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기지 신한촌(1) (2)

작성자간도 지기|작성시간08.01.15|조회수117 목록 댓글 0

독립운동기지 신한촌(1)

1910년 한일합방을 전후하여 해외독립운동기지로 주목을 받던 두 마을이 있었다. 그 하나는 만주의 명동촌이고, 다른 하나는 연해주의 신한촌이다. 이 두 마을은 각기 만주와 연해주에서 이주한인들의 정신적 의지처로서 교육·문화·언론·정보의 중심지였으며, 독립운동의 요람이었다.

그러므로 이 두 마을은 민족사적 의의가 대단히 크며 연구의 대상이다. 그러나 안타까 운 것은 두 마을은 거의 폐허가 되었고, 역사적 유적지로서 잔형마저 찾기 어려운 점이다. 특히 신한촌은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강제이 주당한 후 60여년 풍상을 겪는 동안 마을의 흔적도 없어진 채 러시아인들 의 아파트만 들어서 있을 뿐 선열의 숨결을 느낄 수 없다.

1995년 필자가 신한촌을 찾았을 때, 한민족의 애환과 선열의 얼이 어려있는 유서깊은 이 마을이 이렇게도 무참히 폐허가 되고 기념물 하나도 없이 방치될 수 있 는가 하는 생각에 북받치는 울분과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었다. 지금도 중 앙아시아의 타슈켄트, 알마아타 등지에 산재한 50여만 고려인들은 신한촌을 마음의 고향으로 간직하고 있다.

신한촌의 유래를 살펴보면 1863년 13호의 한인들이 연추(煙秋)의 지신헤 로 이주한 이래 뒤이어 이주해간 한인들은 연해주 동남부 지역, 포시에트 빨디산스크(水淸), 우수리스크(蘇王領), 블라디보스토크(海參威) 등지로 마을을 형성하여 정착했다. 이들 중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시에 한인촌이 형성되었 는데 새 땅을 개척한다는 의미를 부여하여 개척리(開拓里)라고 불렀다. 그 위치는 블라디보스토크 서남쪽 아무르만 변, 시의 중심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마을 형성 초기에는 한옥식 초가 몇 채가 있었다.

블라디보스토크시의 규 모가 커지고 현대적 도시로 면모를 갖추어가면서 거기에 따르는 도시 근로 자의 수요가 늘어나게 되자 이에 편승, 한인수가 증가하여 1911년 이 마을 이 폐쇄될 때는 400∼500호에 달했다.

러시아당국은 개척리를 그들의 기마병 영지로 책정하면서 겉으로는 한인촌에 만연된 콜레라를 근절한다는 이유를 앞세워 한인들을 강제 철거시켰다. 러시아당국의 명령에 따라 새로 옮겨간 곳이 블라디보스토크시 외곽의 변두리였는데 새로운 한인의 마을이란 뜻으로 신한촌(新韓村)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주한인들은 좌절하지 않고 다시 일어서 토막나무로 러시아풍의 작은 집을 짓고, 큰 거리와 작은 골목을 닦으면서 신한촌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구개척리에 있던 한인사회의 운영기관들을 다시 설립하고 계동학교를 옮겨 가 한민학교로 개명하는 한편, 시설을 대폭 확충하여 교육기능과 아울러 시 민의 광장으로서의 기능도 겸하게 했다.

신한촌 마을 입구에 독립문을 세워 조국에 대한 정감과 현실을 인식케 하고, 학교 정문 현관에는 태극문양을 새겨넣어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또한 신한촌 한민회를 조직하여 한인사회 자치의 기반을 다져나갔다. 이렇듯 신한촌은 새로운 면모를 갖추고 활기를 되찾으면서 독립운동단체들이 결성되어 해외 최고의 독립운동기지로 자리매김 하게 되었다.

