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기록한 목적
본문<요20:29~31> 29 29 예수께서 가라사대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은 복 되도다 하시니라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주님이 도마에게 일침을 주십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자들이 복되도다..
지난주에 디두모 도마의 헛된 믿음에 대해 살펴보았었는데, 오늘 좀 더 참된 믿음에 대해 알아보고 다음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디두모 도마라는 이름의 의미는 쌍둥이라고 했습니다. 보지 못하고는 도저히 믿지를 못하는 인간의 정체성을 도마라는 이름을 통해 성경은 고발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즉 디두모(쌍둥이) 도마는 우리 모두의 자화상이라는 메시지입니다.
그런데 도마처럼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진 후에라야 믿겠다는 발상을 오히려 칭찬하는 자들이 기독교에 많습니다. 어떻게 보지 않고 믿는다는 것이냐? 그런 믿음은 자기 체면에 불과한 것이다. 믿으라고 하니까 억지로 믿는 척하는 것은 가짜라서 나중에 다 중도 하차하여 흐지부지 되거나 교회를 떠나게 된다. 그러므로 보고 체험하는 것에 바탕을 둔 믿음이 참된 믿음이라고 주장하는 자들이 꽤나 많습니다.
얼핏 들으면 그럴싸합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이 과연 맞을까요? 전혀 ‘아니오.’입니다. 물론 인간은 보지 않고는 믿지 못하는 속성을 가진 존재가 맞습니다. 그렇다고 보고서야 믿게 되는 것이 진짜 믿음이라는 주장은 틀린 말이지요. 엄밀히 말해서 보고 믿는 것은 사실 확인이지 믿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인간을 잘 아시기에 성령을 보내사 안보고도 믿어지게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령의 간섭으로 안보고도 믿어지는 게 참된 믿음입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이 말씀으로 온 세상을 창조하신 것을 보았나요? 당연히 보지 않았지만 믿어집니까? 아멘이지요.. 온 세상은 진화론을 가르치고 있는데 창조가 믿어진다고요? 그게 기적입니다. 주님의 십자가 사건 때에 옆에서 지켜보았나요? 없었지요.. 그런데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믿어지나요? 그게 복입니다.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은 미래에 오실 메시야를 소망하며 믿었습니다. 안보고 믿은 것이지요. 우리는 2천 년 전의 IX(예수 그리스도)의 행하심을 믿고 있습니다. 아무도 보지 않았지만 성경의 기록을 믿는 것이지요. 이것이 내 능력이라고요? 아닙니다. 이것을 누가 믿을까요? 사람들의 주장대로라면 아무도 믿어서는 안 되는 일인데 실제는 믿는 자들이 있네요? 이들이 바로 언약백성들입니다.
언약백성이 무슨 의미라고 했지요? 그 샘플이 과거 이스라엘 족속이라고 했습니다. 원래는 없던 자들인데 아브라함과의 언약에 의해 태어났고, 그 언약대로 구원을 받은 자들입니다. 얼마나 놀랍습니까? 그들이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애굽의 종살이가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닌데 430년이라는 때가 차니까 언약대로 구원도 받아 출애굽을 한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혈통적 이스라엘이 모두 언약백성인 선민을 의미하는 것을 아닙니다. 사도바울이 선을 긋잖아요. 표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라 이면적 유대인이 참 된 유대인이라고요. 그리고 롬11장에서는 그 이면적 유대인과 이방의 충만한 수가 다 채워지면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얻으리라고 증거 합니다. 이들이 언약백성들이고 이들에게 믿음을 주셔셔 진리의 말씀이 믿어지게 하시는 것입니다.
