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마태복음 1:1
제목: 정통성 2 : 족보에 들어간 자
일시: 2019. 12. 1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다. 이 땅의 소유자로 정통성을 가진 사람들은 그 땅을 주시기로 약속하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자였다. 오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관한 말씀이다. 이 족보에는 어떠한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가? 그 역시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사람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 그 약속을 받은 사람들이 정통성 있는 예수 그리스도의 혈통에 들어가는 것이다. 지난 주 말씀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특권을 말한다면 오늘 말씀은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약속이 우리로 하여금 정통성있는 백성이요 정통성 있는 가문의 후손이 되게 하신다.
II. 마태복음 1장에 족보가 소개되고 있다. 족보의 시작은 아브라함이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낳고 이삭은 야곱을 낳고 야곱은 유다와 그의 형제들을 낳고”(마태1:2). 여기까지는 외우고 알고 있는데 그 다음부터는 언제 그 족보에 나온 모든 사람의 이름을 다 외우나 싶다. 단지 “응 계속 낳고 낳고지 뭐”라는 생각을 할 뿐이다. 이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의 의미는 무엇인가? 낳고 낳아 세대를 연결하는 것이었다. 이 훌륭한 분들이 평생 심혈을 기울여 한 것은 자녀를 갖는 일이었다. 자녀를 가져서 하고자 한 것은 마치 계주선수들이 바통을 이어주듯이 “약속”이라는 바통을 이어주는 것이었다. 사실 아무리 비옥한 토지와 푸른 목초지를 가지고 있고 많은 우양과 종들과 재산을 가지고 있다한들 가진 모든 것을 물려줄 사람이 없으면 얼마나 소망 없고 허무하게 느껴질 것인가?
예)제가 고등학교 때 신학을 하겠다고 미국에 계신 아버님께 말씀드렸을 때 아버님은 기뻐하시면서 “책을 사더라도 즐겁게 사신다”고 했던 기억이 있다. 저의 아버님이 할아버지에게서 받으신 유산은 등 시원하게 긁는 효자손밖에 없으셨다고 종종 말씀하셨는데 당신이 가지고 있는 것을 아들이 물려받을 수 있다는 기쁨이 있었던 것이다.
아브라함은 자신이 가진 약속을 전달해 줄 자식이 없어 고민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업을 무를 자로 다메섹 출신의 충성된 종 엘리에셀을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결재가 떨어지지 않았다. Nein sagen 하신 것이다. 아브라함은 그러면 자녀를 달라고 하였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하늘의 별과 같이 바다의 모래와 같이 많은 후손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감감무소식이다. 나이는 들어가고 자신이나 사라나 자녀를 가질 소망이 없어지자 초조한 마음에 사라의 몸종 애굽여인 하갈을 통해서 자녀를 낳게 된다. 그가 이스마엘이다. 이스마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아들이 아니고 아브라함과 아내 사라의 아이디어 작품이었다. 당연히 약속의 자녀가 아니기에 하나님께서는 약속의 상속자로 엘리에셀이나 이스마엘이나 인정하지 않으셨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의 약속이 없기 때문에 정통성이 없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의 족보에서 그들은 다 탈락되었다. 약속의 아들 이삭이 정통이고 인간의 생각으로 나온 이스마엘은 비정통이다. 그래서 이스마엘은 탈락! 이후 이삭은 쌍둥이 아들들 에서와 야곱을 낳는다. 에서가 비록 형이었지만 그는 약속이 없어 비정통이고 하나님의 약속을 받은 야곱은 정통성을 갖는다. 에서 탈락 야곱 블라이벤, 야곱 이후에 12아들이 있다. 이들 중에 유다가 정통으로 남는다.
그런데 우리는 이 족보에서 핵심인물이 누구인지 알아야 한다. 이 족보가 누구의 족보인지 잘 알아야 한다. 이 족보는 누구의 족보인가? 보통 시조라고 할 수 있는 아브라함과 같지만 아브라함의 족보가 아니다. 마태복음 1장 1절을 자세히 보라.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라고 한다. 문법적으로 잘 보면 핵심 단어는 예수 그리스도가 기준이 되고 앞에 있는 아브라함과 다윗은 예수 그리스도를 꾸며주는 형용사구나 보충 설명하는 동격이 된다. 우리의 시선은 아브라함에게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게로 향해야 한다. 아브라함은 약속을 받았고 그 약속은 이 족보의 끝에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가 딘다. 이 족보에 나오는 사람들의 정통성은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아브라함이나 이삭이나 야곱은 예수 그리스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마태복음 1장 16절의 말씀을 보라. 이전 구절들과는 말씀의 패턴이 달라진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가 강조되고 있다. “마리아에게서 예수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즉 요셉이 예수를 낳고라고 하지 않는다. 아브라함이 의미있는 조상이 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가진 약속이 유효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약속을 성취시켰기 때문이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정통성을 갖게 된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그들을 정통성있는 가문에 입양시켰기 때문이다.
