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 사함의 권세
본문<요20:16~23> 16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여 하니(이는 선생님이라) 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신대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여기서 마리아는 히브리어 ‘마라’에서 온 용어라고 했지요? ‘쓰다, 고통, 괴로움’ 등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왜 쓰고 괴롭습니까? 공허해서지요. 사람은 본래 하나님을 담는 그릇인데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만나지 못하면 만족과 기쁨이 없어 그저 공허함 속에서 방황하는 존재라는 말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을 다 가지고 누린다 해도 하나님을 만나지 못한 심령은 텅빈 공허일 뿐이지요.
세상에서 가장 큰 권세와 부를 누렸고 게다가 최고의 지혜까지 겸비했던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서 뭐라고 탄식합니까? ‘세상의 모든 일이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도다!’ 네 번이나 반복해서 말하면서 결론이 어떻게 끝납니까?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키는 것이 사람의 본문이다’라고 단언하지요.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만난 자가 인생의 공허함에 마침표를 찍고 비로소 진정한 기쁨과 만족을 얻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마리아가 예수님의 부활 사건 전면에 등장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만나지 못해 부평초처럼 떠돌며 사는 모든 인생들아, 공허와 혼돈 속에서 괴로워하는 마리아들아, 너희들의 죄 값을 대신 탕감하사 죽으시고 부활하신 그 사랑의 예수님을 만나야 할 시간이다.’라는 메시지를 던지고 계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아무나 주님을 만날 수 있나요? 아니지요. 하나님이 택한 자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 택한 자에게 먼저 죄를 알게 하는 과정이 주어집니다. 그래서 자신의 가치, 자신의 가능성이 다 묵사발 나서 더 이상 자신을 믿지 못하고 ㅎ님만 소망하는 상태에 이르른 자에게 주님이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일컬어 ‘때가 찼다’라고 하는 것이지요.
부활하신 예수님을 최초로 목격한 자는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그 여인은 누구지요?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을 만나 온전한 자로 고침을 받은 여인입니다. 일곱 귀신이 어떤 상태였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주 심각하고 깊은 죄에 잡혀 있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한마디로 인생의 배가 파선된 실패자였다는 말이지요.
거기서는 빠져 나왔지만 죄인으로 낙인찍혀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고 따돌림 당하는.. 그야말로 쓰디쓴 고통으로 죽지 못해 사는 가련하고 미천한 여인이지요. 마리아는 이런 자의 대표입니다. 이처럼 세상에서 실패하여 사방팔방이 막혀있기에 오직 하늘만 소망하여 살아가는 그런 자에게 주님은 찾아오시는 것입니다.
16절을 보면 마리아가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은 마리아가 눈썰미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주님이 몸이 예전의 그 몸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하는 것입니다. 막16장에서도 이것을 잘 말해주고 있는데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 주님이 다른 모습으로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굳이 다른 모습이라고 표현한 것은 부활의 몸은 단순히 죽기 전의 그 몸이 다시 소생한 그 몸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부활하신 몸은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없습니다. 주님이 열어 주셔야만 볼 수 있습니다. 다른 말로 성령을 보내 주셔야 주님을 알아본다는 말입니다. 누가 영이신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까? 죄인이 하나님을 만나면 즉사합니다. 아니 존재 자체가 없어지겠지요. 사6장을 보면 이사야 선지자가 환상을 보는데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의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한 것을 보고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탄식을 하잖아요?
그 때 천사가 제단에서 핀 숯 하나를 가져다가 이사야 입술에 대면서 네 악이 사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 졌다고 말합니다. 번제단의 불은 피 흘려 죽으신 예수님의 십자가입니다. 거기서 가져온 핀 숯이란 십자가 사건으로 생성된 불로서 복음을 의미합니다.
천사가 그 복음을 전해주니 이사야의 죄악이 사해졌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복음은 하나님의 긍휼과 용서의 아이콘입니다. 그러한 자비와 사랑의 하나님의 모습을 ‘옷자락이 성전에 가득하다’고 묘사한 것입니다. 옷자락은 무엇을 뜻하나요? 죄인을 조건 없이 덮어 주시는 주님의 보배피의 가죽옷을 상징하는 말입니다.
17절을 보면, 지금 주님과 마리아의 관계는 예전의 스승과 제자의 관계가 아닙니다.
