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요한복음 17 : 1 - 8
제목: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일시: 2007. 7. 1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이게 웬 떡이여?”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루떡인지, 찹살떡인지, 계피떡인지, 바람떡인지, 가래떡인지, 떡의 종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떡의 영양성분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떡의 재료나 맛, 혹은 제조과정을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 떡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떡의 존재목적이 뭐냐는 것이다. 사실, “이게 웬 떡이여?”라고 했을 때는 단순한 탄성과 같은 표현이지만,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인 것이다. “이 떡의 존재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떡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떡의 재질과 영양소, 칼로리를 연구할 수 있다. 혹은 예술적으로 그것을 감상하고 노래할 수 있다. 그것을 먹어보고 달콤하고 쫄깃한 맛을 느껴보는 것은 쾌락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웬 떡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연구해서 알 일이 아니다. 왜 떡이 여기에 있고 이 떡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떡을 설계하고 만든 자가 그 떡의 존재목적을 설명할 때 비로소 그게 웬떡임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우리의 지혜와 생각대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계시가 없이는 그 목적을 알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그 떡을 만든 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웬 떡입니까?” 그때 떡을 만든 아내는 말을 한다. 영빈이 돐이잖아요! 아하 돌떡이구나! 우리 각 인생은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인종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할찌라도 그 떡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고는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질문은 왜 있냐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관할 때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II.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고별설교의 결론이다. 고별설교의 결론은 성부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있는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인생을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바쁘게 사는가? 우리는 인생의 테마를 제대로 알고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적으로 사는 인생이며 바르게 사는 것인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우리의 생각, 우리 삶의 수많은 계획들,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와 연관되어 있을 때 의미 있게 된다. 독일은 그래도 여유가 있어 보이고 낭만을 즐기고 철학을 하면서 사는 것 같은데, 한국을 한번 방문하면 정신이 없다. 참 열심히 산다. 바쁘게 움직인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뭐 그리 바쁘게 사는가싶다. 그런데 그 시스템 속에서는 정신없이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한 실존철학자의 인생표현이 생각난다.
예)어느 실존철학자는 본질과 핵심을 잃고 무의미한 분주로 사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 양지바른 산중에서 도토리 나무아래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도토리 하나가 그만 자고 있는 토끼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토끼는 엉겹결에 깨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튀어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끼가 달리니 이에 놀란 꿩이 후다닥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 꿩이 털이 뽑힐 정도로 후다닥거리면서 튀니 주위에 있던 겁 많은 노루도 뛰게 되고 이후에 숲속의 동물들인 늑대, 여우 호랑이 등 각색동물들이 뛰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뛰고 달리고 날고 움직였다. 숲속은 활기차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우리는 열심히 산다. 그렇지만 바쁘게 열심히 산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방향이 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 방향을 알지 못하고 뛰는 것은 열심히는 하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는 인생이다. 우리는 달리긴 달리되 결승테이프가 있는 골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달리기 전에 “주여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인생을 열심히 산다고만 최고가 아니다. 만든 자의 계획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갈 때 계획한 자는 기뻐하신다. 그분의 의도대로 따르게 될 때 그분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사는 삶은 의미가 없다. 내가 꾸미고 계획한대로 되었다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획에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 된다. 우리의 인생이 무조건 바쁘게만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가?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일을 추진하고 내가 노력하고 애를 쓰지는 않는가! 우리의 인생은 조물주를 제외해 놓고 나름대로의 계획만 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주님의 터 위에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기초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과 계획들은 주님께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맡기는 삶이다. 예수님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인생을 맡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계획하신 일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계획되어져야 하는 사람들이지, 계획할 사람들이 아니다.
III.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이었는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생명을 연결시키고 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인 랍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하신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5,26)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지금은 따라 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실 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는 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임을 말하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5000명을 먹이시고 당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고 계시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기록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장 12, 13절).