요10장에서도 예수님이 중요한 말씀을 하시는데, ‘내 양은 내 음성을 듣고 나를 따르나 내 양이 아닌 자들은 내 음성을 듣고 도망간다’고 하십니다. 주님의 음성은 곧 성경말씀이고 진리의 복음이지요. 그러니까 주님의 양인 언약백성만이 보지 않고도 성경의 진리가 믿어지고 예수님이 믿어진다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알 것은 교회 안에 두 부류의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택한 자와 불택자, 언약백성과 아닌 자가 공존하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언약백성이 아닌 자들은 믿어지지 않는 믿음을 믿기 위해 어떤 스탠스를 취할까요? 당연히 보여달라고 떼를 쓰겠지요. 그런데 직설적으로 하나님 살아계신 걸 보여 달라고는 차마 못하고 능력 달라고 매달립니다. 문제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지요.
이런 목적으로 파생된 것들이 다니엘 기도니 특별 새벽기도니 금식기도니 작정기도니 등등이 동원되는 거지요. 좀 더 심한 경우는 만일 안 들어주면 죽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습니다. 많이들 들어보셨을 겁니다. 낭떨어지에서 소나무 붙잡고 어떻게 기도한다고요? 뿌리가 뽑힐 때까지요. 그래도 응답이 없으면 하나님 나 여기서 떨어져 죽을 랍니다. 협박을 한다니까요.
그 결과는 어떨까요? 대부분이 응답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협박에 대응하실 리가 없지요. 하지만 그 중에서 혹시 택한 자가 있다면 비슷하게 응답을 해 주셔서 쓸데없는 짓을 중단하게 하십니다. 그러면 본인은 이것이 무슨 커다란 벼슬을 한 것처럼 동네방네 간증을 하고 다닙니다. 육신에 속한 초보신앙의 모습이고 창피한 일인데 거꾸로 자기가 무슨 특별한 존재인양 선전하고 다니니 얼마나 무지하고 어리석은 모습일까요?
많은 교회에서 간증 집회를 여는데 아주 위험하고 비진리적 비성경적 행태입니다. 내가 어찌어찌 했더니 이렇게 응답을 받았다고 선전을 합니다. 그런 간증의 내용은 다 세상적 물질적 목적을 이루었다는 말들입니다. 사업 문제, 건강 문제, 자녀 문제, 고부간의 갈등문제, 부부 갈등..또는 성령의 은사를 달라는 기도(방언, 예언, 신유..) 등을 힘쓰고 기도하면 응답 되더라 간증합니다. 다 육신에 속한 기도에 해당됩니다.
자~, 이런 기도에 대해 응답을 받았다면 누가 응답해 준 겁니까? 하나님일까요 마귀일까요? 100% 마귀입니다. 만일 그런 기도를 하는 자가 언약백성이라면 그 기도를 응답해 주는 게 유익이 아니라 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언약백성에게는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를 않습니다. 답답해서 본인들이 할 수는 있어요. 그러나 응답하시지는 않습니다. 바울도 몸의 가시가 너무도 괴로워서 없애달라고 3번이나 기도했지만 거절당했습니다. 만일 응답하면 어찌될까요? 교만해져서 망하게 됩니다.
간증 집회하는 자들이 어떤 오류, 어떤 죄에 빠지게 되냐면 자기 자랑에 사로잡힙니다. 내가 이렇게 특별한 자라는 자긍심이 마음 가득하게 자리 잡습니다. 또한 말을 뱉어내면서 은연중에 과장이 섞입니다. 죄에 죄를 더하는 거지요. 자기가 마치 무슨 신령한 존재가 된 위치에 오르게 되고 사람들의 칭송과 존경을 받게 됩니다. 이게 악이지요.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어떤 체험을 하면 다시 또 체험을 하려고 계속 추구합니다. 체험이 없으면 허전하고 답답해서 믿음이 없는 것 같아서 안절부절 합니다. 마치 담배나 술에 인박힌 사람이 계속 그것을 찾듯이 체험이 없으면 버림받은 것 같아서 쫓아다닙니다. 그래서 계속 어떤 환상을 좇고 사소한 꿈을 꿔도 스스로 체험이라고 부풀려서 남들에게 자랑조로 말을 합니다.
