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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전환교육’이 무엇인지부터 설명해야겠다. 특수교육 분야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점차 알려지기 시작한 ‘전환교육’이란 한마디로 “장애인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 독립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미리 준비시키는 교육”이다. 학교에서 하는 공부만으로는 독립적인 사회생활이 어려운 장애인들이 학교를 졸업한 뒤에 ‘어디에서’, ‘누구와 함께’,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지 미리 준비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환교육’이다.
1년에 꼭 한두번 귀국해 ‘전환교육’ 전파
지금까지의 설명이 ‘좁은 의미’의 전환교육이라면, ‘넓은 의미’의 전환교육은 장애인들이 태어나고 자라서 늙어 죽을 때까지 변화하는 단계마다 미리 대비하도록 하는 것을 뜻한다. 병원에서 퇴원해 학교로, 교도소에서 출감해 사회로 돌아올 때 미리 적응하도록 준비하는 것도 모두 ‘전환교육’에 포함된다. 성인도 직장이 바뀔 때마다 필요한 ‘미래에 닥칠 변화에 대처하는 교육’을 통틀어 ‘전환교육’이라고 할 수 있다.
미국에서는 87년에 제정된 장애인교육법을 90년에 개정하면서 ‘전환’(Transition)이라는 개념을 정식으로 채택하였다. 즉 장애인이 유치원에서 공립학교로 전환할 때와 14살부터 22살이 될 때까지의 단계마다, 정부가 비용을 지불하는 ‘전환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환교육’의 세계적인 석학이 캘리포니아주립대학(Cal. State Univ., LA) 특수교육학과(Special Edu.)의 김효선(44) 교수다. 연수를 받는 교사들에게 어찌나 열과 성을 다해 가르쳤는지 “전환교육의 대모, 교주, 전도사”, “전환교육 순악질여사”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또한 마침 우리나라에 와 있는 동안 월드컵 축구경기가 열려 특수교사들은 김효선 교수를 보고 “전환교육계의 오! 필승 코리아!”를 외치기도 했다.
지금까지 김효선씨가 밟아온 숨가쁜 과정을 연대기로만 정리하면 이렇다.
75년- 단국대학교 특수교육학과 입학, 78년- 삼육재활학교 취업, 80년- 대학원 진학, 84년- 미국 유학, 91년- 박사학위 취득, 93년- 박사 이후 과정(흔히 ‘박박사’ 또는 ‘포스트 닥’이라고 한다) 수료, 94년- 신학대학원 입학. 참고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김효선씨는 짬을 내어 LA 교회의 청년담당 선교사로 봉사하고 있다.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만큼 바쁘다”는 표현이 실감나는 생활이다.
유학 가서 지금까지 “자기 돈 한푼 안 내고” 공부했다. 김효선씨는 자기가 지금까지 그렇게 마음껏 공부할 수 있도록 이끌어주고 도움을 준 사람들(재활협회 문병기 회장, 삼육재활원 민은식 선생, 미네소타주립대학 부루닉스 학장)에게 특별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외국 유학을 통해서 “학문이란 우리 실정에 맞는 것을 연구해서 서로 나누는 것”이라는 깨달음을 얻었다. 김효선씨가 1년에 한두번씩 우리나라에 와서 ‘전환교육’을 전파하는 일에 열심인 까닭도 그 때문이다. 대학이나 특수학교에 가서 교사·학부모·교장들을 대상으로 ‘전환교육’의 실천 모형에 대한 교육과 연수를 열심히 한 지 벌써 10년이나 됐다. 국립특수교육원과 손잡고 특수교사들을 자신이 일하는 미국의 대학에서 연수시키는 일도 4년째 해오고 있다. 100여명의 특수교사들을 중심으로 만든 ‘전환교육연구회’에서는 이사 직함을 갖고 있다. 김효선씨는 자신이 하는 많은 일들을 “와서 볼 때마다, 잊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모습을 보면 고맙고요. 열심히들 하니까 너무 좋다”는 짧은 말로 요약했다.
