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산 대종사의 생애와 전법교화
-계· 정· 혜 삼학의 구족과 발현-
목 차
들어가는 말
제1부 고산 대종사의 생애
-계· 정· 혜 삼학의 구족-
1. 출생과 불연
2. 출가와 수행 및 견성오도
제2부 고산 대종사의 전법 교화
–계· 정· 혜 삼학의 발현-
1. 지계의 산
2. 선정의 물
3. 지혜의 문
4. 전법도량 불사
맺음말
고산 대종사의 생애와 전법교화
-계· 정· 혜 삼학의 구족과 발현-
월호 (행불선원장)
들어가는 말
고산 대종사(1933~2021)는 필자의 은사스님이다. 동국대학교 선(禪)학과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필자는 이듬해 큰스님을 찾아뵙고, 출가하여 은사스님으로 모시고자 청하였다. 이에 “쌍계사로 들어가서 행자생활부터 하라.”는 말씀에 따라 지리산 쌍계사로 출가하여 행자생활과 강원공부, 그리고 선원수행을 하였다.
쌍계사 강사시절, 큰스님은 필자의 방 앞에 서 있는 세 그루의 목련나무를 가리키며 말씀하셨다. “한날한시에 똑같은 묘목을 심었는데, 어떤 나무는 작고, 어떤 나무는 중간치며, 어떤 나무는 크게 자랐다. 왜 그런 줄 아느냐? 땅 밑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서, 각각 흙의 깊이가 다르기 때문이다.”
이처럼 똑같은 사람이 똑같은 노력을 해도 어떤 토양을 만나는지에 따라 성장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는 말씀이었다. 이 글을 쓰며, 필자는 은사스님을 잘 만나서 그나마 이 정도라도 와 있다는 생각이 절실하다. 대학원에서 묵조선과 간화선을 전공하여 석·박사학위까지 받았음에도 다시 강원에 입방하여 공부를 무사히 마친 것도 오로지 은사스님 덕분이었다.
사실 필자는 선방수행에 뜻이 있어 출가했다. 동국대학교 선(禪)학과에서 3년간 강사생활을 하고 박사학위까지 받았지만 재가자의 참선수행은 아무래도 한계가 있었으며, 더욱 깊은 선방체험을 하고자 발원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쌍계사에서 행자생활을 하던 중, 새벽예불 후에 강원 학인스님들이 고성으로 독경하는 소리가 마치 천상의 화음처럼 들려 왔다. 이에 신심이 일어나 일단 강원에 입방하여 치문과 사집과정까지 마치자, 다시 선방수행에 대한 동경심이 불현 듯 일어났다. 당시 큰스님 시자로 있던 터라, 선방에 가고자 큰스님께 의견을 피력하니 말씀하셨다.
“강원공부는 다 마쳤냐?”
“아직 못 마쳤습니다.”
“하던 걸 마치지도 않고, 어딜 간다는 거냐?”
“......”
결국 대교반 까지 마치고나서야 선방을 가게 되었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때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지만, 나중에 강사와 강주가 되어 학인스님들을 가르치고 지금까지 대중에게 전법함에 있어 가장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기 때문이다.
강원을 졸업하고 쌍계사와 봉암사, 그리고 동화사 등 이곳저곳 선방을 두루 다니다 해인사 선원에서 해제 무렵, 강주스님과 교무스님이 찾아와 강사직을 청하였다. 해인사 같은 총림에서 강사생활을 해보는 것도 괜찮겠다 싶어 일 년 남짓 강사로 있던 중, 큰스님 생신날 쌍계사로 인사드리러 가니 말씀하셨다.
“요즘 어디에 있느냐?”
“해인사 선방 나고, 강원에서 사교반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제는 쌍계사 들어와서 전강 받을 준비를 하거라.”
“네에.”
그렇게 다시 쌍계사로 들어가 강사생활을 하며, 수시로 큰스님 앞에서 독대하여 강원에서 가르치는 과목들을 읽고 새기곤 하였다. 큰스님은 가만히 듣고 계시다가 지적하거나 보완할 점이 있는 대목에서 한 말씀씩 하였는데, 경전을 거의 다 외우고 계신 것이었다. 하긴 필자도 강원시절 당일 배운 경전구절을 다음날 외워 바치려고 암송하곤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까맣게 잊곤 하였다. 어린 시절 출가하여 경전을 통째로 외운 큰스님은 평생 그 내용을 간직하고 계신 것이었다.
또한 새벽예불 후에는 금당선원으로 올라가 선방 수좌들과 함께 참선정진에 동참하곤 하셨다. 법문하실 적에는 항상 앞뒤로 게송을 설하셨는데, 그 운율과 내용이 단연코 제방에서 최고였다. 나아가 계율에도 정통하여 종단의 전계대화상을 역임하였음은 물론, 평생을 법대로 살다 가신 이 시대의 전정한 선지식이었다. 이하 큰스님의 위대하신 발자취를 회상하며, 자필 회고록인 『지리산의 무쇠소』를 중심으로 미력하나마 생애와 업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고산큰스님 회고록 『지리산의 무쇠소』에 따르면, 큰스님의 생애는 크게 셋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1933년 출생하여 출가하기 이전까지
둘째, 1945년도에 입산 출가하여 1970년도까지 25년간 자신을 위해 수도한 시절
셋째, 1971년도에 중앙상임포교사 임명을 받아 입적까지 중생 교화한 시절
이 가운데 첫째와 둘째는 제1부 고산 대종사의 생애로, 셋째는 제2부 고산 대종사의 전법교화로 나누어 고찰해보도록 하자.
제1부 고산 대종사의 생애
-계· 정· 혜 삼학의 구족-
스님은 1933년 음력 12월 9일 경남 울주군에서 태어났다. 1945년 13세에 부산 범어사로 출가해 1948년 동산화상을 은사로 사미계를, 1956년 동산스님을 은사로 비구계를 받았다. 이후 강원에서 줄곧 삼장을 연구하다가 1961년 김천 직지사에서 고봉선사로부터 선교일여 도리를 배우며 전강을 받았고, 1972년 부산 범어사 금강계단에서 석암율사로부터 전계를 받았다. 젊은 시절 깨달음을 향한 간절한 마음으로 제방 선원에서 용맹 정진하여 마침내 다음과 같은 오도송을 지었다.
마음 일어남은 한바탕 꿈꾸는 것이요 心行一場夢
한 마음 쉰 것이 곧 깨어남이라. 息心卽是覺
꿈과 깨어남이 한결같은 가운데 夢覺一如中
마음 광명이 대천세계를 비추는구나. 心光照大千
이후 스님은 후학에 대한 열정으로 금룡 청암사 강사, 부산 범어사 강사와 포교사를 역임하였고 1976년 부산 혜원정사와 부천 석왕사, 1998년에는 통영 연화사를 창건하였다. 또한 1998년에 대한불교 조계종 총무원장에 취임하였고, 2006년에 원로위원, 2008년에 단일계단 전계사로 추대되었다. 2013년에는 쌍계총림 초대방장에 추대되어 세상에 주옥같은 법어를 내리다 2021년 3월 23일 법랍 74세, 세수 88세로 임종게를 남기고 원적에 들었다.
