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15:5-8
제목: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일시: 2020. 5. 1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모세가 하나님의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나는 스스로 있는 자”(I am who I am) 라고 말씀하셨다. 그분의 이름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분과 함께 있어서 그분을 불러줄 다른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기 때문이다. 그분은 그냥 “홀로 한분이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자신을 설명하기 위해서 어떠한 도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신다. 따라서 하나님을 향해 “당신은 누구냐”고 묻는다면 “나는 나다”라고 말하실 수 있다. 하지만 우리가 “나는 나다” 라고 하면 “어디 아퍼? 좀 돌봐주어야 할 사람이구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는 피조된 존재요 상대적인 존재이기에 부가설명이 필요한 사람이다. 나 자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사람은 도를 깨달은 사람이다. 내가 누군지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근본과 인생목적이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며 자신이 누구인지 정체성(Identity)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다.
II. 이 정체성(Identity)은 관계에서 나온다.
나의 정체성은 스스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고 관계 속에서 설명되는 것이다. 나는 누구인가 하는 사실은 관계 속에서 정의되어진다. 부의 대물림과 가난의 대물림을 풍자하여 설명할 때 금수저, 은수저, 흙수저를 물고 나온다고 말한다. 태어난 사람이 자신의 의도와는 상관 없이 출생의 관계 속에서 ooo집 아들래미 딸래미가 되는 것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신분증을 가지고 태어나는 것이다. 아기가 태어날 때 가장 처음 주어지는 것이 이름이다. 본인이름을 이렇게 짓고 싶어서 지어 나온 사람이 있는가? 공항에서 출입국신고서를 작성할 때도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family name 과 given name을 쓰는 것이다. 우리 존재의 가장 기본이 되는 이름에서 벌써 우리는 Active하게 결정하는 존재가 아니요 Passive하게 결정되는 존재임을 알게 된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라 “의존적인 자”이다.
예)나는 안동“권”씨이다. “순”은 안동권씨 37대돌림자로 쓴다. 태는 같은 항렬 안에 숫자를 넣는데 내게 클 태자를 넣을 것이다. 순일, 순이, 순칠, 순구는 우리 대 중에 있다. 지휘자 권태희집사님은 33대로 알고 있다. 고조할아버지이다.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 중에 권태희집사님처럼 높은 항렬을 가진 사람이 별로 없다. 이렇게 이름이 주어짐으로 권목사는 안동권가 집안의 몇 대손인 줄 안다. 그래서 어디 가서 권씨 성을 가진 사람을 보면 이름만 들어도 관계설정이 확 나오게 되는 것이다. 사회생활을 하다가 같은 집안사람이 만나게 될 때 이름만 들어도 그 서열을 분명히 알아야지, 안 그러면 쌍놈의 집안이 되어 양반 체통이 무너지게 된다. 위 아래도 없고 질서도 없는 콩가루집안이 되어 버린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가 아니요 가족관계속에서 빼도 박도 못하는 안동권씨 37대손이다.
그렇게 이름부터 주어지면서 인생을 살아가게 되는데, 바로 이러한 인생의 여정 속에서 나의 실존적인 정체성이 나오게 된다. 태어나면서부터 만남이 있고 평생 수많은 만남과 관계 속에서 내가 설명이 되는 것이다. 태어날 때는 권씨 가문의 아들이다. 성장하여 결혼하니 나는 양미란의 남편이 된다. 처음에 결혼하고 나와 아내의 관계가 시작되었는데 익숙치 않아서 여보 당신이라 부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에 어이라고 하기도 했다. 연애를 했으면 오빠 미란이라고 할 수 있었을텐데... 그런데 설주 혜주가 태어나니 나는 두 딸의 아빠가 되고 가장이라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그리고 내가 한국을 방문할 때 교회나 사람들은 권순태선교사로 부르지만 이곳 독일에서는 나는 라이프찌히교회의 목회자가 된다. 살면서 엮어지게 되는 수많은 관계를 통해 나의 정체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나는 ~이라 라고 할 때 나의 정체는 바로 관계에서 나온다.