더욱이 이 무렵 국내에서는 1905년 을사조약의 체결로 국운이 기울고 1910년 국권이 일제에 침탈당하자 나라를 걱정하는 많은 애국지사 들이 미주, 간도, 본국 등 각처에서 연해주로 결집함으로써 신한촌의 항일 투쟁의 열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뿐만 아니라 신한촌은 시간이 흐르면서 그 규모도 날로 커져 번성기에 는 주민이 5천500명에 이르렀고, 한민회는 블라디보스토크지역 거류한인 1만 여명을 관장하고 있었다. 교육기관도 초기에는 초등학교부터 시작하여 중등학 교가 병설되고 전문학교와 사범대학까지 설립하여 2세교육에 조금도 부족함이 없었다. 또한 언론사도 ‘해조신문’ ‘대동공보’ ‘신한민보’ ‘권업신문 ’등 여러 개가 있었고, 잡지로는 ‘애국혼’이 있었다. 이 신문들은 연해 주 한인에게만 배포된 것이 아니라, 만주와 멀리 미주에까지 보급되었다. 이러한 사실에서 보듯 연해주지역의 모든 한인사회는 사실상 신한촌의 영향 권 안에 있었다.

신한촌을 중심으로 항일투쟁과 관련된 대소 사건들이 하루도 영일이 없 이 많이 일어났다. 안중근 의사의 이등박문 암살모의와 12인 단지회(斷指會) 조직, 13도의군(道義軍) 양성, 성명회(聲明會)의 한일합방 무효선언과 반일 투쟁궐기, 권업회(勸業會)의 결성과 민족역량 배양, 망명임시정부(대한국민의회 ) 수립, 신한촌 4월참변, 그리고 1917년 러시아 볼세비키 혁명과 관련한 한인사회당 결성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았다.

이 사건들에 대한 논급은 잠시 접어서 후술키로 하고, 오늘의 신한촌에 관련된 이야기 몇 가지를 언급하는 것도 의의가 있을 듯 하다. 1989년 구소련권이 붕괴된 이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당했던 카자흐스탄, 우즈베키 스탄, 키르기스스탄 등의 고려인(이곳에서는 한인을 고려인이라 부른다)들 중 연해주로 다시 귀환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들은 농경에 뜻을 두 고 옛 농촌마을을 답사하고는 반드시 신한촌에 들러 선조들의 발자취를 찾 아본다. 그러나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신한촌의 흔적은 없고, 안내표지 판마저도 하나 없는 것을 보고는 눈시울을 적시며 비통한 심정으로 돌아선 다. 그들의 선조가 짐승취급 당하듯 끌려간 후 60여년이 지나도록 선조의 넋을 위로하고 역사 유적지를 기록한 기념물 하나 없다는 것은 오늘을 살 아가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역사인식과 함께 자성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본 해외한민족연구소에서는 1999년 신한촌 망명정부 수립 80돌을 맞아 신한촌기념탑을 세웠다. 탑 건립비를 마련하기 위해 고심하던 중 전국 경제인연합회에서 지원을 받고, 본 연구소 이사인 <주>백미(白眉)산업 이인기 사장이 거금을 쾌척하여 탑을 건립하게 되었다. 한 가지 첨언할 것은 탑 의 민족사적 의의를 더하기 위해 웅장한 탑신 3개와 판석을 한국에서 다듬 어 배로 수송하여 세운 점이다. 탑문에는 다음의 글귀가 새겨져 있다.

“민족의 최고 가치는 자주와 독립이다. 이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은 민 족적 성전이며 청사에 빛난다. 신한촌은 그 성전의 요람으로 선열들의 얼과 넋이 깃들고 한민족의 피와 땀이 어려있는 곳이다. (중략) 3·1독립선언 80주년을 맞아 선열의 숭고한 넋을 기리고 재러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의 마 음의 상처를 위로하며 후손들에게 역사인식을 일깨워주기 위하여 이 탑을 세운다.” 이 탑은 지금 중앙아시아에서 귀환하는 고려인들에게는 큰 위로가 되고 그들의 마음을 잡아주는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다시 신한촌에서 일어났던 사건들을 간추려서 논급해보자. 그 첫째 는 성명회 결성과 한일합방 반대운동이다. 회명은 ‘聲彼之罪 明我之’에서 딴 것이다. 1910년 8월23일 신한촌에는 비통한 소식이 전해졌다.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한일합방이 조인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이 비보를 접한 한인들은 한민학교에 700여명이 모여 성명회를 결성하고, 한일합방 반 대 선언서를 발표하였다.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사람들은 울분을 참지 못해 흐느꼈다. 선언서는 “오호라 해외재류동포여, 한번 머리를 들어 조국을 바라보라”로 시작하여 일본의 만행을 규탄하고 한일합방을 강력히 반대한다 는 요지로 끝을 맺고 있다. 이와 같이 시작된 성명회의 합방반대운동은 그 날 밤, 청년 50여명이 결사대를 조직하여 일본인 거류지를 습격하였다.

