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부활이요 생명
본문<요11:11~32>
지난주에 병든 나사로를 고쳐달라는 마리아와 마르다의 전갈을 받은 주님이 일부러 지체하며 나사로가 죽기를 기다렸다가, 죽고 무덤에 장사되자 그때서야 거기로 가자고 하시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마리아와 마르다가 병든 자기 오라버니에 대해 전하기를 ‘주여,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라고 합니다. 이것이 우리들의 신앙의 현주소라고 했지요? 이 사랑의 관점이 육신을 가진 사람의 생각과 ㅎ님의 생각이 차이점을 갖고 있음을 일부러 깨우쳐 주시기 위해서 사랑이라는 용어를 쓰면서 사건을 기록하는 것입니다.
ㅎ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면, 내 문제를 해결해주시고 내 육신적인 필요를 채워주시는 ㅎ님으로 알고들 있습니다. 언제나 죽고 썩어질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ㅎ님을 찾고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지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는데, 우리는 겨우 내 생활에 도움을 주는 분으로 오해를 하고 ㅎ님을 대합니다.
그래서 거머리처럼 다고다고에 여념이 없지요. 새벽부터 철야까지 십자가 밑에 나아와서 ㅎ님이 이것주세요, 저것주세요 합니다. 마치 알라딘의 요술램프에 나오는 지니를 부리듯이 예수님을 자기 필요를 챙겨주는 하인으로 취급하는 것이지요. 안그런가요? 기독교인들이 섬기는 ㅎ님은 기꺼해야 존대 말 써주는 능력 있는 종으로 여기는 것이지요. 이것을 성경은 우상숭배라고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공생애를 시작할 때 마귀의 세 가지 시험을 통해 세상 욕망을 기각시키는 것이 ㅎ님의 뜻이라는 것을 미리 보여주셨습니다. ㅎ님의 아들이란 떡을 위하여 사는 자가 아니라, ㅎ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자라는 것이고, 성전에서 떨어져 기적을 보이라는 것을 거절함으로 신비주의 은사주의를 배격하신다는 것을 증거하신 것이며, 천하의 권세를 취하라는 사단의 미혹에 맞서 오직 ㅎ님께 영광을 돌리라는 말씀으로 사단을 물리칩니다.
세 가지를 압축하면 육신의 배부름에 대한 욕망, 사람들의 인기에 영합하는 욕구, 세상 권세에 대한 탐심을 말합니다. 이런 것은 마귀사단이 추구하는 가치체계입니다. 그러나 ㅎ님의 아들은 이 세상 가치가 아니라, 변하지 않는 영원한 것인 하늘의 가치를 추구하는 자라는 것을 계시하는 시험이었던 것이지요.
이런 것을 알게 하는 것이 참 ㅎ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알게 하십니까? 성령을 보내시면 인간 나는 죄만 만들어내는 죄의 공장인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ㅎ님이 원하시는 선을 알지도 못하고 행하지도 못하는 무능하고 무가치하여 지옥이 마땅한 자인데, 그런 나를 용서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보내사 십자가 대속의 피 공로로 죄를 사하시고, 그리스도의 영을 입혀서 ㅎ님의 자녀 삼으시는 고결하시고 순결한 사랑을 말하는 겁니다.
그런데 마귀는 이런 ㅎ님의 사랑을 땅의 사랑, 육신의 사랑으로 왜곡 시켜서 우리를 좀 도와 주시라고 미혹합니다. 이게 사단의 궤계임을 누가 알겠습니까? 계13장을 보면 두 짐승이 나옵니다.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 땅에서 올라온 짐승.., 그런데 사단으로 비유된 붉은 용이 바다에서 올라온 짐승에게 모든 능력을 부여 합니다. 즉 사단이 짝퉁 예수를 만들어 뭇 신도들로 하여금 섬기게 한다는 것이지요. 그러자 모든 사람들이 이 짐승에게 감탄하면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하며 경배한다고 합니다.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 해학적이고 역설적인 표현이지요. ㅎ님이 보실 때는 악하고 무서운 짐승인데 거짓 영에 사로잡힌 자들의 눈에는 사랑이 풍성하고 자비로운 예수님으로 보인다는 말이지요. 그러므로 ‘누가 이 짐승과 같으랴’를 해독하면 어떻게 될까요? 한마디로 ‘우리 예수님 최고야, 따봉이야!’입니다.
