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 막11:12-26
찬송 :
[성경 읽기]
12 이튿날 그들이 베다니에서 나왔을 때에 예수께서 시장하신지라
13 멀리서 잎사귀 있는 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혹 그 나무에 무엇이 있을까 하여 가셨더니 가서 보신즉 잎사귀 외에 아무 것도 없더라 이는 무화과의 때가 아님이라
14 예수께서 나무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하시니 제자들이 이를 듣더라
15 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니라 예수께서 성전에 들어가사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며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둘러 엎으시며
16 아무나 물건을 가지고 성전 안으로 지나다님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17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하시매
18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듣고 예수를 어떻게 죽일까 하고 꾀하니 이는 무리가 다 그의 교훈을 놀랍게 여기므로 그를 두려워함일러라
19 그리고 날이 저물매 그들이 성 밖으로 나가더라
20 그들이 아침에 지나갈 때에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마른 것을 보고
21 베드로가 생각이 나서 여짜오되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22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여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25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그리하여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 허물을 사하여 주시리라 하시니라
26 (없음)
[구조 분석 및 주석]
마가복음 11:12-26은 마가복음의 대표적인 "샌드위치 구조(Markan Sandwich, Intercalation)"로 기록된 본문입니다.
마가는 한 사건 사이에 다른 사건을 삽입하여 두 사건이 서로를 해석하도록 만드는 문학적 기법을 자주 사용합니다.
A. 무화과나무 저주 (11:12-14)
└─ 열매를 찾으셨으나 없음
└─ 예수님의 저주 선언
B. 성전 정화 (11:15-19)
└─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음
└─ 성전의 본래 목적 선언
└─ 종교 지도자들의 반발
A'. 무화과나무가 마름 (11:20-26)
└─ 제자들이 결과를 목격
└─ 믿음과 기도에 대한 교훈
이 구조는 단순히 사건을 나열한 것이 아니라,
가운데 있는
성전 정화 사건(B)을
무화과나무 사건(A-A')이
해석하도록 의도된 구성입니다.
A. 무화과나무 저주 (11:12-14)
예수께서 배고프셔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 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 먹지 못하리라."
① "잎사귀만 무성하다"
무화과나무는 일반적으로 열매가 먼저 또는 열매와 잎이 함께 나타나는 특징이 있습니다.
잎이 많다는 것은 어느 정도 열매를 기대할 수 있다는 표시였습니다.
따라서 문제는 단순히 "철이 아니었다"는 데 있지 않고,
겉으로는 풍성해 보이지만 실제 열매는 없는 상태에 있습니다.
② 구약의 상징
구약에서 무화과나무는 종종 이스라엘을 상징합니다.
예를 들면:
- 예레미야 8:13
- 호세아 9:10
- 미가 7:1
무화과 열매가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의와 믿음의 열매가 없음을 상징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나무에 화가 나셔서 저주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 나무는 앞으로 이어질 성전 사건의 상징적 예언 행위(prophetic action) 입니다.
즉,
"겉모습은 신앙적으로 번성해 보이나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는 없는 이스라엘"
을 보여주는 표지판 역할을 합니다.
B. 성전 정화 (11:15-19)
예수님은 성전에 들어가셔서
-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 돈 바꾸는 자들의 상을 엎으시고
- 물건 운반도 금지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다."
① "만민이 기도하는 집"
이는 이사야 56:7의 인용입니다.
성전은 원래 이스라엘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열방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장소였습니다.
② "강도의 소굴"
이는 예레미야 7:11의 인용입니다.
중요한 점은 "강도가 숨는 은신처"라는 뜻입니다.
즉,
종교 행위를 계속하면서도 삶은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상태를 비판하시는 것입니다.
③ 성전 파괴의 예고
많은 학자들은 이 사건을 단순한 개혁 운동이 아니라
성전 체제에 대한 심판 선언으로 봅니다.
예수님은 성전을 정화하려는 정도를 넘어,
현재의 성전이 하나님의 목적을 상실했다고 선언하시는 것입니다.
해설
무화과나무가 열매 없이 잎만 무성했던 것처럼,
예루살렘 성전도
- 제사
- 절기
- 헌금
- 종교 조직
은 활발했지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 정의
- 믿음
- 회개
- 기도
의 열매는 부족했습니다.
