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대상5:11-26
찬송 :
[성경 읽기]
11 갓 자손은 르우벤 사람을 마주 대하여 바산 땅에 거주하면서 살르가까지 다다랐으니
12 우두머리는 요엘이요 다음은 사밤이요 또 야내와 바산에 산 사밧이요
13 그 조상의 가문의 형제들은 미가엘과 므술람과 세바와 요래와 야간과 시아와 에벨 일곱 명이니
14 이는 다 아비하일의 아들들이라 아비하일은 후리의 아들이요 야로아의 손자요 길르앗의 증손이요 미가엘의 현손이요 여시새의 오대 손이요 야도의 육대 손이요 부스의 칠대 손이며
15 또 구니의 손자 압디엘의 아들 아히가 우두머리가 되었고
16 그들이 바산 길르앗과 그 마을과 사론의 모든 들에 거주하여 그 사방 변두리에 다다랐더라
17 이상은 유다 왕 요담 때와 이스라엘 왕 여로보암 때에 족보에 기록되었더라
18 르우벤 자손과 갓 사람과 므낫세 반 지파에서 나가 싸울 만한 용사 곧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겨 싸움에 익숙한 자는 사만 사천칠백육십 명이라
19 그들이 하갈 사람과 여두르와 나비스와 노답과 싸우는 중에
20 도우심을 입었으므로 하갈 사람과 그들과 함께 있는 자들이 다 그들의 손에 패하였으니 이는 그들이 싸울 때에 하나님께 의뢰하고 부르짖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에게 응답하셨음이라
21 그들이 대적의 짐승 곧 낙타 오만 마리와 양 이십오만 마리와 나귀 이천 마리를 빼앗으며 사람 십만 명을 사로잡았고
22 죽임을 당한 자가 많았으니 이 싸움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그들이 그들의 땅에 거주하여 사로잡힐 때까지 이르렀더라
23 므낫세 반 지파 자손들이 그 땅에 거주하면서 그들이 번성하여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다다랐으며
24 그들의 족장은 에벨과 이시와 엘리엘과 아스리엘과 예레미야와 호다위야와 야디엘이며 다 용감하고 유명한 족장이었더라
25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간음하듯 섬긴지라
26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곧 르우벤과 갓과 므낫세 반 지파를 사로잡아 할라와 하볼과 하라와 고산 강 가에 옮긴지라 그들이 오늘까지 거기에 있으니라
[구조 분석 및 주석]
역대상 5:11-26은 갓 지파의 족보와 정착(11-17절),
르우벤·갓·므낫세 반 지파의 전쟁과 승리(18-22절),
그리고 그들의 배교와 포로(23-26절)라는 세 부분으로 구성됩니다.
이 단락은 단순한 족보 기록이 아니라,
"언약적 충성 → 하나님의 도움 → 배교 → 심판"
이라는 역대기 신학의 핵심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역대상 5:11-26은 갓 지파의 족보(11-17절)에서 시작하여,
요단 동편 지파들의 전쟁과 번영(18-22절),
그리고 우상숭배로 인한 멸망과 포로(23-26절)로 이어지는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락은 단순한 족보 기록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할 때의 승리와 하나님을 배반할 때의 심판"이라는 신학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I. 갓 지파의 족보와 거주지 (5:11-17)
A. 갓 자손의 거주지 (11절)
"갓 자손은 르우벤 사람의 맞은편 바산 땅에 거주하여..."
주석
- "르우벤 사람의 맞은편"은 요단 동편에서 르우벤 지파 북쪽에 위치했음을 보여준다.
- "바산"은 비옥한 목초지와 넓은 평야로 유명한 지역이다.
해설
저자는 먼저 갓 지파가 어디에 정착했는지 설명한다.
이는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약속의 땅을 각 지파에게 분배하셨음을 상기시킨다.
