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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황제의 후손 명씨 한중 교류에 한몫

작성자간도 지기|작성시간07.12.09|조회수259 목록 댓글 0
중국 황제의 후손 명씨 한중 교류에 한몫

조선 건국 때 용포 제작하는 등 우리 복식에도 큰 영향 끼쳐

성(姓)씨의 유래는 지나온 역사만큼 다양하다. 때로는 전쟁으로 인해, 때로는 국가의 폐망으로 인해, 때로는 임금의 하사로 인해 탄생과 소멸의 과정을 밟아왔기 때문이다. 또한 중국 등 외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와 새로운 성의 시조가 된 경우도 적지 않다.

그 가운데서도 명(明)씨는 14세기 원(元).명(明) 교체기 중국에 존재했던 대하(大夏)국 나라의 황제 명옥진(明玉珍)을 시조로 하고 있으며 그 성씨가 우리나라에만 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1982년 중경시 한복판에서 명옥진 황제의 능인 예릉(叡陵)이 발견됐는데 곤룡포를 비롯한 부장품들이 대량으로 출토돼 세인의 관심을 끌었다. 이 때 발굴된 현궁지비(玄宮之碑)에는 명옥진 황제의 치적과 당시 상황이 자세히 기록돼 있어 그에 대한 학계의 활발한 연구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그동안 역사학자들이 명옥진의 능을 찾기 위해 애를 썼으나 알 길이 없었다. 그러다가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위치한 방직공장 확장공사중 우연히 발견하게 된 것이다. 이에 따라 명씨 종친회에서는 한중 수교후 1994년부터 예릉을 참배해왔으며, 2001년부터는 기일인 음력 2월 6일에 제사를 지내기 시작했다. 올해는 지난 3월 8일 예릉을 방문해 647주기 제사를 지냈다. 명씨 대종회 부회장인 명노승(明魯昇) 전 법무부 차관은 선조에 대한 자긍심이 참배에 나서도록 만들었다고 그 배경을 설명했다.


중국 중경시 강북구 상횡가에 위치한 명옥진 황제의 능인 예릉 정문
"중국 대하국 황손이라는 자부심과 긍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에 대해 남다른 친밀감을 느끼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어디까지나 엄연한 한국인입니다. 600년 넘게 살아왔으니 당연한 것 아니겠습니까."

명옥진의 원래 성은 민(旻)씨였다고 한다. 그러나 원명 교체기인 그 당시 배화교인 명교(明敎)가 한족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기에 성을 명씨로 바꿨다는 것. 명옥진은 1329년 지금의 중국 호북성 수주 수현 매구에서 태어났는데 그곳에는 그의 탄생을 기리는 기념관이 있다. 당시는 원나라의 국운이 기울어 가는 시기로, 각지에서 한족들의 봉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명옥진은 1350년 서수휘(徐壽輝)가 기양에서 송(宋)을 창업하자 그 이듬해 그의 휘하에 들어가 지금의 사천성인 촉(蜀)을 중심으로 많은 전공을 세웠다. 그러다 서수휘가 진우량(陳友諒)에 의해 살해되자 1361년 10월 15일 중경에서 국왕으로 즉위했고, 그 뒤 1363년 정월 초하루에 황제로 등극하고 나라 이름을 대하(大夏)로 바꿨다. 중경을 수도로 한 대하국의 영토는 지금의 사천성 대부분과 호북성 의창지역, 귀주성 준의, 섬서성 한중까지를 아우르는 광활한 지역이었다.

