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도 후 49일-연기게송
천인들과 보살들의 찬탄을 받은 부처님은 보리도량 금강좌 주변에서 일주일 씩 일곱 번, 49일 동안 해탈의 즐거움을 누리시며 깨달은 바를 명료하게 사유하셨다.
첫 번째 칠일 동안에는 연기(Paticcasamupada, 緣起, 조건에 의한 발생, dependent origination)의 이치를 사유하셨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일어나므로 저것이 일어난다.
이것이 없으므로 저것이 없고, 이것이 사라지므로 저것이 사라진다.
Imasmim sati, idam hoti; imass uppada, idam uppajjati;
이마쓰밍 사띠 이당 호띠; 이마싸 우빠다 이당 우빠자띠
Imasmim asati, idam na hoti; imassa nirodha, idam nirujjhati.
이마쓰밍 아사띠 이당 나 호띠; 이마싸 니로다 이당 니루잔띠
此有故彼有、此生故彼生; 此無故彼無、此滅故彼滅。
연기의 법칙은 고통의 원인과 결과를 밝히는 지혜이다. 연기법은 약이어서 먹으면 고통이란 병이 낫고, 금강저이므로 번뇌를 파괴하고, 감로이므로 마시면 불사(不死)의 경지에 들게 해준다. 위 게송에서 ‘이것’은 (고통의) 원인이고, ‘저것’은 (고통이란) 결과이다. 원인이 있으므로 결과가 있다. 원인을 없애면 결과는 따라서 소멸한다.
이것을 우리 삶에 적용시켜보자. 삶의 총체적 경험, 즉 생로병사우비고뇌(生老病死 憂悲苦惱)는 고통이다. 고통의 원인은 무엇인가? 인간으로 태어났기(生) 때문이다. 왜 태어남이 있었나? 존재하려는 본능(有) 때문이다. 생존본능은 왜 생겨났나? 붙들고 놓지 않으려는 경향(取)때문이다. 그것의 원인은 무엇인가? 쾌감을 애착하는 성향(愛) 때문이다. 그 성향은 왜 생겨났나? 쾌, 불쾌라는 감각(受) 때문이다. 감각은 어떻게 생겨났나?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觸)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入)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나? 관념과 물질(名色) 때문이다. 관념과 물질은 왜 있게 되었나? 분별하는 의식(識)이 있기 때문이다. 식은 왜 있게 되었나? 의욕과 조작(行)이 활동했기 때문이다. 행은 어떻게 일어났나? 사실을 그대로 알지 못하는 무명(無明) 때문이다. 그래서 결론은 이렇다.
무명(無明)으로 인하여 행(行)이 일어나고, 행으로 인하여 식(識)이 있고, 식이 있으므로 명색(名色)이 일어나고, 명색으로 인하여 육입(六入)이 생겨나고, 육입으로 인하여 촉(觸)이 생겨나고, 촉으로 인하여 수(受)가 일어나고, 수로 인하여 애(愛)가 일어나고, 애로 인하여 취(取)가 일어나고, 취로 인하여 유(有)가 일어나고, 유로 인하여 생(生)이 일어나고, 생으로 인하여 노병사우비고뇌라는 괴로움의 무더기(苦聚)가 일어난다. 이것이 우리가 어떻게 해서 고통스런 삶을 살게 되었는가를 알게 해주는 유전연기(流傳緣起)이다. 고통이란 현상의 원인이 규명되었으니, 이제 그 원인을 없애면 결과는 자연적으로 사라질 것이다. 그래서 무명이 사라지면 행이 사라지고, 행이 사라지면 식이 사라지고,.....,생이 사라지면 노병사우비고뇌라는 괴로움의 무더기가 사라진다. 이것이 고통스런 삶에서 벗어나게 해주는 환멸연기(還滅緣起)이다.
두 번째 주에는 깨달음의 자리를 만들어준 보리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나무를 응시하면서
법열에 잠기셨다.
세 번째 주에는 보리수 주변을 경행하였다.
네 번째 주에는 ‘보배의 방’에 머물면서 아비담마(Abhidhamma)에 대해서 명상하셨다.