따라서 성전 정화는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의 실제 모습이 바로 성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A'. 무화과나무가 마름 (11:20-26)
다음 날 아침,
제자들은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베드로가 이를 보고 놀라자
예수님은 믿음과 기도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① "뿌리째 말랐다"
단순한 가지의 손상이 아닙니다.
완전하고 결정적인 심판을 의미합니다.
이는 성전 체제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상징합니다.
②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져지라"
여기서 "이 산"은 문맥상 많은 학자들이
예루살렘 성전이 있는 시온산 또는 성전산을 암시한다고 해석합니다.
즉,
하나님은 더 이상 성전 건물 자체에 매여 계시지 않으며,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③ 기도와 용서
11:25은 매우 중요합니다.
예수님은 단순히 기도의 능력을 말하지 않고
용서하는 공동체의 삶을 함께 말씀하십니다.
참된 신앙의 열매는
- 믿음
- 기도
- 용서
로 나타난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나무가 말라버린 현상 자체에 놀랐지만,
예수님은 그 사건을 통해 더 큰 진리를 가르치십니다.
옛 성전 체계가 무너진 자리에서
하나님 백성은 이제
- 믿음으로
- 기도로
- 용서하며
하나님께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신학적 메시지
마가는 의도적으로 다음과 같은 대응을 만들고 있습니다.
| 무화과나무 | 성전 |
| 잎은 무성함 | 종교 활동은 활발함 |
| 열매 없음 | 의와 믿음의 열매 없음 |
| 저주 선언 | 성전 심판 선언 |
| 뿌리째 마름 | 성전 체제의 종말 예고 |
따라서 본문의 중심 메시지는 단순히 "기도하면 응답받는다"가 아닙니다.
본문 전체의 흐름 속에서 보면,
하나님은 겉모습의 종교성을 찾지 않으시고 열매를 찾으신다.
는 것이 핵심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성전을 해석하고, 성전은 무화과나무를 해석합니다.
그리고 마지막에 예수님은 참된 열매가 무엇인지를 제시하십니다.
참된 성전의 삶은 믿음, 기도, 용서의 열매로 나타난다.
이것이 마가복음 11:12-26의 구조가 전달하는 중심 메시지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열매
본문: 마가복음 11:12-26
우리는 살아가면서 겉모습과 실제가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자주 경험합니다.
겉으로는 건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겉으로는 행복한 가정처럼 보이지만 깊은 갈등을 안고 있는 가정도 있습니다. 겉으로는 성공한 사람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는 공허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고 판단하지만, 진실은 겉모습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다고 해서 반드시 성숙한 신앙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직분이 있다고 해서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배에 참석하고 봉사하며 여러 사역에 참여한다고 해서 저절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물론 예배와 봉사와 헌신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들은 신앙의 본질이 아니라 신앙의 열매로 나타나야 할 모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외적인 활동보다 우리 안에 실제로 믿음의 열매가 있는지를 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마지막 주간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이제 왕으로 등극하시고 로마를 몰아내며 새로운 나라를 세우실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가장 먼저 하신 일은 정치적인 혁명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찾아가셨고,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이것은 매우 의미심장한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저 하나님의 백성들의 영적 상태를 점검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셨습니다.
오늘 본문은 겉으로 보기에는 서로 다른 세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첫째는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시는 사건입니다.
둘째는 성전을 정결하게 하시는 사건입니다.
셋째는 말라버린 무화과나무를 보시며 믿음과 기도에 대해 가르치시는 사건입니다.
그러나 이 세 사건은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은 열매를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에는 잎은 있었지만 열매가 없었습니다. 성전에는 사람은 많았지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거룩함과 기도의 열매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심판을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는 참된 열매가 무엇인지를 가르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기도, 그리고 용서의 삶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도 이 말씀 앞에 자신을 비추어 보아야 합니다.