1. 출생과 불연(佛緣)
* 출생
스님은 부친 해주오씨 응수 거사와 어머니 밀양박씨 용순 여사 사이에 5남 2녀 중 4남으로 1933년 음력 12월 9일 술시에 경남 울주군 상북면 천전리 428번지에서 출생하였다. 어머니는 한 동자스님이 품에 와서 안기는 꿈을 꾸고 잉태하였다고 한다. 갓난아기 시절부터 바로 위 누나를 밀어제치고 어머니 젖을 혼자 독차지한 외고집의 유별난 아이였다고 한다. 세 살 때부터 밥을 먹기 시작해서도 성질이 얼마나 까다로운지 어머니가 먹여주는 음식이나 어머니가 직접 차려주는 음식이 아니면 절대 먹지 않았다고 한다. 또한 육류는 삶은 냄새만 맡아도 온몸에 두드러기가 나서 마치 옻 오른 것처럼 되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했다고 한다.
스님이 태어난 아름답고 웅장한 간월산 산기슭에 자리 잡은 천전마을은 산고수려하며 인심 좋은 마을이다. 동남쪽으로 5리를 가면 언양읍이 있고, 동북쪽으로 30리 정도 올라가면 신라 때 도의국사께서 창건하신 석남사가 있으며, 아랫마을 한가운데는 용화사가 있어 마치 불국토를 방불케하는 아름다운 고장이기도 하다.
* 입학
스님은 일곱 살에 길천공립국민학교에 입학했다. 또한 어려서부터 천자문과 동몽선습, 명심보감 등 한서를 읽었다. 어느 날 뒷산 장군바위에서 친구인 장우와 함께 놀다 시를 지었는데, 친구가 먼저 ‘내가 산 위에 앉아보니 천하가 눈 안에 있도다. (我坐山上見하니 天下眼中收로다)’하니, 이어서 시를 지어 가로대, ‘묵묵히 장군대에 앉았으니 흰 구름이 마음대로 오고 가는구나. (默坐將軍臺하니 白雲任往來로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 저녁에 위의 시를 아버지께 드렸더니 자세히 살펴보고 말씀하시기를, “장우는 장차 큰 벼슬을 하던지 그렇지 않으면 인술로써 많은 중생을 구할 것이고, 너는 장차 산간에 들어가서 수도승이 되어 도를 통하여 많은 중생을 제도할 것이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결국 장우는 한의사가 되어 많은 병든 중생을 구제하고 있고, 스님은 수도승이 되어 중생을 제도하게 된 것이다.”
* 불연
동자스님이 품에 안기는 태몽과 함께 태어난 스님은 어려서부터 부처님과 연(緣)이 있었다. 아랫마을 용화사 불당에 들어가 참배하고 석불의 두 귀를 잡고 볼에 뽀뽀를 하면서 “나는 부처님을 참 좋아합니다.”라고 말하였다고 한다. 또한 늦가을 졸업소풍을 석남사로 가서, 절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고 한다.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석남사에 도착하여 대웅전 부처님부터 참배했다. 부처님 앞으로 다가가서 어머니가 주신 50전을 몽땅 다 내어서 부처님 앞에 갖다놓고 “부처님, 이 돈 모두 드릴게요. 저를 훌륭한 사람 되게 해주세요. 네?” 하고서 절을 열두 번이나 했다. 아름다운 계곡 가에서 밥을 먹으며 문득 이렇게 공기 좋고 산 좋고 물 좋은 절에서 살고 싶은 생각이 일어났다. 며칠이라도 더 있다 가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절을 뒤로 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오면서도 몇 차례나 절이 있는 풍경을 뒤돌아봤다.”
2. 출가와 수행 및 견성오도
* 범어사로 입산하다
“졸업 후 하는 일 없이 지내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침 일찍 나를 불러 “절에 가서 공부할 생각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전에 석남사에 갔던 생각이 되살아나서 “그러면 참 좋지요.”라고 선뜻 대답했다. 결국 통도사를 거쳐 범어사에서 하동산 조실스님을 참방했다. 인사를 드린 다음 아버지가 말하기를 “오늘 큰스님을 찾아 뵈온 것은 다름 아니라 이놈이 제 넷째 아들놈인데 큰스님의 상좌로 드릴까 해서 데리고 왔습니다.”라고 하니 큰스님께서 “진작 올 것이지 왜 이제 왔어!”라고 하셨다. 첫눈에 이 스님을 보는 순간 평소에 친한 스님처럼 마음에 다정함을 느꼈다. 아버지는 그길로 집에 돌아가시고, 나는 그날부터 행자생활을 하게 되었으니, 이날이 바로 나의 입산득도일이 되는데 1945년 4월 26일(음력 3월 15일)이다.”
* 어머니의 죽음과 재입산
“행자생활 석 달 만에 나는 갑자기 어머니가 보고 싶어 고향집으로 갔다. 며칠 쉬었다가 절로 간다는 것이 보름이 다 되어갔다. 그해 8월 15일 해방이 됐다. 일제의 강점을 받다가 해방이 되고 보니 삼천리강토는 온통 환희의 함성이 메아리쳤다. 나도 다른 사람을 따라 즐거워 날뛰다보니 절에 가는 것을 까맣게 잊어버리고 아버지로부터 다시 명심보감을 통해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한 와중에 1946년 3월 20일 언양 중학교에 입학했다.
여름방학이 끝날 무렵 음력 8월 초 어머니는 몸이 안 좋다고 자리에 누우셨다. 극진한 간호와 기도에도 불구하고, 양력 9월 14일(음력 8월 19일) 어머니는 청천벽력처럼 인생의 종말을 고하고 세상을 떠나셨다. 하늘이 무너진 듯, 땅이 꺼진 듯 나는 앞도 뒤도 보이지 않고 주위도 사람도 보이는 듯 마는 듯 어머님의 손을 잡고 대성통곡을 했다.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겠다는 아버지의 말에 따라 다시 범어사에서 큰스님을 친견하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대강 말씀드렸다. 중학교에 다닌 것과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 것 등을 말씀드리고 어머니만 만나게 해주신다면 앞으로는 절대로 집에 가지 않고 승려 생활을 잘 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큰스님께서는 역시 전과 같이 반가워하시면서 “잘 왔어! 내 너의 어머니를 꼭 만나게 해줄 터이니 시키는 대로 잘하고 있어라!”라고 하셨다. 그래서 나는 수도생활을 하면서도 일 년에 두 차례 시험 통지서를 받고 학기말 시험을 치고 무난히 졸업을 하게 되었다.”
