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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광대사 편지설법] 모음 -(유명했던 사계선사도, 결국 초과조차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걸 알수가 있소) -모음

작성자아미연|작성시간20.09.20|조회수152 목록 댓글 6

[인광대사 편지설법] 모음 -(유명했던 사계선사도, 결국 초과조차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걸 알수가 있소) -모음

*책: [의심 끊고 염불하세]-저자 김지수, 불광출판사

*출처: 보적념불당 (다음블로그)寶積念佛堂 (tistory.com)

          천인대동전당 (네이버 블로그)https://blog.naver.com/lotusbud44/221456324097

 


***화범 거사에 대한 답신 (유명했던 사계선사도, 결국 초과조차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걸 알수가 있소) :

화범(化凡) 거사에 대한 답신

 

화범(化凡) 거사 보시오.

보내온 편지는 잘 받았소. 정토 법문은 불법 가운데 특별한 법문이라, 전생에 청정한 인연(因緣)을 맺지 않은 사람은 자못 믿음을 내기 어렵다오. 선사(禪師)들은 마음을 밝히고 성품을 보아[明心見性] 부처가 된다고 영웅처럼 자처하고, 강사(講師)들은 교리(敎理)와 관법(觀法)을 널리 설하여 전파하는 것으로 자부심이 대단하오. 그래서 이들은 정토 법문을 중생들에게 소개하거나 권장하려고 마음먹기는커녕, 오히려 온 힘을 다해 적극 배척하고 헐뜯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라오.

말법(末法)시대의 중생은 정토 법문을 만나지 못하면, 설령 마음을 밝히고 본성을 보거나 또는 교리와 관법에 깊숙히 통달한다고 할지라도, 번뇌와 미혹을 완전히 끊지 않는 한 누구도 생사 륜회를 해탈할 수 없소.

나는 숙세의 업장이 몹시 무거워서, 태어난 지 여섯달 만에 눈병을 앓아, 그로부터 180일 동안 한쪽 눈도 떠보지 못했다오. 숨쉬고 젖 먹는 것을 빼놓고는, 밤낮으로 계속 울어 대기만 했다는 거요. 그 뒤 병이 나아 하늘을 볼 수는 있었지만, 서당에 나가 글공부를 하기 시작하면서, 한유(韓愈)와 구양수(歐陽修), 정자(程子)와 주자(朱子)가 불교를 비방하고 배척한 문장의 해독(害毒)에 그만 나도 모르게 중독되고 말았소. 다행히 그러한 대유학자들과 같은 재주가 없었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도 불법을 비방하고 그 죄로 지옥에 떨어지는 악보(惡報)를 받았을 것이 틀림없소.

그 뒤로 그들의 주장이 틀렸다는 사실을 알고, 그로 말미암아 곧 출가하게 되었소. 그러나 참선과 교리의 문은 너무도 높아서 내 능력으로는 들여다 볼 엄두도 못내고, 오직 부처님의 자비에 기대어 극락 왕생하기를 기원하게 되었다오. 20년 전 보타산(普陀山) 법우사(法雨寺)에 잠시 얹혀 한가한 직책을 맡은 적이 있을 뿐이오. 그러나 ‘인광(印光)’ 두 글자는 절대로 붓과 종이로 드러난 일이 없어서, 시끄럽지 않고 안락하게 지낼 수 있었소.

그런데 1917년(民國 6년) 어떤 두 사람이 내가 아는 이들에게 보냈던 편지들을 수천 부 인쇄하여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듬해 서울여(徐蔚如)가 내 『문초(文崇: 印光大師 법문집)』를 인쇄하여 배포하게 되었소. 그 뒤로는 매일같이 한가한 겨를이 없게 되었다오. 그러나 나는 찾아오거나 편지 부쳐 오는 사람들에게 한결같이 단지 정토 법문을 이야기해 주며, 나는 그밖에는 전혀 아는 게 없는 무식쟁이라고 말했을 따름이오.

그대가 이미 『안사전서(安士全書)』와 『요범사훈(了凡四訓)』 그리고 내 『문초』를 읽었다면, 이들 내용에 따라 스스로 실행하여 남들까지 교화시켜 나가면, 그걸로도 넉넉하고 오히려 남음이 있을 것이오. 만약 이밖에 더 선종(禪宗)과 교리(敎理)를 연구하려고 든다면,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대가 선가(禪家)의 말들이 미묘하고 불경의 교리가 심오함에 이끌려, 그만 정토 법문을 한 번 쓰고 내버리는 휴지 조각처럼 멸시하지나 않을까 저어할 따름이오. 그러나 참선이나 교리 연구가, 오히려 다른 것은 한 가지도 모르면서 단지 착실하게 한 마음으로 꾸준히 계속하는 념불만도 훨씬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 두시오.

나는 많이 늙어서 시력과 정신이 모두 부치니, 다음부터는 지극히 중요하고 절박한 일이 없거들랑 편지하지 마시오. 편지를 볼 시력과 답장 쓸 기력이 없기 때문이오.

이번에 그대에게 사원(師遠)이라는 법명을 지어 보내오. 원(遠)은 곧 진(晋)나라 때 려산(廬山)의 혜원(慧遠) 대사를 가리키오. 그분이 련종(蓮宗: 정토종)을 처음 일으켜 세운 시조이신데, 그 혜원 대사[遠]를 스승으로 삼아서[師], 지금 유행하는 여러 종파의 지식(知識)들에게 마음이 혹하거나 흔들리지 말라는 뜻이오.

요즘 세상에 불교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모두 깨달음[開悟]을 최고의 목표와 일로 삼고 있소. 깨달아도 증득(證得)하지 못하면, 생사 해탈의 큰 일은 전혀 마무리될 수 없음을 모르는 게요. 설사 초과(初果: 수다원)나 2과(二果: 사다함)·3과(三果: 아나함)를 증득한다고 할지라도, 여전히 생사 륜회 가운데 있게 되오. 다만 그들은 향상만 있지 후퇴나 하락은 결코 없는 것뿐이오. 그러나 초과조차 증득하지 못한 사람은 다음 생에 복을 누리다가 죄업을 지으면 영원히 삼악도에 떨어지기 십상이오. 4과(四果: 아라한)를 증득한 자라야 비로소 생사를 완전히 끝마칠 수 있소.

이는 소승(小乘)의 수행으로 말한 것이고, 대승(大乘)의 궁극 이상인 원만한 교리(圓敎)로 말한다면 조금 달라지오. 대승에서 보는 미혹을 끊는[斷見惑] 초신(初信)은 초과(初果)와 같소. 그러나 생각하는 미혹까지 모두 끊어 없앤[斷思惑盡] 7신(七信)의 경지에 이르러야 바야흐로 생사 륜회를 벗어날 수 있게 되오. 그러니 초신부터 6신까지는 아직도 생사를 다 끝마친 게 아니라오. 초신 경지에 든 보살의 신통력과 지혜만도 이미 일반 범부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인데, 하물며 2·3·4·5·6신의 지위야 말할 나위가 있겠소?

참선하는 사람들은 매번 선가에서 칼끝처럼 날카롭고 기민(機敏)하게 던지는 말에 정토종이나 교종의 수행인들이 모두 대답할 줄 모르는 것을 보고는, 자기네 도가 매우 높고 미묘하여 다른 사람들이 알 수 없는 경지라고 생각하는 것 같소. 그러나 사실인즉 이러한 생각을 하는 사람들도 옛 사람의 뜻을 잘 모르는 것이오. 만약 정말로 안다면, 그들은 반드시 영웅으로 자처하거나 자부하는 빛이 전혀 없게 되오.

왜 그런가 하면, 그토록 몹시 미묘한 말도 사실은 지극히 평범한 일상의 말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오. 그러한 미묘한 말의 뜻을 알 뿐만 아니라, 설사 확철대오(廓徹大悟)한다고 할지라도, 생사 륜회의 큰 일을 다 해결하는 것은 아니라오. 모름지기 완전히 증득한 경지까지 곧장 올라서야 비로소 일을 끝마치는 것이오. 그러나 후세에 증득한 경지까지 이른 사람은 사실 그렇게 많이 찾아볼 수가 없소.

오조사(五祖寺)의 사계(師戒) 선사는 송(宋)나라 초기에 천하에 명성을 떨친 훌륭한 분이오. 그분의 문하는 매우 높고 넓어 마치 용문(龍門)을 방불케 했소. 그런데 그 스님이 사후에 소동파(蘇東坡)로 다시 태어난 거요. 소동파는 과연 전생의 수행공덕과 지혜로 말미암아 그 문장이나 식견이 모두 비범하게 뛰어났으며, 자질구레한 체면치레에 얽매이지 않는 호방함을 보였소.

그런데 그가 항주(杭州)에 재직할 때 곧잘 기생들을 불러다 어울려 놀았다는 거 아니요? 이를 보면 그토록 유명했던 사계 선사도 결국 초과조차 아직 증득하지 못했다는 걸 알 수가 있소. 왜 그런가 하면, 초과를 증득한 사람은 도공계(道共戒) [도공계(道共戒): 3가지 계률 가운데 하나로, 성문·벽지불·보살 삼승(三乘)의 성인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선정에 들어 무루의 지혜와 함께 저절로 몸에 갖추는 무루의 계률인데, 무루의 도(道)와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뜻에서 도공계(道共戒)라 부름.]를 얻어 저절로 계률을 지키므로, 어떻게 하든지 계률을 범하지 않게 되기 때문이오.

[도공계(道共戒): 3가지 계률 가운데 하나로, 성문·벽지불·보살 삼승(三乘)의 성인이 번뇌가 없는 무루(無漏)의 선정에 들어 무루의 지혜와 함께 저절로 몸에 갖추는 무루의 계률인데, 무루의 도(道)와 함께 생겨나고 사라진다는 뜻에서 도공계(道共戒)라 부름.]

[유가에서 공자가 나이 일흔에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 따라 행해도 법도를 벗어남이 없었다고 하는데, 바로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이 도공계 경지에 해당할 듯함.]

만약 출가하지 않고 결혼을 하는 경우라면, 설령 목숨을 끊겠다는 위협으로 사음(邪淫)을 강요해도, 차라리 죽을지언정 사음의 계률을 절대 범하지 않는 정도라오.

참선하는 사람들이 만약 이러한 리치를 안다면, 어떻게 정토 법문을 감히 무시하겠소? 선종만 높이 추앙한 나머지, 어리석은 범부와 아낙네들이나 부처님 힘에 기대어 극락 왕생하라고 내맡기며, 자신들은 생사 륜회를 달게 받아들여 벗어나기를 바라지 않겠단 말이오? 내가 이런 말을 굳이 하는 까닭은, 행여라도 그대가 이러한 리치를 잘 몰라서 참선하는 사람들의 미묘하고 고상한 말에 휩쓸려, 그만 부처님의 자비 가피력을 내버리고 자신의 힘[自力]에 기대려고 잘못 생각할까봐, 걱정스러워 미리 훈계해 두는 거요. 만약 그런 어리석은 판단 착오를 저지른다면 생사 륜회는 당나귀 해나 되어야 벗어날 수 있을 게요.

 

[미래세가 다하도록 12간지에 없는 당나귀 해가 찾아올 리는 만무하다.]

 

그대가 편지 끝에 붙인 게송(偈頌)에서 나를 지나치게 높이 추어올려 부끄럽기 짝이 없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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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 )

 

양종신 거사에 대한 답신 (착한일을 하거나 나쁜일을 저지르는것은, 마치 곡식을 심는일과 같소) :

양종신(楊宗愼) 거사에 대한 답신

 

종신(宗愼) 거사 보시오.

보내 온 서신은 잘 받아 보았소.

세간의 어리석은 사람들은 인과(因果) 법칙을 잘 모르기에, 착한 일[善]을 하고도 화(禍)를 당하는 걸 보면 곧 착한 일은 할 것이 못 된다고 말하는가 하면, 나쁜 짓[惡]을 저지르고도 복(福)을 얻는 걸 보면 곧 나쁜 짓도 굳이 멀리할 필요가 없다고 일컫는구려.

이는 화와 복의 결과가 더러는 금방 들이닥치고 더러는 오랜 뒤에 나타나는 줄을 모르기 때문이오. 닥치는 시기가 이르고 늦음은 일정한 기준이 없어서, 빨리는 모든 사람이 함께 지켜보도록 드러나고, 늦게는 한 생(生: 생명륜회)을 거치거나 또는 여러 생을 지난 다음에야 비로소 나타난다오. 그래서 숙명통(宿命通)의 안목을 지닌 자가 아니면 알아볼 수 없단 말이오.