제가 엊그제 그런 사람을 만났습니다. 60대 중반의 남자인데 예수 믿은 지 수십 년 세월입니다. 고1 때 누구를 따라 구원파 집회에 가서 구원을 받았다고 하는데, 이 분의 특징은 간증거리가 신앙으로 자리매김했습니다. 그래서 언제 어떤 체험을 했다는 간증을 마일리지로 쌓고 그것을 자기 신앙의 중심을 삼아 전하고 다닙니다.
그 말속에서 십자가 은혜와 사랑은 없습니다. 그저 특별한 자신만이 부각될 뿐입니다. 나 같은 무가치한 죄인을 구원하신 십자가 사랑은 없고 나의 노력과 애씀으로 응답 받은 그것이 은혜라고 떠들고 다닙니다. 심지어는 자기자랑과 자긍심에 붙잡혀서 자신은 육신이 죽지 않고 에녹처럼 승천할 거라고 합니다. 누가 들으면 좋은 신앙 같지만 마귀의 술수에 깊이 빠진 형국일 뿐입니다. 이게 뭡니까? 눈으로 보고 믿겠다는 체험 신앙의 현주소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도마를 샘플로 세워서 우리 모두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는 나를 본 고로 믿느냐 보지 못하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 다시 말하지만, 주님의 이 말씀은 도마보고 보지 않고 믿도록 힘쓰고 애쓰라는 뜻이 아니라, 언약백성에게는 주님이 믿음을 주셔서 그렇게 인도 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이라고 했지요?
하나님이 주신 믿음을 소유한 자들의 특징은 감사와 기쁨에 차 있습니다. 왜일까요? 성령이 오시면 먼저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기 때문에 인간 자신이 행함으로 구원 얻지 못한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습니다. 그런 자신을 조건 없이 IX의 십자가 피 공로로 구원하셨다는 것을 알게 되니까 감사가 터져 나오는 것이고, 그 사랑이 느껴지고 만져지니까 기쁨과 평강이 넘치는 것입니다. 따라서 감사와 기쁨과 평강의 상태가 바로 하나님을 만난 간증이지 체험이 간증거리가 아닙니다(롬14, ㅎ님 나라는..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같이 노래합니다.
<벧전1:8~9> 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9 믿음의 결국 곧 영혼의 구원을 받음이라
분명히 밝히고 있잖아요.. 예수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한다고요. 왜 사랑합니까? 내 기도를 응답해 줘서가 아니라 나 같은 불의한 자를 십자가 피 흘리심으로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신 그 은혜에 감격하여 주님을 사랑하는 거지요. 뿐만 아니라 그 믿음이 촉발 시키는 내용이 뭡니까?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과 즐거움의 내용이 바로 영혼의 구원을 받은 이유 때문이라는 거지요.
여기서 중요한 말이 나옵니다. 영혼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졌다? 믿음의 결국으로..결국(텔레스)이라는 말은, 열매적 개념입니다. 믿음의 열매로서 영혼이 구원이 이루어졌다는 말이지요. 그러니까 믿음이 곧 생명입니다. 믿음이 없으면 복음이 내 것이 안 될 테지만 믿음이 주어져서 그 열매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믿음 자체가 은혜요 선물이라고 엡2:8절에서 증거 합니다(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구원을 얻었나니 이는 너희에게서 나온 게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성경은 구원에 대해 기술하는 책이 맞아요. 그러나 구원을 얻는 방법을 제시하는 게 아니라,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알라고 기록된 책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의 열심과 행함으로 구원이 이루어지는 게 아니라 구원이란 하나님의 은혜로 언약백성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임을 알아먹으라고 기록한 책이라는 말입니다. 율법 행함이 아니라 은혜이지요.
마19장을 보면 부자청년이 주님께 질문 합니다.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습니까?
그러자 주님이 너 율법 잘 지켰냐? 묻자, 모든 것을 지켰는데,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대답하는 자에게 철퇴를 휘두르십니다. 네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너는 나를 따르라. 이 부자청년이 뒤돌아갔지요. 이것이 진짜 율법의 눈높이라는 것입니다. 탐심과 자기 사랑으로 조성된 인간은 율법을 절대 지키지 못한다는 것을 폭로시킨 장면이지요.
