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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본문
1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1)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2)화평을 누리자
2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3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4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5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6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10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11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
12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13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
14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3)모형이라
15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6 또 이 선물은 범죄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은 것과 같지 아니하니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
17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18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20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21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 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 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
말씀 강설 스크립트
로마서 4장에서 바울 사도는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는 것이 얼마나 큰 은혜인지를 말했습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하다고 여기는 아브라함의 예를 들면서 아브라함도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다윗도 자신의 의로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죄사함을 받았음을 강조했습니다. 로마서 5장 1절과 2절에서 바울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은 어떠한 은혜를 함께 누릴 수 있는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3절과 4절에서 고난과 시험이 다가올 때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는지를 말합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의 자녀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들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 내용을 “하나님과의 화평”,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 속의 즐거움”,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라는 소제목으로 함께 생각해 보려고 합니다.
하나님과의 화평
먼저 바울은 하나님과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누리는 복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1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고 했습니다.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사도는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해서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신 일로 인해서 그분의 자녀들과 화목하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믿음으로 신자가 받을 형벌을 주 예수께서 대신 받으셨고, 믿음으로 주 예수님의 의로움이 신자의 것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신자는 형벌을 받지 않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는 거두어졌습니다. 그렇게 신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화평”이라는 것은 우리의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목하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이 받는 첫 번째 복입니다.
두 번째 복은 2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의 진노가 거두어진 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받아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왕자의 옷을 입혀 주시고 왕 앞에 서게 해 주셨습니다. 마크 트웨인의 소설 「왕자와 거지」에서 영국의 왕 헨리 8세의 아들 에드워드는 어느 날 자기와 아주 흡사한 외모를 가진 거지인 톰과 옷을 바꿔 입게 됩니다. 거지 톰이 왕자의 옷을 입고 왕 앞에 서게 되었고 그 때부터 모든 사람들은 톰을 영국의 왕자로 대우해 주었습니다. 거지였던 톰이 왕자의 옷을 입고 왕과 교제하며 왕자의 대우를 받게 된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그분의 의로움의 옷을 입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언제든지 왕이신 하나님께 말할 수 있고 그분과 동행할 수 있고 그분을 즐거워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2절 후반부에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하나님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주 예수님을 믿고 따르고 사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죽을 때 하나님께서 그 그리스도인을 거절하실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인을 받아 주시는 하나님은 이 세상에서뿐만 아니라 영원히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특권을 주셨습니다. 영원이라는 시간이 아직 일어난 사건은 아니지만 그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어떤 아버지가 초등학생인 아들에게 늘 갖고 싶어하던 자전거를 선물하려고 샀습니다. 트렁크에서 자전거를 꺼내서 창고에 집어넣는 것을 아들이 몰래 보았습니다. 생일을 하루 앞두고 아버지가 아들에게 묻습니다. “생일 선물로 뭐 갖고 싶니?” 아들은 대답합니다. “자전거를 갖고 싶어요.” 아들은 자전거를 생일 선물로 갖게 되리라는 확신이 있습니다. 이러한 확신은 결코 헛된 소망이 아닙니다. 꾸며낸 이야기도 아닙니다. 분명한 근거가 있는 진짜 소망입니다.
마찬가지로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고 할 때, 하나님의 영광을 “바란다”는 것은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불확실하거나 막연한 바램이 아닙니다. 분명히 누리게 될 확신을 가지고 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그리스도인이라면,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이러한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며 즐거워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시련 속의 즐거움
누군가가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할 수 있나요?” 좋은 질문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받은 사람,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된 사람, 믿음으로 서 있는 은혜에 들어가게 된 사람일지라도 아직 천국에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믿으면 저와 여러분의 모든 문제는 해결되고 우리의 삶은 점점 나아질까요?
