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스님의 법문

<아티샤 존자의 명상요결-4>모든 현상을 꿈처럼 보라

작성자Wondam:원담|작성시간22.09.13|조회수188 목록 댓글 0

2.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인생은 일장춘몽이라, 한바탕 꿈이다. 이런 걸 말하는 게 아니다.

또 장자의 호접몽이 아니다. 장자의 꿈에 나비가 되었나, 나비의 꿈에 장자가 되었나? 이런 꿈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세상을 꿈결같이 팔랑거리며 가볍게 흘러가는 그런 유희로 보라는 게 아니다. 모든 현상을 꿈처럼 보라는 것은 삶을 무책임하게, 건성으로 엄벙덤벙 살아가라는 게 아니다. 

 이건 꿈-요가, Dream Yoga드림 요가, milam 밀람이라는 수행을 말한다. 나로 6법 Naropa`s six Dharma이란 게 있다. 뚬모(Tümmo생명열 통달), 외살(ösal정광명), 귤뤼(Gyulü환영의 몸), 밀람(Milam꿈 요가), 바르도(Bardo중음계 해탈), 뽀와(Phowa의식전이)이다. 이것은 인도 스승 띨로빠Tilopa가 나로빠Naropa에게, 나로빠가 티베트 제자 마르빠Marpa에게, 마르빠가 밀라레빠Milarepa에게 전해준 까귀Kagyu파의 전통적 수행법이다. 이것은 관정을 받아야 입문하는 밀교 행법이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하는 드림요가는 현교적(밀교가 아니라)이다. 꿈을 수행 도구로 삼는다는 것은 삶의 연기성 즉 공성을 깨닫는다는 뜻이다. 무수한 조건으로 말미암아 나타나는 모든 현상은 항상 가변적이며 잠정적이며 반짝이면서 찬란하게 명멸한다. 이것이 緣起연기다, 그래서 일면 몽환적이다.

 

 실제의 본성은 꿈과 같다는 말이다. dreamlike-ness. 꿈-같은 성질 즉 如夢性여몽성이다. 

현상의 본질에 대한 고전적인 비유로 여섯 가지가 있다.

금강경에서 6觀관-'여섯 가지로 보라'는 말을 말한다.

一切有爲法, 如夢幻泡影 ;如露亦如電, 應作如是觀.

일체유위법, 여몽환포영; 여로역여전, 응작여시관.

인연 따라 일어나는 모든 현상은 꿈, 환상, 물거품, 그림자 같고, 이슬 같으며 번갯불과 같으니, 마땅히 이같이 보라.

 

 에드워드 콘쯔(Edward Conze)의 영역본에서는

Thus shall ye think of all this fleeting world:

a star at dawn, a bubble in a stream;

a flash of lightning in a summer cloud,

a flickering lamp, a phantom, and a dream.

새벽 별처럼, 개울에 일어나는 물거품처럼,

여름날 구름 사이로 번쩍이는 번갯불처럼

가물거리는 등불의 불꽃처럼, 환영처럼, 그리고 꿈처럼

덧없는 세상을 모두 이같이 보라.

 

 모든 현상은 연기소생이기에 무자성이다. 그것을 공성空性, suyata수냐타 라고 한다. 공성, 텅 비었음은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Empty-ness is not Nothing-ness. 비었음은 허무, 절대 허무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무엇이 비었나?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어서, 비었다는 것이다. 실체가 없기에 無可得무가득(얻을 게 없다, 집착할 게 없다)이다. 실체론의 부정이다. 현상의 내부나, 배후에 고정 불변하는 실체가 없으니, 비었다는 말이다. 그 현상의 생생한 직접경험은 언어로 표현 불가능하다. 그것을 뭐라고 표현하든 그 즉시 그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흐르는 강물을 움켜잡아서 보여주려고 하는 즉시 그건 흐르는 강물이 아니고 움켜쥔 손바닥-안의 물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실상은 언표불가능성이며, 개념화 불가능하다. 그리고 현상의 배후에나, 기저에나, 선험적이거나, 후험적이거나, 고정불변하는 실체는 없다. 다만 뭇 조건이 모여서 발생했다가 조건이 변하면 사라진다. 모든 것은 변해간다. 조건에 따라 발생하여 조건에 따라 소멸한다. 의존적 발생이며 의존적 소멸의 연속이다. 이것을 홀로그램hologram에 비유할 수도 있다. 중중무진으로 연기하는 우주는 홀로그래픽holographic 우주이다.

