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관계:
어윤희(魚允姬, 1878년 6월 30일 ∼ 1961년 11월 18일) 여류 독립운동가, 사회사업가이다. 본관은 함종이다.
동학혁명 때 남편을 잃었으며, 1912년 미리흠여학교를 졸업하고 외딴 섬에서 전도사로 일하였다.
3·1운동 때 독립선언서를 배포하고 시가 행진에 앞장섰다가 체포되어 2년간 옥살이를 하였다.
그 후 임시정부에서 파견된 밀사들에게 여비와 은신처를 제공하여 주었고, 개성 경찰서 폭파 계획에 가담하여 구속되었다. 석방 후 개성에 유린보육원을 설립했으며, 6·25 때 월남하였다.
1953년 사회사업가로 표창받고, 1959년 인권 옹호 공로 표창, 1961년 3·1운동 선도자 표창 등을 받았다.
현 안국약품 대표이사, 남부3군 국회의원을 지낸 어준선씨가 그의 가까운 친척이 된다.
충북일보기사 내용 중 일부 편집함:등록일: 2010-03-14 오후 4:17:04
http://www.inews365.com/news/article.html?no=121197
어윤중선생의 내력:
1883년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가 된 후, 의주(義州)에서 청국 대표 장석란(張錫鑾)과 중강(中江)무역장정을, 회령(會寧)에 가서는 팽광예(彭光譽)와 회령통상장정을 각각 체결하여 통상협상을 진행하는 한편, 청나라와의 국경을 확정짓기 위해 토문강(土們江)과 두만강, 관서지역을 직접 답사,조사하여 청대표와의 담판을 통해 양국 간의 경계를 확정짓기도 하였다. 이러한 국경 확정은 이후 간도를 조선 영역으로 공식 편입시키는데 근거가 되었다. 이후 고종의 신임으로 서북경략사 직책과 함께 병조참판, 호조참판을 차례로 겸직하였다.
서북경략사 역활:
조선시대 선비들의 백두산 답사기
김우식의 <백두산 정계비 탐방록 및 감계수행 일기>는 <백두산 답사기>에 실린 이중하의 <백두산 일기>와 비교할 만하다. 김우식은 1885년 을유감계회담에 감계사 이중하와 함께 백두산에 올랐다. 이중하가 기록을 남기고 밑에서 일한 김우식이 또 다른 기록을 남긴 셈이다. 김우식의 기록은 1885년 국경회담이 있기 이전에 백두산 정계비를 답사한 대목이 있어 흥미롭다. 김우식은 함경도 종성에 살고 있었다. 1883년 서북경략사 어윤중이 회령에 도착했다는 말을 들은 후 인근 지역 백성 100여 명과 함께 간도 지방의 농사문제를 아뢰었다. 백두산 정계비에 나타난 대로라면 간도는 우리 땅이라는 주장이었다. 어윤중은 공문을 만들어 김우식을 백두산 정계비에까지 가도록 했다.
5월15일 김우식은 백두산 정계비에 이르렀다. 비문을 베껴 쓴 후 경원에 되돌아왔다. 어윤중은 다시 가서 비문을 본뜨되 주변 지역까지 살피라고 명령했다. 김우식은 6월 종성사람 오원정과 다시 백두산 정계비로 찾아갔다.
18일 날이 개자 비석이 있는 곳에 올라가 28장이나 새겼다. 이종려가 보고문을 작성해 경략사에게 보냈다. 짐을 지고 간 군사와 일행 5명이 비석 둔덕 아래로 내려가 200여 리 떨어진 언덕 입구에 이르렀다. 토문강은 물이 깊고 길림의 변경으로 들어갔으므로 이를 단념하고 북증산에서부터 하반령에 이르러 예부터 분계강이라고 부르는 강을 살펴보니 시원이 하반령에서 나와 두만강과 합쳐지며 온성의 무연한 땅에 도달하는데 일명 발가토강이라고도 한다.
백두산 인근에 사는 일개 백성으로서 김우식이 한 행동은 놀라울 정도이다. 간도 지역에서 농사를 짓고 있는 백성들을 위해 백두산 정계비의 비문을 탁본해 오는가 하면 이를 관리에게 보고하고, 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다. 이 기록이 준 놀라움은 이 산문을 북한에서 국역해 발간했다는 것이다. 북한이 중국과의 민감한 영토 문제임을 뻔히 알고도 이런 기록을 국역 출간했는지 궁금하기만 한다.