다섯 번째 주에는 폭풍이 불고 폭우가 쏟아졌다. 나무에 깃들어 살던 무짤린다(Mucalinda)용왕이 나타나 똬리를 틀어 부처님의 몸을 감싸고 머리를 부채처럼 펴서 보호하였다. 폭풍우가 지나자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다시 맑아졌다. 부처님의 몸(佛身)을 보호한 공덕인가, 용왕이 똬리를 푸는 즉시 뱀 몸을 벗고 청년의 모습으로 바뀐다. 합장을 하고 부처님 앞에서 서자, 부처님께서 따스한 목소리로 말씀하신다.
“법을 깨달아 마음이 기쁜 자는 홀로 있어도 행복하다. 이 세상 어떤 생명에게도 적의를 품지 않고 자비로운 마음을 갖는 자는 행복하다. 모든 욕망의 굴레에서 벗어나 ‘나’라는 교만한 마음을 놓아버린 사람은 견줄 수 없는 행복을 누리리라.” 뱀 몸에 깃든 공격성과 분노의 기운이 순간 눈 녹듯 사라진다. 자인삼매(慈仁三昧)는 천하무적이다.
여섯 번째 주에는 라자야따나(Rajayatana, 반얀나무)나무 아래에서 법열을 즐기셨다.
성도 후 최초의 공양-부처님은 머리털 세 개를 뽑아 주시다.
일곱 번째 칠 일을 아자빨라(Ajapala)나무 아래에서 보내시던 그때 욱깔라(Ukkala) 지방에서 온 상인 땁뿌사(Tappussa)와 발리까(Bhallika)라는 상인이 오백 대의 수레에 물건을 가득 싣고 근처를 지나고 있었다. 그들은 며칠 전부터 자기들의 조상신이 현몽하여 깨달은 성자를 곧 만날 터이니 그분께 곡물가루와 꿀을 공양 올리라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그런데 홀연 숲속에서 찬란한 아우라(Aura)가 비쳐나는 것을 목격하고 바로 그 성자가 출현했다고 생각한다. “성자시여, 저희가 올리는 공양을 받으시고 우리가 오랫동안 잘 살고 행복하도록 해주십시오.” 이것이 부처님이 성도하신 후 최초로 받으신 공양이다. 그렇다면 그 공덕이 얼마나 크겠는가? 부처님이 공양을 마치자 두 상인은 삼배를 올리면서 이렇게 사뢰었다.
“Buddham saranam gacchami 붓당 사라낭 가차미
Dhammam saranam gacchami 담망 사라낭 가차미
거룩한 부처님께 귀의합니다. 거룩한 가르침에 귀의합니다. 오늘부터 죽을 때까지 저희들을 재가 제자로 받아들여 주십시오.” 과연 두 상인이야말로 부처님의 최초의 재가 제자로서 불교역사상 세세생생 기억될 것이니 이 얼마나 수승한 보시의 공덕인가? 상인은 부처님을 만난 기념으로 무엇이든 주실 것을 요구했다. 친절하신 부처님은 자신의 머리에서 머리털 세 개를 뽑아 주었다. 미얀마(Myanmar) 불교에 의하면 이 두 상인은 멀리 미얀마에서 인도까지 왕래하는 무역업자이며 그 때 받았던 부처님의 머리털은 양곤(Yangon)의 쉐다곤(Shwedagon) 황금탑에 모셔져 있다고 한다.
범천의 권청-법을 설하옵소서!