* 사미계를 받고 어머니를 만나다
“1948년 음력 3월 15일 하동산 조실스님의 상좌로 사미계를 받게 되니 법명은 혜원이다. 이제는 행자생활도 졸업이고 서지전 강원으로 가서 공부하게 되었다. 강원에 입방한 후 조실방을 찾아가 물었다. “스님! 우리 어머니 언제 만나게 해주시겠습니까?” “오늘부터 관음전에 가서 하루 4분 정근으로 21일간 삼칠일 기도를 하여라. 그러면 관세음보살님께서 틀림없이 네 어머니를 만나게 해주실 것이다. 일체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오직 관세음보살만 생각해야 하느니라.” 나는 환희에 넘친 마음으로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고 예를 올리고 나왔다.
얼마나 큰 소리로 관세음보살을 불렀던지 일주일 만에 목이 쉬어 소리가 잘 안 나와 거북했지만 그래도 쉬지 않고 정진에 정진을 거듭했다. 2주일이 지나니 목이 조금씩 트이기 시작했다. 3주째 접어들어 더욱 열심히 하다나 마지막 삼일은 밤잠과 휴식도 없애고 용맹기도를 했다. 회향 하루 전인 한밤중에 목청을 높여 큰소리로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는데 비몽사몽간에 우리 어머니가 나타나서 내 앞으로 다가오시는 것이었다. 나는 얼마나 기쁘던지 치던 목탁도 던져버리고 뛰어가서 “어머니!”하고 껴안는 순간 어머니는 사라지고 내가 관세음보살을 껴안고 있었다.”
* 화두를 참구하다
“공양주 소임을 보면서도 수시로 틈만 있으면 조실스님을 찾아가서 묻고 배우고, 그러면서 화두도 받았다. 시삼마(是甚麽)화두다. 시삼마는 ‘마음이 아니라 이 몸을 끌고 다니는 물건이 도대체 무슨 물건인고?’하는 것이다. 나는 아침저녁 예불 끝에는 관세음보살을 염하고 낮에 일할 때는 ‘이 뭣고?’하다가 저녁예불이 끝나고 정진시간이 되면 금어선원에 들어가서 취침 시간까지 2시간씩 ‘이 뭣고?’화두를 들고 참선했다.”
* 고통과 장애가 많던 해불암 시절
“1948년 기장 해불암에 도착해서 걸망을 풀었다. 한 철만 지나고 다시 범어사로 간다는 생각으로 부처님께 예배를 드렸지만, 이 길이 영영 5~6년이란 기나긴 세월이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1949년 3월 23일에 울산고등학교에 입학하여 약 1개월간 다니다가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저는 다시 절로 가겠으니 중학교 다닐 때와 같이 시험을 칠 때만 나오게 해주세요.” 이렇게 해서 선생님들의 너그러우신 배려로 고등학교는 무난히 졸업했다.
스님은 해불암에 있으면서 기도 염불을 비롯하여 일체 노동을 빠짐없이 연마 습득하였다. 또한 억울한 일을 당해 세 번이나 바다에 투신하려 하였으나 그때마다 누군가 나타나 말리곤 하였다.
“나는 분하고 원통한 마음에 바닷가 절벽에 서서 큰 한숨을 내쉬고 투신하려 했다. 그때 어떤 30대의 수좌가 말쑥하고 잘 생긴 모습으로 내게 다가와 위험한 짓을 하는 것 같아 구제하려고 왔다고 했다. 그때 수좌스님은 “조금만 더 고생하면 앞으로 큰 광영을 볼 것이니 참고 견디면 자연히 큰절로 가게 되어 선지식의 지도를 받게 될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런 다음 그 스님은 내손을 잡아 일으키면서 절로 다시 돌아가라고 권유했다. 그 스님과 한 걸음 한 걸음 옮기는 도중 갑자기 앞서 가던 스님이 전후좌우 아무리 살펴봐도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바위틈으로 산으로 찾다 찾다 못 찾고 나 혼자 절로 왔다. 어쨌든 그 스님의 말씀을 곱씹으며 변함없이 용맹정진에 임했다.”
* 범어사에서 경전공부를 하다
“1952년 9월 다시 범어사로 가서 동산스님의 지도하에 금어선원에서 참선공부를 시작했다. 나는 은사인 동산 조실스님에게 오후 휴식시간을 틈타서 매일같이 『선요』를 배워가면서 참선을 했다. 당시 나는 삼동결제 동안에 하루 12시간씩 가행정진을 했다.”
“그때 사중에서 강고봉 노스님을 강주스님으로 모시게 되어 노스님께서 상좌인 우룡스님을 데리고 오셨다. 그동안 틈틈이 사집을 보았으나 참선을 위주로 선실에서 공부를 하다가 또 후원소임을 살았지만 이제부터 정식으로 경전을 연구하기로 결심하니 기분이 충천했다. 우선 우룡스님과 능엄경부터 보기 시작해서 일구월심 피나는 노력으로 연구에 연구를 거듭했다. 『능엄경』을 보는 도중 우룡스님과 같이 비구계를 받았는데 서른 명 중 아홉 명만 받았다. 『능엄경』을 마치고 우리는 『기신론』을 함께 연구했다.”
* 전강스님을 친견하다
“그때 전강스님께서는 군산 은적사에 잠시 주석하고 계실 때였다. 두 사람은 은적사를 향해서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온종일 달려서 해가 기울 무렵 은적사에 도착했다. 큰스님께 인사를 드리자마자 같이 간 수자가 대뜸 묻기를 “수행자가 어떻게 공부를 해야 빨리 생사해탈을 할 수 있습니까?”라고 했다. 전강 큰스님께서는 조용히 묻기를 무슨 화두를 들고 있느냐고 했다. 두 사람은 동시에 ‘시삼마’를 하고 있다고 했다. 큰스님께서는 다시 말씀하시되, “시은(施恩)이 일미칠근(一米七斤)임을 생각하여 쉬지 말고 부지런히 공부하여라.”라고 하심에 나는 “그 말씀은 이미 치문에서 배워서 다 알고 있습니다. 다른 적절한 말씀을 해주십시오.”했더니 또 “시은이 일미칠근임을 생각하여 열심히 하여라”라고 하셨다. 같이 갔던 수자가 이번에는 “큰스님! 그것은 유치원생에게나 해당하는 말씀이지, 저희에게는 맞지 않습니다. 일초직입여래지하는 경절언구를 설해주십시오.”라고 했다. 스님께서는 역시 “시은이 일미칠근임을 생각하여 쉬지 말고 부지런히 하여라.”하셨다.
큰스님 말씀이 끝나자 그 수자는 “선지식이라고 하더니 유치원 선생노릇이나 하고 있는 노장이구만! 혼자 선생 노릇이나 많이 하세요!”하고 나의 다리를 꼬집으면서 가자고 재촉했다. 나는 하는 수 없이 따라 일어나서 대문으로 나오다가 뒤돌아서서 이번에는 내가 좋은 말씀을 들으려고 멀리 뛰어온 것이 분해서 조실방을 향해 큰소리로 “조실 노릇 하려면 무엇 좀 알고 하던지! 어린애 달래는 소리만 하고 있어! 조실? 대추 조(棗)자에 열매 실(實)자 조실이나 실컷 해라!”하고는 나왔다.