 

 인간의 일상 체험도 모두 꿈과 같은 게 아니라 꿈 그 자체이다. 이 사실을 보여주는 이론들을 소개한다.

①알라야 연기: 초기불교는 인간의 마음을 분석적으로 접근한다. 그래서 심찰나를 이야기한다. 마음이 생멸하는 최소 시간 단위를 찰나ksana 즉 1/76sec, 76분의 1초를 말한다. 이는 인도 인들의 전통적인 개념에서 빌려온 것이다. 초기불교 및 대승은 지금 여기에서 생생히 전개되는 이 마음을 흐름으로 설명한다. 심상속(心相續, citta-dhāra, citta-srota, 금강경: 心流注)이니, 바왕가의 흐름(bhavaṅga-sota) 등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마음이 찰나 생멸하면서 어떻게 업이 전달되는가? 심상속으로써 업을 설명하려니까 뭔가 완벽하지 않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답으로 알라야식이란 개념이 제시되었다. 유식학파의 대두이다. 유식론은 모든 정신현상을 전5식, 제6식, 제7식, 제8식의 전개로 본다. 다시 말하면 알라야식 연기란 연기설을 더 깊은 차원에서 이야기하는 확장판 12 연기설이다.

 알라야식(ālaya vijñāna)을 含藏識함장식(storehouse consciousness) 혹은 일체종자식(seed con~, sarva-bīja-vijñāna)이라 한다. 개별 중생의 알라야식은 무시이래부터 상속하여 각자 자신의 우주 만상을 변현한다. 즉 하나의 소우주를 만든다. 그리고 모든 중생의 각자의 우주는 서로 교섭하는데 이 과정에서 자신만의 독특한 변현을 이루기도 하고 서로 교섭하여 공통된 변현을 이루기도 한다. 잠재적인 알라야식(종자)에서 7식(말라식, 자아의식)이 생기며, 이것이 주객으로 분열되어 인식이 성립되는 경과를 전변(轉變)이라 하는데, 외부대상으로 전변한 걸 相分상분(경험되는 대상으로 분리되어 드러난다)이라 하고 경험을 인식하는 주체를 見分견분(경험의 주체로 나타난다)이라 한다. 이렇게 상분과 견분이 만나 경험이 이루어지면(現行현행이라 한다)다시 그 결과가 종자에 영향을 준다(이것을 薰習훈습이라 한다). 이런 식으로 종자가 경험을 일으키고, 그 경험의 결과가 다시 종자에 영향을 주면서 현실의 현상세계가 성립되는 과정을 알라야식연기(阿賴耶識緣起)라 한다. 그런데 이 알라야식이란 게 청정한 게 아니라 탐진치로 오염된 것이라서 오염된 연기(染緣起염연기)를 일으키기 때문에, 이것이 정화되지 않는 한 고통을 지속적으로 일으킬 소지가 있다.

 그러므로 중생이 평생토록 경험하는 세상살이란 사실상 알라야식의 놀음에 놀아나는 허깨비 놀음에 불과하다. 업력대로, 입력된 대로 로봇처럼 움직이면서 사는 게 인생이란 얼마나 허무한가? 이것이 자기가 꾸는 꿈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여기에서 탈출구는 없는가? 업종자에는 좋은 종자, 나쁜 종자가 있다. 니체가 <선악의 피안>에서 말한 바대로 선악 이분법을 넘어서 좋음(kusala, gut)과 나쁨(akusala, böse)의 두 가지 종자가 있다. 나쁜 종자에 물을 주지 않고 좋은 종자에 물을 주라. 그러면 경험이 바뀐다. 이에 따라 주변과 세계가 바뀐다. 나쁜 종자가 완전히 소멸하면 열반이다. 그것을 轉識得智전식득지라 한다. 5, 6, 7, 8식이 변하여 여래의 다섯 가지 지혜(五智如來오지여래)를 이룬다는 말이다.