미국 메사츄세츠에 있는 고든 컬리지의 스티븐 헌트 교수는 번영 신학이 가르치는 교리를 이와 같이 설명합니다. “그리스도의 속죄가 죄만 없앤 것이 아니라 질병과 가난도 없앴기 때문에 성경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의 패키지로서 건강과 부가 자동으로 따라옵니다.” 정말 예수님을 믿으면 건강과 부함이 자동으로 따라올까요? 바울은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성경 어디를 찾아봐도 그리스도인이 되면 편안한 삶을 살게 될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성경은 이 세상에서 사는 날 동안에 그리스도인들에게 환난이 반드시 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면, 주 예수님께서는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하셨습니다 (요 16:33). 환난이 있을 것을 전제로 하고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 사도는 제자들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고 미리 경고했습니다 (행 14:22). 게다가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딤후 3:12).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은 반드시 다가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주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에게 환난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게다가 그리스도인은 단순히 환난을 견디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도리어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은 환난을 대하는 그리스도인의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마 5:11)”
어떻게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환난이 가져다 주는 열매 때문입니다. 로마서 5장 3절 이하에서 사도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환난을 겪는 신자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환난을 극복할 수 있도록 도우십니다. 그 결과 우리는 인내를 배우게 됩니다. 그리고 인내는 우리를 연단하여 더욱 성숙한 신자가 되게 합니다. “연단”이라는 단어는 “캐릭터(character)” 즉, 우리의 성품을 뜻하기도 합니다. 환난을 인내함으로 우리의 성품을 거룩하게 다루어 가시는 것이 바로 환난의 열매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제가 중학교 3학년을 졸업하는 날 돌아가셨습니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 내내 아버지는 세차할 때면 저를 데리고 가서 함께 세차하는 것을 좋아 하셨습니다. 당시에 아버지의 차는 베이지색 “스텔라”였습니다. 세차하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잘 아시겠지만, 아버지의 세차 방식은 늘 정석을 따랐습니다. 먼저 물청소를 해서 먼지를 씻어냅니다. 그리고 세제로 거품을 내서 차에 묻은 때를 닦아 냅니다. 그리고 마른 걸레로 물기를 모두 없앱니다. 이제 세차가 끝났나 했지만 언제나 그때부터 본격적인 세차 작업이 시작이었습니다. 왁스로 차를 문질러서 차 전체가 온통 하얀 왁스로 가득 묻게 합니다. 그리고 나서 마른 걸레로 왁스를 닦아 냅니다. 왁스를 닦아 낼 때는 마른 걸레로 차 표면을 여러 번 문질러야 왁스가 사라졌습니다. 제가 대충 문지른 곳도 아버지가 와서 마른 걸레로 불이 날 것처럼 뽀득 뽀득 문지르면 어느새 차에서 광택이 납니다. 저의 얼굴과 아버지의 얼굴이 차에 비췰 정도로 광택이 나면 세차가 완성된 것입니다.
그 시절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 돌아보니 아버지와 세차하는 과정은 마치 하나님께서 그분의 자녀를 다루시는 과정과 흡사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아버지가 마른 걸레로 차를 빡빡 문질러서 차체에 윤이 나게 하는 것처럼, 때때로 하나님께서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사용하셔서 우리의 마음을 빡빡 문지르시기도 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 도대체 왜 이러세요? 너무 아픕니다. 그만 하세요.”라고 호소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 지나고 나면 반들반들한 차 표면에 아버지의 얼굴이 비치는 것처럼 우리에게서 하나님의 형상이 비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환난은 우리를 겸손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2장 10절에서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약한 것들과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기뻐하노니 이는 내가 약한 그 때에 강함이라”고 했습니다. 바울이 강했던 것은 그가 “능욕과 궁핍과 박해와 곤고”를 통해서 하나님 앞에 겸손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환난은 우리의 부족함을 깨닫게 합니다. 우리의 한계를 깨닫고 하나님만 바라보게 합니다. 우리는 환난을 통해 겸손하게 되고, 겸손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게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환난 중에도 믿음을 버리지 않습니다. 오히려 즐거워합니다. 환난이 가져올 열매를 믿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잘 아시는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찬송가의 작사자는 아델레이드 폴라드(Adelaide A. Pollard, 1862-1934)입니다. 1862년 미국의 아이오아(Iowa)에서 태어난 아델레이드는 발성법과 문학을 전공하고 시카고에서 어느 여학교의 선생님이 되었습니다. 성경을 열심히 연구했던 아델레이드는 여러 교회를 다니면서 성경공부를 인도하는 사역을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델레이드는 아프리카로 가서 선교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여러 교회를 다니며 선교사가 되고 싶은 자신의 계획에 대해서 말하고 선교 후원을 받고자 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아델레이드는 무척 낙심합니다. 그러던 어느날 아델레이드는 무거운 마음으로 교회 기도회에 참석했다가 예레미야 18장 3-6절 말씀이 읽혀지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가 토기장이의 집으로 내려가서 본즉 그가 녹로로 일을 하는데 진흙으로 만든 그릇이 토기장이의 손에서 터지매 그가 그것으로 자기 의견에 좋은 대로 다른 그릇을 만들더라. 그 때에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스라엘 족속아 이 토기장이가 하는 것 같이 내가 능히 너희에게 행하지 못하겠느냐 이스라엘 족속아 진흙이 토기장이의 손에 있음 같이 너희가 내 손에 있느니라.”
