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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산책길

하트셉수트 : 모세의 양 어머니?

작성자예림사랑|작성시간26.06.13|조회수107 목록 댓글 0


♧ 하트셉수트(Hatshepsut)는 고대 애굽 제18왕조의 5번째 파라오(바로)이다. 하트셉수트란 이름은 "가장 고귀한 숙녀"라는 의미이다. 애굽학 학자들은 하트셉수트의 치세를 역대 파라오의 치세 중에서도 매우 성공적이었던 시기 중 하나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재위 기간은 약 21년이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반드시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히리니 그들이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벌할지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창 15:13-14).

여호와께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신 대로 요셉이 애굽 총리 있으면서 야곱의 가족들은 애굽(고센)으로 이주하여 애굽에서는 천시 여기나 이스라엘인들은 천직으로 여기는 목동 일과 국가에 필요한 말이나 가축을 기르며 살게 된다.

"요셉과 그의 모든 형제와 그 시대의 사람은 다 죽었고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더라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이 일어나 애굽을 다스리더니"(출 1:6-8).

아시아계 기마민족인 힉소스 왕조가 애굽 왕조를 무너뜨리고 애굽을 지배하였다. 힉소스 왕조 이후 이스라엘 자손들은 노예로 전락하게 되었다.

애굽의 해방자요 제18왕조의 창시자가 되는 아모스(아하메스)의 선왕 카모스는 힘을 모으고 애굽인들의 민족주의 열기에 힘입어서 힉소스와 싸움을 시작한다. 그러나 힉소스 왕조를 애굽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한 것은 그의 아들 아모스였다. 아모스는 즉위 11년에 힉소스 정벌의 대군을 일으켜 즉위 16년에 이민족 힉소스의 통치를 종식시킨다. 아모스는 테베 즉 룩소르에 도읍을 정하고 신왕국 초대 파라오가 된다. 파라오 아모스 1세는 150년 동안의 힉소스 식민지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애굽 국경에 최선을 다하며(B.C 1546-1526) 통치하면서 후계자는 그의 아들이 아닌 중년의 군인 출신의 권력자인 투트모세 1세(Thutmose 1세)을 세웠다.

투트모세 1세는 셈족 힉소스 왕조를 몰아내고 150년의 식민지를 해방시킨 아모세 1세의 딸 아모세 공주와 결혼함으로 모계혈통의 정통성으로 왕위에 오른다. 투트모세 1세에게는 두 아들(와지 모세, 아멘 모세)이 있었으나 아버지보다 먼저 죽고 3번째 아들이 후계자가 된다. 이 후계자도 이름을 투트모세 2세란 이름을 사용하였고 자기와 배다른 누이인 하트셉수트(Hatshepsut Queen)와 결혼을 한다. 그는 하트셉수트와 함께 14년 통치하였고 30대 초반에 세상을 뜨고, 몸이 약하였으나 생전에 시리아와 누비아 원정을 가서 큰 전공을 세웠다.

하트셉수트(B.C 1507-1458)에게는 아들은 없이 외동딸(네페루네)을 두었고 이 여왕이 모세의 양어머니다. 남편인 투트모세 2세는 하녀(이시스)와 사이에서 아들 하나 있었는데 그의 아버지와 똑같은 이름을 지어 주었고(투트모세 3세), 이 하녀의 아들은 하트셉수트에게는 눈에 가시로서 9세에 왕위에 오르자(왕위 계승 때 나이가 14세였으므로), 여왕이 섭정에 들어갔었고, 그 후 21년간 모든 정권은 하트셉수트 손에 있었고 야심이 강한 여자였기에 투트모세 2세가 미리 후계자 지명까지 했던 것이다. 하트셉수트는 양어머니자 고모이지만 이 하녀에게서 낳은 투트모세 3세를 왕위 중심부에 올려 놀 생각이 없었다.