이제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한 비유를 들자면, 착한 일을 하거나 나쁜 짓을 저지르는 것은 마치 곡식을 심는 일과 같소. 어떤 사람이 비록 아무리 착하다고 할지라도, 전생에 지은 행위가 전혀 잘못이 없을 수는 없기 때문에, 금생(今生)에 받는 과보(果報)도 역경(逆境)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금생에 타고난 이 몸은 보신(報身)이라고 하는데, 이는 금생에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또는 아름답거나 추악하거나, 또는 장수와 요절, 가난과 부유, 총명과 우매, 건강과 질병 따위를 타고나는 것은 모두 전생에 짓고 저지른 행위에 따라 받는 과보이기 때문이오. 따라서 이 몸을 보신이라고 하는 것은, 곧 그것이 전생에 지은 행위의 과보로 받은 몸임을 일컫지요. 즉 전생의 원인이 금생의 결과가 되는 것이라오.

금생에 비록 몹시 착하다고 할지라도, 전생의 업장(業障)이 너무 무거우면 금생의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곧장 받을 수는 없으며, 먼저 전생의 나쁜 짓에 대한 앙갚음을 받아야 하는 것이오. 이는 마치 농부가 작년에 씨앗을 뿌리지 않았다면, 설령 올해 제 아무리 부지런히 농사 짓는다고 할지라도, 가을걷이 전에는 먹을 양식이 없는 것과 같소.

지금 양식이 없는 것은, 올해 부지런히 농사 짓더라도 아무 수확이 없다는 말이 아니오. 지금 양식이 없는 것은, 바로 작년에 씨앗을 뿌리지 않은 원인으로 말미암아 받는 결과라는 뜻이쟎소? 물론 올해 부지런히 경작하면, 가을걷이 이후와 내년에는 먹을 양식이 있을 것이 분명하오.

마찬가지로, 나쁜 짓을 저지르는 자들이 아직 벌[禍]을 받지 않은 것은, (전생에 지어 놓은) 복이 아직 다 떨어지지 않고 남아 있기 때문이오. 마치 작년에 부지런히 씨 뿌려서 수확한 농부는, 설령 올해 농사 짓지 않아도 아직은 굶주림에까지 이르지는 않는 것과 같소. 그러나 작년에 남은 양식을 다 먹고 나면, 올해는 씨앗도 뿌리지 않았으므로 장차 곡간이 바닥날 것은 뻔하오.

착한 사람이 나쁜 과보를 받는다고 해서 만약 착한 일을 아예 안 한다면 장차 그 나쁜 과보는 더욱 심해질 것인데, 그나마 착한 일을 열심히 해서 나쁜 과보가 그만큼 가볍게 줄어든다는 리치를 우리는 반드시 알아야 되지요. 마찬가지로, 나쁜 사람이 좋은 과보를 누리는 경우, 만약 나쁜 짓을 안 한다면 그 좋은 과보가 더욱 커질 텐데, 안타깝게도 그가 나쁜 짓을 저지르기 때문에 그의 좋은 과보가 그만큼 줄어들고 말겠지요.

세상 사람들은 의식주와 같이 몸뚱아리에 바치는 물건에 대해서도, 모두 넉넉히 갖추어 두고 행여 다 떨어져 곤란을 당하는 일이 생길세라 자나깨나 걱정할 줄 알지요. 그런데 정작 육신과 심성(心性) 및 생명 자체의 중대한 일에 대해서는, 스스로 미리 닦아[預修] 둘 줄 모를 뿐만 아니라, 남들이 미리 닦아 준비하는 것조차 도리어 어리석다고 비웃고, 자신은 제 멋과 기분 내키는 대로 살상과 음욕을 자행(恣行)하면서도, 복 있고 지혜로운 것으로 착각한단 말이오.

그러나 세상에 그 많은 봉사와 귀머거리와 벙어리, 또는 심한 불구와 장애로 의지할 곳도 없는 사람들이나, 마소나 양·돼지와 같이 사람들에게 고되게 부림 당하고 심지어 도살되어 사람들의 입과 뱃속을 채우고 마는 온갖 축생들이, 모두 전생에 스스로 복 있고 지혜롭다고 착각하면서 나쁜 짓을 자행하던 그런 사람들이 자칭 복과 지혜의 결과로 받은 정말 좋은 과보인 줄을 누가 알 것이오?

수행(修行)을 하는 사람은 모름지기 결연하면서도 강렬한 마음[決烈之心]을 가지고, 그러한 자들의 비웃음이나 비방에 아랑곳하지 않으며, ‘나는 어떠한 경우에도 끄떡없고 결코 의심 걱정 안 한다’는 태도를 지켜야 하오. 만약 남의 비웃음이나 비방을 듣고서 곧 물러설 마음을 품는다면, 이러한 사람 또한 전생에 심은 착한 뿌리[善根]가 너무 얕거나 들떠 있기 때문에 초래된 과보라오.

부처님의 설법에 귀의하지 아니하고 범부(凡夫)나 어리석은 아낙네[愚婦]가 지껄이는 말에 의지한다면, 이러한 사람은 진실로 오랜 세월 동안 생사 륜회(生死輪廻)를 거치면서 영구히 삼악도(三惡道)의 고통을 받게 될 것이오. 인간이나 천상의 몸을 받는 일도 오히려 몹시 어렵거늘, 하물며 생사를 해탈하고 평범을 초월하여 성현의 경지에 들어서며[超凡入聖] 마침내 성불(成佛)하는 커다란 이익인들 꿈에라도 바랄 수 있으리요?

정토(淨土)의 법문은 진실한 믿음[眞信]과 간절한 서원[切願]과 부처를 염송하는 행동[念佛]으로 서방 극락세계에 결정코 왕생하겠다는 것이 그 핵심 요지지요. 만약 념불하는 사람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는 부처님의 가르침에 어긋나게 되오.

한 가지 비유를 들어 봅시다. 가령 어떤 왕자가 다른 나라를 떠돌아다니면서 자신이 왕자라는 사실을 믿지도 않고, 다만 하루 동안 음식을 빌어 먹을 수 있기만 바랄 뿐, 굶어 죽지 않는 것으로 기뻐하고 만족한다면, 그 식견이 너무 낮고 졸렬하여, 사람들이 그를 불쌍하고 가엾게 여기지 않을 수 있겠소?

그런데 왕고씨(王高氏: 자신은 高씨이고 남편의 성이 王씨인 어떤 부인을 일컬음)가 불교 경전을 훤히 잘 알면서도, ‘감히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망상(妄想)을 할 수 없다’고 말한다니, 그 마음과 뜻이 어찌 그처럼 지극히 낮고 졸렬한 정도에까지 이르렀단 말이오? 그가 평소에 가까이 한 스승이 또한 눈먼 수련[盲修如煉]이나 하는 무리임에 틀림없소이다. 만약 그 스승이 정토의 법문을 안다면, 어떻게 그가 이토록 오래 이런 생각에 잠겨 있겠소?

그에게 대신 말해 주기 바라오. 만약 서방 정토에 왕생하려고 발원하지 않는다면, 나도 그냥 귀의를 허락하여 나 자신의 명예를 망가뜨리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기꺼이 서방 정토에 왕생하려고 열망하는 경우에만 귀의를 허락하며, 지금 바로 그에게 종신(宗信)이라는 법명(法名)을 지어 보내오. 부처님 말씀을 깊이 믿고 감히 어기지 않으며, 스스로 청정한 행위[淨業]를 닦아 나가라는 의미요.

물론 자녀와 며느리·손자들도 가르치고 일깨워, 가족 모두 함께 인륜을 돈독히 하고 직분을 다하며[敦倫盡分], 간사함을 막고 정성을 간직하며[閑邪存誠], 어떠한 나쁜 짓도 저지르지 말고 온갖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며[諸惡莫作, 衆善奉行], 살상을 끊고 산 목숨을 보호하며[戒殺護生],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의 성호(聖號)를 염송하여, 금생에 업장이 소멸하고 복록이 증대되며, 림종에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도록 닦아 나가야 할 것이외다.

이와 같이 스스로 수행하면서, 아울러 가정과 친척·친구들에게까지 그 감화를 미친다면, 반드시 소원대로 극락 왕생하리다.

부처님께서 정토의 법문을 열어 놓으신 까닭은 중생들에게 극락 왕생을 바라도록 가르치기 위함인데, 그대들이 어떤 사람이길래 감히 부처님 말씀을 옳다고 여기지 않고, 각자 제 멋과 뜻에 맡기려 한단 말인가? 그러므로 모름지기 한결같이 부처님 말씀을 으뜸가는 주체와 근본[宗主宗本]으로 삼아, 이를 굳게 믿고 받들어 행하면서 한 생각이라도 감히 어긋나지 않으려고 힘써야만, 바야흐로 종신(宗信)이라는 법명을 일컬을 수 있겠소이다.

그의 딸 호왕씨(胡王氏: 아버지 성이 王씨이고 남편 성은 胡씨인 부녀)는 법명을 종정(宗淨)이라고 지어 보내오. 세간의 부부와 자녀 가족은 모두 전생에 맺은 업장의 인연[業緣]이 아닌 게 없소이다. 그의 남편은 일찍 사망하고 아들 또한 장가도 못 들고 요절하였으며, 딸은 시집갔으나 청상과부가 되었다고 하니, 일반 세속의 인정(人情)으로 말한다면, 몹시 불행한 운명이라고 탄식하겠죠? 그렇지만 만약 이러한 운명으로 말미암아 세상의 모든 현상이 덧없는 줄 깨닫고 수행에 전념할 수 있다면, 이러한 모든 고난의 상황이야말로 진실로 생사고해(生死苦海)를 벗어나도록 채찍질하는 훌륭한 안내자가 되기도 한다오.

저기 부귀한 자들을 보시오. 부모 자녀 온 가족이 둥그렇게 모여 앉아 온통 먹고 지껄이며, 시집 장가 들고 자식 손자 낳는 데에 정신을 쏟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지 않소? 그들은 설령 한 마음[一心]으로 념불하고 싶어도, 결국 뜻대로 이룰 수 없는 운명이오.

그(王高氏)가 이러한 생각을 하면서 자기 딸에게도 한 마음으로 념불하도록 가르쳐 준다면, (이미 세상을 떠난) 그의 남편과 아들과 사위가 모두 그의 도업(道業)을 도와 주는 착한 인연으로 바뀔 것이외다. 또한 그가 정말로 극락 왕생에 전념한다면, 그의 남편과 아들과 사위도 또한 그의 수행 공덕을 인연으로 함께 서방 정토에 왕생할 수 있소이다.

바로 이러한 인연을 두고 일컬어, “금은 제련할수록 정밀해지고[金以煉精] 칼날은 갈수록 날카로워진다[刀以磨利].”고 하는 게요. 또 “한 철 뼛속 스미는 추위를 겪지 않으면, 그윽한 매화 향기가 어떻게 콧속을 후빌 수 있겠는가[不經一番寒徹骨, 爭得梅花撲鼻香]?”라고 일깨우는 격언도 있잖소?

하늘이 사람을 성취시키는 데에는 역경(逆境)이 있고 순경(順境)이 있기 마련이오. 사람이 운명을 깨닫고 하늘을 즐겨 따른다[樂天知命]면 역경이 도리어 순경도 될 수 있지요.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물론 순탄한 운명도 오히려 역경으로 뒤바뀌게 되나니, 이 모든 것은 사람이 마음을 잘 쓰느냐 잘못 쓰느냐에 달려 있을 따름이오.

또한 지금은 세상의 도덕이 몹시 어지러운 환난의 시대라오. 총칼이나 물불·전염병·독충의 재앙들과, 각종 원한의 업장[怨業]으로 말미암아 현대 의약으로도 고칠 수 없는 질환들이 얼마나 많소? 그러나 이들도 만약 아미타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을 기꺼이 지성(志誠)으로 염송한다면, 흉악한 재난을 당해서도 틀림없이 평안무사하게 풀어지게 된다오.

또 임산부가 아이를 낳으려는 순간에 반드시 소리를 내어 ‘나무 관세음보살(南無觀世音菩薩)’을 염송한다면, 결코 난산(難産)은 없을 것이오. 설령 난산하여 금방 죽을 지경이라도, 그 임산부에게 ‘나무 관세음보살’을 일념으로 낭송하도록 시키면, 즉각 평안히 몸을 풀 수 있게 되오. 이 방법을 모든 사람에게 말해 주어 알고 실행하도록 한다면, 세상에는 난산이나 난산으로 말미암아 산모와 아이가 함께 죽는 불행한 일이 곧 없어지겠지요.

해산(解産)의 경우에는 알몸을 드러내어 정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소리내어 염송하는 것이 혹시 불보살께 죄가 될까 두렵다는 식의 말은 일절 꺼내서도 안 되오. 왜냐하면, 이러한 때에는 산모와 아기의 목숨이 바로 경각에 달려 있어 달리 어찌할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기 때문에, 평상시 념불처럼 공경과 정결을 갖추어야 한다고 견주어 말할 수 없는 것이오.

또 이 때에는 반드시 낭랑히 소리내어 염송해야 하지, 마음속으로만 묵송(默誦)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하오. 마음속으로만 묵송하면 불보살의 감응력(感應力)이 작을 뿐만 아니라, 온 힘을 다 써서 아이를 내 보내야 하는 마당에 마음속으로만 묵송하다가는 자칫 병을 초래할 수도 있기 때문이오. 물론 방 안에서 출산을 보살펴 주는 사람도 큰 소리로 염송하여 그를 도와주고, 방 밖에 있는 가족 친지들도 또한 소리내어 념불하여 산모를 정신상으로 지원해 주면 더욱 좋겠지요.