노동자 언니들과의 특별한 식사 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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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박사과정을 밟던 90년에는 <특수체육>이라는 책을 우리나라에서 출간하기도 했다. 미국에서 수백번 넘어지면서 스키를 배웠고, 드디어 리프트를 타고 산꼭대기에 올랐을 때 “나에게 아무런 장애가 없다”고 느낀 무한한 감동을 전하고 싶어 쓴 책이다.
“평범하고 조용하고 착하고 공부 잘하는 학생”이던 소녀 김효선은 본래 의사가 되고 싶었다. 그러나 고3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에서 장애인은 의사가 된다 해도 환자를 직접 치료하기는 어렵고 연구직 의사로 일할 수밖에 없다”는 말을 듣고 좌절했다. “장애인을 돕는 의사가 되고 싶다”는 어릴 적부터의 꿈을 포기하고 이과에서 문과로 ‘전환’하면서 특수교육학을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장애인을 돕겠다”는 꿈은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으므로…. 김효선씨는 말하지 않았으나 비슷한 경험을 한 나의 경우로 미루어 짐작컨대 아마 눈물을 “한양동이쯤 쏟으며” 새운 밤이 많았을 것이다.
고등학교 3학년과 대학교에 걸친 기간에는 미혼모들을 돕는 가톨릭 수녀원에 들어가 생활하면서 구로공단 노동자 언니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언니들과 성경 공부, 노동법 공부를 했고 기독교도시산업선교회 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다. 노동자 언니들을 만난 첫날, 모임이 끝나고 한 언니가 “밥 먹고 가야지?”라고 했다. 무심코 “네” 하고 대답을 했는데, 그 언니가 커다란 양푼에 밥을 담아 온갖 반찬들을 섞더니 숟가락 열개를 푹푹 꽂아서 “자, 먹자”고 하는 것 아닌가. 그때까지 다른 사람이 마신 물에는 입도 대지 않고 다른 사람이 자기 밥상을 건드리기라도 하면 밥을 먹다가도 그만두었던 김효선씨는 “나는 죽었다”고 생각했다. 그날 그렇게 처음으로 언니들과 밥을 먹으면서 “이렇게 밥을 먹는 사람들이 있었구나. 그걸 내가 모르고 살았구나” 하고 깨달았다. 그 이후에는 꽁보리로 밥을 해서 무한히 고마워하며 먹는 법을 배웠다.
“그러다가 나는 장애인 분야를 선택한 거야. 하종강씨가 노동운동 분야를 선택한 것처럼….” 이야기를 하다가 말고 우리는 완전한 의기투합으로 잠시 감격했다.
장애인에게 ‘복지’란 무엇인가
‘전환교육’에 관한 이야기를 김효선씨에게서 좀더 들어보자. “장애인들이 옆집에서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아갈 수 있도록 그냥 내버려두는 것이 가장 중요한 ‘복지’라고 하잖아요. 자기 능력껏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 그것이 바로 전환교육이에요. 장애인들이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곳에 친구가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으면 그것이 바로 ‘질 높은 삶’이 되는 거예요. 그러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과 경쟁할 수 있는 기능만 습득할 것이 아니라 ‘자기 결정 능력’이 있어야 해요. 밥 하고 빨래 하는 것 못지않게 인생에 대한 성찰도 함께 함양돼야 하고…. 자기가 선택할 수 있는 자유란 이를테면 이런 거예요. 고등학교 졸업한 뒤 5년, 10년 놀다가도 대학에 갈 수 있는, 그런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은 사회가 되어야 하는 거지요. 집값이 떨어지니까 장애인들이 자기 동네에 들어와 사는 것을 꺼리는 것은 장애인들에게 ‘자유가 없는 것’이에요. 극장에 가고 싶어도 가기 어려우면 그것이 바로 ‘자유가 없는 것’이에요. 하종강씨 역시 노동운동 분야에서 일하기로 한 ‘자기 결정 능력’ 즉, ‘자유’가 있었기에 오늘의 그 삶이 가능했던 것 아닌가요?”
나는 뒤통수를 한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자신이 잘하고 좋아하는 일을 하고, 그곳에 친구가 있고,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있는 삶.” 그것은 장애인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사람이 꿈꾸는 삶일진대, 비장애인들이여, 당신들이 갖고 있는 ‘선택의 자유’를 장애인들도 누리게 하라!
한울노동문제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