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hn Ross목사의 조선 선교활동기

작성자간도 지기|작성시간09.02.05|조회수79 목록 댓글 0

이시기 청과 조선의 국경지대를 알수있는 단서들이 나옵니다. 바로 요녕,북경부근 입니다.

 

선교활동 초기(1872-1879)

 

1867년 가을 그는 조선과 중국 국경을 인접한 세관인 봉황성(Corean Gate)을 방문했는데,연중 보고서에서 몇몇 조선 상인들이 거기서 성경을 몇권 샀고, 휴 와들목사가 최근에 떠났으므로 선교사 몇 명이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런 생각을 로스목사와 나누고 겨울이 오기 전에 영구로 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겨울엔 요동만이 얼어 갈수 없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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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해 10 9일 로스목사는 영구를 떠나 순회전도를 나섰고, 첫 번째로 고려문(Corean Gate)을 방문했다. 그 기록을 그해 11,12월에 나오는 격월지 '중국기록과 선교보고(Chinese Recorder and Missionary Journal)'에 썼고,1875 5 '연합장로선교보고(United Presbyterian Missionary Record)'에 간추려서 기고했다. 왕복여행은 약 3주일 걸렸고, 로스목사가 고려문으로 간 길은 조선의 사신이 북경으로 가는 길과는 방향이 달랐다.

 

 10 9일에 營口로 떠나 첫날밤은 대석교(도시이름)에서 보냈는데, 거기 있는 여관은 북중국에 있는 여관 중 가장 좋다고 했다. 대석교를 떠나 동쪽으로 여행을 하면서 천산(千山)의 산맥을 지났는데, 무수한 산맥들이 북 스코틀랜드의 산맥들처럼 생각이 들었다. 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양하를 12번이나 건넜다. 그의 보고서에서 로스목사는 그 지방의 식물과 동물 및 지리를 살펴 보았고, 또한 그 지방의 풍속도 살펴서 기록했다. 대석교를 떠나 그들이 처음 도착한 큰 도시는 수암주이었고, 거기에서 북동쪽으로 가면서 봉황성으로 곧장 가는 길이 아니었으나,로스목사와 그의 동행인은 그 도시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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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6일간 세관이 개방되기를 기다리면서 그 지방의 상업과 산업을 시찰할 기회를 가졌는데, 그곳 상품의 대부분은 다른 지방으로 수출되도록 대고산의 항구로 보내졌다. 그는 또한 봉황성에서 조선산 배를 샀는데, 그것을 제일 맛있다고 생각했다. 거기서도 설교했고 한문성경을 팔았다. 그가 수암주와 봉황성에서 보낸 보고서에서 그 두 곳에 이슬람교인들이 있었다고 적었다.

고려문이란 마을은 청과 조선사이에 있는 세관이 위치한 작은 마을이었고, 그것은 봉황성에서 떨어진 봉황산이라는 산맥 옆에 있었는데, 그 언덕에는 도가의 수사들이 기거하고 있었다. 세관은 일년에 4번씩 열렸다. 음력 3월에 시작해서 3,4개월간 열렸고,음력 8월에 3주간,음력 9월에 약 6주간,마지막으로 섣달에 한달간 열렸다. 로스목사의 말에 따르면 3.9월에 여는 장은 가장 중요했고,그때엔 봉황성의 지방장관이 직접 열었다. 로스목사의 첫 방문은 음력 9월이었는데 그 때는 그 문이 잠겼고,그가 조선 상인들을 만날려고 했으나 한꺼번에 몰려 올 때가 아니라서 실망했다. 오래 지체할 수가 없어 섭섭하게 營口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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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로 돌아 오자마자 로스목사는 중국기록과 선교보고에 고려문 심방('Visit to the Corean Gate')이란 글을 썼다.