 

②정신분석: 19세기 말부터 빈Wien(영어로 Vienna 비엔나)은 신흥 부르주아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구질서가 충돌하고,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반유대주의와 시오니즘이 들끓던, 유럽 사회의 계급적, 민족적, 인종적 모순의 집결지이자 모더니즘 탄생기의 꿈의 도시이며, 천재들의 놀이터였다. 1913년경엔 히틀러, 트로츠키, 티토, 지그문트 프로이트, 스탈린, 프란츠 요제프 1세, 프란츠 페르디난트 등 세계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을 인물들이 살 정도로 도시의 명성과 영향력이 있었다. 또한 표현주의파 코코슈카와 구스타프 말러도 동시대를 살았다.

 20세기 초반 아르누보와 분리파 미술의 중심지였던 덕분에 구스타프 클림트를 비롯해 에곤 실레, 아돌프 로스 등이 살았으며, 러시아에서 10월 혁명의 혼란을 피해서 온 전위파 화가 칸딘스키, 말레비치도 함께 있었다.

프레게, 힐베르트, 에른스트 마흐, 버트란트 럿셀, 비트겐슈타인, 아인슈타인의 영향을 받은 논리실증주의자들이 1920년대 비엔나 그룹Vienna Circle을 결성하여 정기적으로 모여 과학언어와 과학방법론을 탐구한 철학자·과학자·수학자 그룹이 있었는데 그들은 카르납, 쿠르트 괴델, 칼 포퍼 등이다.

 이런 지적으로 열린 문화적 환경에서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이 각광 받을 만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과 식민지에서 수탈한 막대한 재화 덕분에 호황을 구가하던 유럽 부르조아지들은 물질적 풍요 이면에 전에 없던 정신적 문제가 생겼다. 부르조아 부인들 사이에서 점점 퍼지는 히스테리 증상이 그런 문제 가운데 하나였다.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증상을 가진 부인네들을 상담하면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치유를 모색하던 차에 그들이 꾼 꿈을 소재로 자유롭게 이야기하게 했더니 증상이 호전되는 결과를 얻었다. 이런 상담사례를 분석하여 결과를 발표했다. 〈히스테리에 대한 연구 Studien über Hysterie〉(1895)가 그것이다. 이 방법을 통해 프로이트는 환자에게 마음에 연상적으로 떠오르는 생각을 무작위적으로 표현하도록 함으로써, 그가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정신의 영역으로부터 나오는 내용들을 밝히려 했다.

 1920년대에 출간한 《쾌락의 원리를 넘어서》와 《자아와 이드》에서 그는 정신을 이드(id, 혹은 리비도 libido), 자아(ego), 초자아(superego)의 세 가지로 분류했다. 리비도는 충동적이고 아이 같은 부분으로 결과를 무시하고 원하는 걸 얻고자 하는 욕망, 쾌락의 욕동이다. 초자아는 정신의 도덕적 규범을 통제하는 부분으로 상황의 시비를 판단한다. 자아는 쾌락만을 지향하는 리비도와 도덕만을 지향하는 수퍼에고 사이에서 균형을 잡아주는 부분이다. 인간의 행동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나타나는 정신 부분이 바로 에고(자아)이다. 만약에 에고가 둘 사이의 통제력을 잃고 과도하게 억눌리면 이것은 부인, 억압, 전이 등 방어기제로 나타난다.

 

 프로이트의 논문 〈방어의 신경정신학〉에 소개된 방어기제라는 개념은 마음속에 서로 반대되면서 충돌하는 2가지의 심리가 있다는 것이다. 주된 방어기제에는 억압·반동형성·투사·퇴행·승화·부정·합리화 등이 있다. 억압은 원하지 않는 생각·감정 등을 의식으로부터 끌어내어 무의식 속으로 억눌러버리는 것이다. 투사는 자신의 바람직하지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그 감정이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며, 승화는 본능적인 욕구를 비본능적인 통로를 통해 변형시켜 분출하는 것이다. 부정은 고통스러운 사실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을 의식적으로 거부하는 것이다.

 

 그러면 투사와 내사를 살펴보자.

