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사무엘상 6 : 7 - 15
제목: 언약궤를 실은 두 마리 암소
일시: 2021. 1. 17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소는 지구상에 있는 동물 중 우리 인간에게 가장 유익한 동물일 것이다. 우유와 치즈를 제공하고 스테이크는 물론, 소뼈 곰국, 소족탕, 소머리 국밥을 준다. 소고기장조림, 소갈비, 소등심 숯불갈비도 해 먹을 수 있다. 또한 소가죽으로 옷도 만들고 북도 만든다. 뭐하나 버릴 것이 없다. “소같이 일한다”라고 말하듯이 살아서는 우리에게 노동력을 제공해 준다.
특히 요즘 코로나 시대에 백신이 소망인데 무서운 바이러스에서 인류를 구한 첫 구원투수가 바로 소다. 1796년 영국 시골 의사 에드워드 제너(Edward Jenner)는 소젖 짜는 아가씨들이 천연두에 걸리지 않고 소를 키우는 목축업자들은 천연두에는 잘 감염되지 않는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그래서 그는 천연두에 걸린 소의 상처진액을 짜내어 소량을 인공적으로 사람에게 주입했다. 그것이 불주사라 하는 우두이다. 유럽인구의 30%를 희생시킨 흑사병이나 20세기 초 등장하여 3천만명의 생명을 앗아간 스페인독감보다 더 강력하여 지금까지 10억명 이상 세계인을 희생시킨 천연두는 제너의 그 우두주사로 사라졌고 곰보 얼굴이 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바로 소가 백신제공자이다. 이후 루이파스퇴르 (Louis Pasteur)는 암소를 뜻하는 라틴어 바카(Vacca)에서 백신(Vaccine)이란 용어를 처음 사용했다. 이토록 헌신적인 소가 오늘 본문에 나온다. 이 암소들은 여호와의 궤를 싣고 벧세메스로 향하고 있다. 그들이 얼마나 헌신적이었는지 3가지 헌신의 아이콘을 중심으로 말씀을 나누고자 한다.
II. 첫 번째 헌신의 아이콘은 “멍에” 이다.
멍에는 일을 시키기 위해 소 등위에 걸치는 작업도구이다. 멍에를 멘다는 것은 이제 일을 시작하라는 것이다. 멍에를 메지 아니한 소는 자유분망하게 살던 소이다. 그런 소가 멍에를 메게 되었다는 말은 어떤 일을 위해 구속되었다는 말이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두 마리 암소는 지금껏 “멍에를 메어보지 아니한” 소였다. 아무런 짐도 지어본 적 없이 편히 살았던 소이다. 그런 암소들이 이제는 여호와의 언약궤를 나르기 위해 멍에를 메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따를 때 이 멍에는 언제나 함께 따라온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이 멍에를 메도록 요청했다.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바울은 빌립보성도들에게 함께 멍에를 멘 자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또 참으로 나와 멍에를 같이한 네게 구하노니” (빌 4:3).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듯이, 교회의 지체들이나 주의 일을 하는 동역자들은 함께 멍에를 메야 한다. 무거운 짐을 함께 지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고 지체들과 함께 멍에를 맨다고 해도 멍에를 멘다는 것은 부담스러운 것이다. 사람들은 부담 지는 것을 싫어한다. 가급적 부담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주님을 따르려 할 때 부담을 갖는 것은 부작용이 아니요 당연한 현상이다. 주님은 제자들에게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을 따르는 제자가 될 때 우리 각자가 지어야 할 “십자가 부담”은 늘 있게 마련이다. “멍에”를 메어야 한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자 필수적인 일이다. 신앙의 선배들도 주님을 위해 일하는 것을 다 부담스러워했다. 모세도 부름을 받을 때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라고 한다(출4:10,13). 예레미야를 부르셨을 때 그도 “슬프도소이다 주 여호와여 보소서 나는 아이라 말할 줄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한다(렘1:6).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회개를 선포하라는 멍에를 걸자 부담을 느끼고 그 길로 곧바로 니느웨와 반대방향인 다시스로 도망했다.
주님은 우리를 위해 멍에를 지셨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사야 53:4-5). 이제 우리는 주님을 위해 내가 지어야 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 멍에를 피하지 말라. 주님을 홀로 내버려 두지 말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멍에는 없을 것이 생긴 것이 아니라 우리가 메어야 할 미션이며 우리에게 축복의 부담이다. Q.나의 멍에는 무엇인가?
주님의 이름으로 감당하는 교회의 일들 - 성가대, 어린이, 청소년, 경배와 찬양, 행정일, 교회건물을 돌보는 일들... 또한 주님의 이름으로 사는 우리의 일상적인 삶들 - 가정생활, 직장생활, 사회생활 등등..., 시간을 부담하고, 물질을 부담하고, 정신적인 스트레스를 부담하고, 재능을 써야 하는 것 등등 그 어떠한 것이라도 주님과 멍에를 같이 메고 행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멍에요 부담이다.
