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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피드나]][단편] 드라나고스.

작성자[가나]벨피드나|작성시간07.03.09|조회수83 목록 댓글 1
※ 연습소설방 '과제제출' 에 올렸던 '지룡사냥' 에 약간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원정대에서 살아난 단 한명의 병사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홀츠바이거 남작을 찾아갔다. 그리고 그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놓았다.

원정을 간 이들이 전멸했다는 사실, 그것도 원정대 소속의 엘프가 용을 가로채었다는 사실은 - 원정대를 만들 것을 지휘했던 구르난트의 영주 홀츠바이거 남작 외에도 원정대에 많은 돈을 퍼부은 상인들과 병력을 대준 용병단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또한, 이미 드라나고스가 된 이들과 드라나고스가 되기 위해 노력하던 이들의 분노를 샀다.
드라나고스를 반대하던 엘프들과 엘프 드라냐들은 당황했으며, 자신들이 사주해 원정대를 일부러 망친 것이 아니라며 항변했다. 그러나 이미 사람들은 옛적부터 드라나고스를 극히 싫어했던 엘프들을 의심하기 시작했으며 상인들은 이때다 싶어 이전부터 드라나고스를 방해해왔던 엘프들을 맹렬히 비난했다.
모든 지역의 영주들과, 왕들, 그리고 용병단들은 지룡을 가로채고 달아난 ‘엘프’ 의 목에 막대한 상금을 걸었다. 현상금 사냥꾼들과 인간 사냥꾼들은 그것을 노리고 엘프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이제 엘프 드라냐들은 어디를 가던 수색을 받고, 감시를 받게 되었다. 불과 몇 개월 전까지만 해도 엄청난 대접을 받던 이들이 전쟁 범죄자마냥 푸대접을 받게 된 것에, 엘프 드라냐들은 분통을 터뜨렸으나 별 수 없었다.
몇몇 극렬한 성격의 - 홀츠바이거, 쉬엔 나르크 같은 영주들은 심지어, 그들의 드라냐를 해고하거나 영지 밖으로 내쫓았다. 그들이 해고한 드라냐들의 빈자리는 기다렸다는 듯 드라나고스들이 매우기 시작했으며 약삭빠른 드워프들은 더 이상 드라냐를 위해 무기나 방어구를 만들지 않았다 -많은 드라냐들이 이제 가난해졌다는게 그들의 이유였다 -. 대신 그들은 드라나고스를 위해 무기를 만들었다.
드워프들과, 상인들과, 영주의 지원에 힘입은 드라나고스들은 이제 활발히 용을 죽이러 다니기 시작했다. 그러나 입지가 약해진 드라냐들은 그들의, ‘용에 대한 횡포’ 를 두고 볼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운라르 역시, 엘프 드라냐들의 입지가 대폭 줄어버린 곳 중 하나였다.


- - -


카운라르의 성 안쪽으로 들어가는 것은, 엘프들에게 있어서는 그야말로 성가신 일로 변해있었다. 경비병들은 유독 엘프들만을 붙잡고 늘어져 신분증 제시를 비롯해 온갖 질문들을 해대며 성안에 볼일이 있는 엘프들을 안으로 쉽사리 들여보내 주지 않았다.
용을 죽이려는 원정대가 ‘엘프’ 때문에 용이 가로채어지고, 덤으로 전멸까지 당했다는 소식 - 그 ‘생존자’ 의 보고에 의하면 - 은 이미 대서특필되어 전 대륙에 퍼져있었고, 그 ‘엘프’ 를 잡기 위해 모든 영주들과 왕들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사건’ 에 전혀 관심도, 관여하지도 않은 ‘선량한’ 엘프들은 불만스레 투덜댔으나 별 수 없었다.


“빌어먹을, 용 가로챈 미친놈 때문에 이게 무슨 꼴이람.”


성질 급해보이는 엘프 하나가 욕을 지껄이며 투덜대며, 막 ‘질문’ 공세에서 빠져나와 황급히 성 안으로 총총히 걸어갔다. 그리고 그 모습을 뒤쪽 엘프들이 부러운 눈길로 바라보았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구려.”


컬컬한 목소리가 경비병의 투구 안에서 흘러나왔다.
엘프는 약간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본 다음, 그에게 신분증을 건넸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그의 신분증에는 ‘드라냐’ 라고 기록된 부분은 없었다. 하지만 쉽사리 들여보내 줄 수도 없고, 나름대로 ‘엘프들이 골탕먹는’ 지금 상황이 즐거운 경비병은 한동안 ‘정말 직업이 이 신분증에 기록된 대로요?’ ‘어디 출신이오?’ ‘이 곳에는 뭐 때문에 온거요?’ 등의 질문공세를 퍼부은 다음에야 신분증을 돌주고 엘프를 들여보냈다. 그리고 그 질문공세에서 빠져나온 엘프는 방금 전, 앞서서 들어간 엘프와 마찬가지로 욕을 지껄이며 성 안으로 들어갔다.


“이거, 역시 이쪽도 소란이네요.”


엘프, 페리안과 동행해온 치유사가 난감한듯 갈색 머리카락을 긁적였다. 그는 당장 신전에 가야 했기에 페리안을 ‘기다려 줄 수 없다’ 는 뜻이 포함된 말이었다. 그리고 그것을 잘 알고 있는 페리안은 고개를 끄덕였다. 일감을 맡으면 같이 하고 싶은 자였으나, 별 수 없었다.
치유사는 다시금 멋쩍게 웃어보였다가 엘프들 사이를 헤치고 지나갔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얼마 안가 인파에 휩쓸려 사라져버렸다.


제기랄.


페리안은 욕지기를 했다. 앞서 가버린 자와 같은, 쓸만한 치유사를 구하려면 많이 힘들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는 어쩔 수 없이 차례를 기다려야 했다. 적당히 엘프들 사이로 끼어들었다간 몰매를 맞을 것이 뻔했다.


“신분증 좀 보여주시오.”


