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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

보지 못하고 믿는 복(강해 녹취문)

작성자소자|작성시간26.06.14|조회수53 목록 댓글 0

보지 못하고 믿는 자의 복

 

 

본문<20:24~29> 열 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 오셨을 때에 함께 있지 아니한지라 25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의 못 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 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26 여드레를 지나서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고 문들이 닫혔는데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가라사대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시고 27 도마에게 이르시되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 그리하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 28 도마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성경은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언약백성이라고 말합니다. 언약백성이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태어났고 언약에 의해 구원을 얻는 자들을 총칭해서 하는 말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언약이 없다면 태어나지도 않았고 구원도 없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언약백성에게 믿음을 주셔서 복음이 믿어지게 하여 구원하시는 것입니다. 오늘은 언약과 믿음의 상관관계에 대해 배우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언약백성의 대표가 이스라엘입니다. 이들을 왜 언약백성 혹은 선민(택한 백성)이라고 하는 걸까요? 그들은 분명히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태어났고 인도함을 받은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창15장을 보면 하나님이 아브라함과 언약을 하십니다. 밤하늘의 뭇별을 셀 수 없듯이 장차 네게서 나올 자손들이 이처럼 많아지리라는 언약을 하십니다.

 

그 언약의 구체적인 내용은 장차 아브라함의 자손이 이방의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다가 400년 만에 다시 이 가나안 땅으로 돌아온다는 약속을 하시고 그 약속을 반드시 이행한다는 맹세의 표식으로 쪼갠 고기 사이로 횃불이 지나갑니다. 횃불은 하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따라서 하나님 자신의 죽음으로 이 언약을 이행하겠다는 맹세를 하신 것입니다.

 

이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히6:16절 이하에서 이렇게 증거 합니다.

<6:16~18> 16 사람들은 자기보다 더 큰 자를 가리켜 맹세하나니 맹세는 저희 모든 다투는 일에 최후 확정이니라.

 

하나님이 당신 자신 보다 더 큰 이가 없음으로 자신의 생명을 걸고 맹세로 보증하셨다는 말입니다. 얼마나 중대한 가치가 있는 일이면 하나님의 죽음으로 이루시겠다는 일입니까?

그것이 바로 언약백성의 구원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언약 백성의 구원은 자신들이 해야 할 일이 전혀 없습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하나님이 작정하시고 이루시는 것이지요.

 

‘17~하나님은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에게 그 뜻이 변치 아니함을 충분히 나타내시려고 그 일에 맹세로 보증하셨나니

성도는 누구라고요? 하나님의 약속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이랍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을 생명처럼 실제처럼 받고 믿는 자들이 바로 성도들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그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확증시키려고 맹세로 보증하셨다고 증거 합니다. 다시 말해서 약속만으로는 미덥지가 않게 여기는 자들을 안심시키려고 맹세까지 더하여 보증했다는 말이지요.

 

‘18~이는 하나님이 거짓말을 하실 수 없는 이 두 가지 변치 못할 사실을 인하여 앞에 있는 소망을 얻으려고 피하여 가는 우리로 큰 안위를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거짓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혹시 한 번은 몰라도 두 번은 더더욱 못하시겠지요? 약속한데다가 맹세까지 하셨는데, 이 두 가지를 어길 수 있으시겠냐는 역설적 화법으로 강하게 긍정을 강조합니다. 반드시 이행하신다는 말이지요. 무엇을 약속하고 맹세로 보증했다고요? 400년 만에 애굽의 종살이를 끝내고 다시 고토인 가나안 땅으로 돌아오게 하시겠다는 약속에 더하여 맹세까지 한 언약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게 하신 언약이 역사 속에서 어떻게 실현되었나요? 야곱의 자손 70명이 기근으로 애굽에 내려가서 실제로 430년 동안 장정만 60만(어림잡아 200~250만 명)이라는 큰 민족을 이루어 어린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나온 것입니다. 이는 IX(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피로 구원 받는 하나님의 백성들에 대한 모형과 그림자입니다.

