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목사님 설교

"이익"을 따라 사는가? "주의 뜻"을 따라 사는가?

작성자권순태목사|작성시간18.05.27|조회수634 목록 댓글 0

성경: 야고보서 4:13-17

제목: “이익”과 “주의 뜻” 어느 것을 따라 사는가?

일시: 2018. 5. 2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지난 한 주간 계획대로 잘 지내왔는가? 지난 한 달은 어떠했는가? 2018년도 시작한지 엊그제 같은데 벌써 절반으로 향해 달려가고 있다. 늘 느끼는 것은 계획은 많이 세웠지만 계획대로 잘 되는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그리 기대하지 않았을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늘 그래왔으니까. 이번 주와 다음 달도 계획을 하고 올 한해 남은 후반전을 뛸 준비를 할 것이다. 아니 벌써 나는 내년과 수년 후에 대한 그림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오늘 야고보는 그러한 계획의 그림을 그리고있는 나와 여러분들을 향해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잘 말해주고 있다. 야고보가 “들으라”고 할 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바로 내게 하는 말임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오늘이나 내일이나 어떤 도시에 가서 거기서 일 년을 머물며 장사하여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이다.

 

II. “이익”에 목숨 걸고 살지 말고 “주의 뜻”에 따라 살라.

오늘 말씀을 보면 우리를 움직이는 핵심 동력이 두 가지 나온다. 하나는 “이익”이고 다른 하나는 “주의 뜻”이다. 야고보는 “이익”이 우리 삶의 동인이 되어서는 안 되고 “주의 뜻”이 우리의 삶을 움직이는 엔진이 되어야 한다고 선포하고 있다. 우리는 “이익”을 보기 위해서 무슨 사업아이템을 선정할지, 한다면 그것을 언제부터 시작하고 어디서 일을 벌일지 계획을 하고 고심한다. 여기서 “이익”이란 금전적인 것 뿐 아니라 우리 삶의 수많은 목표들을 말한다. 공부를 하는 것, 직장을 갖는 것,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가정생활을 하는 것, 등등 우리는 삶속에서 무엇인가 쟁취하고 얻으려는 “이익을 보리라 하는 자들”이다. 

“이익”이라는 목표를 세우고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온갖 계획을 다 세운다. 그러한 것이 잘못된 것인가? 그러한 바람과 소망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고 “주의 뜻”이 아닌 “이익”이 우리를 주관하게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다. 특별히 야고보는 우리에게 “들으라”고 하면서 보려고 하는 그 “이익”에 대해 너무 기대를 걸지 말라고 한다. 내 계획과 의도대로 된다는 착각에 빠지지 말라는 것이다.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14절). 우리는 내일을 소망할 수 있어도 결정할 수 없다. 우리의 생명은 잠깐 보이다가 사라지는 안개와 같기 때문에 “내일”을 보증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내일은 안개 낀 날 운전하는 것과 같이 뿌연하고 하이빔을 켜도 더 하얗게 될 뿐이다. 따라서 이러한 “이익”이라고 하는 것에 나의 목숨 걸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에 노예처럼 매여 살지 말라는 것이다.


저는 계획했던 일이 잘 안될 때 가장 화가 난다. 물론 누구나 그러하겠지만... 예정대로 되지 않으면 왜 화가 날까? 성실하기 때문에 그렇다. 즉 그렇게 말했으면 지켜야 하고 몇 시로 약속했으니 바로 그 시간이 그곳에 있어야 하고 뭐 이런 식이다. 정말 그렇다. 계획한 일과 약속한 일은 어김없이 하도록 나는 미리 철저히 준비한다. 준비물은 미리 챙겨놓고 늦을 것 같으면 그것까지 고려하여 시간을 안배한다. 그런 저를 아내는 기계인간이라 한다. 그래서 전 스스로 나무란다. 사람이 쪼잔하게 왜 그러는가? 일이 계획대로 안 되어도 기분 나빠하지 말자. 뭐 그럴 수도 있지. 다른 사람이 늦어도 뭐 그럴 수 있지라고 하자. 다른 사람이 내가 원하는 대로 일을 못해도 “일을 하다보니 그럴 수 있지”라고 이해하려고 한다. “이익”이라고 하는 것을 떨쳐버리려고 하는 나의 고뇌인 것이다. “이익”이라고 하는 목표를 신처럼 떠받들고 그분을 충족시켜드리려고 한다면 그 “이익”이 나를 위해 있는 것인지 내가 그 “이익”을 위해 있는 것인지 혼란스러워진다. “이익”이라는 세워놓은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더 좋은 것을 잃을 수 있다. 내 자신의 일과 계획을 위해 사람도 희생할 수도 있고 아름다운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다. 주변의 친구들과 벗들을 수단과 방법으로 생각할 수 있다. 더 악한 것은 나의 이익을 위해서 하나님도 활용하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에 따라 산다고 해야 한다. 내게 유익인가? 손해인가? 내게 힘든 일인가 쉬운 일인가? 내게 즐거운 일인가? 싫은 일인가? 로 보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인가를 물어야 하는 것이다.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다. ”이익“이 나의 주인이 되어서는 안되고 ”주님“이 나의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는가? 

