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시편 34 : 1-8
제목: 여호와를 맛보아 알지어다
일시: 2021. 2. 21(2005. 8. 14)
장소: 라이프찌히 교회
I. 열대과일 맛을 아는가? 노란 옐로망고는 잘 익어 달콤하고 부드러워 한국사람이 가장 좋아하는 열대과일이다. 파파야는 길쭉한 호박같이 못 생겨도 소화에 좋다. 패션푸르트는 십자가고난을 상징하는 과일이라서 패션(Passion)이며 혈압에 좋고 천식기관지염에 좋다고 한다. 열대과일의 여왕은 잭푸르트로 여러 과일향이 함께 나며 열매 하나의 무게가 40킬로까지 나간다. 열대과일의 왕은 두리안으로 냉장고에 넣어 시원하게 반쯤얼려 먹으면 최고 맛이다. 그러나 향이 강하여 호텔객실이나 비행기로 반입하지는 못한다. 저는 이러한 과일들을 맛보았기에 이름과 사진을 보는 순간 저의 뇌가 반응을 하고 저의 입 속에는 침이 돋는다. 맛을 모르면 반응을 할 수 없다. 수박장사들이 수박을 썰어놓고 한 조각씩 맛보게 하며, 포도장사는 포도알을 하나 먹어보라 권한다. 맛을 봐야 살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우리는 과일맛뿐 아니라 신앙생활의 맛도 보아야 한다. 하나님을 맛보아야 한다. 아무 맛도 없이 밋밋하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지 않는가? 여호와를 맛보는 사람은 그 맛에 산다.
II.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라고 오늘 시편 말씀을 기록한 다윗은 정말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본 사람이다. 다윗은 골리앗을 무너뜨리면서 일약 이스라엘의 스타로 떠올랐다. 그때 그는 살아계신 여호와 하나님을 짜릿하게 맛보았다. 그러나 그 맛을 충분히 음미하기도 전에 사람으로 인해 죽을 맛을 보게 된다. 골리앗을 쓰러뜨린 공으로 사울왕의 사위가 되었지만 권력에 눈이 먼 장인 사울왕을 피해 도망 다니는 신세가 되었기 때문이다. 다윗은 죽을 맛을 보고 있다. 그렇게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간 곳은 “아기스”왕이 다스리고 있는 불레셋 “가드”이다. 가드는 어떤 곳인가? 바로 다윗이 이스라엘정계 데뷔에 결정적인 희생제물의 역할을 했던 적장 골리앗의 조국 아닌가! 세월이 지났건만 아기스왕의 신하들이 다윗을 알아보고 왕에게 그의 정체를 알린다. “이는 그 땅의 왕 다윗이 아니니이까 무리가 춤추며 이 사람의 일을 노래하여 이르되 사울이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로다”의 주인공이라는 것이다(삼상21:11). 이렇게 자기의 정체가 드러난 다윗은 생명의 위협을 느껴 마치 미친 사람처럼 행동을 한다. 다윗이 “미친 체하고 대문짝에 그적거리며 침을 수염에 흘리매”(삼상21:13) 아기스왕은 다윗을 미친 자로 여겨 관심을 두지 않는다. 사울로 인해 죽을 맛을 본 다윗은 다시 가드왕 아기스로 인해 죽을 맛을 보게 된다.
가드에서 미치광이 행세를 하여 겨우 탈출에 성공한 다윗은 시편 34편의 말씀을 기록한다. 곤고하여 죽을 맛을 본 다윗은 송축하고 찬양할 만한 하나님의 맛을 소개하고 있다. 다윗이 맛본 하나님은 절망의 순간에 “간구”하매 “응답”하시는 분이었다. “두려움”이 엄습해 올 때 그 두려움에서 “건지시는” 분이었다. 주님만을 소망으로 “앙망”할 때 그 바라보는 얼굴을 “부끄럽게 하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는” 분이셨고, 수 많은 “환난” 속에서도 “구원”하시는 하나님이셨다. 다윗은 절체절명의 죽음의 맛을 보는 곳에서 하나님의 도우심과 구원하심을 따라 살맛을 보게 된 사람이다.