성문 양 옆에 있던 병사 중 하나가, 긴 로브를 입은 엘프 하나에게 말했다. 엘프는 차가운 얼굴로 그에게 신분증을 건넸다. 그런 엘프 특유의 표정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경비병은 낚아채듯 신분증을 받아 그의 이름부터 살폈다.

‘세브나스 데 안드레이’ .. 통과. 좋아, 엘프 나부랭이다운 이름이군. 출신은.. ‘케이논’ . 이것도 통과. 하지만 질문으로는 꼭 물어봐야지. 직업..직업은 뭐지. 어디보자. ‘드라냐’ . 아하, 드라... 어?

경비병의 시선이, 일순 신분증의 글씨 중 ‘직업’ 에 멈췄다. 그리고 경악스러운 목소리로 이내 입을 열고 소리쳤다.


“드라냐다!!”


그것은 대단한 효과를 가져왔다. 엘프들의 시선이 일순간 ‘드라냐’ 엘프에게로 고정되었고 - 과연 얼마나 잘난 작자인지 보기 위해 - 얼마 지나지 않아 경비대장으로 보이는, 독수리 문장에 검은색과 붉은색의 갑옷을 입고있는 자와 경비병 여럿이 ‘드라냐’ 에게 다가왔다.


“드라냐 라는 것만으로도 죄인취급이군.”


엘프가 차갑게 말했다. 일단 드라냐라는 것은, 쉽게 볼 수 없는 상대이기에 경비대장은 약간의 미소마저 띄운 채로 공손한 어투로 대답했다. 그녀는 자신의 지위와 힘을 믿고 거만하게 구는 이들을 수없이 보아 왔기에 그런 자들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분명 아닙니다. 하지만 알다시피, 요새 상황이 안좋은 것은 당신도 잘 알고있을 것 같군요. 그래서 좀 따라와 줬으면 합니다.”


엘프는 못마땅한 듯 쯧, 하고 혀를 찬 다음 순순히 따라갈 법한 태도를 취했다. 그것을 본 경비대장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만약 ‘용을 가로챈’ 그 놈이어서 저항이라도 한다 싶으면 정말 대형사고가 일어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사실, 그녀는 검문을 받는 엘프들 중 ‘드라냐’ 가 나오기를 바라지 않았다. 처리해야할 일만 늘어날 뿐이니까.




“이 사람은 아니오.”


성안의 마법사 중 하나인 코시아스가 홀츠바이거 남작이 보낸 - 정확히 말하자면 홀츠바이거 휘하의 마법사가 - ‘남아있는 기억’ 을 흩어보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는 희귀하게도 카운라르 성 안에서 일하는 검은엘프 마법사 였다. 그는 처음엔 검은엘프 마법사라는 이유로 별 높은 직책이 주어지지 않았으나, 오랫동안 붙박이로 카운라르에서 일함으로 나름대로의 직책은 얻은 자였다.
아멜리아는 본래 그에게 ‘남아있는 기억’ 을 물어보러 가려 한게 아니었으나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바쁘다고 손사래를 치는 통에 코시아스에게 오게 되었다.
도무지 믿을 수는 있을는지.
검은엘프들에 대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그녀는 그에게 간단히 고개를 끄덕인 후 몸을 돌려서 뒤에서 불만스럽게 서 있던 드라냐를 바라보았다.


“죄송합니다. 오랫동안 붙잡고 있었군요. 이제 가주셔도 됩니다.”


엘프는 회청색 눈으로 짜증스레 그녀를 바라보았다가, 냉큼 뒤돌아 걸어가버렸다.


“누군 좋아서 이짓꺼리 하나..”


안 그래도 벌써 아침부터 엘프들의 ‘불평과 항의’ 를 상대한 터라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는데다가 좀 욱하는 기질이 있는지라 불평을 내뱉고 말았다. 그리고 그녀는 욕을 지껄인 후에야 뒤에 코시아스가 있다는 걸 알았다. 그게 마냥 웃긴지 검은엘프 마법사가 킬킬 웃었고 그게 신경이 거슬린 아멜리아가 미간을 찌푸리고 마법사를 바라보았다. 검은엘프는 어깨를 으쓱, 해 보였다. 마치 아무런 죄도 없다는 것 처럼.


“뭐, 웃으면 안되는건가? 아주 ‘직장용’ 말투 잘 쓰는데 그래.”


그는 인간들이 얼마나 많은 ‘직장용’ 말투를 가지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치 처음으로 직장용 말투를 발견한 것처럼 말해주면 인간들은 하나같이 당황해 하는게 재미있었다.
마찬가지로, 아멜리아 역시 당황해서 얼굴을 붉혔다. 만약 코시아스가 검은엘프가 아닌, 인간 마법사였다면 지금 자신이 한 일을 못마땅하게 여길 게 뻔했다. 본래 그녀는 영주에게 고용되었을때 그 이유중 하나가 ‘침착하고 냉정’ 하다는 이유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분명 욱하는 성격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을 터였고 - 있다는걸 안다면, 썩 좋아하지 않을 터였다.
코시아스가 능글맞게 히죽 웃었다. 그러나 그녀는 못 본 척, 바삐 걸음을 놀려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경비병들에게 갔다.


-

뒤늦게 신전에 가 봤을때는 이미 자신과 함께 동행했던 치유사는 이미 다른 곳으로 가 없다고 했다.
아쉬움이 남았으나 별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는 신전을 나와, 어느새 파르스름한 어두움에 잠겨있는 카운라르를 바라보았다.
산책이나 할까.
그는 어두움에 잠겨들어도, 반짝이는 불빛을 여전히 가지고 있는 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는 ‘킥’ 웃고 나서 거리를 걸었다. 적당히 서늘한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고 지나갔다. 그는 그렇게 의미없이 걷다가 술집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그가 간 술집엔 사람이 아무도 없었으나, 그는 개의치 않고 술을 주문했다.
마찬가지로 엘프들을 많이 보아온 카운라르 토박이인, 갈색 짧은 수염을 기른 술집주인 바우어는 그에게 별로 눈길을 주지 않고 그가 주문한 술을 내왔다.


