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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저주의 죄인을 심판한 십자가(강해 녹취문)

작성자소자|작성시간26.02.01|조회수52 목록 댓글 0

저주의 죄인을 심판한 십자가
 
본문<요18:28~32> 
28 저희가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 저희는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 관정에 들어가지 아니하더라 29 그러므로 빌라도가 밖으로 저희에게 나가서 말하되 너희가 무슨 일로 이 사람을 고소하느냐 30 대답하여 가로되 이 사람이 행악자가 아니었더면 우리가 당신에게 넘기지 아니하였겠나이다 31 빌라도가 가로되 너희가 저를 데려다가 너희 법대로 재판하라 유대인들이 가로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이 없나이다 하니 32 이는 예수께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가리켜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함이러라.
 
지난주에 성경은 반전의 책이라고 했었지요? 어떤 반전 입니까? 죄와 사망의 존재가 아무 조건도 없이 생명의 존재가 되는 반전입니다. 그 반전의 터닝 포인트 지점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공로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받을 죄의 저주를 예수님이 다 받으시고 죽으신 그 자리가 바로 어린양 예수의 십자가의 자리입니다(이런 반전, 이런 기적이 어디에?)
 
지난주에는 시간관계상 이 반전의 예를 롬7~8장에서만 들었지만 실상은 성경 전체가 반전을 다루고 있습니다. 성경을 열자마자부터 반전은 시작되지요. ㅎ님이 아담과 하와에게 명하십니다.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원전대로 하면 선악과를 먹으면 죽고 또 죽으리라 입니다. 두 번 죽는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지요. 죽고 또 죽으리라. 이것을 번역에서는 강조 요법으로 오해를 해서 반드시 죽으리라, 혹은 정녕 죽으리라 번역했습니다만..
 
그러나 두 번 죽으리라가 정확한 말씀입니다. 이것을 히9;27절에서 명확히 해석해 주고 있습니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인데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라. 즉 육신이 죽으면 그 다음에 심판이 있다는 말이고 계20장에서 밝히신 것처럼 백보좌 심판에서 그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불못인 지옥에 들어가게 되는데 이를 둘째 사망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금단의 열매를 먹은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먼저 육신이 죽은 첫 번째 죽음이 있고 그 다음에는 심판을 받고 지옥에 가는 두 번째 죽음이 있습니다. 죽는다는 말은 존재가 없어진다는 말이 아니라 하나님에게서 떨어져 나가 참혹한 상태로 고통당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지옥을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하면서 영벌이라고도 말하는 것이지요. 이게 인간의 운명..
 
이렇게 선악과를 먹고 죄의 저주를 받아 지옥을 가야 하는데, ㅎ님이 이들을 찾아 오셔서 가죽옷을 지어 입히십니다. 이 가죽옷은 어린양의 희생으로 만들어진 긍휼과 용서의 상징입니다. 반전이지요. 아담과 하와가 아무 노력도 아니 했는데 그런 용서를 받은 것입니다. 그 이면에는 어린양의 죽음이 깔려 있는데 이것이 IX의 십자가 은혜를 복선에 깔아 놓으신 것입니다. 이처럼 성경은 처음부터 인간의 행함이 아니라 복음으로 구원하실 것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의 구원, 율법이 아니라 은혜로의 구원에 대해 핵심적으로 다루는 서신서가 로마서입니다. 그래서 이 로마서를 모르면 그 뒤에 이어지는 고린도서나 모든 신약의 서신서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가장 대표적으로 고린도 교회가 얼마나 문제가 많습니까? 서로 누구의 은사가 큰가로 다투고, 세례 때문에 바울파, 베드로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파장을 짓는가 하면 우상의 제물을 먹는 문제로 다투고, 심지어는 음행을 자랑하는 타락한 교회였습니다만 그런 교회를 바울은 어떻게 소개 합니까?
 