그래서 땅에서 올라온 짐승인 거짓 선지자들이 강대상에서 이것을 선전한다고 합니다. 어느 신이 과연 우리가 섬기는 ㅎ님과 같고 예수님과 같으랴? 우리 예수님은 십자가 능력으로 죄사함도 주시고 세상 복도 아낌없이 주시는 좋으신 분이다!라고 하면서. 복음을 땅의 복으로 바꿔서 가르치는 것을 매매한다고 표현합니다. 그게 바로 666표이지요. 그것을 짐승의 수 사람의 수라고 하잖아요. 숫자는 정신사조(영)를 의미합니다. 즉, 짐승이 주는 가치관 사람들인 추구하는 가치관을 복음으로 포장해서 음녀 교회에서 팔아먹는다는 말을 하는 것이지요.
이 표를 받지 않으면 아무도 매매를 못하게 합니까? 세속화된 교회에서는 모두 이것을 판다는 반어법이지요. 그렇잖아요. 모든 교회가 외치는 게 뭡니까? 예수 믿으면 소원 성취하고 문제 해결받고 가정이 평안하고 만사가 형통해진다. 그래서 떡에 배부르고, 사람들로부터 추앙받고 성공출세해서 권세를 가지고 누리며 살수 있다고 사람들을 불러 모으지요. 그게 큰 성 바벨론입니다. 각종 더러운 영들이 모이는 귀신의 처소인 음녀교회를 말하지요. 주님이 마귀의 시험을 통해 물리친 것을 거짓 목사는 잘도 팔아먹고 있습니다. 이게 지금의 기독교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이런 다른 예수가 오늘날 기독교에 편만하게 퍼져 기복주의, 은사주의, 신비주의, 율법주의, 사회 정의를 외치고 있습니다. 기독교가 앞장서서 윤리도덕을 바로세우고 깨끗한 사회로 개혁하자고 주장을 합니다. 이게 뭐라구요? 666표라는 말이지요. ㅎ님 사랑을 땅의 복으로 변질시켜서 ㅎ님을 우상으로 섬기는 거짓 신앙이 넘치는 세상이 된 것입니다. 지금 마리아와 마르다의 신앙이 이렇게 잘못되었기 때문에 주님은 이것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 일부러 나사로가 죽기까지 기다린 것입니다.
그러면서 주님은 아주 충격적인 말씀을 하십니다.
<요11:14~15> 14 이에 예수께서 밝히 이르시되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11:15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한 것을 너희를 위하여 기뻐하노니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그에게로 가자 하시니 11:16 디두모라고도 하는 도마가 다른 제자들에게 말하되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하니라
‘내가 거기 있지 아니해서 나사로가 죽은 것이 기쁘다.’(하심). 이게 주님의 본심입니다.
주님의 원하심은 우리가 잘 먹고 잘사는 데 있지 않습니다. 오히려 세상 것이 풍족해서 룰루랄라 하면, ㅎ님을 배신한다는 것을 잘 아시기에 세상 것을 넘치게 주시는 게 아닙니다. 주기도문에 잘 나오잖아요..‘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즉 오늘에 자족하는 삶, 내일 염려는 내일 하라 .이것이 ㅎ님의 뜻이니까 여기서 벗어난 욕심을 갖지 말라는 언질을 주시는 겁니다. 우리의 욕심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ㅎ님의 일하심 아닌가요? ㅎ님을 알면 알수록 내 생각과 다른 분임을 발견케 됩니다.
그러면서 그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15절b)이렇게 하는 것을 통해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 지금 제자들이나 두 자매가 가진 믿음이 잘못되었다는 말이잖아요. 그래서 믿음을 바로 잡아 주려고 하신다는 것입니다. 믿는다고 다 믿음이 아닙니다. ㅎ님이 주신 믿음이 아니면 사람이 낸 믿음인데 이것은 지금까지 설명했듯이 ㅎ님을 자기 욕심을 들어주는 분으로 믿는 다는 것이지요. 지금 이것을 깨뜨리시고 ‘예수님이 누구신지’ 아는 믿음으로 수정시키는 일을 주님이 하시는 겁니다.