“요새 뭐 별다른 일은 없습니까?”


페리안이 묻기가 무섭게, 술잔을 닦고 있던 바우어는 딱 잘라 대꾸했다.


“있을 리가 있나.”


“약간 돈벌이 되는 것만으로도 괜찮습니다.”


그는 술값 이외의 금화 두 개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바우어는 물끄러미 그 금화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요새 카운라르 자주 오긴 왔었나.”


"아뇨.”


“그렇담 모르겠군. 요새 게일곤 들이 늘어나서, 육로를 이용한다던 상인들이 골머리를 썩는다던데 그놈들 목을 가져가면 괜찮을거야. 그도 아니라면 저 카운라르 주변에 있는 들판서 돌아다니는 - 거, 뭐더라? 회색 털가죽.. 개새끼들.”


“카프스.”


“아, 맞아. 그래. 그것 들 털가죽 벗겨가면 상인들이 꽤 쳐줄걸. 요새 그것들을 원하는 작자들이 많아졌지.”


쯧쯧. 모험가가 정보에 능해야지, 그게 뭔가.


바우어가 핀잔하듯 말한 후, 페리안이 건넨 금화 두 개를 다시 돌려주었다. 이전부터 카운라르에 올때면 그의 술집을 들러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페리안은 희미하게 웃어보인 후 고개를 끄덕였다. 바우어가 말해준 것은 충분히 금화 두 개의 값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카운라르에 자주 왔었다면 그정도야 이미 알고 있었을테지만 그동안 이곳저곳 다니느라 카운라르에 대한 정보를 전혀 얻지 못했던 것이었다.
그는 술을 다 들이킨 후, 술집을 나왔다. 밤하늘이 점차 짙고 짙어져 칠흑같이 변해 있었다. 그는 하, 하 하고 짧게 웃었다. 그리고 여관을 찾아 거리를 거닐었다. 오늘밤은 여관에서 보내고, 아침에 카프스를 잡을 생각이었다. 게일곤 들을 잡아죽이는게 돈은 더 벌겠지만, 귀찮았다.


-


해가 저물었다. 하루종일 엘프들에게 시달려 온 그녀는, 해가 저문 저녁에는 들어오는 엘프들이 없다는 것에 안심했다. 새벽녘부터 영주의 영지를 순찰하고 다시 마을을 순찰하고, 성 안을 돌아본 다음 엘프들의 모습을 눈알이 빠져라 보아왔기에 피로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일도 또다시 그렇게 해야 할 터였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었다.
창 밖을 내다보았을 때는, 해는 없었다. 밤이 깊어왔다. 벽난로에서 태어난 불꽃은 주어진 나무들을 허겁지겁 집어먹으며 타닥타닥 소리를 내었다. 그녀는 책상에 앉아있었다.


“피곤해 보이는군요.”


엘프, ‘헬리만’ 이 말했다. 그는 드라냐였다. 그리고, 예전에는 경비대장인 자였다.
그는 영주가 성을 점령할 때 - 제일 앞세워, 성을 점령하는데 공헌을 한 자였다. 그러나 영주는 그에게 높은 직책을 주지 않은 채 경비대장에 앉혀 주기만을 했다. 그마저도 ‘드라냐가 용을 훔친’ 사건이 일어난 이후로는 그 직책마저도 낮춰버렸다.
그러나 엘프는 그것에 별다른 불만이 없는 것 같았다. 그는 카운라르 성을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왜 그런 것인지 궁금했으나, 차마 그에게 물어볼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는 자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자였다. 그저 같은 경비대장이라고 해도, 그가 드라냐라는 것. 그것만으로도 이미 엄청난 차이였다.
인간인 나보다, 수백년은 더 살아온 자.
그래서 그녀는 그에게 아랫 부하 대하듯 말할 수 없었다. 그녀는 씁쓰레한 기분을 느낄 뿐이었다.


“그럴리가. 그보다, 빨리 들어가 쉬세요. 그쪽이 더 피곤하겠군요. 엄청….”


아멜리아가 농담하듯 대답하려 했으나 말끝이 흐려졌다. 졸음이 밀려왔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꾸벅꾸벅 졸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엘프가 빙긋 웃었다. 아멜리아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간신히 대답했다.


“미안해요.”


엘프는 그녀에게 인사한 뒤 뒤돌아 나갔다. 그녀는 물끄러미 창밖을 바라보았다. 카운라르는 주변이 온통 들판과 초원인 곳이었고, 좀 더 멀리에는 산도 있는 곳이었다. 그만큼 성 밖에서 밀려나 사는 영지민들도 언제나 최소한 배는 곪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다만 흠이라면 춥고 서늘한 기후 때문에, 기를 수 있는 작물과 곡물이 한정되어있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창 밖에서, 들판에서 한들한들 움직이는 보리밭과 밀밭의 움직임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밭과 떨어진 곳에는 사람들이 살지 않는 곳에서는 초원이 있었다. 그러나 그곳에 사는 동물들의 움직임은 너무 멀어서 보이지 않았다.


“테오도라.”


그녀가 무심코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어머니의 이름이었는지, 동생이나 언니의 이름이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졸음이 부드럽게 밀려들어와 그녀를 감싸안았다.




아멜리아는 눈을 떴다. 어젯밤이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침대 위에 있었다. 보나마나, 잠결에 취해 간신히 침대에 몸을 눕힌 것일 터. 그녀는 황급히 몸을 일으켜, 창 밖을 바라보았다. 아직 새벽이었다. 그녀는 안도했다. 그리고 더듬더듬 세숫대야를 찾았다. 그녀는 세숫대야에 담긴 찬 물로 세수했다. 으슬으슬 소름이 돋았다. 그녀는 문득, 고향이었던 남부를 떠올렸다. 그러나 그럴수록 더 추울 뿐이었다.
그녀는 더듬더듬, 나무 옷걸이에 걸려있는 셔츠와 레깅스를 찾아 입었다. 그리고 갑옷을 꺼내들었다. 차가운 갑옷에서 한기가 전해져 왔다.


“제기..”