B. 갓 지파의 족보 (12-15절)
1) 주요 가문 지도자들 (12-13절)
- 요엘
- 사밤
- 야내
- 사밧 등
주석
- 족보는 개인보다 가문과 씨족 단위를 강조한다.
- 각 이름은 갓 지파 내부의 행정적·군사적 조직을 암시한다.
2) 조상의 계보 (14-15절)
주석
- "아비하일"까지 이어지는 긴 계보는 혈통의 정통성을 보여준다.
- 포로 이후 공동체에게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언약 백성"이라는 정체성을 확인시켜 준다.
해설
족보는 현대 독자에게는 지루하게 보일 수 있지만, 역대기 저자에게는 매우 중요하다.
포로기 이후 귀환한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다시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C. 인구 조사 기록 (16-17절)
주석
- "길르앗", "바산", "사론"은 갓 지파의 활동 범위를 보여준다.
- "요담 왕 때"와 "여로보암 왕 때"는 역사적 기준점을 제공한다.
해설
이 부분은 갓 지파가 상당한 세력과 조직력을 가진 공동체였음을 보여준다.
단순한 가족 집단이 아니라 안정된 행정 체계를 가진 지파였다.
II. 요단 동편 지파들의 전쟁과 승리 (5:18-22)
A. 전쟁에 나간 군사력 (18절)
주석
- 르우벤, 갓, 므낫세 반 지파가 연합한다.
- "방패와 칼을 잡고 활을 당기는 자"는 정규 군대를 의미한다.
- 병력 수는 44,760명으로 기록된다.
해설
요단 동편 지파들은 목축 생활을 했지만 동시에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주변 유목 민족의 침입에 대응해야 했기 때문이다.
B. 하갈 사람들과의 전쟁 (19절)
주석
- 하갈 사람들은 아브라함의 첩 하갈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아라비아 계통 부족이다.
- 여두르, 나비스, 노답도 같은 유목 부족들이다.
해설
이 전쟁은 단순한 영토 분쟁이 아니라 생존을 위한 전투였다.
목축 사회에서는 물과 초지를 확보하는 것이 매우 중요했다.
C. 하나님께 부르짖음과 승리 (20절)
"그들이 하나님께 부르짖으매..."
주석
- 역대기의 핵심 신학이 드러나는 구절이다.
- 승리의 원인이 군사력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신뢰라고 설명한다.
해설
저자는 의도적으로 전쟁 기술보다 신앙을 강조한다.
병력이 많았기 때문에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했기 때문에 승리했다는 것이다.
D. 전리품과 번영 (21-22절)
주석
- 낙타 5만 마리
- 양 25만 마리
- 나귀 2천 마리
- 포로 10만 명
22절의
"그 전쟁은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는 단락 전체의 결론이다.
해설
승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의 결과였고, 그 결과로 지파들은 크게 번성하게 되었다.
역대기 저자는 모든 번영의 근원을 하나님께 둔다.
III. 므낫세 반 지파의 확장과 타락 (5:23-26)
A. 므낫세 반 지파의 번성 (23-24절)
주석
- 바산에서 헤르몬 산까지 거주지가 확장된다.
- "용사", "유명한 자", "족장"이라는 표현이 반복된다.
해설
이들은 군사력과 영향력을 가진 강력한 공동체로 성장했다.
인간적으로 보면 성공한 지파였다.
B. 하나님께 대한 배반 (25절)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주석
- "음행하였다"는 표현은 영적 간음을 의미한다.
- 가나안 종교와 우상숭배를 가리킨다.
해설
앞 단락의 승리와 대조가 시작된다.
하나님을 의지했던 조상들과 달리 후손들은 하나님을 떠났다.
C. 심판과 포로 (26절)
주석
- 앗수르 왕
불 왕
디글랏빌레셀 - 북이스라엘 멸망 이전에 요단 동편 지파들이 먼저 포로가 되었다.