여자들이 어려서부터 념불하는 버릇을 길들이면, 나중에 이러한 고통은 결코 생기지 않으며, 장차 림종 시에는 극락왕생할 수도 있소. 그러나 그렇지 못한 경우라도 임신을 한 때부터 염송하거나, 혹은 출산하기 사나흘 전부터라도 지성으로 하면 모두 되오.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남의 착한 생각[善念]을 가로막기 일쑤지요. 예컨대, 산모가 아이를 낳으려고 할 때, 모두가 이를 두려운 일로 여기고, 산모 자신이 감히 념불할 엄두를 내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 시어머니나 친정어머니조차도 며느리나 딸이 애 낳을 때가 되면, 미리 이를 피해 밖으로 달아났다가 한 달쯤 지난 뒤에야 바야흐로 되돌아올 생각을 한단 말이오. 이러한 것은 모두 외도(外道)의 영향을 받아, 단지 평상시 공경을 다해야 한다는 원칙의 도리만 알고, 특수한 사정에 따라 시의(時宜) 적절히 대응하는 변통의 방법은 모르기 때문이오. 그로 말미암아 세상의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극심한 고통을 받거나 심지어 사망하였겠소? 그러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소?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함께 적어 세상 사람들을 조금이나마 이롭게 하길 바라는 마음이라오.

 

 

곽혜융 거사에 대한 답신 (우선 눈앞만 쳐다보기때문에 전쟁에 이긴 나라가 이익을 보는것 같지요. 그러나 내생과 후세와 받을 과보까지 합쳐서 전체로 살펴본다면) :

곽혜융(郭慧融) 거사에 대한 답신

 

혜융(慧融) 거사 보시오.

지금 서양에는 전쟁이 치열한 모양인데, 만약 금방 끝나지 않는다면, 중국에까지 번져올까 걱정되오. 동서양 여러 나라가 국력의 강약이 서로 다르지만, 전쟁으로 받는 피해는 정말 모두 똑같소이다. 전쟁에 진 나라만 피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이겨서 당장 이익을 보는 나라도 실은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오.

남에게 피살된 사람이 불쌍할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일부러 사람 죽이기를 일삼는 자들은 더욱 불쌍하기 짝이 없다오. 그들은 우선 눈앞만 쳐다보기 때문에 전쟁에 이긴 나라가 이익을 보는 것 같지요. 그러나 그들이 내생과 후세에 받을 과보까지 합쳐서 전체로 살펴본다면, 사람을 죽인 자는 피살된 사람보다 그 고통이 만 배나 훨씬 넘는다오. 안타깝게도 세상 사람들이 모두 이러한 리치에 깜깜할 뿐이라오.

강소성(江蘇省)-->[산서성(山西省)]의 청량산(淸凉山: 오대산(五臺山의 별칭) 역사를 기록한 「청량산지(淸凉山志)」에는 이런 이야기가 실려 있소.

수(隋)나라 때 대주(代州)에 조량상(趙良相)이라는 대갑부가 있었다오. 두 아들을 낳아 큰애는 영(盈)이라고 이름 짓고 작은애는 맹(孟)이라고 불렀는데, 영은 강하고 맹은 아주 약했소. 그가 죽을 때 가산(家産)을 둘로 나누어 주었는데, 맹에게 나은 몫을 주었소. 그런데 아버지가 죽자, 큰아들 영이 맹의 가산까지 독차지하고, 맹에게는 집과 텃밭만 주었소. 그래서 맹은 품팔이로 겨우 살아갈 정도였다오.

그런데 머지않아 영이 죽어 아우 집의 아들로 태어나 환(環)이라 불렀는데, 또 얼마 안 되어 맹도 죽어 형 집의 손자로 태어나 선(先)이라고 불렀소. 환은 영의 집안에서 머슴살이를 하였는데, 한 번은 선이 오대산(五臺山)에 행차하면서 환에게 자기를 따라 시중들도록 분부했지요. 환은 큰아버지가 자기 집안 재산을 모두 독차지한 일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 손자인 선을 죽이려고 벼르던 참에, 마침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소.

행차가 오대산의 어느 외진 곳에 이르렀을 때, 환은 숨겨 두었던 칼을 갑자기 꺼내 들고 선을 위협했소.

“너의 할아버지가 우리 가산을 모두 독차지하여, 우리는 집안 대대로 몹시 곤궁하다. 그러니 나는 지금 너를 죽여 집안의 원한을 풀어야겠다.”

선이 깜짝 놀라 부랴부랴 달아나자, 환이 그 뒤를 쫓아갔소. 그러다 마침 어느 초가집으로 들어갔는데, 한 늙은 스님이 나와 말리는 거였소.

“이곳에서는 끔찍한 일을 저지르면 안 되오.”

그러자 환이 자기는 원수를 죽이려고 할 따름이라고 대답했다오. 이 말을 들은 늙은 스님이 두 사람을 자리에 앉히고 나서, 차 한 잔씩을 따라 주며 마시게 했어요. 어찌된 일인지, 두 사람이 차를 받아 마시고 나더니, 모두가 금방 전생의 일을 훤히 알아보고는 서로 통곡을 하는 거였소. 마침내 두 사람 모두 그 산속에서 출가하였다오.

만약 지금 전쟁하는 나라들이 모두 전생과 후세의 일을 알아본다면, 그래도 오로지 살육을 자행하여 강대국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들겠소?

산사의 문은 리치상 세 문을 세워야 할 것이오. 삼해탈문(三解脫門)이 바로 그것인데, 한 문으로 세 가지 뜻을 함께 지니는 것이오. 첫째는 공해탈문(空解脫門)이고, 둘째는 무상해탈문(無相解脫門)이며, 셋째는 무원해탈무(無願解脫門)이오. 이 삼해탈문을 거쳐 곧장 녈반의 대웅보전에 들어가게 되오. 공(空)하기 때문에 무상(無相)이고, 무상하기 때문에 무원이라오. 모든 법은 그 본체가 바로 텅 빈 공이오. 공은 이름 붙일 수 없으므로 형상이 없는 무상이고, 형상이 없기 때문에 없다는 공에 집착하거나 있다는 유(有)에 집착하려는 마음이 없게 되는 거요.

어제 그대가 있는 감숙성(甘肅省)의 불교회로부터 항공서신을 받고 나서, 감숙 지방의 가뭄이 섬서(陝西) 지방과 별로 다르지 않은 걸 알게 되어, 몹시 마음 아프기 짝이 없소. 그대 불교회가 21일 간의 기우법회(祈雨法會)를 이미 마쳤는데도 아직 비 소식이 없다고 하면서, 위혜자(魏慧滋) 거사가 령암산(靈岩山) 스님들의 지원을 요청하더군요. 령암산 스님들이 진실한 수행자이기 때문에 감응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모양이오. 그러나 가뭄 재해의 상황이 워낙 막대하여, 스님들이 특별히 마음을 다해 기도해 드릴 수는 있지만, 흡족한 비가 내릴 수 있는지는 미리 장담할 수가 없구려.

내가 항공서신을 받은 즉시 령암사에 편지를 써서, 스님 스무 분께 7일 동안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여 모든 가뭄 지역에 두루 단비가 내리도록 회향 기도해 달라고 요청하였소. 스무 분의 7일 념불법회에는 통상 2백 원이 드는데, 내가 그대의 불교회를 대신하여 지출하였으니, 별도로 송금할 필요는 없소이다. 단지 그대의 불교회는 현지의 주민들에게 널리 이 사실을 알리고, 주민 모두가 함께 ‘나무 관세음보살’ 성호를 지성으로 염송하도록 협력해 주기만 바라오. 특별히 무슨 법회의식을 갖출 필요는 없소. 다만 보살 성호를 염송하는 공덕으로, 산과 강의 신령님들이 위력과 복덕을 크게 얻고, 주변의 모든 외로운 영혼들이 극락 왕생하도록 회향 기도하면, 가장 바람직스럽겠소. 혹시라도 신령님들께 제사를 올리는 경우에는 절대로 고기를 써서는 안 되오. 모든 일마다 정성과 공경이 가장 중요한 근본이며, 남들 보기 좋은 의식에 겉치레할 필요는 없소.

말세에 불법을 배울 때 치중해야 할 것은 인과법칙을 알고 정토 법문을 닦는 일이오. 인과법칙을 알면, 감히 자기를 속이면서 남을 속이고, 나아가 하늘을 거스르고 섭리를 어기며, 남에게 손해를 입히고 자기의 잇속만 챙기는 짓은 안 할 것이오. 또 정토 법문을 닦으면, 비록 평범한 지아비와 아낙이라 할지라도, 부처님 자비 가피력에 기대어 극락 왕생할 수 있기 때문이오.

그 밖의 다른 법문들은 모두 번뇌가 완전히 끊어져야 바야흐로 생사 륜회를 끝마칠 수 있다오. 그렇지 못하면 설령 확철대오하여 제아무리 위대한 지혜와 말 재주를 얻는다 할지라도, 과거가 흘러갈 대로 흘러가고 미래가 다가올 대로 다가오도록 생사 륜회를 벗어날 기약이 없소. 하물며 번뇌망상에 가득 찬 범부들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소? 명심하기 바라오.

 

 

장도생 거사에 대한 편지설법 (14년의 장기감금형벌로 말미암아, 집안일이나 세속잡사일체을 신경쓰지않고 오로지 도닦는데 전념할수있지않는가) :

장도생(章道生) 거사에 대한 편지 설법

 

도생(道生) 거사 보게나. (1)

친서를 받고, 그대가 용맹심을 일으킨 걸 알게 되어 몹시 기쁘고 안심되네.

다만 그대가 말한 것 중, 종신토록 채식하며 한 마음으로 념불하는 것만 유일무이하고 결코 바꿀 수 없는 수행으로 삼을 일이로되, 기름과 소금까지 전혀 먹지 않겠다는 것은 반드시 지키지 않아도 될 줄 아네. 부처님 법에는 이러한 말씀이 없다네. 더러 다른 수행 집단[外道]에서는 이런 규율이 있을지 모르겠으나, 이는 단지 인연에 따르면[隨緣] 그만일세.

짜고 싱거운 맛은 굳이 구별할 필요가 없네. 싱겁다고 싫어하거나 짜다고 짜증내지 않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법문(解脫法門)이지.

념불할 때는 반드시 지성(志誠)스러운 마음과 깊은 믿음과 회향 기도하는 발원의 마음을 내어야 하네. 특히 자기의 념불 공덕으로 시방법계의 모든 중생이 모두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往生)하도록 회향 기도하는 발원이 중요하지. 이러한 마음으로 념불하면 그 공덕이 무한할 걸세. 그러나 만약 단지 자기 한 사람만을 위해 념불한다면, 그 마음의 도량(度量)이 협소하고, 따라서 그 공덕도 매우 적게 된다네.

비유하자면, 한 등불이 자기 홀로만 타고 있다면 단지 한 등불의 밝기밖에 못 비추지만, 만약 다른 등잔에로 불꽃을 옮겨 붙여주기만 한다면 백천만억의 무수한 등불을 동시에 밝힐 수 있지. 물론 그 광명은 이루 헤아릴 수 없이 증폭되지만, 본래의 등불에는 조금도 줄어듬이 없지 않은가? 세상 사람들이 이러한 리치를 모르기 때문에, 단지 자기 혼자만 아는 개인주의적 이기심에 갇혀, 다른 사람들도 함께 이익 얻는 것을 바라지 않는다네,

감옥이란 사람을 고통의 바다로부터 벗어나도록 핍박하는 도량(道場)일세. 그러나 만약 이 감옥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매일같이 주색잡기나 물욕 이익에 골몰하며, 자신이 본디 지니고 있는 청정한 심성(心性)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을 것이니 말이야.

지금 다행히도 14년의 장기 감금 형벌로 말미암아, 집안 일이나 세속 잡사 일체를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오로지 도(道) 닦는 데에 전념할 수 있지 않은가? 만기출옥(滿期出獄)할 때가 되면, 옛 사람 같고 싶어도 전혀 옛 사람이 아닐 걸세. 그 때는 크게 교화를 펼쳐, 자기 가족은 물론 친척이나 벗들까지 모두 불법의 덕택을 가피 받을 수 있도록 할 것이니, 이보다 더 큰 다행이 어디 있겠는가?

옥중에서는 굳이 책을 많이 보려고 할 필요가 없네. 내가 작년에 두 차례, 그리고 올해 한 차례 보내 준 책들만 꼼꼼히 읽고 그에 따라 실행하면, 수행은 충분하고도 오히려 남음이 있을 걸세. 만일 잡다하게 보게 되면 마음과 사념이 어지럽게 갈라져 별로 이익을 얻을 수 없게 되네. 인과응보의 법칙을 분명히 알아차리고 채식을 하면서 일심으로 념불하는 것만이, 자신도 이롭게 하고 남들도 이롭게 하는[自利利他] 핵심 요체임을 잊지 말게나.