이렇게 성도 후 49일을 법열에 잠겨 계시다가 나오셔서 진리를 설파하실 의도를 내셨다. 그러나 한 순간 의혹이 일어났다. “이 진리는 깊고 깊어, 보기 어렵고, 깨닫기 어렵고, 섬세하고, 고상하고, 단순한 사려를 넘어서는 것이다. 지혜로운 이라야 알 수 있는 것인데 과연 받아들일 만한 사람이 있을까? 세상 사람들은 집착을 즐기고 기뻐한다. 그런 그들이 집착을 떠나고, 없애고, 사라지게 하는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을까? 세상과 반대되는 나의 가르침을 그들은 비방하지 않을까?” 경전에서는 이 대목에서 마라의 속삭임이 있었다고 기록된다. “길고 긴 고행으로 이제 부처의 경지를 이루었으니, 이제 편히 반열반(Parinibbana, 완전한 열반 즉 죽음)에 드소서.” 마라의 속삭임에 대해 부처님은 어떻게 대응하셨는가? “마라여, 너는 열반의 뜻을 잘못 이해하였다. 열반이란 중생을 교화하지 않고 침묵하는 것이 아니다. 중생에게 유익한 일을 하지 않은 채 죽음에 드는 것은 열반이 아니다.” 부처님의 내면에서 두 가지의 생각이 교차한다. 중생이 내 가르침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러니 이대로 반열반에 드는 것이 좋을까, 그런데 중생에게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고 반열반에 든다면 나의 깨달음이 무슨 소용이 있을 것인가?
이때 부처님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고 있는 천상세계가 동요하기 시작한다. 이 우주에 부처님 한 분이 나타나기 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은 세월을 기다려왔던가, 이제 다행하게도 남섬부주 보리수 아래에 싯다르타가 깨달음을 얻어 부처님이 되셨다. 그런데 그 부처님이 설법하실 것을 망설이고 계신다. 부처님께서 설법 하시도록 우리가 무슨 대책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자, 사주세계(四洲)를 감찰하는 제석천왕은 적절한 조치를 취해주시오. 이에 도리천의 주인인 제석천왕이 부처님께 내려와 간청한다.
“자, 어서 일어나십시오. 지혜의 빛으로 세상의 어둠을 비추소서.”
이 정도의 청으로는 세존의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다. 마음이 답답해진 대범천왕 사함빠띠(Mahabrahma Sahampati)가 한 쪽 어깨에 상의를 걸치고 오른쪽 무릎을 꿇은 다음 합장하고 간청하였다.
“부처님이시여, 법을 설하소서. 여래시여, 법을 설하소서. 세존께서 법을 설하시지 않으면 탐욕의 강물에 떠밀리고 분노의 불길에 휩싸인 이 세상은 파멸로 치닫고 말 것입니다. 세존이시여, 이 세상에는 그래도 때가 덜 묻은 이들이 있습니다. 선과 진리 앞에 진실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을 버리지 마소서. 그들마저 놓치는 것은 참으로 슬프고 애석한 일입니다.”
범천은 여전히 침묵을 지키시는 부처님께 간절한 마음으로 노래한다.
“가장 현명하신 분이시여, 모든 것을 보시는 분이시여, 슬픔을 없앤 분이시여.
진리의 누각에 올라 태어남과 늙음과 슬픔에 빠져 있는 사람들을 굽어보소서.
영웅이시여, 승리자이시여, 일어나소서.
진리를 설파해주소서. 분명 이해하는 이가 있을 겁니다.”
부처님은 범천의 간절한 권청(勸請)과 중생에 대한 연민심으로 다시 세상을 살펴본다. 세상이 연못이라면 중생은 그 속에서 피어나는 연꽃과 같구나. 어떤 연꽃은 물속에 잠겨 썩어버리고, 어떤 연꽃은 수면 가까이에 잠겨있고, 어떤 것은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다. 수면 가까이에 있는 연꽃봉오리에 아침햇살이 비치면 꽃봉오리는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운다. 수면 가까이에 있는 연꽃봉오리 같이, 때가 덜 묻은 중생에게 아침햇살 같은 가르침을 주면 그들이 물 위로 솟아올라 꽃을 피우지 않겠는가? 그러면 그 화려한 빛깔과 은은한 향기로 주변을 아름답게 하지 않겠는가? 내가 지혜와 사랑으로 연꽃을 피우는 정원사가 되는 것이 어떠한가? 아득한 과거 생부터 지금에 이르기 까지 나는 무얼 위해서 수행하고 도를 이루려고 하였던가? 일체중생의 완전한 행복을 위해 바르고 완전한 깨달음을 이룰 것을 서원하지 않았던가? 부처님께서는 마침내 세상을 향해 사자처럼 늠름하게 선언하신다.
내 이제 감로의 문을 여나니
귀 있는 자는 들어라!
낡은 믿음을 버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