그런데 16절을 보면, 도마가 여기에 끼어들어 말합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 근처로 가시면 위험하니까 가지 말라고 만류하고 있는데 도마가 나서서 죽으면 같이 죽읍시다라고 하며, 도마는 겁에 질려 있는 동료들을 선동하여 예수와 함께 죽으러 가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 역시 다른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오늘날 교회에서는 이러한 도마 같은 신자가 믿음의 용사로 추앙을 받습니다. 배신하지 않고 의리를 지키는 이런 사람이 믿음의 사람으로 보이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의리와 충성심은 조폭 세계에서나 통하는 것들입니다.
인간 세계에서 의리는 참 중요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의리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수틀리면 등을 돌리고 떠나거나 배신하거나 하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는 세상에서 의리를 중히 여기고 끝까지 함께 하는 사람은 군계일학 같은 사람입니다. 인간 조직이라면 어디서나 이러한 도마 같은 의리 있는 사람이 존중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인간적 의리는 언젠가 서로의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한 순간에 무너져 내릴 뿐입니다. 신앙생활은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려 그리스도를 따라가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의지로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합니다. 지금 도마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붙들려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도마의 이 말은 육신의 생각에 불과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이 어떤 분이지 알아서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는 말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자기 자신을 보고 있을 뿐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육신의 생각에 부화뇌동하시지 않으십니다. 우리에게서 선이 나올 수 없음을 주님은 잘 알고 계십니다. 인간의 믿음은 자기 의를 나타낼 뿐 아무런 능력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주가 죽으시는 데까지 자신도 따라 간다고 장담하였지만 십자가 앞에서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 합니다.
지금 주님은 나사로의 사건을 통해 제자들의 믿음을 바로 잡고자 하십니다. 아니 그들의 믿음을 버리게 하고 주님을 새롭게 알라고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롬10장을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들음은 주의 말씀이라고 합니다. 즉 믿음은 주님의 말씀으로 주님을 알게 될 때 조성되는 것입니다. 주님이 누구신지 모르는데 어떻게 믿음이 생성되겠습니까?
마17장을 보면,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저기로 옮기리라’하십니다. 겨자씨 한 알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작은 알갱이입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그런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한 번은 풍랑이 이는 배 위에서 파도가 넘치자 배가 물에 차서 전복되려고 합니다. 제자들은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떨면서 잠자는 주님을 깨웁니다. 그러자 이 때도 주님이 한 말씀 하십니다. 왜 그리 믿음이 적으냐?
ㅎ님이 주시는 믿음에 믿음이 적고 많음이 있을까요? 적다고 표현한 여기서도 너희는 믿음이 없다는 말입니다. 왜 없지요? 제자들은 주님이 누구신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즉 예수님에 대한 지식(앎)이 없기에 믿음이 없는 것입니다. 이처럼 믿음은 하늘 어디서 뚝 떨어지는 물건이 아닙니다. 예수에 대한 바른 지식이 참 믿음을 조성하는 겁니다. 오늘 나사로 사건의 주 목적이 바로 제자들의 믿음을 위하여 하신 일이라는 것입니다(15절b)
요11장 나사로 사건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본문 전체에서 주는 키 워드가 3군데가 있는데 이를 알아야 합니다. 그 중의 하나가 방금 읽은 주님의 말씀인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니라’입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지난주에 주님이 말씀하신 9절의 말씀입니다. ‘낮에 다니면 빛을 보므로 사람들이 실족하지 아니한다’는 것이고, 셋째 키워드는 오늘 본문 후반에 나오는 ‘내가 부활이요 생명이다’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말씀은 궁극적으로 하나를 말씀하는 겁니다. 나 예수를 똑바로 직시하라는 말입니다. 내가 곧 창조주요 만물을 다스리는 전능자라는 말이지요, 지금 제자들이 이런 예수님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요? 물론 말로는 주는 그리스도요 ㅎ님의 아들이라고 하지만 그 실제를 과연 알고 있나요? 그저 능력 있는 선지자 정도로 알고 있는 수준이지요.