1876 4월말과 5월 초에 고려문으로 두 번째 여행을 했다. 이번에는 준비를 미리 잘 했을 것이고, 이에대한 비용은 영국 리즈(Leeds)시에 있는 로버트아팅톤(Robert Arthington,1823-1900)이 대었다. 그는 유명한 자선사업가였다. 로스목사는 세관으로 갈 때는 2년 전과 같은 길로 갔으나, 세관을 지나 압록강과 북쪽 국경 사이에 있는 무인지경까지 갔고, 애하와 압록강의 합류점까지 갔다. 거기에 있는 모래밭과 더 비옥한 곳에 잇는 농장에서 중국인과 조선인들이 농사를 짓고 있었다. 로스목사는 한권으로 된 전도지와 성경을 출판하려했고 ,나중에 반도로 들어 오는 방법을 찾을려고 했다. 두 강이 만나는 곳에서 로스목사는 의주시를 볼 수 있어서 압록강변을 따라 구경하도록 뱃사공을 부르려 했으나, 조선의 변방 군인들이 두려워 뜻을 이루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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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목사가 조선국경으로 간 두번째 이유는,조선어선생을 찾고 또 신약성서를 조선어로 번역하도록 그를 도울 사람을 찾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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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스목사가 떠나기 전 응찬은 하루 먼저 떠났고, 봉천으로 가서 다시 만났다. 봉황성에서 돌아 올 때 천산을 거쳐서 다른 길로 갔다. 관전과 환인을 지나 청나라 황제조상의 능이 있는 흥경에 갔다. 거리서 그들은 봉천으로 가기 전 며칠 머물렀다. 고려문을 방문한 세번째 이유는 압록강으로 가는 봉천의 동쪽에 있는 지방을 탐색하는 것 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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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이 응찬 밑에서 조선말을 배웠음이 틀림없다. 그의 두번째 저술인 '조선어 교재'('Corean Primer') 1877년에 발행됐다. 그 책의 서론을 보면,맨드린 프라이머에 기초해 있는 조선어 문법공부였다. 불란서 드로조니(de Rosny)에 의해 '조선어에 관하여'('Apercu de la Langue Corene')가 쓰여졌는데, 'Corean Primer'는 첫째 영어로 쓰여졌고 조선어 문법을 설명했으며, 조선어로서 예문 문장을 들도록 모두 서양어로 썼다. 이 책의 특징은 두 가지인데, 하나는 한글을 완전히 쓰고 그 사용언어는 표준어가 아니라 북쪽 사투리였다. 이것은 의주 출신 이응찬의 영향을 나타낸다.

 

첫번째 안식년(1879-18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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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해 7월 로스목사는 페이즐리(Paisley)에서 살았다. 제이 앤드 알 파래인(J.and R.Parlane)이 있었던 곳이었으므로 중요시된다. 1879년 말 그 출판사는 로스목사의 첫번째 큰 책을 만들었다. 페이즐리에 있을 때 로스목사는 그들과 이 책의 출판에 대해 얘기하고, 그때 원고를 주었음이 틀림없다. 이 책은 동양학 연구의 이정표였는데, 그 제목은 '조선의 고대 근대사'('History of Corea, Ancient and Modern')였다.

이것은 그의 세번째 작품이나 초기 저술 중에서는 제일 중요한 것이었다. 이 책의 영어판은 처음 어떤 서양어로서 출판됐는데,조선사()에 대해서는 최초의 저술이었다. 물론 드 할드(de Halde)신부의 청제국에대한 기록 ('Description...de la Chine et la Tartarie Chinoise'[1735])에서 조선에 대해 한 단원을 썼으나, 그것은 내용이나 분량면에서 로스목사의 그것과 비교하면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스목사의 기술 중에는 한가지 문제점이 있는데, 그는 한국 역사를 중국인의 입장에서 본 것이다. 그러나 조선에 대한 자료가 없었으므로 중국역사 자료를 사용해야 했다. 이 책은 대단히 중요하므로 조선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은 로스목사를 거쳐야 됐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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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 5월 로스목사는 ,조선 고대 근대사의 속간인 '만주족:중국의 현대 왕조'('The Manchus,or the Reigning Dynasty of China')글 쓰기에 몰두했다. 시너드가 끝난 뒤 이것은 제이 앤드 앞 파레인 출판사에서 나왔고,9월에 런던에 더 스펙테이터(The Spectator)잡지는 이를 칭찬했다. 이것이 중국과 중국인의 가능성에 대해 우호적인 견해를 보였기 때문에 로스목사를 중국에 대한 열광자로 표현했는데 그가 중국인에 대해 친밀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전에 나왔던 책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그 기언과 자료를 사용하는데 생생한 필체로 썼다고 칭찬받았다. 이 출판은 동아시아와 연구에 훌륭한 학자로서 로스목사의 명성을 공고하게 만들었다.

 

로스목사는 저술을 많이 하는 사람이었다. 첫 안식년에 그는 성경을 한글로 번역했고, 또한 영어로 동양역사에 관한 책 등 두 권을 썼고, 연합 장로교인을 위해 중국에 대한 소개의 글도 썼다. 1880 11월 연합장로교 선교보고에,중국의 지리와 인구에 대해 '中國의 廣大'('The Extent of China')라는 제목을 붙여 썼다. 1881 1월 같은 잡지에 '중국의 민족'('China's People')이라는 제목을 붙여 그들의 그 년성을 찬양했다. 3월과 5월호에 '중국인의 교육'('Chinese Education')이란 제목 하에 중국인 교육제도와 한문과거시험에 대해

설명했다.

