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변문(邊門), 책문(柵門), 고려문(高麗門) |
![]() 변문(邊門)은 조선의 국경도시 평북 의주로부터 48㎞ 떨어진 지점 구련성(九連城)과 봉황성(鳳凰城) 사이에 위치한 곳으로,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이자 별정소(別定所)가 있어 의주 관리들이 파견돼 상주하던 곳이었다. 옛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너 명이나 청나라로 들어가기 위해 처음 만나는 관문이다. 목책을 둘러쳐서 경계를 삼았다고 해서 책문(柵門)이라고도 하고, 변경에 있는 문이라해서 변문(邊門)이라고 부른다. 병자호란 때 잡혀간 고려인들이 살았다고해서 고려문(高麗門)으로 부르기도 한다. 책문(柵門)의 ‘책(柵)’이란 한길 반 쯤되는 나무를 세우고 그 사이사이에 나무를 엮어서 사람이나 말이 드나들 수 없게 만드는 것을 말한다고 한다. 일찍이 명나라는 흙과 돌, 나무로 울타리를 친 변장(邊牆)을 설치했으며, 그 뒤 청나라가 1660년대 허물어진 변장 근처에 버드나무를 잇대어 심고 그 바깥에 참호를 판 유조변을 구축한 책성(柵城)을 만들었다. 이 책성은 발해만 해변에서 시작해 내륙으로 2000리 뻗었으며 군데군데 사람이나 마차가 다닐 수 있게끔 책문을 설치했는데 그 수가 무려 70여개. 그 중 하나가 바로 변문이다. 이 변문의 배후 마을이 변문 마을이다. 지금은 약 2,000여 채의 민가가 있다고 한다. 1780년대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에서 이곳을 지날 때 민가가 20∼30여채가 있다고 적고 있다. 현재 조선인들도 20여 호 정도 살고 있는데 대부분 병자호란 때 잡혀온 조선인의 후예들이라고 한다. 신의주와 단동간은 지금이야 다리가 놓여있기도 하고 큰 도시로 발전했지만 조선 시대 말기까지만 해도 물이 깊고 넓어 거의 도시로 발전하지 못한 상태였으니 조선과 중국간의 교역은 주로 봉황성 변문을 중심으로 이뤄졌다고 할 수 있다. 이 마을을 지나가는 단동-심양 열차가 쉬어가는 역 이름은 이 마을 뒷산의 이름을 따서 일면산역이다 . 그러나 1964년 이전 이 역의 이름은 고려문역이었다. 조선과 청국간 국경 마을인 이 마을에 고려사람들이 많이 살던 곳이라는 것이 증명된다. 그리고 지금도 변문이란 마을 이름은 국경을 의미한다. 이곳에서 1794년 12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가 한복으로 갈아입고 조선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1836년 모방 신부, 1837년 1월 샤스탕 신부, 그리고 그해 12월 엥베르 주교가 방갓 차림으로 변장한 뒤 조선을 향했던 곳이다. 브뤼기에르 주교도 중국을 3년여 헤매면서 이 마을에 들어와 변장한 뒤 조선으로 향하는 꿈을 늘 가슴에 간직했던 곳이기도 하다. 김대건, 최방제, 최양업 세 소년도 바로 여길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온 주요 루트이기도 하다. 이 세 소년은 마카오로 유학을 떠나기 위해 1836년 12월 3일 모방 신부 앞에서 성서에 손을 얹고 순명과 복종 서약을 하고 정하상(丁夏祥, 바오로), 조신철(趙信喆, 가롤로) 등의 인도를 받아 변문(邊門)으로 출발, 그해 12월 28일 조선 입국을 위해 이곳에 와있던 샤스탕(Chastant, 鄭牙各伯) 신부와 만난 곳이다. 몇 년 후인 1842년부터는 마카오에서 신학공부를 하고 한국 입국을 시도하기 위해 이곳과 두만강 등을 수없이 헤메이기도 하였다. 기록에 보면 1842년 말 김대건 신학생은 이곳에서 김 프란치스코라는 조선 밀사를 만나 1839년의 기해박해로 자신의 스승이었던 모방, 샤스탕 신부와 엥베르 주교, 심지어 자신의 아버지뿐만 아니라 동료였던 최양업 부모의 순교 소식까지 들었다. 김대건 신학생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조선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김 프란치스코는 북경에 갔다오는 사신 일행의 일원이었으며 당시 사정이 좋지 않다고 말렸으나 “그럼 나 혼자 가겠다.”