다음날 본사에 돌아온 우리는 더욱 열심히 노력 정진하는 데 계속 전강스님께서 말씀하신 일미칠근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아서 밥을 받을 때는 더욱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시주의 빚만 지고 무위도식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마음이 자꾸만 드는 것이었다.”
* 청암사서 경학 연구에 몰두하다
“사면통지서를 받고 용맹 발분하여 배전의 신심을 내서 열심히 경학 연구에 몰두함에 1961년 음력 10월 10일 고봉스님으로부터 종한스님과 내가 동시에 대교졸업과 건당 그리고 전강식을 하고 호를 나는 고산이라 지어주시고 종한 스님은 우룡이라 지어주셨다. 그리고 학업을 증장코자 고봉스님을 모시고 김천 청암사 극락전으로 들어갔다. 청암사로 들어간 지 얼마 안 되어서 일파만파로 소문이 나서 각처에서 비구 비구니 학인스님들이 약 50여 명 모여들었다. 비구는 극락암에, 비구니는 백련암에 거주하여 수학토록 했다. 고봉스님 당신은 위에서 자문 역할을 하시고 우룡스님과 나를 강사로 임명하시어 학업을 더욱 증진케 해주셨다. 나는 모르는 것은 고봉스님에게 물어서 성심을 다해 맡은 바 후학 지도를 게을리 하지 않고 강사의 임무를 완수했다.”
* 금오스님을 친견하다
“1965년 여름이었다. 일기가 청명한 어느 날 수도암에서 금오스님이 내려오셨다. 극락암 마당에 들어서면서 조실방을 향해서 “고봉 있나, 고봉! 고봉!”하면서 조실방 문 앞까지 갔으나 고봉스님께서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정좌하고 계셨다. 금오스님께서는 인기척도 없이 문을 당겨 열고서 “야! 고봉 있구나.”하고서 고봉스님에게 한 가지 묻겠다고 했다. “바위가 하나 있는데 삼계 안에 있는가, 삼계 밖에 있는가, 어서 대답하게.” 고봉스님이 답했다. “바위는 고사하고 금오 네 바위는 삼계 안에 있나 삼계 밖에 있나?” 금오스님은 “내가 먼저 물었으니 먼저 답하라”고 했고, 고봉스님은 “잔소리 말고 물음에 답하라”고 했다. 급기야 두 스님은 서로 멱살을 잡고 먼저 답하라고 밀고 당기고 난리가 났다. 이 광경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어서 내가 나서서 말렸다. 그러자 두 스님은 어쩔 줄 몰라 했다.
나는 두 스님에게 차를 한 잔씩 올리고 열을 식히도록 했다. 그리고 정중히 절을 올리고 두 스님에게 말씀드렸다. “바위와 금오스님이 산계의 안과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저 마음 가운데 있는 것 아닙니까?” 그러자 두 스님은 동시에 “너는 복장 속에 바위를 넣어 지고 다니니 꽤 고생이 많겠구나!”라고 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그 자리를 물러나고 말았다. 그 뒤 열심히 공부해서 마음과 삼계가 둘이 아님을 알았다.”
* 식광경계(識光境界)를 깨우치다
1966년 음력 4월 20일 새벽예불이 끝나고 한 시간 동안 관음정근을 하고 이산 혜연선사 발원문을 한 다음 보광전 법당에서 42수 관세음보살을 등지고 법당 문을 활짝 열어놓고 참선에 들었다. 약 삼십분 간 앉았는데 이상한 경계가 일어났다. 내 눈앞이 활짝 열려 삼천대천세계가 손바닥에 구슬 굴려보듯 환하게 밝게 보였다. 바둑판처럼 빌딩이 숲을 이룬 대도시가 보이는데 빌딩 사이 도로에는 차와 인파가 오고 갔다. 흑인, 백인, 황인 할 것 없이 심지어 도로에 개미가 기어가는 것까지 곁에서 보는 것보다 더 밝게 거울을 들여다보듯 세밀하게 보였다.
다시 견해를 좁혀 청암사 입구로 왔다. 청암사 입구 약 5백 미터 지점에 우리 절에 자주 오는 성주 천창에 계시는 노보살이 쌀자루에 쌀을 두 되쯤 이고 오른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왼손에는 과일 상자를 들고 오는 것이 보였다. 그래서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법당을 나와 시자를 불렀다. “시자야, 절 밖에 나가서 천창보살이 불공드리러 오는 듯하니 가서 받아 모시고 오너라.” 약 십분 뒤에 도착한 이를 보니 조금 전에 정중에서 본 노보살이 틀림없었다. 그리하여 나는 견성했다는 생각으로 고봉스님에게 가서 정중히 삼배를 올리고, “스님, 저 견성했습니다. 인가해주세요”라고 했다. 고봉 스님은 한마디 일러보라고 했다.
“見聞如虛空 覺知湛如水 湛然虛空中 卽見本來人입니다.
해석하면, 보고 듣는 것은 허공과 같고 느껴서 아는 것은 담담한 물과 같도다.
담담하고 허공과 같은 가운데 곧 본래인을 보았습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경계가 어떠하냐?”라고 물으셨고, 나는 “생각만 하면 삼천대천세계가 손바닥 가운데 구슬처럼 훤히 보입니다.”라고 했다. 고봉스님은 “아직 이다. 더 열심히 해 보아라”라고 하셨다. 나는 미심쩍어 그 길로 바로 통도사 극락암에 계시는 경봉 스님을 찾아갔다. 경봉 스님 역시 일러보라고 해서 고봉스님께 말씀드린 대로 했다. 그러자 경봉스님은 그것이 바로 식광경계라고 하시면서 제8아뢰야식이 맑아지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시고 조금만 더 노력하고 더 정진하라고 격려해주셨다.
* 고봉스님과 경봉스님으로부터 인가를 받다
“1966년 음력 7월 10일, 새벽예불 후 좌선 중에 홀연히 한 경계가 있어 게송을 지었다.
마음작용은 한바탕 꿈이요 心行一場夢
한 마음 쉰 것이 곧 잠깬 것이라 息心卽是覺
꿈과 잠깸이 한결같은 가운데 夢覺一如中
마음 광명이 대천세계에 비추도다. 心光照大千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고봉스님에게 가서 게송을 말씀드리고, 이 우주에 오직 나 하나뿐이라고 했다. 그러자 고봉스님은 “이제 되었다. 앞으로 매하지 말라.”하시면서 인가하셨다. 그러나 나는 미심쩍어서 다시 통도사 극락암에 계시는 경봉스님에게 달려갔다. 삼배를 올리고 게송을 말씀드렸더니 역시 이제 되었다고 하시면서 지금 경계가 어떠냐고 물으셨다. 나는 “이 우주에 오직 나 하나뿐입니다.”라고 했더니 앞으로 잘 두호해 가지라고 했다. 그 길로 나는 청암사로 돌아와서 전일보다 더 열심히 기도와 정진에 임했다.”
