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일염불 회향하는 정토사 설산 스님
“아미타 부처님이 대세지보살님과 관음보살님을 대동하고 나타나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지. 부처님과 정토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천진난만한 아이들 소꿉놀이하듯 노닐고 있으면 시간이 어떻게 흘러가는지도 몰라.”
매일 매일 염불삼매에 들어 부처님을 만나고 보살님을 만나 정토세상 이야기를 나눈다는 설산(雪山) 스님. 여든 넷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몸을 꼿꼿이 한 채 ‘나무아미타불’을 호명하며 삼매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들고 있는 스님은 “염불은 자신의 육체와 정신을 건강하게 하고 남을 맑게 하는 최고의 수행법”이라며 염불수행의 효과를 역설했다.
스님은 경북 문경에서 태어나 열 다섯의 나이에 강원도 건봉사에서 출가했다. 놀이터 삼아 뛰놀며 부처님 가르침을 배운 곳이기에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건봉사에 대한 애착이 남다르다.
6·25 한국전쟁이 끝나고 건봉사를 찾은 스님은 폐허가 되어버린 절터에서 전장의 상흔이 얼마나 가슴아픈 현실을 낳고 있는지를 보아야만 했다. 그리고 그때 그곳에서 아득히 들려오는 소리를 들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어린 시절 끊임없이 산사에 울려퍼지던 아미타불 염불소리가 귓가를 스쳐 도량을 울리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은 간데 없고 주춧돌만 덩그러니 놓여 있는 그곳 건봉사에서.
건봉사를 돌아보고 서울 우이동 도선사로 돌아온 스님은 귓가에 맴돌던 염불소리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동안 모시던 청담 스님이 열반하신 후에 본격적으로 염불수행에 들어갔다.
나무아미타불 육자 염불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은 스님은 지난 74년 “1만일 동안 염불을 하는 것으로 수행을 대신하겠다”는 생각으로 ‘만일염불’을 시작했다.
새벽 4시∼5시와 오후 6시∼7시에 “괴로움을 잊게 해달라”는 발원을 하고 매일 2시간씩 염불을 하던 스님은 어느날 아미타 부처님을 만났다.
그때가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염불에 몰두하고 있는 사이에 홀연히 나타난 아미타 부처님은 그날 이후로 염불하는 동안 스님을 신명나게 했고 가장 가까운 ‘도반’이 되어 어린아이처럼 노닐기도 하고 중생이 염원하는 정토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
“염불삼매에 들면 제불보살의 환희를 느낄 수 있다”는 스님은 “최근 들어 아미타부처님 좌우에 대세지보살님과 관음보살님이 함께 나타나신다”며 마냥 즐거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설산 스님은 10000일 동안 염불수행을 이어오는 동안 부처님과 도반이 되고 스스로 부처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10월 25일(음력 9월 9일) 출가본사 건봉사에서 10000일 동안 이어온 ‘염불만일’을 회향한다.
전국염불만일회(회장 김재일)와 건봉사 금강갑계(회장 이영선) 그리고 스님이 주석중인 서울 종로구 평창동 정토사 신도회가 마련한 ‘염불만일 회향 대법회’를 끝으로 10000일 동안의 염불수행을 정리하고 대중의 앞에서 염불만일운동을 이끌어갈 계획이다.
설산 스님은 30여년 가까이 염불을 수행 방편으로 삼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정진해왔다. 앉은자리 왼쪽엔 북을, 앞에는 징을 놓고 아미타불을 호명하는 염불은 스님에겐 신명나는 수행이다. 그 덕에 부서진 징도 한 둘이 아니다. “우리집(정토사) 북은 나를 닮아 나이가 많아”라는 스님 말처럼 북도 나이 먹은 소리를 낸다.
스님은 염불을 하는 동안 북과 징 치는 것을 “모든 것을 열고 활개를 펴는 것”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속내를 털어내고 성심을 다해 염불에 임해야 한다는 것이다.