명 전 차관은 황제가 재위 6년만인 1366년 2월 6일 급서했는데 그 때 그의 나이 38세에 불과했다며 매우 애석해 했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있을 수 없지만 그가 조금만 더 오래 살았더라면 중국의 역사가 뒤바뀔 수도 있지 않았겠느냐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란다. 그의 뒤를 이어 10살 밖에 안된 아들 승(昇)이 2대 황제에 등극했다. 그러나 1368년 주원장(朱元璋)이 명(明)을 건국, 대하국을 도모하기 시작했고 결국 1371년 멸망하고 말았다. 명옥진 황제가 중경지방을 다스린지 11년만의 일이었고, 그 때 명승 황제의 나이는 15살에 불과했다. 대하를 멸망시킨 명 태조 주원장은 명승을 귀의후(歸義候)로 봉하고, 그 이듬해인 1372년엔 그를 고려의 공민왕에게 보냈다. 그 때 명 태조는 공민왕에게 그를 관리로도 삼지 말고, 백성으로도 삼지 말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명승은 모후인 팽황후(彭皇后)와 함께 고려에 살게 됨으로써 이 땅에 명씨의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예릉에서 출토된 황제의 일상 정복인 적황 비단 곤룡포
팽황후는 우리의 복식사에도 큰 족적을 남겼다고 명 전 차관은 주장했다. 조선이 건국된 뒤 팽황후가 이태조에게 용포(龍袍) 등 궁중 관복을 지어 올렸다는 것이다. 또한 부인들의 당의(唐衣)와 수식(首飾)도 처음으로 보급했다고 한다. 이들의 지위가 왕족과 다를 바 없었다는 것은 이태조가 명승을 화촉군(華蜀君)으로 봉했으며, 태종이 충훈세록(忠勳世祿)을 내린 것에서도 쉽게 알 수 있다. 또 팽황후의 묘를 숙릉(肅陵)이라 하여 국빈(國賓)으로서의 예를 베풀었다. 명씨들은 그후 개성인근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오다 임진왜란 때 각지로 흩어졌다고 명 전 차관은 설명한다.

명씨는 시조가 나라를 세우고 황제로 있었던 서촉(西蜀)을 본관으로 삼았다. 연안(延安) 등 여러 개의 다른 본이 있지만 다같은 명옥진의 후예들이다. 원래 성이 민씨였으므로 중국에 있는 명씨와는 그 뿌리가 다르다. 예릉은 현재 방직공장 가운데 위치하고 있다. 방직공장을 확장하기 위해 공사를 하다가 발견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국정부에 이 지역을 공원화해 줄 것을 요청해 놓았다고 명 전 차관은 밝혔다. 시조의 유택(幽宅)이 공장 안에 있는 걸 방치할 후손은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예릉 발굴 당시 출토되었던 용포, 현궁지비(玄宮之碑), 각종 그릇 등이 현재 중경시 박물관에 전시돼 있는 것도 이러한 요청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박물관에 전시될 정도의 가치있는 유물이 나온 황제의 능을 그대로 놔두지는 않을 것이란 점 때문이다.

이렇듯 중국 황제의 후손이라는 인연으로 인해 이들은 한중교류에도 한몫을 담당하고 있다. 그동안 명씨 종친회에서는 예릉이 있는 중경시 강북구 간부와 인민병원장 등을 3차례나 초청했다고 명 전 차관은 밝혔다. 특히 인민병원에는 의료장비를 지원하기도 했다고. 명 전 차관은 예릉 기념관에 기증한 명씨 족보가 그곳에서 전시중이라는 점을 특히 기쁘게 생각한다고 했다. 중국은 문화혁명 당시 족보 대부분을 없앴기 때문에 이들은 족보가 있다는 사실을 무척 부러워한다는 것이다.

또한 중국의 발전속도가 눈부실 정도라고 강조한 명 차관은 이런 속도라면 몇 년 안에 우리보다 나아질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전망했다. 겉은 사회주의지만 속은 이미 자본주의라고 봐야 한다는 것이다. 특히 중국인과 거래를 할 때는 그들이 영리에 밝고, 상술이 뛰어나다는 걸 알고 접근해야 실패가 적다는 점을 그는 강조했다.

명 전 차관은 또 중국을 방문했을 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중국측 인사들도 친밀감을 표시했다며 이런 성씨를 잘 활용해 한중관계를 돈독히 할 필요가 있다는 의견도 내놓았다. "수백년 전에 떠난 사람들이 자신의 뿌리를 찾아 방문했으니 그쪽 입장에서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겠지요. 앞으로 동북아는 세계의 중심으로 성장할 잠재력이 무한한 곳입니다. 그러니 이러한 점을 잘 활용하면 서로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는데 많은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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