아델레이드는 이 말씀을 듣고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의 뜻대로 하세요, 주님. 주님의 뜻대로 하세요. 주님은 토기장이이시고 저는 진흙입니다. 주님을 기다리고 주님께 맡겨 드리니 저를 빚어서 주님의 뜻대로 만들어 주세요.” 기도회를 마치고 아델레이드는 집으로 돌아와서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라는 찬송가를 작사했습니다. 그 찬송의 2절 가사는 이와 같습니다.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주님 발 앞에 엎드리니 나의 맘속을 살피시사 눈보다 희게 하옵소서.” 자신의 고집과 자신의 교만을 내려놓고 다윗처럼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라고 회개한 아델레이드의 고백입니다. 이러한 고백과 삶의 변화는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이 경험하는 모든 어려움은 그들을 하늘의 영광에 더 가까운 모습으로 변화시켜 갑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바울은 환난 자체를 즐거워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고통을 즐기는 사람들을 “사디스트(sadist)”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바울은 “사디스트”가 아니었습니다. 유대인들에 의해 폭행을 당하고 돌로 맞고 쫓겨나고 바다에서 파선하는 어려움을 바울은 결코 즐기지 않았습니다. 다만 3절에서 바울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한다”고 했습니다.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는 것은 소망이 있기 때문입니다. 소망의 근거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환난 가운데 있을 때에도 우리가 환난을 이겨낼 수 있는 이유는 우리 안에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애써 하나님을 사랑해야만 고난을 극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우리의 강력한 의지와 “맨파워”만으로 고통을 극복해야 한다면, 아무도 환난 중에서 즐거워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움 속에서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 속에서 이해되고, 그 사랑이 느껴지고, 체험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강력한 실체로써 우리 마음 속에 자리를 잡습니다. 이런 것을 가리켜서 5절에서 사도는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되었다”고 표현했습니다. 성령님에 의해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다는 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산헤드린 공의회 앞에서 진리를 전했을 때 유대인들은 스데반을 향해 살기를 내뿜고 있었습니다. 그 때 스데반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뒤로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 말하되, 보라 하늘이 열리고 인자가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노라”고 말했습니다.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스데반은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어지는 것”을 경험한 사람의 모습입니다.
조나단 에드워즈는 “천국이 사랑의 나라”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국에 구멍을 하나 뚫어 놓으시고 성령님께 말씀하시기를, “그 구멍으로 내려가서 천국의 사랑의 일부를 주님의 자녀의 마음에 부으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천국이 내려와서 그 영광이 저의 영혼을 가득 채웠습니다”라는 것이 그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환난을 겪고 있을 때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그분의 사랑을 깨닫게 하심으로 환난을 견디게 하십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의 작사자 존 뉴턴은 환난 가운데 성경 말씀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된 사람들 중 한 사람입니다. 아마도 존 뉴턴이 풍랑 가운데 예수님을 믿고 회심한 사람이라고 이미 알고 계실 것입니다. 존 뉴턴의 전기와 자서전을 참고해서 그 때의 상황이 어떠했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스물 한살의 나이에 존 뉴턴은 30명의 선원이 탈 수 있는 그레이하운드라는 커다란 배에서 일자리를 얻었습니다. 큰 돈을 벌 수 있다는 선장의 말에 솔깃하여 뉴턴은 배에 오르게 됩니다. 그 당시의 자신의 삶에 대해서 뉴턴은 자서전에서 “내 삶은 계속적인 불경건함과 신성모독으로 가득 했다. 나보다 더 입이 더러운 사람을 만나본 적이 없었다.” 심지어 존 뉴턴은 성경의 본문을 뒤틀어서 끔찍한 이야기로 바꾸면서 동료 선원들에게 설교하는 장난을 치기도 했습니다. 그것을 듣고 믿지 않는 선원들조차도 존 뉴턴에게 질려 버렸고, 선장도 존 뉴턴이 성경의 요나처럼 자기의 배에 재앙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는 악인이라고 하며 두려워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 뉴턴은 술 마시기 시합을 열어서 선원들 중에 누가 제일 술을 잘 마시는지를 경주하기도 했습니다. 1748년 3월 1일에 존 뉴턴이 타고 있던 배는 목적지에서의 볼 일을 마치고 다시 영국을 향해 항해하기 시작했습니다. 3월 9일에 존 뉴턴은 배에서 발견한 크리스천 서적을 한 권 들고 읽다가 한쪽으로 밀어 버리고 잠을 청했습니다. 자서전에서 뉴턴은 “내가 늘 그랬듯이 나는 하나님에 대해 무관심한 기분으로 그 책을 한쪽으로 치워 버렸다”라고 기록했습니다.