그녀는 욕을 내뱉은 후, 갑옷을 걸쳐입었다. 이제 갑옷의 한기에는 익숙해지긴 했지만 마음엔 들지 않았다. 갑옷을 다 입고, 그녀는 밖에서 대기하고 있는 병사들과 드라냐에게 갔다. 그녀는 먼저 동물들이 사는 초원으로 갔다.
가장 흔하게 볼 수 있는 사슴의 몸뚱이에 산양의 뿔처럼 생긴 뿔을 가지고 겅중겅중 뛰어다니는 ‘퀴늑’ 이, 그들을 발견하고 풀을 뜯다 황급히 도망쳤다. 영지민들은 그들을 사냥해, 고기를 얻고 뿔을 얻었다. 퀴늑 외에도 가끔씩 회색 털의 카프스가 보였다. 사람들은 카프스를 잡아 가죽을 벗겨 이용했다.
어떤 카프스들은 퀴늑 시체를 물고 늘어져, 서로 차지하려 으르대는 통에 그녀와 병사들이 지나가도 신경쓰지 않았다.

동물들이 사는 초원을 둘러본 다음엔 성 밖으로 밀려나 사는 영지민들을 보는 일이었다. 그들은 성 안에서 사는 영지민보다 가난했다. 그러나 영주는 그들에게도 꼬박꼬박 세금을 거둬가면서도, 제대로 보살피지 않았다. 그나마 헬리만이 경비대장으로 오면서부터 그들을 살펴보거나 민원을 알아보는 것을 시작했다고 했다.
성 밖의 영지민들은 성 안 사람들의 차별에도, 꿋꿋이 살아갔다. 아멜리아는 그런 걸 보며 용하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활을 견디지 못했던 자신과는 영 딴판이었다.


“아멜리아!”


이제 성 안에 들어가 성 안 영지민들을 살펴보려 할 때, 어린애 하나가 그녀를 부르며 달려왔다. 그녀는 타고 있던 말에서 내려, 그 아이를 안아주었다. 가끔 성 밖으로 나와 있을 때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아이였다. 병사들이 그 아이를 못마땅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비쩍 마른 여자가 다가왔다. 아멜리아는 빙긋 웃으며 아이 만큼이나 비쩍 마른 제 어미에게 도로 안겨주었다.


“뭐하러 저런 아이는 살피십니까요?”


이것저것 참견하기로 유명한 경비병이자 이제는 오십을 바라보는 ‘뮐러’ 가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그저 짤막하게 대답했을 뿐이었다.


“좀 더 빨리 가지.”


경비병들은 다시 말에 올라타, 좀더 걸음을 재촉하는 아멜리아의 뒤를 따라 황급히 다리를 놀렸다.

성안 영지민들은 마치 영주가 마을을 도는 것 마냥, 그녀를 슬슬 피했다. 무어라 한 것도 아니었고, 어느 사람을 붙잡아 행패를 부린 것도 아닌데도 그랬다. 성 밖의 영지민들이 그녀에게 가볍게 인사하거나 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마찬가지로 그녀는 성 안의 영지민들에겐 차갑고 딱딱하게 대했다. 성안 사람들은 대개 보면, 바깥의 영지민들보다는 부유한 사람들이었다. 성 안 사람들은 변호사, 의사, 상인, 그것도 아니면 제법 돈좀 만지는 농민들이 다수였다. 그런 자들에겐 인심을 보일 필요가 없게 느껴졌다. 비록 잘못된 생각이긴 했지만, 고치는 것은 힘들었다. 그러나 가끔, 성 안에서 사는 아이 몇몇이 다가오곤 하면 그들에게 웃어보이기도 했다.

그녀는 경비병을 잠시 세워두고 말에서 내린 후 술집이나 여관을 살폈다. 수상한 자 - 이를테면, 얼굴이 알려진 인간 사냥꾼이나 범죄자, 혹시라도 ‘용을 훔친’ 드라냐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그녀는 헬리만과 함께 어느 술집에 들어서 사람들을 대강 흩어보았다. 술집에 있는 자들은 그녀에게 별로 신경쓰지 않았다. 자신은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기에 그런 것 같았다.
검은엘프 두명과 드워프 하나, 인간 셋, 달무리 하나. 그녀는 별로 특별한 건 없다고 보고, 다시 술집에서 나가려 했다. 그러나 어떤 목소리가 그녀의 발걸음을 붙잡아놓았다.


“뉘갈. 멍청한 소리 하지 마.”


“멍청한 소리가 아니다.”


달무리와 인간이 언쟁하는 것 처럼 보였다.
아멜리아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의 옆에 있던, 헬리만이 슬그머니 칼자루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뉘갈은 몇 개월 전, ‘달무리’ 들의 사자가 다가와 인간사냥꾼과 있는 범죄자라고 말한 것을 들은 적이 있었다. 영주 역시 그녀에게 뉘갈과, 같이 다니는 인간 사냥꾼을 잡으라는 명령을 내린 적이 있었다.
이런 때에..
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눈치채면 안되었다. 달무리들의 힘은 어느 정도 인지, 그녀는 알고 있었다. 거기에 ‘방패자’ 라면, 반항도 적지 않을 터였다.
일단 나가는게 좋겠어.
그녀는 태연하게, 하품을 하는 체 하며 바깥으로 나갔다. 헬리만이 잠시 멈춰 있다가 그녀를 따라갔다. 술집 밖으로 나온 아멜리아는 말에 오르지 않았다. 병사들이 그녀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체포자가 있다.”


그녀가 거의 들리지 않을법한 목소리로 말했다. 결코 조용하지는 않은 거리였으나, 경비병들은 똑똑히 알아들었다.


“달 하나, 해 하나.”


‘달’ 은 달무리를 줄여 말하는 암호였고, ‘해’ 는 인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경비병들이 천천히 무기를 꺼내들었다. 아멜리아는 애써 미소를지었다. 그리고 경비병 하나를 불러, 치유사와 마법사를 데려오고 영주에게 알리라 했다. 저 정도라면 영주도 그냥 넘기지 않을 테니까.
그녀는 술집으로 다시 들이닥쳤다. 쾅, 하고 나무문짝이 부서졌다. 일순 술집에서 떠들썩하게 떠들던 자들의 이목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아멜리아는 신경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인간 사냥꾼이 있는걸 알고 있다. 순순히 나와 주는게 좋아.”