나의 ”이익“은 무엇인가? 목회이다. 하지만 라이프찌히에서 목양을 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을 위한 목회인지 나를 위한 목회인지 거꾸로 가지 않도록 하기 위해 늘 정신을 차리려고 한다.

어느 선배목사님이 평생 사역을 얼마나 잘 하셨는지 모른다. 사역을 잘했다고 하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여들고 건물도 크게 짓고 영향력도 있어서 신학생들도 많이 가서 배웠다. 그러나 결정적인 실수는 자기의 사역만을 위해서 사람을 키우지 않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다. “내가 잘못 산 것 같다”고 하신 말씀을 전해 들은 적이 있다.

 

III. “이익”이 삶의 중심에 있으면 부자연스럽다. 주의 뜻이 중심이면 자연스럽게 된다.

“이익”을 보겠노라는 목표를 세우면 그것을 성취하기 위해 많은 계획을 세울 것이다. 시나리오를 다 짜놓고 그 목표를 향해서 움직인다. “오늘”과 “내일”은 "이익“에 따라서 결정된다. 어떤 도시로 갈 것인가도 ”이익“에 따라서 결정된다. 몇 개월을 머물지 일년을 머물지도 ”이익“에 따라서 결정된다. 그렇기 때문에 ”이익“을 결코 놓치지 않기 위해서 무리하게 된다. “안되면 되게 하라”는 정신이 나오게 된다. 그 열정과 의지는 좋지만 무리하여 부작용이 나오게 된다. “이익”이 삶의 중심에 있으면 이루어지는 일이 아주 부자연스러워질 것이다.

합리적(合理的)인 것과 합리화(合理化)를 구분할 수 있는가? 둘 다 合理로 시작하지만, 끝에 化가 붙느냐, 的이 붙느냐의 차이가 있다. 합리적이란 인위적인 꾸밈과 조작이 없이 가만히 두어도 딱 들어맞는다는 말이다. 합리화란 지금 현재 상황이 이치나 도리에 맞지 않지만 일이 그리 되도록 꾀한다라는 의미이다. 합리적인 것에는 자연스러움이 있고 향기가 나지만 합리화한 것에는 부자연스러움이 있고 인간의 냄새가 난다. 합리적인 것은 창조의 질서에 따라 자연과 잘 조화하는 것이다. 논리가 맞고 맞추려고 안해도 저절로 맞추어진 것이다. 그러나 합리화라고 하는 것은 인간이 이론을 만들고 논리를 짜맞추는 것이다. “이익”이라고 하는 나의 목표를 쟁취하고자 할 때 “이익”에 맞추어 무리하게 합리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주의 뜻”을 좇아 할 때는 무리하게 일을 하지 않고 합리적으로 하게 된다.