이미 요8장에서도 주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논쟁에서 말씀한 바 있습니다.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내가 그 인줄 알지 못하면 너희는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예수님은 자신이 모세에게 율법을 주신 ㅎ님이시며, 더군다나 모세가 기록한 창1장부터 언급되는 창조주 ㅎ님이심을 암시하셨는데, 누가 이것을 알아들었겠습니까? 예수님은 흑암인 세상에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첫째 날에 빛이 있으라 하시매, 빛이 있었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칭하게 됩니다. 예수 자체가 빛이고 낮인 셈이지요. 따라서 예수 밖은 어둠(사망)인 것입니다.
이처럼 구약 성경에 명시된 그 빛이 드디어 역사 속으로 성육신 하여 오셨습니다. 그게 요1장의 참 빛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거짓 빛에 호도되어 참 빛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참 빛이 오기 전에 있던 가짜 빛은 율법을 말합니다. 그리고 이 빛을 전하던 종교지도자들은 바리새인 율법사 제사장 서기관들이고 이들이 자신들을 의로운 자라고 자칭하고 있으니, 주님은 그들이 절도요 강도라고 그 정체를 밝히셨습니다.
성경은 구원을 세 가지 시제로 말합니다. 구원을 얻었다, 구원을 이루라, 구원을 얻으리라.
과거, 현재, 미래로 나누어서 말하기도 합니다. 이게 어떤 의미일까요? 우리의 구원은 IX의 십자가 피를 믿음으로 이미 완성되었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엡2:8절에서는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라 ㅎ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하려함이니라.’ 그렇지요? ㅎ님의 은혜로 주신 믿음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완료형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빌2:12,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말씀합니다. 지금 현재에 구원을 이루어 나가라는 말로 들립니다(진행형). 그런가하면 마24에서는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라든가, 고전15:21 보면,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변화하리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고 우리가 변화하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일어날 몸의 구속인 신령한 몸으로의 변화를 의미 합니다(미래적)
요약한다면, 성령을 받아 거듭나는 것은 완료형 구원으로서 과거시제이고,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우리 몸이 주의 몸과 같이 영화롭게 변화되는 것은 미래적인 구원을 의미합니다. 그렇다면 지금 살아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진행형 구원은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일반 기독교에서 보편적으로 알고 있는 성화를 말하는 걸까요?
누차 말씀 드리지만, 우리 인간은 거듭났어도 인간 본질이나 본성이 변하지를 않습니다. 그렇기에 성화라는 말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성화란 주님처럼 거룩한 성품으로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가당치도 않은 차원입니다. 만일 우리가 성령을 받은 후에 거룩을 이루어 갈 수 있다면, 죄를 안 지어야 합니다만, 그게 가능합니까? 어떤 때는 가능하고 어떤 때는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불완전성을 여전히 가지는 것이기에 성화가 된 게 아닙니다. (그렇기에 성경은 우리의 개과천선하는 변화를 목적하지를 않습니다.)
그렇다면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구원을 이루라는 말의 진의는 무엇일까요? 결론적으로 말해서 진리의 빛이 내 안에 더 많이 들어올수록 깨닫게 되는 것은 자신의 죄인됨을 더 확실하게 발견하게 된다는 겁니다. 사도 바울의 예를 든다면 처음에는 자신을 사도라고 당당하게 말했습니다만(갈1:1), 시간이 지나자 사도 중에 작은 자라고 낮아졌고(고전15:9), 이어서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라고(엡3:8) 하다가, 순교 전에는 죄인 중의 괴수(딤전1:15)라고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정한 성화, 성경적이고 복음적인 성화는 죄를 안 짓고 거룩한 삶을 살아간다고 자긍하는 자가 아니라, 자신이야말로 죄인의 우두머리라는 고백을 하는 자를 말합니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가능합니까? 인간 자신 스스로 인지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 전적으로 성령의 인도하심으로만 가능합니다. 이런 자까지 만들어 가시는 게 바로 지금 현재 우리를 붙잡고 이루어 가시는 구원인 것입니다. 즉 내가 하는 게 아니라 ㅎ님이 이끌어 가시는 구원입니다.
