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돈 내고 마시는 커피...왜 사상 검증과 낙인 공포를 느껴야 하나,

작성자삿갓|작성시간26.06.05|조회수19 목록 댓글 0

 

내 돈 내고 마시는 커피...왜 사상 검증과 낙인 공포를 느껴야 하나,

  • 기자명 최보식 
  •  입력 2026.05.28 1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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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거기 카페 가니?

[최보식의언론=나폴리 강호논객]

MBC 뉴스 화면 캡처

 

카페에서 커피 한 잔을 주문하는 행위는 사적이고 자유로운 선택이어야 한다. 최근 발생한 스타벅스의 '탱크 텀블러' 마케팅 논란과 양 진영의 싸움으로 평범한 일상은 급속히 정치화됐다.

부적절한 마케팅에 대한 비판과 불매운동은 시민의 자율에 맡겨야 한다. 하지만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목도한 것은 대중의 분노를 등에 업은 공권력의 폭주, 그 귀결로서 자유의 상실이다.

 

이는 한국 자유민주주의의 위기를 나타내는 징후다. 그 핵심은 국가 권력과 거대 여당이 결탁하여 시장과 개인의 영역을 침범한 메커니즘에 있다. 행정부의 수반과 입법부의 대표 등이 공개적으로 특정 기업을 비판하며 불매를 유도했고, 협력사업마저 취소했다. 정치적 영향력을 활용해 시장에 압력을 행사한 것이다. 이는 정치학에서 말하는 국가 개입주의의 변형이다.

 

동시에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치겠다"는 명분하에 시민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정부의 오만이기도 하다. 공동체의 도덕적 가치를 보호하겠다는 목적 자체는 선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실천은 국가가 자애로운 '부모'의 얼굴을 한 채 "너희 시민들은 미성숙하여 잘못된 기업에 휘둘리고 있으니, 무엇이 올바른 소비이고 가치인지 가르쳐주겠다"며 일상의 사소한 영역에 간섭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 결과 시장의 생산과 소비, 나아가 개인이 자율적으로 판단해야 할 사유의 영역까지 왜곡됐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핵심 근간은 공적 영역과 사적 영역의 엄격한 분리에 있다. 내가 어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지는 국가나 이념이 개입해서는 안 되는 문제다. 그러나 스타벅스는 순식간에 진영 전쟁의 최전선이 되었다. 아무런 정치적 맥락이 없던 공간이 좌파진영에는 '금기', 우파진영의 '성지'라는 정치적 상징물로 변질됐다. 

 

이제 스타벅스에 들어서는 행위는 진영에 대한 충성 선언이나 정치적 커밍아웃으로 해석된다. "여기서 커피를 마시면 역사 의식이 없는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혹은 "저 진영을 지지하는 사람으로 낙인찍히지 않을까" 우려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소비자는 '낙인의 공포'를 마주하게 되었다. 

 

또한 스타벅스 매장의 직원들은 아무런 권한도 책임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의 감정 쓰레기통이자 사상 검증의 총알받이로 내몰리며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박탈당했다. 사적 영역은 축소됐고 일상이 정치화됐다.

 

더욱 우려스러운 대목은 스타벅스 측이 사죄와 진상규명, 그리고 대규모 환불 조치라는 책임 이행 프로세스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분노의 광풍이 멈추지 않는다는 점이다. 고발이 남발되고 급기야 신세계 그룹 정용진 회장의 사임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다. 이는 과오의 크기에 비해 과도한 책임을 요구하는 것으로, '비례성의 원칙'에 어긋난다. 또한 합리적 문제해결이 아니라 평소 눈엣가시였던 상대 진영의 상징적 인물을 사회적으로 '숙청'하려는 정치적 청산주의의 발현이다.

 

상대 진영을 대화와 타협의 파트너가 아니라 타도해야 할 '적'으로 규정하는 순간, 정치는 현실적인 이익 조정의 기능을 잃고 '과잉 도덕화' 단계로 진입한다. 상대의 실수가 단순한 실책이 아닌 '도덕적 죄악'으로 규정되는 순간, 속죄는 불가능해진다. 분노한 대중은 죄인의 영구적인 퇴출과 인격적 파멸이라는 종교적 '인신공양'에 가까운 처벌을 요구한다. 

 

이 과정에서 대중은 강력한 정치적 효능감을 맛본다. 제도권 정치가 해결하지 못하는 심판을 자신들이 직접 수행한다는 이 일그러진 정의감은 분노를 정당화하고 폭주를 가속하는 연료가 된다. 사실과 법리에 따라 시시비비를 가려야 할 사법 절차마저 대중의 도덕적 심판을 집행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이렇게 정치가 사적인 일상까지 지배하면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무너진다. 카페에 앉아 있는 낯선 타인을 '커피를 좋아하는 이웃'이 아니라 '나와 정치 성향이 다른 적'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하고 검열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상호 적대는 신뢰를 무너뜨리고 대화와 타협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여기에 이 사태가 가진 슬픈 역설이 존재한다. 광주민주화운동은 본래 국가의 부당한 폭력과 억압에 맞서 시민의 자유와 인권을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그 정신을 계승한다고 주장하는 일부 정치세력과 대중운동은 영업의 자유, 소비의 자유, 그리고 노동의 자유를 제한하는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다. 권력의 폭주를 막는 '방패'였던 역사를 자신들의 권력 강화를 위한 '창'으로 휘두르고 있다. 

스타벅스 측의 사죄 후에도 여전히 '적'의 허물을 찾아내어 공격하고 마침내 완전히 섬멸하려는 광풍이 휘몰아치고 있다. 과거 권위주의 정권이 국가 안보와 반공을 명분으로 시민의 사상을 검증하고 낙인찍었던 방식은 오늘날 다른 이름과 다른 언어를 통해 반복될 위험이 있다. 문제의 핵심은 자유를 보호한다는 명분이 또 다른 자유를 제한하는 도구가 되는 점에 있다.

 

의 공포를 느껴야 하는 이 숨 막히는 현실을, 광주민주화운동의 영령은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5·18의 이름으로 시민의 자유가 억압당하는 역설 속에서,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단호히 수호해야 할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야말로 오늘날 우리가 다시 질문해야 할 5·18 정신의 한 모습일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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