람들이 너무 먹고 싶을까봐”. 기계적인 답변이 아닌 미성숙한 답변은 유머를 준다. 지금도 아이들이 크리스마스발표회를 하면 실수를 하는 것이 더욱 재미가 있다. 북한 아이들이 공연할 때 얼마나 완벽한가? 멋진가? 기계인간 같고 마리오네트 인형극을 하는 것 같다. 기계적으로 실수 없이 잘 하여 “반갑습니다”라고 노래할 때 측은한 생각이 든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시고 아들을 보내신 것은 인간을 위하여 대신 죽으셔야 할 측은한 마음을 가졌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완벽한 인간이 되기를 원하신 것이 아니라, 완벽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를 원하셨다. 실수는 좋은 교훈이다. 베를린 이병희 목사님은 “실패 안에 실마리가 있다”고 했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하는 일은 내 자신에 대한 회개이다. 약점을 인식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내 자신에 대한 포기이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가장 처음 해야 할 것은 회개이다. I am so sorry. 슐디궁이다. 완벽한 인간은 없기에 우리는 먼저 자신에 대해서 실망하고 다른 사람을 기대하지 말아야 한다. “인간이 그렇지 뭘 기대해”라고 인정하라.

 

III. 언제 완전한 사람이 되는가?

하나님의 이름은 무엇인가? “스스로 있는 자”이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특별한 미션을 주시어 이스라엘백성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어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라 말씀하신다. 이때 모세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가서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어 지도자가 되게 해서 너희를 애굽에서 이끌어내게 하셨다”고 하면 그들이 과연 나의 권위를 인정해서 나를 지도자로 삼고 따를 것인가가 의심스러웠다. 그래서 모세는 보낸자의 권위를 갖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출애굽기3:13-14절). “누가 보낸 것으로 할까요” 를 물은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가르쳐준 이름이 “스스로 있는 자”였다. 그분은 완전하신 분이기 때문에 다른 설명이 필요 없다. 그분은 자존하시는 분이시다. 무엇이 있어야 존재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른 조건이 없으시다는 것이다. 그분은 스스로 계신 분이시기에 어떠한 보조 설명이 필요 없으시다. 그분의 존재가 설명되기 위해서 우리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분은 그저 그분 자신으로 설명이 된다.


하지만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 우리는 완전하지 않아서 늘 보조 설명이 필요한 사람들이다. 무조건적인 하나님과는 달리 조건이 지어지는 존재이다. 혼자 지탱해 있을 수 없고 그 무엇인가에 의존해 있기에 상대적인 존재라고 한다. 독립해 있을 수 없고 무엇인가에 기대야만 하는 의존적인 존재라는 것이다. 저를 설명할 때 스스로 있다고 말하지 못한다. Wer bist du?라고 물으면 저는 무어라고 대답해야 하는가? “Ich bin ich"라고 하면 ”너가 누구냐니까“라고 계속 물을 것이다. 그때 나는 양미란을 말해야 한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설주와 혜주를 말해야 한다. 한국이나 다른 목회자 선교사들 모임에 가서 나를 설명하려면 여러분들을 말해야 한다. 보낸 자의 권위가 필요하듯이 라이프찌히교회 가족들이 저의 권위가 된다. 저를 소개하려면 대한민국을 말해야 한다. 대한민국이 있기에 내가 설명이 된다.