이 에 당황한 일본 영사관에서는 러시아 군부와 경찰 당국에 일본인 보호를 요청하였다. 이튿날 한인들의 행동은 더욱 격앙되어 결사대의 수는 1천여명 으로 늘어났으며 부녀자들까지 가담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26일에는 러시아 군·경의 감시로 블라디보스토크시내에서 시위를 하지 못하게 되자 시 북 방 2km 지점에 있는 ‘친고개’에서 다시 모임을 갖고 조국 독립의 결의를 재다짐하며 이윤의 제의로 “두만강의 결빙기를 기다려 의병을 200명 단위 로 부대를 편성하여 국내진공작전을 벌이고 총병력 1만여명에 달하면 독립전 쟁을 개시한다”는 안을 의결하였다. 그리고 선언서와 격문을 만주와 극동 노령지역의 한인들에 반포함으로써 그 활동 범위와 세를 확장하는 한편 선 언서를 영어, 불어, 러시아어 등으로 번역하여 세계 각국 정부와 신문사에 발송하였다.

이에 일본은 러시아에 성명회를 제재할 것을 강력히 요구함에 따라 8월30일 러시아 당국은 유인석, 이상설을 포함한 성명회 주요 인물 과 13도의군 간부 42명의 체포를 명하였다. 이때 이범윤을 비롯한 김좌두, 이남기, 권유상, 이규풍 등 8명은 시베리아 이르쿠츠크로 유형당했으며 유 인석, 홍범도, 이종호 등은 다행히 피신하여 화를 면했다. 이로써 성명회의 활동은 더 이상 진척 못하게 되었지만 성명회 선언서는 한민족의 독립의 지를 대변하는 최초의 합방무효선언으로서 그 이후 광복 때까지 줄기차게 전개된 항일독립선언의 원류가 되었다는 데 그 의미가 크다.

 

(2)

신한촌에서 일어났던 독립운동 중 가장 큰 비중을 지녔던 단체는 권업 회(勸業會)였다. 지난 회에서 논급한 바 있는 성명회는 일시적으로 섬광처럼 빛을 발하여 위세를 과시했으나 너무 급조된 조직체였고 지속적 행동이 따르지 못한 데다 러시아당국의 탄압을 받아 활동이 한 달도 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를 안타깝게 생각하고 사태의 진전을 주시하던 한인 지도자들은 보다 현실적이고 장기적인 안목에서 독립운동의 방략을 강구하게 되었다. 그 강구책으로 결성한 것이 권업회였다.

권업회는 1911년 12월19일 이상설, 이종호, 이동휘, 최재형, 최봉준, 이 범윤, 유인석, 홍범도, 윤해, 정재관 등 당시 신한촌 한인사회에서 가장 신뢰를 받고 영향력이 있는 애국인사들의 여러 계열의 단합된 노력에 의하 여 결성되었으며 임원에는 회장에 이상설, 부회장에 이종호가 선출되었다.

여기서 여러 계열의 지도자들의 단합이라 함은 상당한 의의가 있다. 왜냐하 면 많은 애국지사들이 신한촌을 중심으로 운집해 있었으나 그들의 주장과 입장이 각기 달라 통일된 단일의견을 도출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 니었기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 계열로는 첫째 일찍이 연해주에 이주하여 원 호(原戶)의 신분으로 경제·사회적으로 안정된 지위를 가진 계열이다. 최재형 , 최봉준, 김학만, 김병학, 차석보 등이 이 부류에 속한다. 둘째는 국내와 간도에서 일본에 항전하다가 연해주로 들어온 의병 계열인 유인석, 홍범도 등이 이에 속한다. 셋째는 국내외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던 계열이다.

헤이그 밀사로 활약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국민회 조직에 참여하고 그 총회장 정재관과 함께 연해주로 건너온 이상설과 국내 신민회에서 활동하던 이종호, 이동휘, 김하구, 윤해 등이 여기에 속한다. 이 계열들이 권업회 결성에 단합하고 동일보조를 취했다는 것은 노령 한인사회에서 권업회의 위상과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말해준다.