해설
하나님께서는 앗수르를 심판의 도구로 사용하셨다.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는 승리를 주셨지만, 하나님을 버렸을 때는 포로가 되게 하셨다.
역대기 저자는 이것을 단순한 국제정치의 결과가 아니라 영적 원인으로 해석한다.
문학적·신학적 구조
다음과 같은 대칭 구조를 볼 수 있다.
| 단락 | 내용 | 신학적 의미 |
| 11-17절 | 갓 지파의 족보와 정착 | 언약 백성의 정체성 |
| 18-22절 | 하나님을 의지하여 승리 | 순종 → 구원 |
| 23-24절 | 므낫세 반 지파의 번성 | 하나님의 축복 |
| 25-26절 | 우상숭배와 포로 | 불순종 → 심판 |
즉, 역대상 5:11-26은 단순히 족보를 나열하는 본문이 아니라,
정체성(11-17) →*신뢰와 승리(18-22) → 번영(23-24) → 배반과 심판(25-26)
이라는 흐름으로 전개된다.
역대기 저자는 포로기 이후 독자들에게 "하나님을*의지하면 승리하지만,
하나님을 버리면 결국 포로가 된다"는
언약 신학의 원리를 이 단락 전체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와 하나님을 떠날 때
본문: 역대상 5:11-26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생활을 마치고 약속의 땅 가나안을 눈앞에 두고 있을 때,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모세에게 특별한 요청을 합니다.
그들은 요단강 동편 지역을 둘러보며 그 땅이 자신들에게 매우 적합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목축을 주업으로 하는 지파였는데, 길르앗과 바산 지역은 넓은 초지와 풍부한 목초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요단강을 건너 서편 가나안 땅으로 들어가지 않고 동편에 정착하게 해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후 므낫세 지파의 절반도 그 지역에 함께 정착하게 되면서 이른바 "요단 동편 2지파 반"이 형성되었습니다.
처음에 모세는 크게 염려했습니다.
가데스 바네아에서 열 명의 정탐꾼이 백성들의 마음을 낙심시켜 가나안 입성을 좌절시켰던 사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혹시 이들의 선택이 형제들의 사기를 꺾고 하나님의 약속을 포기하는 행동이 아닌가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르우벤 지파와 갓 지파는 자신들이 먼저 무장하고 앞장서서 전쟁에 참여할 것이며,
모든 지파가 기업을 얻을 때까지 돌아오지 않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요청을 허락하셨고, 그들은 요단 동편에 기업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요단 동편은 축복의 땅인 동시에 위험한 땅이었습니다.
지리적으로 볼 때 그들은 약속의 땅 중심부가 아니라 경계 지역에 위치했습니다.
요단강이라는 자연적 경계 너머에 있었기 때문에 다른 지파들과의 교류가 상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주변에는 아람 족속과 아라비아 유목 민족들이 살고 있었고,
끊임없는 침략과 문화적 영향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들은 가장 먼저 외적의 공격을 받을 수 있는 위치에 있었고,
동시에 가장 쉽게 이방 문화에 노출될 수 있는 환경 속에 살았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요단 동편 2지파 반의 역사를 "경계에 선 백성의 역사"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었지만 항상 세상과 맞닿아 있는 곳에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누렸지만 동시에 세상의 유혹도 가장 가까이에서 경험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비슷한 환경 속에 살아갑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교회 안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직장과 학교, 가정과 사회 속에서 살아갑니다.
날마다 세상의 가치관과 마주하고,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선택해야 하는 순간들을 경험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도 어쩌면 요단 동편 2지파 반과 같은 위치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들의 역사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점은 본문이 단순히 족보를 기록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역대기 저자는 이들의 역사를 통해 한 가지 중요한 진리를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는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지만,
하나님을 떠났을 때는 가장 먼저 무너지고 말았다는 사실입니다.
본문은 성공과 실패의 원인을 환경에서 찾지 않습니다.
