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실재 40연
기도
실재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실재에 대한 생각이 일어날 수 있습니까?
실재는 생각이 없는 가슴속에 있습니다.
그렇다면 가슴이라는 그러한 실재를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실재를 아는 것은 단순히 가슴 속에 있는 것일 뿐입니다.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들이
죽음도 없고 태어남도 없는 지고한 신의 발아래 피난처를 찾을 때,
그들의 자아와 집착들은 죽습니다.
이제 죽음이 없으므로 그들은 더 이상 죽음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본문
1.
우리가 세상을 지각하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공통된 근원을 인정해야 하지만,
다수처럼 보이는 힘도 인정해야 합니다.
이름들과 형태들의 그림, 구경꾼, 화면, 화면을 밝히는 빛,
이 모든 것들은 진정으로 그분입니다.
2.
모든 신조creed는 개인, 신, 세상이라는 세 가지 실체를 기반으로 합니다.
'하나는 셋이 된다.', '항상 셋은 하나다.'라는 말은
자아가 지속될 때만 말합니다.
자아를 잃고 나 안에 머무는 것이 최고의 상태입니다.
3.
'세상은 진짜이다!' -'아니, 그것은 거짓된 모습이다.’
‘세상은 마음이다’ - '아니, 그렇지 않다.’ ‘세상은 즐겁다’ - '그렇지 않다'.
그런 말들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세상을 내버려 두고 나를 아는 것,
하나와 둘이라는 모든 생각들을 넘어서는 것,
이 무아의 상태가 모두의 공통 목표입니다.
4.
우리에게 형상이 있다면 세상과 신도 마찬가지로 형상이 있습니다.
우리에게 형상이 없다면 세상과 신의 형상은 누구에 의해 어떻게 볼 수 있습니까?
눈 없이, 시력이나 광경이 있을 수 있습니까?
진정한 눈인 나는 무한합니다.
5.
신체는 다섯 덮개들로 되어 있습니다.
신체라는 말 안에 다섯이 모두 포함됩니다.
신체가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신체가 없는 사람이 세상을 본 적이 있습니까?
6.
세상은 다섯 감각의 지각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그 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그 감각 지각들은 다섯 감각들에 의해 대상으로 느껴집니다.
감각들을 통해 마음이 오로지 세상을 지각합니다.
세상이 마음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7.
우리 앞에 있는 세상이 마음과 더불어 생겨났다 가라앉는다 할지라도,
세상은 마음의 빛을 받아서 빛납니다.
세상과 마음이라는 둘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것처럼,
나타나지도 사라지지도 않고 빛나는 완벽함이 바로 실재입니다.
8.
우리가 그것을 어떤 이름들과 형상들로 숭배한다 해도,
그 숭배는 우리를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절대에 대한 지식에 이르게 합니다.
그러나 절대 안에서 진정한 나를 보는 것, 그것 안으로 가라앉아 그것과 하나가 되는 것,
이것이 진리에 대한 참된 지식입니다.
9.
‘둘’과 ‘셋’은
하나 즉 자아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만약 누가 자신의 가슴 안에서
‘이 자아는 무엇인가?’라고 묻고 그것을 찾으면,
(둘들과 셋들은) 사라집니다.
이것을 발견한 사람들만이 진리를 압니다.
그들은 결코 당황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무지가 없다면 지식이 없습니다.
지식이 없다면 무지 또한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지식은 누구의 것인가?, 이 무지는 누구의 것인가?’라고 물어서
그래서 원초적 나를 아는 것, 이것이야말로 지식입니다.
11.
아는 나를 모르면서
모든 대상들을 아는 것은 지식이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무지일 뿐입니다.
지식과 무지의 바탕인 나를 알면,
지식과 무지 둘 다는 사라집니다.
12.
참된 지식은 대상들에 대한 지식도 무지도 없습니다.
대상에 대한 지식은 진정한 지식이 아닙니다.
나는 알아야 할 어떤 것도 없고, 알 어떤 것도 없이 스스로 빛나고 있습니다.
나는 곧 지식입니다. 그것은 무지가 아닙니다.
13.
자각인 나, 그것만이 참됩니다.
다양한 지식들은 무지입니다.
거짓인 무지조차도 나와는 별개로 존재할 수 없습니다.
많은 금장식들이 가짜이지만, 그것들은 진짜인 금과 별개로는 존재할 수 없습니다.
14
‘너’와 ‘그’, 이런 것들은 ‘나’가 나타날 때에 나타납니다.