주님이 제자들을 내 형제라고 부르십니다. 놀랍잖아요? 이어서 하나님을 일컬어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라고 호칭합니다. 이런 호칭은 여기서 처음으로 하신 말씀입니다. 이전에는 우리의 죄가 해결이 안된 상태이기에 그저 하나님 앞에서 진노의 자식일 뿐입니다. 그런데 이제 주님이 십자가 대속으로 우리의 죄값을 다 치루셨기에 하나님과 화목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령(아들의 영)을 보내사 ㅎ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성령은 부활하신 주님이 하늘로 가셔서 보내셔야 오시는 것이기에 아직 나를 만지지 말라고 하신 것이지요. 이것은 주님이 즉흥적으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다 구약에 미리 예언하신 그 시나리오대로 성취하시는 것입니다. 우리가 곳곳에서 확인하듯이 무엇을 하게 될 때마다 ‘말씀이 응하게 하려 하심이라’는 단서가 붙잖아요? 그것은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의 작정하신대로 지금 이루시고 계신다는 것을 알아먹으라는 힌트를 주시는 것입니다.
지금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했다는 말씀의 근거는 레23장에서 매년의 추수 때에 수확의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리라는 규례에 대한 성취 때문에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 첫 이삭이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살펴봅니다.
<레23:9~10> 9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10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여 이르라
너희는 내가 너희에게 주는 땅에 들어가서 너희의 곡물을 거둘 때에 너희의 곡물의 첫 이삭 한 단을 제사장에게로 가져갈 것이요. 11 제사장은 너희를 위하여 그 단을 여호와 앞에 기쁘게 받으심이 되도록 흔들되 안식일 이튿날에 흔들 것이며
여기서 첫 이삭은 히브리어로 ‘레쉬트’라고 하는데 ‘태초에, 첫째 것’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레쉬트(히)를 더 깊게 살펴보면 ‘인친 머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머리이신 예수님에게 어떤 흔적이 있다는 뜻이니, 줄이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라는 말이지요. 놀랍습니다. 그러므로 첫 이삭은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입니다(창1:1 태초에=벧+로쉬+타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 안에서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다)
11절에서 그 첫 이삭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말은, 우리의 모든 죄를 지고 유월절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부활 승천케 하여 하나님이 천국 곳간에 거두어 드리는 모습을 말합니다. 즉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이 부활 승천하시는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을, ‘첫 이삭 한 단을 안식일 이튿날 흔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레23:12> 너희가 그 단을 흔드는 날에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고
그 단을 흔드는 날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날을 말하는데, 일 년 되고 흠 없는 숫양을 여호와께 번제로 드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번제물이 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심을 믿고, 너 자신도 주님의 은혜로 함께 생명으로 부활함을 잊지 말고 천국을 소망하며 살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레23:13> 그 소제로는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려 화제로 삼아 향기로운 냄새가 되게 하고 전재로는 포도주 사분의 일 흰을 쓸 것이며
소제 예물 역시 깨뜨려지고 가루가 된 주님의 십자가 피 흘리심을 비유하는 말인데 여기에 기름을 섞는 것은 부활 하신 후 보내신 성령의 역사로 복음이 전파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십분의 일은 우리의 십일조 되신 예수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십분의 이(2) 에바란 유대인 뿐 아니라 이방인에게도 복음이 전파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를 다시 말하자면, 기름 섞은 고운 가루 십분의 이 에바를 여호와께 드리라는 것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성령에 의한 복음 시대가 열려 유대인과 이방인이 복음으로 하나님을 섬길 것임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복음 시대가 오기 전까지는 이렇게 하라고 이어지는 14절은 말합니다.