지리적 조건이나 군사력, 경제력에서도 찾지 않습니다.
오직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찾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면 승리했고, 하나님을 떠나면 멸망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당신은 지금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본문은 요단 동편 2지파 반의 역사를 통해
하나님을 신뢰하는 삶과 하나님을 떠난 삶의 결과가 얼마나 다른지를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1.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승리를 주신다 (18-22절)
본문 18절부터 22절은 요단 동편의 르우벤 지파, 갓 지파, 므낫세 반 지파가 하갈 사람들과 전쟁을 벌인 사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본문은 먼저 그들의 군사력을 소개합니다.
"능히 방패와 칼을 들며 활을 당기고 싸움을 잘하는 자가 사만 사천 칠백육십 명이라"(18절)
이 숫자는 당시로서는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었습니다.
더욱이 본문은 그들이 단순한 농부나 목자가 아니라 무기를 다룰 줄 알고 전투 경험을 갖춘 용사들이었다고 설명합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승리할 만한 충분한 조건을 갖춘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의도적으로 그들의 군사력에 초점을 맞추지 않습니다.
오히려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에 있었던 영적 사건을 강조합니다.
20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들이 전쟁할 때에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하갈 사람과 그와 함께한 모든 자를 그들의 손에 넘기셨으니"
여기서 중요한 표현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였다"는 말입니다.
원문이 가진 의미는 단순히 형식적인 기도를 했다는 정도가 아닙니다.
절박한 상황 속에서 하나님께 부르짖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이길 수 없음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간구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무기를 가지고 있었지만 무기를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병력이 있었지만 병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전투 경험이 있었지만 경험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많은 경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이 클수록 하나님을 덜 의지하려고 합니다.
재능이 많으면 재능을 믿고, 돈이 많으면 돈을 믿고, 경험이 많으면 경험을 믿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백성은 자신의 조건보다 하나님을 더 신뢰하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들을 통해 일하셨습니다.
모세는 자신의 능력이 부족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나님을 의지하여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었습니다.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무너뜨릴 때 군사 전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랐습니다.
기드온은 삼백 명의 군사만 남겨 둔 채 미디안 대군과 싸워야 했습니다.
다윗은 골리앗 앞에서 칼과 창이 아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을 통해 역사하셨습니다.
본문의 요단 동편 지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전쟁의 한복판에서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특별히 20절 후반부는 승리의 이유를 더욱 분명하게 설명합니다.
"이는 그들이 하나님을 의지하였기 때문이라"
이 한 문장은 본문 전체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왜 승리했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그들의 적을 넘겨주셨습니까?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22절은 이 전쟁의 결론을 다음과 같이 선언합니다.
"그 전쟁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음이라"
역대기 저자는 승리의 공로를 인간에게 돌리지 않습니다.
훌륭한 지휘관 때문도 아니고 뛰어난 무기 때문도 아니고 우연한 행운 때문도 아니라고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개입하셨기 때문에 승리한 것입니다.
사실 이것이 믿음의 사람과 세상 사람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세상은 결과를 보고 인간의 능력을 칭찬합니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결과를 통해 하나님의 손길을 봅니다.
사람들은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도우셨다"고 말합니다.
사람들은 "내가 잘했다"고 말하지만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에도 수많은 전쟁이 있습니다.
신앙의 전쟁이 있고, 가정의 전쟁이 있고, 직장의 전쟁이 있습니다.
건강과 경제, 인간관계의 문제로 씨름하기도 합니다.
그때 우리는 흔히 문제의 크기만 바라봅니다.
상대가 얼마나 강한지, 상황이 얼마나 어려운지만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다른 곳을 바라보라고 말씀합니다.
문제의 크기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크기가 중요합니다.
적의 힘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중요합니다.
내가 얼마나 강한가보다 내가 누구를 의지하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먼저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방법을 다 동원한 후 마지막에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먼저 하나님께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은 결코 약한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가장 강한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힘이 아니라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을 의지하기 때문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의 승리는 바로 이 사실을 증언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친히 싸워 주시고,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허락하십니다.