모름지기 자신이 현재 처한 상황에 맞게 수행하면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탓하지 않아야, 바야흐로 불법의 진실한 이익을 정말로 얻을 수 있다네. 항상 스스로 격려하고 분발하길 바라네.

 

도생 거사 보게나 (2)

세상 사람들의 질병 고통은 대부분 숙세(宿世)에 살생한 죄업으로 말미암은 보복이라네. 어떠한 질병을 막론하고, 만약 지성스런 마음으로 ‘나무 아미타불’과 ‘나무 관세음보살’의 성호(聖號)를 간절히 염송하면, 반드시 숙세의 업장을 해소하고 선근(善根)이 자라나서 질병이 저절로 나을 수 있다네. 설령 수명이 다한다고 할지라도, 사후 천상이나 인간 같은 선도(善道)에 태어나고,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없지.

더구나 정토 법문(淨土法門)을 알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념불하면, 서방 극락에도 왕생하여 생사 륜회를 완전히 벗어날 수 있다네. 그러나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심오한 리치를 잘 모르니, 먼저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일러 주어야 할 걸세.

절강성(浙江省) 진해현(鎭海縣)에 방문년(方文年)이란 사람이 있는데, 그 아들 자중(子重)이 3년 전 19살 때에 창자에 종양이 생겼다네. 한의사는 치료할 방법조차 없고, 양의사는 수술하지 않으면 치료할 수 없다고 했으나, 그 부모가 수술은 하고 싶지 않아 그만 치료를 하지 못했지. 그런데 그 어머니가 문리(文理)가 트인 사람이라, 내 글[印光文崇]을 보고 스스로 채식하며 념불하면서, 집안의 어른과 아이는 물론 고용인까지 모두 완전 채식하도록 이끌었다네. 오직 아버지 문년만 아직 완전 채식은 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러나 육식을 절제하며 크게 줄였지. 그런데 그 어머니와 할머니 가정부(이 노파도 몹시 현명하고 방씨 집에 수십 년간 함께 살았는데, 그 아들도 잘살고 그 손자가 집에 돌아가 사시자고 청하였지만, 그는 주인 마님과 수행하고 싶어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고, 주인 마님도 그를 하녀가 아니라 친구로 대하며 살고 있는 사람이네.)가 목숨을 바칠 듯이 ‘나무 아미타불’과 ‘관세음보살’을 열심히 염송하고, 또한 『금강경』도 함께 독송하였다네. 그 결과 사흘 만에 창자 안에서 종기가 저절로 터져 피고름이 대변을 통해 쏟아지고, 닷새 만에 완전히 나았다네.

념불과 독경을 지성으로 하면, 이와 같이 숙세의 업장이 해소되곤 하지. 그런데 세상 사람들은 단지 업장을 쌓을 줄만 알고, 해소하는 방법은 모르고 있으니, 정말 가련하네.

또 절강성의 해염현(海鹽縣) 출신인 서울여(徐蔚如)는 줄곧 북경에 거처하였는데, 공부를 너무 많이 하여 속이 다 상하고 탈장(脫腸) 병까지 얻은 지 2년이나 되었다네. 매번 대변을 보고 나면, 반드시 한 차례 잠을 자면서 창자가 스스로 들어가길 기다린 다음에야, 감히 움직일 엄두를 낼 정도였네. 그런데 1919년 정월 대변을 본 후 잠시도 늦출 수 없는 중요한 일이 있어 곧장 차를 타고 외출했다가, 접촉 마찰로 말미암아 탈장이 끝내 되들어가지 않은 상황이 벌어졌다네. 그리하여 이레 밤낮을 한 순간도 그치지 않고 마치 바늘로 쑤시는 듯한 고통 속에서 나뒹굴며 눈도 전혀 붙일 수 없을 정도였지.

비록 처음부터 념불은 계속 했지만 고통이 줄어들지 않자, 마침내 대보리심(大菩提心)을 내어 “이토록 극심한 질병의 고통을 차라리 내가 좀 더 받기를 원하옵나니, 세상 사람들은 누구도 이 병에 걸리지 않기를 끝끝내 바라옵니다”라고 발원했다네. 그리고 지성으로 념불하다가 곧 잠들었는데, 깨어나 보니 병이 저절로 나아 있었고, 그 후로는 병이 뿌리째 뽑혀 재발하는 일이 없다는 걸세.

그 사람 본인이 서신을 보내 와 이 사실을 알렸기에, 내가 답장에다 “이 병은 숙세의 업장 때문에 생겼는데, 귀하께서 이처럼 큰 보리심으로 발원하여, 그 숙세의 업장이 완전히 해소되고 병이 완치되어 뿌리 뽑힌 것입니다.”라고 격려해 주었네.

그대의 외사촌 형도 만약 이러한 리치를 알고 실행한다면, 단지 치질만 나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생사 륜회의 질병 또한 완치할 수 있지. 그렇지 않고 집안에서 복이나 누리고 편안히 지내면서, 술에 취한 듯 살다가 꿈결처럼 죽는다[醉生夢死]면, 차라리 그대처럼 감옥에 갇혀 념불 수행의 막대한 이익을 얻는 것보다 훨씬 못할 걸세. 바깥 상황이란 고유한 본래 속성이 없으며, 그 이해득실은 오직 사람 자신에게 달려 있지. 그대가 내 말을 믿을 수 있다면, 그로 말미암아 얻는 이익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도생 거사 보게나 (3)

세간의 화(禍)와 복은 서로 기대고 숨어 있어서, 오직 사람의 마음씀이 착한지 여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날 뿐이라네. 그대가 감옥에 들어감으로써 불법(佛法)을 듣게 되었으니, 이 또한 불행 중의 천만다행이 아닌가? 만약 이를 그대의 훌륭한 인도자로 생각한다면, 그대 마음이 더욱 더 청정해질 수 있을 걸세.

그대가 언급한 『금강경(金剛經)』의 구절은 그대가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네 그려. 경전에서 “선남자나 선여인이 이 경전을 받아 지니고 독송한다고 다른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이나 경멸을 당하는 경우에는, 이는 전생의 죄업이 무거워 본디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운명인데, 바로 금생에 사람들로부터 비웃음이나 경멸을 당하는 까닭에 (악업이 선하게 전환되고 금생에) 전생의 죄업이 곧장 소멸하여 아누다라삼먁삼보리[無上正等正覺]를 얻게 될 것이다.”(이는 이 인연으로 말미암아 미래에 얻을 것이라는 말이지, 현생에 곧장 얻는 것으로 오해해서는 결코 안 되네.)고 말하고 있지 않은가?

『금강경』을 독송하는 것은 금생의 선행이고, 남들의 비웃음을 당하는 것은 전생의 업장인데, 남들의 비웃음 덕분에 지옥·아귀·축생의 삼악도에 떨어져야 할 과거의 악업이 소멸될 뿐만 아니라, 미래세에 무상정등정각이라는 부처의 과보까지 얻을 수 있다는 말씀이지. 이것이 바로 선업(善業)으로 악업(惡業)을 전환시키고, 미래의 과보[後報]를 현재의 과보[現報]로, 그리고 무거운 과보[重報]를 가벼운 과보[輕報]로 각각 변화시키는 수행 공덕의 원리라네.

그대가 감옥을 악도(惡道)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은 지나친 생각일세. 옛날 감옥은 그 고통이 이루 다 말할 수 없을 정도였는데, 지금 감옥은 바로 폐관(閉關) 수련이나 매한가지이니 무슨 고통을 받는단 말인가? 감옥 안에 들어 있지 않은 사람들을 한번 보게나. 동분서주 정신 없이 바쁘지만 의식주조차 구할래야 제대로 얻지 못하는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르지 않은가?

사람이 분수를 깨닫고 만족할 줄 안다면, 감옥 또한 복록 가득한 천당이 될 걸세. 그러나 만약 만족할 줄 모른다면, 설령 억만장자의 대부자나 최고 관직의 권세가라 할지라도, 정말로 날마다 지옥에서 살아가는 거나 다름없다네.

 

 

도생 거사 보게나 (4)

속세의 인연은 제아무리 장수한다고 할지라도 눈 깜짝할 사이에 덧없이 지나고 마는데, 스스로 힘써 닦지 않으면 대부분 사후에 삼악도에 떨어진다네. 다시 사람 받기조차 정말 쉬운 일이 아니라네.

그대가 이제 잘못을 깨닫고 뉘우쳐 고치면서 청정한 선업을 힘써 닦기 시작한다면, 격물(格物: 즉 克己를 뜻하며, 外物을 이르게 하는 것으로 이해하면 안 되네)과 치지(致知)를 이루어, 살아 생전에 성현의 경지에 들 수 있고,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비면 죽은 뒤에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네. 설사 업장이 다하고 감정이 텅 비는 경지까지 이르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진실한 믿음과 간절한 서원으로 념불하면, 반드시 부처님 자비광명의 가피력에 의해 서방 극락세계에 왕생할 수 있네.

이렇게 하면, 금생에 타고난 인생과 배우고 닦은 공부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으며, 또한 이번에 겪은 커다란 좌절(감옥생활)의 운명도 무의미하게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걸세. 이것이 이른바 전화위복(轉禍爲福)이라는 것이니, 마땅히 멀리 내다보는 안목으로 불퇴전의 대보리심(大菩提心)을 내어야 할 걸세. 그리하기만 한다면, 앞서 말한 커다란 이익은 틀림없이 얻게 된다네.

만약 정성과 공경은 전혀 없이, 단지 겉모습만 꾸며 대어 남들이 자기가 진실하게 수행한다고 알아 주기를 바란다면, 이는 완전히 거짓 투성이에 불과할 뿐, 결코 실제 이익을 얻을 수 없으니 명심하게.

이번에 관음송(觀音頌) 7부를 부치네. 혹시 전에 부쳤는지 기억할 수 없으니, 남는 것은 감옥의 소장과 교도관이나 믿음과 공경심을 지니고 문리(文理)가 트인 동지들에게 나누어 주게나. 비록 많은 책들이 있지만, 모름지기 부처님과 관세음보살 성호의 염송을 위주로 수행하여야 함은 물론일세. 책만 보고서 념불 수행을 하지 않으면 결코 안 되네. 아무리 훌륭한 요리라도 보기만 하고 먹지 않으면 빈 뱃속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것과 같은 리치일세.

지금 그대에게 혜성(慧誠)이라는 법명(法名)을 지어 보내네. 정성은 도의 근본[道本]인데. 도가 크게 자라나지 못하는 것은 모두 어리석고 지혜가 없기 때문일세. 만약 정성으로 말미암아 현명을 피워내고(현명은 곧 지혜일세) 현명으로 말미암아 정성을 드러낼 수 있다면, 도는 저절로 생겨 자라게 된다네.

정성은 대학(大學)으로 말하면 명덕(明德)이고, 지혜는 곧 ‘밝힌다’는 명(明)에 해당하니, 지혜와 정성이 함께 갖추어지면 이것이 바로 ‘명명덕(明明德)’이 되지. 명명덕은 곧 정성과 현명이니, 정성은 성덕(性德: 천성적인 덕)에 속하고 지혜는 수덕(修德: 덕의 수양)에 해당하네. 성덕은 사람마다 타고 났으나, 수덕에는 거역과 순응이 있지.

거역하여 닦으면 타락하고, 순응하여 닦으면 상승하는데, 순응이 극도에 이르면 곧 불도(佛道)를 원만히 성취하게 된다네. 우리는 이러한 능력까지는 아직 없기 때문에, 단지 자기 마음의 넓고 좁은 도량과 수행 공부의 깊고 얕은 정도에 따라 각자에게 합당한 이익을 얻으면 그만이라네.

 

 

도생 거사 보게나 (5)

서본무(徐本茂)가 이미 수행할 줄 알게 되었다면, 어찌하여 항상 채식할 수는 없단 말인고? 아마도 육식을 좋은 것으로 생각하여, 차마 완전히 끊어버리지는 못하겠다는 거겠지.

그러나 모든 생명이 도살될 때 받을 고통 상황을 한번 가만히 생각해 보라고 하게. 잠시 자기 입맛을 즐기기 위해 차마 그렇게 도살된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가령 자신이 그 짐승의 상황에 처해 있다고 한다면, 정말 편안한 마음으로 남들이 자기를 도살하여 그 입과 배를 채우도록 기꺼이 받아들이겠는가?

이러한 식탐(食貪)으로 말미암은 잔인스러운 마음과 행동은, 한 마디로 생각해 보지 않기 때문일 따름이라네. 만약 조금만 자세히 생각하고 살펴본다면, 육식을 끊어 버리고 다시는 감히 먹고 싶은 엄두가 나지 않을 걸세.