그래서 ㅎ님이 야곱을 태어나기 전부터 내가 사랑했다고 하셨지만, 그 사랑이 야곱으로 하여금 그야말로 험악한 세월을 살도록 안배하신 것입니다. 자기 고집과 욕심으로 조성된 인간의 본성을 깨드리시고 ㅎ님을 아는 자로 만들어 참 된 ‘이스라엘’로 조성하시는 ㅎ님의 일하심을 배우는 게 ㅎ님의 사랑을 아는 자입니다. 어디 야곱 뿐 이겠습니까?
다윗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새의 8번째 아들로 태어나서 너무도 볼품이 없어서 누구에게 ‘내 아들이요’라고 말하지도 못하는 못난이였습니다. 선지자 사무엘이 왕재를 구하고자 비밀하게 연통하여 내가 갈테니 아들들과 식사를 합시다 했는데, 다윗은 정말 깜도 못되어 식사 자리에 끼지도 못하고, 형들이 ㅎ님의 사람 사무엘과 영광스럽게 식사를 하는데, 들에 나가서 양을 치고 있었습니다. 부친 이새의 눈에 ‘없어도 되는 자’로 여겨질 정도로 존재감 없는 다윗이었습니다.
그러나 ㅎ님은 잘난 사람을 외면하시고 못난 다윗에게 마음을 두셨습니다. 그게 바로 다윗을 보고 ‘내 마음에 합한 자’라는 말로 ㅎ님이 찜한 자임을 나타내십니다. 잘나서가 아니라 오히려 못낫기에 ㅎ님 마음에 드신 겁니다. 이게 ㅎ님의 일하심의 포인트입니다. 사무엘이 그에게 기름을 붓자 성령의 감동을 받는 자가 됩니다.
그 때 마침 불레셋과의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스라엘의 뭇 장수들은 불레셋의 장수 골리앗의 위풍에 기가 질려 오줌을 저리고 있었는데, 소년 다윗이 물맷돌을 가지고 나가 한 방에 죽여 버립니다. 누가 한 겁니까? 다윗인가요? ㅎ님이신가요? 당연히 ㅎ님 작품이지요. 그런데 많은 목사들은 신자들로 하여금 다윗처럼 용감하게 싸우라고 종용 합니다. 정말 기도 안 찹니다. 저도 못하면서 잘도 떠들어 댑니다. 이게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는 형국이지요.
그 후 다윗은 사울왕의 핍박으로 인해 많은 고난을 겪게 되지만 결국에는 왕이 됩니다. 그리고 승승장구 일취월장하며 이스라엘을 부국강병으로 세웁니다. 누가 했습니까? (다윗 or ㅎ님?). 그러나 실패가 없던 다윗은 그만 교만에 빠지게 됩니다. 이것을 ㅎ님이 방관하시겠습니까? ㅎ님이 손을 살짝 놓자 밧세바 사건이 터집니다. 그야말로 모든 범죄의 종합 세트라고 할 정도로 무지막지한 죄를 저지르고 말았습니다.
일반인도 아닌 크나큰 은혜를 입어 왕이 된 다윗입니다. 그러니 죄를 물어 처형하자면 단순 교수형도 아깝습니다. 능지처참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용서를 하십니다. 이런 불공평은 또 어디 있을까요? 이게 ㅎ님의 끊어지지 않는 사랑입니다. 물론 맨입으로 용서받지는 않았습니다. 지옥을 방불케 하는 뼈속 깊이 아프고 쓰라리고 고통스러운 징계를 통과해야 헸습니다.