이때 모세도 비슷하게 자라게 되었서 투트모세 3세는 모세보다 몇 살 위인 것 같았다.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기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내가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기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그 아기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가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의 이름을 모세라 하여 이르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내었음이라 하였더라"(출 2:9-10). 그녀는 모세를 왕자로 키웠고 자기 권력의 중심까지 생각하면서 엄격하게 모세의 교육을 시켰었고 투트모세 3세의 그 자리에 모세를 올리려는 야심 있는 여자였다. 항상 투트모세 3세와는 알력이 있었다.

남편 투트모세 2세가 병약하여 일찍 죽자 아직 어린 투트모세 3세의 섭정을 시작했다가 곧 남장을 하고 스스로 왕으로 칭하는 대범함을 보여 결국 애굽 최초의 여성 파라오가 되었다.
고대 애굽에서는 파라오가 남자만 있지 않고 4명의 여성 파라오가 있었고, 우리에게 클레오파트라가 유명하지만 가장 권력을 행사한 여성 파라오는 모세의 양모인 '하트셉수트 여왕(재위 B.C 1479-1458)'이다. 이 이름의 뜻은 “지혜의 첨단” 또는 “지혜의 최고봉”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남장을 하고 가짜 수염도 귀에 달고 파라오의 복장인 마직 머릿수건, 짧은 킬트 치마를 입고 남성 파라오처럼 똑같은 행세를 했고 신왕국에 와서는 도굴을 피하기 위해 테베(현재 룩소) 근처에 도굴을 피해 묘를 암석 깊이 아무도 모르게 매장하고 그 대신 장엄한 장제전(데르 엘 바하리)을 짓고 의식을 행했다.

이렇게 천하를 호령할 것 같은 기세 등등한 여성 파라오 하트셉수트 여왕이지만 모세가 누비아 지역 정벌을 끝내고 고센 지역을 순찰 중 이스라엘을 학대하는 고급 관리의 모습을 보고 그를 살해한 것을 투트모세 3세에게 전달되자, 바로 이일로 하트셉수트 여왕의 입지와 모든 기대가 무너지면서 모세는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미디안 광야로 피신을 가고(출 2:15) 여왕은 급격히 쇠약해지다가 중심부에서 뒤로 물러나며 모진 두통, 치통으로 이가 거의 없었다고 한다. 그 일 뒤 투트모세 3세는 승승장구하여 하트셉수트에 관계된 것이면 다 없애고 비문도 무너뜨렸다고 학자들에게 전해지며 이 야심 찬 하트셉수트 여왕은 충격으로 갑자기 사망했다고 한다.

투트모세 3세는 이후 정복 왕으로 애굽의 '나폴레옹'이란 별명이 붙여지고, 이 양어머니는 모세를 양육하는데 까지 마치고 향년 50세에 죽었다(B.C 1458).

죽음을 피하여 모세는 미디안으로 피신하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도망자가 된 모세를 시내산에서 직접 만나주셨다. 모세가 애굽으로 돌아와서 이스라엘 백성을 구하여 낸 연대는 B.C 1445년 혹은 1446년이라고 한다. 이때의 파라오 투트모스 3세가 죽고 새롭게 파라오가 된 아메노피스 2세( B.C 1450-1426)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애굽의 권력투쟁에서 구하여 이스라엘의 해방자로 사용하셨다. 하나님은 모세를 세우기 위하여 왕자로서 학문과 병법, 모든 견문 지식을 취하게 하여 준비하신 하나님은 하트셉수트를 도구로 쓰시고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준비하신 것이다.

서울 강서교회 김창환 목사(성령충만 영성계발원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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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론 : 서사로써의 추측은 가능하나 유력한 증거는 의심된다

♤ 핫셉수트가 모세의 어머니였다는 신뢰할 만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는 없습니다. 그 주장은 성경 본문의 선택적 해석, 후대의 전통, 그리고 이집트와 이스라엘 이야기의 유사성을 바탕으로 한 현대의 추측 가설이지만, 1차 자료의 뒷받침은 부족하다.

☆ 왜 그 아이디어가 나타나는지

비슷한 모티프: 두 이야기 모두 이집트 왕족 배경, 나일강의 바구니/방주에 담긴 아기, 그리고 입양된 왕족 딸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러한 유사점들은 비교를 유도하지만 정체성을 증명하지는 않습니다.