논문을 쓸 때 흔히 설문조사나 인터뷰 등을 통해 기본자료를 수집한다. 저자는 그러한 방법을 사용할 때 예상 결과를 예측하여 가설을 내어 놓고 시작을 한다. 내심 바라는 어떤 결과를 기대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실제적으로 설문조사도 하고 인터뷰를 하여 데이터를 모은다. 그런데 논문의 결론으로 가면서 꼭 원하는 대로 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때 어떻게 해야 하는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고 그 설문조사 데이터에 손을 대어서는 안된다. 그냥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다. “안된다”는 결과가 나올 때는 “그렇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그대로 두는 것이다. 제대로 된 논문은 보려고 하는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흘러가는 대로 두는 것이다. 원치 않는 쓸데없는 결과가 나왔다고? 쓸데없는 결과란 없다. 그러한 결과는 버려두는 것이 아니라 귀하게 사용되어질 자료로 활용될 수도 있다. 의학에서도 원래 의도한 것이 있는데 부작용을 통해서 개발된 약이 있다. 약을 먹었을 때 원래 기대했던 효과 외에 나타나는 다른 작용을 가리켜 부작용(Side effect)이라고 한다. 하지만 부작용도 자연스레 사용될 수 있으면 효능(main effect)이 될 수 있다. 

아스피린은 해열·진통제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스피린을 먹은 환자들에게는 상처가 나면 지혈이 잘 안 되는 “부작용”이 일어났다. 의학자들은 이를 통해 아스피린이 혈소판의 응집을 막아 혈액의 응고를 억제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혈액의 응고가 억제되면 상처 치료에는 방해가 된다. 그러나 한편으로 지혈에는 좋지 않지만 인체 내에서는 혈소판 덩어리인 혈전(피떡)의 생성을 억제하는 효과를 가져 온다. 이러한 부작용 덕분에 아스피린은 현재 관상동맥 질환 등 심혈관질환의 예방과 치료에 널리 사용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한국에 갈때마다 친구목사가 독일 아스피린을 사달라고 한다. 수십만원어치 사다 주곤 한다. 그래서 국내에서는 심혈관질환 치료용으로 사용되는 아스피린의 판매액이 해열·진통제로 사용되는 아스피린 판매액의 무려 10배에 달한다고 한다.

“이익”을 좇게 되면 무리하고 부자연스럽다. 그러나 “주의 뜻”을 따라 살면 그 결과가 비록 만족스럽지 못하다 할찌라도 Side effect처럼 보이지만 Main effect 가 되어 우리 삶에 효능이 될 수 있다. “이익”을 따라 살게 되면 무리하고 부자연스러우니 힘들다. 그러나 “주의 뜻”을 따라 살면 자연스러우니 쉬운 삶이 된다.

 

IV. “이익”을 좇아 사는 사람은 순수하지 못하다. 그러나 “주의 뜻”으로 사는 사람은 순수한 사람이다. 좀 더 세게 이야기해 볼까? 이익을 쫓는 사람은 악한 사람이다. 16절을 보라. “이제도 너희가 허탄한 자랑을 하니 그러한 자랑은 다 악한 것이라.” 허탄한 자랑은 인간의 욕망과 죄의 성품에서 나오는 것이다. “주의 뜻”을 쫓는 사람은 선한 사람이다. 17절을 보라. “선을 행할 줄” 안다는 것은 “주의 뜻”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주의 뜻대로 살지 않는다는 것은 “죄”라고 하는 것이다. “이익”을 좇아서 살 때 불완전연소 되어 검은 연기가 배출구를 통해서 뿜어 나온다. 그러나 주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은 완전연소 되어 무공해 에너지가 거기서 나온다.

“이익”을 쫓아 사는 사람은 목표 성취를 중요시 여긴다. 그 이익이라고 하는 것은 허탄한 자랑이요 악한 것이기에 순수한 것이 못된다. 반면 “주의 뜻”을 쫓아 사는 사람은 ”결과“에 따라서 산다. 주의 뜻을 따라 사는 것은 선을 행하는 일이다. 목표의 인생은 투쟁의 인생이지만 결과의 인생은 은혜의 인생이다. 우리가 목표를 갖는다면 그것은 ”주의 뜻“이 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익을 갖는다면 ”주의 뜻“에 따라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은혜의 결실이 되어야 할 것이다.