 

그러니까 이스라엘 백성은 430년 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과의 언약 이전에는 없었던 자들이잖아요. 무존재들인데 어떻게 태어났고 어떻게 바로의 종살이에서 해방되었어요?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태어났고 언약대로 430년 만에 애굽에서 빠져나와 자유의 몸, 구원이 된 것이지요.애굽 왕 바로는 세상신 마귀를 상징하니까, 결국 어린양의 피의 능력으로 출애굽한 이스라엘은 세상신 마귀의 손에서 예수 십자가 피로 구원받은 성도들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언약 백성이란 원래는 없던 자들인데, 탄생 자체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태어났고 구원도 하나님의 언약으로 되는 것이니까 이를 함축해서 언약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우연에 의해 태어났고 우연으로 구원된 게 아닙니다. 이런 자들을 롬8:30절 에서는 미리아신 자들이라고 합니다. 그들을 복음으로 부르시고 부르신 자들을 의롭다고 여겨주시고 또한 아들로 삼아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 되고 싶어서 되는 것도 아니고 내가 구원 받고 싶다고 해서 되는 구원도 아니라 전적으로 다 하나님의 주권으로 되어지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슥4:6절에서는 이같이 말합니다.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뭔말이냐면 바벨론 포로에서 70년 만에 돌아와 스룹바벨 성전을 재건하는 일이 사람의 힘과 능력으로 되는 게 아니라 ㅎ님의 신(성령)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즉 스룹바벨 성전을 짓는 것은 모형으로서 성령에 의한 마음 성전을 짓는 것에 대한 비유로서 거듭나는 것을 말하는데, 이것은 사람의 힘으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성령에 의해 된다는 말입니다.

 

롬9:16절에서도 같은 증거를 합니다.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 어떤 선악을 행하기도 전에 에서는 미워하시기로 작정하시고, 야곱을 사랑하기로 작정했노라 하시면서, 야곱처럼 ㅎ님이 긍휼을 입는 것은 사람이 원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달음박질(열심과 충성, 힘과 능력) 한다고 되는 게 아니라, 오직 ㅎ님이 긍휼히 여기시는 택하심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택함이 곧 언약백성과 같은 의미입니다.

 

언약백성을 좀 더 묵상해 봅니다. 서두에서 이스라엘은 태어나기도 전에 ㅎ님이 아브람에게 언약해서 존재케 된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즉 탄생 전에 이미 ㅎ님의 언약이 있었고 그 언약대로 태어났으며 또한 언약대로 430년 만에 출애굽하여 가나안(구원)에 들어갔습니다. 즉 하나님의 언약이 없었으면 존재 자체가 없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자신들이 탄생하기도 전에 먼저 하나님의 구원 언약이 있었다는 말을, 역사 전체로 확장하면 창세전 언약이 되는 것입니다. 구원의 방식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택하심을 따라 긍휼로 하셨듯이 또한 선민 이스라엘이 400년 전에 아브람에게 언약하신대로 태어났고 구원을 받은 것처럼, 모든 성도 역시 창세전에 이미 하나님의 언약에 의해 구원이 정해졌다는 것을 알라는 것입니다.

 

창세전 언약을 가장 잘 명시한 곳이 엡1장입니다. 모두 잘 아시겠지만 다시 살펴봅니다.

<1:3~10> 3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으로 우리에게 복 주시되

 

바울이 감격에 겨워 노래합니다. 찬송하리로다..

왜냐하면 자신이야말로 도저히 구원을 받지 못할 죄인이잖아요. 전에는 훼방자요 포행자요 핍박자였는데, 어느 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와서 눈의 비늘을 벗겨 주심으로 알게 된 것이 뭐예요? 구원은 인간의 율법적 행함의 의로 되는 게 아니라 오직 택하심의 긍휼로 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그 은혜의 구원을 지금 설명하려니까 가슴 벅차서 먼저 찬송부터 터져 나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하늘에 속한 신령한 복인 구원에 대해 계속 이어갑니다.

 

‘4절~여기서 창세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고 말합니다. 이건 천기누설에 해당하는 1급 비밀이지요. 그런데 이 비밀이 버젓이 기록되어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은 이 말씀을 외면합니다. 왜일까요? 공정하신 하나님이 그럴 리가 없다고 다른 뜻으로 해석을 하기 때문이지요. 이런 모든 일들 역시 ㅎ님의 안배 속에서 진행되는 일입니다. 즉 성령의 역사가 아니면 이 말씀을 받지 못합니다.