◇ 19세기-21세기 추측: 일부 골동품 연구가와 대중 작가들(그리고 몇몇 주변 학자들)은 성경 연대기에 부합하거나 고고학적 주장을 출애굽기 이야기와 조화시키기 위해 하트셉수트나 기원전 18세기/15세기-13세기 이집트 왕족들을 후보로 제안했습니다.

1. 연대기의 혼란: 성경은 정해진 날짜를 거의 제시하지 않습니다. 경쟁 모델들은 출애굽기를 기원전 15세기(전통적으로 열왕기상 6장 1절의 15세기 해석과 관련됨)부터 기원전 13세기(출애굽기 1:11의 라메세스와 관련됨)까지로 추정하고 있어, 어떤 파라오나 여왕이 어울릴지에 대한 추측의 여지를 만들어 줍니다. 핫셉수트를 모세의 어머니와 연결하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2. 현대 문헌은 없습니다: 하트셉수트의 방대한 비문과 기념물(데이르 엘-바흐리, 카르나크, 오벨리스크, 무덤 비문)은 히브리인이나 나일강에서 발견된 아기에 대한 언급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극적인 사건은 이집트 기록이나 후대의 이집트 역사에 흔적을 남겼을 가능성이 큽니다.

3. 연대기적 불일치: 하트셉수트는 제18왕조 초기(기원전 1479–1458년경)에 통치했습니다. 출애굽기의 날짜는 논쟁의 여지가 있으며, 주요 학계의 입장은 기원전 13세기(람세스 2세 시대) 또는 훨씬 후대의 신학적 구성으로 본다. 하트셉수트의 통치와 역사적인 모세를 연결하는 확실한 일치는 없습니다.

4. 정체성과 역할: 하트셉수트는 자신을 왕으로 묘사한 파라오였는데, 출애굽기 2장에서 모세의 양어머니를 묘사하는 방식처럼 단순히 "딸"로 묘사되는 경우는 드뭅니다. 성경에 나오는 입양 인물은 보통 "파라오의 딸"(히브리어: bat-Par’oh)이라고 불리며, 성경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이후 유대교와 기독교 전통에서는 그녀의 이름을 붙였지만(예: Bithia, Merris), 이는 성경 이후의 것입니다.

5. 인명학적 또는 고고학적 연관성 부족: 하트셉수트를 셈족 가정이나 버려진 히브리 아기와 연결하는 비문, 파피루스, 무덤 장면, 유물이 없습니다. 신왕국 왕족에 대한 이집트 기록은 비교적 잘 기록되어 있으며, 주요 연결 고리가 없다는 것은 놀라운 일일 것입니다.

6. 학자들이 말하는 것
주류 이집트학자들과 성서 역사가들은 하트셉수트-모세 동일시를 추측으로 여기며 증거로 뒷받침되지 않는다고 본다. 대부분의 비판 학자들은 출애굽기를 단일 이집트 궁정 에피소드와 일치시킬 수 있는 단순한 역사적 보고서가 아니라, 여러 기억에서 비롯된 복잡한 문학 및 신학적 전통으로 접근합니다. 일부 학자들은 이집트와 가나안 간의 문화적 교류와 이집트 내 셈족 민족의 존재(예: 아피루/하비루, 아시아 노동자 공동체)를 탐구하며, 성경 속 인물들을 이집트 통치자들과 직접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을 지지하지 않습니다. 그러한 주장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을까요?

후대의 전통이나 표면적 유사성보다는 동시대의 주요 증거(비문, 행정 기록, 고고학)를 선호한다.

7. 연대기를 주의 깊게 확인하세요: 이집트와 레반트 연대기에는 불확실성이 있습니다. 성경 속 인물을 파라오로 식별하는 것은 단순한 모티프 일치가 아닌 동시성이 필요합니다. 고대 근동 문학에서 발견되는 문학적 모티프 유사점을 직접적인 역사적 동일시와 구별하십시오.