예수님의 하실 일은 바로 이 영생을 주시는 것이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었다. 영생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여기에 나오고 있다. 어떻게 제자들이 영생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가? 이제 예수님의 사역의 하이라이트인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요즘말로 “잘 나가는” 예수님으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때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기도 했다.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기적을 베푸니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얼마 있지 않으면 유대를 독립시킬 임금으로 생각했다. 제자들도 얼마나 뻐기면서 다녔겠는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아들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주님은 잘 나가는 주님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미션을 통한 것이었다. 이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전 말씀을 보라. 16장 33절의 말씀을 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비장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때가 왔다고 하신다. 그때는 바로 십자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 사역을 앞에 두고 고별설교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자체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감수해야 할 일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다. 그가 소경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시신경이 상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설명일 뿐이다. 그가 죄를 지어서도 아니다.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된 것이다. 주님도 눈을 뜨게 해 주려면 소경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IV.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의 결론임을 말씀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십자가임을 주님은 아셨다. 그분의 그 일이 바로 미션이다. 8절 말씀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었다는 말이 있다. 보내었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바로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이다. 보낸 자는 권세를 주고 일을 주고 사람과 계획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자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할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Missionary가 무엇인가?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 뒤에는 파송한 교회나 단체가 있다. 그들은 미션을 가지고 보내어진 것이다. 선교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계속 본국과 연결하여 소식을 전하고 듣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 안되면 고립된다. 미션너리는 미션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다. 미션너리는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깨닫는 자이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가진 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셔너리가 되어야 한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영어에서 직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몇가지 단어가 있다. 그 중 가장 수준이 낮고 천박하기까지 한 것은 Job이다. 이것은 돈을 추구하는 것이다.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짭을 가져야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돈을 위해서 노래를 하고 돈을 위해서 의사를 하고 돈을 위해서 판검사를 할 것인가? 또 다른 영어 단어는 occupation이다. 이것은 명예에 관계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우그스투스플라츠 할테스텔레에 매일 새벽에 신문을 파는 사람이 있다. 빌트라고 쓰여진 빨간 옷을 입고 언제나 그곳에서 신문을 판다. 새벽 때마다 보니 좀 쑥스럽기도 하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나는 그를 안다. 그런데 꼭 거기서 1분 가까이를 멈추어서야 한다.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척하면서 나를 보는데 무척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그곳에서 평생 신문을 팔 것인가? 돈은 안 되어도 자리가 좋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직업이라는 다른 마지막 단어는 vocation 이다. 마지막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천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직장이요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예)청소부가 청소를 할 때 생계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피곤하다. 좀 더 고귀한 생각을 할 수 없을까? 내가 깨끗한 거리를 만들고 환경을 만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일하게 하시는 건강을 주셨고 맡겨주신 일을 성실히 잘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음악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직장 밥벌이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그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만 있다면 이라는 데까지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나의 악기와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이라는 뿌리를 박아야 한다. 이럴 때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식당의 요리사는 어떠한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수준을 높이라. 맛있고 평안하고 이들이 나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라.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다 먹는 것을 요리사는 좋아할 것이다. 나아가 이 일을 통해 주님 영광 받으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주님 안에서 인정받는 일이다.
치과의사가 되어 일을 한다? 돈을 위해 일하면 평생 냄새나는 남의 입맛보고 있으면 얼마나 괴롭냐? 고통을 없앴다고 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라.
목사를 보라. 돈을 벌자고? 인기를 얻자고? 교회를 기업체처럼 크게 하자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삯군목사가 되고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치계로 나가게 된다. 더 고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참으로 축복되게 살게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일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IV. 이 한 주간을 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도록 살라.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보낸 자의 이름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통해 아버지를 알게 해야 한다. 비록 내가 가는 길이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이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면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고 높이 되게 하셔도 내가 중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짤라 먹으면 안 된다. 영광을 킵하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영광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광은 우리에게 합당치 않는 것이다.
예)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러한 노래를 나의 생일날 불러준다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고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주여 나를 영화롭게 하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제목: 나를 영화롭게 하소서
일시: 2007. 7. 1
장소: 라이프찌히 한인교회
I. “이게 웬 떡이여?” 라고 말할 때, 그것은 시루떡인지, 찹살떡인지, 계피떡인지, 바람떡인지, 가래떡인지, 떡의 종류에 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떡의 영양성분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니다. 당연히 떡의 재료나 맛, 혹은 제조과정을 말해달라는 것이 아니다. 그 떡의 의미가 무엇이냐는 것이다. 이 떡의 존재목적이 뭐냐는 것이다. 사실, “이게 웬 떡이여?”라고 했을 때는 단순한 탄성과 같은 표현이지만, 굉장히 철학적인 질문인 것이다. “이 떡의 존재목적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이다. 우리는 떡에 대해 연구할 수 있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떡의 재질과 영양소, 칼로리를 연구할 수 있다. 혹은 예술적으로 그것을 감상하고 노래할 수 있다. 그것을 먹어보고 달콤하고 쫄깃한 맛을 느껴보는 것은 쾌락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게 웬 떡인지는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연구해서 알 일이 아니다. 왜 떡이 여기에 있고 이 떡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아는 것은 계시를 통해서 알게 되는 것이다. 그 떡을 설계하고 만든 자가 그 떡의 존재목적을 설명할 때 비로소 그게 웬떡임이 설명이 되는 것이다. 그 목적을 우리의 지혜와 생각대로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나 계시가 없이는 그 목적을 알지 못한다. 결국 우리는 그 떡을 만든 자에게 물어보아야 할 것이다. “웬 떡입니까?” 그때 떡을 만든 아내는 말을 한다. 영빈이 돐이잖아요! 아하 돌떡이구나! 우리 각 인생은 다양한 각도에서 설명될 수 있다. 인간은 생물학적으로 인종학적으로 사회학적으로 설명될 수 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물음은 왜 존재하는가하는 것이다. 다른 것에 대해 알지 못한다 할찌라도 그 떡이 왜 만들어졌는지를 알고는 먹어야 하는 것처럼, 우리가 물어야 할 가장 중요한 인생의 질문은 왜 있냐하는 것이다. 이 질문은 우리를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과 연관할 때만 답을 구할 수 있는 것이다.