 

1884년도 만주 교회는 계속 성장했고 6월까지 34명이 세례를 받았다. 또한 중국인 전도자 2명은 요앙에서 일하고 있었고, 봉천에 3개의 예배당이 설립되었는데 그것을 모두 중국인이 감독했다. 철령에서는 제일 처음으로 봉천 북쪽에 교회가 설립되었다.같은 해 영국 및 외국성서회 대표자들은 각 지역에서 성경 보급이 동이 났다고 전했다. 재미 있었던 것 중에는 로스목사가 그 전 인쇄자인 김 청송의 간도지방 전도에 대해 전했고, 로스목사에게 통화 동쪽 지역에 머무르고 있는 조선 피난민들에게 성서를 많이 팔았고, 물건이 더 공급되면 더 팔 수 있다고 전했다. 그의 전도에서 갑신정변 피난자인 사람은 봉천으로 가서 세례를 부탁했다. 한 사람은 간도지방으로 다시 가서 전도를 시작했고, 또 한 사람은 로스목사가 신약번역의 최후 교정을 할 때에 도움을 주었다. 이때에 이응찬씨는 죽었던 것 같다.

김 청송을 통해서 간도 전도가 잘 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으므로, 로스목사는 1884년 가을 초 웹스터목사를 그 지방으로 보냈는데, 아마 봉황성에 선교장소를 설립할 생각이 있었던 것 같다. 웹스터목사와 아일랜드 선교회 하먼(Harmon)목사와 함께 수암과 대고산으로 갔다가 봉황성과 고려문(Corean Gate)으로 갔다. 거기에는 관전으로 해서 120리 북쪽에 있는 Corean Valleys(간도)라는 조선인 촌으로 갔다. 영구로 돌아 갈때는 봉황성과 해성을 통해서 갔다

1884 12월 로스목사와 웹스터목사는 간도로 갔고,봉천을 떠나 왕릉이 있는 흥경을 거쳐 통화로 갔다. 그곳을 새로운 부라 하며 중국과 조선 사이에 있는 女軍 숙영지와 같은 곳이었다. 그 지역의 행정장관이 보냈던 군인 2명을 성 밖에서 만나서 성안으로 호위했다. 거기서 며칠간 머무른 후에 다시 동쪽으로 향했는데,눈이 많이 와서 그 우두머리는 행로에 대해 대단히 걱정했다. 또한 장관이 보냈던 군인을 로스목사가 다시 통화로 돌려 보냈으므로,산적이나 노상강도에 대해서도 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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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출판된 긴진 산맥:만주의 여행(The Long White Mountain:or a Journey in Manchuria)을 보면, 만주 교회에 대해 칭찬을 많이 했다. 그 해에 본부에서 1888년이 안식년이란 소식을 받고 귀국할 준비를 했다. 이 소식을 받고 봉천 북쪽 지방에서 탐험과 전도할 생각이 있어서, 웹스터목사와 함께 11 18봉천을 떠나 먼 길림으로 갔다. 갈 때는 철령과 해룡성을 거쳐 갔다고 했다. 로스목사는 계속해서 글을 썼고,그해 봄 만주 선교회의 小史와 유교에 관한 글을 본부에 보냈다. 1887년 가을 로스 목사는 배를 타고 서울에 가서, 조선에서 있은 조선인의 세례와 한국 교회의 첫 장로 임명을 보았다.

 

1890 12월과 1891 1월에 그는 북방으로 여행을 했는데, 아주 놀랍게도 조선반도의 왕국에서 나온 조선인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평북지방인 강계에서 온 어떤 최씨라는 사람이 로스 목사를 찾아와 교인들이 있었던 그 시 부근에 많은 사람이 있다는 정보를 제공했는데,또한 로스목사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 온 것이었다. 얼마 후 로스목사의 조선인 서적판매원인 김 청송이 강계에서 온 다른 조선인과 같이 봉천에 도착해서 최씨의 얘기를 뒷받침했다. 그후 조정관리의 두번째 직급에 해당하는 강계의 호방에서 온 사자가 도착해서 최씨가 복음서, 신약성서 및 교회 문답서를 가져 오도록 요구해서 이것들을 보냈다. 로스목사는 그때 그 상황을 파악키 위해 그의 조선인 식자공인 공씨라는 사람을 최씨와 같이 보냈다. 그는 관리가 직접 보낸 회답을 받았는데,거기엔 그가 열심히 성경을 공부하고 있었고, 최씨와 공씨가 도착한 후 그는 강계와 자성,후창지방에 있는 교인들에게 신앙을 키워 주기 위해 노력했다고 쓰여 있었다. 강계에서 서약했던 100명의 교인 중 10명만이 세례를 받기에 적격이었고,자성에서는 90여명중 단지 7,후창에선 150명중 15명만이 적격이었다. 32명의 이름이 로스목사에게 전달됐는데,편지는 후창현의 공인이 찍혀 우송됐다. 나아가 그 현령은 최씨가 머무르면서 이 신자들을 가르치도록 요구했고,후창에 있는 교인들이 그 중 한 사람인 최 정홍이란 사람을 로스목사에게 보낸다고 적혀 있었다. 이것은 선교사들이 조선의 북방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기독교 사회가 성립되어졌다는 것을 가르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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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1 2월 로스목사는 철령과 그 주위를 살펴 보려고 여행했고,26명에게 세례를 주었으며 4명의 집사들을 뽑도록 지도했다. 교회가 최초에 설립된 봉천의 북쪽지방에 있어서 조차 자체 독립과 자체 전도의 단계가 이미 달성되었기 때문이었다. 1891 3월 대평구에서 더 멀리 떨어진 곳에서 47명이 세례를 받았다. 이러한 것들은 3 27일 그의 아들인 존 허버트(John Herbert)가 출생함으로 로스목사에게 기쁨을 더하게 했다. 잉글리스가 봉천에 왔고, 더글라스씨가 요양에 보내졌으며, 영박사(Dr.Young)와 로버트슨(Robertson)하얼빈의 바로 남쪽에 있는 쌍성부에 새 지부를 설립해서 왔다.