제2부 고산 대종사의 전법 교화
- 계·정·혜 삼학의 발현 -
스님은 1992년 하안거 결제를 하여 가행정진을 하였다. 며칠 정진하다가 계·정·혜에 대해 다음과 같이 ‘계정혜 송(頌)’을 지었다.
신령스럽게 밝음이 고요히 비춰 항하사의 세계에 두루 한데 靈明寂照遍河沙
헤아려 의논하되 옳고 그름 논함을 용납하지 않는지라. 擬議未容論是非
계(戒)의 산에 구름이 지나감에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고 戒山雲過山不動
정(定)의 물에 달이 옴에 물은 물결치지 아니하도다. 定水月來水不波
지혜(智慧)의 문에는 육근 육진의 무명초가 길이 멸했으니 慧門永滅根塵草
성품의 하늘에 부처님의 광명이 가득히 발했도다. 性天滿發佛光明
무시 겁으로 옴에 소식이 다했으니 無始劫來消息盡
나무사람이 일이 없이 태평가를 부르는구나. 木人無事太平歌
이른 바, 지계(戒)의 산과 선정(定)의 물, 그리고 지혜(智慧)의 문을 읊은 것이다. 지계의 산에 구름이 지나가도 산은 움직이지 아니하듯 계율을 굳건히 지키고, 선정의 물에 달이 비쳐도 물은 물결치지 아니하듯 마음은 여여부동하며, 지혜의 문에 육근 육진의 무명초가 길이 멸했으니 광명이 가득히 발했다고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계· 정· 혜 삼학을 바탕으로 평생토록 전법교화를 한시도 쉬지 않았다.
1. 지계(戒)의 산(山)
스님은 매일 새벽예불에 앞서 108참회로 하루를 시작하고, 예불 후에는 수좌들과 함께 참선 정진하였으며, 낮에는 선농일치 정신으로 농사일도 손수 앞장서서 시행하였다. 그러면서도 한편 서릿발 같은 청정 율사로 엄하기 짝이 없었지만, 때로는 다정다감한 면모를 보여주기도 했다. 다음과 같이 ‘지계(持戒) 송(頌)’을 지었다.
비틀걸음 걷지 않고 나쁜 말 하지 않고
더러운 것 보지 않고 나쁜 소리 듣지 않고
좋은 옷 입지 않고 좋은 음식 먹지 않으리.
맑은 마음 청정향을 부처님께 바치고저!
* 범어사 계단의 전계사가 되다.
1972년 양력 2월 초에 조계사 주지를 맡게 된 스님은 그해 음력 3월 15일 범어사 보살계에 전계사인 석암스님의 부름을 받고 교수아사리로 참가한다.
“단주이신 석암스님께서는 너무나 만족해하시더니 보살계 수계의식과 회향 법문이 끝나자 사전에 아무 말씀도 없었는데 갑작스럽게 사부대중에게 “나는 이제 나이도 많고 정신도 흐리고 해서 젊은 교수사인 고산스님에게 전계하니 사부대중은 그리 아시길 바란다.”고 하셨다. 범어사 계단이 어떤 곳인가? 과거 만화 승림율사, 동산 혜일율사, 석암 혜수율사께서 맥을 이었던 계단이 아니던가? 이러한 중한 계단을 나에게 전한다는 것이니 놀라고 또 놀랬다.“
* 마음이 곧으면 계를 지님이라.
1988년 음력 7월 21일 오후 3시, 음력 17일부터 송광사 보성스님과 같이 7일간 용맹기도를 시작하여 닷새째 되는 날에 오색구름 위 삼존불(석가모니불 문수보살 미륵보살)과 삼존불 아래 금자 사구게가 허공에 나타났다.
마음이 곧으면 계를 지님이요. 心直名持戒
마음이 굽으면 계를 범함이라. 心曲名毁犯
곧은 마음으로 부지런히 수행하면 直心勤修行
자리와 이타를 원만히 이루리라. 二利俱圓成
이와 같이 나는 서상계를 받기 위해 기도하다가 이런 상서가 나타났으니 대은 스님의 서상계와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때부터 나는 대은스님의 서상계의 금강계단을 설립코자 발원했다.
* 쌍계사에 금강계단을 설립하고 매년 쌍계사 보살계를 봉행하다
스님은 쌍계사에 금강계단을 설립하고, 매년 보살계 행사를 특히 소중히 여기어서 심지어 “보살계 행사에 동참하지 않으면 내 상좌도 아니다.”라고 말씀할 정도였다. 실로 보살계를 받지 않으면 참 보살도 아니요, 참 불자도 아닌 것이다.
“모든 불자 등이여, 보살계경 말씀에, ‘보살계를 받은 자는 비록 당장에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미 다섯 가지 공덕을 구족한다 하셨느니라. 첫째는 제불보살의 호념하는 바가 되고, 둘째는 세세생생에 언제나 승묘한 쾌락을 받게 되고, 셋째는 임명종시에 후회가 없고, 넷째는 이 몸을 버린 뒤에 부처님 세계에 나게 되고, 다섯째는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장엄하게 된다.’하셨느니라.
모든 선남자 선여인 이여! 내가 지금 무진계법을 설해 주어 마쳤음에 너희가 무진계법을 받아 마쳤으니, 이제는 참 보살이 된 지라. 보리심을 발하니 참 불자니라.”
2. 선정(定)의 물(水)
이미 고봉스님과 경봉스님으로부터 선정의 경지를 인가받은 스님은 틈날 때마다 선정삼매에 들었으며, 수시로 해탈법문을 설하였다. 스님은 특히 육조스님을 모신 쌍계사에서 『육조단경』을 설하며 당일 생사해탈하기를 권하였다.
* 『육조단경』을 설하며 당일 생사해탈을 권하다
아유일개보(我有一介寶) 비대역비소(非大亦非小)
본래무형상(本來無形相) 수처방광명(隨處放光明)
오늘 사부대중이 한 자리에 모인 것은 무엇을 하고자 함인가?
오직 금일 생사해탈을 하기 위해서 한 자리에 모인 것입니다.
생사해탈을 하려면 부처님 말씀을 공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33대 조사이신 육조 혜능조사의 경절문 돈오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면 일념 즉시에 성불을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육조정상을 모신 하동 쌍계사에서 육조스님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으니, 이는 참으로 백겁천생에 만나기 어려운 그런 기회가 아닌가 생각이 듭니다.
육조스님이 말씀하신 것이 앞에 말한 게송입니다.
