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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

⑬ - 낭만주의 미술

작성자천상훈|작성시간08.11.28|조회수884 목록 댓글 0

 

 

 낭만주의미술

 

 1.특징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 걸쳐 전 유럽에 탄생한 예술적 경향이다
        
(정치적인 혁명의 소용돌이가 고스란히 기록) 

·시적이며 신화적인 주제(현실을 떠난 상상력)

·현실을 떠난 이상향추구. 이국적인 소재등에 깊은 관심(단순한 현실도피)

·'감정'이 중요- 작가의 상상력이 중요

·색채에 비중을 두고 화려하고 열정적인 화면을 구사

·작가의 감정의 호소를 감상  

·개인의 상상력과 내면을 중시하는 주관적

·격렬한 동세, 파격적인 색채의 사용, 그리고 휘몰아치는 붓놀림

·18세기말부터 몰아닥친 질풍노도의 혁명의 시대를 반영하는 정신적인 사조

 

2. 화가

스페인 낭만주의

고 야 <Goyay Lucientes, Francisco Jose de>(1746.3.30~1828.4.16)    

"나의 스승은 벨라스케스와 자연이다"라고 말했듯이 벨라스케스의 예술에서 많은 영향을 받아 종교화, 초상화 및 민중생활에서 제재를 취한 사실적 풍속화를 많이 그렸다. 1792년 혹독한 질병으로 청력을 상실하면서 고립된 자아를 발견하고 인간의 내면세계에 몰두함으로써 그의 작품에는 보다 세부적인 사실이 냉혹하게 묘사되고 종교적이고 풍자적인 강렬한 힘이 자리잡게 되었다.
로코코를 지나 낭만주의까지 스페인의 가장 뛰어난 화가
예리한 관찰과 밝은 색채, 상쾌한 필치. 초상화에서 인물화로 유명하다.

 '근대회화의 모든 흐름을 예고했다'(앙드레 말로)
'하늘로 쏘아 올려진 불꽃놀이의 폭죽 같았다.'(스페인 미술계)

잠자는 이성은 괴물을 깨운다(1799년. 판화집 카프리초스 43번)

뒤러의 멜랑코리아 (1514년. 루브르 박물관 )

르네상스 시기에 뒤러가 예술가를 우울증에 사로잡힌 천재로 묘사했던 것을 떠올리게 한다. 고야는 내면의 상상력이야말로 예술 창조력의 보고라는 점을 인식하였던 것 같다. '상상력'은 자유와 개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정신의 근간이었으며, 바로 이러한 점에서 낭만주의는 19세기 말의 상징주의나 표현주의와 상통한다. 또한 현실과 충돌하는 초현실의 영역에 대한 탐구는 후에 프로이트의 무의식의 발견으로 이어진다.

화실의 자화상(1791-92년경. 마드리드, 산 페르난도 왕립 아카데미)
실크 스타킹에 모자를 쓴 멋쟁이 신사의 모습은 당시 궁정화가 고야의 자화상이다 

카를로 4세의가족(1800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
고야가 수석 궁정화가로 임명된 후 그린 이 그림은 그 동안 다루어 온 초상화 작품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작품의 내용은 영화가 극에 달하여 퇴폐와 부패로 치닫던 스페인 왕조의 가식적이고 오만하며 탐욕스런 모습을 담은 것이다. 고야는 자신의 후원자를 민중을 착취하는 폭정과 무능의 화신으로 그렸다. 도도한 왕비가 화면 중앙을 차지하고 왕이 옆으로 비켜서 있는 것은 카르로스의 무능을 암시하고, 그 대신 국권을 좌지우지한 왕비를 부각시키려는 의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바아 인물배치에 있어서의 구성적 변화, 광선 효과와 질감 표현에 있어서의 다양한 변화는 고야 예술의 한 정점을 이루며, 특히 등장인물에 대한 예리한 통팔력은 그의 예술을 미와 추의 한계를 초월하는 수준으로 올려놓았다. 고티에는 "복권에 당첨된 빵집 주인 일가족 같다"고 풍자했다.

