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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고보서 강설

긍휼을 행함 (야고보서 2장 12-13절)

작성자강효주|작성시간26.06.11|조회수24 목록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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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2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13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

 

 

말씀 강설 스크립트

 

계속해서 수요일마다 야고보서 2장 말씀을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12절과 13절 말씀에 초점을 맞추어서 말씀의 의미를 생각하고 우리 자신에게 적용해 보고자 합니다. 우리 주 예수님께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셔서 그렇게 살려고 하는데 일상 생활을 하다 보니 사람을 또 외모로 판단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대로 살지 못하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 때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이 야고보서 2장 12절 말씀입니다.

 

자유의 율법

 

너희는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이 말씀이 무슨 의미일까요? 먼저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이라는 구절에서 “자유의 율법”은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자유의 율법”이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삶의 규범으로 주어진 율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밝혀 주시는 율법의 의미를 말합니다. 예를 들면, 우리는 “간음하지 말라”는 계명을 대할 때 아내가 아닌 어떤 이성과 잠자리를 하지 않으면 그 계명을 지킨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주 예수님은 다른 이성을 향해 음욕을 품기만 해도 이미 간음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 5:27). 우리가 주일마다 십계명을 살펴보며 확인하였듯이, 유튜브 영상이나 영화나 드라마나 광고를 통해 접하게 되는 어떤 이성을 향해 음욕을 품기만 해도 간음한 것입니다. 간음 죄를 포함해서 우리의 모든 죄는 정죄를 받아야 합니다. 그 정죄는 아주 심각해서 우리가 죽어도 우리의 죄를 다 씻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심판을 받아야 하는 그 심판의 율법을 자유의 율법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야고보는 왜 “자유”라는 말을 사용했을까요?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은 죄로 인해 우리는 모두 정죄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그분을 믿고 따르는 이들을 위해서 정죄를 받아 주셨기 때문에 우리가 정말 그분을 믿고 따르면 우리는 최후의 심판 때 정죄를 받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기때문입니다 (롬 8:1).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사람들, 즉 “자유롭게 하는 율법”을 알고 받아들인 사람들은 자기 마음대로 살 수 없습니다. 이전처럼 욕하고, 이전처럼 음란을 좋아하며 살 수 없습니다. 이전처럼 미워하고 시기하며 교만하고 분노하면서 회개함 없이 살 수 없습니다. 방종하는 삶을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삶의 규범으로서의 율법을 다 지키지 못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의 우리의 삶을 생각해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나름대로 도덕적인 모습, 괜찮은 모습으로 살았다고 해도 그것이 하나님이 요구하는 수준에 이른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제대로 살았다고 느낀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는 심판 받고 정죄를 받아야 마땅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을 의지하며 하나님의 백성답게 살려고 한다면 주님은 부족함이 많아도 최후의 심판 때 “너는 정죄 받아야 한다”고 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의미가 담겨 있는 말씀이 바로 12절입니다. 자유의 율법대로 심판 받을 자처럼 말도 하고 행하기도 하라.” 율법대로 심판 받을 사람으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하니까 어떻게 살아야 하겠습니까? 율법이 요구한대로 말도 하고 행동도 해야 합니다. 예수 믿고 구원 받았으니 괜찮아라고 이전에 하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행동이 달라져야 합니다.

 