권업회는 그 명칭이 말해주듯 극동 노령 한인들에게 실업을 권장하고 근검절약정신을 기르며 교육을 장려하는 것이었다. 이 단체가 명칭을 권업이 라고 한 것은 일본의 방해를 피하고 러시아 당국의 허가를 얻어 합법적으 로 활동하기 위한 위장술이었고 실제는 독립운동이 주목적이었다. 따라서 권 업회는 급진적인 의병항전을 하거나 울분과 감정에 의한 극렬적인 항일시위 를 하기보다는 민족의 힘을 길러 장기적인 전략으로 독립전쟁을 해야한다는 데 역점을 두었다.

그리고 그 목표를 실천하기 위해 실업부, 교육부, 선 전부, 검사부 등의 부서를 두고 교육 진흥, 신문 간행, 한인 자치활동, 토지 조사, 귀화 문제 등의 업무를 추진하였다. 러시아 총독은 한인들의 이와 같은 활동이 극동 노령지역에 있어 정치·경제·군사적으로 도움을 주 는 요소로 간주하고 권업회 활동을 적극 권장하였고 한인들은 이에 고무되 어 힘을 얻었다. 그리고 극동 노령당국은 권업회로 하여금 연해주 한인의 자치기관의 지위를 부여하고 러시아당국의 행정 업무를 대행케 하였다.

권업회는 국내외 소식과 정보 교환 그리고 민족의식 고양 등의 필요성 을 절감하고 ‘권업신문’을 간행하였다. 이 신문은 순 한글로 간행한 것이 특징이며 1주일 1회 4면으로 일요일에 간행되었다. 필진은 신채호, 장도빈 , 이상설, 김하구, 윤해 등이 참여하여 민족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교육에 있어서는 권업회 본부 또는 지부의 관할 하에 있던 학교가 10개나 되며 학생 수는 1천명을 상회하였다. 신한촌에서 제일 규모가 크고 모범 교로 인정받던 한민학교는 신한촌 거류민회가 관할하였으나 거류민회가 권업 회에 통합됨으로써 권업회에서 관장하였다. 권업회는 회세가 꾸준히 확장되어 번성기에는 회원이 8천579명에 이르고 하바로프스크, 수이푼, 스챤 등 한 인사회가 있는 거의 모든 지역에 지회가 결성되어 10개 이상이나 되었다.

이처럼 권업회는 체계적이고 조직적으로 역동적인 활동을 함으로써 연해주 한인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14년 제1차세계대전의 발발로 러 시아와 일본이 동맹국으로 제휴함으로써 권업회를 강력히 탄압하여 그 활동 이 위축되었다.

블라디보스토크 주재 일본영사관에서는 이동휘, 이상설, 이종 호, 유동열, 이강 등 중요인사들을 연해주에서 추방할 것을 요구하고 러시 아 당국은 권업회를 해체시킴으로써 1914년 8월 단명의 비운을 맞았다. 한편 권업회와 신한촌민회에서는 이에 맞서 신한촌 내 일본인의 상점을 철수케 하고 일본인의 출입을 금지했으며 만약 출입하는 일본인이 발견되 면 한인 청년들이 사정없이 위해를 가했다. 이러한 한인의 강렬한 의기의 소식이 만주로 미주로 본국으로 전해지면서 온 민족의 독립의지는 더욱 결 연해졌다.

1919년 3·1독립운동 직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망명임시정부-대한국 민의회가 수립되었다. 이 시기 임시정부는 한 달 사이에 블라디보스토크(191 9. 3.21)와 중국 상해 임시정부(1919. 4.11) 국내 한성임시정부(1919. 4.23) 등 세 곳에서 수립되었는데 블라디보스토크에 수립된 임시정부가 제일 먼 저 수립된 점과 대한국민의회란 명칭을 사용한 점이 이채롭다. 여기서는 지 면상 대한국민의회에 대해서만 기술하고 다음 기회가 있으면 세 곳 임시정 부의 특징과 통합과정을 언급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1918년 11월 제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전후 세계문제 처리에 있어 윌슨 미국 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함에 따라 약소민족해방운동이 급속히 진 행되었다. 때마침 이듬해 1월8일부터 파리에서 강화회의가 시작되자 피지배민 족들은 독립을 쟁취할 수 있는 호기로 판단하고 저마다 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기에 열을 올렸다. 한민족 역시 이러한 국제정치적 상황을 충분히 활용하고자 하였다.

