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신명기 8:2-3
제목: 너로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일시: 2018. 4. 8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지난 몇 주는 폭풍우가 몰아친 것 같이 정신없이 지나간 것 같다. 가장 중요한 믿음의 명절인 고난주간과 부활주간을 맞이하면서 성찬식, 칸타타, 유한침선교사대회 등으로 심신이 무척 분주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늘 궁금한 것이 있다. 고난절이 되면 다들 주님이 당하신 고난을 생각하면서 함께 마음이 아팠는가? 그리고 부활의 아침이 되었을 때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을 생각하고 감격과 감사로 충만했는가? 주님이 우리 위해 십자가 고통을 당하셨다고 하는 고난절이 되어도 그렇게 침울하거나 마음 아파하는 것 같지도 않고 사망을 이기고 우리에게 새생명을 주신 부활주일이 되어도 그렇게 눈물이 날 정도로 감격해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왜 그럴까? 사지 선다형질문을 한다면, 첫째, 일단 하도 많이 들어 너무 익숙해서 둘째, 이 기간 행사가 너무 많아 슬프고 기쁘고 할 정신이 없다. 셋째, 나하고는 별로 관계가 없는 것 같아서 별로 큰 감동이 없다. 넷째, 요즘 많이 바쁘다.
II. 주님께서 이루신 고난과 부활의 감동과 감격이 어떻게 해야 우리에게 진하게 인식되겠는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하심을 깨닫고 인식할 수 있을까? 우리는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아직 피부에 와 닿지 않아서...”라는 표현을 쓴다. 알기는 아는데 아직 깊이 있게 모른다는 것이다. 뼈져리게 알아야 하고 몸에서 반응해야 하는데 수박겉핥기식으로 알 뿐이어서 실제로는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귀로 들을 수 있다. 그러나 청각일 뿐이다. 눈으로 볼 수 있다. 시각일 뿐이다. 두가지 다 있으면 시청각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강하게 와 닿으려면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피부감각으로 와 닿는 인식이 있어야 한다. 피부가 감각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차갑고 뜨거운 것이 있다. 딱딱하고 부드러운 것이 있다. 압력을 느낀다. 아픈 것이 있고 가려운 것이 있고 닭살돋는 것이 있다. 간지럼이 있다. 성숙하고 제대로 아는 사람들은 피부로 느끼는 사람들이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해”라고 할 때가 있다. 나이가 든 감각이 없는 것이다. 아직도 젊다는 것이다. 여전히 운동하고 달릴 수 있으니 50중반을 넘어가도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든다. 실감이 나지를 않는다. 신석기, 구석기시대를 수백만년 전 수억년 전이라고 하면서 막 말할 때 그 엄청난 세월에 대해 아무런 감각이 없다. 가끔 운동선수들의 연봉을 말할때도 감각이 없다. 로날도 400억, 네이마르 470억, 메시가 600억 정도의 연봉을 받고 있다고 한다. 그러한 연봉은 큰 의미가 없고 숫자에 불과하다. 하지만 실제 피부로 느끼는 액수는 아주 적절한 양의 돈이다. 가정예산을 짜서 여름에 온 가족이 한국에 갈 비행기표를 끊을 수 있는 정도면 피부에 와 닿는 돈이다. 우어라우프를 가려고 일년간 모으면 스페인 바르셀로나도 갈 수 있는 양의 돈이 피부에 와 닿는 돈이다. 삼성핸드폰 최선형을 사려고 하는데 100유로 부족한 그 정도의 돈이 피부에 와 닿는 돈이다. 포르쉐와 같이 아주 좋은 승용차가 아니더라도 조금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차를 사고 싶은 마음을 채울 수 없을 때가 아주 피부에 와 닿는 액수의 돈이다.
욥이 자녀를 잃고 재산을 잃고 건강을 잃은 다음에 그의 친구 엘리바스가 위로차 왔다가 한 말이 틀린 말은 아니다. “보라 전에 네가 여러 사람을 훈계하였고 손이 늘어진 자를 강하게 하였고 넘어지는 자를 말로 붙들어 주었고 무릎이 약한 자를 강하게 하였거늘 이제 이 일이 네게 이르매 네가 힘들어하고 이 일이 네게 닥치매 네가 놀라는구나”(욥기4:3-5). 직접적인 자기 일이 아닐 때는 조언도 하고 격려도 하고 위로도 해 줄 수 있지만 자기에게 닥친 일이 될 때는 이야기는 달라질 것이다. 온도가 달라지기 시작한다. 그것을 체감온도라고 한다. “체감온도”라는 것은 온도계에 나타난 온도가 있어도 사람마다 느끼는 실제 온도는 각 사람마다 다르다는 것이다. 뜨거운 목욕탕에 들어가서 아비는 어 시원하다 해도 아들은 뜨거워할 것이다. 체감온도는 경험하는 것이고 체험하는 것이고 피부로 느껴지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굽에서 이스라엘백성을 이끌어 내신 이후 즉각적으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이지 않으셨다. 40년 동안 이스라엘백성들이 걸었던 길은 광야였다. 그들이 재수 없게 길을 잘못들어 광야길을 걸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걷게 하신 것”이었다. 그들은 광야의 삶을 통해서 하나님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도 광야의 생활현장을 통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마음이 어떠한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지 지키지 않는지”를 더 깊이 알아보기 원했고, 또한 이스라엘백성들도 하나님에 대해 더 깊고 넓은 이해를 하기 원했던 것이다. 광야의 체험 이후에 이스라엘백성들은 하나님을 피부로 알게 되는 것이다. 책속에 있고 상상속에 있고 하늘에 머물러 있는 하나님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나오는 하나님이시다.