<레23:14> 너희는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지니 이는 너희가 거주하는 각처에서 대대로 지킬 영원한 규례니라
너희 하나님께 예물을 가져오는 그 날까지는 첫 이삭 한 단을 여호와께 흔들어 드리는 날을 말하는 것으로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기 전(구약 율법시대)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십자가 사건으로 시작되는 성령이 오시기 전까지는, 떡이든지 볶은 곡식이든지 생 이삭이든지 먹지 말라는 것은,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진리의 말씀이라 생각하고 먹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여 성령이 오셔서 진리의 말씀을 깨달아 믿게 하심으로 진리의 말씀을 알 수 있다는 것으로 그 이전에 먹는 것은 진리의 말씀이 아닌 다른복음(사람의 의)이라는 뜻입니다(나보다 먼저 온 자는 절도요 강도: 율법의 정체성=비진리)
그래서 예수님께 3년 동안 진리의 말씀을 가르침 받은 제자들도 성령이 임하므로 비로소 복음을 알게 되었고 그 후에 땅끝까지 복음을 전했던 것입니다. 여기서의 첫 이삭을 고전15장에서는 첫 열매라고 표현합니다. 가서 봅니다.
<고전15:20> 20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란 아까 첫 이삭과 같은 말이지요. 잠자는 자는 육신은 죽었지만 복음을 믿었던 자들을 말하는데 이들에게 약속의 말씀대로 생명으로 부활케 하여 하나님 나라를 기업으로 주시려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생명으로 부활케 하셨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고전15:21~23> 21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22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23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아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모든 인류가 지옥불에 들어가게 되었지만 예수님 한 분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고 죽은 자도 생명으로 부활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가장 먼저 부활하셨고 예수님을 믿는 자들도 생명으로 부활케 하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그가 강림하실 때라는 말은 재림을 말하는 게 아니지요. 강림(헬/파루시아)은 요14:3절에서 말씀하셨듯이 ‘내가 가서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와서 너희를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겠다.’는 말씀과 같은 뜻입니다. 즉 처소란 성령을 보내사 성령 안에서 하나가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요. 따라서 강림은 성령의 오심을 뜻하는 말이지 종말적 재림이 아닙니다.
이처럼 예수님께 속한 자들을 생명으로 부활케 하려고 예수님을 가장 먼저 생명으로 부활케 하셨다는 뜻으로 예수님이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첫 열매라는 용어에 깊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둘째, 셋째.. 계속해서 열매를 어떻게 맺으실까요? 첫 열매를 좋은 밭에 뿌림으로 30배 60배 100배를 거두는 것이지요.
잘 아는 대로, 마13장에서 예수님이 네 밭에 대한 씨 뿌리기 비유에서 이미 말씀하셨습니다. 문제는 좋은 씨를 길가 밭, 돌밭, 가시 떨기 밭, 좋은 밭에 뿌렸는데..좋은 밭에만 많은 열매를 맺게 됩니다. 좋은 밭이 어떤 밭일까요? 나는 어떤 밭입니까?(좋은 밭?),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이 이 비유를 들을 때에 어떤 생각들을 하냐면 자기는 좋은 밭이라고 여긴다는 거지요. 아주 큰 착각들입니다.
성경은 모든 인간들은 다 나쁜 밭이라고 고발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하나님이 간섭하신 밭만 좋은 밭이 됩니다. 그 좋은 밭의 실제가 바로 막달라 마리아와 같이 자신이 죄인인 것을 인식하는 자를 뜻합니다. 자신이 죄로 가득하여 하나님 말씀대로 살 수 없는 무능과 무가치한 자라는 자기부인이 일어나서 주님의 십자가 은혜가 아니면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의 가난한 심령을 말합니다.
한마디로 상한 마음과 통회하는 심령의 소유자이지요. 그런 자가 복이 있어 천국이 저희 것이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이란 IX(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산상수훈의 8복이 바로 이것을 가리키고 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잘 알지만 정답대로 살지 못하는 절망과 탄식으로 오직 ㅎ님만 소망하는 마음을 ‘마음이 가난한 자, 애통하는 자, 마음이 청경한 자’라고 하는 것입니다.
복음은 바로 이런 자들의 것입니다. 딤전1장의 말씀처럼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임하셨도다. 죄인 중의 내가 괴수로다’ 이것이 비단 바울만의 고백이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고백이며 찬송이지요. 무엇이 복입니까? 이 세상에서 성공출세 승승장구입니까? 그런 자들은 천국과는 거리가 먼 자들입니다.
비록 세상에서는 인생의 배가 깨뜨려진 실패자일지라도, 그래서 의탁할 건덕지가 하나도 없게 된 만신창이가 된 그자들이 바로 ㅎ님의 자녀가 될 수 있기 때문에 복이지요. 세상의 복은 찰라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이 주시는 영생의 복은 영원한 것입니다.