나는 신앙의 잎사귀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나는 사람들에게 신앙인처럼 보이는 데 만족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믿음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
오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가 무엇인지 깨닫고, 우리 모두가 열매 맺는 신앙으로 나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던 중 시장하셨습니다. 멀리서 한 무화과나무를 보셨습니다. 그 나무는 잎이 무성했습니다. 푸른 잎들이 풍성하게 달려 있었기 때문에 누구나 그 나무에 열매가 있을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도 그 나무 가까이 가셔서 열매를 찾으셨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 보니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겉으로는 생명력이 넘쳐 보였지만 실제로는 아무런 열매도 없는 나무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본문을 읽으면서 의문을 가집니다. "열매 맺을 때가 아니었는데 왜 예수님께서 나무를 저주하셨을까?" 그러나 본문의 핵심은 농업 지식에 있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순히 나무 한 그루에 화를 내신 것이 아니라 이 나무를 통해 영적인 교훈을 보여주고 계신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구약성경에서 자주 이스라엘 백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에게서 믿음의 열매와 순종의 열매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은 화려한 종교적 외형을 가지고 있었지만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예루살렘 성전은 웅장했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기를 지키기 위해 모여들었습니다. 제사가 드려지고 율법이 낭독되었습니다. 종교 지도자들은 긴 옷을 입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기는 민족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중심을 보셨습니다.
그들의 예배에는 진실한 회개가 부족했습니다. 그들의 기도에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보다 자기 의가 더 많았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정의와 사랑보다 형식과 전통이 앞서 있었습니다.
잎은 무성했지만 열매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무화과나무를 향한 심판을 통해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보여주셨던 것입니다.
이 말씀은 오늘 우리에게도 매우 중요한 경고가 됩니다.
우리도 신앙의 잎사귀를 많이 가질 수 있습니다.
주일마다 예배에 참석할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직분을 맡을 수 있습니다. 봉사와 헌신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신앙이 좋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단지 우리의 종교 활동만 보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 속에서 실제 열매를 찾으십니다.
예배를 드린 후에 우리의 삶이 변화되고 있는가?
말씀을 들은 후에 순종의 결단이 있는가?
기도한 후에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되는가?
용서받은 사람답게 다른 사람을 용서하고 있는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답게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지식보다 순종을 원하십니다. 많은 활동보다 거룩한 삶을 원하십니다. 사람들에게 보이는 신앙보다 하나님 앞에서 진실한 신앙을 원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찾으신 것은 잎이 아니었습니다. 열매였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혹시 우리는 신앙의 모양만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교회 안에서는 신앙인처럼 보이지만 가정과 직장에서는 세상 사람과 다를 바 없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지는 않습니까? 입술로는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하나님보다 세상의 가치와 성공을 더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삶 가까이 오셔서 열매를 찾고 계십니다.
그 열매는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열매, 말씀에 순종하는 열매, 이웃을 사랑하는 열매, 정직과 거룩함의 열매, 기도와 감사의 열매입니다.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 앞에 서셨던 것처럼 오늘도 우리의 삶 앞에 서 계십니다.
그리고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네 삶에는 어떤 열매가 있느냐?"
우리 모두가 잎사귀만 무성한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아름다운 열매를 풍성히 맺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성전은 기도하는 집이어야 한다
무화과나무 사건 다음에 마가는 곧바로 성전 정화 사건을 기록합니다. 이것은 우연한 배열이 아닙니다. 무화과나무가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를 상징한다면, 성전은 그 영적 상태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 장소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가셨을 때, 그곳은 절기를 맞아 수많은 사람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제사를 드리기 위해 각지에서 순례자들이 모여들었고, 성전 뜰에서는 희생 제물로 사용할 짐승들이 거래되고 있었습니다. 또한 로마 화폐를 성전 화폐로 바꾸어 주는 환전상들도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매우 활발한 종교 활동이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모였고, 제사를 드리기 위해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누구나 성전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보신 것은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은 성전의 중심에서 하나님을 향한 경외심이 사라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자리여야 할 곳이 사람들의 이익과 종교적 형식에 의해 채워지고 있음을 보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시고 환전상들의 상을 엎으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언하셨습니다.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
이 말씀은 단순한 책망이 아니라 성전의 본래 목적을 선언하신 말씀입니다.
성전은 원래 하나님을 만나는 곳이었습니다.
죄인이 하나님 앞에 나아와 용서를 구하는 곳이었습니다.
상한 마음을 가진 자가 하나님께 기도하는 곳이었습니다.
