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에 숨어있는 신기한 암호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무엇을 ‘관자재(觀自在)’라고 할까요?
시방의 여래는 동일한 마음이지 두 개의 마음은 없습니다. 아미타불의 마음과 석가불의 마음이 같고 석가여래의 마음과 약사유리광여래의 마음도 서로 같습니다. 그러므로 시방의 무량한 부처님들은 모두 하나의 마음입니다. 중생의 마음을 돌아보면 저마다 다릅니다. 왜냐하면 중생의 마음은 망심(妄心)이기 때문입니다. 망심이 또 어떻게 서로 같을 리가 있겠습니까? 당신에게는 당신의 ‘망(妄)’이 있고, 나에게는 나의 ‘망’이 있습니다. 백 사람에게 백 사람의 ‘망’이 있습니다. 이른바 ‘사람들 마음이 다름은 저마다 그 얼굴이 다름과 같다[人心不同, 各如其面].’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에 숨어있는 신기한 암호가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는데, 무엇을 ‘관자재(觀自在)’라고 할까요? 근기에 맞추어 법을 설하고 병에 맞추어 약을 쓰는 것[對機說法, 對病落藥]입니다. 일체중생은 그 시작을 알 수 없는 과거로부터 지금까지[無始劫以來] 자기의 보리심(菩提心)을 등지고 법(法)을 바라봅니다. 보리심을 등진 채 법을 바라보는 것은 대단히 위험합니다. 그러기에 일체법에 자재하지 못하고 법에 속박되어 있습니다. 보리심을 떠나서 색상[色]을 바라보니, 색상에 집착하고 색상에 속박되어서 자재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떠나서 소리[聲]를 들으니, 소리에 물들어 소리에 속박되어서 자재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떠나서 냄새[香]를 맡으니, 냄새에 물들어져 냄새에 속박되어서 자재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떠나서 말을 하니, 언어문자에 집착해서 역시 자재할 수 없습니다. 보리심을 떠나서 촉(觸)을 감각하니, 촉에 탐착하여 촉진(觸塵)에 속박되어 자재할 수 없습니다. 그 잘못이 어디에 있을까요? 모두 다 자기의 마음을 등지고 일체법을 바라보고, 일체법에 집착하여 일체법에 자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만약 법을 등지고 마음을 바라볼 수 있다면 마음이 밝아지고 법은 공해져서[心明法空] 일체법에 자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세음보살에서의 관(觀) 자는 우리더러 법을 바라보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황금을 바라본다면 훔칠 마음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색상을 바라보면 색상에 집착하고, 명예를 바라보면 명예를 추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대상 경계를 떠나야 합니다. 즉, 3계(三界: 욕계 색계 무색계―역주)의 경계를 떠나고, 6진 경계를 떠나고, 인간세계와 천상세계의 경계를 떠나고. 목전의 대상 경계를 떠나서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면 무심이어서, 마음은 공하고 대상 경계는 고요해지며[心空境寂] 일체법이 허깨비 변화와 같아서 일체법에 자재할 수 있습니다.
남회근 선생 반야심경 주해에서
출처 : 홍남서원弘南書院
작성자 : 문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