주님이 사족으로 덧붙여 말씀하십니다.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부자란 자기 행함의 의로 업적을 쌓는 행태를 말합니다. 즉 율법 행함을 가치로 삼는 것을 부자라고 지적하시면서 그렇게는 구원이 불가능하다는 말씀이지요. 이어서 말씀하시기를 사람으로서는 할 수 없으되 하나님은 할 수 있느니라.
그럼 어떻게 하나님은 하신다는 말인가요? 롬8:3절에서 답을 주십니다. 육신이 연약하여 사람은 할 수 없지만 하나님은 하시나니 자기 아들을 죄 없는 육신으로 보내사 육신에 죄를 때려 넣어 십자가에서 대신 죽게 하심으로 율법의 요구를 이루시고 언약백성의 죄를 용서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대속의 십자가 복음을 믿게 하셔서 구원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구원을 마음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을 영을 좇는다고 말하며, 복음을 믿지 않고 율법 행함을 구원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을 육신을 좇는다고 말합니다. 성도인 언약백성은 믿음을 받았기 때문에 영을 좇게 되지만 성령을 받지 못한 자들은 하나님의 차원을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행함을 좇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영의 생각은 생명과 평안이라고 밝히십니다.
여기서 영의 생각이 곧 믿음입니다. 눈에는 아무 것도 안 보여도 하나님의 일하심이 마치 눈에 보이는 것처럼 믿겨진다니까요. 너무도 확실하게 믿어지니까 억지로 안 믿고 싶어도 도망가고 싶어도 도망가지 못합니다. 믿음은 사람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하게 역사합니다. 그냥 다 믿어집니다. 그래서 평강이지요.
부활하신 주님이 제자들을 찾아와 하신 첫 마디가 무슨 말이었지요? “평강이 있을지어다.” 무슨 말이세요? 내가 성령을 보내주면 다 믿어져서 평강이 가득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이 오자 성령을 받은 제자들이 잠가둔 문을 열고 밖으로 뛰쳐나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게 되잖아요? 하늘의 평강과 기쁨이 넘치니 더 이상 죽음이 두렵지가 않아 부활을 외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성령의 생명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인 율법에서 해방된 자의 모습입니다.
율법이 아니라 은혜가 우리를 자유케 합니다. 다 믿어지기 때문에 걸음걸이가 자유롭고 가볍습니다. 이런 하나님의 주신 믿음에 대해 증거하는 좋은 사례가 마8장의 백부장의 믿음입니다. 마8장은 산상수훈(마5~7장)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시자마자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산상수훈의 결론이 어떻게 끝납니까?
<마7:24~29> 24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25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연고요 26 나의 이 말을 듣고 행치 아니하는 자는 그 집을 모래 위에 지은 어리석은 사람 같으리니 27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매 무너져 그 무너짐이 심하니라.
반석 위에 집짓는 자와 모래 위에 집짓는 자의 차이를 설명합니다. 주님의 말씀을 다 듣고 행하는 자가 반석 위에 집짓는 지혜로운 자라고 합니다. 말씀을 듣고도 행치 않는 자는 모래 위에 집짓는 어리석은 자구요.
산상수훈의 전체의 말씀이 무엇을 가리킬까요? 간단히 말하면 형제를 보고 미워만해도 살인자고 여자를 보고 음욕만 품어도 간음이다. 이처럼 너희는 율법을 절대로 지키지 못하기에 다 지옥행이 마땅하지만, 내가 대신 율법을 다 지켜서 그 의를 전가해 준다는 의미를 돌려서, 내가 율법을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란 자기가 율법을 도저히 지킬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라는 것을 알고 주님의 긍휼을 구하는 자가 되겠지요? 행하라고 하니까 다시 실천적 의미로 여기면 잘못 알아들은 게 됩니다. 이렇게 산상수훈의 말씀을 마치시고 산에서 내려오자 첫 번째 등장인물이 문둥병자이지요(히4: ㅎ님 말씀의 능력~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기며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죄를 들춰내심).. 이 편집의 순서가 우연이겠습니까?
