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고린도전서 15:9-10
제목: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일시: 2018. 4. 22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우리가 오늘 주일을 맞이하여 건강하게 주님께 예배할 수 있다는 것은 주의 은혜이다. 하나님의 자녀로서 또한 백성으로서 주의 집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은 주의 크신 은혜이다. 주님 앞에 예배드릴 자격 없는 사람들이지만 십자가의 은혜로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게 된 것도 큰 은혜이다. 오늘도 경배와 찬양이 참 은혜로왔다. 성가대의 찬양이 은혜롭다. 오늘 드리는 이 예배가 은혜 속에 드려진다. 이제 선포되는 말씀으로 우리 모두에게 은혜가 풍성하기를 바란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 고백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우리가 살아가는 모든 삶이 은혜로 이루어지는 삶이 되기를 바란다.
II.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을 자신의 수고와 노력의 결과로 여기지 않는다.
바울이 “내가 나 된 것”이라고 하는데 그 의미는 무엇인가? “내가 나 된 것”은 이라고 말할 때는 그 자리와 위치가 너무나 귀하고 축복된 자리라는 것이다. 지금 고린도교회에 편지를 쓰고 있는 바로 이 시점의 바울은 어떠한 사람인가? 예수님의 부활을 직접 목격하는 축복을 누린 사람이라는 것이다. “맨 나중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내게도 보이셨느니라”(고전15:8). 또한 비록 자격은 없지만 당당히 권위있는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이다. 바울은 사도로서 막차를 탄 사람이었다. “나는 사도 중에 가장 작은 자라”(9절)고 한다.
“사도”는 주님의 12제자들을 말한다. 라틴어로 apostulus 이다. 그러나 이후 가룟유다는 예수님을 배반하여 떠남으로 12제자 가운데서 빠지게 되고 그 빈자리를 맛디아가 채우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 사도는 바울이다. 바울을 부를 때는 그냥 이름만 부르지 않고 보통 “사도 바울”이라는 표현을 늘 쓴다. 바울은 그가 쓴 서신서 첫 인사말에서 자신의 사도권을 아주 강조해서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롬1:1),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로 부르심을 받은 바울과...”(고전1:1),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과...” (고후 2:1). 이렇게 바울은 사도의 직분을 가진 지금의 “나”란 사람이 수고와 노력으로 사도가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였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그 자리를 어떻게 획득하였는가? 어떻게 그 특권과 축복을 누리게 되었는가? 그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사실 그러했다. 바울은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번 죽을 뻔하였으니...”(고린도후서 11:23)라고 말한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로 험한 일도 많이 하고 핍박도 많이 받았지만 그러한 수고를 통해 사도의 자격을 취득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이 한 것은 전혀 없고 이 모든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말하고 있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라는 표현은 일을 많이 했다는 자기 자랑과 교만으로 말한 것이 아니라 그러한 수고가 사도의 자격을 주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그가 지금 이렇게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임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내 노력과 수고가 많으면 자칫 은혜에 손상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러한 상황에서 자신의 수고는 “내가 나 된 것”에 0% 기여한 것이고 100%의 은혜를 말하고 있으니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가?
가끔 우리는 “천부여 의지 없어서 손들고 옵니다”라고 하면서 그 헌신에 대해서 높은 감명을 받고 칭송한다. 그러나 알고 보면 의지 없어 나오는 사람은 카이네 아눙 즉 답이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의지할 것이 많은 부자나 권력자나 재능가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더욱 존경스러운 것이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이 그의 수고 때문이 아니요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고 있다.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9절) 바울은 “원래” 자신이 어떠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다른 어떤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지만 그것으로도 안 되는 은혜의 사람임을 고백한다.
III. 바울의 수고는 은혜를 손상시키지 않고 오히려 은혜를 위한 것이다.
왜 바울은 그 온갖 수고를 다 했을까? 가장 작은 자 쫄따구이니 험한 일을 해야 했기 때문인가? 아니다.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는 전과경력이 있으니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 수고해야했었는가? 그 역시 아니다. 바울이 수고한 이유는 행함과 업적과 최선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를 가지고는 하나님 앞에서 아무것도 자랑할 것이 없고 오직 은혜만을 말할 수 밖에 없음을 고백하기 위함이었다. 그의 수고는 오히려 은혜를 부각시킨다.