다시 본문 요20:17절을 봅니다.
주님이 아주 파격적인 말씀을 하시지요? 마리아를 보고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 올라간다 하라.’ 이제는 주님과 제자가 아니라 형제가 된 것이고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고 예수님과 형제가 된 놀라운 신분으로 바뀌게 된 것이 마리아나 제자들이 무슨 업적을 행하였나요? 업적은커녕 다른 이들보다 더 큰 죄인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마리아는 일곱 귀신 들렸던 자고 11제자들은 어떻습니까? 주님과 3년 동안이나 동고동락을 했으면서 주님이 체포당하실 때 다들 도망간 배신자들 아닙니까? 수제자였던 베드로는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자로 평가절하의 모지리들입니다.
그런데 왜 무슨 이유로 이들이 구원을 받고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까? 아무리 성경을 샅샅이 찾고 뒤져도 이들이 어떤 업적을 쌓아서 하나님 자녀가 된 게 아닙니다. 갈4:6절을 보면, 너희가 아들인 고로 아들의 영(성령)을 보내사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아들이기 때문에 아들 삼는 성령을 보내 거듭나게 하여 ㅎ님 자녀 삼았다는 것이지요.
여기에 사람의 자질이나 조건이 전혀 없습니다. 본래 창세전부터 하나님의 아들로 정해져 있었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롬8장에서는 더 구체적으로 증거하고 있습니다. 창세전에 영생 얻기로 작정된 자들을 미리 아신 자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롬8: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셨다는 것은 단지 이들이 먼 미래에 구원 받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렇게 주장하는 자들이 있습니다만 전혀 성경과 맞지 않는 무식한 말일 뿐입니다. 죄에 갇혀 본질상 진노의 자식이라는 자신의 실체를 보지 못하는 소경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가능성을 두고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오판입니다.
미리 아셨다는 말은 엡1장에서 잘 해석해 주고 있듯이, 창세전 IX안에서 하나님의 기쁘신 뜻을 따라 택한 자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미리 아는 자란 처음부터 ㅎ님의 사랑으로 정하신 자라는 의미로서 맹목적이고 기계적인 택함이 아닌 것입니다. 우리들도 자녀를 갖게 될 때 미리부터 사랑으로 소망하고 계획하여 갖게 되는 것이지 뜬금없이 어느 날 갑자가 태어난 존재를 내 아기라고 말하지는 않지요.
이들이 누구냐면 아들 예수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정하셨다고 합니다. 이것이 ㅎ님의 구원 방식입니다. 복제양 둘리처럼 아예 아들 예수의 영을 택한 자에게 부어 주심으로 아들의 형상을 이루시는 방식이지요. 그래서 아들의 영을 받은 자 역시 아들 예수의 붕어빵처럼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죄를 안 짓고 세상을 등지고 오로지 ㅎ님 뜻만 이루기 위해 사신 삶을 본받게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 건 전혀 할 수도 없고 할 자도 없습니다.
여기서 예수님을 맏아들이라고 칭합니다. 그렇다면 아들의 영을 받은 자들은 예수님의 동생들이 됩니다. 주님이 아까 17절에서 내 형제들이라고 말씀하신대로입니다. 이러한 구원을 창세전부터 작정하신 하나님이 예수님을 보내사 십자가로 다 성취하신 것입니다. 히2장에서도 같은 말을 증거 하잖아요. 거룩하신 자(IX)와 거룩함을 입은 자(성도)가 하나(ㅎ님)에게서 난지라, 그러므로 형제라 부르시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셨다고 증거 합니다(기쁨으로 하심). 창조주가 피조물과 한 형제가 되다니요..이런 망극한 은혜라니요.
<롬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택하여 아신 자들을 역사 속에서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또한 영화롭게(ㅎ님 자녀)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의 구원에 사람의 높은 윤리 도덕적 반듯함이나 율법적 행함이 들어 있습니까? 사람의 자질과 조건은 전혀 감안되지 않고 오직 미리 아신 자들을 복음으로 불러서 주신 구원입니다.
롬9장에 가면 기절초풍할 말씀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기로, 야곱은 사랑하기로 작정했다고요. 그들이 태어나서 무슨 선과 악을 행하기 전에 미리 정했다고 선언을 한다니까요. 이에 대해 누가 반기를 들겠느냐고 하시네요.