몸과 마음을 다해 한치의 거리낌도 없이 염불에 매진할 때 삼매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하는 설산 스님. “좋은 음식은 씹을수록 그 깊은 맛을 알 수 있듯이, 지극 정성으로 염불을 해야 부처를 만나고 정토를 볼 수 있다”는 게 스님이 말하는 염불이다. 따라서 그 어떠한 수행보다 염불수행이 재가불자들에게 유익하고 가깝게 다가설 수 있다는 것이다.
열 다섯의 어린 나이에 강원도 건봉사에서 출가 사문의 길에 들어선 설산 스님은 강원교육을 마치고 제방의 선원에서 수행을 했다. 그리고 동국대학교 전신인 혜화전문학교 불교학과를 졸업하고 그 오랜 시간을 염불수행으로 일관해온 염불수행의 선구자로 우뚝선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운동가로 활동한 영향 때문일까. 스님은 44년 1월 20일 학병 강제징집에 반발, 서울역에서 달려오는 기차에 발을 집어넣는 자해로 일제에 저항했다. 때문에 지금도 지팡이와 벽에 의지하지 않고선 걸음을 옮기기 어려울 만큼 불편한 몸을 하고 있다. 한 걸음 옮기기가 불편한 자신의 다리를 가리키며 “이것이 중생고야”라고 한마디 불쑥 던지는 스님의 얼굴엔 고통이 아닌 편안함이 배어 있다.
이 중생고를 없애는 게 수행이고 그 수행이 염불이라는 것을 스님을 그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곤 한마디 덧붙였다.
“염불 한번 해봐. 해봐야 뭐가 어떤지 알 것 아닌가”
설산 스님과 금강산 건봉사 “독립운동가였던 할아버지 때부터 인연 깊었지”
울던 아이도 그치게 했다는 일본 순사의 서슬퍼런 눈길이 이땅 곳곳을 감시하던 시절에 그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설산 스님. 설산 스님은 독립운동에 뛰어든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둔 독립운동가의 자손이다.
스님의 할아버지는 강원도 고성 쑥고개 전투에서 왼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채 건봉사 판로방에 은신해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다.
건봉사에서 부목생활을 하며 몸을 돌본 할아버지는 아홉 살난 스님을 건봉사로 데려다 놓고 봉명학교에서 공부를 하도록 했다. 그리고 “조선을 잊지마라. 뒤에 서면 앞이 보이지 않으니 앞에 서라”는 말씀을 남기고 떠나간 뒤 다시는 가족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아버지는 승복을 입고 스님으로 가장해 독립운동을 했었다. 그러던 어느날 일본 경찰에 잡혀 옥고를 치르다가 1930년 신의주 형무소에서 사망했다.
할아버지 때문에 건봉사 사하촌으로 이사해 생활하던 설산 스님은 열다섯 살 되던 늦은 봄 부처님오신날에 출가, 건봉사 스님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 “조선을 되찾으라는 할아버지 가르침과 스승님들의 구국 항쟁정신, 그리고 한암 만해 청담 스님의 고절한 정신만 간직한 채 살아왔다”는 스님 스스로의 말처럼 올곧게 출가 수행자의 길을 걸어왔다.
10월 25일 강원도 건봉사에서 30여년 염불수행의 한 매듭을 풀어내는 염불만일 회향법회를 여는 스님과 건봉사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신라 법흥왕 7년 아도화상이 창건하였고 발징화상이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를 설판하여 서른 한명이 만일 동안 염불한 공덕으로 육신을 버리고 일시에 왕생극락했다는 이적이 남아 있는 건봉사.
한국불교에 현존하는 최고의 염불수행자 설산 스님은 건봉사가 옛 염불수행도량의 면모를 갖추기를 바라며 대중들에게 염불의 공덕을 전하고 수행의 참모습을 가르치기 위해 오늘도 자신을 가다듬고 있다.
출처 : 법보신문
글 심정섭·사진 남수연 기자
사진 출처 : 자항慈航 김성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