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우리 삶의 현장과 안간힘을,보건관리 현장을 1년 여간 촬영한 다큐멘터리 카타리나의 주말 영화]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라>

작성자쌩떽쥐베리|작성시간11.12.12|조회수42 목록 댓글 0

보라, 보랏빛으로 물들어가는 우리 삶의 현장과 안간힘을
[카타리나의 주말 영화]이강현 감독의 다큐멘터리, <보라>
2011년 12월 10일 (토) 15:11:15 진수미 shistory@hanmail.net

   

고통스럽지만 응시해야 하는 것들이 있다. 이상(李箱)은 먹기 싫어하는 것을 자신에게 강요하는 패러독스라고 이를 해학적으로 말했다. 그리고 애니어그램의 5번 탐구자 유형이 이러한 역설을 자신에게 감행한다. <보라>를 보는 136분은 감독이 ‘통증의 색’으로 규정한 보랏빛으로 나 자신이 물들어가는 시간이었다. 이 힘겨운 시간 끝에, 나는 이강현 감독이 애니어그램 도식의 5번이면서 4번을 날개로 삼은 유형의 사람이 아닐까 생각하게 되었다. 적어도 <보라>를 통해 세계와 만나는 방법에 있어서는.

애니어그램은 여러 영적, 종교적 전통에서 검증을 거쳐 현대화된 심리 유형학이다. 이는 인간을 아홉 가지 유형으로 나누는데, 각 유형은 서로 연관되면서 다양한 갈래를 산출한다. 즉, 5번 유형은 흔히 4번과 6번 중 하나를 날개로 삼으며, 이에 따라 나름의 성격을 표출하게 된다. 5번이 탐구자(관찰자)라면, 4번은 개인주의자(예술가)이다.

이강현 감독의 <보라>는 산업안전보건법에 따라 전문의가 사업장을 방문, 근로자들을 인터뷰하고 건강검진을 실시하고 안전교육을 하는 등의 보건관리 현장을 1년 여간 촬영한 결과물이다. 그는 집요하고 끈질긴 관찰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라>에 다큐의 미덕으로 꼽히는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는 고발의 외침이나 성찰의 내레이션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보라>는 영화의 마지막까지 집단 감성 혹은 지성이 호출되지 않는 기이한 다큐멘터리이다. 하여 지극히 개인적이고 건조한 사실 보고라는 인상 속에 대부분의 시간이 흘러가는데, 어느 순간 우리는 삶이라는 동전에 뒷면이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것처럼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게 된다.

애니어그램에서 4번 날개를 가진 5번은 인습타파주의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보라>가 다큐멘터리의 일반화된 방식을 거부하는 데서 인습을 거부하는 고독한 예술가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이러한 면모는 <보라>에 고유명사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극대화된다. 이 영화는 인터뷰이의 이름, 나이, 소속이나 사건의 장소, 일시 등을 밝힘으로써 ‘팩트’의 진실성을 확보하는 다큐멘터리의 상도(常道)를 위반하고 있다. 저것은 누구의 이야기인가. 왜 카메라가 저기 있어야 하는가. 명시적 정보를 주지 않은 까닭에 영화의 시작 몇 분 동안 나는 <보라>가 다큐멘터리가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갸우뚱하기까지 했다. 이강현은 왜 이러한 방식을 택한 것일까.

   


고유명사는 특정 대상을 지시함으로써 명료성과 상징성을 획득하지만 그 대가로 나머지를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그렇다면 고유명사를 배제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이점은 무엇인가. 이야기의 확산 가능성이 그것일 터이다. <보라>의 카메라는 아무 설명 없이 비닐하우스에서 일하는 할머니들을 비추고 그들의 이야기를 듣는다. 그러다 용산에서 24시간 서버를 관리하는 청년 파트타이머의 근로 현장을 보여준다. 물론 연관 지점에 대한 설명은 없다. 다시 카메라는 사진 찍는 무리 중 한 여자 앞에서 멈춘다. 맥락을 잇는 설명이나 그녀의 정체에 대한 언급 없이.

이러한 방식의 공간 이동은 <보라>의 논란거리가 된다. <씨네21>에서 김태훈은 이를 감독의 통제력 부족으로 평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좀 다른 견해를 갖고 있다. 구체성을 배제함으로써 저 화면에 투영되는 모든 것들이 ‘내’ 직업 현장과 무관하지 않다는, 즉 <보라>가 ‘우리 모두’의 이야기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깨달음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의 작업 현장은 인터넷 앞에서 놀이와 일을 오락가락하고 있는 저 파트타이머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 청년이 잠을 자기 위해 바닥에 놓인 종이박스 안으로 들어갈 때, 그리고 관 뚜껑처럼 입구가 봉해질 때 글을 쓰다가 허리가 아파 시멘트 바닥에 신문지를 깔고 누웠던 어느 순간이 떠올랐다. 너무 추워서 이내 몸을 일으켰지만.

   

그렇다고 <보라>의 모든 인물에게 나의 처지를 대입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일당 2만 5천원에 종일 허리도 펴지 못하고 비닐하우스에서 딸기를 따는 할머니와 비교한다면 나의 급료는 상당히 높다. 7년째 한 푼도 인상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고려하고라도 말이다. 이러한 차이가 무용한 것일까. 물론 아닐 것이다. 개인차에 따른 연민과 슬픔은 <보라>의 힘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지금 라디오에는 '나란 놈의 답은 너다'라는 노래가 흘러나온다. 맞아, 1980년대에 나온 황지우의 시집 제목도 그랬다. <나는 너다>, 라고. 고통스럽지만 감내하고 고개 끄덕여야 하는 우리 모두의 답은 단 4글자, 2어절로 이루어져 있다. 이를 다시 깨닫기 위해서라도 당신은 <보라>를 보아야 한다.

 

   
진수미(카타리나)
시인, 한국문학과 영화를 전공으로 삼고 있다. <달의 코르크마개가 열릴 때까지>, <시와 회화의 현대적 만남>을 썼다. 가톨릭청년성서모임 출신. 작은형제회 <평화의 사도> 편집위원으로 일하면서 가톨리시즘이 담긴 시를 같은 지면에 소개했다. 덧붙여, 시는 영혼이고 영화는 삶이다. 펄프 향 풍기는 ‘거기’서 먼지와 정전기 날리는 ‘여기’로 경로 이동 중. 덕분에 머리는 산발이지만 약간 더 명랑해지고 조금 덜 외로워졌다고 믿고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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