집 안이 쑥대밭 되고 나라가 반란으로 두 동강나고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왜였지요? 다윗 하나 제대로 세우시려고 ㅎ님은 많은 손해를 감수해야 했습니다. 이 사건으로 다윗이 시51편에서 고백한 회개의 말이 우리 모두에게 빛이 되어 비춰주고 있습니다. 자신이 깨닫고 보니 어미의 태중에서부터 죄악 가운데 태어난 자라는 것을 토설합니다. 그런 자가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오직 ㅎ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런데 이런 큰 죄를 지었는데, 살아날 방도가 없습니다. 죄인이 무슨 공로를 세워 용서를 받겠습니다. 천부당만부당한 일입니다. 그래서 1절부터 ㅎ님의 긍휼과 자비하심만을 의탁하여 용서를 구합니다. 이런 태생적 죄인이 살 길은 ㅎ님의 자비뿐임을 안 것이지요.
그리고 하나 더 덧붙여 요청합니다. 주의 꺾으신 뼈를 생각해서라도 용서를 해 달라고 기도 합니다. 꺾으신 뼈란 아무 잘못도 없는 우리야가 죽은 것을 말합니다. 죄 없는 그가 죽은 것을 대신하여 자신을 용서해 달라는 겁니다. 이것은 장차 죄 없으신 IX의 십자가 대속을 근거로 죄 용서를 베푸시는 ㅎ님의 은혜를 미리 계시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자신 같은 무도한 자를 용서하신 ㅎ님의 은혜를 후세에 널리 알리겠노라고 말합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ㅎ님의 마음을 읽고 대속의 은혜인 십자가 복음에 대한 복선을 까는 말입니다.
이렇게 많은 댓가를 치루면서 ㅎ님을 배운 다윗이 시편23편을 노래합니다.
<시23편>
‘1절~다윗의 인생의 결산을 압축한 구절이며 동시에 시편 23편의 결론을 먼저 말함.
‘3절~일차적 일하심(영혼 소성), 다음은(자기 이름을 위해 다윗을 의의 길로 인도하심)
-이게 야곱이 걸었던 험악한 세월이고 모든 택한 자가 걷게 되는 십자가 길임
-사43편(야곱-이스라엘로 조성-빚어냄. 이게 이루어 가는 구원임-고통 수반, 물에도 불에도 들어감, 그러나 두려워 말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고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
‘2절,4절~그래서 푸른 초장으로, 혹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안배하심
‘5절~결국은 원수 앞에서 이긴 자로 세우심
‘6절~ㅎ님의 사랑으로 자신이 ㅎ님의 집에서 거하는 자로 영생의 존재가 된 것을 찬송함.
이처럼 야곱이 이스라엘로 탈바꿈 되는 일은 많은 댓가가 동반되는 것입니다. 공짜는 없습니다. 고난, 역경, 가난, 배신, 사기, 슬픔 등을 겪는 동안 마음의 폭이 간장 종지만한데서 마침내는 모든 것은 수용하는 하늘만큼, 우주만큼 커집니까? 자신이 죄인인 것을 깨닫게 되면 나오는 열매가 용서와 긍휼입니다. 자신이 죄인임을 아는 그런 마음으로 이웃을 대하게 되면 또한 사랑과 자비가 나옵니다. ㅎ님의 형상이 새겨지게 되는 겁니다.
지금 주님이 병든 나사로를 죽게 하신 것은 나사로뿐만 아니라 그의 가족에게도 고통과 슬픔입니다. 나사로는 마리아와 마르다 가정의 기둥입니다. 당시에 누가 생계를 책임졌겠습니까? 여자는 사람으로 여기지도 않아 오병이어를 먹은 자를 헤아릴 때도 남자만 오천명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 두 자매의 오라비는 생명줄 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늦게 오심으로 죽고 말았으니 얼마나 원망스럽겠습니까?
주님을 보자마자 원망불평을 쏟아냅니다.
<요11:17~22/32절> 그러자 주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산다고 말씀합니다(23)
<23~27절> 주님은 나사로가 이제 무덤에서 살아날 것을 말씀하시지만, 마르다는 건성입니다. 미래의 어느 날, 주가 재림하시는 때에 다시 살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교리적 부활관입니다. 지식에 머문 부활이라는 말입니다. 능력이 없는 신앙, 죽은 신앙과 매일반입니다. 부활을 말하나 성경적이고 진리적인 부활을 모릅니다. 그래서 슬픈 것입니다.