원한의 업장은 결국 스스로 감당하여야 한다네. 그대가 아직도 중생의 고기를 먹으려고 한다면, 죽을 처지[死地]까지 이르지는 않은 일체의 고통은 모두 ‘고통’이라고 부를 수가 결코 없네. 금생에 어떤 중생의 고기를 먹는다면, 장래에 반드시 그에게 먹히는 날이 돌아오게 되지. 그래서 정말로 원한의 업장은 해소하기 어렵다고 말하는 걸세.

그(서본무)가 말하는 걸 보면, 깨달음의 근기[悟機]가 상당히 있는 듯하이. 그렇지만 아직도 육식을 하고 싶다면, 그 깨달음이란 단지 빈말에 지나지 않네. 빈말은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아. 예컨대, 밥을 입으로만 말해 가지고 그대의 굶주림을 채워 줄 수 있겠나? 내가 남들에게 채식하라고 강요하는 것은 결코 아니네. 다만 그가 바라는 바와 행동하는 내용이 서로 어긋나기 때문에, 그를 위해 간곡히 말해 주는 것일 따름이라네.

서본무가 묵은 잘못을 힘써 참회하고, 맵거나 비린내 나는 음식을 완전히 끊어 버릴 수 있다면, 이것이야말로 지난날을 회개하고 미래를 닦아[改往修來], 본래 마음의 근원으로 되돌아갈 수 있는 진실한 수행이 되지.

진국보(陳國甫)는 종신토록 불경을 독송하고 념불을 하겠다고 발원했다니, 그 뜻이 가상하네. 그러나 그 마음이 오래도록 물러서지 않고 유지되어야 하지, 용두사미처럼 시작만 있고 끝은 없이 흐지부지해서는 결코 안 되네.

이번에 서본무의 법명을 혜본(慧本)으로 지어 보내네. 지혜를 근본으로 삼으면,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모든 것이 저절로 위로 부처님의 마음과 천리[天理: 하늘·자연의 리치]에 부합하여, 예전처럼 어리석고 미혹되게 악업을 지어 삼악도에 떨어지는 일은 없게 될 것이라는 뜻일세.

진국보의 법명은 혜보(慧甫)로 짓네. 보(甫)란 남자에 대한 아름다운 호칭이지. 만약 지난날의 잘못을 비통하게 회개하고 마음에 바른 생각[正念]을 지니면서, 착한 마음을 품고 착한 말을 하며 착한 일을 하고 어떠한 악도 짓지 않으며, 모든 선행을 받들어 행하고 효제충신(孝悌忠信)과 같은 인륜을 돈독히 실천하되, 여기다가 덧붙여 지성으로 념불하여 극락 왕생을 바란다면, 이것이 바로 ‘혜보’의 실질 내용이라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단지 허울 좋은 빈 이름에 지나지 않을 것이니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부처님 앞에 나아가 귀의를 하는 법은 『문초』 안에 이미 설명해 놓았으니, 그 내용에 따라 그들에게 말해 주게나. 세간과 출세간(出世間)을 막론하고, 모든 일은 다 진실한 정성[眞誠]을 근본으로 삼으니, 이를 명심하게. 항상 자기의 허물을 되돌이켜 살펴냄으로써, 날마다 높고 밝은 경지로 나아가길 바라마지 않네.

 

도생 거사 보게나 (6)

오랫동안 소식이 끊겨 근래 수행 상황은 어떠한지 궁금하네. 념불은 잘하고 있겠지? 그대의 성정(性情)은 자못 총명한데, 대개 총명한 사람들이 마음을 잘못 써 일을 그르치는 경우가 많다네. 단지 이익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해가 되고 연구와 수행에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곤 하지.

내가 7월에 상해(上海)와 항주(抗州)의 각 지역을 돌아보며 두 달 남짓 머물렀는데, 자못 똑똑한 어느 젊은이가 질문하는 게 어찌나 우스꽝스럽고 안스럽던지 혼났다네. 그가 질문한 내용이 대강 이러한 것이네.

“모든 유정(有情)이 다 불성을 갖추고 있다면, 비록 크고 작은 것은 다를지라도 죽음을 두려워하는 한 가지일 텐데, 무릇 방생(放生)에는 마땅히 작은 생명에 먼저 주의를 해야 한다고 하면, 이는 모두 불성을 갖추고 똑같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는 이론에 모순되는 것이 아닙니까? 똑같은 걸 알았으면, 응당 자기의 분수와 능력에 따라 구제하여야 할 것이지, 어찌 논함에 앞뒤를 가린단 말입니까?”

“또 물속이나 공기 중에는 미생물이 수없이 많아서, 사람이 한 번 호흡할 때마다 숨 따라 흡입하는 생명이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텐데, 장래의 업보는 언제나 다 끝마칠 기약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사람과 축생이 서로 순환한다면, 고금의 위대한 유학자 중에도 불교의 리치에 통달한 자가 몹시 많은데도, 어찌하여 그들은 살생을 끊어 버리도록 계률을 세우지 않았단 말입니까?”

“또한 일체의 중생이 모두 과거의 부모이고 미래의 부처님들이기에, 살해해서도 안 되고 간음해서도 안 된다고 말하는데, 세간의 정식 결혼도 또한 숙세(宿世: 전생)의 부모였던 이들과 결합하는 게 아닙니까?”

이 세 가지 질문들은 모두 얄팍한 총명을 자랑하여 편협한 말단지엽의 논리를 내세우는 것으로, 백해무익하기 짝이 없네. 왜 그렇겠는가? 그토록 극단적인 미세한 것 때문에, 거대한 것까지 함께 모두 폐기해 버릴 수는 없지 않은가?

예컨대, 청결함을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 몸에 때나 먼지가 끼지 않기를 바라겠지. 그런데 결벽증이 약간 생겨 자세히 살펴보니, 몸 안은 똥오줌과 피고름으로 가득 차 있고, 몸 밖은 땀과 때가 뒤범벅이 되어 피부와 터럭에 절어 있으며, 옷 속에는 이와 벼룩이, 옷 밖에는 모기와 날타리가 들끓으면서 자신을 귀찮게 하는 줄 깨달았단 말일세. 이 몸뚱아리가 안팎으로 더럽고 추악한 꼴이 결국 측간의 똥 고자리와 진배 없다는 것을 생각하니, 이 결벽증 환자는 마침내 더 이상 몸을 깨끗이 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지고, 왼종일 측간의 고자리 떼 속에서 함께 뒹굴며 즐거워한다고 비유하면 적절하지 않겠나?

고금의 위대한 유학자들이 어찌 살생하지 못하도록 계률을 세우지 않았는가라는 의문은, 세간과 출세간의 법에는 일시적인 임기응변(臨機應變)의 방편인 권(權)과 항상적인 구경불변(究竟不變)의 본질인 실(實)이 있는 줄을 모르기 때문에 품는 것이지. 【옮긴이: 유가에서는 實에 상응하는 것을 經이라고 하여 經權으로 대칭함】 비록 대유학자들이 실(實)을 안다고 하더라도, 세속의 인심이 완전히 부처님의 교화에 귀의할 수는 없기 때문에, 실체의 리치[實理] 그대로 살생 금지의 계률을 정하기는 정말로 쉽지 않은 걸세.

군자는 자신이 처한 지위에 맞추어 행동하는 법이네. 무릇 자기 능력이 미칠 수 있는 바가 아닌 경우에는,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까지 함께 끌어다가 파괴해서는 결코 안 되지. 능력이 미칠 수 없는 줄을 안 경우, 자기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에 각별히 주의해서 행한다면, 이것은 막대한 선(善)이라네. 그러나 능력이 미칠 수 없는 것 때문에 능력이 미칠 수 있는 것까지 물리치고 파괴하여 이를 행하지 못하도록 막는다면, 이는 중대한 악(惡)이 되네.

똑똑하고 총명하다는 사람들이 이러한 사견(邪見)에 빠져 있는 경우는 너무도 많지. 이러한 종류의 시비논리를 내가 얼마나 보고 들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네. 나는 오직 사람들이 마음을 잘못 써서 죄악을 짓지나 않을까 두려울 따름이네. 그대나 그대 주위의 동료들이 혹시라도 이러한 사견(邪見)을 가지고 있지나 않을까 염려되어, 그대에게 대강만 특별히 말하는 것이네. 만약 이러한 사견을 미리 뽑아내지 않으면, 장래에 자신은 물론 남도 그르칠 수 있기 때문일세. 내가 이러한 사견을 비판하여 조복시킨 언론은 며칠간의 공력을 몽땅 들이지 않으면 다 쓸 수가 없다네.

“인륜강상을 돈돈히 실천하고[敦篤倫常] 자기 분수를 공경스럽게 다하며[恪盡己分]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諸惡莫作] 모든 선을 받들어 행하라.[衆善奉行]” 이 열여섯 글자[네 구절]가 살아 생전에 성현의 경지에 들고 사후 극락세계에 되돌아가는 근본 서원[本願]이지. 우리 제자들이 모두 이를 조심스럽게 지키고 힘써 행한다면 매우 다행이겠네.

 

 

도생 거사 보게나 (7)

정성이 지극하면 쇠와 돌도 열린다네[精誠所至, 金石爲開]. 또 적은 알맹이가 많은 허울보다 나으며[小實勝多虛] 기교스러운 속임수가 졸렬한 성실만 못한[巧詐不如拙誠] 법이네.

전에 황함지(黃涵之)가 장기간 채식하려고 마음먹은 뒤, 자기 어머님도 함께 채식하시도록 권해 드리고, 나에게 어떤 방법이 좋은지 자문을 구해 왔지. 그때 내가 어머님을 대신해 지성으로 참회해 드리면, 업장이 해소되어 채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일러 주었는데, 한 달이 채 못 되어 장기간 채식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전해 왔네.

또 한 번은 척칙주(戚則周)가 딸이 나이 열아홉에 두 눈을 실명(失明)하여 눈 앞에 손을 갖다 들이대도 보지 못한다고 편지로 알려온 일이 있었네. 그때 그는 산중의 삼성당(三聖堂)에 있었는데, 답신을 받으면 곧 귀가하여 자기 딸을 항주(抗州)의 비구니 암자에 보낼 생각이었지. 내가 편지를 보내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도록 분부했는데, 역시 한 달이 채 못 되어 자신이 직접 편지를 써서 다 나았다고 알려 왔다네.

또 한 여인은 열여섯 살 때 기관지 통증을 얻어 매일 반드시 두세 차례 발작하는데, 통증이 죽을 정도로 극심하였다네. 올해 56세로 나에게 와서 귀의하기에, 내가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도록 분부하고, 아울러 한 약처방을 알려 주었지. 곧 『문초』 안에 있는 담배 끊는 처방인데, 연기도 가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한 가지를 물에 끓여 처음 한 차례 복용하자 기관지가 더 이상 아프지 않게 되었다는 걸세. 41년간 수많은 의사들도 어찌할 수 없었던 고질병이 한 차례 약처방을 쓰고 나서 완전히 나았다니,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였기 때문에 이러한 처방의 속효를 본 것이 아니겠는가?

이상 세 사람이 힘은 적게 들이고 큰 효험을 본 것은 바로 정성 때문일세. 그대가 어머님의 고질병 때문에 어찌할 줄 모르고 탄식하기에, 나는 그대가 어찌하여 지성으로 념불하여 어머님의 업장을 해소시켜 드리려고 하지 않는지 꾸짖었네. 그대가 곧 많은 불경을 베껴 쓰고 부처님께 예배드렸는데, 아직 별 효험을 보지 못하는 듯하군.

이렇게 불경을 베껴 쓰는 일은, 이른바 적은 알맹이가 많은 허울보다 나은 것인데, 가령 그대가 진실로 이처럼 예배 독송하는데도 그대 어머님의 고질병이 낫지 않는다면, 내 두 눈이 멀고 하늘과 땅이 뒤바뀌며 해와 달도 거꾸로 운행하여만 할 걸세. 세상에 정말로 그러할 리가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아마도 그대가 ‘정성’ 한 글자에 뜻을 완전히 집중하지 못한 것이라고 여기네. 그래서 내가 애당초 그대의 법명을 혜성(慧誠)이라고 지어 주지 않았나?

결국 그대의 정성은 붓 끝에 있지, 마음에 있지 아니한 것을 분명히 알 수 있네. 가령 정성이 마음에 있다면, 이처럼 수행하는데도 전혀 이익(효험)이 없는 지경에까지는 결코 이르지 않을 걸세.

그대가 살아 생전에 성현의 제자가 되고, 죽은 다음 극락세계에 들어가길 바란다면, 모름지기 모든 가식적인 마음 상태[假心相]를 완전히 바다 밖으로 내던져 버리고, 실질적인 일을 진지하게 하여야 하네. 말한 것은 반드시 실행하고, 실행할 수 없는 것은 말을 꺼내지도 말아야지.

정말 이렇게만 할 수 있다면, 그대의 조상이나 부모에게도 커다란 영광이 있을 것이고, 나 또한 그대의 실행 공덕으로 말미암아 죄업을 상당히 해소할 수 있다네.