II. 오늘 말씀은 예수님이 이 땅에 계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마지막 고별설교의 결론이다. 고별설교의 결론은 성부하나님을 영화롭게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땅에 있는 목적을 분명히 알고 계셨다. 그것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일이었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었다. 우리는 인생을 가만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이렇게 열심히 사는가? 무엇으로 인해 그렇게 바쁘게 사는가? 우리는 인생의 테마를 제대로 알고 사는가? 어떻게 사는 것이 성공적으로 사는 인생이며 바르게 사는 것인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 우리의 생각, 우리 삶의 수많은 계획들, 추구하고 있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지와 연관되어 있을 때 의미 있게 된다. 독일은 그래도 여유가 있어 보이고 낭만을 즐기고 철학을 하면서 사는 것 같은데, 한국을 한번 방문하면 정신이 없다. 참 열심히 산다. 바쁘게 움직인다. 사람들을 볼 때마다 뭐 그리 바쁘게 사는가싶다. 그런데 그 시스템 속에서는 정신없이 사는 것이다. 사람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 한 실존철학자의 인생표현이 생각난다.
예)어느 실존철학자는 본질과 핵심을 잃고 무의미한 분주로 사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어느 양지바른 산중에서 도토리 나무아래 토끼가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데 마침 도토리 하나가 그만 자고 있는 토끼의 콧잔등에 떨어졌다. 깜짝 놀란 토끼는 엉겹결에 깨어서 무슨 일인가 싶어 후다닥 튀어 일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있어 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토끼가 달리니 이에 놀란 꿩이 후다닥거리고 하늘로 날아갔다. 꿩이 털이 뽑힐 정도로 후다닥거리면서 튀니 주위에 있던 겁 많은 노루도 뛰게 되고 이후에 숲속의 동물들인 늑대, 여우 호랑이 등 각색동물들이 뛰기 시작했다. 다들 열심히 뛰고 달리고 날고 움직였다. 숲속은 활기차고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왜 그런지도 모르고...
우리는 열심히 산다. 그렇지만 바쁘게 열심히 산다고 잘 사는 것은 아니다. 방향이 바로 되어 있어야 한다. 방향을 알지 못하고 뛰는 것은 열심히는 하지만, 아무런 결실이 없는 인생이다. 우리는 달리긴 달리되 결승테이프가 있는 골로 방향을 잡아야 한다. 달리기 전에 “주여 이것이 당신의 뜻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인생을 열심히 산다고만 최고가 아니다. 만든 자의 계획에 따라 살아야 한다. 그 계획에 따라 살아갈 때 계획한 자는 기뻐하신다. 그분의 의도대로 따르게 될 때 그분은 영광을 받으신다. 하나님께 맡기지 않고 사는 삶은 의미가 없다. 내가 꾸미고 계획한대로 되었다한들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의 삶을 평가하시고 우리를 이끄시는 분이 여호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주님의 계획에 따라서 주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 때 우리의 삶은 성공적인 삶이 된다. 우리의 인생이 무조건 바쁘게만 살아가는 인생은 아닌가? 내가 계획을 세우고 내가 일을 추진하고 내가 노력하고 애를 쓰지는 않는가! 우리의 인생은 조물주를 제외해 놓고 나름대로의 계획만 세우고 있지는 않는가? 우리는 주님의 터 위에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삶은 우리 나름대로 살아가는 삶이 아니라, 주님을 기초로 살아가야 한다. 우리의 하는 모든 일들과 계획들은 주님께 뿌리를 박고 살아야 한다. 이것이 바로 맡기는 삶이다. 예수님은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계획에 자신의 인생을 맡김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를 향하여 계획하신 일을 하신 것이다. 우리는 계획되어져야 하는 사람들이지, 계획할 사람들이 아니다.
