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도의 위치 및 백두산 정계비에 대한 설명
일반적인 위성 사진에 강(江)의 위치를 보기 편하게 만들어봤습니다.
간도의 문제에 대해서 정리할려면 우선 백두산 정계비에 대해서 알아야 합니다.
백두산 정계비는 1712년 목극등이라는 통관에 의해 제작된 국경을 명시해놓은 비석이라 알려져 있습니다.오늘날 우리와 중국간(청나라때부터..) 분쟁의 중심에 있는 이 비석의 내용의 한부분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烏喇摠管 穆克登(오라총관 목극등),奉旨査邊(봉지사변)
오라총관 목극등이 왕의 뜻을 받들어 변방 경계를 조사하게 되어
至此審視(지차심시),西爲鴨綠(서위압록),東爲土門(동위토문)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니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므로
故於分水嶺上(고어분수령상),勒石爲記(늑석위기)
물이 나뉘는 고개 위에 돌을 새겨 기록하노라.
- 아래 내용 줄임 -
라고 적혀 있습니다.
양측의 주장
여기서 우리와 중국측의 주장이 엇갈리는데 내용을 간략히 살펴보면 우리측 주장은 아래와 같습니다.
숙종조때 청나라와 국경협약이 있었는데 압록강과 토문강을 경계로 삼자고 했다. 조선은 토문강이 송화강의 지류이니 그것을 경계로 알고 주민이 이주하였는데 청나라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우겨서 영토분쟁이 일어났다.그와중에 을사조약 이후 일본이 철도 부설권을 얻는 조건으로 간도를 중국으로 넘겨 줬다. 을사조약은 우리나라 왕의 허가 없는 계약이니 무효이고 그에 따라 간도 협약도 무효임으로 간도는 원래의 주인인 조선의 영토로 귀속되여야 한다.
라는 것이 우리측의 주장입니다.
반면 중국의 주장은 우리의 압록강과 토문강이라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사실 무근이다.
토문강이라는 것은 도문강 즉 두만강을 뜻하는 것이다 라고 하는것이 그들의 얘기입니다.
여기 까지가 보통 알려져 있는 상황입니다.
중요한것은 이것이 아니니 간단히만 알고 넘어 가겠습니다.
바로 알아야 할 몇가지 사실과 견해
앞서 보셨던 것처럼 우리측의 주장은 상당히 논리적인 주장인 것처럼 보입니다.
비문의 내용을 위주로 상당히 설득력이 있어 보이는군요.
하지만 제가 보는 관점은 약간 다릅니다.
저위에 우리측 주장은 말도 안되는 거짓이라는 것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의 주장에 대한 근거들은 무수히 많습니다.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이익의 성호사설 -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기술
조선왕조의 수많은 관찬 지도들, 이중환의 택리지 - 함경도의 경계를 두만강으로 표기
등등이 있습니다.
물론 간도 영유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내놓은 외국지도가 상당히 신빙성이 있어보이지만
알고보면 우리나라의 국경도 제대로 모르던 사람들이고 우리나라를 청의 주변국이 아닌 청의 지방쯤으로 그린 지도도 있는것을 보면 외국이 기술한 내용들은 그리 믿을것이 없다는 것을 알아 주셨으면 합니다.조선왕조 실록의 내용을 봐도 우리가 얼마나 논리없이 거짓을 말하고 있는가를 알수 있습니다.
아래는 숙종조때의 일입니다.
접반사 박권이 백두산 정계의 일에 대해서 치계하다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이 치계하기를,
“총관(摠管)이 백산(白山) 산마루에 올라 살펴보았더니, 압록강(鴨綠江)의 근원이 과연 산 허리의 남변(南邊)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미 경계(境界)로 삼았으며, 토문강(土門江)의 근원은 백두산 동변(東邊)의 가장 낮은 곳에 한 갈래 물줄기가 동쪽으로 흘렀습니다. 총관이 이것을 가리켜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이라 하고 말하기를, ‘이 물이 하나는 동쪽으로 하나는 서쪽으로 흘러서 나뉘어 두 강(江)이 되었으니 분수령(分水嶺)으로 일컫는 것이 좋겠다.’ 하고, 고개 위에 비(碑)를 세우고자 하며 말하기를, ‘경계를 정하고 비석을 세움이 황상(皇上)의 뜻이다. 도신(道臣)과 빈신(貧臣)도 또한 마땅히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겨야 한다.’고 하기에, 신 등은 이미 함께 가서 간심(看審)하지 못하고 비석 끝에다 이름을 새김은 일이 성실(誠實)하지 못하다.’는 말로 대답하였습니다.”
