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누가복음 15:20-24
제목: 아버지의 눈물
일시: 2019. 5. 19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교회에서 가장 많이 쓰는 용어가 “아버지”일 것이다. “하나님” 이라 하면 모든 것을 다 아시는 “전지자”요 모든 능력을 다 가지고 계시는 “전능자”로서의 이미지는 있지만, 따뜻한 느낌이 없어 뭔가 말씀을 드려도 설득력이 떨어질 것만 같다. 하나님이란 호칭보다 “아버지”라고 하면 내게 그럴 만한 자격이 없고 부족해도 받아주실 것 같다. 내 상처도 싸매어 주실 것 같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에 있는 말을 해도 잘 들어주실 것 같다.
II. 누가복음 15장 오늘 본문에도 아버지가 나온다. 예수님이 하신 이 비유를 보통 “탕자”의 비유라고 하지만 저는 이 비유의 타이틀을 “아버지의 눈물”이라고 붙이고 싶다. 오늘 말씀은 눈물이 마르지 않는 아버지의 이야기이다. 물론 “눈물”이라고 하는 단어는 본문에서 한 번도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 스토리에서 지하수처럼 내내 흐르는 것은 아버지의 눈물이다. 첫 번째 아버지가 흘린 눈물은 안타까움의 눈물이다.
아버지에게는 아들이 둘이 있었다. 자녀가 있어도 똑 같지가 않고 참 다르다. “어디서 이런 게 하나 나왔지”라는 생각이 든다. “우리 조상 가운데는 이런 종류는 없는데”라고 한다. 둘째가 그러했다. 그는 요즘 말로 “자유로운 영혼” 이었다.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표현은 얼핏 듣기에는 긍정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걱정되는 존재”라는 것이다.
둘째 아들의 모습을 보라. 그 녀석은 몹쓸 녀석이다. 돌아가시지도 않은 아버지에게 재산을 나누어달라고 한다. 내게 돌아올 분깃이라 하여 자기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이다. 자기의 권리라도 Bitte 해야 아름다운 모습인데 염치없이 아주 당당하게 요청하고 있다. 밥을 사더라도 Please 라고 하면서 사야 한다. “시간 좀 내 주세요!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요”라고 한다. May I help you 라고 백화점 직원이 말하지 않는가? 물론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 목적이기는 하지만 돕는데 허락을 받는 것이 얼마나 보기 좋은가! 그리고 돈을 내려고 하면, “네 계산 도와드리겠습니다”라는 표현도 종종한다. Please를 쓰고 있는 것이다.
몇 일이 안 되어 짐을 쌌다는 것은 계획적이었다는 것이다. 죄를 지어도 우발적인 범죄와 의도적인 범죄는 죄질이 다르다. 재산을 어떻게 처리할지, 어디로 갈지, 가서 무엇을 할지. 계획을 했다는 것은 생각이 악한 것이고 동기가 좋지 않다는 것이다.
먼 나라로 갔다. 가고자 하는 나라가 미국이든 중국이든 독일이든 그리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아버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벗어나면 되는 것이었다. 이유는? 진리가 불편하기 때문이다. 옳은 것이 견디기 힘들기 때문이다. 잔소리가 듣기 싫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원하는 대로 하려는 것이다. 가진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사용해도 아무도 쓴소리를 하지 않으니 얼마나 신바람 날 것인가! 옳은 소리 하는 아버지보다는 듣기 좋은 소리 하는 친구들이 더 마음이 간 것이다.
하지만 이 둘째 아들이 영혼이 자유로워 마음껏 살았지만 그에게는 보호자가 없다. 아버지에게 보호해 주어야 할 아들이 없어진 것은 큰 상심이고 보호할 수 없다는 것은 걱정을 넘어 큰 절망이다. 또한 보호자가 필요한 아들에게 보호자가 없어졌다는 것은 큰 슬픔이고 비극이었다. 둘째 아들이 먼 나라에서 재산을 다 탕진하였을 때 그 누구도 그를 돌보아 주고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고, 무시 받았고 재정적으로도 공급을 받지 못했다. 그 아들이 잃은 것은 가진 재산을 탕진했을 뿐 아니라 보호자를 잃은 것이다. 불쌍한 고아와 같은 것이다.