 

여기서 두 가지에 주목합니다. 첫째, 창세전 그리스도 안이라는 말입니다. 지난주에도 잠깐 언급했습니다만 창1:1절 ‘태초에 ㅎ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느니라’에서 태초라는 단어가 베레쉬트’라고 했지요? 히브리어 의미가 인친머리 안(벧+로쉬+타브) 즉 십자가 달리신 예수 안에서 우리를 택하였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창세전부터 십자가 복음을 염두에 두시고 인간 창조와 구원을 작정하셨다는 말입니다.

 

둘째, 택한 자들이 누구라고 합니까? ‘우리’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좀 더 볼까요?(3~9절까지) 계속 우리, 우리, 우리..라고 나옵니다. 우리란 너도 아니고 나도 아니고 저들도 아닙니다. 집합을 뜻하는 모두입니다. 왜 구별하지 않고 뭉뚱그려 우리라고 했을까요? 구원이란 개개인의 조건이나 자질이나 특성을 배제하고 오직 ㅎ님의 택하심으로만 된다는 의도가 숨어 있습니다. 한마디로 ‘우리’란 옛날의 바울처럼 죄만 쏟아내는 ㅎ님의 원수요 진노의 자식들을 말합니다.

 

‘5절~창세전 하나님의 예정의 근거가 밝혀집니다. IX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들이 되게 하신 예정은 하나님 자신의 기쁨으로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아무 감정이 없이 기계적인 선택이 아니지요. 4절도 보면 사랑 안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도록 하셨다는 말입니다. 여기에 핵심이 있습니다. 거룩함과 흠이 없게 되는 일은 사랑 안에서만 가능하지 사랑이 배제된 상태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차원입니다.

 

가정에서 경험하는 일이 아닙니까? 자기 자녀이기에 흠이 없다고 여기지 남의 자식이면 흠이 없다고 여길까요? 조금만 눈에 벗어나면 즉각 단점이 보여져서 미워지고 싫어지는 게 인지상정이지요. 그러나 자기 자식은 사랑으로 보기에 어떠한 단점도 다 용납되고 이해되어지는 것처럼 하나님의 기쁘심과 사랑으로 택하신 자들의 복이 그러하다는 뜻입니다.

 

‘6절~왜 그렇게 조건도 없이 무자격자들을 거저 은혜로 구원을 시키는지 목적을 밝힙니다. 그 은혜의 영광을 찬송케 하려는 것이랍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 목적을 잘 알아야 구원에 대한 오해가 없어집니다. 만일 사람 스스로 구원을 쟁취하거나 조금이라도 구원에 조력을 했다고 한다면 그 은혜를 순수하게 찬양할 수 있겠습니까?

 

오히려 자신이 열심을 내어 구원 받았다고 자랑을 하겠지요.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인간이 자랑하는 여지는 단 1도 없는 곳이 천국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채워진 곳이 천국이라는 말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자들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자신이야말로 구원을 고사하고 지옥이 마땅한데 ㅎ님의 망극하신 사랑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것을 10절에서 증거 합니다. 하늘에 있는 자나 땅에 있는 자나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 되게 하려 한다는 말입니다. 하늘에 있는 자란 이미 구원을 받고 육신이 죽은 자들이고 땅에 있는 자들이란 성령으로 거듭나서 지금 살아있는 자들을 말합니다. 둘 다 공통점은 자기 의가 단 1도 없고 오직 ㅎ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다는 면에서 하나입니다. 나도 없고 너도 없고 ‘모두가 똑같이 은혜 받은 우리’라는 의미에서 하나로 통일입니다.

 

‘7절~하나님의 구원의 전모가 밝혀집니다. 택함을 받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아요? IX의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사함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한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거저 선물로 은혜로 구원을 받는 이면에는 아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이라는 어마어마한 댓가가 지불되었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줄여서 구속(댓가 주고 사오다: 가알)이라고 합니다. 이를 행20:28절에서는 하나님의 피로 사신 교회라고 표현합니다.