위에 내용을 보시면 주황색으로 표시한 부분에 분명하게도 지명과 그 강의 특성이 나와 있습니다. 바로 두만강이죠.청의 사신과 조선의 사신은 토문강이 압록강과 두만강의 상류 지류인줄 알았던 겁니다. 토문강에서 물이 흘러 두만강과 압록강으로 흐른다고 두나라가 다 잘못 알고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강은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토문강과 두만강 압록강이 만나는 지점을 경계로 압록강과 두만강의 지도상 북쪽은 청나라이고 남쪽은 조선이라 말한 것입니다.글의 내용을 자세히 보면 두만강에 대한 부분이 있는데 동쪽으로 흐르고 얼마후 바다로 이어진다는것도 나와 있습니다.
어쨋든 목극동은 만나는 지점에 국경을 알리는 목책을 세우라 명하고 떠납니다.
그런데 우습게도 우리나라 사신이 목책을 세우려 가봤더니 토문강은 우리나라쪽으로 흐르는 것이 아니라 북으로 흘렀고 더더군다나 강은 연결도 되어 있지 않습니다.
당시 당황한 사신에 숙종조에게 이 사실을 알립니다.
신(臣)이 여러 차사원(差使員)들을 데리고 청차가 이른바 강의 수원이 도로 들어가는 곳이란 곳에 도착하자, 감역(監役)과 차원(差員) 모두가 하는 말이 ‘이 물이 비록 총관(摠管)이 정한 바 강의 수원이지만, 그때는 일이 급박하여 미처 그 하류(下流)를 두루 찾아보지 못했습니다. 이번에 푯말을 세우게 되었으니 한 번 가보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이 허(許)와 박(朴)【거산 찰방(居山察訪) 허양(許樑)과 나난 만호(羅暖萬戶) 박도상(朴道常)이다.】 두 차원을 시켜 함께 가서 살펴보게 했더니, 돌아와서 고하기를, ‘흐름을 따라 거의 30리를 가니 이 물의 하류는 또 북쪽에서 내려오는 딴 물과 합쳐 점점 동북(東北)을 향해 갔고, 두만강에는 속하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끝까지 찾아보려고 한다면 사세로 보아 장차 오랑캐들 지역으로 깊이 들어가야 하며, 만약 혹시라도 피인(彼人)들을 만난다면 일이 불편하게 되겠기에 앞질러 돌아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송화강으로 흘러가는 부분이 분명 오랑케의 땅이라 말을 하고 있습니다.
뒤에 보시면 청이 이미 자기 땅이라고 목책을 세운 것도 나오고 조선의 관리가 세세히 알아보지 않았던 점을 들어 처벌해야 한다고 하는 부분도 나옵니다.
토문강에 대한 의문점은 그들의 실수에 의한 헤프닝입니다.
토문강이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흘러 들어가는 수원지로 알고 있었고 경계점이 아닌 수원지로 토문강을 언급 했을뿐 어디에도 토문강 하류인 송화강 주변이 경계라는 사실적 근거는 없습니다.
오히려 원문을보시면 토문강주변은 오랑케의 땅이라는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어쨋든 문제는 조선말 고종때로 이어집니다.
조선말에는 목책이든가 하는 등의 경계가 불분명 해지고 사람들이 빈땅(봉금정책으로..)에 들어가 땅을 개간하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부분이 문제가 되어 국경 문제가 대두 된것입니다.
덕원부사 이중하가 상소를 올려 경계 문제를 보고하다
덕원 부사(德源府使) 이중하(李重夏)가 올린 상소의 대략에,
“신이 재작년 겨울에 분에 넘치게도 토문강(土門江)의 경계를 확인하라는 명을 받고, 중국 관원 진영(秦瑛) 등과 함께 백두산(白頭山) 꼭대기에 올라가 두만강(豆滿江)의 근원을 두루 답사한 다음 달포나 논쟁했으나 끝내 결말을 보지 못하여 치계(馳啓)하고 대죄(待罪)하고 있었는데, 곧 다시 조사하도록 명을 받았습니다.
맡은 일이 중대한 만큼 응당 재촉해서 행장을 꾸려 길을 떠나야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건대, 나라의 일 가운데서도 국경에 관한 문제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세종(世宗) 때와 숙종(肅宗) 때 북쪽의 경계 문제를 처리한 것을 두루 상고하여 보니, 그때에는 중신(重臣)과 도신(道臣)이 함께 변경에 머물렀으며 임금과 신하, 상하 모두가 오랫동안 고생하며 주획(籌劃)한 뒤에야 비로소 일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신으로 말하면 배운 것이 없고 식견이 얕으며 품계가 낮고 사람이 보잘 것 없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중임을 맡았으니 어찌 소홀하여 실수를 하지 않겠습니까? 만일 착오가 있게 되면 주륙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오늘날 경계를 확인하는 일은 지난 시기에 비할 것이 못 됩니다. 옛날의 경계를 다시 밝히고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시키는 데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나 옛날의 경계로 말한다면 수원(水源)이 일치하지 않고 목책(木柵)도 다 썩어서 실제의 장소가 옛 문헌과 맞지 않기 때문에 옳게 확인하기가 오늘날에는 난처합니다. 유민들로 말한다면 강에 대한 단속이 오랫동안 해이해져 넘어간 사람들이 아주 많은데 쇄환할 길이 없으며 그렇다고 내버려둘 수도 없습니다.