III. 예수님이 하실 일이 무엇이었는가? 택함을 받은 자들에게 영생을 주는 일이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과 생명을 연결시키고 있다.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관원인 랍비 니고데모가 예수님을 찾아왔을 때 주님이 하신 말씀이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고 하신다. 주님이 사랑하시는 형제 나사로가 죽었을 때 그의 누이 마르다에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11: 25,26) 라고 말씀하신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게 될 것을 암시하면서 내가 가는 곳에 너희가 지금은 따라 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말씀하실 때 근심하는 제자들에게 주님은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14:6)라고 말씀하신다. 요한복음 4장에서 수가성 여인을 만나서는 그가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영생수임을 말하고 요한복음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표적으로 5000명을 먹이시고 당신이 생명의 떡임을 말씀하고 계시다. 요한은 그의 서신서에서도 이렇게 기록한다.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한일서 5장 12, 13절).
예수님의 하실 일은 바로 이 영생을 주시는 것이었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요17:3)이었다. 영생에 대한 분명한 정의가 여기에 나오고 있다. 어떻게 제자들이 영생을 얻게 되고 예수님을 알게 되는가? 이제 예수님의 사역의 하이라이트인 십자가를 통해서이다. 이전에 제자들은 예수님을 어떻게 알고 있었는가? 요즘말로 “잘 나가는” 예수님으로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한때 그를 왕으로 삼고자 하기도 했다. 병자를 고치고 배고픈 자를 먹이고 기적을 베푸니 그를 따르는 무리가 많았다. 얼마 있지 않으면 유대를 독립시킬 임금으로 생각했다. 제자들도 얼마나 뻐기면서 다녔겠는가?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는 예수님께 와서 자기의 아들들을 하나는 주의 우편에 하나는 주의 좌편에 앉혀 달라고 하지 않았는가! 제자들이 지금까지 알고 있던 주님은 잘 나가는 주님이었다.
하지만 예수님이 성부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자신을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바로 십자가라는 미션을 통한 것이었다. 이 십자가사건을 통해서 제자들은 주님을 더욱 확실하게 알게 될 것이다. 오늘 본문의 이전 말씀을 보라. 16장 33절의 말씀을 보라.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 비장하게 말씀하시고 계시다. 이 말씀을 하시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면서 때가 왔다고 하신다. 그때는 바로 십자가 죽음을 말하는 것이다. 그가 십자가 사역을 앞에 두고 고별설교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시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일이 잘 되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 하지만,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도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난자체는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그것을 통해서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실 것으로 생각하면 그것도 감수해야 할 일이다. 요한복음 9장에서도 날 때부터 소경된 사람이 있다. 그가 소경이 된 이유가 무엇인가? 시신경이 상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설명일 뿐이다. 그가 죄를 지어서도 아니다. 재수가 없어서도 아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소경이 된 것이다. 주님도 눈을 뜨게 해 주려면 소경이라는 재료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IV.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 이 땅에서의 삶의 결론임을 말씀하시고 영화롭게 하는 방법이 십자가임을 주님은 아셨다. 그분의 그 일이 바로 미션이다. 8절 말씀에 보면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었다는 말이 있다. 보내었다라고 하는 표현에서 우리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 사이에는 중요한 관계성을 알 수 있다. 하나님과 예수님은 바로 보낸 자와 보냄을 받은 자의 관계이다. 보낸 자는 권세를 주고 일을 주고 사람과 계획을 주었다. 그는 자신이 보냄을 받은 자임을 알았기에 자신이 할일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Missionary가 무엇인가? 보냄을 받은 자들이다. 그들 뒤에는 파송한 교회나 단체가 있다. 그들은 미션을 가지고 보내어진 것이다. 