*투사(projection):자신의 바람직스럽지 않은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옮겨서, 그 감정이 외부로부터 오는 위협으로 보이게 하는 과정이다. 흔히 볼 수 있는 투사행위로는, 어떤 사람이 자기에게 분노, 짜증, 미움이 올라올 때 자기는 아무 문제가 없는데, 오히려 상대가 나에게 적대적인 감정을 갖고 있다고 비난하는 경우다. 내가 화내는 건 이유가 있어 괜찮은데(자기 합리화), 이것은 모두 네가 나를 화나게 만든 원인을 제공했기 때문이야(내 안의 미움을 상대에게 덮어씌우는 투사).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능숙하게 이 교묘한 투사라는 방어기제(자기 행동을 정당화, 합리화하면서 자기를 보호하려는 술책이기에 방어기제 defense mechanism이라 한다)를 사용한다. ‘돈만 밝히는 속물은 딱 질색이야’라는 말은 자기 자신이 속물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는 신호일 수 있다. 또 타인에게 비판적인 사람이 ‘그 여자는 너무 비판적인 성향이 있더라’하는 말을 하기도 한다. 자신의 비판적인 면이 싫어서 거기에 집착하다 보니 다른 사람에게서 그런 면을 더욱 잘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자기 외모에 대해 끊임없이 신경 쓰고 걱정하면서도 그래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을 할 수 있다. ‘저 사람들은 허영이 너무 심해. 자기가 어떻게 보일지에만 신경 쓴다니까.’

*내사(injection): 내사는 자신의 불편한 마음에 대해 상대방에게 탓을 돌리는 투사 projection와 반대로 자신에게 탓을 돌리는 무의식적 심리이다. 외부의 대상이 자신 내면의 자아로 투영되어 그대로 받아들이게 된다. 어린 시절 가까운 가족, 특히 부모로부터 나의 마음에 내사되어 각인된 가치관이나 생각 그리고 감정들은 위험할 수도 있다. 자신이 겪는 마음의 고통에 대해 나도 모르게 내가 무언가 잘못해서 그런 것이라고 여겨버리기 때문이다. 내사는 타인의 기준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모범생인 아이들이 자신의 의지나 적성과 상관없이 부모들의 요구에 길들여져 판, 검사나 의사가 되고 싶다 하는 것이나 친구의 말버릇이나 행동을 그대로 따라서 내면화시키는 것이다. “여자는 순종해야 한다.”, “공부 잘해야 출세한다.”, “윗사람에게 잘 보여야지.”, “튀지마라.” 등 자율적인 행동을 억누르는 초자아의 명령이다. 이렇게 산다면 내가 좋아하는 것을 추구하면 안 될 것 같은 죄책감을 느끼면서, 진정으로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는 채 창의적인 삶을 사는 것을 두려워한다. 권위 있는 사람이 결정 내려주기를 바라며 다른 사람이 나의 행동을 어떻게 평가할까, 눈치를 보면서 행동한다.

 

 투사와 내사는 공격성이 가진 두 얼굴이다. 내사는 타인을 미워하지 못해 자신을 미워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자신을 미워하는 마음은 언젠가는 타인에게 다시 전가된다. 이를 해결하려면 자신을 미워하는 ‘감춰진 미움’을 먼저 꺼내어 보아야 한다. 이렇듯 우리는 투사(상대 탓)하고 내사(내 탓)하는 버릇 때문에 외부대상을 있는 그대로 느끼고 대하지 못한다. 매일 집안에서나, 직장에서나, 거리에서, 사람을 만날 때마다 실재-만남을 경험하는 게 아니라 투사와 내사라는 안경을 쓰고 보니까 거의 꿈꾸듯이 사는 셈이다. 자기의 드라마를 자기가 쓰면서 혼자 울고 웃고 성내고 집착하고 있다. 이것이 삶이 꿈같다고 하는 또 하나의 이유이다.

 

 투사와 내사를 멈추라. 어둡고 괴로운 기억, 상처, 부정적인 성향, 부정적 에너지를 외부대상에 던지지 말라. 던진 것은 반드시 되돌아온다. 억누른 것은 반드시 튀어나온다.

