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 제가 이 몸이 아니라는 것이 정말 사실입니까?
라: 그렇습니다.
헌: 만약 그렇다면, 몸이 어떤 손상을 입을 때 왜 제가 고통을 느낍니까? 가령 말하자면, 타고 있는 석탄 조각이 제 근처의 누군가에게 떨어질 때, 저는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고 그 사람만 고통을 느낍니다. 마찬가지로 가시가 제 발을 찌르면, 저만 고통을 느끼고 제 옆에서 걷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라: 몸이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소리칩니까? 당신은 자신을 당신의 몸과 연관시키고 그것에 대해 당신의 “나”라고 말합니다. 몸은 오직 마음에만 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몸이 겪는 모든 고통은 몸 그 자체만큼이나 상상에 불과한 것입니다. 몸은 아무것도 알
수 없습니다. 그것은 지각이 없는 살과 뼈입니다. 고통에 대한 개념은 오직 우리 자신의 상상으로부터 일어납니다. 따라서 깊은 잠에서는 마음이 활동적이지 않기 때문에 고통이 없습니다.
헌: 제 손에 금속 전선 조각이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것을 잘라도 그 금속은 지각이 없기 때문에 잘리고 있다는 것을 의식할 수 없습니다. 반면, 살아있는 몸이 긁히기만 해도, 그것은 극도의 고통으로 폭발합니다. 그러므로 바가반은 어떤 의미에서 몸이 지각이 없다고 하시는 겁니까?
라: 사실입니다. 몸은 상처를 입으면 물리적 고통의 자극을 경험합니다. 하지만 왜 그 사실이 마음속에서 “나는 고통을 느끼고 있다.”라는 생각을 만들어내야 합니까? 물리적 고통은 다음의 이유 때문에 마음의 고통을 만들어냅니다. 마음은 그 자신을 몸이라고 가정하고 몸의 정체성(“나는 몸이다”라는 확신)을 자신에게 부과하는데, 이는 그런 잘못된 자기-객관화가 없으면 그것은 살아남거나 번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몸이다”라는 생각을 버리면, 고통을 포함해서 몸이 겪는 모든 것은 오직 희열일 뿐입니다.
헌: 하지만 저는 몸이 상처를 입으면 고통을 자각합니다!
라: 몸이 상처를 입을 때, 깨우치지 못한 사람의 경우 다음과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그의 몸은 물리적 고통의 자극을 느끼고, 그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나는 상처를 입었다.”라는 생각을 드러내어 그가 마음을 흔들리게 만듭니다. 그런 생각이 나타나는 원인은 “나는 몸이다”라는 근본적인 그릇된 생각입니다.
몸을 나로 받아들이는 잘못된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에게 있어서, 몸의 부상은 그의 축복받은 지고의 평화 상태에 아무런 방해가 되지 않습니다. 각각은 실제로 나이지만, 자신을 터무니없이 비나로 혼동하고, 그래서 그런 데 트마붓디(자신을 몸과 동일시하는 지성)로 인해 불필요하게 고통받습니다.
헌: 그 질문이 아직 대답되지 않은 채로 있어서 저는 끈질기게 계속 질문합니다. 만약 슈리 바가반이 가정하신 것처럼 몸이 지각이 없다면 어떻게 그것이 고통을 느낄 수 있고 도대체 왜 고통을 느낍니까?
라: “고통”이라는 말은 마음속에 그런 자극에 대한 편견이 있기 때문에 사용되는 것입니다.
“마음”이라는 용어로 알려진 객관화의 능력(세상을 객관적으로 실제인 개체라고 간주하는 마음의 습관)과 동일시(자신을 지적인 정체성에 의해 구성되고, 형태를 차지하며, 객관적으로 실제인 세계를 인식하는 주체라고 간주하는 마음의 습관)가 순수한 주관적 의식 속에서 용해되고 사라질 때, 그렇게 함으로써 그것과 하나가 되어 그것의 편견 또한 사라집니다.
마음이 죽은 갸니의 경우, 고통과 쾌락은 대등한 위치에 있는 물리적 자극입니다. 그는 어떤 것은 좋아하고 다른 것은 싫어하지 않습니다. 또한 그는 어떤 것은 싫어하고 다른 것은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마음이 사라지면 어떤 감각이 고통으로 간주되고 또 어떤 것이 쾌락으로 간주될지에 대한 기준이 남지 않게 됩니다.