어윤중의 이야기:
어비울이(魚肥里)
원혼(怨魂)되어 맴도는 풍운아의 넋(1)
시내를 빠져나와 이동면 천리(泉里)를 지나 송전(松田)에 들어서니 눈발이 점점 더 거세어 진다. 꽁꽁 얼어붙은 저수지를 안고 돌면서 혹시나 싶어 지나가는 여학생을 붙들고 「어비울이」가 어디냐고 물으니, 아니나 다를까 모른다고 고개를 흔든다. 방아리를 지나다가 60대쯤 돼 보이는 어른에게 다시 물었다.
“어비울이는 왜 찾아요? 물 속에 잠긴 지가 언제인데… ”
용인에 사는 사람이라면 「어비울이」또는 「어비리(魚肥里)」라고 불리던 마을이 지금의 「이동저수지」가 생기면서 수몰되었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지금도 해마다 가뭄으로 저수지 물이 줄어들면 「어비울이」에 있었던 아름드리 고목들이 저수지 수면 위로 어김없이 그 모습을 나타내곤 하여 그 옛날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이동저수지는 집에서 가까운 곳이어서 자주 가족나들이를 하는데, 주말이면 강태공들이 몰려들어 북적되는 용인 최고의 저수지이다. 원래 이 마을을 가운데 두고 제법 큰 하천이 흘렀다. 이 하천은 용인에서 발원하여 진위천으로 합류하여 서해안으로 흘러드는 지류였는데, 예로부터 고기가 많이 잡혀 마을이름도 어비울이라고 지어졌던 곳이다.
그러나 매 년 가뭄이 심해지면서 농사짓기가 힘들어지자 60년대에 들어와 마을 아래 방아리 쪽에 둑을 만들어 물길을 막아 담수호를 만들었다. 이 대대적인 공사가 시작되면서 자연히 어비울이 마을은 수몰이 되었고 마을에 살던 사람들은 보상을 받고 부근으로 이주하거나 혹은 도시로 떠나게 되었다.
내가 이동저수지에 수몰된 어비리에 관심을 가지고 자주 찾는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이 마을이 우리 근대사에 얽힌 가슴 아픈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현장이기 때문이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명성황후가 시해되던 해인 을미년(1895년) 음력 섣달 그믐께, 「어비울이」마을 입구에 낯선 2인교의 부인용 가마가 나타났다. 가마에는 기름병이니 바가지 등이 잔뜩 매달려 있어서 한 눈에 친정에 다녀오는 여인의 가마임을 알 수 있었다.
가마가 송전을 지나 안성과 용인 땅 경계에 있는 이 마을에 들어서려 할 때쯤 되어 날이 저물었다. 가마가 하룻밤을 묵어가기 위해 마을의 주막에 들러 여장을 풀었다. 그런데, 가마에서 내린 사람은 뜻밖에도 여자가 아닌 남자였다. 어설프게 허름하게 변색을 했어도 그의 행동에는 무게가 있었고 그를 따라 온 가마꾼들도 모두 건장한 사내들이었다. 이 과객이 저녁상을 물리면서 주모에게 마을 이름이 뭐냐고 묻자, 주모는 여기 사람들은「어비(魚肥)울이」라고 부르는데 외지에서는 「어사리(魚死里)」라고 부른다고 대답했다.
주모의 대답을 들은 과객은 마을 이름이 마음에 걸리는 듯 뭔가 골똘하게 생각에 잠겼다. 그 당시에는 오늘날처럼 저수지가 생기기 전이어서 마을 이름이 생소했던 것이다. 원래는 냇물이 좋아 고기가 살찐다는 뜻으로 「어비(魚肥)울이」인데, 이 과객에게는 「어사리(魚死里)」라는 말이 걸렸던 것이다. 즉, 고기가 죽는 마을이라는 뜻에 과객은 뭔가 불길한 생각이 들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과객이 바로 어씨(魚氏) 성을 가진 어윤중(魚允中)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충북 보은(報恩) 사람으로, 21살 때인 1869년 문과에 급제하여 승정원의 주서로 등용된 후, 승지와 참판을 거치면서 유길준(兪吉濬), 윤치호(尹致昊)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새로운 문물제도를 시찰하고 돌아와 초기 개화정책을 추진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또, 서북경략사(西北經略使)로 임명되어 러시아, 청나라와의 협의하여 국경을 정하는데 공을 세웠고, 동학농민운동 때에는 선무사(宣撫使)로 파견되었으며 드디어 1895년에는 탁지부(度支部) 대신(大臣)이 되어 재정, 경제 부문의 대개혁을 단행하였는데, 특히 조세제도의 개혁은 농민층의 부담을 크게 경감시켜 농민들로부터 상당한 지지와 환영을 받았다. 그런 그가 지금은 탁지부 대신이라는 벼슬을 감추고 사람들의 눈을 피해 자신의 고향인 충북 보은(報恩)으로 가고 있는 중에 날이 저물어 이 마을에 묵게 된 것이었다.