부정적 감정을 바깥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이해하고 용서하라.

억눌린 분노를 바깥으로 던질 수밖에 없었던 자기 환경을 이해하고 용서하라.

나에게 부정적 씨앗을 심어준 부모와 가족, 그런 사람들을 이해하고 용서하라.

그들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던 그들의 무지, 이기심, 자기 한계를 이해하고 용서하라.

내 안에 쌓인 미움을 투사하여 나의 미움을 덮어쓴 그 사람을 이해하고 용서하라.

내 안에 갈증난 애정결핍을 투사하여 나의 요구를 채워주지 못했다고 원망받고 그 무능함을 경멸당한 그 사람께 용서를 빌고 이해를 구하라.

나의 이루지 못한 욕망을 다른 사람에게 던지면서, 대리만족이나 보상을 받아내려고 하지 말라.

 

③뇌신경과학의 보고: 아닐 세쓰 Anil Seth의 저서 <내가 된다는 것, Being>에서 인용한다. 지각이란 제어된 환각이다. 뇌는 예측 기계이다. 먼저 예측하고 예측 오류를 최소화한다. 이것이 뇌가 하는 인지 과정이다. 지각과 환각의 경계는 밤과 낮의 경계만큼이나 모호하다.

 두개골에 봉인된 채 바깥세상에 무엇이 있는지 알아내려고 애쓰는 뇌brain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생각해보자. 거기엔 빛도, 소리도, 아무것도 없다. 완벽한 어둠과 침묵뿐이다. 지각을 형성하려 애쓰면 뇌는 바깥세상의 사물과 간접적으로만 이어진 끊임없는 전기적 신호의 세례와 만나야 한다. 이런 감각 입력에는 (나는 커피에서 온 것임, 나는 나무에서 온 것임이라는) 꼬리표가 붙어있지 않다. 시각, 청각, 촉각, 같은 감각 양식들 가운데 그 무엇도 특정 감각 입력이 무엇에서 왔는지 알려주지 않는다. 뇌는 본질적으로 모호한 이런 감각 신호를 어떻게 이에 해당하는 사물, 사람, 장소로 가득한 지각적 세상으로 변환할까? 뇌는 예측 기계 prediction machine이며,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것은 감각입력이라는 원인에 반응해 뇌가 만든 ‘최선의 추측 best guess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세상을 ‘그 자체’로 경험하지 못한다. 우리는 감각 신호를 그 자체로 경험하는 게 아니라 그 해석만을 경험한다. 의식의 내용이란 실제 세상보다 더 많거나 적은, 깨어있는 꿈, 즉 제어된 환각 controlled hallucination이라는 사실이다. 지각적 경험의 총체는 지각적 최선의 추측, 즉 제어된 환각을 계속 만들어내며 세상과 얽혀있는 신경적 환상 neuronic illusion이다. 이렇게 본다면 우리는 일상적으로 환각 상태에 있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소위 말하는 ‘현실’이란 뇌에서 세상으로 뻗어나가는 생생하고도 현재적인 투사이다. 이른바 ‘세상’이나 ‘현실’ 및 ‘자아’란 두뇌가 일으킨 환각이라는 사실이 뇌신경과학이 주는 메시지다.

 

 결론적으로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꿈은 어떻게 나타나는가? 꿈을 탐험하는 가장 유용한 방법은 꿈을 꾸는 동안 꿈을 자각하는 것이다. 꿈속에 객관적인 환경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이는 동안, 꿈속의 대상과 환경은 꿈꾸는 자의 마음에 나타난다. 마치 마음이 영사기를 돌려 스크린 위에 영화를 상영하는 것과 같다. 그런데 영사기도 내 마음이고 스크린도 내 마음이고 영화를 영화로 즐겨보는 것도 내 마음이다. 영화의 모든 것이 내 마음이 만들어 낸 창조물이다. 이것은 마음의 놀라운 창조력이다.

꿈꾸는 상태와 깨어있는 상태에서 무엇인가 절대적으로 실재한다고 추측하는 것은 우리의 환상이다. 꿈속에서 꿈꾸는 자가 만지고 느끼면서 실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무리 실재같이 보였다 하더라도 꿈을 깨고 나면 ‘아, 꿈이었구나!’ 하듯이, 꿈에서 경험하는 모든 것은 실재가 아니다.