그러한 다윗이 이 시편을 읽는 우리에게 “여호와의 선하심”을 한번 맛보라고 권하고 있다. 우리는 다윗이 맛본 여호와의 맛을 맛보았는가 아니면 그 맛이 어떠하다는 것을 들었는가? 내가 “들어 알게 된” 주님과 내가 “직접 맛본” 주님은 다르다. “귀로만 듣던” 주님과 내가 “직접 경험한” 주님은 색상이 다르다. 남 얘기로 들을 때와 내 얘기로 들을 때는 스토리는 전혀 달라진다. 흔히 듣고 보던 일들도 내게 닥치게 되면 감정과 해석과 결정이 달라진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로 들으면 “슬프겠구나, 아프겠구나, 힘들겠구나, 속상하겠구나” 라고 쿨하게 생각하고 제법 그럴듯한 훈수도 두지만 막상 내게 닥치면 머리가 하얗게 되고 당황하여 파닉에 빠지게 된다. 우리는 맛을 본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직접 맛을 보아야 한다. 우리는 하나님에 “대해서” 알거나 그분 “주변만” 맴돌고 있지는 않는가? 하나 건너서 아는 것이 아니라 디렉트로 알아야 한다. 무대에 계신 주님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나와 일대일로 대화하시는 주님을 알아야 한다. 삭개오도 예수님에 대해 많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예수님 맛을 충분한 볼 수 없었다. 뽕나무위에서도 맛을 느낄수는 없었다. 예수님을 자신의 집으로 초대하여 함께 교제를 나눌 때 비로소 구원의 맛을 볼 수 있었다. 수가성 우물가의 여인도 처음에 물을 달라 하는 예수님을 그저 유대랍비로 보았을 뿐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과거를 아는 그를 선지자로 안다. 하지만 주님이 수가성에 머물러 함께 교제할 때 주님이 세상의 구주인 줄을 알게 되었다. 진짜 예수님의 참맛을 안 것이다.
우리는 다윗이 맛본 하나님을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라 맛보아 알아야 한다.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은 각자 자신들이 맛본 하나님의 맛이 있었을 것이다. 그 하나님의 맛을 나도 볼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갈 바를 알지 못할 때 약속의 땅을 인도하시던 바로 그런 아브라함의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뒤에는 애굽병사요 앞에는 홍해로 꽉 막혀 있을 때, 홍해를 갈라 길을 열어주신 모세의 하나님을 나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광야 같은 인생을 살아갈 때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인도하시는 광야의 하나님 맛볼 수 있어야 한다. 갈멜산에서 바알 아세라선지자들과 살아계신 신이 누구인지 기도로 한판 승부를 벌일 때 불로써 응답하신 엘리야의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죽으면 죽으리이다라고 고백한 에스더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결단의 순간에 두려움을 없게 하시고 담대케 하시는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다니엘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어 사자굴에 들어가 죽을 위기 속에서도 나를 구하시는 하나님을 맛볼 수 있어야 한다. 다윗은 우리에게 그 맛을 보라고 하고 있다.
다윗의 하나님이 그리 좋지만 그저 들어 좋은 하나님이 아니요 내가 직접 맛보는 하나님이 되어야 한다.
III. 여호와를 맛보아 알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을 “관념적”으로가 아니요 “실존적”으로 알게 된다는 것이다. 실존적으로 안다는 것은 내 삶의 현장에서 주님을 구체적으로 경험한다는 것이다. 내 삶의 현장에서 실존적으로 주님을 알 때 주님의 맛을 제대로 보는 것이다. 맛을 보는 것은 “이론”으로 아는 것이 아니다. 삶의 “현장”에서 직접 온몸으로 맛보는 것이다.
요즘 같은 코로나시대는 어디 가지를 못하니 온라인 영상을 많이 보게 된다. 먹고 싶은 동남아 음식을 즐겨보려고 먹방영상을 종종 본다. 그렇지만 대리만족이 되다가 맛이 나지를 않는다. 아시아 여러 나라들의 익숙한 길거리와 시장, 명소들을 유투브 영상으로 이리저리 돌아다녀본다. 블로거들과 유투버들이 그런 불만족한 사람들의 심리를 아는것 같다. 그러나 결국 맛이 안난다. 스포츠경기도 텔레비전을 통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굳이 티켓을 사서 차 대기도 어려운데(가끔 딱지도 떼고) 레드불 슈타디움에 가서 응원을 하고 관람을 하는 것은 그 현장분위기를 맛보기 위함이다. 이렇게 영상 온라인예배도 드리지만 시원하게 예배의 맛을 볼 수 없기에 어떻게든지 현장예배도 함께 드리는 것이다. 20%의 현장예배참석할 수 있음에 너무 마음 아파하는 목회자의 페북고백도 보인다.