고 길을 나서 혼자 변문을 지나 일단 조선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조선 옷을 구하지 못한 채 중국 옷을 조선 옷 비슷하게 흉내를 내었는데 이게 곧 사람들의 의심을 사기 시작해 결국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다시 변문을 통해 중국으로 빠져나왔다고 한다. 그곳이 바로 이 변문 마을이다. 1844년 12월 김대건이 부제품을 받은 직후 페레올 주교와 김대건 부제는 소팔가자를 떠나 봉황성 변문으로 향했다. 12월 말 변문에 도착한 그들은 1845년 1월 1일 이곳에 이미 와 있던 조선 신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페레올 주교는 포교지 조선에 들어간다는 기대를 가졌지만 조선 국경인 의주 변문쪽 경비가 삼엄해 입국이 불가능해 할 수 없이 김대건 부제를 먼저 조선에 입국시키로 했다. 신자들을 따라 의주 변문 근처에 온 김대건 부제는 어렵사리 국경을 통과한 후 다시 신자들을 만나 평양을 거쳐 1월 15일 한양 돌우물골(石井洞)에 신자들이 마련해 놓은 집에 도착했다. 한양을 떠난지 9년 만이었다. 15살 소년은 24살 청년으로 장성했고, 부제품을 받은 어엿한 성직자 신분이 됐다. 조선을 향해 마카오를 출발한지 3년이 지났다. 그동안 네 번이나 입국로 탐사를 시도했고 두 번은 조선 땅 의주까지 들어왔으나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다섯 번째 시도에서 김대건은 마침내 한양 땅을 밟았다. 변문 마을은 지금도 국경 요충지인데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 시설인 무기고가 있다고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큰 산 두 개 사이에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 게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봉황산 변문이라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 다시 120리를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단동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우리는 책문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 사람은 변문(邊門)·가자문(架子門)·고려문(高麗門)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그 연도에서 ‘변문진’의 표적을 볼 수 있다.책문을 통과함으로써 본격적인 중국 땅에 들어서게 된다. 옛 책문이 있었다는 곳은 현재로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수백년의 세월을 거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고, 특히 지난세기의 중국 문화대혁명은 과거와의 단절로 상징되듯, 우리 역사와 밀접한 연관이 있는 유적들도 모두 파괴했다. 또한 당시까지만 해도 이곳이 조선땅이었음을 확인해주는 중요한 단서가 되기 때문이다. 옛 고려문은 1966년 홍위병들이 철폐시켰고 1995년 5월에 설치된 변문진(邊門鎭)이란 비석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변문진 북쪽을 고려마을이라 부른 것으로 보아 우리 민족이 그곳에서 상업과 농업을 하면서 살아왔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 1737∼1805)의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의하면 울짱으로 된 문 책문은 연암의 눈에 불을 지핀 곳이다. 