예)올 초 한국을 방문했을 때 아주 오래전 바이바르에서 바이올린을 공부하던 자매를 만났다. 유학 이후 융에오케스트라 단원으로 있었다. 그러나 꿈은 현모양처였다. 그래서 한국에 가서 결혼하여 자녀를 셋이나 낳았다. 활동을 할 만하기 시작하자 콰르텟 수를 조직하여 지금까지 10년이 넘게 왕성히 활동하며 음대도 출강을 하면서 교수님이 되었다. 이번에 만남은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코로나가 대한민국을 한참 강타하고 있어 모든 연주와 레슨과 강의가 취소되고 시간이 났는가 보다. 대화 중 하는 말이 코로나 때문에 못하고 취소되는 것이 있어도 덕분에 논문을 쓰기에 좋다고 했다. 무슨 논문? 뭐 더 배우는 게 있던가?라고 물었다. “목회학박사논문”이라고 했다. “목회학 박사?” 목사가 쓰는 것인데. 그랬더니 자신이 목사라 했다. 안수를 받았다는 것이다. “아니 그러면 도대체 정체가 뭐야? 연주자, 세 아이의 엄마, 교수, 목사?” 놀랍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그 자리에서 “여근하목사”라고 불렀다. 본인은 그 이름에 아주 어색해 했다. 마침 점심에 몇 분의 친구목사님들과 식사를 하기로 했는데 같이 가자고 했다. 무슨 자격인가? 목사의 자격으로 갔던 것이다. 그 자매의 고민 아닌 고민은 정체를 뭘로 하느냐는 것이었다. 답은 간단하다. 관계에 따라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면 되는 것이다. 여러 정체가 있지만 집에서는 엄마요 아내로, 연주장에서는 연주자로, 학교에서는 교수로, 교회에서는 목사로 자신을 소개하면 되는 것이다. 정체성은 관계에서 나온다. 나는 교회에서 목사이지 집에서는 남편이다. 집에서 목사하면 아내와 아이들에게 늘 설교해야 한다. 나는 부모님이 계실 때 그분들이 머무는 곳에 가면 아들이었다. 들어가서는 그분들의 침대에 텀블링을 하면서 올라간다. 그러면 어머님은 역시 어머님이시다. 아들 목사 목 다쳐 지금 나이가 몇인데라고 한다. 나이가 들어도 영원한 아들이다.
오늘 요한복음의 말씀은 우리의 정체성을 관계 속에서 발견하게 한다. 포도나무를 보라. “나는 참 포도나무요 내 아버지는 농부라”(요15:1). 5절에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 라고 한다. 가지는 포도나무와의 관계 속에서 “가지 자신”의 정체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이다. “가지”는 나무에 붙어 있을 때 설명이 된다. 나무에 붙어있는 가지는 더 이상 가지가 아니라 막대기일 뿐이다. 영양분도 수분도 없는 마른 막대기가 되어 불 때는 연료로 사용될 뿐이다. 가지인 우리의 정체성은 포도나무인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분명해지게 된다. 예수님은 포도나무고 우리는 가지가 되기에 우리는 예수님께 딱 달라붙어 있어야 한다. 그때 가지는 살고 그때 열매를 맺는다. 열매를 맺게 되면 그 나무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것이다. 아 포도나무구나! 아 불루베리구나! 아 체리나무구나! 포도나무와 가지가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열매를 맺을 수 없고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열매를 맺게 되면 누가 영광을 받는가? “농부 아버지”이다.
III. “포도나무”와 “가지”! 이제 그 관계성에 있어서 중심은 어디에 있는가?
포도나무와 가지 사이에서 관계성의 축이 어떠하느냐가 중요하다. 포도나무 비유에서 계속 강조하면서 말하는 것은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무가 가지에 달리는 것이 아니고 가지가 나무에 달리는 것이다. 서로 관계가 끊어지게 되면 나무는 문제 없어도 가지는 마른 막대기처럼 생명을 잃고 열매를 맺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딱 달라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처럼 가지된 우리는 포도나무되시는 예수님에게 딱 달라 붙어있어야 한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 있어 중심은 포도나무가 되어야 한다.
예)옥희집사님 용서하세요 또 얘기해서... 아들래미가 공부를 잘해서 의사를 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많았나 보다. 그렇지만 제가 볼 때 축구도 보통 잘하는 게 아니어서 축구를 시키면 어떻겠느냐고 했더니 “축구 잘하는 의사”하면 된다고 한다, 맞는 말 같다. 그리고 아빠가 노래를 잘하니 성악을 시키면 어떻겠냐고 물으니 “성악 잘하는 의사”로 키우고 싶다고 말한다. 재미로 한 말이었지만 진짜 같다. 물론 집안에 의사가 있으니 좋기는 하다. 김희중 전도사도 누나가 심장의사이고 작은 아버지가 외과의사이니 연골에 물혹이 생기고 다리무릎 십자인대 끊어져도 한국 가서 수술을 받을 수 있고. 그러나 삶의 축이 어디 있는가? 의사가 좋기는 하지만 삶의 중심에 올 수는 없다. 저는 아버님이 목사라서 좋은 것 같다. 아버님이 남기신 책을 다 내가 받아 쓸 수 있으니. 그러나 가끔 요즘처럼 스포츠가 활성화되고 세상이 축구를 좋아하는 것을 보면 축구선수를 하고 목사를 하면 좋았겠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면 축구 잘하는 목사가 될 것이다. 어떠한 목사들은 성악을 전공하신 분들도 꽤 있는데 성악을 전공하여 찬양 잘하는 목사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교회 작업과 공사가 있지만 다 못하지만 제가 가장 못하고 두려워하는 부분이 있다면 보이지 않는 전기이다. 베를린 함승화목사님은 전기를 전공하셨다는데 전기기술이 있는 목사는 어땠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요즘처럼 정치판이 혼란스러운 시기에는 정치학을 공부했던 김응석 바이마르목사님처럼 국제정세와 시대흐름을 잘 알 수 있는 목사가 되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우리의 정체성은 의사가 중심이 아니다. 축구선수가 중심이 아니다. 성악가 중심이 아니다. 그렇다고 목사가 중심이 아니다. 우리의 중심에는 주님이 있으셔야 한다. 우리의 정체성은 “가지”인 “내”가 아니요 “포도나무”인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의 중심에 올 때 분명해진다. 나와 그분의 관계에 있어 그분이 중심축이 되어 내가 그분에게 딱 달라붙어 있을 때 흔들리지 않는다. 무게중심이 딱 잡히는 것이다. 주님께 붙어 있지 않게 되면 마치 럭비공과 같이 좌충우돌하게 된다. 어디로 튈지 어떻게 변할지 알지 못한다. 살아가면서 관계는 수없이 많다. 그런데 문제는 그 관계의 축을 잘못 두고 있기에 삶이 흔들리는 것이다.