그러면 우리 자신을 설명할 수 있는 최선의 표현은 무엇인가? 어떠한 설명이 들어갈 때 불완전한 내가 완전하게 될 수 있는가? 사도바울은 빌립보서 3장 8,9절에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 동안 바울을 설명한 것은 “배설물들”이었다. 가말리엘 문하에서 배운 율법들, 공회의 권력, 길리기아 다소에서 태어나 국제적 문화적 감각, 로마시민권자 등등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를 제대로 설명하고 조건지어주는 것은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편지하면서 오늘 말씀에서 분명히 다시 한 번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것이 되었도다”(17절). 인간은 이전에는 헌 것 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새롭게 되는 것이다. 인간은 그전에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로 완전체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첫째 아담에서 태어남으로 불완전한 존재로 태어나지만 둘째 아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다시 태어날 때 완전한 사람이 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거듭난 우리는 새로운 인격체가 된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자아가 되고 예수님의 인격이 우리 가운데 있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변화의 챔피언이었다. 첫 표적은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변하여 포도주로 바뀌는 것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표적은 무엇인가?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이제 포도주가 변화여 피가 되는 것이다.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함께 주의 만찬을 가지셨다. 떡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몸이라고 하셨고 잔을 주시면서 이것은 내 언약의 피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십자가에서 당신의 몸과 피를 주신 것이다. 그 변화는 포도주 잔이 변하여 언약의 피가 된 것이다. 십자가는 변화의 하이라이트이다. 십자가는 완전함을 가지고 왔다.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을 완성하였다. 주님은 “다 이루셨다”고 하심으로 완성을 선포하셨다. 십자가는 사망을 생명으로 옮겼다. 십자가는 죄를 의로 만들어 버렸다. 십자가는 율법을 은혜로 변화시켰다. 바로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서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요 백성으로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약하고 실수 많아 불완전한 사람들이지만 그리스도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는 것이고 완전한 존재가 된다. 십자가를 통해서 이전 것은 지나갔고 새것이 된 것이다.


우리는 불완전한 존재이다. 완전하기 위해서 우리가 노력해서 되는 것이 아니다. 오직 우리는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이라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침례로서 고백한 것이다. 침례를 받으면서도 모든 이들이 다 완벽하지 않음을 알고 있다. 권목사도 지체들이 그러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하나님도 알고 계신다. 그러나 나의 공로가 아니고 내 인생을 주님 안에 던짐으로 완전해지는 것이다. 내 삶을 다 그리스도 안에 집어넣으라.


지난 주 침례를 받는데 민서가 옷을 갈아입으면서 “핸드폰과 지갑을 둘데 없느냐”고 한다. 그래서 “그냥 두고 가도 괜찮으니 두라”고 했다. 그러면서 옛 어느 목사님의 예가 생각이 났다. 미국에서 침례를 받는데 수침자가 바지 속에 지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목사님 잠시 지갑을 빼고요”라고 했다고 한다. 그때 목사님은 “형제님 지갑까지도 침례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명답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었으면 지갑도 죽어야 한다. 핸드폰도 죽어야 한다. 자존심도 죽어야 한다. 내 인생의 야망과 생각계획도 물속에 들어가야 한다.

우리의 불완전한 것이 죽을 때 다시 완전한 것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옛사람이 죽을 때 새사람으로 태어날 수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날 때 우리는 육신을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새피조물로서 사는 것이다.

 

IV. 완전한 사람은 없다. 내 자신을 보면 언제나 실망스럽다. 기대할 것이 없다. 전적으로 타락해서 건질 것이 없는 존재이다. 다른 사람을 보고도 소망을 걸지 말라. 아내를 보고 그리 기대하지 말라. 남편을 보고 그리 기대하지 말라. 내가 꼭 필요한 불완전한 사람으로 보라. 목회자를 볼 때 내가 필요한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해주는 성도가 되라. 성도들을 볼 때 답답해하지 말고 그러니까 목양하는 것이고 나를 필요로 하지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이상하게 보지 말고 노말하게 보라.

오직 주님을 바라볼 때 소망이 있다.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라. 부족한 것을 채워주소서. 연약한 것을 강하게 하소서. 실수많은 우리를 그래도 사랑으로 잘 봐주소서. 흠이 많지만 불쌍히 여겨주소서 하는 기도가 우리의 기도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된 존재로 살라. 하나님의 자녀 아닌가? 하나님의 백성 아닌가! 그러한 주님을 메시야로 기대하는 아드벤트 2번째 주일이다. 우리는 불완전하지만 우리를 완전하게 하시는 주님에 대한 소망으로 또 한 주간 승리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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