 

얼마 전에도 나눈바가 있지만 이같이 창세전에 아들 예수의 피로 구원하실 것을 홀로 정하셨겠습니까? 아니지요. 아들 예수와 함께 작정하신 일을 줄여서 저는 ‘창세전 메시야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다른 말로는 십자가 복음을 통하여 구원하시기로 이미 창세전부터 ㅎ님은 작정하셨다는 말입니다. 이처럼 그 언약은 아들 예수님의 자원함이 근본 바탕이 된 것이라는 말이지요.

 

그래서 레위기에 나오는 5대 제사 중 번제와 소제 화목제는 자원제에 해당됩니다. 속죄제사와 속건제사는 의무제에 해당되고요. 우리의 속죄와 속건이 되시려고 자원해서 십자가 피의 희생을 창세전부터 언약하시고 역사를 열어 구속사를 운영하시는 것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역사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이 다 찾아지면, 즉 역사 속에서 택한 자들을 다 구원하시면 세상은 종말을 맞게 되겠지요.

 

오늘의 본문 요20장은 바로 창세전 언약을 성취하시려고 십자가에서 죽고 장사되셨다가 사흘 만에 부활하사 당신의 택한 백성들에게 그 은혜의 복음을 설명하시는 과정입니다. 만일 행함으로 구원을 받는 것이라면 11제자 역시 다 버림받아야 할 처지입니다. 3년 동안 주님과 동고동락을 했지만 날마다 서로 누가 큰 자인가로 다투기를 일삼더니 십자가 사건이 터지자 모두들 도망치고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자들입니다. 행함으로는 구원받을 건덕지가 꽝인 자들입니다

 

그러나 애당초 사람의 행함으로 구원받을 자는 아무도 없기에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택함 받은 자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부활하신 주님이 다시 이들을 찾아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등장하는 인물이 도마인데 도마를 통해 주님은 무엇을 말씀하시고자 하는지 보겠습니다.

 

<20:24~25>

앞서서 부활하신 주님이 두려워서 숨어 지내던 제자들에게 나타나서 손과 옆구리를 보여주자 제자들이 안심하며 기뻐합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 마침 도마만 자리에 없어서 주님을 보지 못했는데 나중에 제자들이 주님을 보았다고 하자, 자신의 손가락으로 주님 손의 못자국과 옆구리에 넣어 확인해야 믿겠다고 의심을 합니다.

 

<20:26~27>

그런 후 다시 8일이 지나서 다시 제자들이 문을 닫고 있었는데 마침 주님이 문 안으로 슥~ 들어 오사 도마에게 말씀하시기를, ‘자~ 네 말대로 네 손가락으로 넣어보고 만져보라’고 하십니다. 주님은 도마의 말을 다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자 도마는 깜짝 놀랍니다(어떻게..?).

게다가 눈앞에 분명 예수님이 다시 살아계심이 보이는데 만지고 자시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신도 모르게 말이 튀어 나옵니다.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이 말은 도마 자신이 한 말이 아니라 성령께서 고백하게 하신 것입니다. 마16장에서도 주님이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는 질문에 베드로가 나서서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하자, 주님이 ‘이를 알게 한 것은 네 실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하십니다.

 

주님을 보고 ‘주요 그리스도’라 고백하는 것은 성령에 의하여만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물론 지금의 기독교인들 대다수는 익히 들어서 습관적으로 하는 헛빠진 말들이지만 실제는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라고 부를 수가 없습니다. 오직 성령으로만 가능합니다(고전12:3).

 

27절을 끝을 다시 보면, 그리하여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십니다. 이 부분에 대한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말씀은 너 스스로 잘 판단하고 결단하여 믿는 자가 되는 말이 아닙니다. 앞으로 주님이 성령을 보내사 믿는 자가 되게 하시겠다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스스로 예수님이나 하나님을 믿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은혜로 받아야 믿어지는 것입니다.

 

만일 인간 스스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면 인간이 선을 행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이 선을 행할 수 있다는 말은 스스로 구원을 쟁취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롬3:12절에서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말씀과 충돌하게 됩니다.