헌: 슈리 바가반은 진심으로, 벌레가 그의 다리를 물 때와 누군가 다리를 마사지할 때 따라오는 감각의 차이를 그가 구별할 수 없다고 말씀하시는 겁니까?
라: 그것들이 다른 감각이라는 것은 자명합니다. 하나는 혐오스럽고 다른 것은 호의적이라는 것은 단지 마음의 판단일 뿐이고 갸니는 그것으로부터 아주 자유롭습니다. 그 자신은 고통이나 쾌락을 찾지 않지 않고, 그에게 닥치는 것을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입니다. 갸나에는 자동
적인 수용만 남습니다.
헌: 갸니에게 그것은 다릅니다. 보통 사람은 어떻습니까?
라: 당신도 갸니입니다. 오직 당신이 다르게 생각할 뿐입니다!
헌: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라: 안으로 향해서 조용히 마음이 나의 존재함the Beingness of the Self 안으로 뛰어들어 녹아들 수 있도록 하는 선택권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가능합니다. 그것은 선택된 소수의 절대적 지반fiefdom이 아닙니다. 모두가 바로 오직 나입니다.
헌: 그것은 저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저는 스스로 그것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라: 세상에 대한 애착이 존재하는 한 마음은 성공적으로 안으로 향해질 수 없습니다.
헌: 세상에 대한 애착을 어떻게 없앨 수 있습니까?
라: 마음을 안으로 향하게 함으로써 입니다.
헌: 정말로 스승님, 당신이 하시는 말씀은 얼마나 비현실적인지!
라: 나의 존재를 고수하거나 노력을 하지 않고 의지 없이 유지되는 그것의 원래 순수한 주관적 의식 상태에 마음을 유지할수록, 마음의 성향과 세상에 대한 애착은 시듭니다. 마음의 성향과 세상에 대한 애착이 더 줄어들수록, 노력을 하지 않고 의지 없이 유지되는 그것의 원래 순수한 주관적 의식 상태에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더 쉬워집니다.
헌: 어느 것이 먼저입니까?
라: 사다카는 객관적 세계의 덧없는 성품과 그 자신의 몸의 일시적인 성품을 인식하고 깊이 생각합니다. 그는 물질적 쾌락들에 신물이 나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의 즐거움이 어떤 이유에서건 현재 그리고 예견되는 미래에 불가능해질 때, 그것들은 결국 슬픔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는 더 영구적인 삶의 경험이 가능하지 않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봅니다.
그런 다음 그는 아자타 아드바이타 교리를 발견합니다. 처음에 그는 확신하지 못하고, 만약 그것이 꿈이라면 확증의 가능성이 없을 것이지만, 여기에서 그의 친척들과 친구들이 그의 감각들에 의해 제공되는 증거를 보여줄 수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또한 그것이 모두 단지 꿈이라면 왜 똑같은 꿈이 매일 반복되어야 하는지를 묻습니다. 그에 따르면, 여기에서 그는 매일 똑같은 태양, 달, 지구를 보는 반면, 그의 꿈에서 그는 매 순간 새로운 세계에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결국 자신이 살고 있다고 믿고 있는 세상의 외견상의 영원성에 대한 이해를 포함해서 자신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단지 생각 또는 상상이라는 것을 그는 깨닫습니다. 그런 다음 지적 수준에서 그는 진리 즉 세상을 구성하는 이름과 형상은 허구라는 것을 이해합니다.
이것은 그것들의 기초를 이루고 있다고 말해지는 바탕에 대한 탐구를 유발하는데, 현명한 자들은 그것만이 진짜라고 말합니다. 그는 마음의 근원이며 바탕인 노력을 하지 않고 의지 없이 유지되는 순수한 주관적 의식이 그의 진정한 나로 가는 관문이라는 가르침을 듣습니다. 그
런 다음 그는 비차라 또는 다른 방법을 통해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다양한 산만함들이 일어날 때 그것들로부터 주의를 거두어들여 나의 존재함the Beingness of the Self에 그것을 고정시킴으로서 그 산만함들을 해결하는 수행을 시작합니다. 그 시작은 단지 세상의 덧없는 성품과 그것이 제공해야 하는 손에 잡히지 않는 매력에 지겨워지는 것입니다.