 

④자각몽 Lucid dreamimg.

꿈을 꾸는 상태를 실재라고 착각하는 환상의 예외는 꿈속에서 꿈을 꾸고 있음을 아는 것이다.

꿈에서 꿈인 것을 알아차려서 꿈을 변형하는 수행을 드림요가 dream yoga, 꿈-수행이라 한다. 이것은 카규Kagyu파의 나로 6법 가운데 포함되며, 또한 닝마Nyngma파의 족첸 Dzogchen수행에도 포함된다. 서양에서도 이와 비슷한 수행법이 있는데, 그걸 자각몽, 혹은 명석몽, lucid dreaming루시드 드리밍 이라 한다.

 

*낮에 ‘꿈 요가 dream yoga’를 수행하는 법:

모든 현상을 꿈처럼 생각하라. 현상이 꿈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자각하라.

Are you awake? 당신은 깨어있는가? Where are you? 당신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자기에게 자주 던져라.

위에서 보았듯이 지각이란 항상 대상을 향해 선입관, 편견, 기대와 희망을 던져 미리 짐작, 추측, 예측한다. 그 결과로 대상을 지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대상’이란 불가능하다. 모든 대상은 내가 보는, 내게 보이는 대상인 것이다. 나의 관점이 들어가 내 눈에 맞게 해석되고 이해된 대상이다. 그러므로 내가 보는 세상은 내 구미에 맞게 조작된, 내가 보고 싶은 대로 보이는 세상이다. 그러니 보는 자를 보라! 대상을 보는 자를 보라. 이것이 꿈에서 깨어나는 각성 훈련이다. 낮 동안 깨어있는 상태도 꿈과 같은 성질을 가지고 있음을 유념하라. 깨어있는 그 상태도 꿈이라는 걸 알라. 꿈을 깨는 것도 하나의 꿈이다. 꿈을 깨어 꿈 밖으로 나간다는 생각도 역시 꿈이다.

 

*밤에 하는 꿈 요가:

자각몽의 달인은 완전히 명료한 꿈을 꾸며, 꿈을 꾸면서 꿈속에 나타난 대상과 개인이 단지 마음이 나타낸 것을 안다. 꿈속의 환경과 꿈속에 나타난 당신 자신도 자기의 마음이 나타난 것이다. 평소에 깨어있는 상태가 꿈과 유사하다는 것을 기억하라.

잠을 잘 때 사자좌의 자세로 누워라. 부처님이 열반에 들었던 그 자세다. 오른쪽 어깨가 땅에 닿으면서 모로 눕는 것이다. 그리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 기도하라.

 

나는 꿈을 기억할 것이다.

내가 꿈을 꿀 때 ‘내가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것이다’라고 기도하라.

 

먼저 잠이 얕고 자주 깨기 쉬운 새벽 아침의 꿈에 주의를 기울이라.

잠을 자다가 중간에 한두 번 깰 경우, 한편의 꿈의 줄거리를 기억하면서 잠에서 일어나는 즉시, 빨리 꿈의 내용을 기억하고 다시 잠의 상태로 들어가라. 그러면 자각몽을 꿀 가능성이 높다. 꿈을 기억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기다려라. 꿈을 꿈으로 인식하려는 의지가 중요하다.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꿈을 기억하면서 꿈-일기(Dream Journal)에 꿈을 기록하라. 먼저 대강의 이미지를 그림으로 그리거나, 몇 개의 단어를 써서 요점을 파악하고, 그다음에 줄거리를 쓰라. 꿈-일기를 계속 써서 나중에 읽어보면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좋은 자료가 된다. 거기엔 자기만이 해석 가능한 비밀스런 이야기가 담겨있다. 여러 예술가나 문인들, 명상가들도 이렇게 꿈-일기를 쓴다.

