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체유심조에 대해서>
1. 원래는 「一切法 唯心所造」
이 구절은 華嚴經에 나오는 若人欲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 약인욕료지, 삼체이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
라는 게송과 연관됩니다.
여기서 「일체(一切)」는 "우주 만물"이라기보다 일체법(一切法), 즉 경험되고 인식되는 모든 현상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조(造)」는 창조(creatio ex nihilo)가 아니라 구성, 형성, 분별, 의미 부여를 뜻합니다.
따라서 一切法 唯心所造란
"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법은 마음의 작용에 의해 그렇게 나타난다."는 뜻에 가깝습니다.
2. 유식학에서의 「造」
Yogācāra에서 세계는 식(識)의 변현(變現)입니다.
여기서 식은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지각, 기억 ,언어, 개념, 욕망, 업습(業習) 등을 포함하는 역동적 과정입니다.
따라서 「造」란
지각의 구성
범주의 형성
의미의 투사
주객의 분별
업에 의한 경험 세계의 조직을 의미합니다.
예를 들어,
같은 비를 보더라도
농부는 풍년의 징조로,
여행자는 불편으로,
시인은 아름다움으로받아들입니다.
비 자체를 창조한 것이 아니라, 비의 세계를 그렇게 경험하는 방식이 마음에 의해 '조성'되는 것입니다.
3. 화엄의 법계연기와 일체유심조
화엄에서는 모든 존재가 상호의존적으로 일어나므로 독립적 실체가 없습니다.
따라서 마음 역시 홀로 존재하는 절대자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도 법계의 일부이고, 법계도 마음과 더불어 나타난다.는 것이 화엄의 입장입니다.
그래서 화엄의 「심(心)」은 개인의 두뇌 속 의식이 아니라
법계를 드러내는 자리에 가깝습니다.
이 점에서 일체유심조 ≠ 주관적 관념론입니다.
4. 「造」를 현대 인지과학적으로 본다면
현대의 구성주의나 엔액티브(enactive) 인지과학에서도 세계는 단순히 외부에 객관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생명체와 환경의 상호작용 속에서 의미 있는 세계가 공동으로 생성된다고 봅니다.
Francisco Varela 프랜시스코 바렐라는 이를 "세계의 enactment"라고 불렀습니다.
즉,
눈에 들어온 자극을 수동적으로 복사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기억과 언어와 문화가 함께 작용하여
하나의 세계가 성립합니다.이런 의미에서 「造」는construction(구성) 혹은 enactment(현행적 생성)에 더 가깝습니다.
5. 「조(造)」는 의미의 세계를 짓는 활동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단순한 물리적 우주가 아니라,
사랑의 세계
증오의 세계
경쟁의 세계
수행의 세계
해탈의 세계입니다.
같은 공간에서도
탐욕이 강한 사람은 지옥을 살고,
자비로운 사람은 정토를 삽니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육도윤회란 어떤 의미에서는
마음이 만들어내는 존재양식(mode of being)의 차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6. 하이데거와 연결한다면
Martin Heidegger의 세계 개념도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합니다.
하이데거에게 세계(Welt)는 객관적 사물의 총합이 아니라,
인간이 의미망 속에서 거주하는 열림(Offenheit) 입니다.
망치는 단순한 물체가 아니라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나타나며,
숲은 벌목꾼에게는 노동의 장소,
시인에게는 신성한 공간,
등산가에게는 풍경으로 드러납니다.
즉 존재자는 항상 하나의 의미지평 안에서 나타납니다.
이러한 세계의 열림은 일종의 Spielraum(유희 공간) 이며,
유식학의 식변(識變)이나 화엄의 일체유심조와 깊은 상응성을 보입니다.
결국 「일체유심조」의 「조(造)」는 창조주가 무(無)에서 만물을 만들어내는 생산(creation)이 아니라,
인연 따라 세계를 의미 있게 드러내고 구성하는 작용(enactment, construction)이다.
라고 이해하는 것이 보다 정확합니다.
그래서 「일체유심조」는 "세계는 마음이 만들어낸 환상이다."라는 말이 아니라,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는 마음의 분별·기억·업·언어·행위에 의해 끊임없이 구성되고 있으며,
그 마음이 바뀌면 세계의 모습도 함께 달라진다."
라는 매우 깊은 존재론적·현상학적 통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이해하면, 「일체유심조」는 오히려 현대의 엔액티브 인지과학, Martin Heidegger의 세계 개념, 그리고 Henri Bergson앙리 베르그송의 이미지(image) 철학과도 상당한 철학적 친연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