하나님을 맛볼 때 “저기”만 계시는 분이 아니라 “여기 이곳”에도 계시는 분으로 경험해야 한다. 거룩하고 신성한 “하늘의 것”이 내 삶 현장의 용어로 해석될 때 분명하고 뚜렷하게 이해된다. 그것이 “실존적인” 신앙이다. “실존주의”는 하나님을 부정하고 내 삶에만 가치를 부여하는 철학이지만 “실존적 신앙”은 하늘의 가치를 내 삶의 현장을 통해서 깨닫고자 하는 것이다. 성경은 그런 실존적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태초부터 있는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자세히 보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우리 삶의 현장에서 느끼고 인식하는 그 카테고리 안에서만 존재하는 분은 아니다. 그러나 실존적 현장을 통해서 하나님의 깊은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피부로 느끼고 뼛속까지 경험하기 위해 애굽과 광야는 필수코스였다. 그곳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백성들에게 하나님의 맛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교육현장이었다. “애굽과 광야”라는 삶의 현장을 통해 유월절 구원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알게 되고, 홍해를 갈라 구원의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고, 마라의 쓴물을 달게 하시어 생명수를 주시는 하나님을 알게 된다, 애굽에서 가지고 나온 양식이 떨어졌을 때 하늘만나를 주시는 하나님을 맛보기도 했다.
우리 삶의 현장은 바로 그 광야와 같다. 이 광야에서 하나님을 맛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고 할 때는 들어서 아는 관념적인 사랑이다. 그러나 우리는 갈보리 십자가를 통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것을 역사 속에서 알게 되었다. 그런 하나님의 사랑을 우리 각자가 자신의 삶으로 끌고 들어와야 사랑의 하나님의 맛을 제대로 볼 수 있다. *주님은 “생명의 떡”이시다. 그저 하늘에서 내린 생명의 떡이라고 하면 피부로 느끼지 못할 것 같아 하나님은 이스라엘백성들에게 광야에서 만나를 주셨고, 주님은 벳새다 들판에서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시기도 했다. 거기까지가 아니다. 신광야의 만나와 벳새다 들판의 오병이어를 내 삶의 현장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때 비로소 제대로 맛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주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 했을 때는 그렇다고 여겨준다. 그러나 사람들이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보고 주님이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사실을 피부로 체험했다. 이제 그 부활의 주님을 우리 삶으로 모시고 오라. 그분이 계실 때 죽을 맛의 내 인생이 살맛이 되고, 슬프고 고통스런 내 삶이 위로를 얻고, 두려움이 변하여 담대함을 얻게 된다. 그런 주님을 맛볼 때 제대로 신앙생활의 맛을 보는 것이다.
다윗은 사울을 피하여 갔더니 가드왕 아기스를 만났다. 피할 곳 없는 곤고한 사람이다. 그때 그는 여호와께 피하는 것이 복이 됨을 알았다. 두려움과 환난 중에 있었지만 그러한 삶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이 구원하시는 분이요 피난처가 되시는 분임을 실존적으로 맛보아 알게 되었다. 다윗이 맛본 여호와의 선하심을 우리가 듣고 은혜받는 것에만 머물러서는 안 되고 다윗의 이야기가 나의 이야기 나의 간증이 되어야 한다.
IV. 이제 한주가 또 시작된다. 여호와의 선하심을 대충 들어서 알고 밋밋하게 간만 보고 살지 말고 꼭 직접 맛을 볼 수 있기 바란다. 물론 사울왕에게 쫓기는 일도 없고 아기스에게 피하는 일도 없으면 좋겠지만 혹 내 삶이 광야와 같이 어려움과 위기와 고통이 온다해도 이때에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기도를 맛보라. 기도에 대해 그리고 기도하자는 말은 많이 들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 기도시간을 마련하고 기도장소를 물색하고 하나님과의 대화의 시간을 귀히 여겨 나의 간구와 소망을 주님께 아뢰라. 기도 가운데 응답을 받고 기도의 맛을 보라. 기도하기 어려우면 새벽기도에 와서 하라. 새벽기도도 맛보아 알라. 저와 아내는 독일에 와 21년째 새벽기도를 한다. 둘이 맞장구치면서 공히 하는 말은 “좋다”가 아니라 “너무 좋다”이다.
말씀을 맛보라. 세상의 뉴스와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듣기를 사모하라. 성령께서 생각나게 하시고 마음에 딱 걸리게 하시는 말씀이 있다면 그 말씀 붙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때 말씀의 맛이 나게 된다. 말씀대로 한번 인내해보라. 결실은 열대과일보다 더욱 달콤한 맛이다. 말씀의 능력을 맛보라. 오른뺨을 때리면 왼쪽도 대어주라. 무슨 일이 일어 날른지 가만히 보라. 오리를 가자하면 10리를 가주라.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 벗어주라. 내게 손해를 입힌 사람에게 밥 한 그릇 대접해 보라. 나에게 잘못한 사람을 용서해주고 오히려 감사하다고 해 줘 보라. 내 마음을 아프게 한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다독거려주고 위로해 보라. 짜릿한 여호와의 맛을 보게 될 것이다.
이번 한 주간 밋밋하게 살지 말고 하나님 즐기라!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라! 우리는 맛을 모르고 음식을 먹고 있지는 않는가? 다윗이 맛보았던 하나님을 우리의 삶속에서 각자 맛을 보고 그 간증과 이야기 거리가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