<마8:1~3> 1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 2 한 문둥병자가 나아와 절하고 가로되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하거늘 3 예수께서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하신대 즉시 그의 문둥병이 깨끗하여진지라
즉 산상수훈의 말씀을 다 듣고 나니까 자신이 죄로 죽은 저주 받은 자임을 깨닫게 된 것을 문둥병자로 표현한 것입니다. 그가 주님께 나아와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말합니다. 문둥병은 불치의 병인데 죄의 저주 때문에 온 것으로 여겨 왔습니다. 이 사람이 얼마나 고침을 받고 싶겠습니까? 그렇다면 ‘주여 제발 이 병을 고쳐주세요’라고 해야 하는데, 주께서 원하시면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말합니다.
예수님의 산상수훈 말씀을 듣고 보니까 자신이야말로 저주의 존재라서 감히 고쳐달라고 요청도 못할 지경임을 토로하는 모양새입니다. 저는 죽어도 마땅합니다만 행여나 긍휼히 여김을 주시면 나을 수 있다는 뜻이지요. 얼마나 자신의 실존에 대해 깨뜨려지고 낮아진 마음입니까? 이런 자가 심령이 가난한 자요 애통하는 자라는 말이지요.
<마8:5~13> 봉독(백부장의 믿음)
백부장의 하인이 중풍병이 들어 괴로워하는데, 주님이 가서 고쳐주겠다고 하자, 백부장이 극구 사양하면서 말씀으로만 해도 낫는다는 걸 믿네요..이것이 참된 믿음이라는 것을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고자 백부장을 등장시켜서 사건을 조성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백부장의 이 놀라운 믿음이 자신이 만들어 낸 것인가요? 천부당만부당이지요. 주님이 주셨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의 말씀으로 사람의 죄를 보게 하여 문둥병같이 저주받은 자임을 깨닫게 하여 고쳐주시는 것이고, 그 다음에는 이방인 로마군의 백부장에게 믿음을 주셔서 구원하시는 것을 계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12절을 일부러 언급하신 것이지요. 자기의 율법 행함으로 자긍하는 나라의 본 자손인 유대인들을 원 가지에서 끊어내고 그 자리에 이방인을 접붙여서 먼저 구원한 다음에, 다시 이방인들이 자긍하여 교만하면 유대인들에게 늦은 비 성령의 역사를 통해 믿음을 주어 복음을 영접시켜 구원하신다는 복안(경륜)을 여기서 살짝 내비치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롬9,10,11장에서 자세히 설명하고 있지요.
다시 본문 요20장 끝을 봅니다.
<요20:30~31> 30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31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이 책이란 요한복음이면서 동시에 4복음서 전체를 의미합니다. 4복음서는 중복되는 부분도 있지만 빠진 부분도 있기에 서로 보완하면서 하나님의 의이신 십자가 복음을 계시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모든 행적과 표적을 다 기록하지는 못했다고 말합니다.
21장 25절을 봅니다.
예수님의 행적을 낱낱이 기록했다면 이 세상이 좁아서 두기에 부족했다고 합니다. 은유법을 사용한 거지요. 물리적인 부족을 말하는 게 아니라 가치적인 면에서 주님의 일하심을 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즉 주님의 행적은 모두 다 영적인 차원의 계시를 담고 있기에 세상이 깨닫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요한복음을 비롯하여 나머지 복음서는 다 무엇을 목적하여 기록했다고요?
첫째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메시야, 구원자)이시고, 둘째는 주님을 믿어 그 이름의 능력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랍니다.
베드가가 예수님을 보고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니이다.’라는 신앙고백은 네 실력이 아니라 하늘에 계신 주님의 아버지 하나님이 알려 주셔야 알게 된다는 거지요. 아까 교회 안에는 두 부류가 있다고 했지요? 진짜와 가짜가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을 그리스도라고 부르지만, 정작 습관적으로 부르는 자들이 있고 정말 믿음을 따라 고백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어떻게 구분될까요? 쉽지는 않지만 제가 보는 기준은 ‘자기부인’이 판별의 리트머스 종이라고 여겨집니다. 자기부인이 뭐지요? 자신이 죄로 죽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무능하고 무가치한 자임을 토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자입니다. 내가 하는 짓거리가 몽땅 죄악 덩어리였네~! 실토하면서 자기 의를 완전히 내려놓는 자이지요.