그는 친청파(親淸派)도 아니요 친일파(親日派)도 아니며, 또 보수파도 개혁파도 아니었다. 그는 김윤식(金允植)과 더불어 중도 성향의 정치가로 국민들에게 상당히 인기가 있는 명망 있는 사람이었다.
어윤중(魚允中)은 주막의 주모가 일러준 마을 이름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이 마을 이름이 어쩌면 자신의 운명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 그는 어쩌면 자신이 이 곳에서 변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예감이 든 것이다.
어윤중은 하인들을 불러 부랴부랴 다시 행장(行裝)을 갖추게 하고 이 마을을 피해 이웃 동네를 찾아 안관현(安寬鉉)이라는 사람의 사랑채를 빌어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다.
어윤중이 이 마을에 들어서기 불과 얼마 전에 대궐에서는 고종황제가 상궁의 가마를 타고 대궐을 탈출하여 거처를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긴 이른 바, 아관파천(俄館播遷) 사건이 있었다. 일본공사 미우라(三浦梧樓)가 일본 군대와 낭인(浪人)들을 앞세워 대원군(大院君)을 등에 업고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김홍집(金弘集) 내각을 출범시키자, 고종이 신변의 위협을 느껴 러시아 공관으로 몸을 피한 것이었다.
이 사건으로 김홍집 내각이 붕괴되자, 이 내각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져 김홍집과 정병하(鄭秉夏)는 살해되어 종로 네거리에 효시되었고 유길준, 조희연(趙羲淵) 등은 체포되어 연행 중에 일본군에 의해 구출되었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망명하였다.
김홍집 내각에서 탁지부 대신(度支部 大臣)이었던 어윤중은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났을 때 마침 낙향 중이었고, 또 평소에 원만한 인품의 중도파라는 점에서 살해 대상에서 일단 제외되었다.
어윤중은 김홍집과 함께 일본측으로부터 망명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했다. 그는 당시 농민들로부터 많은 지지를 받고 있었기 때문에 망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서울에 남아 있는 것이 여전히 불안하였으므로 고향인 충북(忠北) 보은(報恩)으로 가기 위해 여인이 타는 가마로 위장하여 낙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계속)
원혼(怨魂)되어 맴도는 풍운아의 넋(2)
예나 지금이나 한 마을에 과객(過客)이 묵게 되면 그 과객의 신분을 알기 위해 마을 전체가 술렁이기 마련이다. 왜냐하면, 만약 그 과객이 귀인(貴人)이거나 높은 벼슬아치일 때 못 알아보고 대접이 소홀했다가는 마을에 후환이 닥칠 것이고, 반대로 이를 잘 대접함으로써 영달의 기회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마을 사람들은 안관현의 사랑채에 든 과객이 탁지부 대신(度支部 大臣) 어윤중(魚允中)임을 알아냈다. 이러한 사실은 곧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을 통해 삽시간에 이웃 마을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이 사실은 송전리(松田里)까지 퍼져 그 마을에 사는 정원로(鄭元老)라는 사람의 집에 식객으로 와 있던 유진구(兪鎭九)라는 이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이 말을 들은 유진구는 귀가 번쩍했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고 했던가. 어윤중과 유진구, 이 두 사람의 악연(惡緣)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화기 근대사에서 묻혀버린 잘 알려지지 않은 춘생문사건(춘生門事件)을 들추어 내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바로, 이들이 「어비울이」에서 다시 마주치기 두 달 전에 있었던 「국모시해 복수 의거 실패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 일어난 지 두 달 후인 을미년(1895년) 음력 10월 16일 필동장신(筆洞將臣)인 김기석(金箕錫)의 조카 김재풍(金在豊)이 국모 복수의 의거를 일으켜 경복궁에 침입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있었다. 김재풍은 시해사건 이전에 탁지부 대신이던 어윤중의 밑에서 사계국장(司計局長)으로 있었다. 의거의 주축은 남촌(南村)에 사는 무인(武人)들이었는데 친로파(親露派)인 이범진 등과 내통하여, 지금의 동대문운동장 자리에 있던 훈련원에 모여 거사계획을 세웠다.