헌: 바가반께서 언급했던 의문들은 또한 저의 의문이기도 합니다. 왜 모든 사람은 똑같은 꿈을 목격하고 있습니까? 모두가 태양, 달 등을 봅니다.
라: 결국 그 “모두”는 당신에 의해서만 보입니다. 깊은 잠에서 마음이 없을 때, 아무것도 보일 없지만 당신의 존재는 변함이 없습니다.
헌: 왜 저는 매일 똑같은 꿈을 꿉니까? 예를 들어 어제 저는 아쉬람에 와서 바가반의 다르샨을 받았습니다. 그는 같은 소파에 완전히 똑같은 식으로 앉아있었습니다. 오늘 저는 바가반을 보고 있고 내일도 같은 바가반일 것입니다.
라: 미래는 단순한 마음의 투사입니다. 과거는 단지 기억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방문하는 장소가 아주 익숙해 보이는 꿈을 꾸지 않았습니까?
헌: 적어도 현재는 진짜입니까?
라: 보이는 어떤 것도 진짜일 수는 없습니다. 보이는 것은 프라티약샤(직접적인 지각)가 아닙니다. 주체-대상의 관계가 수반되기 때문에 그것은 증명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아비디야마야(무지의 환영)라는 그 자신의 사악한 능력의 힘에 의해 마음에 반사되는 감각 정보일 뿐입니다. 그것That만이 스스로의 빛에 의해 빛나는 진짜입니다.
당신은 세상의 대상들에 대해 묻고 있습니다. 그런 대상들이 지각하는 자인 당신 없이 존재할 수 있습니까? 기절하거나 깊은 잠에서처럼 지각하는 자가 없을 때, 지각되는 것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추론은 무엇입니까? 그 대상들의 겉으로 보이는 존재의 모습은 오직 당신 덕분입니다. 그것들은 단지 마음의 창조물입니다. 당신 주위의 이 거대한 우주의 모습은 단지... 마음의 정보입니다. 마음은 허구입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의해 만들어진 “대상들” 또한 허구입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조금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 만약 모든 것이 진짜가 아니라면, 속박과 해방 또한 진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까?
라: 그렇습니다.
헌: 그렇다면 왜 저는 구원을 얻으려고 애써야 합니까? 저는 저의 모습 이대로 있겠습니다.
라: 맞습니다!
헌: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라: 당신의 모습 그대로 남는 것이 가장 고귀한 사다나입니다.
헌: 무지 속에 있는 것이 어떻게 사다나일 수 있습니까?
라: 당신은 자신이 무지 속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당신이 전혀 생각하지 않을 때, 남는 것은 오직 지혜입니다. 생각의 장막을 제거하는 것이 실재가 드러나기 위해 필요한 전부입니다. 당신은 이 생각이 없는 상태에 이를 수 있는 사다나를 원하기 때문에 비차라를 권합니다.
사실 그의 모습 그대로 남아 있거나 존재하는 기술 즉 노력을 하지 않고 의지 없이 유지되는 순수한 주관적 의식과 구별이 안 되고 마음으로 남아 있는 기술을 습득한 사람에게는 어떤 사다나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숨마 이루 즉 침묵으로 있으라는 조언의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보통 그것을 오해합니다. 그것은 몸을 게으르게 두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마음을 고요하게 하거나 생각으로부터 자유롭게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생각이 없는 “나”-흐름에 끊임없이 몰두해 있으십시오.
오랜 시간 동안 끊임없이 유지되면, “나”-흐름에 대한 몰두는 더 이상의 노력을 필요로 하지 않고 자동적으로 당신을 사하자스티티로 이끌 것입니다. “나”-흐름은 “나”-생각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실체가 아니라 단지 신기루 같은 모습인 “나”-생각이 겉으로 보이는 자기
존재의 허무하고 환영적인 성품을 깨닫고 낙담해서 고개를 숙이는 순간, “나”-흐름은 빛을 발합니다.
헌: 깨달음에 대한 욕망조차도 깨달음에 대한 장애물입니까?
라: 그렇습니다.
헌: 아유르베다에 대한 많은 책들에서 규정된 것처럼 레기얌(허브 약)을 하는 것이 깨달음을 앞당깁니까?
라: 비차라만이 필요한 유일한 레기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