III. 두 번 째 헌신의 아이콘은 “송아지”이다.
암소들은 멍에를 쓰게 되었을 뿐 아니라 언약궤를 나르기 위해 젖을 먹여야 하는 송아지를 떼어내야 했다. 어미 소는 송아지를 돌보아야 했고 송아지는 어미를 필요로 했다. 늘 엄마 옆에서 함께 있고 젖을 빨아먹고 살고 있었던 송아지들은 이제 어미를 잃게 되었다. 젖나는 소에게 가장 중요한 존재는 송아지들이었다. 어미 소의 본능은 아직 자기들을 필요로 하는 새끼 송아지들을 떼어 놓고 가는 것을 참기 어려웠을 것이다. 본문12절에 “암소가 벧세메스 길로 바로 행하여 대로로 가며 갈 때에 울고...”라고 한다.
암소들은 궤를 옮기는 일을 함에 있어 자신들의 가장 귀한 송아지들을 드리는 헌신을 했다. 암소는 그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 가장 귀한 것을 희생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가장 귀한 것을 요구하신다. 우리 역시 하나님께 가장 귀한 것을 드려야 한다. 하나님이 찬밥 신세같이 대충 대우받고, 우리도 가장 귀한 것이 아닌 남는 것으로 대충 드리게 될 때 그런 헌신은 하나님을 위한 헌신이 아니요 내 자신을 위한 인사치례 헌신이요 하나님이 받으실 수 없는 상한 헌신이 된다.
헌신하면 언제나 아브라함의 헌신이 생각난다. 그에게 주문된 것은 은도 금도 다른 가축도 아니요 그가 가장 사랑하는 아들 이삭이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꼭 찍어 그가 가장 아끼는 아들을 저울에 달아보게 하신 것이다. 아들사랑이 무게가 나가는지 “하나님사랑”이 무게가 더 나가는지 보기 위해서이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 이삭을 모리아산에서 번제물로 드리라는 요구를 하셨을 때는 아브라함의 생명을 요구하신 것이다. 그것은 “너의 가장 귀한 것을 드릴 수 있느냐”는 헌신에 대한 질문이었다. 아브라함에게 그토록 무리한 요청을 하신 하나님은 이후 당신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줌으로 아브라함의 입장에서 우리를 향하신 사랑을 증명해 주셨다.
우리의 삶에서 명예, 물질, 재능, 부귀영화... 등등을 언급하면서 그런 것들을 아주 나쁜 것처럼 말할 때가 있다. 그러나 그들은 나쁜 아이들이 아니다. 그들이 하나님과 경쟁하게 될 때 나쁜 것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비교의 대상이 될 때 우상이 되는 것이고 하나님은 비교되는 것만으로도 아주 불쾌해 하신다. 그래서 좋은 것이 계속 좋은 것으로 남기 위해서는 하나님과 비교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좋은 것은 우리에게 큰 고민거리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는 결단하여야 한다. 젖나는 암소에게 가장 귀한 것은 송아지들이다. 아브라함에게 가장 귀한 것은 생명과 같은 아들 이삭이다. 가장 귀하기에 고민이 된다. 이스라엘의 사사였던 입다는 암몬족속을 물리쳐서 이스라엘을 구했지만 하나님과 서원한 대로 무남독녀인 딸을 번제물로 드리게 될 때 자신의 옷을 찢으며 그 딸에게 “어찌할꼬 내 딸이여 너는 나를 참담하게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로다”(삿11:35) 라고 한다. 그러나 그 고민의 끝에 결정체로 나온 우리의 헌신을 하나님은 기쁘게 받으시는 것이다. 질투하시는 하나님은 비교되는 것을 용납지 아니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장 귀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족집게처럼 집어내셔서 바로 그것을 요구하신다. 두 마리 암소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라 가장 귀한 송아지를 남겨 두면서 언약궤를 메는 미션을 감당했다. Q.나의 송아지는 무엇인가?
IV. 세 번째 헌신의 아이콘은 “수레”이다.
암소들은 언약궤를 끌었다. 참 훌륭하게 일한 것이다. 그러면 여물도 좀 주고, 물도 주고, 수고했다고 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런데 그 암소들의 운명은 어떠한가? 그 암소들은 새끼 송아지가 기다리고 있는 집으로 다시 돌려보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번제물로 드려졌다. 완전히 태워지는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태우는 땔감이 어디서 나왔는가? 바로 그 암소들 자신들이 끌고 온 수레나무를 패서 만든 장작이었다. 참 어이없는 일이다. 자기를 태울 나무를 자기가 지고 온 것 아닌가!
