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서장 2009/04/28
벤자민 린제이(Benjamin Lindsey)는 미국의 판사로서, 1900년부터 1927년까지 콜로라도주의 소년법원에서 일하면서 주로 청소년 비행(非行)문제를 취급하였다. 그가 그의 오랜 경험을 토대로 하여 1925년에 출간한 [현대 청년의 반항 The Revolt of Youth]은 전통적 결혼관과 도덕관에 정면으로 도전한 내용 때문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린제이가 이 저서를 발표할 무렵은 제1차 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전통적인 가치관, 특히 결혼 및 성의 윤리가 현저하게 동요되기 시작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이 책이 나온 지 70여 년이 지난 지금도 상황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전통적 성윤리로의 복귀가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새로운 성윤리가 뿌리를 내린 것도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지금까지도 그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20세기 초부터 서구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이미 전통적 혼인질서가 그 권위를 상실하고 있었다. 린제이가 이 책을 출판할 당시, 미국의 미혼 남녀 사이에서는 그 이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혼전교제의 양상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이다. 남녀고교생의 약 90퍼센트가 포옹과 키스를 즐기고, 그 가운데 50퍼센트가 짙은 애무 (petting)에 탐닉했으며, 성교에까지 이르는 쌍도 20퍼센트나 되었다. 이러한 성행동에 대해 고교생 자신들은 별로 죄의식을 느끼지 않았지만, 기성세대의 눈으로 볼 때는 진정 <말세의 징조>로만 보였다. 그래서 수많은 도덕론자나 청교도주의자들이 청소년의 탈선을 개탄하곤 하였는데, 거기에 정면으로 맞서 도전한 사람이 바로 린제이였던 것이다.
린제이의 주장을 요약하자면, 미혼남녀의 <혼전관계>가 전혀 나쁘지 않다는 것이다. 그들의 행위가 인간사회의 안전을 손상시키는 것이 아닌 이상, 성관계를 포함하는 자유로운 연애는 해악(害惡)보다도 오히려 이익을 초래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사랑 없는 결혼은 서로 사랑하는 미혼자의 동거보다 더 악하고 유해한 것이고, 따라서 연애를 동반하지 않은 결혼 (예컨대 중매결혼)은 <매음(賣淫)>과 다를 게 없다. 사랑하지도 않는데 단지 이해타산적 목적에서 결혼할 경우, 그것은 단지 난교(亂交)가 아니라는 점에서 매음과 다를 뿐, 더욱 추악한 위선을 내포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사랑>만 수반된다면 두 남녀가 혼전성교를 하든지, 더 나아가 동거까지 가든지 모두 다 사회적으로 공인(公認)되어야 한다는 입장을 취했다. <결혼식>이란 것은 단지 <공식적 선언>에 불과할 뿐이므로 별의미가 없다. 억지로 법에 의해 두 사람을 묶어 놓는 것보다는, 보다 자유로운 사랑의 실험이 가능하도록 하는 게 낫다. 그런 이유에서 그는 <시험결혼(trial marriage)>을 권유한다.
<시험결혼>이란 남녀의 성적(性的) 조화와 결혼의사를 서로 확인하기 위한 <시험적 동거>를 의미하는데, 이 시험결혼이 보편화될 수만 있다면 결혼의 파탄과 이혼의 비극을 오히려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당시의 미국에서도 이혼문제는 사회적으로 큰 골칫거리였다. 1920년대에도 이혼율은 거의 50퍼센트에 육박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토록 이혼이 잦은데도 불구하고 이혼은 법률상 제한되어 있었고, 이혼을 청구하려면 상대방에게 <간통>이나 <학대> 따위의 이유가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미 실패로 판가름난 결혼생활을 억지로 계속해야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고통스러운 일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린제이는 <시험결혼>제도를 주장한 것이다. 요컨대 그것은 결혼이 잘 될지 안 될지를 확인하기 위해서이고, 또한 실패로 끝났을 경우에도 간단히 헤어질 수 있기 위해서이다.
시험결혼은 또한 낙태의 방지역할도 해준다. 원래 혼전성교의 필연적 결과로서 <혼전임신>이 파생되는데, 처녀들은 <미혼모>가 되는 것과 그녀에게 생긴 아이, 즉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압박을 피하기 위해서 자연히 낙태수술을 하게 된다. 그래서 린제이는 미혼모와 사생아에 대해서 불필요할 정도로 잔인한 오명을 뒤집어씌우는 사회의 편견에 반발하면서, 그러한 사회적 편견의 저변에는 여자의 <혼전순결>에 대한 인습적 미신(迷信)이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라고 진단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혼전동거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지면 따라서 미혼모와 사생아에 대한 사회적 . 법적 편견과 박해가 없어지게 되고, 따라서 여성들이 겪는 낙태의 고통을 덜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피임약의 자유로운 사용이 동시에 이뤼져야 함은 물론이다.
린제이가 주장하고 있는 성의식의 혁신은 지금 우리나라에도 그대로 적용된다고 하겠다. 아직도 <결혼>과 <혼전순결>이라는 인습적 장치에 얽매여 자유로운 연애를 마음대로 즐기지 못하는 젊은이들이 많이 있으며, 내키지 않은 결혼을 한 뒤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서 우울한 나날을 보내고 있는 기혼 남녀들이 많다.
그러므로 이제부터라도 우리는 <결혼>과 <사랑>을 동일시하는 관습적이고 진부한 사고방식으로부터의 탈피를 시도해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