 

또한 사람이 스스로 주님을 믿을 수 있다면 죄인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스스로 주님을 믿을 수 없기에 주님이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말씀은 도마에게 책임을 부여하는 게 아니라 앞으로 주님이 그리 인도하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입니다.

 

<20:29>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되도다 하시니라

주님이 책망조로 말씀하시는 것 같지만 도마에게만 말한 게 아닙니다. 11제자 모두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다른 제자들도 마리아가 전해준 부활 소식을 듣고도 못 믿었고, 심지어는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가 와서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해도 믿지를 못해 문을 닫고 무서워 했던 것을 보면 모두가 보지 못하고는 믿지 못하는 자입니다.

 

지금 주님은 도마를 모델로 세워서 우리 모두에게 일침을 주시는 것입니다. 도마나 다른 제자들이나 우리들이나 모두 같다는 말입니다. 성령의 인도하심이 없으면 아무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고 또한 주님의 십자가 복음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도 선물로 받아야 예수님의 복음을 믿는 자기 될 수 있다는 의도를 품고 이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도마를 디두모 도마라고 부릅니다. 도마는 히브리어인데 디두모는 도마의 헬라식 발음입니다. 둘 다 같은 말인데 ‘쌍둥이’, 혹은 ‘이중적’이라는 의미를 가지는 단어입니다. 대충 감이 잡히십니까? 도마의 입장이 다른 제자들의 입장과 쌍둥이 같다는 뜻입니다. ‘도낀개낀’이라는 말이지요. 죄와 허물로 죽어있는 인간은 아무도 부활하신 주님에 대해 알려주어도 믿지를 못합니다. 앞에서처럼 마리아 옆에 서 계셔도 눈을 열어서 보게 하지 않으면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이것이 육과 영의 세계의 차이입니다. 신앙의 첫 출발은 자신이 죄와 허물로 죽어 공중 권세 잡은 사단의 종, 진노의 자식이라는 정체성을 아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을 모르고 자기 가능성을 가지고 마치 바리새인들처럼 자신의 열심과 정성으로 말씀을 실천하며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서 구원을 얻겠다는 발상을 한다면 아직 구원과는 너무도 거리가 먼 자일뿐입니다.

 

지금 주님은 도마와 같은 입장에 있는 육적인 제자들을 모두 영적인 차원으로 이끌어 복음을 믿게 하고 더 나아가서는 그 십자가 복음을 땅 끝까지 전하는 증인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그 복안을 부활의 숫자 8(여드레)로 시사하고 계십니다. 팔(8)은 부활을 상징하는 숫자로 하나님의 백성은 반드시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하도록 율법에 정한 바가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백성은 육을 입고 살지만 영의 세계에서 사는 자들이라는 뜻을 할례 규례에 담아 시행해 오신 것입니다.

 

26절을 보면 주님이 언제 제자들에게 찾아오십니까? 여드레를 지나서.. 그런데 앞의 19절을 보면 역시 팔일 째에 주님이 나타나셨음을 알 수 있습니다. 부활하신 당일 아침에 마리아에게 보여주신 주님이 그날 저녁에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는데, 그 날을 안식 후 첫날 저녁이라고 표현 합니다. 그러니까 안식 후 첫날이라는 말에서 안식일이라는 말이 여기서 종결됩니다.

 