선교사가 해야 할 중요한 일은 계속 본국과 연결하여 소식을 전하고 듣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잘 안되면 고립된다. 미션너리는 미션을 가지고 일을 하는 사람이다. 미션너리는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보냄을 받은 자임을 깨닫는 자이다. 따라서 자기의 생각과 계획을 가진 자가 아니라, 특별한 사명을 이루기 위해 일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미셔너리가 되어야 한다. 특별한 목적을 가진 자로서 살아야 한다. 영어에서 직업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몇가지 단어가 있다. 그 중 가장 수준이 낮고 천박하기까지 한 것은 Job이다. 이것은 돈을 추구하는 것이다. 직업을 가지려고 하는 가장 기본적인 이유는 돈을 벌려고 하는 것이다. 짭을 가져야 되겠지. 하지만 여기서 머물러 있으면 안된다. 돈을 위해서 노래를 하고 돈을 위해서 의사를 하고 돈을 위해서 판검사를 할 것인가? 또 다른 영어 단어는 occupation이다. 이것은 명예에 관계된 것이다. 내가 무엇을 담당하고 있는가? 아우그스투스플라츠 할테스텔레에 매일 새벽에 신문을 파는 사람이 있다. 빌트라고 쓰여진 빨간 옷을 입고 언제나 그곳에서 신문을 판다. 새벽 때마다 보니 좀 쑥스럽기도 하다. 저 사람은 나를 모른다. 나는 그를 안다. 그런데 꼭 거기서 1분 가까이를 멈추어서야 한다. 눈을 다른 데로 돌리는 척하면서 나를 보는데 무척 궁금해 하는 것 같다. 그곳에서 평생 신문을 팔 것인가? 돈은 안 되어도 자리가 좋은 것이 있을 수 있다. 직업이라는 다른 마지막 단어는 vocation 이다. 마지막 것은 돈도 명예도 아니고 천직이라는 것이다. 하늘이 내려준 직장이요 직업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소명의식을 가지고 하는 것이다.
예)청소부가 청소를 할 때 생계의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피곤하다. 좀 더 고귀한 생각을 할 수 없을까? 내가 깨끗한 거리를 만들고 환경을 만들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쾌적하게 하루를 시작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여야 한다. 나아가 우리의 뿌리를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일하게 하시는 건강을 주셨고 맡겨주신 일을 성실히 잘 감당하겠습니다 라고 한다면 얼마나 아름답겠는가! 음악하는 사람이라면 좋은 직장 밥벌이만으로 생각해서는 안되고 많은 이들에게 좋은 음악을 들려주고 그들의 심금을 울려줄 수만 있다면 이라는 데까지 수준이 올라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의 뿌리를 나의 악기와 소리를 통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있다면 이라는 뿌리를 박아야 한다. 이럴 때 아무리 바쁘게 살아도 우리의 삶은 의미가 있는 것이다. 식당의 요리사는 어떠한가?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보다 수준을 높이라. 맛있고 평안하고 이들이 나의 음식을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를 생각하라. 음식점에 가서 밥을 먹을 때 다 먹는 것을 요리사는 좋아할 것이다. 나아가 이 일을 통해 주님 영광 받으소서 라고 한다면 그것은 참으로 주님 안에서 인정받는 일이다.
치과의사가 되어 일을 한다? 돈을 위해 일하면 평생 냄새나는 남의 입맛보고 있으면 얼마나 괴롭냐? 고통을 없앴다고 하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살라.
목사를 보라. 돈을 벌자고? 인기를 얻자고? 교회를 기업체처럼 크게 하자고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사람은 삯군목사가 되고 자기의 본분을 망각하고 정치계로 나가게 된다. 더 고귀한 생각을 해야 한다. 우리의 형제, 자매들이 참으로 축복되게 살게 그들을 돌보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이 모든 일들을 주님의 영광을 위해 하는 일이 되어야 한다.
IV. 이 한 주간을 살면서 아버지의 이름을 드러내라. 하나님께서 영화롭게 되도록 살라. 보냄을 받은 자로서 보낸 자의 이름을 나타내어야 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나를 통해 아버지를 알게 해야 한다. 비록 내가 가는 길이 가시밭길 십자가의 길이라도 하나님이 영광을 받으시는 길이면 가겠습니다라고 고백해야 한다. 또한 하나님께서 나를 영화롭게 하고 높이 되게 하셔도 내가 중간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짤라 먹으면 안 된다. 영광을 킵하고 있으면 안 된다. 우리는 이 영광에 합당한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광은 우리에게 합당치 않는 것이다.
예)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이러한 노래를 나의 생일날 불러준다면 정말 몸둘 바를 모르겠다. 익숙치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만이 영광을 받으시기에 합당한 분이시다.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드려야 하고 삶에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라”
주여 나를 영화롭게 하사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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