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튼 밖의 雪國을 다스리다 / 양미경
겨울이 오면 꼭 한 번은 저질러 보고 싶은 게 있었다. 눈 덮인 산속 오두막에서 며칠간은 세상으로부터 잊히고 싶은 것이다. 그리되면 60여 년간을 짓누른 나의 일상적 무게에서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지 않을까 해서다. 가끔 힐링 개념으로 찾는 오두막이 지리산 중턱에 있다. 그곳에서 눈을 볼 때도 있지만, 햇빛 나기가 무섭게 이내 녹아버려 나의 바람은 무참해지기 일쑤였다.
지난해 정월, 대설주의보를 듣고 용기를 내어 2박 3일 일정으로 오두막을 찾았다. 아침에 일어나 창을 여니 반갑다고 눈바람이 안겨들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눈발은 커다란 함박눈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눈송이가 얼마나 큰지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가 사박사박 들릴 정도였다.
서너 시간이 지나자 눈은 50㎝가 넘게 쌓여갔다, 차에도, 테라스에도, 소나무에도. 나는 사진을 찍어 가족 단톡방에 올리고, 후배들에게도 보내느라 부산을 떨었다. 며늘아기들은 어머니 소원 성취하셨다며 응원을 보내왔고, 후배도 부럽다며 덕담을 전해왔다. 일정대로라면 이튿날은 하산해야 하는데 꼬불꼬불한 산길이 얼게 되면 그때는 꼼짝없이 눈 속에 갇히게 된다. 내가 생각한 것이 바로 그것이었다.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뉴스는 호남과 서부 경남지방에 폭설을 예보하고 있었다. 만족감이 설층(雪層)처럼 쌓여갔다. 그간의 세월에 눈 쌓인 계곡에 홀로 갇히는 자유를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나는 하염없이 쌓여가는 눈을 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전화했다.
“여보, 눈이 쌓여 썰매를 타도 좋겠어요?”
“눈길 운전은 절대 안 되니, 다 녹으면 와요.”
이미 세상은 백색으로 변해 있었다. 산도 계곡도 하늘도 내 마음까지도 온통 하얀 세상이었다. 여름엔 초록 세상이다가 단풍의 계절로 접어들더니 이내 순백의 세상에 갇히고 보니 나는 우주를 통틀어 이곳 눈의 나라를 지키는 단 한 사람의 군주였다. 세상과 단절된 완벽하게 고독한 사람을 꿈꾸었는데 그때의 내 모습이 딱 그랬다. 고독한 이 시간이 이리도 행복한 일인가에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오전 한나절을 내리던 폭설은 계곡의 물소리마저 얼어버려 모든 것이 눈 아래 잠잠했다. 난간에 기대어 하얀 눈을 바라보다가 문득 생각난 것이 있었다. 내가 눈 속에 묻혀 홀로 지내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치유의 의식에 기인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삶은 어느 의미에서 상처다. 우리는 자연을 즐기며 삶에서 받은 여러 상처를 힐링한다지만 식물은 식물대로, 동물은 동물대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는 관계가 된다. 사람들은 자신이 만든 무대에서 살아가고 자연은 자연대로 그들만의 세상에서 또 그렇게 살아간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사람이든 자연이든 상처 아닌 것이 어디 있으랴. 바람에 가지가 꺾이고 둥치가 휘거나 때로는 산불에게 저 자신을 온통 공양하는 나무들…. 동물도 사람과 마찬가지로 먹이를 찾거나 자기 영역을 지키기에 사생결단으로 용을 쓰며 살아간다.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거나 세상은 숱한 상처로 점철되어 있다. 하늘에서 만나 가루처럼 내리는 눈은 그 같은 상처들을 치유의 손길로 하얗게 안아주는 축복과 위안이라 할만했다
모든 상처는 관계에서 비롯된다. 누구나 조금씩은 자기중심적인 생각을 하게 되고 결국 그 같은 것들이 서로에게 상처로 돌아온다. 그런 상처들이 더께처럼 쌓여가다 덧나면 견딜 수 없는 후유증을 유발한다. 사람들이 혼자서 여행을 떠나는 것도 치유 의식의 하나로 볼 수 있으리라.
눈의 세계로 혼자 떠나는 나 또한 대담한 모험심이 필요했다.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어느 사람도 내게 다가올 수 없는 순백에의 세계. 오늘 하루만은 雪國을 호령하는 여왕으로 자처해도 그 누가 나무랄 것인가.
이 백 년은 족히 됨직한 소나무 우듬지에 앉은 산까치와 눈이 마주쳤다. 나는 팔을 뻗어 그놈에게 말했다.
“너를, 눈의 나라 여왕의 호위무사로 삼겠다. 내려와서 작위를 받으시오!”
산까치가 눈을 말똥거리더니 무슨 객쩍은 소리냐는 듯 날아가 버렸다. 가지 끝의 눈이 뭉텅이로 떨어졌다. 나는 피식 웃으며 생각했다. 호위무사가 군주를 위해 호박 마차를 대령하려나
종일 설경을 쳐다만 봐도 행복했다. 혼자서 맞이하는 밤. 벽난로에선 장작이 타고, 고구마가 익어가고 있으니 마냥 배가 부르고 따뜻했다. 산 고양이는 야옹, 장작은 톡톡, 이럴 때를 어느 시인이 ‘먼 데서 여인의 옷 벗는 소리’라 노래했던가. 홀로이 깨어있는 밤은 음악 소리마저 평온했다. 음악 소리를 가깝게 끌어당기다가 잠을 들었다.
새벽녘에 커튼을 걷고 밖을 살펴보았다. 군주로서 당연한 임무다. 눈은 그쳤고 어두컴컴한 천지가 온통 새하얗다, 숄을 걸치고 테라스로 친정을 나갔다. 나는 ‘운서리(雲棲里)’ 눈의 나라의 지배자인 내 발자국을 선명하게 내리찍었다. 몇 시간 후면 또다시 세상으로 나가 얽히고설킨 세속의 여러 인연과 종횡으로 엮이며 해후하기에 바쁘리라. 하지만 마음은 오래도록 雪國을 다스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