만약 내가 직접 보고 있지 않다고 해서 그대가 자기 멋대로 거짓말을 한다면, 설사 나는 참말이라고 생각한다고 할지라도, 천지신명과 불보살님들도 또한 진실이라고 여길 줄로 생각하는가? 그대가 이런 마음을 조금이라도 지니고 있다면, 이는 부모를 속이고 스승과 부처님을 속이는 대불효가 될 걸세. 부모와 스승을 어떻게 정말로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대가 단지 스스로 속일 뿐이네. 나는 그래도 그대가 어느 정도 사리에 밝다고 여겨, 여러 번 침과 송곳으로 찔러 주어 왔네. 그런데 내가 잘못되었다고 하면, 오늘부터 앞으로는 서로 왕래하지 않는 것이 좋겠네. 군자는 일시적인 방편상으로는 속일 수 있어도, 도(道)가 아닌 것으로 영원히 속이기는 어려운 법일세.

내가 지나치게 각박하게 따지는 것은 아니네. 그대의 말이 앞뒤가 서로 맞지 않고, 또 그 일이 그대가 감옥 안에서 해낼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기 때문일세. 내가 비록 별 도덕은 없지만, 세상을 68년간이나 겪어 왔기 때문에, 리치와 정황에 맞지 않는 일은 눈가림으로 속이기가 자뭇 어려울 걸세. 침통하게 뉘우치고 고치길 바라네. 그렇지 않다면 장차 종신토록 유교와 불교 모두에게 큰 죄인이 될 걸세.

도생 거사 보게나 (8)

편지를 받고, 그들이 아직도 계속 념불을 실행하고 있다니 기쁘기 짝이 없네. 그대 어머님의 질병이 30여 년이나 끌어왔다면, 어찌 그대는 몸소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염송하여 어머님을 위해 회향 기도해 드리고, 그대의 아내와 자녀들에게도 그렇게 념불하도록 당부하지는 않고 있는가?

자식이 어버이를 위해 수행함에 그 마음이 정말로 정성스럽다면, 당연히 기묘한 감응과 효험이 있게 마련이네. 또 그대가 마땅히 어머님께 서신을 올려, 당신도 친히 념불하시도록 완곡히 권해 드려야 할 일 아닌가? 그렇게 해서 그대 어머님이 믿음을 내어 실행하게 된다면, 오랜 지병이 바로 세간을 벗어나도록 이끌어 주는 스승[出世導師]으로 변신할 걸세.

이번에 그대의 뜻에 따라 그대 어머님을 위해 덕초(德超)라는 법명을 지어 보내며, 서방 극락세계 칠보지(七寶池) 가운데 련꽃 한 송이를 덧보탤 수 있도록 기원하네. 일심으로 념불하여 그 공덕으로 현세에 사바 홍진의 번뇌업장을 초월하고, 림종에는 시방삼계를 초월하여 구품련화지(九品蓮華池)에 곧장 올라가도록 격려하는 뜻일세.

념불을 하지 않을 때는 마음을 완전히 세속의 번뇌망상 속에 파묻어 두지만, 일심으로 념불만 할 수 있다면, 홍진의 번뇌도 더 이상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어, 홍진 속에서 홍진을 초월할 수 있다네. 그리고 극락 왕생하면 단지 질병 고통을 받지 않을 뿐만 아니라, 장차 질병 고통을 당하는 모든 중생들을 고해로부터 건져 내어 함께 극락을 누리도록 할 수 있지.

자식된 자가 부모를 섬기는 효도는 육체상의 수고와 물질상의 봉양이 맨 처음 바탕이 되지만, 자신을 세워 도를 실행하는 것[立身行道]이 커다란 근본이 된다네. 혹시라도 마음에 사악한 염두를 일으키면 곧 불효가 되니, 당장 참회하고 제거하여 청정하게 만들어야 하네. 그리하여 이 마음이 한 순간 한 생각이라도 천지신명께 떳떳하지 않음이 없으면, 그 밑바탕이 제대로 선 걸세. 여기다가 다시 믿음과 발원으로 념불공부를 진실하게 하면, 살아 생전에 성현의 영역에 들고 죽은 후 극락국토에 되돌아 가는 것을 그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혹시라도 입으로는 수행한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착하지 못한 생각을 품고, 정인군자(正人君子)의 진실 수행이라는 이름만 얻으려고 꾀한다면, 약삭빠르게 눈치나 살피는 파렴치한 진짜 소인배가 될 걸세. 본디 남을 속이려다 끝내는 스스로만 속이고 말게 되지.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모두 몹시 똑똑하고 잘난 체하는 사람들이니, 어찌 서글프지 않겠는가?

예컨대, 옥돌도 진흙처럼 단번에 가르는 천하의 보검(寶劍)을 가지고서 하찮은 진흙 덩어리나 자른다면, 진흙도 별 물건을 이루지 못하면서, 괜히 보검의 날만 손상시키지 않겠나? 원컨대, 그대는 내 말을 잘 음미해서 독실하게 실행해 나가길 바라네. 그런다면, 성현이나 불보살의 경지가 어찌 그들만의 전유물이고 나에게는 불가능한 영역이라고 포기할 수 있겠는가?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성현도 한 생각 놓쳐 버리면 미치광이가 되고, 미치광이도 한 생각 잘 이기면 성현이 된다.”고 했네. 또 불경에는 “세간에 두 부류의 건아(健兒)가 있으니, 하나는 아예 죄를 짓지 않는 자이고, 다른 하나는 이미 죄를 지은 뒤에 곧 회개하는 자이다.”고 말씀하셨지. 말하자면, 잘못을 고치는 데 인색하지 않은 것은 유가 선비들이 성현을 향해 수양해 가는 방도이고, 죄악을 스스로 드러내 참회하는 것은 우리 불자들이 본래 성품으로 되돌아가는 요체일세.

하지만 그대는 몇 년간 서신왕래 하면서, 한 번도 자기 잘못을 드러낸 적이 없었네. 나는 그래도 그대가 이제나마 자기 수행하려고 발심하는 것을 생각하여, 지나간 일은 조금도 묻지 않고 그대에게 편지와 책들을 보내 주면서, 그대가 진실한 념불 수행으로 살아 생전에 성현의 영역에 들고 죽은 후 극락국토에 올라가기만을 기원해 왔네.

그런데 그대가 말을 거짓으로 꾸며 사람을 속일 줄은 어찌 알았겠는가? 이제 보니 그대는 이미 3년간이나 계속 정좌(靜坐: 참선)하여 정신상으로 자못 체득한 바가 많다고 자랑하고 있으니, 내 마음이 통탄스러울 뿐이라. 그대가 정말 이럴 수 있는가? 그런 행위는 한 번으로도 심한데, 하물며 몇 년씩이나 계속해왔단 말인가? 열 개의 눈이 함께 보고 열 개의 귀가 함께 듣는 법인데, 그대가 나를 속이려 들었단 말인가?

그대가 이 편지를 보고, 만약 지금까지의 마음을 비통하게 회개한다면, 아직 늦지 않았네. 그렇지 않다면 영원히 절교(絶交)하고, 그대가 무슨 도를 닦아 천하를 뒤덮든지, 나는 전혀 간섭하지 않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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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화 거사에 대한 답신 (늘 관세음보살을 염송한다면, 수풀처럼 빽빽한 포탄사이와 빗발치는 총알속에 들어간다고할지라도,큰 위험에 빠지는일은 없을것이오) :

혜화(慧華) 거사에 대한 답신

 

혜화(慧華) 보시오.

보내온 편지는 잘 받았소.

지금 온 나라가 내우외환(內憂外患)에 시달리고 민생은 불안하기 짝이 없소. 사납고 거친 자들을 제거하고 선량한 백성을 편안히 보호하며 지방의 치안을 유지한다는 정성스런 마음만 지닌다면, 군대 경찰의 일[軍事]도 곧바로 부처님 일[佛事]이며, 자신에게나 남에게 모두 크게 유익하게 되오. 나아가 모름지기 이러한 뜻을 다른 부하 군인들에게도 단단히 타일러, 남들을 자신처럼 여기고 안락하게 해 주려 생각하도록 이끌어야 할 것이오. 남의 어려움과 슬픔을 보면 마치 자신의 어려움과 슬픔처럼 여기고, 남의 부모를 자기 부모처럼 편안하게 해드리고 싶으며, 남의 아내와 딸들을 보면 자기 아내와 딸들처럼 생각하여 조금도 삿된 생각[邪念]을 일으키지 않아야 하오.

인생이 세상에 머무는 시간은 길어야 수십 년에 지나지 않소. 만약 자기 멋대로 함부로 행동하면, 영겁(永劫)토록 다시는 사람 몸을 받을 수가 없으리다. 또한 항상 관세음보살 성호를 염송하여 보살의 그윽한 보우(保祐)를 빌어야 할 것이오. 군인이 정말로 늘 착한 마음을 품고, 노략질이나 간음 따위의 나쁜 짓을 전혀 하지 않으면서, 게다가 늘 관세음보살을 염송한다면, 설령 수풀처럼 빽빽한 포탄 사이와 빗발치는 총알 속에 들어간다고 할지라도, 큰 위험에 빠지는 일은 없을 것이오. 만약 노략질이나 간음 따위의 나쁜 짓을 서슴지 않는다면, 보살의 가피를 받기는 분명히 어려우리다. 이를 모든 형제 장병들에게 말해 주기 바라오.

이번에 『정토십요(淨土十要)』73) 세 부를 보내니, 한 부는 그대가 보존하고 나머지 두 부는 믿음이 두텁고 문리(文理)가 트인 사람 가운데 경전을 공경스럽게 대할 이에게 보시하기 바라오.

[『정토십요(淨土十要)』: 명말(明末)·청초(淸初)에 우익 지욱(藕益智旭) 스님이 편집한 열 가지 중요한 념불정토 법문.]

이 책은 정토 법문(淨土法門) 가운데 가장 중요한 책이라오. 내가 쓴 서문을 보면 저절로 알 것이오.

그대가 이미 믿음을 가졌다면 내 『문초』를 바탕으로 수행해 나가면 되오. 『문초』가 혹시 부족하다고 생각된다면, 『정토십요』는 여러 부처님과 조사(祖師)들이 일제히 찬탄하고 널리 선양한 법문들이니, 마땅히 믿고 따라 실행할 수 있으리다. 마치 충신이 현명한 성왕(聖王)의 명령을 받들어 행하고, 효자가 자애로운 어버이의 유언을 받들어 지키는 듯한 마음으로 대하여야 하오. 행여라도 색다른 법문을 보거나 듣고 그리로 옮겨갈 생각일랑 품어서는 절대 안 되오.

지금 세상에는 거창한 말로 중생들을 속이는 사람들이 참으로 많소. 단지 오직 아름다운 아내와 예쁜 첩에 연연할 뿐만 아니라, 술과 고기를 실컷 먹고 쾌락을 맘껏 누리면서, 방자하고 거리낌없는 말투로 자기가 무슨 보살의 화신으로 내려와 크게 도통한 위인이라고 자처하는 게요. 게다가 채식하면서 계률을 엄하게 지키는 수행인들을 소승(小乘)이라고 헐뜯으며, 도처에서 미친 듯이 날뛰는 망언(妄言)과 사견(邪見)은, 정말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 주기 어려울 정도라오. 이러한 말들이 현허(玄虛)하고 기묘하다고 생각하는 수많은 어리석은 대중이 맹목적으로 따르며 부화뇌동(附和雷同)하기까지 하니, 정말로 소경이 장님을 이끌고 함께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들어 가는 격이 아닐 수 없소.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않겠소? 그대는 지혜롭게 살펴, 혹시라도 그들에게 미혹되는 일이 없길 간절히 바라오.

 

 

림포 거사에 대한 답신 (유전병도 지성으로 간절하게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염송한다면,) :

림포(琳圃) 거사에 대한 답신

 

림포(琳圃) 거사 보시오.

유전병(遺傳病)도 또한 숙세의 업장(宿業)으로 말미암는 질병이오. 지성으로 간절하게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성호(聖號)를 염송하면 당연히 곧 낫게 되며, 더 이상 유전되지 않을 수 있소.

그대가 물어온 해탈의 법문이란, 오직 믿음과 발원으로 간절히 념불하여 극락 왕생을 바라는 방법 하나뿐이라오. 이는 부처님의 자비력에 기대어 생사 륜회를 벗어나는 법문으로, 바로 금생에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일이오. 만약 이 정토 법문에 전념하지 않고 다른 갖가지 법문을 닦으려 한다면, 우리 같이 평범한 중생이 한두 생(生)에 이룰 수 있는 방법이 결코 아니라오. 우리가 시작도 없는 태고적부터 지금까지 끝도 없이 생사 륜회의 고해를 헤매는 것은, 모두 그 동안 정토 법문을 만나지 못했거나, 더러 만났더라도 열심히 닦지 않았기 때문일 게요. 지금 다행히 이 정토 법문을 알게 되었으니, 절대로 그냥 놓쳐서는 안 되오.