서울의 은천국민학교에서 4-5학년을 다닌 적이 있다. 한반에 100명씩 있는 학교였다. 거기에 고아원원생이 두 명이 같은 반에 있었다. 아이들은 그들을 싫어했다. 조직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구든 그 아이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었고 두려워했다. 매점에서 빵을 사서 먹으려고 하면 달려가서 독수리가 먹이감을 채듯이 채어간다. 장난꾸러기들이 장난을 치는 것과 달리 거의 생존을 위한 범죄수준이었다. 그렇게 기고만장한 아이들이 점심시간만 되면 순한 양처럼 변했다. 고아원원장님이 학교에 부탁했는지 반찬과 밥을 그 학급이 책임지고 그들에게 주었다. 주번이 반친구들의 도시락뚜껑을 4개 얻어서 두 곳에는 반찬을 두 곳에는 밥을 가득 챙겼다. 한 숟가락씩 도네이션하는 것이다. 그러면 보기에도 먹음직스런 음식의 산이 되었다. 그때 저는 그 아이들을 보았다. 어떻게 느낄까 싶어 본 것이 아니라, “짜식들 먹을 것 줄 때는 어떤가보자”라는 생각이었다. 저는 빡빡이 머리를 하고 고개를 떨구고 교실 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그 아이들을 보았다. 46년전 일인데 그들의 얼굴이 기억이 난다. 어떻게 그들이 고아원까지 갔는지 모른다. 전쟁고아는 아니고 우리 시대이니 가난의 고아들이었을 것이다. 버려진 아이들이었다. 우리 엄마 아빠는 어디 있을까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 부모가 봤다면 마음이 어땠을까? 보호자를 잃어버린 것은 슬픈 일이다.
아버지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둘째 아들에 대해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고 고아와 같이 보호자를 잃은 둘째 아들에 대한 측은한 마음으로 눈물을 흘린 것이다.
III. 이제 아버지는 다시 우신다. 그렇게 기백 넘치게 나갔던 아들이 노숙자 거지 꼬라지를 하고 등장하자 “그를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면서 환영한 것이다. 분명, 눈에 눈물이 가득하고 그 더러운 얼굴에 입도 맞추고 어루만졌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그 눈물은 슬픔과 상실의 눈물의 아니다. 다시 찾았다는 기쁨의 눈물이다.
누가복음 15장에서 한가지 주제를 가지고 세가지 비유를 드는데 모두 잃은 것을 다시 찾은 기쁨에 대한 것이다. 그 기쁨이 얼마나 컸는지 종종 배보다 배꼽이 더 크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첫 번째 비유는 잃은 양을 찾는 기쁨이고 두 번째 비유는 잃은 드라크마를 찾은 기쁨에 대한 이야기이다. 물론 양을 찾았을 때와 드라크마를 찾았을 때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라고만 했으니 재정지출은 없었을 수도 있다. 양한마리는 5만원 정도이고 한 드라크마는 10만원 정도의 가치인데, 그것으로 잔치를 벌였다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찾았다”라는 것이다. 이러한 기쁨을 주님은 가지고 계셨다. 세 번째 비유가 바로 주님의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잃어버린 아들, 고아와 같이 되어버린 아들, 자유로운 영혼으로 보호자를 잃어버린 불쌍한 아들을 아버지는 애타게 찾았고 마침내 아들을 찾는 기쁨을 맞이한 것이다. 찾으니 얼마나 기쁜지 큰 돈이나 벌어오고 벼슬이나 하고 온 아들처럼 대우한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정도가 아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고 한다. 잘한 것이 뭐가 있는가? 펑펑 맞아도 시원찮을 판에 말이다. 그냥 살아돌아만 와도 좋은 것이다. 잃었다가 찾으니 좋은 것이다. 아비의 기쁨의 눈물은 오직 찾은 기쁨이다. 아버지의 관심은 잃은 재산도 아니었고 오직 “아들” 자신이었다. 이곳에서 유학하는 우리들에게 우리 부모님들은 공부잘하고 합격하고 성공하기를 바라는가? 바라기는 하지! 하지만 부모님의 관심은 공부, 합격, 실력, 직장... 이러한 것보다 “나 자신”이다. 연락을 하면 아픈 데는 없냐? 너무 힘들면 그냥 들어와라고 할 것이다.