2. 하나님이 주신 축복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위한 것이다 (23-24절)
하갈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본문은 자연스럽게 므낫세 반 지파의 번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23절과 24절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므낫세 반 지파의 자손들은 그 땅에 거주하면서 바산에서부터 바알헤르몬과 스닐과 헤르몬 산까지 미쳤으며 그 수가 많아졌더라."
이 말씀은 단순한 지리 정보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얼마나 풍성한 축복을 주셨는지를 보여 주는 표현입니다.
그들의 거주지는 점점 넓어졌고, 인구는 증가했으며,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24절은 그들을 가리켜
"그들의 종족의 우두머리요 용감한 군인이요 유명한 사람이며 족장들"
이라고 소개합니다.
그들은 군사적으로도 강했습니다.
경제적으로도 안정되었습니다.
사회적으로도 영향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는 지도자들도 많이 배출했습니다.
한마디로 말하면 성공한 공동체였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부족한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복이 그들의 삶 가운데 풍성하게 나타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중요한 진리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축복의 목적은 단순히 잘 먹고 잘 살게 하는 데 있지 않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그 복을 통해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하나님을 더 의지하며, 하나님을 더 영화롭게 하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종종 축복을 받으면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보다 축복 자체에 마음을 빼앗깁니다.
하나님보다 건강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물질을 사랑하고,
하나님보다 성공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축복은 더 이상 축복이 아니라 우상이 됩니다.
신명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반복해서 경고하셨습니다.
"네가 먹어서 배부르고 아름다운 집을 짓고 거주하게 되며 ...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신 8장)
흥미롭게도 하나님께서는 가난 때문에 하나님을 잊을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풍요 때문에 하나님을 잊을 수 있다고 경고하셨습니다.
고난은 사람을 기도하게 만듭니다.
병상에서는 하나님을 찾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는 하나님께 매달립니다.
인생이 무너질 때는 하나님 앞에 엎드립니다.
그런데 형통함은 종종 사람을 교만하게 만듭니다.
기도하지 않아도 살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없이도 괜찮다고 생각합니다.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다고 착각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가난보다 풍요를 더 경계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의 역사를 살펴보면 가장 큰 영적 타락은 언제나 번영의 시기에 찾아왔습니다.
광야에서는 만나가 없으면 살 수 없었기에 하나님을 의지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정착하여 곡식 창고가 가득 차고 포도원이 풍성해지자 점점 하나님을 잊기 시작했습니다.
사사 시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고난이 오면 하나님께 부르짖었고,
평안이 오면 하나님을 떠났습니다.
이런 패턴이 반복되었습니다.
본문의 므낫세 반 지파 역시 같은 위험 앞에 서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넓은 땅을 주셨습니다.
많은 사람을 주셨습니다.
명예와 영향력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축복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습니다.
축복은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더 가까이 가게 만드는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건강을 주셨다면 더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물질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재능을 주셨다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성공을 주셨다면 더 큰 책임감으로 하나님을 섬기라고 주신 것입니다.
축복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지만, 동시에 하나님의 신뢰의 표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복을 맡기시면서 그 복을 통해 하나님 나라를 세워 가기를 기대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축복을 받을 때마다 두 가지 질문을 해야 합니다.
첫째, "이 축복의 근원이 누구인가?"
답은 분명합니다.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이 축복을 왜 주셨는가?"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잊어버린다면 축복은 오히려 영적인 위험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축복을 주신 하나님을 기억한다면, 그 축복은 더욱 풍성한 은혜의 통로가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모든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축복보다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더 사랑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잃어버린 성공은 참된 성공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기억하는 축복만이 진정한 축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을 주셨든지 그것을 붙들기보다
그것을 주신 하나님을 더욱 굳게 붙드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3. 하나님을 떠나면 결국 심판을 맞게 된다 (25-26절)
본문은 매우 안타까운 말씀으로 마무리됩니다.