즉 역사적인 7일의 안식일이라는 용어는 주님의 부활로 막을 내리고, 앞으로 주님과의 관계성은 묵시의 시간을 암시하는 여드레 안에서 진행하신다는 의도를 품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역시 부활의 차원인 여드레 안에서 주님을 믿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눈으로 보고 믿는 사람의 믿음이 아니라, 보지 않고도 믿어지는 영의 차원인 믿음의 세계에 살고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부터 믿음에 대해 살펴보는데, 히11장 1절에서 믿음의 정의를 잘 내려줍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즉 믿음이란 바라는 소망이 마치 이루어진 실상처럼, 그리고 보지 못하는 것을 마치 보는 것처럼 확증하는 능력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서 믿음이란 눈에 안 보이는 묵시의 세계를 실제처럼 여기고 증거하는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역으로 말하면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은 믿음이 아니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1:16>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왜 바울은 복음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합니까? 사람들은 복음을 매우 하찮게 여기고 귀를 막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은 자신들의 가치를 높이 평가해 주는 것을 선호합니다. 특히 구원을 얻는 문제에 있어서는 더더욱 그러합니다. 아니 천국을 가는 게 쉬운 일이 아닌데 열심과 정성을 다해도 갈까말까 한데, 오히려 복음은 사람의 행함을 일체 부정하고 오직 예수 십자가 공로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하니, 복음은 그저 세상의 조롱거리라는 뜻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인간은 그 자체가 죄악 덩어리임을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롬7장에서 인간의 정체성에 대해 길게 폭로하지 않습니까? 탐심이 죄라고 고발하는 율법 앞에서 의로운 자는 하나도 없다고 말하면서, 원하는바 선을 행치 않고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는 자신에 대해 ‘오호라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건져내랴’고 탄식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태생적 죄인이 스스로의 힘으로는 죽었다 깨나도 구원을 따낼 수가 없고, 오직 복음이라는 은혜가 아니면 아무도 구원 받지 못함을 잘 알기에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강변합니다. 하나님의 구원의 능력이 어디에 있다고요? 복음을 믿는 믿음에요.

 

‘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의 의가 복음에 나타난답니다. ㅎ님의 의가 무엇이지요? 율법의 의인 사람의 행함이 의가 아니라, 예수님의 십자가 공로를 믿으면 의롭다고 여기시는 복음이 곧 하나님의 의라는 말씀입니다. 앞에서 계속 말씀드린 창세전 메시야 언약이 바로 하나님의 의라는 말이지요. 예수님의 피 공로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구원을 줄여서 ‘복음’ 또는 ‘하나님의 의’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복음을 누가 믿게 됩니까? 여기서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합니다. ‘믿음에서 믿음에 이르게 한다?’ 앞의 믿음은 주신 믿음이고 나중의 믿음은 주신 믿음이 우리 안에서 촉발되어서 생성되는 믿어지는 믿음입니다. 즉 은혜로 믿음을 받으면 그 믿음이 안에서 일을 해서 믿어지게 한답니다. 이렇게 해서 의인이란 반드시 믿음으로 된다는 말을 ‘오직 믿음으로 의인은 산다’는 선언을 하는 것입니다.

 

엡2:8절에서도 같은 증거를 합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는데 그 믿음이 은혜로 받은 것이라고, 믿음의 출처를 밝히고 있지요? 왜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주신다고요? 행함으로 구원을 준다면 자랑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천국은 없다는 것입니다. 천국은 인간의 썩은 냄새가 나는 것은 일체 없는 곳이기 때문이지요.

 

벧후 1:1절에서 베드로 사도는 놀라운 증언을 합니다.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같이 동일하게 받은 자들에게 이 편지를 쓴다’고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 받은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되어 영생이라는 구원을 받는 것이기에 ‘보배로운 믿음’이라는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정말 예수님 십자가가 나의 모든 죄를 탕감하고 나를 의롭게 하신 것이 믿어지십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보배로운 믿음을 받은 자가 분명합니다. 축하합니다. 가장 복 받은 분입니다.

 

그 복의 노선에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이 있고 다윗이 있습니다.

<4:1~8>

‘1,2절~아브라함이 육신으로는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다는 말입니다. 설사 있다고 치더라도 하나님께 인정받지는 못하는 것들이라고 잘라 말합니다.

 

‘3절~아브라함이 ㅎ님을 믿으매 그것을 의로 여기신바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행적을 보면 믿음에 실패한 자입니다. 창15장에서 장차 네 자손이 하늘의 별만큼 많아지리라는 말을 믿었다는 것은 ㅎ님의 믿음이 아니라 자신의 믿음이었지요. 보기 좋게 실패했잖아요.

 

그 때가 대략 75세인데, 그 후 10년이나 기다려도 아내 사래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틀렸구나 생각을 하고 몸종 하갈을 통해 이스마엘을 낳게 됩니다. 그때가 86세였지요. 그러고도 13년이 흘러 아브람이 99세 때에 하나님이 나타나셔서 믿지 못함을 책망하십니다. 그리고 할례를 명하시고 이름을 아브라함으로 개명을 시킵니다.