예)토마스교회 샵에서 파는 것이 있는데 바하의 Familiestamm이다. 바하의 족보가 왜 의미가 있고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가? 다른 사람이 아닌 바하 때문이다. 바하의 계보는 바하로 인해 그 위의 이모나 형제들이 다 가치가 있게 되는 것이다.
III. 그러면 예수 그리스도 이후는 무엇인가? 이 족보에 따르면 다들 낳았는데 예수님은 누구를 낳았는가? 이 족보는 어떻게 계속 이어지는가?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족보는 끊어진다. 아들을 못 낳아서가 아니다. 여기서부터 이스라엘의 역사 족보가 아니요 새로운 이스라엘, 즉 영적인 족보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이제 신약성경에 나오는 모든 스토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다음 세대를 낳게 되는지를 말씀하고 있다. 예수님은 우리를 낳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낳는 것이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1:12). 우리는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가 있다. 예수님의 족보에 올려져 있는 우리는 그의 자녀요 가족구성원이 된다. 우리는 약속을 성취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자녀가 되었기에 정통성을 갖는다.
예수님 이전에 사람들은 낳고 낳고 하였다. 하지만 그 다음 출생부터는 낳는 방법이 다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낳는 방법은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십자가의 고난을 “해산의 고통”이라고 한다. 십자가는 사망에 이르게 하는 곳이 아니라 생명을 주는 출생 장소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새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에 예수 그리스도를 달아 놓지 않는다. 그리고 십자가에 세마포만 올려 놓는 그림도 있다. 예수는 그곳에 머물러 있지 않고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아드벤트 시즌에 약속된 메시야을 기대하고 크리스마스에 오시는 주님을 고대한다. 그분이 오셔서 하신 일이 무엇인가? 바로 십자가의 길을 걷기 위해 오셨다. 십자가로 약속을 완성하시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이루신 것이 십자가이다. 십자가에서 주님이 하신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가? “다 이루었다” 주님이 약속을 이루신 것이다. 우리를 이 족보에 넣으려는 약속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의 핵심은 십자가이며 십자가의 핵심은 피가 된다. 가족관계는 바로 이 피의 관계이다. 우리가 십자가의 해산으로 태어난다는 것은 예수님과 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이고 그분과 가족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가족관계에 있으면 닮게 된다. 피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통해서 태어났기에 우리는 그 흘리신 피를 받아 신의 성품에 참예한 자가 된다. 우리는 누구를 닮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가졌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닮고 있는 것이다. 안디옥에 있는 초대교회성도들이 처음 그리스도인이라 불렸는데 그리스도를 닮았기 때문이다.
예)저를 보는 사람은 늘 아버지하고 꼭 같으네라고 한다. 키에프 강의를 위해 몇 년 전에 갔을 때 선교사님 가정들이 5가정 모여 친교를 했다. 세월이 가서 그런지 다들 후배동역자들이다. 다들 저를 보고 반가워한다. 사실 나를 개인적으로 알아서보다 선배가 왔으니 챙긴다는 분위기였는데 그래도 반가워하는 이유를 대화속에서 알 것 같았다. 나를 보면서 하는 이야기는 꼭 권교수님 같다는 말이다. 그들은 아버님께 배운 세대이고 그들이 나의 아버님을 볼 때가 50대의 아버님이었는데 제가 그 나이가 드니 아버님의 모습이 드러나 보인 것이다. 그래도 감사한 것은 아버님 교수를 싫어하지 않았나 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숨겨져 있는 저의 어머니를 보는 순간 어머니를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외모도 그렇고 성실하다 못해 기계적인 성품도 어머니를 닮았다. 철저하다. 후천적으로는 아버지를 닮았다. 그런데 더욱 닮은 것은 시골에서 사과농장도 하시고 소도 키우고 농사일을 하시는 삼촌이시다. 그래서 어른들이 내게 어찌 꼭 네 삼촌하고 똑 같냐고 하곤했다. 걷는 폼이나 웃는 것이나 기질이나... 어머님이 시집오셔서 삼촌을 미워해서 그런가보다라고 말씀하곤 했다. 그 삼촌에게도 조카가 꼭 삼촌닮았다는 말을 많이 해서인지 어느날 시골을 방문했다가 서로 농장으로 가면서 처다보면 무척 웃었던 적이 있다. 바로 그 모멘트에서 참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도 자녀들을 보면 꼭 닮았다고 하지 않는가?
IV. 예수님의 족보에 나의 이름이 있는가?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출생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 그분의 천국호적이 등록되어 있다. “오직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만 들어가리라”(요한계시록21:27). 아브라함이 받은 약속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한1:12)의 말씀과 같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자녀가 되었고 마태복음에 나오는 족보에 등록된다.
이러한 신앙의 고백이 침례식과 성찬식이다. 두 가지 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의미하고 있다.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는 것은 죽음과 부활의 상징이다. 떡과 잔을 먹고 마시는 것은 주님의 몸과 피를 먹고 마시는 것이다. 주님과 하나로 연합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정통성있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정통성있는 하나님의 가족이 된다. 오늘 침례식이 오후에 있다. 주님과 연합됨의 아름다운 신앙의 고백을 통해서 온 성도들에게 주의 은혜가 풍성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