그녀의 목소리가, 일순간 떠들썩한 술집을 조용하도록 만들었다. 술을 마시던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들은 모험가였고, 현상금 사냥꾼을 하던 이들도 제법 있을 터였다. 따라서 인간 사냥꾼을 찾아 목을 따내면 돈을 받는 것도, 그리고 경비대장이 말할 정도라면 얼마나 많은 돈이 걸려있을지도 알고 있었다. 그리고 최소한 목을 따지는 못하더라도 잡는걸 도운다면 돈을 받는것 역시도.
이거, 멋진데..
길게 머리를 기른 인간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른 이들은 숨을 죽이고 - 돈을 노리는 이들은, 제각기 가지고 있는 무기를 슬슬 꺼내들었다. 술집 주인은 짜증스런 얼굴로, 술집을 나가버렸다. 일단 그로써는 피하는게 상책이었다. 가게에 손해가 생긴다면 영주가 보상을 할 것이었으니 괜히 술집에 앉아있다가 애꿎게 골병만 드는 건 좋지 않았다.
이런 싸움을 원치 않는 이들은 재빨리 술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그들은 투덜대었고, 짜증스러워 보였다. 그러나 어느 한명은, 그 싸움을 지켜보고 싶다는 듯 흥미로운 표정으로 바깥에서 술집 안을 들여다보았다.


쾅!


아멜리아와 그녀 옆의 헬리만이 검을 꺼내드는 순간, 미동없이 앉아있는 것 처럼 보이던 달무리 하나가 나무 테이블을 집어던졌다. 아멜리아와 헬리만이 재빨리 피했고, 나무테이블은 벽에 부딫혀 순식간에 부서졌다. 돈을 노리는 것으로 보이는 자들이 무기를 꺼내들고, ‘인간 사냥꾼’ 으로 보이는 달무리에게 달려들었다. 달려들려는 아멜리아를 헬리만이 저지했다. 그는 고개를 저었다. 아멜리아는 그것이 무슨 뜻인지를 알았다. 일단 ‘현상금’ 을 노리는 자들이 덤벼들도록 놔두는 것이 좋다는 것이었다.
비록 영주는 좋아하지 않겠지만.


아아악!


달려들었던 검은엘프 하나가 달무리의 발에 걷어채이고 뼈가 부러져 비명을 질렀다. 그의 동료로 보이는 자가 치유의 빛을 읊어 상처를 낫게 해 주었다. 간신히 되살아난 검은엘프는 헐떡이며 비틀댔다. 그가 입었던 상처는 없어졌고, 상처가 났었다는걸 알려주는 건 - 잔뜩 일그러진 갑옷 뿐이었다.
공격하는 자들은, 검은엘프 하나와 인간 둘이었다. 빨간 수염을 잔뜩 기른 드워프는 테이블 의자에 앉아 흥미롭다는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보통 드워프들이 이런 일이 생기면 앞뒤 안가리고 뛰어드는 걸 감안한다면, 대단한 ‘자제력’ 이었다.


으르렁.


꼭 개가 난폭하게 짖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달려드는 인간 하나의 얼굴을 붙잡았다. 인간은 당황하지 않았다. 그는 검을 휘둘러, 달무리의 억센 팔을 잘라내려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도 전에 달무리의 곁에 있던 인간이 그의 목에 검을 박아넣었다. 피가 꿀럭꿀럭 솟아났다. 다른 하나는, 이미 달무리의 동료에게 죽임을 당해 있었다.


“이런.”


아멜리아는 유감스러운 소리를 냈다. 모험가들이 좀더 체포자의 진을 빼놓기를 바랬지만, 이래서야 더 이상은 무리인 것 같았다.
경비병들과 그녀, 헬리만이 검을 꺼내들려 할때 - 아까 상처 입었었던 검은엘프와, 그의 동료가 다가왔다. 검은엘프는 질린다는 표정이었다. 보나마나 돈을 요구할 셈인 것 같았다. 사실상 도움도 되지 않았건만.


“제기.. 죽을뻔했네. 제기랄! 뭐 저런게 있담. 댁도 도망치는게 어때?”


아멜리아가 돈주머니를 내밀었고, 약간 충격을 받은 것처럼 보이던 검은엘프 대신 그의 동료가 그걸 받았다. 그리고, 검은엘프는 ‘쩝’ 하고 입맛을 다신 후에 동료를 데리고 황급히 꼬리를 내뺐다. 헬리만이 그녀에게 물었다.


“용을 부를까요?”


“최악의 경우에만. 마을이 부서지잖아.”


그녀는 병사를 눈을 의식해 존댓말을 쓰지 않았다.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달무리가 술집 벽을 부수고 빠져나왔다.
과격한 방법이야.
아멜리아는 낮게 중얼거렸다. 달무리치곤 얌전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 그녀는 검에 마나를 불어넣었다. 그리고 무어라 읊었다. 검이 하얗게 빛났고, 그녀의 몸에서 피같은 검붉은 안개가 피어났다. 그 안개는 도망치려는 달무리를 도로 불러들였다. 달무리는 뒤돌아서던 몸을 돌렸다. 달무리는 그녀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달무리가 불쾌한 듯이 으르댔다. 달무리 옆의 인간은 뒤틀린 것 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입꼬리만 간신히 올라간 그 웃음은 약간 소름을 돋도록 만들었다.
실컷 비웃어 봐, 얼간이.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치유사가 빨리 오기만을 바랬다. 달무리가 한번 날뛰면 지금 자신을 따라온 경비병들은 죄다 죽거나 치명상을 입을 터였다.


화악.