그러한 모습을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의 한 산으로 갈 때 아브라함은 불과 칼을 들었고 아들 이삭에게는 장작을 메게 한 장면이 연상된다. 이삭은 자기를 번제로 태울 나무를 스스로 지고가는 것이다. 그리고 한단계 더 나아가 이런 이삭을 보면서 우리는 또한 예수님을 생각한다. 순종하는 어린희생양으로 자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오르는 주님의 모습이다. 자기가 매어 달려 죽게 될 십자가를 지고 가는 모습이 참 어이가 없고 아이러니 한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모습은 참된 순종과 온전한 헌신의 모습이었다.
암소의 헌신은 끝까지 드리는 헌신이었다. “더 이상은 안 됩니다 여기까지입니다” “그건 지나칩니다”가 아니라 내 마지막까지 태워드리는 헌신이었다. 암소들이 말할 수 있었다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수고했다고 상을 주지는 못할망정 저희를 번제물로 삼으면 너무 하지 않습니까? 집에는 젖을 주어야 할 우리 송아지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빈수레에 여물을 실어주어야지 그것을 패서 저를 태우는 땔감으로 쓰다니요 너무하지 않습니까?” 그 수레를 장작삼아 번제물로 드려진 소들은 헌신은 온전한 헌신이었다.
이렇게 완전히 다 드리고 나면 내게 떨어지는 것은 뭐지라는 본전생각이 나게 된다. 그러나 온전한 헌신은 보상을 생각하지 않는다. 만일 하나님께 give를 하면서 이미 take를 하려는 의도를 가지게 되면 그러한 헌신은 불순한 헌신이요 상한 헌신이 된다. 하나님께 드리는 번제물은 헌신이지 비즈니스 거래가 아니다. 내가 헌신한 것에 대해 값을 쳐달라고 하면 더 이상 “헌신”이 아니요 “장사”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거래관계로 격하되면 천박스러워진다. 하나님과 우리는 고객과 업주의 관계가 아니다. 하나님과 우리는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요 생명까지 줄 수 있는 관계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들의 생명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러한 하나님께 나 자신과 내가 끌던 수레장작까지 드리는 것이다.
32년간 친구로 지내오고 몇 일 전에도 통화를 하면서 안부를 물었던 인도 나갈랜드 출신의 꼬뻬메로라는 친구가 있다. 1988년도 필리핀 신학교에 처음 갔을 때 만난 친구다. 그는 작곡도 하고 노래도 곧잘 불렀는데 당시 내가 가지고 있던 기타를 몹시 갖고 싶어 했다. 그러면서 어느 날 내게 그 기타를 팔지 않겠느냐고 제안했다. 그리고 그 값으로 그가 가지고 온 자신 부족 전통의 핸드메이드 쇼울을 주겠다는 것이다. 저의 기타와 그의 쇼울의 실제 값이 어떻게 되는지 비교할 수 없었지만 나는 안팔겠다고 했다. No I don't want to sell it. 그 친구는 약간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때 저는 But I want to give it to you as a gift 라고 했다. 선물로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기타와 쇼울을 서로 주고 받았다. 사고팔지 않고 선물로 주고 받았다. 사고파는 것은 고객관계이지만 선물을 주고받은 것은 친구의 관계인 것이다.“사고팔고”와 “주고받고”는 겉으로는 같아 보이지만 그 의미는 완전히 달랐다. 냉정한 거래가 아닌 따뜻한 선물인 것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주었기 때문에 우리도 어쩔 수 없이 값을 지불해 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아들을 선물로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나의 마지막 수레까지도 드리는 것이다. Q. 보상을 얻어 가득 실어야 할 수레를 오히려 나를 태울 땔감으로 드릴 나의 수레는 무엇인가?
VI. 결론
올해는 신축년 소의 해다. 12년 전 이맘 때 표어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와 같이 2009”를 가지고 말씀을 나누었다. 솔로몬이 일천번제를 드림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 되어 산 것처럼, 벧세메스로 향하는 소와 같이 번제물로 드리는 헌신의 삶이 되어 주의 마음에 합당한 교우들이 되기를 바라고 축복한다. 고기와 우유도 주고, 노동력도 주고, 백신의 구원투수로 인류에게도 유익을 주었던 소와 같이 하나님 앞에 “뭐하나 버릴 것 없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번제물이 되기를 바란다.
나의 멍에는 무엇인가? 거룩한 부담을 지라. 나의 송아지는 무엇인가? 하나님을 눈속임 하지 말고 가장 귀한 것을 드려라. 어차피 다 아신다. 나의 수레는 무엇인가? 수레에 보상을 채우는 것이 아니요 나를 다 태우는 땔깜이 되는 마지막 자존심의 수레까지 드리라.
이제 1월 셋째주를 맞으면서 번제물로 드려진 소들과 같이 100% 온전한 헌신을 결단하는 우리 모든 지체들의 삶속에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어떻게 역사하실지 기대와 설레임으로 나아가는 이번 한 주간과 남은 한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