이번에 그대의 법명을 종신(宗信)이라고 지어 보내오. 믿음[信] 발원[願] 수행[行]의 세 가지 법은 정토 법문의 정종(正宗: 올바른 宗旨)인데, 그 중 첫번째 요소가 바로 진실한 믿음[眞信]이오. 진실한 믿음이 있으면 반드시 진실한 발원과 진실한 수행이 있기 때문이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진실한 믿음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게지요.

념불 법문 하나만으로 평범함을 뛰어넘어 성현의 경지에 들어갈[超凡入聖] 수 있는데, 하물며 유전병 정도를 금방 낫게 하지 못할 리치가 있겠소? 일단 불법에 귀의한 사람이라면 모름지기 효도·공경·충실·믿음·예절·의리·청렴·수치의 여덟 덕성과 유가의 대학(大學)에 나오는 격물(格物)·치지(致知)·성의(誠意)·정심(正心)·수신(修身)·제가(齊家)의 여섯 덕목을 힘써 실행하여,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천하가 태평하기를 기원하여야 하오.

옛말에 “천하가 다스려지지 않는 데에는 개개인 모두의 책임이 있다[天下不治, 匹夫有責].”는 속담이 있소. 그 책임이 어디에 있느냐 하면, 바로 물건[物]이 제대로 다스려지지 않은 데 있단 말이외다. 만약 물건만 제대로 다스린다면, 지혜가 밝아오고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마음이 바로잡히고 몸이 제대로 잘 닦이게 될 것이오. 한 사람만 이렇게 수양해도 정말 큰 이익이 있거늘, 하물며 개개인 모두가 이와 같이 수양한다면, 천하가 저절로 태평스러워지지 않겠소?

여기서 ‘물건[物]’이 무엇이냐 하면, 바로 우리 마음속의 사리사욕이오. ‘다스린다[格]’는 것은 몽둥이로 쳐서 깨끗이 몰아낸다는 뜻이오. 사람 마음 속에 사리사욕만 없다면, 본래 청정한 지혜와 식견이 저절로 올바르게 드러날 것이오. 비유하건대, 처자식을 사랑하는 사람은 그 마음속이 애정에 온통 뒤덮여, 처자식의 나쁜 점은 끝내 보지 못하고 마는 것과 같소. 만약 애정이 없다면, 처자식의 옳고 그름이 마치 거울에 물건의 그림자가 비춰지듯이 곧장 훤하게 드러나 조금도 헝클어지지 않을 것이오.

행여라도 주자주(朱子註)의 해석처럼, 내 지식을 끝까지 미루어 넓히는 것을 치지(致知)라 하고, 또 천하 사물의 리치를 모두 궁리하는 것을 격물(格物)이라 받아들여서는 절대로 안 되오. 만약 그렇게 주자처럼 해석한다면, 비록 성인이라도 격물과 치지를 할 수 없을 게요. 마음 바르게 하는 정심(正心)과 뜻을 정성스럽게 하는 성의(誠意)는, 설령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어리석은 지아비나 아낙네라 할지라도, 단지 사사로운 이기적 욕심만 없으면 누구나 해낼 수 있는 수양 아니겠소?

격물·치지·성의·정심·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8덕목은 근본상으로 말하면, 결국 격물 한 가지일 뿐이지요. 물건만 제대로 쳐서 다스린다면, 지혜가 밝아지고 뜻이 정성스러워지며, 마음이 바로잡히고 몸이 잘 닦이기 때문이오. 그런데 이렇게 몹시 절친하고 매우 간단한 근본 도리를, 주자는 지극히 멀고 거창하여 다 마치기 어려운 말단지엽으로 해석하였소. 그리하여 성인이 천하를 다스리는 도(道)의 근본을 파묻어 버리고, 후학들로 하여금 성인의 도를 배우는 데 가장 절친하고 쉬운 법칙에 손을 대지 못하도록 막은 셈이 됐지요. 그 결과 모두가 완전히 밖으로만 치닫고, 안으로 자신을 살필 줄은 모르게 되었소.

게다가 주자는 생사 륜회의 원리와 인과응보의 법칙을 존재하지도 않는다고 쳐부수고 배척하였소. 그 결과 오륜(五倫)과 여덟 덕성이 무너지고 도덕의 울타리가 부서지게 되었소. 모든 중생이 죄악의 도탄에 빠져 삼악도의 고통을 피하기 어려운 것도 바로 이로부터 비롯되었으니, 어찌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소? 이러한 (도덕 철학상의) 유전병은 몹시 크고 몹시 독하여, 크게 깨달으신 세존(世尊)과 같은 위대한 의왕(醫王)이 아니시면 고칠 수가 없소.

이 말은 내가 오직 그대에게만 하는 말이니, 그대는 어리석은 사람들에게 함부로 말해서는 절대 안 되오. 무심코 지껼였다가는 모두들 칼을 빼들고 덤벼들어 구제할 방법조차 없을까 두렵기 때문이오.

여하튼 일단 부처님께 귀의했으면, 반드시 분수를 알고 인륜을 돈독히 지키며, 정성을 간직하여 삿된 생각을 막으며, 어떠한 악도 짓지 않고 뭇 선은 받들어 행하며, 산 목숨을 보호하여 죽이지 아니하며, 채식하고 념불하면서, 깊은 믿음과 간절한 발원으로 극락 왕생을 위해 전념하여야 할 것이오. 이렇게 스스로 수행하면서 남도 교화해 나간다면, 금생의 이 인연을 결코 헛되이 보내지 않을 수 있으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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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조각 여사에 대한 답신2 (죽음에 임박한사람의 정신의식이 혼미한경우, 대비주를 염송하여 대비수나 향잿물이나 쌀뜨물을 마시게하면, 밝게 정신을 되찾을수 있다오) :

장조각 여사에 대한 답신 2

 

조각(朝覺) 여사 보시오.

15일 편지를 받고 서씨 노부인의 병이 크게 호전된 것을 알았소. 무릇 죽음에 임박한 사람의 정신의식이 혼미한 경우, 대비주(大悲呪)를 염송하여 관음보살의 자비력을 가피 받은 물[大悲水]이나 향잿물[大悲香灰水]이나 쌀뜨물[大悲米水]을 마시게 하면, 모두 밝게 정신을 되찾을 수 있다오. 또 주위에서 념불로 도와 주면, 본인 스스로 념불하면서 갈 수가 있소. 최근 일이 년 사이에 벌써 세 사람이나 그렇게 하였다오.

념불공부로 금생에 이익을 얻고자 한다면, 반드시 지성으로 간절히 늘 염송해야 하오. 그러나 단지 내생의 착한 뿌리만 심기로 한다면, 비록 장난이나 억지로 한 번 념불한 것도, 후세에 반드시 수행할 수 있도록 착한 인연의 싹을 틔우게 되지요. 사실 옛 사람들이 사찰이나 탑을 크게 세운 것도 알고 보면, 모든 사람들이 이들을 한 번 쳐다본 인연 공덕으로 착한 뿌리를 심게 되길 바랐던 마음에서라오. 이 한 구절의 념불 소리가 제8식인 아뢰야식(阿賴耶識)의 터전 가운데 심어져 영원히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지요.

석가모니부처님께서 세상에 살아 계실 때 어떤 노인이 부처님께 귀의하여 출가 수행하려 했다오. 그런데 오백 명의 성중(聖衆: 아라한과를 증득한 부처님의 성문 제자들)이 혜안(慧眼)으로 그 노인을 살펴보니 8만 겁(劫) 동안 어떠한 착한 뿌리도 심은 것이 없길래, 출가 수행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긴 뒤 그를 받아주지 않고 돌려보냈다오. 그래 그 노인이 기수급고독원(祇樹給孤獨園)의 바깥에서 크게 소리내어 울었소. 이 소리를 들은 부처님께서 그를 불러들여 설법해 주시니, 그도 곧 아라한과를 증득했다오. 당연히 오백 성중은 어찌된 까닭인지 어리둥절하여 부처님께 여쭈었소. 이에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오.

“이 사람은 무량겁 이전에 호랑이에게 쫓기다가 급한 김에 나무 위로 기어올랐는데, 그때 엉겹결에 ‘나무불(南無佛)’ 한 구절 염송한 공덕으로 지금 나를 만나 도(道)를 증득한 것이다. 너희들 성문 대중의 도안(道眼)으로 알아볼 수 있는 인연이 결코 아니란다.”

이걸 보면 스스로 념불하기만 하면 정말로 좋다는 것을 알 수 있소. 그러나 본인이 념불하려고 하지 않는 경우에도, 그 사람에게 념불 소리를 듣게 해 주기만 하면 역시 착한 뿌리를 심게 된다오. 오랫동안 계속해서 들으면 그 공덕은 정말 커지오.

무석(無錫) 지방에 요즘 념불하는 사람이 부쩍 늘었다오. 어떤 사람이 채식 요리를 잘하여, 7일 간의 념불법회[佛七]를 열 때마다 으레이 그를 불러다가 요리를 시켰지요. 그래 그 사람이 매일같이 념불 소리를 귀에 박히도록 들었는데, 나중에 그의 아들이 금방 죽게 되자,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했다는 거요.

“아무래도 제가 죽을 것 같은데, 공덕이 없어 좋은 데도 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아버지께서 아버지의 부처님을 저에게 좀 주시면, 제가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겠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대답하였소.

“나는 념불도 하지 않는 사람인데, 어디에 부처님이 있겠냐?”

아들이 다시 말했다오.

“아버지의 부처님은 많기도 매우 많습니다. 아버지께서 단지 ‘그러마’고 한 마디만 말씀하시면, 저는 곧 좋은 데로 갈 수 있는 걸요.”

그러자 아버지가 응락했다오.

“그렇다면 네가 필요한 만큼 부처님을 가져 가거라.”

그리고 나서 그 아들이 죽었다오.

자신은 본디 념불하지 않기 때문에 어떻게 부처님이 있겠느냐고 말하지만, 아는 사람이 보면 다르오. 요리할 때 부엌이 념불하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아, 날마다 많은 사람들이 함께 념불하는 소리를 늘상 듣기 때문에, 그 공덕만도 그만큼 매우 크다는 거요. 이는 무심코 듣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만약 유심히 듣는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더 크겠소? 독경 소리 같으면 구절이 반복되지 않기 때문에,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알아 들을 수는 없지요. 설사 유심히 듣는다고 하더라도 뚜렷하기 어려울 텐데, 하물며 무심코 귓가에 스치는 독경 소리를 얼마나 알아 듣겠소? 그래서 념불의 공덕이 특히 뛰어나다고 하는 거라오.

 

장조각 여사에 대한 답신 1 (인광대사 편지설법)http://blog.daum.net/lotusbud44/375?category=941967

개생 녕생 형제 보시오 2 (인광대사 편지설법)http://blog.daum.net/lotusbud44/368?category=941967

개생 녕생 형제 보시오 1 (인광대사 편지설법)http://blog.daum.net/lotusbud44/369?category=9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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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덕전 거사에 대한 답신 (세가지를 모두갖춘 자식을 얻고자 한다면...여인이 해산할때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염송하면 절대 고통이 없을 것이오) :

장덕전(張德田) 거사에 대한 답신

 

덕전(德田) 거사 보시오.

자식을 구하는 길을 사람들은 대부분 거꾸로 가고 있소. 그대가 몸이 건장하며 성품이 어질고 착하면서 복록과 지혜와 수명 세 가지를 모두 갖춘 자식을 얻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내가 알려 주는 대로 따라 하여야 뜻을 이룰 수 있소.

세상 사람들은 자식이 없으면, 대부분 첩이나 소실을 거느리고 정력강장제를 끊이지 않고 먹으면서 동침[房事]을 일삼지요. 그러나 이는 일찍 죽는 첩경일 뿐, 결코 자식을 구하는 올바른 방도가 아니라오. 요행히 자식을 얻는다고 할지라도, 마치 쭉정이 나락을 씨 뿌리는 것과 같아서 싹이 제대로 나지도 않거나, 싹이 튼다고 할지라도 제대로 자라서 익기 어렵소.

제일 중요한 것은, 우선 반년이나 적어도 백 일 이상 동침을 끊는 일이오. 물론 그 기간은 길수록 더욱 좋소. 이 사실을 아내에게 잘 설명해 주고, 서로 이러한 관념으로 각기 다른 방에 별거하는 거요. 만약 방이 많지 않으면 반드시 별도의 침대를 사용하시오. 평소에 아내를 절대로 아내로 생각하지 말고 누이로 여기며, 한 순간의 삿된 생각도 감히 일으키지 않아야 할 것이오.

몸을 충분히 보양한 뒤, 아내가 월경이 깨끗해지기를 기다렸다가, 모름지기 날씨가 맑고 밝으며[淸明] 길하고 상서로운[吉祥] 날짜를 택해 밤에 한 번 동침하면 반드시 임신하게 될 것이오. 그 뒤로는 완전히 동침을 끊어야 하오. 적어도 아기를 낳은 뒤 백 일은 지나고서야 바야흐로 다시 동침할 수 있소.