중국에 결성되어 있던 독립운동단체인 동제사(同濟社)는 그 하부 청년조직인 신한청년당의 명의로 미국 윌슨대통령과 파리강화회의 열국대표들에게 진정서를 보내는 한편 김규식을 한국민족대표로 파리에 파견 키로 하였다. 그리고 선우혁, 김철, 서병호, 김순애(김규식의 부인), 백남규 등을 국내에 파견하여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전하고 그 외 당원들을 만주, 러시아 등지의 한인들과 일본 유학생들에게 독립운동 봉기의 기회임을 알 려, 국내외의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이에 호응하여 1919년 2월25일 니코리스크(蘇王嶺:현 우수리스크)에서 전 로한인회의(全露韓人會議)를 개최하였다. 이 회의에는 러시아 각지의 한인대표 는 물론 북간도 대표 김약연, 정재면과 상해에서 온 여운형 등 80여명의 대표가 참가하였다. 이 대회에서 문창범, 김하석, 장기영 등의 발의로 전로 한족중앙총회를 확대 개편하여 대한국민의회를 창립하기로 의결했다.

이를 위 해 각지의 대표들이 다시 집결할 때까지 이 회에 참석한 지방연회(聯會) 대표 15명이 임시연합 상설회의를 구성하여 임시국민의회 준비작업을 담당케 했다. 그리고 윤해, 고창일을 파리에 파견하여 김규식과 합류하도록 했다.

이러한 운동이 진척되어가던 중 1919년 3월1일 본국에서 독립선언과 만 세시위가 일어났으며 이 소식은 즉각 러시아 한인사회에 전달되었다. 이에 호응하여 1919년 3월17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대한국민의회를 개최하고 독립선 언 발표와 경축시가행진을 하였다. 이어 3월21일에는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 의 각료 명단을 발표하고 5개항의 결의문을 채택하였다.

임시정부 각료명단: 대통령-손병희, 부통령-박영효, 국무총리-이승만, 군무 (및 선전)총장-이동휘, 탁지총장-윤현진, 내무총장-안창호, 산업총장-남형우, 참모총장-유동열, 강화대사-김규식 결의문: 1.민족자결주의에 입각한 한민족의 자주독립 2.일본통치철폐 3.파 리강화회의에 독립정부 승인 요구와 국제연맹 참가 4.독립운동의 실정과 정 부수립의 사실을 각국에 통고 5.이상의 목적이 달성되지 못할 때 대일혈전 포고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소비에트체제를 참작하여 국민의회가 입법, 행정 , 사법을 모두 관장하도록 하고 그 안의 행정부를 임시정부로 설정했다.

국민의회 임시정부의 특징은 1.의회주의 성격이 강하고 2.극동노령과 간도의 수십만 교포를 배경하고 있으며 3.독립군에 의한 무장투쟁을 강조하고 있 고 4.행정부 조직에 산업총장과 참모총장을 별도로 두어 교포의 산업진흥과 독립군을 양성하여 무력투쟁을 적극 추진하려는 기구를 갖춘 것이다. 또한 각료선임의 특징을 보면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확립하기 위하여 3·1독립선 언 대표 손병희를 대통령으로 추대했고 부통령에는 국내와의 연락 관계를 고려하여 박영효를 추대하였다.

그러나 손병희는 감옥에 있었고 박영효는 국 내에 있었으므로 모두 명예직에 불과했다. 실질적으로 국정을 담당할 국무총 리에 이승만과 내무총장에 안창호를 선임한 것은 이들의 명성과 미주독립운 동과의 관련을 중시한 듯하다. 김규식을 강화대사로 선임한 것은 이미 상해 신한청년당에서 파견한 기정사실을 임시정부 대표로 추인한 것이라 하겠다. 대한국민의회 임시정부는 1919년 9월6일 3개 임시정부가 상해임시정부로 통 합될 때 이에 합류하였다.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usjang7@hanmail.net

이윤기<해외한민족연구소장> <대구대학교 역사교육과> usjang7@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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