<고전1:2> 2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과 또 각처에서 우리의 주 곧 그들과 우리의 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부르는 모든 자들에게 3 하나님 우리 아버지와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은혜와 평강이 있기를 원하노라
 
고린도에 있는 ㅎ님의 교회를 무엇이라고 부릅니까? XI안에서 거룩하여지고 성도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이라고 합니다. 아니 이런 엉터리들을 향해서 거룩하여진 자들, 성도들..이라고 호칭합니다. 성도란 거룩한 무리, 거룩한 교회라는 의미입니다. 놀랍지 않나요? 그런데 도대체 깜도 안 되는 자들에게 이런 호칭을 붙이다니요. 그러나 이건 바울의 개인적 생각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감동으로 하는 말입니다.
 
<고전1:8~9> 8 주께서 너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날에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까지 견고하게 하시리라. 9 너희를 불러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와 더불어 교제하게 하시는 하나님은 미쁘시도다.
 
8절은 더 전입가경입니다. 정말 믿어지지 않는 내용이지요? 우리 주 IX의 날이란 주님의 재림과 동시에 펼쳐질 심판의 날을 말합니다. 그 심판 날에 뭐라고요?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끝가지 견고케 하신다? 즉 주님이 고린도 성도들을 일체 깨끗하고 거룩한 자로 여기고 끝까지 감싸주신다는 말입니다. 여기 어디에 조건부가 달려 있습니까? 그냥 죄와 허물로 얼룩진 죄인들에게 ‘너는 죄 없고 깨끗하다’고 여겨 주신다는 것이 책망할 것이 없는 자란 말이잖아요. 세상에 이런 반전이 어디 있습니까? 이건 반전을 넘어 너무도 편애적인 상황입니다.
 
아가서~솔로몬이 슬람미 여인을 향해 너는 어여쁘고 어여쁘다. 내 사랑아 너는 흠이 없고 완전하구나(라고 합니다). 슬람미는 포도원에서 일하느라 얼굴이 검게 그을린 게달의 장막 같은 모습입니다. 행함이 예뻐서가 아니라 그냥 솔로몬의 눈에 사랑스러운 것이라는 말이지요. 솔로몬과 슬람미는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한 비유입니다.
 
따라서 다시 말씀드리지만 이 반전의 중심에 누가 있다고요? IX의 십자가 피 흘림의 사랑이 배어 있다는 말입니다.
<고전1:17~18> 17 그리스도께서 나를 보내심은 세례를 베풀게 하려 하심이 아니요 오직 복음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말의 지혜로 하지 아니함은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 함이라. 18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받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17절은 고린도 교회에서 세례로 인해 파당 싸움이 났었는데, 세례란 사람이 ㅎ님의 말씀을 지킬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함 죄인이라서 죽어야 할 자라는 것을 깨닫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게 하는 하나의 상징의 표식인데, 이들은 이것이 무슨 벼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여겨서 애지중지 했기에 바울이 세례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 복음이 중요하다고 일깨워 주는 말입니다.
 
18절은 십자가의 의미에 대해 선언하는 말입니다. 십자가의 도(진리)가 멸망하는 자들이 볼 때는 한 없이 미련하게 보이는 것이라는 말이지요. 인간의 행함이 없는데 단지 예수께서 내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신 죽으셨다는 것을 믿으면 죄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는다는 게 말도 안 되는 거라고 반문하고 뒤돌아선다는 의미이지요. 그러나 성령의 인도하심을 통해 정말 자신이 죄인인 것을 알게 되면 십자가야말로 ㅎ님의 능력이요 생명이라는 말입니다.
 
그러면서 구원은 ‘오직 ㅎ님의 부르심으로 된다’라고 하는 비밀을 밝히고 있습니다.
‘24~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
 
이 부르심을 받은 자들을 일컬어 창세전에 IX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자들(엡1) 또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된 자들(계13:8)이라고 부릅니다. 혹은 롬8:29절에서는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라고 하며, 벧전 1:2절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종합하여 ㅎ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IX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고 부릅니다. 그러니까 주님의 피의 효력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게 아니라 특정된 자들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결국 백보좌 심판 때에 이들은 행위대로 심판을 받는 자리에서 제외되는 은총을 입는 것이지요. 왜일까요? 어린양의 생명책에 녹명이 되었기 때문이고 이들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으신 IX의 십자가 피 공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IX의 십자가가 반전의 이유라는 말입니다. 그 이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합니다.
 