 

봉천을 출발한 뒤 그들은 통화를 거쳐 간도지방까지 갔다. 그곳에서 자성과 후창으로 갔고, 연안에 있는 장진을 거쳐 5 9일 원산에 도착했다. 로스목사는 조선과 만주지방에 어떤 선교사가 있어야 하며,젊은 선교사들이 스스로 그 상황을 본다면 그들이나 동료 중 하나가 그곳에 파송되길 바란다고 했다.

1891 7월 한달간을 로스목사는 순회전도 여행을 하면서 보냈다. 그해 여름 동력하여 활동 중인 에이레와 스코틀랜드 선교회가 단독 장로회 관학구를 만들었는데,그것이 지방교회 연합의 중요한 단계였다. 그것은 하나의 선교회로서 더 이상 간주되지 않았고, 관동 장로교구로서 알려진 하나의 자립교회로 생각되었다. 그 장로교구의 영역을 청나라 시대에 전형적인 만주의 새 지방으로서,만리장성 동쪽으로 조선국경과 남쪽으로는 흑룡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지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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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 2 16 로스목사와 잉글리스는 또 한번의 여행을 했는데, 이때 봉천의 동서와 개원을 거쳐 처음엔 철령으로, 서쪽으로 대평구와 매매가로 갔고, 거기서 동쪽으로 이동,남쪽으로 휘난 즉 오늘의 조양에 이르렀다. 그 장소에서 떠날 때까지 그들은 통화와 간도지방으로 계속 여행했는데,그들은 2 3일을 보낸 후 나흘 걸려 봉천으로 돌아 왔다. 5 17일 아침 그 장로회 관할교구가 봉천에서 모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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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3 4월 로스목사는 봉천의 동쪽으로 순회전도 여행을 했는데, 선왕들의 무덤이 있는 흥경을 거쳐 조선과 중국 사이에 오래된 세관 중 하나인 왕청문에 도착했다. 거기서 통화를 지나 동쪽으로 발길을 돌려 통화와 환첸의 중간인 치안티엔추까지 도달했고,

 

월에 로스목사는 글래스고우대학에서 신학박사학위를 받았는데,그 공적으은 만주에서의 선교에 대한 노력뿐만 아니라 그의 두저서인 'A History of Corea' 'History of the Manchus'때문이었다. 이 때까지 선교부는 만주에서 20년간 활동해 왔고 끊임없이 고요한 성장을 지속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해 여름 조선의 영주권 문제를 둘러 싸고 청.일 전쟁이 일어났다. 주된 격전지는 만주와 조선의 북쪽 지방으로 교회와 선교의 모든 방면에 타격을 주었다

 

로스목사는 불굴의 여행자였다. 1898 1월 다시 동쪽으로 여행했는데 흥정까지 여행했고,먼 산골에 있는 작은 마을을 거치면서 북쪽으로 파치아쭈까지 갔다. 이 여행을 끝내고 2월에 다시 더 동쪽에 있는 마을들을 방문했고, 한 달 후 영릉,흥경에 다시 갔으며,그후 통화 서도강,예쉬호쭈, 치앙티엔쭈, 라클리큐, 쟈오징고우와 리쉬짜이를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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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 전체의 두배에 해당하는 인구가 서울에 있었으나, 이 중요한 지역에는 한 사람도 배치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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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서양 언어로 첫 한국 역사책을 썼고, 영어로 된 첫 한글 문법책을 썼으며, 한글로 처음 신약성서를 번역했고,최초의 만주민족사,중국 고대종교 및 만주족의 기원을 쓰는 등 중요한 저술들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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