고구려 때 양만춘 장군이 당나라 대군을 격퇴한 안시성(安市城)이 이곳이라는 풍설이 있는가 하면, 명·청 때까지 조선인 가구 수천호가 살아서 ‘가오리먼(高麗門)’으로 불렸던 역사적인 유서지이고, 봉황산의 빼어난 산수에 에워싸인 책문 안 청나라인의 삶의 현장이 질투를 유발할 정도로 풍요로운데다 청인들이 일용하는 도르래나 편담 등 기물이 과학적이었기 때문이다. 연암은 책문이 나무 각으로 울을 짜서 겨우 경계를 표시했노라고, 그러니까 버들가지를 꺾어서 채전의 울타리를 만든 격이라 했다. 책문 저 안에는 민가가 널려 있었다. 수레와 차들이 북적였고, 다섯 개의 들보가 높이 솟은 민가들은 그 등성마루나 문호가 훤칠하고 가지런하여 연암은 기가 한풀 꺾였다. 그 와중에 책문 밖에선 부채, 먹, 손칼, 장지, 담뱃대, 은장도, 연죽 등의 예단(禮單)을 두고 청나라 관원과 우리 역관 사이에 밀고 당기는 야료가 벌어졌다. 사신들을 따라 연행길에 오른 상인들이 이곳 책문 일대에서 중국상인들과 교역을 했기때문에 '책문후시(柵門後市)'라는 이름이 생겨나기도 하였다. 변문의 역사적 고찰 단동에서 심양으로 국도를 따라 130리를 가면 봉성시 조금 못 미쳐 고려문이 있던 변문진(변두리(邊)의 경계진영(鎭)을 표시한 문(門))이 나타난다. 지금의 행정구역으로 변문진 변문촌이다. 이 지역은 지명에서도 알수 있듯이 당시 조선의 국경도시로 한만 국경 출입을 위해 한국 관리가 파견된 별정소가 있던 곳으로 엄연한 우리 땅이다. 고려문(高麗門 ; Korean-Gate)은 책문(柵門)의 하나로 우리나라 국경 도시인 의주(義州)에서 약 48Km되는 곳에 있는 마을의 이름이다. 말하자면 고려문은 한국인이 중국에 들어가는 관문과 같으며, 이곳에는 출입국 관리하기 위한 우리나라 별정소(別定所)가 설치되어 있었고 의주부(義州府)의 집사(執事) 몇 사람이 항상 파견, 주둔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봄과 가을에 정기적으로 교역 시장이 열려 많은 한국인이 찾아와 교역하고 돌아가곤 하였다. ![]() 1996년 9월 17일 길림성 봉산구(鳳山區)에서 세운 변문진 표지석 위치가 고려문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변문진의 진(鎭)은 바닷가나 강변에 군대가 진주하고 있을 경우에 흔히 쓰는 강변 혹은 해변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으므로 중국쪽의 제일 변두리에 세워졌던 변문(邊門)을 의미한다. 그러나 지금은 고려문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1966년 문을 없애고 그 자리에 1995년 5월에 높이 1m70cm,넓이 50cm의 표지석을 세웠다. 붉은 글씨로 세겨진 변문진 글자 밑에 영어로 'Blarimen Zhen'을 새겼으며,뒷면에는 '1995年 5月'이란 글씨가 있다. 표지석은 일면산(一面山)역에서 가까운 곳에 있으며,철길 건널목 도로변에 자리잡고 있다. 아직도 주변에는 고려문을 헐었던 돌무더기가 보인다. 일면산역은 원래 고려문역이었다. 1962년 김일성이 중국을 방문할 때 이곳을 지나가기 때문에 역 이름을 일면산역(一面山驛)으로 바꾸어버렸다. 이곳 변문에서 남쪽으로 조금 가면 '조선촌'이라는 곳이 있었다. 그 때 이곳도 김일성이가 지나가다가 조선땅이다고 할까봐 이름을 탕하(湯河)라고 바꾸어 버렸다. 심양에서 단동까지 철도를 놓았던 일본 건설회사의 기록을 보면(間組百年事 185쪽) "고려문역"이 분명히 있었다. 안동현(安東懸)-사하진(沙河鎭)-합마당(蛤마塘)-오룡배(五龍背)-탕산성(湯山城)-고려문(高麗門)-봉황성(鳳凰城)이었으나 현재의 역 이름을 보면 단동-사하진-합마당-오룡배-탕산성-일면산-봉황성으로 되어 있어 "고려문"만 "일면산역"으로 바뀌었다. 변문진에서 북쪽은 한족(漢族) 마을이 있고, 그 건너편이 고려 마을이 있었다. 이 곳에 사는 어른들의 증언에 의하면 "이 지역은 조선 땅이 맞다." "당시 이 곳에 3000호에 달하는 한국인 가구가 있었다. 최근까지 살고 있었는데 북한에서 이 지역을 내 놓으라고 해서 지금은 인근 다른 지역으로 이주시켜 한명도 없다." "고려문의 위치는 군부대 안에 있었는데 현재는 없다. 오래전에 없어졌다." 중국 정부는 고려문의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군부대를 주둔시키고, 기차길도 막아 버렸다. 