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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상 산책길

덕의 적 향원

작성자예림사랑|작성시간26.06.20|조회수45 목록 댓글 0



만장(萬章)이 물었다.

“공자께서 진(陳)나라에 계실 때 ‘어찌 돌아가지 않겠는가? 우리 고향의 선비들은 뜻이 크고 진취적이거나, 절개가 있어 함부로 하지 않는 바가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는 진나라에 계시면서 어찌하여 노나라의 광견(狂獧)한 선비들을 생각하신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중도(中道)의 인물을 얻어 함께할 수 없다면, 차라리 광견(狂獧)한 자와 함께하겠다. 광자(狂者)는 뜻이 높고 진취적이며, 견자(獧者)는 하지 않는 바가 있기 때문이다’라고 하셨다. 공자께서 어찌 중도(中道)의 인물을 얻고자 하지 않으셨겠느냐. 다만 그런 사람을 반드시 얻을 수 없으므로 그다음 인물을 구하신 것이다.”

만장이 다시 물었다.

“어떤 사람을 광자(狂者)라고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공자께서는 금장(琴張), 증석(曾晳), 목피(牧皮) 같은 사람들을 광자라고 하셨다.”

만장이 물었다.

“무엇 때문에 그들을 광자라고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그들은 뜻이 높고 말이 커서 입을 열면 늘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고 말한다. 그러나 평소의 행실을 살펴보면 자기 말에 미치지 못하는 점이 있다. 말은 크지만 실천은 아직 그에 따르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도 그들은 높은 뜻을 향해 나아가려는 기상이 있다.

공자께서는 이런 광자마저 얻지 못하면, 적어도 더러운 짓은 하지 않는 선비를 얻어 함께하고자 하셨다. 이것이 견자(獧者)이다. 견자는 광자처럼 크게 나아가지는 못하더라도, 해서는 안 될 일을 하지 않는 절도가 있다. 그러므로 광자 다음가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만장이 다시 물었다.

“공자께서는 ‘내 문 앞을 지나면서도 내 집에 들어오지 않더라도 내가 유감스럽게 여기지 않을 자는 오직 향원(鄕原)이다. 향원은 덕(德)을 해치는 자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을 향원이라 합니까?”

맹자가 말했다.

“향원은 광자를 보고 ‘저 사람은 어찌 저렇게 잘난 체하는가. 말은 행실을 돌아보지 않고, 행실은 말을 따라가지 못하면서도 입만 열면 옛사람이여, 옛사람이여 하는가’라고 비웃는다. 또 견자를 보고는 ‘어찌 혼자서만 도도하게 구는가. 이 세상에 태어났으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사는 것이 좋은 일이지’라고 비웃는다.

이렇게 광자의 높은 뜻을 허황된 말로 깎아내리고, 견자의 절개를 고립된 태도로 몰아붙이면서, 자신은 세속의 흐름에 맞추고 더러운 세상과 타협한다. 겉으로는 원만하고 신중해 보이며, 말과 행동도 크게 흠잡을 데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 속에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르려는 마음이 없다. 세상이 좋아하는 말과 태도를 익혀 사람들의 환심을 얻고, 스스로도 자신이 옳다고 여긴다. 이런 자가 바로 향원이다.”

만장이 물었다.

“한 고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후덕한 사람이라고 칭찬하고, 어디를 가든 좋은 사람으로 인정받는데도, 공자께서는 어째서 그를 덕을 해치는 자라고 하신 것입니까?”

맹자가 말했다.

“그를 비판하려 해도 뚜렷하게 들어 말할 일이 없고, 찌르려 해도 겉으로 드러난 흠이 없다. 그는 세속의 흐름과 함께하고, 더러운 세상과 맞아떨어진다. 평소의 처신은 충성스럽고 믿음직해 보이며, 행동은 청렴하고 깨끗해 보인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그를 좋아한다. 그 자신 또한 스스로 옳다고 여긴다.

그러나 그런 사람과는 요순(堯舜)의 도(道)로 함께 들어갈 수 없다. 덕은 옳고 그름의 분별 위에서 자라는데, 향원은 그 분별을 흐린다. 충신(忠信)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세속의 눈치를 따르고, 염결(廉潔)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자기 보전을 앞세운다. 겉모습이 덕과 비슷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덕 있는 사람으로 착각한다. 그래서 공자께서 ‘향원은 덕을 해치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나는 비슷하지만 참된 것이 아닌 것을 미워한다.

가라지를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곡식의 싹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말재주 있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의로움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말을 교묘하게 꾸미는 자를 미워하는 것은 그가 믿음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정나라 음악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바른 음악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자주색을 미워하는 것은 그것이 붉은색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향원을 미워하는 것은 그가 덕을 어지럽힐까 두렵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향원(鄕原)의 위험성은 악인이기 때문이 아니라, 선인처럼 보이기 때문에 생긴다. 악인은 적어도 분별의 대상이 되지만, 향원은 분별 자체를 무디게 만든다. 광자에게는 지나친 뜻이 있고, 견자에게는 좁은 절개가 있다. 두 사람 모두 온전한 중도에는 이르지 못했지만, 적어도 도를 향한 긴장과 결단은 남아 있다. 반면 향원은 그 긴장을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만들고, 세속과의 원만한 적응을 덕처럼 포장한다.

그러므로 맹자가 말한 향원 비판은 성격이 원만한 사람에 대한 비난이 아니다. 문제는 원만함 자체가 아니라, 시비를 흐리고 자기 보전을 덕의 이름으로 꾸미는 태도에 있다. 덕은 때로 불편한 분별을 요구한다. 옳은 것을 옳다 하고, 그른 것을 그르다 하는 판단이 사라진 자리에서는 아무리 사람들의 칭찬이 많아도 요순의 도로 나아갈 수 없다.

향원은 한 고을의 평판 속에서는 좋은 사람이다. 그러나 도의 관점에서는 가장 경계해야 할 사람이다. 그는 덕을 정면으로 부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덕과 닮은 얼굴을 하고 덕의 자리를 차지한다. 공자가 그를 “덕의 적”이라 한 까닭은 여기에 있다.

출처 : 김희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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