2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조상들의 하나님께 범죄하여 하나님이 그들 앞에서 멸하신 그 땅 백성의 신들을 음란하게 섬긴지라"
여기서 가장 가슴 아픈 단어는 "그러나"입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는 모두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에게 기업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전쟁에서 승리를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넓은 영토와 많은 가축과 번영을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보호하시고 형통하게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은혜를 경험했던 백성들이 결국 하나님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단순히 "실수했다"거나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표현하지 않습니다.
"범죄하였다"고 말합니다.
더 나아가 "음란하게 섬겼다"고 표현합니다.
성경에서 우상숭배를 음행으로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는 단순한 계약 관계가 아니라 언약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마치 남편과 아내의 관계처럼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사랑하셨고, 백성은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하나님을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종교적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의 배신이었습니다.
언약에 대한 배반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위해 싸워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위해 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구원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축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우상을 더 사랑했습니다.
이것이 죄의 본질입니다.
죄는 단순히 규칙을 어기는 행동이 아닙니다.
죄는 하나님보다 다른 것을 더 사랑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을 의지하기보다 다른 것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죄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와 즐거움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요단 동편 지파들은 하나님을 떠나게 되었을까요?
본문은 직접 설명하지 않지만 우리는 그들의 환경을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중심부가 아닌 경계 지역에 살았습니다.
주변에는 수많은 이방 민족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날마다 이방 문화와 접촉해야 했습니다.
이방 종교와 우상숭배의 유혹이 끊임없이 찾아왔습니다.
처음에는 단지 구경하는 수준이었을 것입니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가?"
"저들은 어떤 신을 섬기는가?"
그런 작은 관심이 점점 익숙함이 되고, 익숙함이 결국 동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신앙의 타락은 대부분 갑자기 일어나지 않습니다.
아무도 하루아침에 하나님을 버리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기도를 조금 소홀히 합니다.
예배를 가볍게 여기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보다 세상의 목소리를 더 많이 듣습니다.
조금씩 하나님과의 거리가 멀어집니다.
그리고 어느 순간 하나님 없이도 살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이 영적 타락의 과정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큰 죄보다 작은 타협을 더 경계해야 합니다.
오늘날에도 우상숭배는 여전히 존재합니다.
물론 나무나 돌로 만든 신상 앞에 절하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그러나 현대인의 우상은 훨씬 더 세련된 모습으로 다가옵니다.
돈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성공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명예가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쾌락과 편안함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우상이 되기도 합니다.
내 뜻이 하나님의 뜻보다 중요해질 때,
내 욕망이 하나님의 말씀보다 중요해질 때,
우리는 이미 우상을 섬기고 있는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죄를 그냥 지나치지 않으셨습니다.
26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하나님이 앗수르 왕 불의 마음을 일으키시며 곧 앗수르 왕 디글랏빌레셀의 마음을 일으키시매"
역사를 움직이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강대국 앗수르가 침략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정치적 실패 때문이라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군사력이 약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사건의 배후를 보여 줍니다.
앗수르보다 크신 하나님이 계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징계하기 위해 앗수르를 사용하셨던 것입니다.
이것이 역대기의 역사관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흥망성쇠는 단순히 국제정세에 의해 결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의해 결정됩니다.
그 결과 요단 동편 지파들은 포로로 끌려갔습니다.
더욱 의미심장한 사실은 그들이 북이스라엘 전체가 멸망하기 전에 먼저 사라졌다는 점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사람들이 가장 먼저 무너졌습니다.
경계에 있던 사람들이 가장 먼저 공격받았습니다.
하나님을 떠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역사 속에서 사라졌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하나님의 심판을 단순히 형벌로만 이해해서는 안 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징계는 언제나 회복을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훈계하듯이, 하나님께서도 사랑하시는 백성을 돌이키기 위해 징계하십니다.