그러나 ‘나’의 성품을 찾아 자아가 파괴되면
‘너’와 ‘그’는 끝이 납니다.
그때 하나로서 빛나는 것이 진정한 나입니다.
15.
과거와 미래는 매일 경험하는 현재에 의존하고 있습니다.
그것들이 나타날 때 그때 그것들 역시 현재였습니다. 현재만이 존재합니다.
지금이라는 시간의 진리를 모르면서 과거와 미래를 알려고 하는 것은
하나라는 숫자를 모르면서 숫자를 세려는 것과 같습니다.
16.
우리가 없으면 시간도 공간도 없습니다.
만약 우리가 단지 신체일 뿐이라면, 우리는 시간과 공간에 갇힙니다.
하지만 우리가 신체입니까? 지금, 그때 그리고 언제나, 여기, 지금 그리고 어디에서나,
우리는 동일합니다. 우리는 공간을 초월하여 존재합니다.
17.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과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
신체는 ‘나’입니다. 하지만 나를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몸에 한정되지만,
신체 안에 있는 나를 아는 사람들에게는 ‘나’는 한계 없이 빛납니다.
이것이 그들 사이의 차이점입니다.
18.
모르는 사람들에게나 아는 사람들에게나 세상은 실재입니다.
그러나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실재가 세상에 의해 한정되는 반면,
아는 사람들에게는 실재는 세상의 바탕으로서 형상 없이 빛납니다.
이것이 그들 간의 차이입니다.
19.
‘자유의지가 우세한가, 아니면 운명이 우세한가?’라는 논쟁은
이 둘의 근원을 모르는 사람들만이 합니다.
자유의지와 운명의 공통 근원인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 둘 다 너머로 가, 그 둘에게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입니다.
20.
신을 보면서 나를 보지 못하는 것은
마음의 투사만을 보는 것입니다.
나를 보는 이만이 신을 본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자아를 잃어버리고 나를 본 사람은 다름 아닌 신입니다.
21.
경전에서 ‘나를 보는 것’과 ‘신을 보는 것’에 대해 이야기할 때,
그것들이 무슨 뜻입니까? 나를 어떻게 봅니까?
나는 둘이 없는 하나이기에 그것을 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어떻게 신을 볼 수 있습니까?
신을 본다는 것은 신에 의해 자신이 소멸되는 것입니다.
22.
신은 마음 안에 빛나면서 모든 것을 볼 수 있도록 마음에게 빛을 줍니다.
마음의 제어로 마음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 안에 있는 신을 보는 대신에,
마음으로 신을 어떻게 생각할 수 있습니까?
이 점을 생각해 보십시오.
23.
신체는 자각이 없기에,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누구도 ‘잠이 들면 나는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나’가 일어난 후, 모든 것들이 일어납니다.
예리한 마음으로 이 ‘나’가 일어나는 곳을 탐구해보면 ‘나’는 사라질 것입니다.
24.
물질인 신체는 ‘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영원한 자각은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습니다.
둘 사이에서 신체에 묶여 ‘나’라는 생각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물질과 자각의 매듭입니다. 이것은 속박입니다.
이것이 지바이고, 미세한 몸이고 자아입니다.
이것이 삼사라입니다. 이것이 마음입니다.
25.
한 형상을 취하면서 그것은 일어나고, 한 형상을 취하면서 그것은 머무르고,
형상을 취해 형상을 먹으면서 그것은 자랍니다.
한 형상을 떠나면 그것은 다른 형상을 붙듭니다.
찾으면, 그것은 달아납니다. 이런 것이 바로 그 자체로는 아무런 형상이 없는 자아라는 유령입니다.
26.
자아가 일어나면, 모든 것들은 자아와 함께 일어납니다.
자아가 일어나지 않으면, 어떤 것도 없습니다.
이처럼 자아가 모든 것이기에,
‘이것은 무엇인가?’라고 물으면, 모든 것들이 소멸됩니다.
27.
‘나’가 일어나지 않을 때, 우리는 ‘그것’입니다.
‘나’가 일어나는 곳을 찾지 않으면
어떻게 ‘나’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인 자아 소멸을 성취할 수 있겠습니까?
자아 소멸을 성취하지 않으면 어떻게 나가 ‘그것’인, 자신의 참된 상태 안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28.