<롬8:31~34> 같이 묵상..
우리의 신분이 이와 같습니다. 정말, 정말 복 터진 자 맞습니다. 한마디로 이런 횡재가 어디 있습니까? 너무 놀라워서 안 믿어지겠지만 이것이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 선물의 내막입니다. 이것이 믿어지면 주님의 양이고 안 믿어지면 주님의 양이 아닙니다. 단순 명료합니다. 다만 아직 안 믿어지더라도 실망할 게 못되는 것은 아직 때가 안 찬 사람인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저도 예전엔 예정이 안 믿어져서 뭐라고? 예정? 웃기고 자빠졌네..코방귀를 쳤던 장본인데.. 언젠가 때가 차서 내가 죄인임을 알게 되니.. 찰떡같이 믿어집디다.
당시 하도 안 믿으니까 아예 어느 날 예수님이 찾아와서 성경을 열어서 가르쳐 주셨다니까요? 그때의 감격은 말로 다 할 수 없습니다. 이거였군요 이거였군요..너무도 뻔한 말이 왜 그리 눈에 안보였는지 알다가도 모를 지경입니다. 그야말로 그때는 눈뜬 소경, 당달봉사였습니다. 보고도 보지 못하는 자, 성경을 읽어도 알지 못하는 자, 눈뜬 소경..지금 수많은 자들이 이런 상태이지만 이거야말로 사람의 노력으로 가능한 차원이 아닙니다. 다 때가 있습니다(기도하라)
다시 본문 요20장으로 갑니다.
<20:18절> 18 막달라 마리아가 가서 제자들에게 내가 주를 보았다 하고 또 주께서 자기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이르니라.
마리아가 제자들을 찾아와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말하지만 다른 복음서에 나와 있듯이 제자들은 믿지를 못합니다. 믿지 못했다는 증거가 제자들이 여전히 두려워하여 자기들의 은밀한 장소에 숨어 문을 닫고 있는 것이지요. 종교 지도자들에게 잡히면 맥없이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한 것입니다. 그런 제자들에게 주님이 직접 찾아와 평강을 말씀합니다.
<요20:19~20> 19 이 날 곧 안식 후 첫 날 저녁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에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20 이 말씀을 하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이시니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하더라
문을 닫았는데 그 안으로 부활하신 주님이 들어오신 것이지요. 부활하신 몸의 신비한 현상입니다. 두려워 하니까 주님이 평강을 말씀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평강을 가지지 못합니다. 그러자 주님이 손과 발의 못 자국을 보여 주며 부활하셨다는 것을 증명해 주시자 제자들이 기뻐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쁨은 평강 상태의 기쁨을 의미하는 게 아니었습니다. 죽은 줄 알았던 스승이 살았기 때문에 이제 자기들의 문제를 다시 예수님이 모두 해결해 줄 것이라는 기대로 인한 육신적인 기쁨이었지요. 이것은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이 예수님을 자기 문제 해결을 위한 수단으로 여기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제자들은 다시 사신 예수님을 보고도 주님의 부활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고, 자신들과 어떤 연관이 있는지에 대한 관심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부활이 관심거리가 아니라, 자신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구세주가 다시 생겼다는 것으로 기뻐하는 것뿐입니다.
만약 제자들이 주를 보고 기뻐한 것이 평강이었다면 21절에서 다시 평강을 말씀하실 이유는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주를 보고 기뻐하는 제자들에게 다시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21절)는 말씀을 하시는 것을 보면 그들의 기쁨은 평강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음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요20:21> 21 예수께서 또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예수님을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심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낸다.”하나님은 예수님을 세상에서 편안하고 안락한 삶에 있게 하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높임 받는 자리로 보내시지도 않았습니다. 오직 멸시천대와 고난의 자리로 보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만 바라보시고 아버지께 순종하심으로써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환경과 형편에도 평강이 있으셨고 그 어떤 것도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바로 이러한 자로 보내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에게 보냄 받은 제자답게 살아가는 것은, 두려워하지 않고 평강에 거하는 것입니다. 이것이야 말로 예수님의 제자요, 예수님으로부터 보냄 받은 자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합니다.