 

⑤꿈을 바꾸라. 악몽을 꾸지 말고 아름다운 꿈, 멋진 꿈으로 바꾸라. 꿈을 깨고 꿈 밖으로 나갈 수는 없다. 꿈이 아닌 또 다른 삶이란 없다. 그런 생각 자체가 꿈이다. 왜? 만상이 곧 연기되었기에, 연기되었다는 것은 무실체(실체-없음), 무소득(집착할 게 없다, 얻을 게 없다), 환영-같음이다. 실재가 꿈-같음이다. 그러기에 이제까지는 꿈에 빠져, 꿈에 휘둘려 살았다면 이제부터는 의도를 가지고 새로운 꿈을 꾸라. 광대하고 심오하고 아름답고 멋진 꿈을 꾸라. 대승불교는 보살의 길을 가는 꿈을 꾸라고 한다. 상사도는 보리심의 길을 가는 꿈을 꾸라 한다. 우주의 주인으로 살아가는 꿈을 꾸라. 이런 삶이 업의 창조자이며 업의 계승자이지 않은가? 佛業불업 佛夢불몽. 부처의 일을 하는 부처의 꿈을 꾸라.

 마지막으로 아티샤 존자는 결혼한 재가자를 위하여 조언하신다.

“당신의 남편과 아내도 곧 죽을 것이고, 당신도 곧 죽을 것이다. 그러니 서로 잘 대접하라.”

 

우리가 감쪽같이 덮어둔 것. 그건 죽음이라네. 모두가 죽네. 나도 자네도.

우리 모두 곧 여기서 사라질 존재들이니, 서로를 귀빈처럼 환대하자.

서로를 귀한 손님처럼, 소중한 선물처럼 환대하는 세상을 만들어가자.

 

 자, 마지막으로 통렌수행을 해보자.

내가 이제까지 미움을 투사했던 그 사람의 고통을 들이쉬고, 그 사람이 행복해졌음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원망을 투사했던 그 사람의 고통을 들이쉬고, 그 사람이 편한해졌음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서러움을 들이쉬고, 이제 편안해졌음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쌓아온 한을 들이쉬고, 이제 한이 풀렸음을 내쉰다.

내가 이제까지 억눌렀던 욕구를 인정하면서 들이쉬고, 내 욕구를 다정하게 대하겠다고 생각하면서 내쉰다.

내 안에 있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애 같은 나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이해하고 용서한다.

당신 안에 있는 아직 미성숙한 어린애 같은 성향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이해하고 용서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세상에 투사한 분노를 들이쉬고, 내쉬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세상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비난하거나 저주했던 것을 들이쉬고, 내쉬면서 세상을 이해하고 용서한다.

내가 살아오면서 피해자를 자처한 걸 들이쉬고, 내쉬면서 가해자를 이해하고 용서한다.

들이쉬면서 ‘모든 것을 용서하리라’, 내쉬면서 ‘모든 것이 행복하기를’

들이쉬면서 ‘가해자도 없고 피해자도 없다’, 내쉬면서 ‘우리 서로 사랑하리라.’

 

끝으로 랑리탕파의 ‘마음 바꾸는 여덟 가지 게송’을 합송합시다.

 

마음 바꾸는 여덟 가지 게송

 

제가 일체중생 모두를

여의주보다 더욱

큰 뜻을 이루는 생각으로

항상 사랑하게 하소서.

 

어디서 누구와 만날 때

나 자신 누구보다 낮게 보고

마음 깊이 남을

사랑하게 하소서.

 

모든 행에 자신 마음을 살피고

번뇌 생기자마자

자타自他에 해가 되기에

곧바로 제거하게 하소서.

 

나쁜 성질의 중생들

죄, 고통으로 시달리는 걸 볼 때

얻기 어려운 보물을 얻었다는

마음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나에게 남이 질투로

비방 등의 맞지 않는

손해는 내가 받고

이익은 남에게 올리게 하소서.

 

누구에게 내가 이익 준

기대 컸던 그가

아주 맞지 않는 해를 끼쳐도

바른 선지식으로 보게 하소서.

 

요약하면 직접과 간접으로

이利, 락樂은 모든 어머니에게 올리고

어머니의 해침과 모든 고통

은밀히 내가 받게 하소서.

 

이들 모두 또한 팔풍의

번뇌가 물들지 않고

모든 법을 신기루로 아는 마음으로

집착 없이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소서.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