긍휼의 행함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에 있어서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난 이렇게 잘 하고 있는데 다른 사람들은 못하고 있네”라는 판단하는 마음이 생깁니다. 그래서 13절 말씀에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남들을 판단할 때 어떻게 판단하라는 말씀입니까? 긍휼히 여기는 마음, 즉 불쌍히 여기는 마음으로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죄를 모른 척 하라는 말씀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구원 받은 자녀에게 요구하시는 것은 죄와 싸우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말하고 행동하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으로 인해 구속함을 받았으니까, 정죄로부터 자유를 주셨으니까, 그 자유를 사용해서 하나님의 뜻을 따라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사람이 옆에 있는 사람을 보았을 때 그가 그렇게 살지 않음을 보면서 어떤 마음을 가져야 할까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안 믿는 사람은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대로 살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저 괜찮은 것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믿지 않는 그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가 구원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그 길을 가야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행위를 하는 사람들을 보면서 우리는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 믿으라고, 교회당 오라고 해도 오지 않고 삶 속에서 욕하고 방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도덕적으로 살아가는 것처럼 보여도 자기의 야망과 이기적인 욕심을 위해서만 살아가는 사람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물론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잘못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볼 때 열심히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는데 저렇게 엉터리로 할까?”하는 마음이 들 수 있습니다. 안 믿는다고 하면 안 믿어서 저렇구나 생각할텐데 믿는다고 하면서 하나님께 불순종하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을 보면 더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에도 긍휼이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는 말은 잘못한 것을 보며 “괜찮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원하는 수준은 주님이 원하시는 대로 열심히 말씀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기도하고 권면도 하지만 그렇게 살지 못할 때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는 이것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법을 사용했습니다. 13절에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과장법이 아니라면 우리는 큰 일이 난 겁니다. 여러분은 다른 사람에게 긍휼을 행하면서 살고 있습니까? 누구에게나 바리새인과 같은 죄성이 있어서 주의 뜻을 행하면 행할수록 남을 판단하고 내가 남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오늘 수요 기도회에 참석하지 않은 사람들을 보며 그래도 나는 수요기도회에 왔으니 그들보다 낫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 우리의 죄악된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지 않으면 최후의 심판의 날에 긍휼 없는 심판을 받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과장법이 아니라면 우리에게 소망이 없습니다. 우리 모두가 긍휼 없는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야고보가 이렇게까지 이야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서 우리가 얼마나 주의하며 살아야 하는지를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예수님을 믿는다고 말은 하는데 삶이 전혀 주님을 믿는 사람 같지 않은 누군가를 향해 남들이 혀를 차며 외모로 판단할 때 우리는 그 사람이 영적으로 충분히 장성하지 않아서 그런 것이라고 여기면서 받아 줄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그 사람이 그런 수준에 계속 있어도 된다는 말은 아닙니다. 그 사람이 장선한 수준을 향해서 갈 수 있도록 우리가 부단히 애를 써야 합니다. 그를 위해서 기도해야 하고 아주 적절한 때에 적절한 말로 그 수준으로 갈 수 있도록 이끌어야 합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이 왜 그 모양이야?”라고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긍휼히 여기고 기도하며 말씀으로 지혜롭게 이끌어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합신 신대원의 석좌교수인 이승구 교수님은 이런 것을 일종의 “간접 전달”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직접 전달을 하면 그 사람이 상처를 입을 수 있기 때문에 주님이 원하는 수준까지 갈 수 있도록 간접적으로 도와야 한다는 것입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는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께서 산상 수훈에서 하신 말씀을 떠오르게 합니다. 긍휼이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 5:7)”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기를 바라면서 정작 우리에게 잘못을 행하는 사람들에게 불평하고 화를 내곤 합니다. 다른 사람의 죄를 기꺼이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주 예수님만을 믿고 의지하는 용서 받은 사람의 특징이라는 것을 잊어 버리곤 합니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을 때조차도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시니 감사할 뿐입니다. 오늘 읽은 이사야서 42장 3절 말씀처럼 주님은 상한 갈대를 꺾지 아니하며 꺼져가는 등불을 끄지 아니하는분입니다. 우리가 남을 판단하고 업신여기고 긍휼히 여기지 않을 때 성령님께서 우리 마음을 불편하게 하셔서 진실로 회개하고 다시 주 예수님을 의지하면 주님께서 우리를 긍휼히 여겨 주실 것입니다. 우리가 주 예수의 이름으로 다른 사람들을 향해 긍휼히 여기는 마음을 가질 때, 우리가 주님으로부터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알렉 모티어가 말했듯이, 우리의 긍휼로 하나님의 긍휼을 있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긍휼이 하나님의 긍휼을 증거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도 예수님도 긍휼에서 나온 우리의 행동이 공로가 되어 우리를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게 만들 수 있다고 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하나님 앞에 합당한 존재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에게는 긍휼이 필요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긍휼을 베푼다고 우리가 하나님의 긍휼을 얻기에 합당한 존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긍휼을 베풀지 않으면 하나님이 주시는 긍휼을 구할 수도 없고 받을 수도 없습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해 간음하다가 붙잡힌 여성을 주님 앞에 데리고 왔습니다. 만약 주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이 죽어야 한다고 동의하신다면, 바리새인들은 유대인들이 사형 집행을 하는 것을 금지했던 로마의 관리들에게 주 예수님을 고소하려고 했을 것입니다. 만약 주 예수님이 간음한 여인이 모세의 율법에 따라 돌에 맞아 죽어야 한다는 것을 부인한다면, 바리새인들은 주님을 율법을 거절한 이단이라고 정죄할 참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주님이 어떻게 하셨습니까? 주님은 그 여인이 율법에 따라 정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셨습니다. “너희들이 그 여인이 죽어 마땅하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여인이 죽어 마땅하다는 것에 동의하시면서 주님은 동시에 그 여인을 처형하려는 사람들이 죄가 없다면 그 여인을 처형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해서 결국 그 누구도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못하고 집으로 갔습니다 (요 8:9).

 

죄가 없으신 분은 오직 한 분 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이 죄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간음한 여인을 처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진 분은 주 예수님밖에 없었지만 주님은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은 그 여인을 긍휼히 여기시며 용서하시고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잘못을 한 것을 부인하거나 죄를 가볍게 여기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긍휼히 여긴다는 것은 형벌을 받아야 마땅한 사람에게 인내와 용서를 베푸는 것입니다. 죄를 그저 눈 감아 주는 것을 선한 것이라고 여기는 이 시대 속에서 긍휼히 여기는 것과 죄를 눈 감아 주는 것의 차이를 분명히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잘못하는 부분들이 있을 때 우리는 단 한번도 “그래도 괜찮지”라고 반응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우리의 문제점을 발견하고 그것을 극복해 나가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자기 자신에게는 언제나 철저하게 그렇게 해야 합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을 구하며 우리의 마음에 하나님의 백성 답지 않은 모습을 끄집어 내어서 뿌리를 뽑는 일에 힘을 써야 합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는 “긍휼을 가진 판단”을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에게, 혹은 믿음이 있다고 말은 하는데 믿음 없는 것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내하고 용서하고 긍휼히 여겨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긍휼히 여기면 우리는 전부 다 방종의 길로 가서 자기 마음대로 살아가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기독교가 기독교가 아닌 것으로 전락해 버립니다. 그렇게 되면 이름 뿐인 신자의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미 있게 듣고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일에 힘써야 합니다. 그러면서 동시에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긍휼을 가진 판단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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