주님은 25~26절에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것이 요11장의 세 가지 키워드의 마지막 말씀입니다. (다시 말) 첫째: 내가 빛이고 낮이다. 둘째: 너희 믿음을 위하여 한 일이다. 그리고 셋째: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결국 주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 이것을 증명하시고자 나사로 사건을 일으키신 겁니다.
이 3키워드는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했지요?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은, 주님이 생명의 주관자이시라는 말입니다. 그러니 주님을 믿고 사는 게 낮에 빛 가운데 다니는 것이고, 이게 참된 믿음이라는 말입니다.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용어를 좀 더 살펴보지요.
잠시 후에 주님은 나사로의 무덤을 찾아 썩는 냄새가 나는 시체 나사로를 불러내십니다. 그 때 상황을 상상을 좀 해볼까요? 세상에 이럴 수가 있나요? 시체에 염을 해서 수의를 입히고 천으로 둘둘 감아 안치했는데, 주께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니까, 그 시체가 강시처럼 살아나서 퉁퉁 뛰어 나옵니다. 그러자 주님이 풀어 놓아 다니게 하라고 하십니다. 사람들이 감격에 겨워 기절추풍을 했겠지요.
얼마 전에는 풍랑이 이는 배 위에서 주무시다가 깨시더니 풍랑을 보고 명하십니다. ‘풍랑아 잠잠하라.’ 그랬더니 풍랑이 말을 듣고 즉시 고요해집니다. 그러자 제자들이 ‘이가 뉘시기에 풍랑도 말을 듣는가?’ 놀랬지요. 그런데 오늘은 사망도 음부도 주님의 말씀에 복종을 해서 죽은 자를 토해 냅니다. 사망도 음부도 다 예수께서 창조한 것들입니다. 우주만물도, 그 안에 운행되는 모든 법칙도 주님의 작품입니다. 필요하면 태양도 달도 멈출 수도 있습니다(수10장)
그러므로 ㅎ님이신 예수님께는 사망이 없습니다. 항상 생명만 있을 뿐입니다. 이를 영생이라고 합니다. 요일 5장에서는, 아들 예수그리스도가 있는 자에게는 영생이 있음을 알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은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말이 아니라 영생의 존재임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나듯이 육신의 죽음은 죽는 게 아니라는 말입니다. 너희는 모두 죽음이 없는 나와 같은 존재들이라는 선언입니다.
우리 주변에 성도가 누구는 어떤 일로 일찍 죽을 수도 있고, 누구는 명대로 사는 자도 있고 천태만상이지만, 육신이 죽고 사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IX안에 있으면 모두가 다 산자라는 말입니다. 그들에게는 사망 권세가 다가오지를 못합니다. 생명싸개이신 그리스도가 핵우산처럼 보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주님은 이것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자 봐라, 나사로가 살아나듯이 육신이 죽음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죽어도 죽는 게 아니야. 육신이 죽어도 죽음으로 여기지를 말고 잠을 좀 길게 잔다고 여겨라(주님은 부활이요 생명이시기에, 예수 안은 사망이 없기에)..주께는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고 합니다. 즉 육신의 인생은 하루라는 찰라와 같으나 그 이면에는 천년이라는 영생이 숨겨져 있습니다. 그러니 거기에 매이지 말고 중요한 것은 지금 IX를 믿어 주 안에 거하는지를 확인하고 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게 바로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않는다는 말씀의 진의입니다. 성도에게 잠깐의 잠은 있어도 죽음은 없습니다. 이 얼마나 기쁜 소식입니까? 이것을 모르니 마리아처럼 우는 것을 보시고 주님도 같이 우십니다. 주님의 울음은 제자들이 깨닫지 못하여 육신의 죽음을 끝이라고 여기기에 벽창호 같은 무지에 대해 답답해서 우셨다는 말입니다.
죽지 않는 몸(불사신)은 그리스 로마 신화가 아니라 실존합니다. 바로 IX안에 있는 우리들입니다. 물론 주님의 재림 때에, 이 몸은 신령한 몸으로 변화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신분을 가진 성도임을 알고, 오늘 말씀을 통해 살아서 믿는 신앙을 갖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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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