“나에게 한 개 보배가 있으니
큰 것도 아니고 작은 것도 아니다.
본래 형상이 없지만
곳을 따라 항상 광명을 놓는다.”
이 말씀은 평상시에 많은 수행납자에게 가르치신 그대로 돈오돈수인 것입니다. 즉 한 생각 깨달으면 그대로 다겁 다생 모든 번뇌· 습기는 일시에 소멸되어서 바로 무상보리에 이르게 된다는 가르침입니다. 육조스님의 법문을 잘 들어서 모두 원만성불할 수 있도록 모두 힘을 써주길 부탁드립니다.
전념불각 명범부(前念不覺 名凡夫)요
후념즉각 명위불(後念卽覺 名爲佛)이로다.
앞생각 미혹해 있을 때에는 범부중생이지만, 뒤 한 생각 깨달으면 모두 원만성불이라 하였습니다. 모두 힘써서 생사해탈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 『금강경 오가해』를 강의하며 언어도단의 경지를 설하다
심유야 광겁이체범부(心有也 曠劫而滯凡夫)하고
심무야 찰나이등정각(心無也 刹那而登正覺)이로다.
마음이 있으면 광겁에 범부에 처하거니와, 이 한 마음이 없으면 찰나에 정각에 오른다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달마비문에 있는 말씀입니다. 중생 중생마다 이 분별망심이 있음으로 해서 항상 육도의 윤회고를 받고, 그 망상이 없으면 찰나 간에 성불을 한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이 주장자를 치는 도리는 역대 조사 고금 모든 현철들이 항상 법어로서 활용하던 그 도리인데, 이 일착자 도리는 공도 아니고 또한 빛깔이 있는 것도 아니며, 태어나는 것도 아니고, 또한 멸한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말로써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언어의 길이 끊어지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도 없기 때문에 심행처가 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 내용인 즉 지어목전 물형단자(只於目前 勿形段者), 누구든지 우리 중생들 개개인이 자기 눈앞을 잘 살펴보세요. 성성역력해가지고 추우면 추운 줄 알고, 배고프면 배고픈 줄 알고, 칭찬하면 기뻐할 줄 알고, 비방하면 슬퍼할 줄 아는 그 물건이 하나 있기는 있는데, 찾아보면 어디로 자취를 감췄는지 형단이 없어요. 그 형단이 없는 그 자체를 이 주장자를 한 번 탁 쳐서 나타내 보인 것입니다.
*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골수법문이 ‘관자재보살’임을 밝히다
육백부 『반야바라밀경』의 골수가 ‘금강반야바라밀’이요, 『금강반야바라밀경』의 골수가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이요,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의 골수법문이 ‘관자재보살’이라고 할 때, 이 관자재보살이 과거에 정법명왕여래인 관자재보살로만 알아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속에 반조해서 각자 자기 마음속에 있는 관자재보살도 찾을 줄을 알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각자 자기 마음속에 있는 관자재보살은 누구냐는 것입니다. 지금 이 법사 말을 들을 줄 아는 이가 관자재보살입니다. 분명히 듣고 있습니다. 과거에 정법명왕여래로 계시던 관자재보살이 이 반야심경의 근본 뜻인 공(空)도리를 체득해서 중생을 구제하셨다는 것을 분명히 아셔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해야 될 것이 아니냐는 것입니다. 과거에 관자재보살도 오온이 공한 줄을 비추어보고 원만 성불을 해서 중생교화를 했을진댄, 나도 그렇게 하면 되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가르친 법이 바로 그것입니다.
* 마음의 경지를 게송으로 노래하다
스님은 법문 전후로 항상 게송을 읊고 풀이하였다. 또한 때때로 마음의 게송을 지었는데, 모두 선기(禪機)가 충만하였다. 그 중 몇 수만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85년 아침예불이 끝나고 마애석불에 참배할 때 미소 짓는 모습을 보면서 한 수의 시를 지었다.
천년동안 미소 짓고 입을 봉해 묵묵히 계시는데 千年微笑緘口默
스님들과 세속의 모든 사람이 가피를 입었도다. 緇白諸人蒙加被
멀리서 들은 이나 가까이서 친견한 모든 중생이 遠聞親見諸衆生
다 생사를 벗어나 정각을 이루었도다. 咸脫生死成正覺
불일평전을 지나 불일폭포에 이르렀다. 큰비가 내린 뒤에 와서 보니 참으로 장관이다. 수없는 시상이 떠올랐지만 그중 두 수만 소개한다.
청학봉 백학봉 사이에 쏟아지는 폭포수가 淸白鶴峯瀑流水
백의 관음보살님의 춤추는 자태로다. 白衣觀音舞踊態
어젯밤 관세음보살님께서 꿈 가운데 나타났더니 昨夜觀音夢中現
오늘 저 폭포 가운데 나타났다 숨었다 하는구나. 今日隱現飛瀑中
본래면목이 이 무슨 물건인고? 本來面目是何物
의보 정보의 당체가 다만 이것이니라. 依正當體只這是
자비하신 얼굴을 얻어 보기 어렵다고 이르지 말라. 莫謂姿容難得見
면전에 산과 물이 참다운 부처로다. 面前山水是眞佛
음다 삼십사송으로 다선일여의 경지를 노래하다
차를 마시고 참선함에 의심을 매하지 아니하고 飮茶入禪 疑不昧
잠자고 잠깸에 한결 같아서 마음 홀로 드러나는지라 寤寐一如 心獨露
반조하는 즉시에 조사관을 투득해서 反照卽時 透祖關
한 생각 놓아버림에 본고향에 돌아간다. 放下一念 歸本鄕
3. 지혜(智慧)의 문(門)
계율과 선정, 그리고 경전에 정통한 스님은 이를 바탕으로 전법교화에 매진하였으니, 이른 바 지혜방편까지 구족한 것이다.
* 조계사에 불교합창단을 창설하다
1972년 2월초 총무원장 석주스님의 요청으로 조계사 주지가 된 스님은 법당내부 정리부터 시작해서 실속 없는 꽃 공양을 현실적인 백미공양으로 바꾸었으며, 마침내 불교합창단 창설을 도모한다.
나는 또 한 가지 혁명적인 일을 추진하기로 하고 원장스님을 찾아뵙고 말씀드렸다.