<고전1:29~31> 29 이는 아무 육체라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30 너희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고 예수는 하나님께로서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31 기록된바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 함과 같게 하려 함이니라
 
왜 이렇게 ㅎ님의 자기백성들에게 거저 공짜로 구원을 베푸세요? 29절에서 밝히시기를 아무 육체라도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고요. 31절처럼 주님만 자랑하라고요. 천국에 가서 내가 뭔가를 해서 여기 왔다는 말을 입에 담지 못하게 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그런데도 상급 받겠다고 열심과 노력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는 자들은 복음이 뭔지를 전혀 모르는 자들이겠지요.
 
30절을 보면 너희는 어디로부터 나왔다? ㅎ님께로부터 나와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다고 합니다. 역으로 보면 XI 안에 있는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출생에 대해 언급합니다. 요1:13절에도 참 빛이신 예수를 영접하는 자들은 ㅎ님께로서 난자들이지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의지(뜻)로 난 자들이 아니라는 말을 합니다. 즉 예수는 아무나 믿는 게 아니라 택하신 자들이 믿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예수 믿는 건 기적이고 복이지요.
 
그 결과 예수님 때문에 우리가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된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에는 인간 내가 어떤 공로를 세울 건덕지가 없습니다. 있으면 자랑할 테니까 하나님이 원천 봉쇄 하신 것이지요. 어떻게요. 태생적인 죄인임을 알게 하여 우리의 행위가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게 함으로 오직 십자가 복음 안에서만 산자로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한 군데만 더 봅니다.
<고전6:9~10> 9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음란하는 자나 우상 숭배하는 자나 간음하는 자나 탐색하는 자나 남색하는 자나 10 도적이나 탐람하는 자나 술 취하는 자나 후욕하는 자나 토색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리라.
 
인간의 여러 가지 죄악들이 열거 됩니다. 불의 간음 탐색 우상숭배..물론 여기에 기록되지 않은 죄목들이 더 많아요. 시기 질투 미움 분노 등등 다 마찬가지입니다. 여기서 나는 깨끗하다고 여기는 사람이 있을까요? 약4:4~세상을 사랑하는 게 간음이고 이것이 ㅎ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고 폭로합니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사랑치 않을 수 있나요? 그건 거짓말입니다. (질문) 속세를 떠나 도를 닦는 승려들이 세상을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N/본성 문제)
 
한마디로 너희는 모두 천국을 유업으로 받을 수가 없는 존재들이라는 말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절대로 천국을 노력해서 갈 수가 없다는데 어리석은 인간들은 지속적으로 인간의 행함을 바르게 해서 도달하려고 애쓰는 꼴이 나면서부터 소경들이라서 그런 거지요. 그 대표자들이 유대인들이고 바리새인들입니다. 성경을 보되 날로 먹고 물에 삶아 먹은 증거들이지요. 다음 구절을 봅니다.
 
‘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대 반전입니다. 너희가 다 불의한 자들이라서 천국은 고사하고 지옥이 마땅한 자들인데, IX의 은혜로 성령 안에서 그리스도의 영(아들의 영)을 받아 죄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다고 합니다. 잘 보세요. 행함이 예뻐서가 아니라 예수의 피로 덮어 사랑하신다는 말입니다. 고린도 교회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구원에 걸 맞는 삶을 살았기에 이러한 구원의 반열에 참여케 되었나요? 단지 앞의 1:24절과 26절에서 언급된 부르심 때문이라는 말입니다.
 