달무리가 뛰어올랐다. 그리고 병사들을 내리찍었다. 병사들이 위로 치켜든 창들은 달무리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살갗을 베기도 전에 힘없이 부서졌다. 병사 하나가 그에게 달려들었으나, 달무리는 우악스럽게 손으로 얼굴을 후려갈겼다. 동시에 병사의 얼굴에서 피가 좍 튀겨나왔다. 그는 한스라고 불리던 자였다.
아직 치유사가 도착하지 않아서, 병사들은 이리저리 널브러질 수 밖에 없었다. 뮐러는 긴 창을 휘두르기도 전에 죽었다. 달무리가 그의 배를 걷어찼기 때문이었다.
맙소사.
그녀는 입술을 짓씹었다. 그리고 달무리를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먼저 뛰쳐나간 것은 헬리만이었다. 그는 달무리를 공격했다. 그래서 그녀는 타겟을 바꾸어 뒤에 있는 인간을 공격했다. 수척해보이는 사람이었는데, 달무리의 곁에 가만히 있을 뿐이었다. 그녀는 보통 인간 사냥꾼들의 혈색이 안 좋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있었다.
하기사, 인간 죽이는것도 보통 일이 아니지.
그녀는 쓰게 웃었다.


“아가씨인가?”


인간 사냥꾼의 목소리에서 쉰 듯한 거슬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멜리아는 억지로 웃음을 지어보였다. 그리고 분명하지 않은 발음으로 대답했다.


“맞아.”


쩡!


그녀는 인간과 달무리를 떼어놓을 생각으로 검을 들이밀며 밀어붙였다. 보아하니, 그렇게 상태가 좋아보이는 것 같지는 않은 인간이었다. 달무리가 그녀를 발견하고 공격하려 했으나, 헬리만에게 막혔다. 달무리가 불쾌한 것처럼 으르댔다. 그러나 엘프는 빙긋이 웃었다. 달무리가 손톱을 길게 빼었다. 갈색으로 빛나는 손톱들은, 단검 여러개가 손가락 끝에 달린 것 같았다.


쾅!


끔찍하다고 할 법한 충격이 밀려들었다. 큰 망치로 얻어맞은 것 같았다. 그러나 엘프는 이를 악물고 검을 비틀어내어 손톱을 튕겨내었다. 그는 달무리를 죽인 경험을 떠올렸다. 이전에도 달무리를 죽인 적이 있었다. 몇백년 전의 ‘달무리와 인간의 맹세’ 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달무리 사냥꾼이었을 적에.
오랜만에 사냥이나 할까.
그는 달무리가 다시 달려드는걸 바라보았다.

그녀는 달려드는 인간의 공격을 검의 한가운데로 막았다. 그러나 공기가 찢어지는 소리가 났다. 그녀는 단검의 힘을 흘려보내며 옆으로 몸을 돌려 피했다. 머리카락이 서석, 하고 마른 나뭇잎처럼 잘려나갔다.
단검과 장검이라..
그녀는 쓰게 웃었다. 상대방은 단검만 쓰지 않았다. 한손으로 장검으로 길게 휘두르면서, 동시에 단검으로 날카롭게 베었다. 여지껏 보지 못한 것이었다.


“댁같은 작자들은 많이 보아왔지.”


“아하. 그래?”


그녀는 상대방의 말을 똑같이 받아치는 자신이 우습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흰 기운이 실린 검을 휘둘렀다. 인간 사냥꾼의 칼날이 움직이는 꼴은, 어지러운 춤사위 같았다. 이전에 본 ‘칼의 바람’ 들의 움직임과 좀 비슷한 듯 하면서도 틀렸다. 인간 사냥꾼은 단검으로 다가왔다가, 검으로 베었다. 긴 검이 다시 움직이려는 순간에, 그녀는 검을 자신의 것으로 강하게 쳐내고 길게 베었다. 인간 사냥꾼의 검이, 균형을 잃고 하늘로 튕겨져나갔다.
인간 사냥꾼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단검으로 그녀의 검을 막으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는 재빨리 몸을 뒤로 뺐고, 검이 아슬아슬하게 가슴팍을 스쳤다. 가죽 갑옷이 찢어졌다.


“이거, 그냥 놀려먹으면 안되겠군.”


그가 희쭉 웃으며 말했고, 아멜리아가 코웃음쳤다.


“놀려먹는다고?”


그녀가 재차 달려들었다. 그녀의 공격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장검을 주워들을 수 있음에도 상대방은 주워들지 않았다. 단검으로 그녀의 공격을 상대했다. 단검은 재빨랐고, 그녀의 몸에 상처를 남기기 시작했다. 재빠르게 공격하는 독사처럼 그녀의 목숨을 노리던 단검을, 그녀는 이를 악물고 검으로 받아 친 후 그의 배를 걷어찼다. 쿨럭! 하는 소리와 함께 그는 뒤로 넘어질 뻔 했으나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래, 인간들 사냥하니 좋았나?”


그녀의 검에 다시 흰 기운이 모였다. 꼭 햇살을 받은 거울처럼, 그녀의 검이 눈부시게 빛났다. 그걸 바라보던 인간 사냥군은 얼굴을 찌푸렸다. 소름이 돋았다. 그는 단검에 기운을 실었다. 단검에 짙은 흑색 바람이 모여들었다. 이번엔 그가 먼저 달려들었고, 그녀는 으르대며 강하게 그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인간 사냥꾼은 그냥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의 다리를 노리고, 그가 검을 피함과 동시에 그녀의 다리를 걷어찼다. 그녀가 일순 휘청하며 뒤로 넘어졌다. 그리고 그의 단검이 날아들었다. 그녀는 검으로 그것을 간신히 막아냈다. 팔목이 지끈댔다. 인간 사냥꾼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크르렁!