“원장스님! 제가 조계사 주지로서 집행할 터이니 우리 불교도 천주교와 예수교처럼 신명나게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합시다. 그러면 젊은 신도들이나 청소년 학생들이 얼마나 많이 모여들겠습니까?” 나는 마음속으로 얼마나 좋았던지 기쁨을 걷잡을 수 없었다. 우리 불교 믿는 사람도 이제 마음 놓고 신명나게 노래를 부를 수 있으니 말이다. 이리하여 음력 초하루 날 피아노를 치고 지휘자를 불러서 합창을 집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노보살님들이 일제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그만하세요.”라고 외치는 바람에 노래가 중단됐고 내가 마이크를 잡고 아무리 설득해도 노보살들은 막무가내였다. 한 보살이 하는 말이 경상도 무지렁이 젊은 스님이 와서 가장 신성한 법당에서 무슨 경연대회냐면서 불교를 망칠 작정이냐고 난리를 피웠다. 역대 스님 중 어떤 분도 이런 짓을 하지 않았다면서 당장 물러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이 날 노래 집행은 중단되고 초하루 법문을 마치고 나는 손수 등사판에 글을 긁어 직접 등사해서 그 다음날 반대하는 신도들 집에 우편으로 보내고 인편으로도 보내고, 법당에서는 계속해서 노래연습을 강행했다.
나는 한번 하고자 하는 일은 그 누가 반대하고 막아도 하고 마는 성정이어서 계속 연습을 하였던 것이다. 석가모니부처님이 출현해서 못하게 한다면 그만두지만 그렇지 않고는 지금까지 중도에 폐한 일은 없었다. 이러한 의지로 강사와 법사와 포교사와 율사와 선사와 종사와 대종사까지 묵묵히 걸어온 것이다.
일요법회 법문이 끝나고 나는 불교음악에 대해서 말했다.
“부처님 당시에 동방호세 건달바주 지국천왕이 거문고를 튕기고 천녀들이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어 공양을 올린 일이 있으며, 또 가지각색의 재주꾼들이 와서 재주를 연주하여 공양 올린 일도 있으며, 천상음악 즉 범음과 범패로써 공양을 올린 일이 있습니다. 범음과 범패는 어산 이라고도 하는데 지금까지 우리나라에도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불교음악도 시대에 따라 변해야 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에 와서는 이 시대에 맞는 노래가 필요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지금은 반대하지만 10년 뒤에는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들 것입니다. 앞으로 많은 불교 노래를 만들어 부르게 되면 젊은 불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합창단이 생기고 끝없이 노래로써 불교가 크게 발전할 것입니다.”
이러한 법문이 있은 뒤로 조계사에서는 합창단을 만들고, 불교도의 노래를 열심히 부르게 되었다.”
* 동래포교당에서 전국최초로 중고등 학생회를 창설하다
스님은 시대에 맞는 포교로 부처님의 혜명을 이어 전법 도생하고자 하였다. 특히 어릴 때부터 부처님과 인연을 맺어주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전국 최초로 불교합창단과 더불어 학생회를 창설하였다. 범어사 강주로 있던 당시, 범어사 주지였던 성수스님의 요청에 따라 동래포교당으로 가서 학생회를 창설한다.
“신도들의 자녀 가운데 남학생 4명과 여학생 2명, 도합 6명을 설득하여 중고등 학생회를 창설하여 남학생 한 명을 회장으로 시키고 여학생 두 명을 부회장 시켜서 매주 토요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부처님 말씀을 알리는 법문을 해주었다.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학생회 창설이었다. 1969년의 일이었다. 동래포교당에서 중고등 학생회 창설을 듣고 제2차로 온천장 금강사에서 학생회를 창설하고, 제3차로 부산 대각사에서 중고등 학생회를 창설했다. 이어서 네 번째로 강릉포교당에서 학생회를 창설했다. 이렇게 삽시간에 전국으로 확산됐다.”
또한 부산 동래포교당에서도 조계사와 마찬가지로 불교합창단을 창설했다.
“부산 동래포교당은 내가 조계사 주지로서 겸직을 하고 있었기에 동래포교당에도 피아노를 사들이고 법회 날 조계사와 같이 시도했다. 역시 여기서도 서울처럼 신도들이 데모를 했다. 나는 여러 날 설득하고 타일러서 겨우 허락을 얻어 마침내 시행하게 되었다. 이 출발이 바로 우리나라에 범패가 아닌 대중적인 불교음악이 시작된 1972년도다.”
* 쌍계사를 중창하다.
스님은 쌍계사 주지로 부임한 이래 대부분의 건물을 새롭게 중창 또는 개창하여 도량의 면모를 일신하고 대작불사를 지속하였다.
“1974년에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에 피선되었고, 1978년에도 종회의원에 당선되어 종단 발전에 활약했다. 폐사일로에 있던 쌍계사를 부임하는 즉시 응급조치로 부분적인 보수는 했으나 힘에 따라 한 채씩 완전 보수 또는 헌 집을 뜯어버리고 새로운 목재로 중건해 나갔다. 팔상전은 환전해체 중건하고, 명부전도 완전 해체 중건하고, 천왕문· 금강문· 나한전· 적묵당· 삼성각 등은 해체 중수하였다. 육조 정상탑을 모신 금당도 두세 차례 부분적인 보수를 하였으나 한 겨울만 지나면 비가 새고 해서 완전 해체 복원하여 청기와로 덮었다.
쌍계사 주지 재임을 하고 경상남도 도정 자문위원으로 추대되어 복원 불사에 가일층 매진했으며, 불교 홍포에 몸과 마음을 다하여 정진하였다.”
또한 육조(六祖)정상탑(頂相塔)이 모셔진 금당(金堂)의 의미를 확실하게 정립하고, 금당선원의 동·서 방장(方丈)을 새롭게 복원하여 매일 새벽예불 뒤에 수좌들과 함께 직접 정진하였다.
“1982년 중화민국 승려 열다섯 명 일행이 육조정상 동래설(東來說)을 확인코자 지리산 쌍계사에 내방하였다. 그 일행 중 단장이신 본혜스님이 하시는 말씀이 “말로만 듣고 그럴 리가 있는가, 했는데 사실 현지를 답사하고 참배해보니 관연 거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절로 납니다. 왜냐하면 산세가 너무 아름답고 수려한 경관이 천하 절경임을 알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도 말했다. “육조단경에 육조정상을 도난당했으나 도로 찾았다고 했는데, 그것은 불조의 경계를 잘 모르고 하신 말씀이오. 진짜 정상은 이곳에 바로 모셔진 것이고, 도로 찾았다는 것은 머리가 또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본혜스님은 또 “과연 그건 것 같다. 금당에 들어서는 순간 저절로 머리가 숙여지고 존경심이 솟아나는 것을 보니 진짜 정상이 모셔진 것이 분명한 것 같다”고 했다. 나는 이어서 “이 정상탑에서 수시로 방광하여 중생을 깨우치는데, 제가 주지로 온 뒤에도 세 차례나 방광하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참배단 일행은 너무나 감격하여 일주일간 유숙기도 정진하고 본혜스님은 ‘육조정상참배기념비명’을 지어 기념비를 세워줄 것을 부탁하고, 비석머리에 ‘알조비기(謁祖碑記)’라고 간단한 참배기를 적어서 중화민국이라고 표해달라고 했다. 그 뒤 나는 바로 비석을 세워서 쌍계사 비전에는 지금도 잘 보존되고 있다.”