물건을 사기 위해 종종 네토, 뢰베, 니들... 이러한 마크트에 간다. 가서 사게 되는 것은 바겐세일 즉 앙게보트로 나온 것들이다. 앙게보트로 나온 줄을 어떻게 아는가? 표를 붙여 놓는다. 그럴 때 꼭 줄로 긋어 이전 가격을 지워 놓는다. 그러나 재미난 것은 꼭 이전 가격이 보이도록 하는 것이다. 그리고 옆에 앙게보트로 나온 새로운 착한가격을 써 놓는다. 앙게보트가 주어질 때 이전 가격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앙게보트를 주셨다. 그것은 생명인데 이전에 그 값은 상상할 수 없는 가격이었다. 우리는 수고와 행함으로 그것을 사려고 했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십자가 앙게보트가 나온 것이다. 가격은 눌 공짜이다. 이제 감사하게 우리는 우리 장바구니에 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전 가격을 우리가 알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야 지금 공짜로 주어진 앙게보트가 얼마나 좋은 특권인지 축복인지 안다는 것이다. 십자가의 은혜를 받더라도 이전 율법 아래 있을 때 어떠한 죄인이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우리가 원래 근본 태생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아야 한다. 율법에 의해서 죄가 드러나고 사망선고가 내려져야 하는 존재가 은혜의 앙게보트를 통해 두줄로 지워질 때 비로소 은혜를 알게 되는 것이다.
다음 주부터 전도서를 새벽기도 시간에 묵상하려고 한다. 솔로몬이 저자이다. 예루살렘의 왕 전도자가 말하기를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전도서1:2)라고 말을 한다. 그의 지혜의 앙게보트는 바로 인생이 헛되다는 실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옆에 줄을 쳐야 할 것이 있다. 솔로몬은 앙게보트 이전의 가격을 우리에게 다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빨간줄로 긋어버리고 존더프라이스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부와 명예와 권력과 쾌락과 지혜를 다 가져 보았다. 그러기 때문에 헛되다고 말할 자격이 있는 것는 것이다. 그가 가지고 잇는 모든 것은 세상의 모든 것이 헛되다는 것을 더욱 느끼게 하는 재료가 될 뿐이다. 우리는 은혜를 경험하기 위해서 늘 옆에 빨간 줄로 그은 이전의 것을 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오자 마자 하우스아르츠트 터민이 있었다. 병원에 가면 기본이 혈압이다. 아내와 나를 재는데 다 높아 버린 것이다. 단호하게 약을 먹으라고 처방을 해 준다. 아주 기계적인 처방이다. 게다가 내게는 혈당을 위한 약도 하나씩 더 먹으라고 말하면서 말이다. 수용하기가 어려웠다. 그때부터 강훈련의 시간으로 들어갔다. 5주간이 흘러간 것이다. 당뇨수치와 혈압을 낮추는 방법으로 내 특유의 성실함으로 돌입했다. 밥은 거의 먹지 않을 정도였다. 대체음식으로는 달지 않고 소금기 없는 것으로 했다. 밥량은 1/3로 줄였다. 반면 운동량은 3배 정도 늘였다. 이후 체중계를 재었더니 5킬로 정도가 빠진 것이다. 혈압은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난 금요일 주치의에게 가서 그가 요구한 기록보다 몇배나 더 풍성하게 조사해서 가지고 갔더니 내게 impressed 라고 표현을 한다. 감명을 받았다는 것이다. 아내는 내게 별명을 붙여주었다. 8%라고. 초기에 열심히 성실히 하는 사람 가운데 8%만 성공할 수 있다나? 역시 바짝 조으니까 되었다. 누구든지 다이어트하고 싶으면 권목사와 하라. 어머니를 닮은 제가 저의 특별한 기계적 성실함이 있다. 이러한 것이 당연한 결과인가? 우리는 빨간 선을 긋고 앙게보트로 넘어와야 한다. 그것이 바로 은혜이다. 존더프라이스이다. 자신을 자랑하거나 믿으면 안되고 은혜에다가 모든 것을 던져야 한다.