비명인가? 아니면 헬리만을 죽였다는 거야?
그녀는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느꼈다. 동시에, 인간 사냥꾼의 시선도 다른 곳으로 향했다. 그녀는 그걸 놓치지 않았다. 검으로 단검을 밀어내고 위에서 내리찍으려는 그를 걷어찼다. 그가 뒤로 나뒹군 사이에, 그녀는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리고 재빨리 뒤를 돌아보았다. 엘프도 달무리도 죽지 않았다. 엘프는 드라냐의 마법을 이용해 흰색 사자를 불러내었다. 사자가 달무리에게 달려들어 팔뚝을 물어뜯었다. 으르르, 하고 달무리가 으르대며 사자를 붙잡았다. 그리고 억지로 뜯어내 헬리만에게 던지려 했다. 그러나 그 순간에 - 엘프의 검이, 달무리의 배를 찢었다.


“안돼.”


쉰 목소리였다. 몸을 추스르고 휘청대며 일어난 인간 사냥꾼이 그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헬리만은 인간 사냥꾼을 보지 않았다.
그는 달무리의 배에 박힌 검을 깊히 밀어넣었다. 비릿한 피비린내가 났고, 달무리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그는 달무리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뻗는 것을 알았다. 그는 검을 내버려두고, 몸만 뒤로 내뺐다. 달무리는 재빨리 몸을 내뺀 엘프 대신, 검을 붙잡았다. 달무리는 검을 뽑았다. ‘촥’ 하고 피가 튀겼다. 달무리가 으르댔다.
인간 사냥꾼이, 달무리에게 달려갔다. 그대로 보내면 안되었기에 아멜리아는 지나가려는 그를 검으로 붙잡았다.


“사냥꾼이 어딜 가시나.”


“제기랄!”


단검에 일순간 흑색 바람이 모여, 검을 쳐냈다. 그리고 그는 달무리에게로 달렸다.
그녀는 손목이 비틀린 것을 느꼈다. 검이 뒤틀리면서 붙잡고 있던 손목도 뒤틀렸다. 그나마 손목이 아예 부러져 너덜거리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그녀는 뒤틀리지 않은 손목으로 검을 붙잡았다. 그리고 앞서가는 자를 막기 위해 검을 치켜들었다.

이제야 오고있는, 저만치서 달려오는 치유사가 달려오며 치유를 읊었다. 그래도 영주 나름대로 급했던 모양인지 빨리 온 것에 속했다.
따스한 기운이 올라와 손목을 다시 원래모양으로 되돌려놓았다. 그녀는 한손에 쥐고 있던 검을 원래대로 쥐었다. 치유사는 치유 뿐만이 아니라 그녀에게 축복 역시 읊었다. 회청색 바람이 그녀의 발치에 맴돌았다. 카운라르의 바람을 표현하는 색이라면, 바로 이 축복의 바람일 터였다.
그녀는 검을 가지고 달렸다. 엘프의 발치에도 바람이 일었다. 덕분에 그는 날아드는 공격을 피할 수 있었다. 달무리는 배에 구멍이 뚫렸어도 죽으려 하지 않았고, 엘프를 공격했다. 엘프가 있던 자리에 달무리의 손톱이 공기를 긁어냈다. 공기가 비명을 지르며 찢어졌다.

헬리만은 누군가가 양피지를 찢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자신을 공격하려는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밝은 빛이 났고 - 번개 비슷한 것 같았다 - 그것은 재차 달려들려고 하는 달무리의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워어어, 하고 달무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렸다. 번개로 지져진 살이 타는 냄새가 났다. 아멜리아는 누가 양피지를 찢었는지 궁금했지만, 지금은 신경쓸 수 없다는게 안타까웠다. 만약 여유로운 상황이라면 도운 것에 대해 보상이라도 할텐데.


“헬리만!”


아멜리아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헬리만의 검을 던져주었다. 엘프는 검을 받았다. 아멜리아는 뒤에서
발목을 베었다. 달무리가 균형을 완전히 잃었다. 그는 울부짖으며, 뒤로 쓰러졌다. 달무리는 가물가물한 시선을 접고 숨을 멈췄다.

제길.

인간 사냥꾼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는 달무리가 죽을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다.


왜, 그가 엘프 따위를 죽이지 못한거야?


그는 이해할 수 없었으나, 상황이 갈수록 안 좋아지는 것은 알고 있었다. 심장이 미친듯이 뛰었다. 그는 조심스레 품 속을 뒤졌다. 여분의 단검이 하나 있었다.
쩡, 하고 검과 검이 맞부딫혀 울부짖었다. 검이 환하게 빛났고 소름이 돋았다. 그는 품 속의 단검 하나를 아멜리아의 복부에 던졌다. 푹,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솟구쳤다. 그는 그녀를 뿌리치고 엘프를 향해 달려들었다.
치유사는 아멜리아가 배에 박힌 단검을 빼내는 동안 그녀를 치유했다. 상처가 아물었고 남은 것이라곤 말라비틀어진 핏자국과 검이 박혔다는 걸 알려줄만한 갑옷의 틈새 뿐이었다.
엘프는 무엇인가를 불러내었다.
검은색.. 아니, 흰색 해골?
눈이 쓰려졌다. 시선이 갑자기 흐릿해지는 걸 느꼈다. 또다시 누군가가 마법을 걸어버린 모양이었다. 시야가 시카맣게 변함과 동시에 그는 일순 비칠거렸다. 그는 속으로 신음했다. 이런 전투상황에 시야 가리기 마법은 분명 죽음을 가져다 줄 터였다.


푹.


해골이 비칠대는 인간에게 다가와, 그의 목에 앙상한 뼈로 만든 검을 쑤셔박았다. 피가 좍 튀겼다. 인간 사냥꾼은 마침내 '시야 가리기' 마법이 사라져서 눈을 뜨고 푸르르 떨다 고꾸라졌다. 입속에서 진한 쇠비린내가 났다. 그는 피를 뱉어내려 했으나 계속해서 피가 올라오는 바람에 그럴 수 없었다.
해골이 달깍, 웃었다. 아멜리아는 차가운 눈으로 시체를 바라보았다. 헬리만은 해골을 돌려보냈다.


“상처는?”


그녀가 달려와 물었다. 헬리만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그의 행동과는 달리 뼈가 부러진 것 같았다. 한쪽 손목이 부러져 있었다. 그리고 갑옷도 이곳저곳 우그러져 있었다.
빌어먹을 달무리.
그녀는 속으로 욕지기를 했다.