이스라엘뿐 아니라 모든 민족이 하나님께 나아오는 은혜의 통로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성전을 이용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찾기보다 종교를 이용하여 자신의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예배는 있었지만 하나님을 향한 갈망은 없었습니다.
제사는 있었지만 회개는 없었습니다.
종교 활동은 있었지만 하나님과의 참된 교제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강도의 소굴”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씀을 단순히 부정한 상행위를 비판하신 것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훨씬 더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강도의 소굴은 강도들이 범죄를 저지른 후 숨어드는 장소입니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으면서도 성전에 들어와 예배드린다는 이유로 자신들이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삶은 하나님과 멀어져 있으면서도 종교 활동을 하고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런 형식적인 신앙을 받지 않으십니다.
예배당에 앉아 있는 것만으로 하나님과 올바른 관계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직분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자동적으로 하나님께 인정받는 것도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관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기도의 집이 되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왜 하필 기도일까요?
기도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장 잘 보여주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래서 기도가 사라지면 신앙은 형식으로 변하고, 기도가 살아 있으면 신앙도 살아 있습니다.
교회의 진정한 능력은 건물의 크기에 있지 않습니다.
프로그램의 다양성에 있지 않습니다.
사람의 숫자에 있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찾는 기도에 있습니다.
성도의 영적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얼마나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는가보다 얼마나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신 것은 단순히 건물을 깨끗하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신앙을 회복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은 성전의 본질을 되찾기를 원하셨습니다.
오늘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의 예배는 살아 있는 예배입니까?
우리의 기도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부르짖음입니까?
우리는 하나님을 찾기 위해 교회에 오는 것입니까, 아니면 습관적으로 종교 생활을 하고 있는 것입니까?
우리의 마음은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그 마음속에 하나님보다 더 크게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없습니까?
염려와 욕심, 세상에 대한 집착이 우리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 안으로 들어오셔서 성전을 정결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하시고, 잃어버린 기도를 회복시키시고,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제를 다시 시작하게 하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화려한 외형보다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사람을 기뻐하십니다.
우리의 삶과 가정, 그리고 교회가 다시금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기도하는 집”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믿음과 기도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다음 날 아침, 예수님과 제자들은 다시 그 길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전날 예수님께서 저주하셨던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베드로는 깜짝 놀라며 말했습니다.
“랍비여, 보소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랐나이다.”
제자들의 관심은 기적 그 자체에 있었습니다. 어떻게 하루 만에 나무가 저렇게 말라버릴 수 있는지 놀라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나무가 마른 현상에 시선을 머물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 사건을 통해 제자들이 배워야 할 영적 진리를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이것은 단순한 격려의 말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이 무너질 시대를 앞두고 제자들에게 새로운 신앙의 길을 가르치고 계셨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기 위해 성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는 성전에 가야 했고, 제사를 드려야 했으며, 종교 체계를 따라야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제 하나님께 나아가는 중심이 성전 건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될 것임을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은 환경이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은 제도가 아닙니다.
신앙생활의 중심은 사람도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입니다.
믿음은 하나님께서 누구이신지를 신뢰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질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하시며 능력이 있으시고 신실하시다는 사실을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은 상황보다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에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어도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입니다.
응답이 늦어지는 것 같아도 하나님의 선하심을 의심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져지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이 말씀은 우리의 말에 마법 같은 능력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 매우 강렬한 표현을 사용하신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에게 산은 움직일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가장 견고하고 불가능해 보이는 장애물을 상징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인간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까지도 가능하게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 삶에도 여러 산들이 있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건강의 문제라는 산이 있습니다.
가정의 갈등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사역의 어려움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죄와 유혹이라는 산이 있습니다.
우리의 힘으로는 움직일 수 없어 보이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산보다 크신 분이십니다.
믿음은 문제를 크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크게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또한 기도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이 말씀은 원하는 것을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성경 전체는 기도가 하나님의 뜻 안에서 드려져야 함을 가르칩니다.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 동산에서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따라서 참된 믿음의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에 맞추려는 기도가 아닙니다.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맞추는 기도입니다.