세상에는 결코 변치 않는 절대진리가 없다. 계절에 따라 변하고 흔들린다. 상황과 형편에 따라서 가치도 바뀌어 버리고 카멜리온처럼 얼굴색도 바꾼다. 그러나 하나님은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다(야고보서 1:17). 태양도 기준이 되지 못하고 하나님이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결정되는 분이 아니라 결정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은 상대적 존재가 아니라 스스로 계신 절대기준이 되신다. 이스라엘은 그러한 하나님의 임재를 소망하며 예루살렘성전을 짓고 그 성전을 중심으로 살았다. 기독교나라인 유럽사회도 시 중심에 교회가 있고 그 교회는 Stadt kirche 가 된다. 우리 삶에 수많은 변수가 있고 도전이 들어온다 하여도 주님이 그 중심에 계시고 우리가 그 포도나무에 붙어 있으면 알레스 인 오두눙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와 요한이 나면서부터 앉은뱅이된 걸인을 고치고 나서 서슬이 퍼런 공회 앞에 섰다. 유대지도자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고 경고하였을 때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행4:19)이라고 한다. 또한 바울은 엉뚱한 거짓 진리와 복음을 말하는 사람들에게 “내가 사람들에게 좋게 하랴 하나님께 좋게 하랴”(갈라디아서 1장 10절). 베드로나 바울은 그들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는 것에 소홀하지 않았다.
우리는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에서 그 축이 어디 있는지 분명히 깨달아야 한다. 그럴 때 정체성이 흔들리지 않는다. 집과 교회? 거리가 있다면 “우리집이 왜 이리 멀지”라고 해야지 “교회가 왜 이리 멀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코로나와 하나님? 코로나로 인해 상황이 이렇게 되면 “하나님은 도무지 살아계신거야 뭐하고 있지”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은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지? 왜 이런 일을 허용하셨을까?”를 생각해야 한다. 사업과 하나님? 유학생활과 하나님? 건강과 하나님?... 우리는 이 모든 일로 하나님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내 삶의 모든 일을 해석해야 한다. 가지인 내가 중심이 되면 복을 쫓는 무속주의 신앙이 된다. 우리의 신앙은 내 중심이 아니요 나를 지으시고 나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아시아외국친구들이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생각이 난다. 푹풍과 하나님 사이에서 축을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다. Don't tell God how big the storm is, tell the storm how big your God is. 하나님에게 폭풍이 얼마나 센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폭풍에게 우리 하나님이 얼마나 위대하신가를 이야기해 주어야 한다. 나의 삶의 중심축은 어디인가? 포도나무 되신 예수님에게 붙어 있는 가지가 될 때 열매를 맺고 농부되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는 것이다.
IV. 나는 누구인가? 우리는 스스로를 설명할 수 없다. 내 삶과 엮여진 수많은 관계 속에서 나는 설명되어진다. 그 관계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오해가 생길 때 내 자신의 정체성이 무너진다.
포도나무와 가지의 관계가 예수님과 나의 관계임을 기억하라. 그렇게 관계의 첫단추를 끼울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열매를 맺게 되는 것이다. In Jesus Christ 즉 그리스도 예수 안에 모든 것을 다 집어 넣는 것이다. 내 가족도 집어 넣으라. 건강의 문제도 넣으라. 내 직장과 활동과 비젼도 집어 넣으라. 그분과 연관되지 않는 것은 열매로 나올 수가 없는 것이다. 포도나무되신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하여 맺어지는 열매를 통해서 나의 정체성이 드러나고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것이다. 이번 한 주도 무의미하게 왜 사는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분명히 내가 누구인지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인생의 목적과 방향과 주체를 잘 파악하고 살아가는 주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