그러던 중 갑작스럽게 배가 커다란 폭풍을 만나게 됩니다. 거대한 파도가 밀려 들어 와서 몇 분 안에 갑판은 물이 넘쳐 나게 되었고 배의 일부는 크게 파손되었습니다. 선원들은 너무나 당황하였고 선장은 신성모독을 일삼던 뉴턴을 큰 소리로 저주하며 폭풍에 대응하고 있었습니다. 존 뉴턴의 마음에는 그동안 자신이 내뱉었던 신성모독의 말들이 떠올랐습니다. “내가 무슨 자비를 바라겠는가?” 창백해진 얼굴로 존 뉴턴의 거만한 태도는 두려움으로 바뀌었습니다. 뉴턴은 “정말 신이 존재한다는 말인가?”라고 자신에게 물었습니다.”죽음 이후에 삶이 있는가?” 이런 질문을 하며 본능적으로 뉴턴은 그의 창조주를 만날 준비를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내가 그렇게 모욕했던 하나님을 어떻게 대면한다는 말인가?” 선장은 배에 차 오른 물을 빼내기 위해 펌프질을 하고 있던 뉴턴을 키쪽으로 옮겨서 다른 선원들과 돌아가며 키를 잡고 씨름하도록 했습니다. 방향키를 잡고 씨름하면서 뉴턴의 머리 속에는 그동안 알아왔던 성경구절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고 하며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자주 조롱하곤 했던 주 예수님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분의 삶과 죽음에 대해 기억해 냈다. 그분의 죄 때문이 아니라 그분을 믿는 모든 이들의 죄를 위해서 형벌을 받고 죽으신 것에 대해서 생각했다. 나의 형벌을 대신 받으신 그분을 내가 어떻게 믿을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그것을 하실 수 있다는 증거가 있으면 좋겠다. 그것이 정말 사실이면 좋겠다.” 이런 생각 가운데 뉴턴은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구하는 기도를 했습니다.
얼마 후에 거대한 폭풍이 잦아 들고 잠시 쉴 수 있게 되자 존 뉴턴은 배에 있던 성경을 한 권 집어 들어서 마태복음 7장에 기록된 그리스도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 구하는 이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마 7:7-11)” 죽음의 위협 앞에서 뉴턴의 머리 속은 아주 맑아졌습니다. “만약 성경이 전부 사실이라면, 내가 방금 읽은 본문도 사실일 것이다. 만약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이시라면, 성령을 구하는 자에게 주실 것이라고 약속하셨으니 내가 그것을 구해야겠다. 성령을 주신다면,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나는 믿어야 한다.”
한편 뉴턴의 머리 속에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누군가가 친구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가능하지만 누가 철천지 원수를 용서할 수 있다는 말인가? 하나님이 나 같은 원수를 용서해 주시기를 어떻게 기대할 수 있는가?” 그러나 뉴턴은 그리스도를 미워하고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였던 다소 사람 사울에 대해 읽은 것을 기억했습니다. “사울이 용서 받고 사도가 되었으니, 사울에게 자비를 베푸셨으면 나에게도 자비를 베푸실 수 있지 않을까?” 이런 고민을 하는 사이에 폭풍은 멈추었지만 배의 선장과 선원들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먹을 것도 없어서 생선 반 마리를 12명이 나눠 먹다가 나중에는 배고픔과 추위 속에 몇 일동안 고통해야 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선원이 죽었고, 목마름과 굶주림 가운데 모든 선원들이 절망했습니다.