자연스럽게 만나 얘기하다보니 대화가 되고 일이 풀려져야하지 자연스러움을 가장하여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하면 이미 동기가 불순한 것이다. 모든 일이 된 이후에 감사해서 돈을 주면 “감사의 사례”가 되지만 일이 되기 전에 미리 돈을 주면 뇌물이 된다. 물론 말을 하지 않았어도 사례가 올 것이라고 생각하면 그 역시 뇌물이 된다. “이익”을 기대했다는 불순함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앉아 있는데 돈을 주면 뇌물이다. 그러나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에게 줄 때 그것은 예의이다. 정승집 개가 죽으면 문상을 가도 정승이 죽으면 문상을 가지 않는다고 하지 않는가!

하나님은 앞서 가시는 분이시고 당신의 “뜻”을 가지고 미리 계획하시는 분이시다. 그것이 자연스러움이고 질서이다. 주님은 이 땅에 내려오시기 위해 하늘 영광 하늘 보좌를 버리셨다. 이 땅에 내려오시기 위해 의도적으로 하늘 보좌를 버리신 것이다. 갈데 없어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니다. 이 땅에 오신 것은 십자가를 지시기 위함이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이다. 주님은 이 땅에 우연히 떨어지시고 온 김에 십자가나 질까 하신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신 것은 부활하시기 위함이었다. 사람이 죽지 않으면 어떻게 부활하겠는가? 부활을 위해 먼저 죽으실 필요가 있으셨다. 철저히 계획된 죽음이었다. 주님이 부활하신 것은 영광을 받으시기 위함이었다. 결국 하나님은 영광을 버리셨지만 다시 영광을 얻기 위한 계획을 가지고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계획대로 움직이기 때문에 목적을 두고 하신다. 그래서 그가 바이나흐트에 오실 때나 고난절에 가실 때 모든 것들이 다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신다.


우리는 바로 그런 “주의 뜻”을 쫓아 살면 최고의 선이 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우리의 바람이나 소망대로 잘 되지 않고 내 계획대로 잘 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익”을 쫓아 사는 삶이 아니요 “주의 뜻”을 쫓아 사는 사람은 모든 계획이 다 주의 뜻 안에 있기에 그것을 “하나님의 섭리”라고 한다. “주의 뜻”이 하나님의 섭리인 것이다. 지금의 “삶의 조각”을 이해하지 못해도 이후에 뒤를 돌아보면서 하나님의 큰 맥락에서 이해하게 된다. 따라서 하나님은 목적의 삶이지만 우리는 결과의 삶이다. 그래서 갈수록 우리가 하게 되는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 “한량없는 은혜”이다. 사도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10절에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고 한다. 요셉을 보라. 부모형제를 떠나 애굽의 종으로 팔려가 13년의 세월을 고통스럽게 보내지만 극한 가뭄과 기근 속에 식량을 구하러 온 형들을 보았을 때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창45:5,8)고 한다. 하나님은 요셉과 야곱의 가문과 이스라엘을 철저히 계획하고 있었고 요셉과 그 형들은 하나님의 섭리를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의 최선의 삶은 우리를 계획하시는 주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삶이요 순수한 삶이요 선한 삶이다.

 

V. “이익”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좌절과 교만이다. 일이 잘 되면 자기가 계획을 잘 하고 탁월한 전략가니까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다. 일이 잘 되지 않으면 계획과 투자와 수고가 얼마나 허무하다는 것을 깨달아 얼마나 좌절할 것인가? 나의 계획대로 안 되었다고 잘못되는 것은 아니다. 나의 계획대로 되었다고 잘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주의 뜻”을 좇아서 사는 사람은 모든 것이 다 주님의 은혜이다. 주님의 계획에 따라 이런 결과로 살기 때문이다. 일이 잘 되어도 교만하지 않는다. 일이 못되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내가 잘한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시기 때문이고 내가 못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기 때문이다. 주의 뜻을 좇아 사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감사와 은혜이다.

시험 치르는 지체들 많은 계획을 가지고 “이익”을 위해서 산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도리어 말하기를 주의 뜻이면 우리가 살기도 하고 이것이나 저것을 하리라” 할 것이다. 자기 계획 다 세워놓고 주님에게 결재하라고 강요하지 말고, 주님의 뜻에 맞추어 놓고 모든 것을 계획하라. 내가 세운 목적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의 뜻의 결과로 살라. 이익은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쫓아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은혜와 축복이 풍성하기를 축원드린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