 

마치 여드레 후에 도마와 제자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신 것처럼, 아브라함의 이름을 바꾸신 것은 육신의 차원이 아니라 영적이 차원으로 대하시겠다는 의도입니다. 할례란 육의 생명이 끝났다는 표식이니 이제부터 아브라함은 영으로 사는 자라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낳은 자식이 이삭입니다. 아브라함은 육신의 생식능력이 끝났고 사라 역시 경수가 끊어진 상태에서 이삭이 태어났다면 이삭은 누구의 자식입니까?

 

언약의 자식이요 하나님의 자식입니다. 이삭은 성령으로 잉태하신 IX의 예표적 인물이지요. 결국 아브라함의 실패한 믿음을 바꿔서 하나님이 억지로 주입해서 믿게 하신 그 믿음으로 하나님을 믿었다고 성경은 증거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의 구원도 억지춘향 식으로 하나님에 의해 끌려가는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4절~만일 사람의 공로가 있어서 구원을 받게 된다면 거기서는 은혜가 설 자리가 없고 자기 자랑이 삯으로 행세를 하여 목을 뻣뻣이 들고 다니겠지요.. 그런 모습을 하나님이 허용하실 리가 만무하지요? 그래서 공짜 구원을 주시는 것입니다. 자랑? 찍소리 말라는 거지요.

 

‘5절~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의 내막이고 비밀입니다. 구원을 위해 아무 일을 하지도 않았는데, 게다가 경건치도 않은 모지리들을, 엉터리들을, 죄만 쏟아내는 자들을 오직 복음을 믿게 하고 그 믿음을 의롭다고 여기시는 구원입니다. 여기에 사람의 행함이 끼어들 여지가 있나요? 복음도 하나님의 작품이고 그것을 믿는 믿음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니 사람이 할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에서, 내가 할 게 없이 처음부터 나중까지 다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성취하시고 안겨주시는 구원인지라 우리는 그저 받아 누리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이런 구원을 깨닫게 되면 그동안 율법적 신앙관으로 인간 내가 어떻게 살아야 구원을 받을까 노심초사하던 데서 해방된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날마다 축제의 날이지요. 행복과 감사가 넘쳐나지요.

 

‘6절~정말 이러한 구원을 주신 하나님께 감격하고 감사하십니까? 아니면 뭔가 찝찝하고 안 믿어집니까? 너무도 커다란 공짜 구원을 말하니까 성큼 공감하기가 어려운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러나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씀하는 하나님의 구원입니다. 다윗도 그 행복에 대해 찬송하고 있습니다.

 

‘7절~다윗은 왕의 신분으로 이미 많은 부를 누리던 자였습니다. 본처가 4명이고 후궁이 10명이나 되는 자였는데, 유부녀 밧세바를 범하고 죄를 덮기 위해 남편 우리야를 죽인 중죄인입니다. 도저히 용서받지 못할 능지처참이 마땅한 자였는데, 아무 조건도 없이 그 죄를 사함 받았으니 그 기쁨이 어떠하겠습니까?

 

오늘 등장인물인 디두모 도마란 쌍둥이라는 고발이었지요? 우리 모두가 도마를 위시하여 다른 모든 제자들처럼 혹은 아브라함처럼 육신으로는 도저히 복음을 믿지 못하는 허접한 자들이고, 또한 왕이면서도 엄청난 죄를 범한 다윗과 별반 다른 게 없는 자들이라는 고발입니다.

 

따라서 행함으로는 절대로 구원을 받지 못하는 무기력한 자들이지만, 오직 창세전 택하심을 입은 언약백성이기에 그 언약에 따라 IX의 십자가 공로를 믿어지게 하여 의롭다 여김을 받는 구원의 수혜자들입니다. 이러한 무자격자들이 은혜로 구원을 받았으니 그 기쁨이 어떻겠습니까? 날마다 어깨춤이 추어지고 구원의 즐거움 속에서 자유와 평강이 넘치는 삶을 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사람의 상식과 이성으로는 생각하지 못하는 기가 막힌 구원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IX의 십자가 은혜에 대해 감격에 겨워 찬송만 할 뿐입니다. 이런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날마다 더 깊이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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