전번에 청(淸)에서 온 자문(咨文)에 저들의 국적에 편입시키겠다는 뜻을 보였지만, 이 역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강토와 백성들에게 관계되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니, 묘당(廟堂)에서 충분히 의논하도록 해야 합니다. 옛날의 경계에 대해서는 도지(圖誌)를 살펴 고증하고 유민들에 대해서는 사리를 잘 헤아려 표획(標劃)할 곳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이고, 안착시킬 곳은 이쪽 땅인가 저쪽 땅인가 하는 것을 충분히 토의하고 확정하여 다시 참작하여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감당할 만한 사람을 새로 차하(差下)하여 다시 분명히 통지하면 나라의 체면도 정중하게 되고 사리에도 합당하게 될 것입니다.“
하니, 비답하기를,
“신중하게 조사해야 할 일이기 때문에 다시 획정하도록 한 것이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곧 가서 일을 처리하라.“ 하였다.
위에 내용을 보시면 조중하가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것을 알수 있습니다.
이미 조중하는 강에 대한 단속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서 국경을 넘었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앞에 유민들을 찾아다 안착 이라는 표현을 썼는데 다르게 돌려 말하면 이미 살고 있는 사람들을 어디다가 찾아서 안착 시킨다는 건가라고 돌려 생각 할수 있는 것입니다. 또 뒤에 옛날의 경계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그가 목책의 위치를 알고 있다는 말을 하고 있는것이죠. 그곳에 살고 있는 거주자들이 이곳은 자기들 땅이다라고 주장하는데 백성의 말을 나몰라라 할수 없었던 조중하는 내용을 이미 알고 있슴에도 모른척 조정에 의견을 물어보는 겁니다.
간도라고 칭하는 땅은 청의 근원지이고 신성시 되는 땅입니다. 그래서 청이 봉금정책(땅에 사람을 물리고 비워 신성화 하는것)을 하고 있었던 땅이고 당연히 사람이 없는 빈땅이 되었던 것이죠. 조선인들이 마구 들어가 땅을 개간하고 살았던 겁니다.이에 청에서 관리가 나와 이에 문제를 제기 하기 시작하면서 논란이 시작된것이죠.어쨋든 조중하의 상소문에도 보여 지듯 수원지는 토문강이고 그 땅은 우리의 땅이 아닌 청나라의 땅이라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의 주장대로 송화강이 국경이었다면 이 상소문의 내용만 놓고 봤을때 송화강 이북쪽에서 일어난 일이 되야 하는것이 정답이겠죠. 하지만 그런 사실을 뒷받침 할만한 어떤 근거도 있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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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내용은 몇가지 사실일 뿐입니다 이외에도 우리의 주장이 이치적으로 봤을때 옳지 못한점이 많다라고 볼수있을만한 근거들이 상당수 있습니다.역사적인 증거가 충분 해야하는 이런 일에 찾아보면 헛점이 너무나 많은 것은 약점이 아닐수 없겠죠.
지금 국민에게 알려진 공소시효 100년이라는 말도 사실은 어불 성설에 거짓입니다.쉽게 얘기해서 뺏긴 땅이라면 백년이 지나든 이백년이 지나든 무슨 상관입니까. 기간을 떠나서 찾아와야죠.
간도라는 땅이 우리에게 온다면 지금의 남북한 땅을 다 합친 것보다 큰 땅을 얻는것인데 왜 좋지 않겠습니까.하지만 자료가 너무도 신빙성이 없고 오히려 우리의 역사를 써 놓은 조선왕조 실록 같은 것에도 찾아 볼수 있을만큼 아니라는것이 알려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김영삼 정부때 IMF가 터질 무렵 정부에서 쓸데없는 주장을 다시 벌이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낚여 사실화 되고 또 지금에서 들고 일어 나는것은 정치적인 선동으로 물타기를 하려는 수작으로 밖에 보이질 않는군요.
중국은 대국입니다. 짱깨니 대륙의 무엇이니 하며 떠드는거 다 좋습니다 어짜피 웃자고 하는 것이니 웃으면 좋죠. 하지만 일본이 우리의 독도를 자기의 땅이라고 우기는 것에 대해 우리가 심각하게 받아 들이고 그들을 욕하는 것처럼 중국도 또한 우리가 우기는 간도땅에 대해서 굉장한 논란이 있을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할것이고 이 문제가 크게 번져 옳고 그름의 기준이 확연하지 않은 일로 말미암아 득보다는 실이 더 큰 분쟁이 되는것이 아닐까 하는 걱정도 하셔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에 대한 책임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막대한 경제적 불이익으로 이어 질수 있다는 것을 명심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