군부대를 따라 카메라를 설치하여 출입을 감시하고 있었다. 군부대 담장과 봉황산이 끝나는 지점 너머가 고려고성이 있던 자리로 추정된다. 조선과 청 사이에는 국경이라는 것이 없었는데 정묘호란의 강화조약인 강도회맹에 의해 양국간에 서쪽과 북쪽의 국경을 책정하였다. 1627년 3월 3일 체결한 강도회맹에 “조선 국왕은 금국과 더불어 맹약을 한다. 우리 두 나라가 이미 화친을 결정하였으니, 이후로는 서로 맹약을 준수하여 각각 자기 나라를 지키도록 한다.(朝鮮國與金國立誓 我兩國已講和好 今後兩國 各遵誓約 各守封疆)”는 내용으로 보아 양국간에 국경을 정했음을 알 수 있다. 그 당시 국경선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청 호부의 기록에 청의 태종이 1638년에 압록강 하류지점 남반에서 봉황성을 거쳐 감양변문(京興)을 지나 성창문(城廠門)과 왕청변문(旺晴邊門)에 이르는 150리 내지 200리 가량의 방압공사(防壓工事)를 실시하였다. 그리고 1670년(강희 9년)부터 개원(開原) 위원보(威遠堡)에서 시작하여 북쪽으로 전장 343.1km의 ‘유조변책(柳條邊柵)’을 1681년(강희 20년)까지 설치한 것으로 나타나 있으며, 지금도 사평(四平)에서 이수(梨樹), 공주령(公主嶺), 이통(伊通), 장춘(長春), 구태(九台)를 거쳐 서란(舒蘭)까지 구불구불 이어진 유조변의 유적이 아직도 남아 있다. 사평시(四平市) 산문향(山門鄕)에는 포이도고소파이한변문아문(布爾圖庫蘇巴爾汗邊門衙門)의 병사(兵舍)가 남아 있다. 기록에 의하면 청나라는 봉황성으로부터 서쪽으로 산해관에 이르기까지 둘레 1,800여 리에 이르는 울타리를 쳤고, 그 중간에 총 17개의 문을 두었다. 그리고 각 문마다 지키는 관병을 두었고, 그 주위에 장정들을 선발하여 거주하게 하였다. 책문은 조선과 청나라의 실질적인 국경이었고, 그런만큼 일정한 통관 절차를 밟아야 했던 곳이었다. 연행사들은 역관을 보내 사신의 인적 사항과 인마(人馬)의 수 등을 적은 문서를 보냈고, 책문의 관리자인 봉성장(鳳城將)이 나와 인마를 점고하고 들여보냈다. 간혹 이 통관 절차를 엄격하게 할 때가 있어, 연행사들은 책문의 관리 책임자부터 말단의 호송 군조들에게까지 종이ㆍ부채ㆍ붓ㆍ담뱃대 등의 예물을 나누어 주었다. 봉성시(鳳城市)에는 봉황성과 남문, 동문, 서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봉황성은 조선 쪽의 국경을 책임지는 도시로, 봉황성장이 주관하였다. 명나라의 지리서 『일통지(一統志)』에 따르면 발해 때에는 동경용원부(東京龍原府), 요나라 때에는 개주진국군(開州鎭國軍)이 설치되었고, 원나라 때에는 동녕로(東寧路)에 소속되었다. 명나라 때에 벽돌로 튼튼하게 성을 쌓았고, 청나라에 이르러서는 조선과의 국경 무역으로 번성하였다. 현지인들은 조선을 숭상하여 사행에 따라온 의주 사람을 이웃 친지처럼 대하였다. (조병현, 북한토지연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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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문 마을은 지금도 국경 요충지인데다 중국 인민해방군의 주요 시설인 무기고가 있다고 하여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큰 산 두 개 사이에 작은 모래 언덕이 있는 게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봉황산 변문이라고 한다. 압록강을 건너 다시 120리를 들어가야 중국의 국경선인 책문(柵門)이다. 압록강으로부터 책문까지는 사람이 살지 않는 이른바 완충지대였던 것이다. 단동역에서 옛 책문 터인 일면산(一面山)역까진 기찻길로 45km. 우리는 책문이라 부르는 것을 중국 사람은 변문(邊門)·가자문(架子門)·고려문(高麗門) 등으로 불렀다. 지금은 행정구역으로 변문진(邊門鎭)에 속하며 단동으로부터 봉황성시(鳳凰城市)로 가는 국도 304번 그 연도에서 ‘변문진’의 표적을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