부르심이란 창세전에 택하심을 입은 자들이라는 말이지요. 아무나 부르지는 않겠지요? 창세전에 택한 자를 역사 속에서 복음으로 불러 내셔서 구원시키는 것을 ㅎ님의 구원의 경륜이라고 합니다. 이 은혜 때문에 바울이 구원을 얻은 장본인입니다. 다메섹 사건이 부르심을 입은 현장이었고요. 그 전에는 예수 믿는 자들을 잡아 죽이는 추노군 이었는데, 가만 놔두면 당연히 지옥행인데 ㅎ님의 부르심으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감개무량함이 어떠하겠습니까?
 
베드로도 마찬가지 입장이지요. 주님을 세 번이나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배신자였지만 주님이 버리지 않으시고 다시 찾아와 부르신 것은 택한 자였기 때문이지 베드로의 자질이 뛰어났거나 무슨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이를 잘 알게 된 베드로가 벧후1:10절에서 이같이 강조합니다.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지 아니하리라.’ 당부 합니다.
 
무엇을 굳게 붙잡으라고요? 사람의 반듯한 행함과 열심일까요? 인간 편에서의 그 무엇도 아닌 ㅎ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입니다. 만일 사람의 행함에 구원의 여부가 결정된다면 우리는 수시로 실족하게 됩니다. 잘 할 때는 구원을 받은 것 같은데 죄로 넘어졌을 때나 게으름을 필 때는 구원을 받지 못했나? 내가 이러고도 구원을 받겠는가? 의심하게 되지요. 그게 잘못된 구원관에서 비롯된 결과라는 겁니다. 인간의 행함에 방점을 두면 결코 자유함이나 구원의 기쁨을 누릴 수가 없습니다.
 
그 다음절인 벧후 1:11절에서는 만루 홈런 같은 결정타를 선사합니다. 이같이 하면 IX의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 들어가게 된다고요. 어떻게 하라고요? ㅎ님의 택하심과 부르심을 굳게 붙잡으면 천국에 들어가는 게 아주 간신히 들어가는 게 아니라 넉넉하게 들어간답니다. 이것이 십자가 복음으로 주어지는 하늘의 복입니다. 이것을 믿는 것이 쉬울 것 같은데 아무나 믿는 게 아니라고 성경을 증거 합니다. 이 받는 믿음을 보배로운 믿음이라고 1절에서 언급합니다.
 
이처럼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구원하시는 그 이면에는 IX의 십자가라는 엄청난 대가가 지불되었습니다. 우리가 공짜로 구원을 얻는 것은 이미 주님의 생애 33년간의 의로운 삶과 십자가 대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반전으로 구원하시는 ㅎ님의 일이 가능하신 것입니다. 지금 주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 자원해서 당시의 종교와 정치의 권력자들에게 체포되어 지금 심문을 당하시는 것입니다. 본문을 봅니다.
 
<18:28~32> 봉독
 

본문을 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고소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무엇이라 고소합니까? “행악자” 라고 고소합니다. “행악자”란? 강도란 말입니다. 즉 자기들에 것을 빼앗아 가는 자란 말입니다. 대 제사장을 위시하여 종교지도자들 입장에서 예수는 자기들의 것을 빼앗아 가는 강도와 같은 것입니다. 자기들 돈줄을 끊고 있으니 도적인 것입니다.
 
그럴 만도 하지요. 당시 성전에서 행하여지는 갖가지 장사에서 얻어지는 로열티가 있었어요. 거기에서 나오는 수익을 종교 지도자들끼리 분배하여 착복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나타나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좇아내 버린 것입니다. 성전을 일컬어 강도의 굴혈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급기야 성전을 허물어버리라고 합니다.
 
이거 가만 둘 수가 없지요. 가만 두면 지금까지 누렸던 모든 것들이 일순간에 다 날아가게 생겼어요. 예수가 자기들 영광도 빼앗아 가고 자기들 밥줄도 빼앗아 가고 있는 겁니다. 특히 대 제사장 입장에선 예수가 자기 것을 다 빼앗아 가는 강도에요. 그래서 자기 수하들을 앞세워서 예수를 행악자로 몰아서 죽이라고 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런 놈을 살려 두면 두고 두고 자신들의 우환거리가 되므로 없애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합법적으로 예수는 죽어도 마땅한 자라는 것으로 여론을 형성하는 것입니다. 촛불 집회라도 해야지요. 당시 여론 주도 세력이 바리새인들이었어요. 그러니 순식간에 온 예루살렘에 예수는 행악자라는 여론이 형성 되고 말았어요.
 