IV. 사도바울은 자신의 수고에 미련을 두지 않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로 넘긴다.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10절). 우리는 우리를 교만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을 다 빨간 줄 쳐 놓고 지워야 한다. 그리고 은혜로 넘겨야 한다. 만일 우리 노력의 결과를 가지고 삶을 생각하면 잘 되었을 경우, 우리는 교만하게 될 것이다. 또한 잘 되지 못하였을 때는 좌절하게 될 것이다. 어느 방향이든 내가 한 노력은 좋은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도무지 노력은 왜 하고 왜 최선을 다하는가? 진정한 겸손으로 가기 위함이다. 주님은 우리에게 낮아지라고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낮아지기 위해서 우리 자신에 대해 실망해야 한다. 우리 자신의 한계를 느끼기 위해 우리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좌절도 아니하고 교만도 아니하기 위해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던져야 한다.
오늘 짧은 본문에 바울의 두 모습이 나온다. 하나는 “가장 작은 자로서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하고 사도로 칭함을 감당하지 못할 부족한 사람이라고 하는 것”과 또 하나는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는 사실”이다. 재미있지 않는가? 잘한 것 내놓으려면 못한 것이 발목을 잡고 못한 것을 내 놓으려면 잘한 것도 있기도 하고... 수고를 아주 많이 하여도 사도의 자격을 가질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인 것처럼, 역으로 형편없고 실력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몹쓸 사람도 사도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그의 후배동역자 디모데에게 편지하면서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딤전 1:12-13) 이라고 말하고 있다. 바울에게 직분을 주신 것은 그가 충성해서가 아니라 이미 하나님을 핍박하는 때에도 선택한 것이다. “그러하기” 때문이 아니요 “그렇다고 여겨”주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은혜인 것이다. 어떨 때는 자격이 있어 보이고 어떤 때는 자격이 없어 보일 수 있는 우리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은혜에 던져야 한다.
고린도후서에서 보면 마게도냐교회가 은혜가 넘치는 교회였다. 왜 그런 간증이 나오는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넘치는 기쁨”이 있었기 때문이다. “극심한 가난” 가운데서도 “풍성한 헌금”을 예루살렘교회에 보내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큰 은혜였다. 시련과 기쁨 그리고 극심한 가난과 풍성한 연보는 상반된 개념이다. 하지만 그 극단의 두 단어들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가? 은혜가 연결고리이다. 이 극단의 두 단어가 바로 은혜를 더욱 많이 생산해 내고 있는 것이다. 더욱 은혜를 빛내고 있는 것이다. 그럴 수 없는 환경에서도 은혜는 빛을 발하는 것이다. 마게도냐교회는 상황과 형편에 상관없이 은혜를 생산해 내는 교회였다.
종종 잘 지내세요? 건강하세요라고 묻는다. 그러면 하는 대답은 “은혜로 삽니다”라고 한다. 교회는 평안하세요?라고 하면 “은혜로 잘 지내고 있습니다”라고 한다. 겸손한 표현정도가 아니다. 흔히 하는 인사가 아니다. 진짜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평안하고 누구나 문제없지. 그렇게 투자했다고 다 얻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건강챙겼다고 건강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V. 지금 “내가 나 된 것”이 자랑스럽고 귀한 것인가? 내 수고를 자랑하지 말라. 하나님의 은혜의 강물에 던지라.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 하나님께 돌리라. 지금 “가장 작은 자”요 하나님의 교회를 박해했던 전과자 바울과 같이 하나님께 누를 끼친 사람이요 주어진 일을 감당하기도 벅찬 사람인가? 이때에도 역시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실 하나님의 은혜임을 믿고 은혜의 강물에 나를 던지라. 지금까지 지내온 것은 은혜이다. 앞으로도 주의 은혜로 살라. 내가 지금 나 된 것은 어떻게 된 것인가? 하나님의 은혜임을 알라. “내가 한 것이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라. 10년후 20년 후 30년 후 그 이후 나의 모습 역시 내가 하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은혜로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