III.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경험하는 교우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 피부로 주님을 체험하기를 축원드린다. 그러나 내심 더욱 바라고 소망하는 나의 마음은 라이프찌히 교우들이 광야를 경험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이다. 아멘인가? 광야를 사절하고 싶다. 홍해를 가르신 모세의 기적을 행하신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는가? 앞에 홍해란 절망이 있고 뒤에는 애굽의 군사가 쫓아오는 위기에 몰려야 하는 것이다. 만나를 주신 하나님을 알기 원하는가? 그 직전에 사람들은 아사직전까지 가게 되고 굶어 죽게 생겼다고 하나님께 부르짖었다. 반석에서 생수를 주신 주님을 경험하기 원하는가? 먼저 목말라 죽을 지경에 이르러야 한다.
우리는 성경 속에서 드라마처럼 재미난 인생의 경험을 주신 신앙의 선배들을 본다. 야곱이 있다. 하지만 스토리가 많은 그의 인생은 파란만장한 삶이다. 그는 바로를 만났을 때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삭을 보라. 성경에서 이삭을 이야기할 때는 랑바일뤼쉬하다. 난 여호와이레(Jehovah Jireh) 즉 예비하시는 주(창 22:14)님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절박한 필요에 처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난 여호와닛시 (Jehovah Nissi) 나의 깃발(승리)이신 주(출 17:15)를 경험하기 원하는가? 전쟁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여호와샬롬(Jehovah Shalom)(삿 6:24)을 경험하고 싶지 않다. 왜냐하면 갈등과 혼돈 속에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호와라파(Jehovah Rahpa) 치유하는 주(출 15:26)를 경험하기 원하는가? 아파 봐야 하지 않겠는가? 깊은 병에 걸려야 하는 것이 설정이 먼저 되어야 한다.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는가? 그러면 큰 슬픔과 고통에 있어야 한다. 사절이다. 위기에서 건져주는 하나님을 경험하기 원하는가? 어려움에 빠져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그 감각도 사라질 것이다. 나중에는 그러한 일을 당연하게 생각할 것이다. 더 자극적이고 감흥이 있을 것이 필요하다.
개인적으로 고난주간을 작년과 올해 맛을 보았다. 작년에는 쇄골뼈를 붙이게 했던 메탈 쇠 봉을 빼면서 고난을 당했다. 당사자는 마취상태여서 모르고 있었지만 그 간단한 수술에 기도가 막히는 응급상황이 벌어졌다. 한시간 수술이 4시간이 되었고 깨어난 곳은 일반병실이 아니라 중환자실이었다. 밤새도록 Herr Schmacher 씨를 깨우려고 쭝에 아우스 (혀 내밀어)라고 의사들이 외침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이후 유한침 수련회에 참석해야 하는데 수술부위가 부워올라 하우스 아르츠트에서 특별처방을 받아 슬로배니아 대회를 갔었다. 올해는 한국에서 오자 마자 치과에 가서 작년부터 뽑으라는 어금니를 하나 뽑고 상실의 마음이 있었는데 하우스아르츠트 루드비쉬는 더 엄격하게 우리를 조이고 있다. 2019년이 기대가 된다. 하나님이 어떠한 삶의 일로 피부로 느끼게 하실런지요. 피부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아는 표적과 은혜도 감사하겠지만 더 큰 은혜는 그저 오늘 하루 주어진 이 평범한 하루가 얼마나 감사한지요라는 고백이다. 일상의 평범한 일이 더욱 큰 은혜요 감사이다.
IV.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어떻게 할 것인가? 감각이 오기 전에 감각하는 것이다. 그 감각은 오늘 말씀의 키워드인 “기억하라”는 것이다. 우리는 바로 이 “기억감각”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잊게 되면 다시 상기시켜 주기 위해서 또 레슨을 주실 것이다. 그러나 기억하면 또 레슨하실 필요가 없으실 것이다. 기억하는 감각은 배고프지 않아도 배고픔을 잊지 않는 감각이다. 지금은 평안하고 아무 문제가 없어도 고통스럽고 어렵던 그 시련의 때를 잊지 않고 기억하는 감각이다. 이스라엘백성들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은 이미 결론이 나와 있다.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느니라”(신명기8:16). 그러나 하나님의 관심은 이스라엘백성들이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또 소와 양이 번성하며 은금이 증식되며 소유가 다 풍부하게 될 때”였다. 그때 주님이 가장 염려한 것은 “잊어버릴까”하는 것이다.