그 가운데 뉴턴은 누가복음 13장에서 주인이 쓸모 없는 무화과 나무를 모두 자르라고 하자 종이 열매를 맺도록 한번만 더 기회를 주자고 간구하는 것을 읽었습니다. 과거의 악한 삶에도 불구하고 회개하는 죄인에게 자비가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가복음 15장에서 탕자의 비유를 읽었습니다. 자서전에서 그는 말합니다. “(그 때) 나보다 탕자의 모습에 완벽하게 들어맞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했다. 탕자의 아버지가 아들을 받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를 달려와서 만난 것을 읽으며 다시 돌아오는 죄인을 향한 주님의 선하심에 마음이 감동되었다.” 마침내 폭풍을 만난지 4주 만에 뉴턴이 타고 있던 그레이하운드는 북아일랜드 북쪽 해안의 작은 섬에 정박하게 됩니다. 그 때의 마음을 뉴턴은 자서전에 이렇게 썼습니다. “그 때 쯤 나는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시는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믿기 시작했다. 나의 마음은 이전에 경험해 본적이 없는 평안과 만족을 느끼기 시작했다.” 존 뉴턴이 경험했듯이, 하나님은 그분의 자녀가 환난을 겪을 때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
11절에 보시면, “그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하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자체를 즐거워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즐거워하는 것이 그리스도인이 누리는 특권이고 동시에 그것이 유일한 삶의 목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우리의 즐거움을 포기해야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실제로는 하나님을 즐거워해야 그분을 영화롭게 할 수 있습니다.
신자는 하나님을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그분이 자기를 사랑하시는 줄 알기 때문입니다. 제 아들은 저와 함께 있으면 즐거워합니다. 왜냐하면 제가 아들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나님을 즐거워할 수 있는 이유는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어디에서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신다는 증거를 찾을 수 있으십니까? 많은 경우에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집중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발견할 수 없습니다. 갈보리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드님께서 저를 사랑하십니다. 얼마나 먼 거리를 찾아오셨는지를 알면 그분이 얼마나 저를 사랑하시는지 알 수 있습니다.
셔우드 홀 선교사님의 자서전인 <조선회상>에 보면 셔우드 홀의 아버지인 윌리엄 홀 선교사님이 1889년에 뉴욕의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1892년에 조선에 와서 로제타 홀 선교사님과 결혼하고 평양에서 사역을 합니다. 그런데 1894년 8월에 청일 전쟁으로 평양이 일본군과 중국군의 격전지가 되었습니다. 선교부에서는 서울 본부로 귀환하라고 했지만 윌리엄 홀은 의사로서 부상당한 군인들을 외면할 수 없어서 평양에서 머물며 환자들을 치료하다가 과로와 발진티푸스 감염으로 34세의 나이로 죽었습니다. 윌리엄 홀은 아내에게 유언을 남기며 자기가 평양으로 간 것을 후회하지 말라고 부탁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 일을 하였고 주께서 갚아주실 것이니 후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는 조선 사람들을 정말 사랑했습니다.
주 예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로마서 5장에서 가장 자주 등장하는 단어들 중 하나는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에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는 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힘을 얻을 수 없습니다.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도 없습니다. 갈 길을 잃어버린 사람인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우리를 위해 죽으셨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저를 사랑하시는지 어떻게 하냐고요? 제 일이 잘 풀리잖아요. 한번 보세요. 저의 인생이 얼마나 잘 풀리고 있는지요.” 그렇다면 우리는 진지하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의 삶에서 잘 되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는 주님이 당신을 사랑하는지 어떻게 알 수 있나요?” 우리가 건강하고 우리 삶 속의 여러가지 일들이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 잘 되고 있기 때문에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신다고 믿어 보겠다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고 열심히 믿어 볼꺼야”라고 결심하는 성격의 문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새벽에 해가 떠오르듯이 우리 삶에 그 사랑의 빛이 비추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는데 마음에 그 사랑의 빛이 비추어질 때 그분이 믿어지고 그로 인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그분이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어린 아이들도 이해할 수 있는 복음입니다. 동시에 세상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이라도 도무지 알 수 없는 복음이기도 합니다.
이 사랑을 아는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입니다. 그분의 소유가 된 사람보다 더 행복한 사람은 없습니다. 그 사랑을 알게 된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싶습니다.” 이 세상 어떤 것보다 예수 그리스도의 소유가 되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혹시 가족들이 건강하고 돈 잘 벌고 일이 잘 풀리기만 하면 그분의 소유가 되건 안 되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까? “이 세상 그 무엇보다 저는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 되고 싶습니다.” 이러한 고백을 하기를 원하는 사람이 성찬을 받을 준비가 된 사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