저는 숨겨진 아버지의 눈물을 세 번 보았다. 한번은 누님이 시집가고 더 이상 집에 오지 않을 때이다. 신혼여행을 떠나면서 다녀올께요라고 갔지만 그 길로 잠시 인사만 왔을 뿐 자기의 인생을 살러 갔던 것이다. 그리고 누님이 늘 있던 방은 텅 빈 빈방이었고 아버지는 당신 마음이 허전하고 비었나 보다. 둘째는 이 교회건물에 오셔서 본당을 올라가면서 “아들 수고 많이 했어”라고 했을 때... 아버님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다른 사람들은 건물의 역사, 건물의 용도, 건물의 견고성, 건물의 편리성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아버지는 아들 자신을 보고 있었던 것이다. 세 번째는 제작 년 저를 인천공항에 배웅하고 뒷모습을 보이셨을 때이다. 출국라인에 서 있는 저를 보시더니 “잘 가 아들, 건강하게 사역 잘하고” 그리고 아직 몇분 정도는 더 이야기할 수 있는데 뒤돌아가신다. 그때 본 아버님의 뒷모습은 아킬레스건이 끊어진 아버님의 절뚝거리는 걸음과 손을 저으면서 잘 가라는 모습이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는 아버님은 울고 계셨다. 그래서 올해 한국에서 올 때 어머님도 공항에 함께 배웅 나오도록 했다. 어머님이 공항버스비 15000원을 아끼기 위해서 그냥 집에서 배웅하시겠다는 것을 저는 극구 함께 가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뒤돌아서서 우시는 아버님을 보았기 때문이다.
주님은 눈물을 흘리셨다. 비유속의 아버지와 같은 눈물을 흘리셨다. 안타까움의 눈물과 찾은 기쁨의 눈물을 다 가지고 계셨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그리고 잃었던 아들을 찾은 이 세가지 비유를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하는 첫째 아들과 같은 사람들을 위해서이다. “모든 세리와 죄인들이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나아오니.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수군거려 이르되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 (눅15:1-2). 예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는 이 친구들이 오죽 답답했으면 주님은 알아먹도록 여러 비유로 반복해서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주님이 죄인과 세리와 병자들 약한자들을 보실 때 마음은 늘 “불쌍히 여기사”였다.
IV. 부모님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신다는 것을 알고 있느냐? 그 눈물을 언제 알게 되는가?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눈물은 이미 있었다. 자녀들은 잘 알아듣지 못한다. 때가 되어야 “비로소”알게 되는 것이다. “비로소”라는 단어의 매력이다! 지금 당장은 모른다는 것이다. 지금 당장은 깨닫지 못한다. 자녀들에게 말하고 성도들에게 말하고 학생들에게 말해도 알지 못한다. 그러기에 눈물이 마르지 않는 것이다.
오래전에 딸아이가 Facebook에 남자친구있음이라는 곳에 체크를 했던 것 같다. 그때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보였는지 아는가? 축하해. 누구냐? 좋겠다.... 등등의 댓글이 달린다. 그런데 나는 어떠한 반응이었겠는가? 축하해? 좋겠다? No! 어떤 놈이야? 아빠로서 긴장이 확되고 눈에 힘이 가기 시작한다. 부모는 다른 사람이 보지 않는 것을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듣고 의식하지 못하는 부분을 깨닫고 있는 것이다. 그때부터 아이들과 페이스북 친구가 끊긴 것 같다.
냉정한 사회에서 힘들게 돈을 벌어봐야 비로소 “아버지가 어떻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양육하셨을까”를 알게 되는 것이다. 돼지가 먹는 쥐엄열매를 먹어봐야 비로소 집에서 부모님이 해 주시는 음식이 얼마나 귀하고 사랑 가득 찬 음식인지 알게 되는 것이다. 좋을 때는 알랑거리던 친구들이 형편이 나빠지고 어려워지자 180도 돌아서 배반하고 떠나봐야 비로소 나에게 진정한 충고를 하시고 싫은 말도 하시는 부모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때 아버지의 눈물을 알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언제 부모님을 알게 될까? 우리가 산 만큼이다. 그만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다. 마지막 입종의 순간에 “아 부모님은 이러한 생각을 하고 돌아가셨겠구나”라고 알 것이다.
V. 우리는 육신의 아버지는 우리를 위해서 늘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가 힘들 때 함께 힘들어 하시고 우리가 자유로운 영혼이 될 때 걱정과 안타까움의 눈물을 흘리신다. 또한 좋은 일이 있으면 기쁨과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신다. 우리는 그 눈물의 의미를 알까? 세상의 그 어떠한 사람도 부모님만큼 나를 더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가족에 속한 자녀이다. Family of God에 속해 있다. 우리의 아바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서 눈물을 흘리시는 분이시다. 그저 “우리 자신”을 생각하실 뿐이다.
또 하루를 살고 또 다른 한주간을 살아가면서 “비로소” 아버지의 눈물과 사랑을 깨달아가는 철든 자녀요 성숙한 자녀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