기도는 하나님을 설득하는 과정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변화되는 과정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더욱 신뢰하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자신의 연약함을 깨닫게 됩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기도는 단순히 응답을 받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기도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갑자기 용서에 대한 말씀을 덧붙이십니다.
“서서 기도할 때에 아무에게나 혐의가 있거든 용서하라.”
왜 믿음과 기도에 이어 용서를 말씀하셨을까요?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열매가 단순한 종교적 열심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속에 미움과 원한을 품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사랑을 흘려보내야 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키고, 용서는 사람과의 관계를 회복시킵니다.
그래서 참된 신앙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나타납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입니다.
무화과나무는 열매가 없었기에 말라버렸습니다.
성전은 본질을 잃어버렸기에 심판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새로운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그 길은 믿음의 길입니다.
기도의 길입니다.
용서의 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에게 많은 종교 활동보다 믿음을 원하십니다.
화려한 외형보다 기도를 원하십니다.
신앙의 말보다 삶의 열매를 원하십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열매가 맺히고, 하나님을 찾는 기도의 열매가 맺히며, 이웃을 품는 사랑과 용서의 열매가 풍성하게 맺히기를 바랍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무화과나무와 성전 사건을 통해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는 참된 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무화과나무와 성전, 그리고 믿음과 기도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을 함께 살펴보았습니다.
겉으로 보면 이 세 사건은 서로 다른 이야기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마가는 이 사건들을 하나로 묶어 우리에게 매우 중요한 영적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는 잎이 무성했습니다. 멀리서 보면 건강해 보였고 열매가 풍성할 것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가까이 가보니 열매가 없었습니다.
성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고 종교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기도와 회개, 믿음과 순종의 열매는 찾아보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무화과나무를 저주하셨고 성전을 정결하게 하셨습니다.
이 두 사건은 하나님께서 외형보다 본질을 보신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잎을 보지만 하나님은 열매를 보십니다.
사람들은 외형을 보지만 하나님은 중심을 보십니다.
사람들은 활동을 보지만 하나님은 그 활동 속에 담긴 믿음과 순종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은 단순히 2천 년 전 이스라엘을 향한 말씀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에게 물어보아야 합니다.
나는 신앙의 잎사귀만 가지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를 맺고 있는가?
나는 예배에 참석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예배하고 있는가?
나는 기도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을 의지하며 살아가고 있는가?
나는 신앙인처럼 보이는 삶을 살고 있는가?
아니면 실제로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고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완벽함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연약함을 아십니다.
실패할 때도 있고 넘어질 때도 있다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것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열매 맺기를 힘쓰는 사람입니다.
작은 믿음이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입니다.
부족한 기도라도 하나님께 나아오는 사람입니다.
넘어졌어도 다시 회개하고 일어서는 사람입니다.
미워할 이유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용서하려고 애쓰는 사람입니다.
그러한 삶 속에서 하나님께서는 열매를 보십니다.
생각해 보면 열매는 하루아침에 맺히지 않습니다.
나무는 뿌리를 내리고 햇빛을 받고 비를 맞으며 긴 시간을 지나야 열매를 맺습니다.
신앙의 열매도 마찬가지입니다.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고, 기도로 하나님과 교제하며,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갈 때 조금씩 열매가 자라게 됩니다.
어느 날 돌아보면 예전보다 더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고, 예전보다 더 순종하게 되고, 예전보다 더 기도하게 되고, 예전보다 더 사람을 품을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열매입니다.
특별히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가르쳐 줍니다.
열매 없는 신앙은 결국 말라가지만, 믿음과 기도의 신앙은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말라버렸지만, 믿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누리게 됩니다.
성전은 심판을 받게 되었지만,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하나님을 만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옛 종교의 형식이 아니라 살아 있는 믿음의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건물에 의존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형식에 만족하는 사람이 아니라 열매를 맺는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신앙이 잎사귀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마음이 기도를 잃어버린 성전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실 때 믿음의 열매, 기도의 열매, 사랑의 열매, 용서의 열매를 보여드릴 수 있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주님께서 오늘도 우리 삶 가까이 오셔서 열매를 찾으십니다.
그때 주님께서 우리의 삶을 보시며 기뻐하시고,
“잘하였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라고 칭찬하실 수 있는 복된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를 풍성히 맺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