유대인들은 사람을 죽일 권세가 없으니 로마의 힘을 빌려서라도 죽여야 하니까 예수님을 빌라도 총독에게 데리고 와서 행악자라고 고소를 하는 것입니다. 자신들은 법집행을 할 수가 없으니까 빌라도에게 사형언도를 좀 내려 달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된 것은 32절의 말씀처럼 주님이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인지 구약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 한다는 언급을 합니다.
 
즉 주님의 모든 행보가 우연이나 즉흥적이 것이 아니라 다 ㅎ님의 시나리오대로 움직인다는 반증이지요. 이것은 비단 주님에 대해서만 국한된 게 아니라 온 세상의 역사의 흐름도 다 ㅎ님의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 각 개인의 운명도 다 ㅎ님의 주관 아래 있음을 인지하고 있어야 합니다.

 
자, 주님의 죽으심이 어떠한 죽음입니까? 십자가에 달려 모진 고통을 다 감당하시는 죽음입니다. 알다시피 십자가는 로마가 제정한 사형제도입니다. 힘으로 빼앗은 넓고 넓은 지역을 다스리는 입장에서 로마를 가장 위협하는 것은 반역행위입니다. 그래서 가장 혹독한 십자가 처형의 악랄함을 통해 로마 정부를 위협하는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정책을 펼쳤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ㅎ님은 주님에게 그러한 혹독한 고통을 당하시는 죽음을 마련하셨을까요? 그냥 내 죄 값을 지불하기 위해 죽으신다면 칼이나 화살로 목숨을 끊게 하면 안 되었을까요? 그러나 이 십자가에 어두운 비밀이 있습니다. 우리 인간의 죄악이 그만큼 크고 엄중해서 지옥 형벌이 마땅하다는 메시지입니다. 우리의 죄와 허물 때문에 우리가 지옥으로 떨어져 겪어야 할 지옥의 참혹하고도 영원한 고통을 예수님으로 대신 겪게 하신 것이 십자가 형벌입니다.
 
이와 같은 십자가에 대한 구약의 예언이 어디에서 기인되었는지 살펴봅니다.
<21:18~21>
자기 아들이 완악하고 패역하다고 마을 사람들에게 신고해서 그를 잡아다가 성읍사람들로 하여금 돌로 쳐 죽이라는 말을 하고 있네요. 이런 율법대로 과연 얼마나 사람들이 동조하고 지켰는지는 의문이 갑니다. 이것을 ㅎ님과 우리에게 적용시켜 보자고요. 자식인 우리들이 완악하고 패역하여 아버지의 말씀을 순종치 않고 방탕하며 술에 취하듯 세상에 빠져 살아가니 죄의 저주로 돌로 쳐 죽임을 받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죄를 폭로하는 내용입니다.
 
<22~23> 22 사람이 만일 죽을 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당일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그런데 갑자기 나무에 달아 죽이라는 형벌이 이어집니다. 바로 위에서 아들이 완악하고 패역하고 순종치 않으면 돌로 쳐 죽이라고 했는데, 그것이 죽어야 할 죄라서 돌로 쳐 죽이는 게 아니겠어요? 그런데 다시 죽을 죄를 범하면 그를 나무에 달아 죽이라고 하는 것은 뭔가 구별시키는 메시지라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사실 유대인 역사에서 죄인을 나무에 달아 죽인 사례는 찾아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돌로 쳐 죽였다는 기록은 종종 있습니다. 심지어는 신약 교회에서 스데반이 율법주의자들에게 돌로 맞아 죽는 순교를 당하기도 했지요. 그러나 나무에 달아 죽이는 일은 없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장차 IX에게 당할 일을 예언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지요.
 