아내가 아기를 가진 뒤, 한 번 동침을 할 때마다, 아기보[胞]가 한 번씩 더 두터워지고, 태독(胎毒)도 한 차례씩 더 무거워지는 법이오. 게다가 자궁이 자주 열리기 때문에, 낙태나 유산을 초래할 수도 있소. 이러한 금기(禁忌)는 사람들이 대부분 잘 모르고, 설령 아는 사람이 있다손 치더라도 이를 잘 따르려 하지 않는다오. 그래서 더러는 아이를 낳지도 못하거나, 낳더라도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하고 허약하게 시름거리다가 요절하는 경우가 많소. 자기가 마음을 잘 쓰지 못하는 줄은 모르고, 도리어 운명이 좋지 못하다고 투덜거리며, 또 다시 동침을 항다반사로 일삼는 게요. 매일같이 동침하면 죽지 않는 것만도 천만 다행으로 알아야 해요.

또 마음을 자비롭고 선량하게 지니며, 남을 이롭게 하고 만물을 이롭게 하여야 하오. 남과 만물을 이롭게 하는 데에 반드시 돈을 들여야 하는 것은 아니오. 좋은 마음을 품고 좋은 말을 하여 좋은 일을 하는 것으로 충분하오. 무릇 이익이 되지 않는 마음과 말과 일은, 한결같이 품지도 말고 입 밖에 내지도 말며 몸으로 행하지도 않는 거요. 온몸이 모두 태평스럽고 온화한 원기[太和之氣]로 가득하면, 저절로 생기(生機)가 발랄하게 피어나는 법이라오.

또 모름지기 지성으로 ‘나무 관세음보살’을 염송하는 버릇을 들여야 하오. 많이 염송할수록 더욱 좋겠지요. 아침저녁으로 보살상 앞에 예배(禮拜) 드리면서 어느 정도 염송하고, 그밖에 다니고 머물고 앉고 눕는 모든 생활 속에서도 수시로 잘 염송하는 거요. 잠들 때까지도 염송하는 것은 좋지만, 마음에 공경을 잘 간직해야 함은 물론이오. 속옷은 차려 입어 알몸을 드러내는 일이 없어야 하고, 이때는 소리를 내지 않고 묵송하는 것이 좋겠소. 묵송할 때 만약 글자가 너무 많아 잘 염송하기 어려우면 ‘나무’ 두 글자는 생략하고 ‘관세음보살’ 다섯 글자만 염송해도 괜찮소. 백의주(白衣呪)는 염송해도 좋고 염송하지 않아도 무방하오.

그대 자신이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며 염송함은 물론, 그대의 아내에게도 이와 같이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하며 염송하도록 일러야 하오. 아이를 낳을 때까지 이렇게 계속하는데, 출산 때에는 속으로 묵송해서는 안 되고 소리 내어 염송하여야 되오. 옆에서 돌보는 사람들도 함께 큰 소리로 염송하여 힘껏 도와주면, 고통이나 난산이 없는 분만을 보장할 수 있소. 특히 해산 때에는 묵송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기를 힘껏 몸 밖으로 내보내는데 속으로 염송하다가는 자칫 호흡조절 잘못으로 병을 얻을 염려가 있기 때문이오.

그리고 여인은 일단 아기를 가지게 되면 화를 내서는 안 되오. 화를 크게 내면 낙태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난폭한 분노(忿怒)의 기운이 태아에게 물들어 자식의 심성이 흉악해지기 쉽소. 또 아이에게 젖을 먹일 때에는 반드시 심기(心氣)가 평화로워야 하오. 만약 화를 크게 내면 젖이 독으로 변하여 심하면 즉사하거나, 반나절이나 하루 만에 죽게 만들 것이오. 화를 적게 내면 독도 약해 비록 죽기까지는 않지만, 병에 걸리기 쉽소. 그래서 화 내기 좋아하는 여인의 아이들은 죽는 경우도 많고 병치레하는 경우도 많다오. 이는 자기가 몸소 젖을 먹이거나 유모를 들여 대신 먹이거나 모두 한가지요.

혹시라도 크게 화를 낸 경우에는, 절대로 젖을 아이에게 물려서는 안 되오. 반드시 그 자리에서 바로 모든 것을 놓아 버리고 마음과 기분을 차분하고 온화하게 가라앉힌 뒤, 적어도 반나절은 지난 다음에 젖을 주어야 하오. 젖을 물릴 때에도 먼저 젖을 반 잔 이상은 짜내 버리고, 젖꼭지를 깨끗이 씻은 뒤 젖을 주어야 별 탈이 없게 되오. 만약 마음속에 아직도 화가 들끓고 있다면, 하루 동안 젖을 먹여서는 안 되오. 그냥 젖을 물리는 경우에는, 죽지 않으면 큰 병에 걸릴 것이오.

이러한 사정은 고금의 의약 서적들이 전혀 밝히지 못한 내용인데, 최근에야 보고 들어 비로소 그 재앙을 알게 되었소. 여자는 모름지기 어려서부터 부드럽고 온화하며 겸손하도록 배우고 익혀야 하오. 그래야 나중에 아이를 낳을 때 낳기도 쉽고 낳은 아이가 반드시 착하며, 또 죽거나 병들지 않고 잘 자라게 되기 때문이오. 무릇 아이들이 어려서 죽거나 병드는 것은 절반 이상이 모두 그 어머니가 화를 내기 때문이고, 나머지 절반 이하는 자기가 전생 업장으로 운명이 나쁘게 타고난 때문이라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젖이 독으로 변해 죽인 아이들이 갠지스 강[恒河]의 모래알 수보다 몇 배나 더 많은지 모르겠소. 그러니 슬프지 않겠소?

그대가 어버이를 기쁘게 해 드리려고 하기 때문에, 내가 그대에게 자세히 이야기해 주는 거요. 그대 어머님께 채식하며 념불하여 극락 왕생을 발원하도록 권해 드리고, 그대와 그대 아내도 또한 그렇게 행하여야 할 것이오. 지혜롭게 살피길 바라오.

 

당도용 여사에 대한 답신 http://blog.daum.net/lotusbud44/376?category=941967

주진혜정 여사에 대한 답신 (인광대사 편지설법)http://blog.daum.net/lotusbud44/377?category=9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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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손 거사에 대한 답신 (육식이 얼마나 비위생적이며 해독이크며 목숨빚을 얼마나 짊어지는줄 잘모르기때문이오. 많이먹으면 많이갚고,적게먹으면 적게갚고, 안먹으면 안갚아도 되는것이 바로 목숨빚이기 때문이오) :

화손(華蓀) 거사에 대한 답신

 

화손(華蓀) 거사 보시오.

화손(華蓀)은 직업상 수행하기가 자못 어렵겠소. 그러나 정성스러운 마음[誠心]만 있다면 저절로 어떤 감응(感應)이 있게 마련이오. 여기에 구체적인 사실 한 가지를 예로 들어 보겠소.

북경(北京)의 부성문(阜城門) 안 한길 가에 구여춘(九如春)이라는 커다란 육식 요리집이 있었는데, 장사가 아주 잘되었다오. 그런데 하루 밤에는 지배인이 악몽을 꾸었는데, 수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몰려와서 목숨을 내 놓으라고 하는 거였소. 그는 마음으로 그들이 자기가 잡아죽인 짐승들인 줄 즉각 알아채고서, 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오.

“나 한 사람이 그대들 수많은 사람의 목숨(빚)을 갚는다면, 어떻게 다 청산할 수 있겠소? 내가 오늘부터 이 음식점 영업을 그만두고 나서, 스님 몇 분을 모셔다가 념불과 독경으로 그대들을 천도(薦渡)시켜 주도록 청하리라. 좋겠소?”

그러자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다고 허락하였는데, 몇몇 사람은 받아들이지 않고 도리어 따지고 들었소.

“네가 몇 천 원이나 몇 백 원을 벌려고 우리들을 죽였는데, 우리가 얼마나 고통 받은 지 아느냐? 그냥 이렇게 마무리 짓는다면, 네가 너무 횡재하는 거지. 안 돼!”

이때 대부분 사람들이 그들 몇몇 사람을 설득하여 말했소.

“저 사람이 만약 이렇게만 한다면, 피차간에 서로 좋은 거니, 저 사람 제의를 받아들입시다.”

그러자 몇몇 사람은 “저 사람이 반드시 실행해야만 된다.”고 별르는 거였소. 이에 지배인은 곧장 “틀림없이 실행하겠소. 만약 내가 그렇게 않는다면, 그때 다시 나를 찾아 오시오.”라고 대답했지요.

그리하여 그 사람들은 물러가고 지배인은 꿈에서 깨어났다오. 마침 새벽녘 짐승들을 잡을 시간이 되어 점원들이 일어나 도살을 준비하는데, 그만 닭과 오리들이 우리 밖으로 뛰쳐 나와 사방으로 달아난 거요. 점원이 부랴부랴 지배인을 깨우며 상황을 알리자, 지배인은 이렇게 선언했소.

“오늘 우리 식당은 문을 열지도 않고 짐승도 잡지 않는다. 우리를 뛰쳐나온 닭과 오리는 점포 안에 있는 것은 잡아 가두고, 점포 밖으로 나간 것은 가는 대로 내버려 두어라.”

날이 밝자, 지배인은 주인을 오라고 요청하여 간밤 꿈을 이야기 한 뒤, 다시는 절대로 지배인 노릇 안 하겠다며 사의(辭意)를 밝혔소. 그러자 주인은 그 자리에서 선뜻 이렇게 제안했다오.

“그대가 정말로 산 목숨을 죽이고 싶지 않다면, 우리는 영업규칙을 바꾸어 채식 요리집을 차려도 괜찮소.”

그리하여 채식 전문점으로 바꾸고, 이름은 그대로 ‘구여춘’이라고 썼다오. 그로 말미암아 채식하는 사람이 제법 많아지고 장사는 더욱 잘되었다는 거요.

그대가 정말로 남을 이롭게 하고 중생을 이롭게 하는 마음으로 발원한다면, 부처님과 관세음보살의 성호를 지성으로 염송하여 주인과 지배인에게 자비력이 가피(加被)되도록 기도해 보시오. 그러면 그들이 돼지 잡는 일을 그만두게 될 수 있다오.

그대 어머님이 그대를 아끼는 나머지 “채식하면 몸이 여위고 허약해진다.”고 말씀하시는 것은, 육식이 얼마나 비위생적이고 해독이 크며, 또 목숨 빚을 얼마나 짊어지는 줄 잘 모르시기 때문이오. 그대 어머님께도 채식하며 념불하여 극락 왕생을 기원하도록 간곡히 권해 드리고, 아내와 아이들에게도 채식하도록 일러야 할 것이오.

만약 깨끗한 채식[淨素]을 할 수 없다면, 적어도 집 안에서 산 목숨을 죽이지 않는 일만은 지켜야 하오. 그렇지만 시장에서 파는 고기도 많이 먹어서는 안 되오. 많이 먹으면 많이 갚고, 적게 먹으면 적게 갚으며, 안 먹으면 안 갚아도 되는 것이 바로 목숨 빚이기 때문이오. 그대가 만약 음식점 지배인과 주인 사이의 꿈 이야기로 사람들을 감동시킨다면, 앞으로 채식을 제창하는 분위기가 갈수록 번져나갈 것이오. 그대로부터 그러한 공덕이 비롯된다면, 그로 말미암아 중생이 받게 될 이익은 무척이나 크리다.

이번에 그대의 법명을 종원(宗願)이라고 지어 보내오. 종(宗)은 줏대[主]를 가리키는데, 줏대가 있으면 다른 법문에 흔들리거나 이끌려 가지 않는다는 뜻이오. 념불에 믿음과 발원이 있으면 림종에 틀림없이 극락 왕생하지만, 믿음과 발원이 없으면 단지 인간 세상과 천상의 복록을 보답으로 받게 될 뿐이라오. 믿음만 있고 발원은 없으면 진실한 믿음이라 말할 수 없소. 반대로 발원만 하고 믿음이 없어도 진실한 믿음이라 말할 수 없소. 믿음과 발원 이 두 가지 법은 마치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와 같아서, 어느 하나라도 빠져서는 결코 안 되오.

 

[이는 형제인 듯한 림포와 화손 두 거사에게 함께 답신하면서, 종신(宗信)과 종원(宗願)의 법명을 지어 보내며, 수레의 두 바퀴와 새의 두 날개처럼 서로 협동 조화를 잘 이루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음.]

 

그 밖에 자세한 내용은 수시로 내 『문초』나 『가언록(嘉言錄)』을 읽고 닦도록 하시오.

 

손경택 거사에 대한 답신 (상례에 술과고기를 써서는 안됨)http://blog.daum.net/lotusbud44/367?category=941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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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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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답댓글 작성자아미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1 감사합니다() 근데 클릭주소표시가 잘못되어 있어서 다시 수정해 올립니다 죄송.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전법심 | 작성시간 20.09.21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 답댓글 작성자아미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09.21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작성자경원리 | 작성시간 20.09.28 감사드립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 답댓글 작성자아미연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0.10.09 감사합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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