눅18장에 나오는 세리와 같은 자입니다. 감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우러러 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탄식하는 자입니다. 아까 산상수훈을 듣고 나온 문둥병자처럼 주께서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라고 숨죽여 말하는 자입니다. 무슨 의미이지요? 나의 원함은 포기하고 행여나 주께서 버리셔도 저는 할 말이 없다는 자기부인이지요. 너무도 중대한 죄인인지라 용서조차도 감히 바라지 못하는 그저 지옥이 마땅한 죄인의 괴수라는 입장에 서 있는 자를 듯합니다.
이렇게 깨어진 마음으로 오직 주님의 긍휼만을 기다리는 자의 상태를 ‘자기부인’이라고 합니다. 인간 스스로 이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서울역 지하철의 노숙자들이 세상에서는 실패한자요 인생의 배가 파선된 자들이지만 그들도 다 자존심은 펄펄 살아 있습니다. 비록 돈이 없어서 노숙자 신세지만 자기 의는 뻣뻣이 곤두서 있기에 잘못 건드리면 큰일 납니다.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한다는 속담이 인간의 자아적 본성을 말하고 있지요.
따라서 자기부인은 하나님의 안배와 간섭으로 깨뜨려져야 가능하다는 말입니다. 인간 스스로 자기의 무능과 무가치함을 자백하며 하나님의 긍휼을 찾지 않는다는 의미이지요. 그래서 주님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 역시 다 하나님이 그렇게 조성해서 너희들의 코를 꿰어 끌고 가시겠다는 의중이 숨어 있는 말씀이지 인간 스스로 자기부인과 자기십자가를 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요21장 끝에서 주님이 베드로 보고 말씀하시잖아요.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지만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를 띠우고 원치 않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늙어서는 남이 네 띠를 띠우고 간다는 말은 성령이 이끄심으로 자신의 비참함을 보게 하여 마침내 육신이 원치 않는 상황으로 이끌고 가신다는 의미로서 순교를 시사하는 말씀입니다.
복음서의 기록 목적 두 번째는, 이렇게 주님의 언약백성에게 자기부인이 일어나게 하여 오직 주님만 믿고 소망하게 이끄시는 것입니다. 너무도 유명한 갈2:20절도 같은 맥락의 말씀입니다.
<갈2:19~21> 19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향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을 향하여 살려 함이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 값을 치루신 것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는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어 주신 것이지요. 따라서 이제 우리는 율법과 상관없는 자가 된 것입니다. 롬7장에서도 첫 남편인 율법이 죽었으니 새 남편이 그리스도께로 가서 재혼한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높이고 자랑하는 새 사람이 된 것이라는 말입니다.
<갈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나의 무능과 무기력함을 알고 십자가로 나아가 주님의 십자가에서 함께 죽었으니 이제는 내가 산 게 아니라 주님이 살아계신다는 것입니다. 자기부인이 일어나면 율법 못 지키는 나, 죄를 이기지 못하는 나를 보기 때문에 고개를 들지 못합니다. 이게 죽은 자의 모습이지요. 나는 없고 내 안에 주님만 생명으로 계신다는 것입니다. 철저한 자기부인의 고백입니다.
혹자는 이 구절을 죄를 다시는 안 짓겠다는 결단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전혀 앞뒤 문맥과 맞지도 않을뿐더러 바울의 신앙도 아닙니다. 20절 후반부,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이게 뭔말이냐면 죄만 나오는 육체의 속성을 표현하는 겁니다. 롬7장에서 탄식하듯이 원하는 바 선은 행치 아니하고 원치 않는바 악을 행하는 비참한 나인데, 그런데 죄를 짓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라고 하면서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고 한탄하지요? 그 육체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진 내가 매일 죄 가운데서 사는 것은 내 행함의 의로 사는 게 아니라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의 십자가 대속의 은혜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는 말이지요. 철저한 복음주의적 신앙을 피력하는 것입니다. 구원을 받았지만 비록 매일 죄 가운데서 사는 것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신 복음을 믿고 산다는 취지를 언급하는 거지요.