“1986년 동·서 방장을 복원하여 수행자들의 정진 수도장을 만들고 보니 환희심이 절로 났다. 삼동결제 때 수자 7~8명을 방부 받아 동·서 방장에 정진케 하고 나는 틈나는 대로 서 방장에 들어가 같이 정진했다.”
이와 더불어 쌍계사 산내암자인 국사암을 중건하고 불일암을 복원해 마쳤다. 또한 지리산록에 차나무 시배지를 복원하고 선다일여(禪茶一如)의 정신으로 다맥을 되살려 전수하였다.
4. 전법도량 불사
위와 같이 삼학을 구족하고 발현하던 스님은 마침내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전법도량 불사에 매진하게 된다. 스님은 석왕사와 혜원정사, 그리고 연화사를 창건하게 된 소회를 다음과 같이 피력하고 있다.
“사회나 종교계나 인정사정없는 냉혹함은 매한가지였다. 나 역시 본사를 위해서 1948년도부터 1954년까지 6년간 별좌와 도감, 원주소임을 무보수로 헌신하고 노력했으며, 또 1968년부터 1971년까지 3년간 강주 겸 총무, 공사 총감독까지 몸과 마음으로 다하여 노력했건만 본사 승려로서 어느 뒷방이라도 하나 주지 않고 내쫒고 마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본의 아니게 석왕사와 혜원정사, 연화사를 창건하게 되었다.”
* 석왕사를 창건하다
스님은 1976년 3월 15일, 부천 석왕사를 창건했다.
“부천 원미동에 터를 잡고 가람 불사를 시작했다. 처음에는 나를 따르던 약 20명의 신도가 모여 천막을 치고 법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가건물을 짓고 법회를 하면서 인법당 겸 해서 사용할 수 있는 육화전을 지었다. 육화사상으로 신도대중이 모두 화합하여 가정이 화목하고 나라가 화목하고 세계가 하나가 되는 세계일화를 주창하기 위한 것이었다.”
* 혜원정사를 건립하다.
1976년 2월 3일, 부산 혜원정사를 창건했다.
“해외순방을 마치고 돌아오니 부산 동래포교당 신도들이 지금 혜원정사 부지 임야 6천 평을 사놓고 내가 오기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와서 둘러본 결과 작은 암자 부지로 쓸 만했다. 그래서 사찰건립을 허락하고 남의 산소 등에서 한 달에 한 번씩 법회를 열기로 하고 처음 15명이 모인 가운데 법회를 열었다. 다음 달에는 30명, 또 그 다음달에는 70명, 이렇게 해서 나중에는 이 노지에서 150여명의 신도가 항상 모여 법회를 봉행하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천막을 치고 하다가 가건물을 짓고 가건물에서 육화전을 짓게 되고 다시 대웅전을 짓고 연차적으로 건립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1976년 2월 허가를 득하여 사찰 건립을 시작했다.”
1988년 혜원정사 대웅전을 짓고 준공 회향일에 시를 지으니 다음과 같다.
신도 성금을 모으고 재물을 모은 지 십여 년에 募緣勤搆十餘年에
심력을 다하여 큰 가람을 완성하니 盡力完成大伽藍하니
묘봉산 기슭 크게 불연이 있는 곳에 妙峰山麓大化處에
우담바라 꽃이 곧 스스로 피었도다.“ 優曇鉢花卽自開로다
* 연화사와 보덕암을 창건하다
스님은 1998년 8월 31일, 통영시 연화도에 연화사를 창건했다.
“1981년과 1996년도에 전국 성지를 순방하던 중 연화도인의 시구에 따라 욕지도· 연화도· 두미도· 문도· 세존도를 답사하다가 연화장세계를 상징하는 연화도에 와서 사흘을 답사해도 연화정은 고사하고 불교의 자취도 찾지 못하고 혼자 생각하기를 연화도인이 앞으로 몇 백 년 뒤에 고산이라는 수행자가 연화장 세계를 건립할 것이라는 예언으로 즉감하고 내가 이곳에 대가람을 세우리라 불보살님께 발원하고 부지를 매입하기 시작했다. 그 후 약 15년간 팔려고 한 땅을 계속 매입하여 약 2만여 평이 되었을 때 연화사 건립을 시작하니 그때가 바로 1996년이다. 만 3년이 걸려서 완성하니 1998년이었다.”
그 후 다시 2004년 9월 21일, 연화도에 보덕암을 창건했다.
“2002년에 기초공사를 시작해서 2004년 9월 21일에 보덕암을 완공 회향했다. 처음 시작할 때 10억 원 예산을 책정했는데 도로개설 포장에 7억 원, 기초공사에 2억 원, 비석· 석등· 주차장 시설에 1억 원, 건축공사에 10억 원, 총합계 20억 원으로 완성해 망망대해 해안고절처에 관음성지가 이뤄져서 많은 불자의 소구여원과 선불장이 되었다.”
맺음말
이 글을 쓰기 위해 큰스님 관련 자료를 이리 저리 찾으면서, 생전에 미처 듣지 못하고 알지 못했던 내용을 많이 알게 되었다. 이미 어느 정도는 겪어서 알고 있었지만, 어찌 그리도 계율을 엄수하고, 선정에 투철하였으며, 지혜가 출중하셨는지 감탄을 금할 길 없다. 한 마디로 계· 정· 혜 삼학을 골고루 갖추고 발현하셨던 것이다. 어디로 출가할지 고심하던 필자에게 고산 큰스님 밑으로 출가할 것을 강력히 권하신 어머니 말씀대로 ‘진짜 큰스님’이셨던 것이다.
불교의 삼학인 계· 정· 혜 가운데 한 가지만이라도 제대로 갖추기 어려운데, 세 가지를 모두 갖추도록 얼마나 고난이 많았으며, 평생을 얼마나 부지런히 정진하셨던 것일까? 대선사이자 대강사이며 대율사였던 큰스님의 경지는 필설로 다할 수 없다. 다만 그 단편만을 엿보고 전할 수 있을 따름이다.
또한 수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셨으니, 출가자와 재가자로서 스님의 가르침을 받고 감화를 받은 이는 일일이 셀 수 없을 정도이다. 그런데 이렇게 훌륭하신 큰스님께 강맥(講脈)을 전수받은 필자는 도대체 무슨 복이었던가? 감히 큰스님의 유지를 얼마나 이어갈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마지막으로 큰스님께서 손수 육필로 작성하신 임종게의 ‘다음을 기약한다’는 말씀대로, 다시 이 땅에 돌아오셔서 삼학으로써 중생들을 널리 제도하리라 확신하는 바이다.
봄이 오니 삼라만상 생기가 약동하고 春來萬像 生躍動
가을 오니 거둬들여 다음을 기약하네. 秋來收藏 待次期
내 한 평생 아바타 노릇 我於一生 幻人事
오늘 아침 거두고 본래 자리 돌아가네. 今朝收攝 歸故里
출처 : 행불선원
작성자 : 달빛산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