배고프기 전에 배고픔을 느낄 수 있어라. 감사한 일이 있기 전에 미리 감사를 인지할 수 있어라. 주님이 화나다는 것을 진노하신 후 한 대 맞은 후에 그러지 말고 미리 눈치를 보고 의식을 하라. 지혜로운 자는 얻어맞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미리 알아서 행하는 것이다. 미리 알아차리는 것이다. 머리가 확확 돌아가는 것이다. 눈치 빠른 센서가 있어야 한다. 예민한 센서가 있어서 그것을 미리 알아내는 것이다.
한국에 있을 때 첫딸 권설주가 주일학교를 다니고 있을 때이다. 4살 정도 되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하도 떠드니 선생님이 야단을 치신다. 그때 선생님이 설주에게 아무 말씀도 하지 않았는데 설주가 알아서 한쪽구석으로 가서 손을 들고 있다. “야 설주야 뭐하니?”라고 선생님이 놀라서 말한다. 주중에 유치원에 다니면서 언니들이 혼나고 자신도 함께 손을 들고 있었던 경험이 있는 것이다. 선생님이 화나면 알아서 눈치껏 기고 있는 것이다. 센스가 없고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아이는 혼이 나야 겨우 알아듣는다.
광야는 학습의 장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백성들에게 약속의 땅을 주시면서 미리 광야에서 공부를 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너를 낮추시며 너를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 고 하신다. 그러한 레슨을 앞으로 기억이 나도록 광야에서 학습을 시키시는 것이다. 기억이 나려면 뭔가 기억날 해프닝과 건더기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는 그 기억이라는 감각을 가지고 있다. 말씀 속의 스토리들이 우리의 기억감각이 된다. 아브라함시절, 모세시절 베드로시절로 돌아가 우리 삶에서 되풀이 되어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의 “기억감각”이 우리에게 있어 하나님을 감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지혜로운 자의 모습이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주신 말씀과 레슨이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우리의 삶 속으로 들어와야 한다. 우리 각자가 이해할 표현과 삶의 현장 속에 들어와야 한다.
성경은 “권순태가 누구와 결혼하라고 하는가?”에 대해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순결한 신부와 하는 것이다. 물론 양미란을 찾기 위해서 양, 미, 란을 하나 하나 찾아보았다. 성경은 우리가 유학을 나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를 말해주는가? 성경은 프라하를 갈 때 버스로 갈 것인가? 기차로 갈 것인가? 승용차로 갈 것인가? 비행기로 갈 것인가를 말해주는가? 오늘 점심을 집에서 먹을지 외식을 할지 금식을 할지 말하지 않는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종종 그러한 답을 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게 묻기도 한다. 그러면 종종 틀리기도 한다.
여기서 우리가 발동시켜야 할 감각이 바로 “기억감각”이다. 그 감각을 가지고 오늘 내 삶 속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의 의도와 뜻을 발견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폴란드의 기자 출신 작가 센키에비치가 쓴 노벨수상작 소설 “쿠오바디스”에서 베드로는 환상 속에 나타난 주님에게 “쿠오바디스 도미네” 즉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라고 묻는다. 주님은 박해를 피해 로마를 떠나려는 베드로에게 내가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려 가신다고 하는 것이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잠시 망각했고 주님은 그에게 기억감각을 일깨우신 것이다.
IV. 오늘날에는 감동이 없는 시대이다. 우리의 감각이 얼마나 떨어져 있는가? 주님은 이 세대의 사람을 무엇으로 비유할까라고 하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아이들이 장터에 앉아 서로 불러 이르되 우리가 너히를 향하여 피리를 불어도 너희가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하여도 너희가 울지 아니하였다”(눅 7:32). 하도 많이 들어서 그저 내 귀에 익숙하고 잔소리가 되었는가? 그냥 행사와 일로 바빠서 정신이 없는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로 생각하지 않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계속 말씀하고 계신다. 잊지 말라고 하신다. 그래서 고난절과 부활절 절기를 주셨다. 그나마 그래서 다시 기억하려고 노력하지 않았는가?
이제 매일 매일이 주님과 동행하고 주님을 기억하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올해 표어가 무엇인가? 신앙생활하십니까이다. 살아계시고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생활 속에서 더 깊이 알아가기를 축원드린다. 이제 또 한 주간 삶으로 뛰어들라. live out 보라. 살아가 보라. 삶의 현장 속에서 기억감각으로 주님을 경험하고 체험하기를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