지금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떠는 상태이지만 오순절 성령이 임하자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달라집니다. 목숨이 두려워 숨어 지내던 자들이 담대하게 거리로 나가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게 됩니다. 부활을 전하지 말라는 종교 지도자들 앞에서 뭐라고 반박합니까?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게 옳겠느냐, 하나님 말씀 듣는 게 옳겠느냐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외칩니다. 또한 예수님 때문에 능욕 당하는 걸 기쁘게 여깁니다(행5)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 스스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제자들 안에 오신 성령께서 담대한 마음을 주신 것입니다. 마치 어린 소년 다윗이 하나님의 신에 붙들려 블레셋 거인 골리앗을 상대하러 나설 때의 용기와 같은 것입니다. 육척 장신 골리앗을 누가 죽였습니까? 다윗 인가요 하나님이신가요?(ㅎ님). 필요하면 하나님은 누구든지 들어서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지금 주님이 제자들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말씀하신 것은 제자들에게 평강을 요구하거나 종용하시는 의도가 아니라, 앞으로 성령을 보내어 제자들을 그런 자들로 이끄시겠다는 복안을 미리 설명하신 것입니다. 다 주님이 하실 테니 두고 보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이런 이치를 모르고 ‘우리도 다윗처럼 용기를 내어 적을 대적하자, 어떤 상화에서든지 평강을 유지하자.’라고 한다면 육신을 부추기는 어리석은 일일 뿐입니다.
<요20:22~23> 22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향하사 숨을 내쉬며 가라사대 성령을 받으라 23 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주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제자들이 지금 성령을 받을 걸까요? 아닙니다. 성령은 행2장에서 오순절이 되어야 오십니다. 다 성경의 예언대로 진행됩니다. 지금 주님의 이런 퍼포먼스는 성령을 이렇게 너희에게 생명의 숨으로 부어 주시겠다는 것을 상징하여 미리 보여주신 장면입니다.
성령은 우리가 달라고 해서 오시는 분이 아니고, 또한 어떤 기준에 도달해야 오시는 분도 아니라, 전적으로 주님의 판단에 따라 택하신 자들에게 조건 없이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형해서 지금 주님이 숨을 내쉬며 성령을 받으라고 하신 것이지요.
그리고 23절의처럼 죄사함의 권세를 제자들에게 주십니다. 정말 제자들에게 죄 사함의 권세가 주어졌습니까? 이 구절을 오해하여 천주교에서 고해성사 교리가 시행되지만 완전히 곡해한 무지의 소치입니다. 23절은 십자가 복음을 전할 때 나타나는 능력에 대해 설명하는 것입니다.
롬1:17절에서 복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사람의 구원은 율법의 행함에 있는 게 아니라, 오직 IX의 십자가 피 공로를 믿음으로 주어진다는 것이 복음입니다. 이것이 바로 창세전 하나님이 작정하신 하나님의 의입니다. 율법의 의가 아닌 믿음의 의이지요. 구원은 행함이 아니라 은혜로 주어진다는 말입니다.
제자들이 행함으로 구원 받았습니까? 아니지요 아니지요. 도저히 구원과는 거리가 먼 자들 아닙니까? 도저히 구원 받지 못할 엉터리들, 죄인들, 배신자들이 거저 선물로 죄사함 받고 성령을 받아 하나님 자녀가 되는 놀라운 은혜의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에게 이루어진 그 증거를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의 복음을 전할 때에 택한 자들은 아멘으로 화답하여 구원의 반열에 들어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아무나 전하는 게 아니라 주님의 그 은혜를 받은 자들이 또 다시 전하는 것입니다.
마치 수가성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이 주님을 만나서 너무 기뻐 물동이를 버려두고 마을로 뛰어 들어가며 ‘내가 메시야를 만났다’ 외치듯이, 메시야를 만난 자는 가만히 있지를 못합니다. 생수의 기쁨이 속에서부터 흘러넘치기 때문이지요.
너무 기뻐서 내 일은 제쳐두고 복음의 신을 신고 뛰어 다닙니다.
‘내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내 모든 죄가 사해졌다’
‘내가 사랑의 하나님을 만났다.’고 외치는 기쁨의 노래가 전도입니다.
십자가 복음, 이것을 전하는 게 바로 죄사함의 권세입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