마치 물에 빠트린 물건을 찾기 위해 깊이 잠수하는 사람처럼,
말과 호흡을 통제하고
자신 안으로 깊이 들어가서,
야심 찬 자아가 솟아나는 곳을 찾아내야 합니다.
29.
‘나’에 대한 말을 모두 그만두고, 내면으로 뛰어드는 마음으로
‘나’라는 생각이 솟아나는 곳을 찾으십시오. 이것이 지식의 길입니다.
대신 “나는 이것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찾는데 도움은 되겠지만, 찾는 그 자체는 아닙니다.
30.
마음이 ‘나는 누구인가?’를 찾기 위해 내면으로 향하여 가슴과 하나가 되면,
‘나’는 부끄러워 고개를 숙이고 다른 ‘나’가 나타납니다.
그것이 ‘나-나’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자아는 아닙니다.
그것은 실재요, 완전이요, 나의 본질substance입니다.
31
자아의 소멸로 일어나는 나의 희열이 된 사람에게,
무슨 할 일이 있겠습니까?
그는 이 나 외에는 그 어떤 것도 알지 못합니다.
그의 상태가 어떤 것인지 어떻게 상상이나 할 수 있겠습니까?
32.
베다들에서는 분명히 ‘그대는 그것이다(탓트밤아시)’ 라고 선언합니다.
나를 찾아서 그 안에 있지 않고
‘나는 이것이 아니라 그것이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강함이 부족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나로서 늘 있기 때문입니다.
33.
‘나는 나 자신을 모른다.’라거나 ‘나는 나 자신을 알았다’라고 말하는 것은
웃음을 자아냅니다. 무슨 말입니까?
다른 것에 의해 알려지는 나, 즉 두 개의 나가 있어서 하나의 나가 다른 나를 안다는 말입니까?
오직 하나로 있는 나가 있습니다. 이것은 진리를 깨달은 모든 이들의 체험입니다.
34.
자연스럽고 참된 실재는 모두의 가슴 안에 늘 있습니다.
거기서 그것을 깨달아 그것 안에 있지 않고
‘그것은 있다’, ‘그것은 없다’, ‘그것은 형상이 있다’, ‘그것은 형상이 없다’,
‘그것은 하나다’, ‘그것은 둘이다’, ‘그것은 어느 것도 아니다.’라고 다투는 것, 이것은 마야의 유희입니다.
35.
항상 있는 실재를 찾아내어 그 안에 있는 것이 진정한 성취(싯디)입니다.
다른 모든 성취들은 꿈속에서 즐기는 것과 같습니다.
잠에서 깨어나면, 잠에 있던 것들이 있습니까?
비실재를 벗어버리고 진리의 상태에 머무는 이들이 미혹되겠습니까?
36.
만약 우리가 자신을 신체라고 생각한다면,
‘아니다. 나는 그것이다(아함 브람아스미)’라고 말하는 것은 그것으로 있는데 도움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항상 그것으로 있는데, 왜 우리는 ‘나는 그것이다.’라고 늘 생각해야 합니까?
‘나는 사람이다.’라고 늘 생각해야 할 필요가 어디에 있습니까?
37.
‘찾는 중에는 이원, 찾으면 일원’이라는 이 신념doctrine도 잘못된 것입니다.
열심히 자신을 찾을 때나, 나중에 자신을 발견했을 때나,
이야기 속의 열 번째 사람은 열 번째 사람이었을 뿐
다른 누구도 아니었습니다.
38.
만약 자신을 행위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면 그는 행위의 열매들을 거두어 들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행위를 하는 사람인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어 나를 깨달으면,
행위자라는 느낌은 사라집니다. 세 가지 카르마들은 없어집니다.
이러한 해방은 영원합니다.
39.
속박과 자유에 대한 생각은 ‘나는 속박되어 있다.’라고 느끼는 동안에만 지속됩니다.
‘속박되어 있는 자인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으면,
영원하며 늘 자유로운 나가 남습니다.
속박에 대한 생각이 사라지면,
그것과 더불어 자유에 대한 생각도 사라집니다.
40.
만약 ‘형상이 있는 것, 형상이 없는 것, 형상이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 것,
이 셋 중 어느 것이 최종적인 해방인가?’라고 묻는다면
“해방은 ‘형상이 있는가, 없는가,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한가’라고 묻는
자아의 소멸이다.”라고 나는 말합니다.
슈리 라마나가 그의 은총으로 지어서
칼리벤바로 연결한 이 작품
울라두 나르파두는 실재를 드러내는 빛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