“치유사!”


놀란 눈으로 달무리의 시체와 인간의 시체를 번갈아 바라보던 어린 치유사 하나가 아멜리아의 목소리에 황급히 달려와 헬리만을 치유했다. 이제 영주에게 보고해야만 했기에 그녀는 말에 올랐다. 용케도 말은 멀리 도망치지 않고 있었다. 치유사들은 병사들의 시체를 찾아보며 행여나 아직 숨이 붙어있는 자가 있는지 살폈다. 다행히 몇이 살아있는지 치유의 빛이 환하게 일어났다.

발걸음을 바삐 놀려, 성의 계단을 밟아 올랐다. 그리고 그녀는 영주의 앞에 가 인사했다. 영주는 이제 마흔이 넘은 자로, 아내는 죽고 아들은 ‘이본텐스’ 가 되기 위해 떠났다고 했다. 영주가 차가운 눈으로 아멜리아를 바라보며 짧은 수염이 자라는 턱을 쓰다듬었다.


"어찌 되었나?"


“달무리, 인간 전부 죽였습니다. 생포는 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항을 하는 바람에…”


영주는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다른 지역의 영주들, 왕들도 못 잡은 인간 사냥꾼 둘을 잡은 것 은 좋은 수확이었다. 그는 살아남은 경비병 여럿이 간신히 들고 온 달무리의 시체와 인간 시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차갑게 미소지었다.


“수고했네.”


아멜리아는 간신히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인사한 후에 뒤돌아 나갔다. 헬리만도 영주에게 인사한 후, 그녀의 뒤를 따라 나갔다. 영주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수프와 딱딱한 빵으로 저녁을 때우고, 그녀는 몇 개의 서류를 살펴본 후 사인했다. 가끔 쓸데없는 것들은 영주 대신 그녀가 맡아 하기도 했다. 그녀는 할 일이 없어, 아무런 재미도 없는 그것들을 흥미로운 책이라도 되는 것 마냥 찬찬히 흩어보기도 했다. 그렇게 하다 보니,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지나갔다.
이제 밤의 여신의 손길이 드리워진 밤이었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산책이라도 할까 싶어 바깥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


페리안은 어느 집의 벽에 몸을 기댄 채 카프스를 죽이고 남은 돈을 세 보았다. 생각보다 많아서 그는 만족스런 웃음을 띄었다. 그리고 그는 오늘 한낮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생각했다. 막 돈을 벌고 오는데 이전에 보았던 경비대장과 달무리와 달라붙어 싸우고 있던 엘프의 모습이 보였고, 그는 아무래도 경비대장 쪽을 돕는게 나을 것 같아 달무리를 공격하고 인간 하나에게 저주 마법을 걸었다. 마법사는 아니었으나 마법 시전이 가능한 양피지를 지니고 있기에 가능했었다.
그거, 아까워라. 다시 살려면 꽤 돈이 들 것 같은데.
그는 입맛을 다셨다. 그리고 그가 여관으로 가려 할 때 - 누군가 저만치서 오는 것 이 보였다. 자세히 보니, 아까 낮에 본 그 여자였다.
경비대장 이었던가?
그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


페리안이 그녀를 불렀다. 아멜리아가 신전에 막 들어가려는 찰나에, 그녀는 어느 엘프를 보았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그녀는 경비대장인 만큼 그의 신원을 확인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이런게 흠이야.
그녀는 속으로 혀를 찼다. 경비대장이 되고 나니 성안에서 보지 못했던 사람들을 혼자 만나면 누군지 확인부터 하게 되어버렸다.


“설마, 드라냐는 아니겠죠?”


“물론. 전투는 잘 봤수다.”


아멜리아는 고개를 갸웃했다. 전투를 잘 봤다니. 거리에 지나가던 사람들이었나?
아무렴 어떠랴 하는 심정으로 그녀는 웃어보였다. 이 엘프에 관해 문제가 일어난다면 그때에 해결해도 늦지 않을 터.


“다행이군요.”


그녀는 웃었다. 찬 바람이 머리카락을 쓸었다. 그녀는 거리를 걸었고, 엘프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여관으로 향했다. 페리안은 돈이 든 주머니를 들고 무어라 노래를 흥얼대었다.

그녀는 들판에 주저앉았다. 성을 나오는 도중에 경비병들이 그녀를 알아보고 인사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평소 같으면 피곤해서 꾸벅꾸벅 졸고 있을 시간인데도 졸음이 오지 않았다. 그녀는 눈을 감았다. 오늘 있었던 것들을 다시 되짚어보았다. 달무리로 인해서 죽은 경비병들 중, ‘한스’ 의 어머니가 신전으로 와 흐느끼고 있던게 기억났다. 남편 없이 한스를 키웠다고 하니 아들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이 어느정도 일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런 것 외에도 술집이 부서져 보상을 요구하던 술집 주인도 보였다. 그 사람, 보상 받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카운라르의 영주는 돈만 처먹어대는 돼지 같은 작자는 아니니까.
무심코 올려다 본 하늘은 더없이 맑았다. 별이 총총히 박힌 모양이 보였다.







────
설명을 하자면, 성주의 아들이 되려는 '이본텐스' 는 일종의 기사입니다. 다만 '이본다르그' 를 섬기는 자가 되어 그 관련 기술을 배우는 것입니다. 오크들은 이본텐스를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오크들의 분노를 절망으로 바꾸는 기술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므로 이본텐스는 오크들에게 자신이 어떤 자인지 말하면 좋지 않습니다.


덧.
제 소설의 세계관은 각 종족마다 고유한 하나의 신이 있는게 아니라, 같은 종족이라도 제각기 일파에 따라서 여러 믿는 신이 다르다는 설정입니다. 따라서 신관들도 축복을 내릴 때에는, 함부로 어느 하나의 신의 이름만을 부르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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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레코]은빛카린 | 작성시간 07.03.11 벨피드나님도 죽화에 이어 괴수타입이신 듯...; 저는 이렇게 많이는 못 씁니다-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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