23절에서 나무에 매다는 죽음이 더 십자가 사건임을 부각시키는 것은, 당일에 장사하라, 밤새도록 두지 말라고 하는 대목입니다. 그리고 나무에 달린 자는 ㅎ님께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는 말을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저주를 다 짊어지셨기에 하는 말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렸을 때 ‘나의 ㅎ님 나의 ㅎ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부르짖으셨습니다.
 
주님은 한 번도 아버지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에서 떨어져 버린 적이 없었습니다. 영원 전에도 사랑 안에서 하나로 연합하여 사셨고, 성육신 하여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사랑으로 연합된 관계였습니다. 그렇기에 어쩌면 아들 예수의 입장에서는 그 아버지와의 결별이 가장 겪기 힘든 상황이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십자가를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실 때에도 ‘아버지여 할 만 하시거든 이 잔을 지나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도 죽음의 고통이 두려워서 십자가를 피하겠다는 말이 아니라, 십자가라는 저주의 잔을 받게 되면 필연코 아버지와 잠시나마의 단절이 발생할 텐데 그 사랑의 연합 관계에서 잠시라도 떨어지는 것을 주님은 견디기 어려웠다고 보여 집니다.
 
그 증거가 주님의 외침이 아니었습니까? ‘나의 ㅎ님 나의 ㅎ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주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짊어지시고 죽으실 때는 아들의 입장이 아니라 죄인의 처지가 되어 죽으신 것입니다. 아버지께 버림당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고후5:21절은 이렇게 증거 합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IX안에서 ㅎ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이처럼 주님이 우리의 죄를 다 전가 받아 우리의 죄가 되셔서 죽으셨기에 하나님께서도 그 십자가에 달린 시간 동안 아들이 아닌 죄인으로 여기셔서 예수님을 등지고 냉정하게 외면하신 것이지요. 그래서 주님도 이것을 훤히 아셨기에 감히 ‘나의 아버지’라고 부르지 못하고 ‘나의 하나님’이라고 불렀던 것입니다. 죄에 대한 엄중한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으로 대하신 것이지요.
이 신21장을 사도바울은 갈3장에서 인용하고 있습니다.
<3: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
 
우리가 받을 죄의 저주를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받으심으로 우리가 율법의 저주에서 속량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는 내가 달려야 할 죽음의 자리 저주의 자리였는데, 주님이 대신 그 지옥의 형벌을 다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율법도, 죄도 우리와 상관없는 관계가 되었습니다. 그 어떠한 죄도 나를 정죄하지 못합니다.
 
가령 어느 일로 죄를 짓고 넘어졌을 때에, 사단 마귀가 와서 너 또 죄 지었네? 너 심판 받고 지옥 가야겠다고 속삭이면 뭐라고 답해요? 그래 내가 방금 죄를 지은 건 맞지만 어쩌냐? 그 죄를 IX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다 도말하여 주셨는데, 꺼져라! 이 마귀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나는 깨끗해 이놈아! 라고 좇아버려야 합니다. 이것이 복음 안에서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마귀가 주는 정죄의 참소를 거부하라는 말입니다.
 
죄에 종노릇하지 마세요. 롬6:2절을 보면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은 자라고 합니다. 죄를 안 짓는 자가 아니라 주님의 은혜 안에 있기 때문에 죄와 상관없는 자라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사단이 성도를 건드리지 못합니다. 왜죠? 나라고 하는 죄인을 주님의 피로 덮고 계시니까요. 이것이 빛나고 하얀 세마포 옷입니다. 하나님이 입혀주신 가죽옷의 실제입니다(그렇다고 함부로 죄를 지어도 무관하다는 방종을 조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죄의식을 거절, 거부..)
 