‘21절~ 다시 한 번, 십자가 대속의 은혜의 효력과 영원성을 말합니다. 성도가 붙잡을 것은 오직 은혜, 오직 십자가, 오직 믿음이라는 겁니다. 만일 의롭게 되는 율법으로 된다면 주님은 헛되이 죽으셨다고 반어법으로 은혜만을 강조합니다.
오늘 말씀을 마무리 합니다.
성경은 구원의 방법을 제시하는 책이 아니라, 성도의 구원이 어떻게 은혜로 주어지는지 알게 하여 그 은혜의 영광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베푸시는 은혜의 중심에 IX의 십자가 대속의 피 흘리심이 기둥처럼 서 있습니다.
이러한 구원 경륜을 이미 창세전에 하나님이 아들 예수와 함께 작정하셨기에 언약이라고 부릅니다. 세상 역사는 이러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전개시키기 위해 잡아 돌리는 현장에 불과합니다. 예수의 예수에 의한 예수를 위한 창조와 구속사입니다. 그래서 세상 역사를 BC와 AD로(예수전과 예수 후로) 나뉘어 일하십니다. 예수님이 우주 역사의 중심임을 알라는 뜻이지요.
죄와 사망에 갇혀 죽을 운명에 처해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하여 하나님은 아들 예수를 역사 속으로 보내시면서 이미 그 이름 속에 주님의 성육신의 목적을 담아 놓았습니다. 천사의 수태고지에서 이미 작명이 명하여 집니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심이니라.’ 이렇게 주님은 이 세상에 자기백성을 위해 죽으시러 오신 것입니다.
성경의 두 분깃점인 옛 언약과 새 언약, 율법과 복음도 다 IX의 십자가를 중심으로 나뉩니다. 알다시피 옛 언약은 인간 보고 한번 율법을 지켜보라고 주어진 기회를 말합니다. 보기 좋게 실패로 끝났습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너희는 손을 떼라, 나 예수가 너희 죄를 다 속하여 그 의를 전가해 줄게, 이것이 새 언약입니다. 이름 하여 십자가 복음입니다.
이 복음을 누가 믿는다고요? 언약백성들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어 십자가 사건이 바로 나의 죄 값을 청산하기 위해 예수님이 대속의 피를 흘렸음을 믿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 믿음을 보시고 믿는 자를 의롭다고 여겨주시는 것이지요. 인간 내가 할 일이 전혀 없이 그저 주님이 다 이루신 일을 믿음으로만 의롭다고 여겨주시기 때문에 복음이고 기쁜 소식입니다.
구원을 받기 위한 목적으로 내가 믿었다고 주장한다면 이미 탈락입니다. 내가 믿었다는 것도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행위가 안 되기 위해서는 믿음도 받아야만 합니다. 그렇다면 누구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실까요? 창세전 택한 자들입니다. 다른 말로는 어린양의 생명책에 기록된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인간의 행함은 일체 배제시키고 구원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다 일방적으로 베푸시는 걸까요? 그것도 아들 예수의 처참한 십자가 희생의 피 흘리심을 통해서 말이지요. 하나님이 바라시는 것은 오직 하나 뿐입니다. 내가 준 그 사랑 제발 좀 알아달라는 것입니다. 천국은 은혜 아는 자로 채우시겠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성도는 모든 입을 막고 오직 망극하신 그 은혜와 사랑에 감복하여 사는 자입니다. 도저히 구원받지 못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을 세세토록 찬양하는 곳, 거기가 은혜 받은 자들이 들어가는 천국입니다. 날마다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을 더 알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소원합니다(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