문제는 징계 자체가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오지 않는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집니다.
"나는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 있는가, 아니면 조금씩 멀어지고 있는가?"
신앙은 과거의 경험으로 유지되지 않습니다.
어제의 은혜로 오늘을 살 수 없습니다.
과거의 승리가 현재의 순종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도 한때 하나님께 부르짖어 승리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과거의 신앙이 현재의 불순종을 덮어 주지는 못했습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과거의 간증이 아니라 현재의 순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야 합니다.
말씀 앞에 서야 합니다.
기도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는지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축복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을 떠난 성공은 결국 무너집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어 있는 사람은 어떤 상황에서도 소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단 동편 지파들의 실패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을 감사함으로 누리며,
끝까지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역대상 5장 11절부터 26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요단 동편 2지파 반의 역사를 살펴보았습니다.
얼핏 보면 족보와 전쟁 이야기, 그리고 포로에 대한 역사 기록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역대기 저자는 단순히 과거의 사건을 기록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 사건 속에 담긴 하나님의 메시지를 후대의 백성들에게 전하고자 했습니다.
본문은 매우 분명한 두 가지 길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길과 하나님을 떠나는 길입니다.
요단 동편 지파들은 하나님께 부르짖을 때 놀라운 승리를 경험했습니다.
강한 적들과 싸웠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를 들으셨고,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의 싸움을 대신 싸워 주셨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풍성한 전리품을 얻었고 넓은 땅을 차지했으며 번영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승리의 원인을 잊어버렸습니다.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축복 자체를 더 중요하게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보다 눈앞의 환경과 문화에 더 영향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하나님을 떠났고 우상을 섬겼으며, 그 결과 가장 먼저 포로가 되어 역사 속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통해 역대기 저자는 한 가지 진리를 강조합니다.
인생의 성패는 환경에 달려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달려 있다는 것입니다.
요단 동편에 살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 아닙니다.
주변에 이방 민족이 많았기 때문에 망한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무너진 것입니다.
반대로 하갈 사람들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도 군사력이 강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세상 한가운데에서 살아갑니다.
신앙을 지키기 쉽지 않은 시대를 살아갑니다.
물질주의와 성공주의가 넘쳐나는 세상 속에서 살아갑니다.
수많은 유혹과 가치관이 우리를 흔들고 있습니다.
어쩌면 우리 역시 요단 동편 2지파 반처럼 영적인 경계선 위에 서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환경이 아닙니다.
어떤 환경 속에서도 하나님을 붙들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어떤 축복을 받았든 그 축복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리 자신에게 몇 가지 질문을 던져 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금 누구를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보다 더 사랑하는 것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축복을 주신 하나님보다 축복 자체를 붙들고 있지는 않은가?
나는 처음 하나님을 만났을 때의 사랑과 믿음을 지금도 가지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자신을 의지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능력이 많은 사람을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완벽한 사람을 찾으시는 것도 아닙니다.
겸손히 하나님께 도움을 구하며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붙들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붙드십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가까이 가면 하나님께서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의지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책임져 주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요단 동편 2지파 반의 역사는 단순히 과거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이야기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승리가 우리의 승리가 될 수도 있고, 그들의 실패가 우리의 실패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의 성공에서 교훈을 배우고, 그들의 실패에서 경고를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 부르짖었던 믿음을 잃지 맙시다.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 속에서도 하나님을 잊지 맙시다.
세상의 유혹 속에서도 하나님께 충성하는 삶을 살아갑시다.
그리고 인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하나님을 붙드는 성도들이 됩시다.
그럴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며,
우리의 삶을 붙드시고,
마침내 영원한 승리의 자리로 인도하실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여호와는 그의 의뢰하는 자의 피난처가 되심이라."
이 말씀이 우리 모두의 삶 가운데 이루어지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