♤ 결론
핫셉수트의 모세로서의 어머니 아이디어는 서사적 유사성과 연대기적 불확실성을 이용하는 흥미로운 대중적 추측이지만, 신뢰할 만한 역사적 또는 고고학적 증거로 뒷받침되지는 않습니다. 가장 안전한 학문적 입장은 성경에 나오는 "파라오의 딸"이 이름이 밝혀지지 않았고, 하트셉수트를 포함한 어떤 이집트 왕족과도 식별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 원문:
There is no credible historical or archaeological evidence that Hatshepsut was Moses’ mother. The claim is a modern speculative hypothesis built on selective readings of biblical texts, later traditions, and parallels between Egyptian and Israelite narratives, but it lacks support from primary sources.
Why the idea appears
• Similar motifs: Both stories feature a royal Egyptian setting, a baby placed in a basket/ark on the Nile, and an adoptive royal daughter. Those parallels invite comparison but do not prove identity.19th–21st century speculation: Some antiquarians and popular writers (and a few fringe scholars) suggested Hatshepsut or other 18th/15th–13th century BCE Egyptian royals as candidates to fit biblical chronology or to harmonize archaeological claims with the Exodus narrative.Confusion of chronologies: The Bible gives few fixed dates. Competing models date the Exodus anywhere from the 15th century BCE (traditionally tied to a 15th-century reading of 1 Kings 6:1) to the 13th century BCE (linked to Ramesses in Exodus 1:11), creating room for speculation about which pharaoh or queen might fit.Problems with linking Hatshepsut to Moses’ mother
• No contemporary texts: Hatshepsut’s extensive inscriptions and monuments (Deir el-Bahri, Karnak, obelisks, tomb inscriptions) make no reference to Hebrews or an infant found in the Nile. An event so dramatic would likely have left some trace in Egyptian records or later Egyptian histories.Chronological mismatch: Hatshepsut ruled in the early 18th Dynasty (c. 1479–1458 BCE). The date of the Exodus is disputed; the main scholarly positions place it either in the 13th century BCE (during Ramesses II) or as a much later theological construct. There is no secure synchronism connecting Hatshepsut’s reign with a historical Moses.Identity and role: Hatshepsut was a pharaoh who portrayed herself as king—rarely described simply as a “daughter” in the way Exodus 2 describes Moses’ adoptive mother. The biblical adoptive figure is usually termed “Pharaoh’s daughter” (Hebrew: bat-Par’oh), unnamed in the Bible; later Jewish and Christian traditions gave her names (e.g., Bithia, Merris), but these are postbiblical.Lack of onomastic or archaeological linkage: No inscription, papyrus, tomb scene, or artifact links Hatshepsut to Semitic households or an abandoned Hebrew infant. The Egyptian record for New Kingdom royal families is comparatively well-documented; a major missing link would be surprising.What scholars say
• Mainstream Egyptologists and biblical historians treat the Hatshepsut–Moses identification as speculative and not supported by evidence.Most critical scholars approach the Exodus as a complex literary and theological tradition built from multiple memories, not as a straightforward historical report that can be matched to a single Egyptian court episode.Some scholars explore cultural interchange between Egypt and Canaan and the presence of Semitic peoples in Egypt (e.g., Apiru/Habiru, Asiatic worker communities) without endorsing direct identification of biblical personages with named Egyptian rulers.How to eval‎uate such claims
• Prefer contemporary primary evidence (inscriptions, administrative records, archaeology) over later tradition or surface parallels.Check chronology carefully: Egyptian and Levantine chronologies have uncertainties; identifying a biblical figure with a named pharaoh requires synchronisms, not just motif matches.Distinguish literary motif parallels (found across ancient Near Eastern literature) from direct historical identification.Conclusion
The Hatshepsut-as-Moses’ mother idea is an interesting piece of popular conjecture that exploits narrative parallels and chronological uncertainties, but it is not supported by reliable historical or archaeological evidence. The safest scholarly position is that the biblical “Pharaoh’s daughter” remains unnamed and unidentifiable with any attested Egyptian royal, including Hatshepsut

° 참조:
https://m.blog.naver.com/insun7485/130007514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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