이들이 경복궁(景福宮) 후문인 신무문(神武門)에 집결하면 이범진의 조카인 시위대장 이진호가 이들과 내통하여 신무문을 열어 주도록 계획한 것이다. 이 때, 궁내부 순사(巡使)요 장사(壯士)였던 유진구도 이 거사에 참여했다. 궁문(宮門)을 열도록 이범진의 내통을 받은 이진호는 고민하다가 자신의 직접 상관인 어윤중(魚允中)에게 거사 사실을 알리고 지시를 받기로 했다.
이 사실을 보고받은 어윤중(魚允中)은 심사숙고한 끝에 양전지계(兩全之計)를 노리고 “당신이 알아서 하시오”라고 대답했다. 승낙도 부인도 아닌 대답을 들은 이진호는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예나 지금이나 “알아서 하라”는 말처럼 해석하기 어려운 게 없다. 그는 며칠을 두고 고민을 거듭하다가, 마침내 상관의 명령도 없이 궁문(宮門)을 열어 주는 것이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하여 결국 신무문(神武門)을 열어주지 않고 말았다.
이 약속이 지켜지지 않아 거사(擧事)는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격렬한 접전 끝에 그들은 모두 현장에서 체포당했고, 유진구는 다행히 현장을 탈출하였으나 체포령이 내려져 있어 법망을 피해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 유진구는 이 거사의 직접적인 실패 원인이 바로 어윤중의 우유부단한 태도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항상 복수심에 불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는 방랑 끝에 이 곳 용인(龍仁)으로 숨어들어 평소 의기가 투합 되었던 정원로(鄭元老)의 집에 숨어 있다가 어윤중의 소식을 접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진구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정원로는 분노했다. 당시 세간(世間)의 인심은 국모시해에 대한 복수의 열기로 온 나라가 들끓고 있었기 때문에, 이 사실을 들은 정원로 역시 다를 바가 없었다. 정원로는 즉시 사람을 먼저 보내 집주인 안관현과 내통케 하고, 자신은 유진구와 함께 동네 청년들을 이끌고 마을로 쳐들어가 어윤중이 묵고 있던 사랑방을 덮쳤다.
그러나, 초저녁부터 심상찮게 돌아가는 마을의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었던 어윤중 일행은 이미 떠나고 난 다음이었다. 흥분한 이들은 즉시 가마를 추적했다. 마침내 이들은 어윤중 일행이 처음 묵어가려 했던 「어비울이」주막 앞길에서 일행을 잡았다. 어윤중(魚允中)은 가마에서 끌려나와 지금은 저수지의 수문(水門)이 된 강변에서 몽둥이에 맞아 무참하게 타살되었고, 그의 시신은 다시 장작더미에 얹혀 태워졌다.
살찐 고기가 죽는다는 뜻을 가진 마을이름을 듣는 순간부터 들었던 어윤중(魚允中)의 불길한 예감이 그대로 현실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때가 설날이 며칠 남지 않은 을미년(乙未年) 그믐께요, 양력으로는 1896년 2월 17일로, 그의 나이 겨우 47세였다.
당시 「어비울이」에 살았던 주민들은 이 곳이 수몰되면서 그 위쪽 언덕배기로 이주하였거나 대부분 마을을 떠났고, 당시 이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은 이미 고인(故人)들이 되고 없다. 그리고 섣달 그믐께 밤에 갑작스레 일어난 이 사건은 마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대를 이어가며 구전(口傳)되었으나, 지금은 사실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다만, 그 사건이 있은 후로 지금까지「어비울이」마을 강변에는 밤마다 「어 탁지, 어 탁지」하며 귀신 우는 소리가 들려온다고 마을에서 만난 한 촌로(村老)께서 들려준다.
“저수지로 변한 지 오래됐는데 아직도 어 탁지 귀신이 웁니까?”
“물귀신이 되어 그런지 더욱 구슬프게 운답니다.”
눈발이 날리는 저수지가에 서서 한 시대를 주름잡던 풍운아의 원혼(怨魂)이라도 달랠 수 있을까 하여, 준비해 온 소주를 잔에 가득 채워 꽁꽁 얼어붙은 빙판 위로 뿌려 본다.
함박눈이 내리는 저수지의 겨울 경치가 너무도 아름다워 발길을 돌리기가 영 아쉬운데, 눈발에 실려 오는 바람 소리를 빌어 「어 탁지」의 원혼이 생전에 남기지 못한 말씀을 들려주려는 듯하여, 오던 걸음을 잠시 멈추고 고개를 빼 손을 들어 시린 귀를 쫑긋 세워본다.
(2000. 1.22)
[출처] 어윤중과 어비울이(魚肥里) (2) |작성자 무릉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