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 진실원 : “광명무량光明無量”원]
황념조 거사
“광명무량光明無量”은 제13원으로 발원문 전체는 이러합니다. “제가 부처 될 적에 광명이 무량하여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어서 제불의 광명보다 훨씬 수승하고, 해와 달보다 천만 억 배나 더 밝도록 하겠나이다.” 그 아래에 “촉광안락觸光安樂”원이 있습니다. “만약 어떤 중생이 저의 광명을 보아 그의 몸에 비추어 닿기만 해도 안락함을 느끼지 않음이 없고, 자심으로 선을 행하여 저의 국토에 태어나도록 하겠나이다.”
아미타부처님께서 이들 서원을 밝게 드러내신 이유는 모두 중생을 위함입니다. 일본의 망서望西 스님께서는 매우 잘 말씀하셨습니다.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여기서 “시방”이란 동서남북에 4개의 방위각을 덧붙여 팔방八方이고 다시 위와 아래를 합쳐 시방十方이라 합니다. 시방은 바로 모든 장소입니다. 부처님의 광명이 시방세계의 모든 장소를 두루 비추십니다. 일본의 망서 스님께서 이를 해석하여 말씀하셨습니다.
허공은 가이없는 것이다. (현재 천문학은 가장 큰 망원경으로 아직 발견하지 못한 하나의 천체로부터 우리 지구가 140억 광년 떨어져 있음을, 바꾸어 말하면 그 빛이 우리에게 전해지는데 빛이 가는 시간이 140억년임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들은 현재 보는 빛은 140억 년 전의 일이고, 빛의 속도는 1초에 30만 km입니다. 빛이 1년간 얼마나 멀리 가는가를 1광년이라고 합니다. 그 천체는 우리와 140억 광년 떨어져 있습니다. 이것은 현재 과학이 관찰할 수 있는 것으로 이미 이렇게 커졌습니다. 관찰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현재 과학도 우주의 크기는 끝이 없음을 승인하고 있습니다.)
시방세계는 끝이 없고, 시방의 국토도 끝이 없다. 그래서 중생도 끝이 없다. 불보살님의 대비심도 끝이 없다. 대비심이 끝이 없기 때문에 광명도 끝이 없어야 한다. 광명이 중생을 위해 불사佛事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광명은 끝이 없어서 중생을 거두어들이는 이익도 끝이 없다. 요컨대 이익이 끝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는 광명도 끝이 없어야 한다. 이익은 중생에게 주는 이익이다. 부처님께서는 왜 무량한 광명이 필요하겠는가? 중생에게 무량한 이익을 주고자 함이다.
이 해석은 너무나 좋은 해석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늘 이야기 합니다. 불교도는 언제나 자신을 고려하지 말고,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해야 한다고. 어떤 불교도는 다만 이렇게 생각할 뿐입니다. 흉한 일을 만나면 길한 일로 바꾸고, 고난을 만나면 길상을 성취하며, 일이 생기면 소원을 빌고, 부처님께 빌고 빌며, 염념마다 염불하고, 염념마다 관음보살을 부르며, 사후에는 왕생하길 구합니다. 단지 지금 생에서도 매우 잘 살 뿐만 아니라 죽어서도 좋은 곳에 태어나서, 다른 사람보다 좋아지는 방법을 찾습니다. 철두철미 개인의 이해타산을 위합니다. 성운대사曇鸞大師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이해타산적인 사람은 왕생할 수 없습니다. 극락에 왕생하는 사람은 모두 대승의 마음을 일으킨 사람입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여러 부처님의 광명보다 훨씬 수승합니다.” 이것은 아미타부처님의 광명이 모든 부처님보다 절대로 수승하다는 것으로 대경大經에서는 모든 부처님의 광명은 다르다고 설하고 있는데, 이는 그가 발원한 때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각자 다른 원을 발하였고 성불한 때가 그의 원을 실현하는 때이므로 광명도 다릅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 발원하신 때인 최초의 출발점은 모든 불국토 보다 수승합니다.
본경에서는 이르시길, “제불의 광명이 비추는 거리가 멀고 가까운 것은 본래 이전 세상에서 도를 구할 때 일으킨 서원과 공덕의 크기가 크고 작아 같지 않기 때문이니라.” 하였습니다. 아미타부처님께서는 모든 불국토의 서원을 뛰어넘습니다. 그래서 성불하신 후 “아미타부처님의 위신 광명은 가장 존귀하고 제일로 뛰어나서 시방제불의 광명은 미칠 수 없느니라.” 하셨습니다. 그 아래의 서원에서는 광명을 만나는 사람은 “안락함을 느끼지 않음이 없고, 자심으로 선을 행하여 저의 국토에 태어나도록 하겠나이다.” 하셨습니다.
『무량수경』 제12품에서는 “그 광명을 만나는 중생은 마음의 때가 멸하고, 선념이 생겨난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들 번뇌의 때와 더러운 것이 소멸하면 선념善念이 곧 생기게 됩니다. 또한 바로 삼악도의 지극히 괴로운 곳에서도 “이 광명을 보기만 하면 모두 휴식을 얻게 되며, 수명이 다한 뒤에는 모두 해탈을 얻게 되느니라.” 하셨습니다. 중생이 삼악도의 지극한 고통이 있는 곳, 지옥 가운데 있어도 만약이 광명을 보기만 하면 당시 죗값을 받는 상황이 곧 멈추고 목숨이 다할 때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습니다.
왜 무량한 광명이 필요합니까? 광명에게는 이와 같은 불가사의한 묘용이 있는데, 우리들은 광명을 만나고 있습니까? 만나지 못하고 있습니까? 광명을 볼 수 없다고 해서 부처님의 광명이 닿지 않는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육안으로 비록 보지 못한다고 해서 어찌 부처님의 광명을 받지 못한다고 하겠습니까? 저는 부처님의 광명이 우리 모두를 거두어 보살피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이렇게 한 자리에서 만나서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을 연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눈앞에 텔레비전 수상기 한 대가 놓여 있고, 방송국에서 마침 방송을 하고 있다고 합시다. 수상기에 전원이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방송국에서 방송하는 정보는 당신이 있는 이 자리에 가득하지만 당신은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전원에 플러그를 꼽고 전기 스위치를 눌러도 당신에게 필요한 채널이 불일치하면 잡히지 않고, (안테나를) 조절하기 어려워도 잡히지 않습니다. 실재 정보는 이미 전부 이 자리에 있습니다. 조금만 조정하면 곧 소리와 화상이 다 나옵니다! 방송국의 프로그램은 본래 이 자리에 있습니다! 조절이 되지 않는 경우 다시 그것을 불러오면 됩니다. 당신은 한 채널, 한 버튼을 바꾸면 두 번째 채널이 곧 나옵니다. 앞 채널은 이내 사라집니다. 이것은 모든 채널, 모든 전파, 모든 정보가 모두 바로 이 자리(當處)에 있음을 입증해줍니다. 어느 것도 부족함이 없습니다. 단지 당신은 채널을 선택하지 못해서 수신할 수 없을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처님의 광명은 바로 이 자리에 있고, 우리의 몸과 마음을 두루 비추고 있습니다. 당신이 느낄 수 없는 것은 당신이 (부처님의 광명과) 계합하도록 조절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미타부처님의 대원은 광명이 무량하여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고, 일체 중생을 거두어 보살피며, 안락을 베풀고 극락에 왕생하도록 합니다. 부처님의 광명은 무량하여 중생을 이롭게 하는 이익도 무량합니다.
《미타원왕 대원핵심》 황념조 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