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 게시판

국제시장

작성자36회 김옥덕|작성시간16.01.11|조회수172 목록 댓글 8

 그해 겨울 우리 집에서는 두 번의 잔치가 있었다. 길일(吉日)이라고 받은 날이 소한과 대한이었다.

1960년 1월 6일, 24절기 중 가장 춥다는 소한에 작은고모의 결혼식, 보름 뒤 대한에 큰이모의 결혼식이 있었다.

고모야 당연하지만 이모까지 우리 집에서 한 이유는 각별했던 두 분 할아버지 인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한 고향 실향민이란 인연으로 사돈으로 맺어졌다.

회갑 전에 세상을 떠난 외할아버지 외할머니를 대신해 이모의 혼인 잔치를 우리 집에서 허락한 할아버지의 훌륭한 인품에 외가 친척들의 칭송이 자자했다.

 

 요즘과는 사뭇 달랐던 결혼 잔치 풍습, 그때는 집에서 하객들에게 음식대접을 했다.

며칠 전부터 친척들이 오셨고 잔치 음식 장만으로 온 집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턱이 높은 부엌, 바닥은 더 깊어 출입이 불편했던 전통 한옥 구조에 장작을 때 음식을 만들었고 우물과 수도는 마당 장독대에 있었다. 꽁꽁 얼어붙은 수도에 뜨거운 물을 부어 녹였다.

음식 재료를 상자째 그득하게 사들였고, 음식 냄새가 온 동네를 휘저었다.

열린 대문으로 각설이가 들어오면 푸짐하게 먹여보내기도 했다. 
 

 신혼여행이 생겨나기 전이라 신방을 집에서 차렸다.

이튿날도 친척들이 모여 신랑 다루기로 비명과 엄살로 웃음꽃이 만발했고 부엌에선 계속 음식 장만으로 분주했다.

잔치 준비부터 결혼식, 신행 가기까지 1주일 이상은 집에서 잔치 분위기가 이어졌다.

두 번의 잔치를 치르고 나니 겨울방학이 거의 끝나 있었다.

숙제가 밀려서 끙끙대며 애를 썼던 기억이 지금도 또렷하다.

 

 그때는 4월에 새 학년이 시작되었다.

3월 봄방학 중에 종고모님의 초대로 소한에 결혼한 고모 내외와 할머님을 모시고 여동생과 함께 부산에 가게 되었다. 나는 중학교 입학식을 앞두고 있었고, 여동생은 취학전이었기에 따라갈 수 있었다.

종고모님은 6.25 한국전쟁 때 평양에서 피난 내려와 부산에 살고 계셨다.

종고모님이 부산의 명물인 국제시장에 구경 가자고 했다.

영화 '국제시장'이 태어나기 반세기 전이었다.

토박이보다 피난민이 더 많은 때라 국제시장은 많은 사람들로 붐볐고 어마어마하게 넓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은 처음 보았다.

맏이라 가끔 엄마 따라 대구 서문 시장에는 가보았지만, 국제시장은 처음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가게들, 끝도 없이 물결치는 인파들, 그중에서 온갖 무늬의 알록달록한 색으로 휘황찬란한 포목점 앞에서는 구경하는데 넋이 나가다시피 눈만 휘둥그레졌다.

여기가 영화 국제시장의 꽃분이 가게였을까.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가면서 눈은 좌우 양쪽의 아름다운 옷감을 구경하느라 정신을 빼놓고 있었다.
 

 "야가 어데 갔노?"

할머니의 비명에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여동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아이고, 큰일 났구나. 이 넓은 시장 바닥에서 어디서 아아(아이)를 찾겠노?" 

우리 모두는 그 자리에 얼어붙었다.

우왕좌왕하다가 포목점 주인들에게 일곱 살쯤 되고 빨간 스웨터 입은 여자애를 못 봤냐고 다그쳤다.

못 봤다는 대답에 모두 하얗게 질린 얼굴로 계속 묻고 물으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빨간 스웨터만 보이면 달려갔고 울면서 또 뛰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그저 머릿속이 하얘져 동생 이름만 애타게 불렀다.

한 가게 주인이 조금 전에 그런 여자애가 울면서 지나갔다는 말에 마지막 사력을 다해 그 쪽으로 달려갔다.

숨이 차는 것도 모르고 정신없이 동생 이름을 부르며 뛰었다.

 아, 그런데 저기 앞에 동생이 울면서 걸어가고 있는 게 보였다.

동생도 제이름을 들었는지 뒤를 돌아다봤다. 달려갔다. 화살보다 빨리.

눈물 콧물 범벅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얼싸안았다.

안도감에 다리 힘이 풀려 주저앉아 그때서야 마음 놓고 엉엉 울었다.

하나님 부처님 무조건 고맙습니다.
 

 할머니 치마꼬리를 잡고 따라가던 동생도 구경에 정신을 뺏겨, 어느 순간 다른 할머니 치마를 잡고 따라갔다고 한다. 그 할머니가 동생 손을 뿌리치기 전까지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한다.

울며불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를 반복하며 우리를 찾아 헤맸던 것이다. 그래도 운이 좋았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소름이 돋는다.

일곱 살이던 여동생은 지금 이순의 나이에 존경과 신뢰를 받는 내과 전문의로 일하고 있다.

형제자매 중 가장 착실하고 삶의 목표가 뚜렷한 여동생은 부모님의 가장 자랑스러운 딸이 되어 있다.

생각하기도 끔찍한 일이지만 만약 그때 일이 잘못 되었다면 우리 가족 모두는 평생 국제시장 미아가 되어 흐느끼며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2015.12.25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답댓글 작성자36회 김옥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12 그래서 동생 앞에서는 일절 이 이야기를 꺼내지 않습니다.
    늦은 나이에 두 아들 키우면서도 외출시에는 언제나 손을 잡고 다녔습니다.
  • 작성자40회 장인순 | 작성시간 16.01.12 옛 풍경이 고스란히 전달되어 너무 반가운 글입니다.
    저도 번화가에서 어린 둘째딸을 잃어 얼마나 애간장이 탔었는지!!!
    택시를 타고 거리를 오르내리며 훑은 결과
    어느 슈퍼마켓 주인이 애를 보호하고 있어서
    쉽게 찾을 수 있었답니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이 죄어옵니다.
    무사히 찾았을 때의 안도감도 느껴 본 사람으로
    글 속에서 그대로 전달받은 느낌입니다.
  • 답댓글 작성자36회 김옥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12 그런 일이 있었군요.
    부모에겐 이런 일이 가장 다급하고 애간장 녹는 일이지요.
    그래도 금방 찾아서 다행입니다.
  • 작성자28회 박정자 | 작성시간 16.01.13 옥덕아우 글이 점점 재미있게 다듬어져 갑니다 수필집 한권 내야겠어요
  • 답댓글 작성자36회 김옥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6.01.13 아직 요원한 일입니다.
    8순에나 가능하려는지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