<3: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왜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우리의 모든 저주를 대신 져 주셨다고요? 아브라함의 복과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고요. 아브라함이 받은 복과 성령의 약속은 같은 겁니다. 한마디로 예수님을 통해 오는 천국을 유업으로 받은 것입니다. 아까 고전 6장에서 열거된 수많은 죄를 태생적으로 뿜어내는 죄의 공장인 내가 무슨 수로 구원을 받겠어요? 마냥 저주의 존재라서 나로서는 영원히 불가능한 구원인데.. 거저 선물로 안겨 받은 겁니다.
 
롬4장에서 아브라함의 복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4:2~3>
3절에서 아브라함이 ㅎ님을 믿으매~ 창세기를 보면 아브라함이 ㅎ님을 믿지 못했어요. 그러나 ㅎ님의 일하심이 믿어지게끔 믿음을 아브라함에게 밀어 넣으셨어요. 즉 위로부터 믿음을 부어 주셨지요. 마침내는 ㅎ님의 말씀이 그냥 다 믿어지는 영역으로까지 이끌어 가셨습니다. 그렇게 완고하고 질긴 아브라함의 고집을 꺾기까지 ㅎ님의 수고와 열심이 배어 있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어진 구원의 복을 다음 구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4:4~8> 봉독
아브라함의 복을 요약하면, 일한 것이 없고 경건하지도 않은 죄인인데 ㅎ님의 인도하심으로 믿어지게 해서 영생의 복을 받은 아브라함은 복이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 뿐 아니라 다윗 역시 그 복을 받은 장본인이라는 말을 7,8에서 하고 있습니다.
 
사울 왕과 다윗 왕과 누가 더 큰 죄를 지었나요?
죄를 저지른 것은 건 둘 다 똑 같아요. 죄에는 크고 작은 경중이 없습니다. 어찌 보면 다윗이 더 악랄하고 비열한 죄를 지었지요.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덮기 위해 남편 우리야 장군을 살인교사로 죽였으니까요. 그런데도 사울은 버림받고 다윗은 그 죄를 사하심을 받았습니다. 이것이 택하심과 부르심으로 구원하시는 ㅎ님의 편애입니다.
 
그런데 그 편애의 뒤편에는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 잡고 있다는 말이지요. 그래서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ㅎ님의 공의를 십자가를 통해 율법의 요구가 충족되었기에, 주님의 십자가로 주어진 성도의 구원에는 아무런 하자가 없습니다. 이런 망극한 구원을 받은 성도는 나중에 성령을 받고 보니 이 모든 내막을 환하게 알게 됩니다.
 
나 같은 무지랭이가, 나 같은 엉터리가, 나 같은 죄인이 구원을 받다니 세상에 세상에~
내가 구원을 받은 것은 오직 ㅎ님의 택하심의 사랑과 예수님의 십자가 피의 공로였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랑에 감복하여 저절로 주님을 사랑하는 자리로 나아가게 되는 것이지요. 내가 죽어야 할 그 십자가 위에 대신 달리신 주님의 모습이 보여지니 어찌 주님을 사랑치 않겠습니까?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다음과 같이 증거 합니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믿음의 결국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벧전1:8~9)
 
그렇습니다. 간음하다가 현장에서 잡혀 와서 돌로 쳐 죽임을 당해 마땅한데 주님의 용서로 구원을 받은 여인이 주님의 발에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붓고 머리털로 주님의 발을 씻기는 사랑을 한 것처럼 죄의 저주로 인해 지옥가야 마땅한 내가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살게 되었으니 어찌 주님을 사랑치 않겠습니까.
 
내 구원으로 기뻐하는 게 아니라 나 같은 자를 사랑하신 그 사랑이 크고 너무 귀해서 주님을 높이고 자랑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말이지요. 나 같이 깜도 안 되는 자가 ㅎ님의 사랑을 받다니 너무도 감사하고 즐거운 거지요. 그 사랑의 자리가 바로 십자가였으니까요.
 
그래서 바울의 찬양이 곧 나의 찬양이 되는 것입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노라’(6:14).~아멘~
 
...
*출처: 사랑과 복음교회 | - Daum 카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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