거인(1808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전쟁이 가져다주는 공포와 잔혹, 인간의 내면적인 폭력성, 그리고 공포가 악몽처럼 거침없이 드러난 이 작품들을 접하면 인간이 정말 이성적이며 선한 본성을 지녔는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20세기의 대량살상의 전쟁을 두 번이나 경험한 현대인들에게 고야의 이미지들은 소름끼치는 예언력을 지니는 것처럼 느껴진다. 

1808년5월3일(1814년. 마드리드, 프라도 박물관)
나폴레옹의 군대가 스페인에 입성하였을 때 민중들은 내심 혁명군이 자신들에게 자유를 선사할 것이라 기대하였지만 제국주의적인 욕심을 지닌 프랑스 군대는 단지 침략자였을 뿐이었다. 고야의 <1808년 5월의 처형>은 전날 스페인의 기습공격을 당한 프랑스인들이 무고한 농민들을 상대로 무자비한 보복을 가하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두려움에 얼굴을 감싸고 형장으로 올라오는 인물과 이미 주검이 되어 쓰러진 인물 사이의 흰 옷을 입은 인물은 그 강렬한 빛으로 인해서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이다. 고야는 이 무지랭이를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처럼 순교자로 그리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스페인의 맹렬한 저항으로 마침내 무적의 나폴레옹군은 1814년 퇴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스페인인들은 프랑스와의 투쟁을 통해 새로운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었다. 이 작품은 이러한 스페인의 저항을 기념하기 위해 1814년 페르디난트 7세의 요청으로 제작된 역사의 기록화이자, 혁명의 그림자가 어둡게 드리운 19세기 낭만주의의 걸작이다.

자화상
렘브란트와 함께 가장 많은 자화상을 그린 화가 중의 한 사람으로, 현재 알려진 고야의 자화상은 20여 점에 달하고 있다. 고야의 초상화들은 변화하는 그의 정신적 상태와 생활환경을 반영하는 일종의 자전적인 성격을 띠고 있다. 이미 노년에 접어든 69세 때의 것이지만 그의 모습에는 자신감과 정력이 넘치고 있다. 두툼한 목과 가슴팍, 그리고 무엇인가를 깊이 응시하고 있는 듯한 시선과 풍가어린 입 모습 등 고야 자신의 건재를 과시하고 있는 자화상이다.

시골의 투우
그 당시에는 투우가 오늘날처럼 대규모적인 것은 아니었고 축제를 즐기는 스페인 사람들의 행사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 따라서 대도시뿐만 아니라 시골에서도 널판지로 울타리를 치고 투우를 하였다. 이 작품은 결결하게 움직인 동적인 자세를 극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서민 출신인 고야는 투우 등 서민 생활의 다양한 모습에 큰 간심을 갖고 있었으며, 1816년에는 투우를 주제로 33점의 판화 시리즈를 출간하기도 했다.

옷을 벗은 마하(1798-1805년. 프라도미술관)
짝을 이루는 옷을 입은 마하가 있다. 같은 여성이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두 작품에는 같은 듯하지만 묘한 차이가 있다. 나체 쪽은 머리를 풀었고, 표정도 몽롱하다. 두 그림 사이에 시간적인 차이가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작품에서 에로틱한 의미를 찾아볼 수 있다. 이 작품들을 의뢰한 사람은 당시 왕비 마리아 루이제의 사랑을 받아 젊은 나이에 수상이 된 마누엘 고도이었다. 모델은 고도이의 애인으로 생각된다. 고도이는 자택 거실에 이 작품과 벨라스케스의 <거울을 보는 비너스>를 걸어 놓고 손님들에게 보여 주었다. 나중에 고야는 이 작품을 이유로 이단 심판을 받게 된다.

옷을 입은 마하
      알바공작    대장간

프랑스 낭만주의

제리코( Gericault, Jean Louis Andre Theodore(1791.9.26~1824.1.26)

그 뭐라 할 수 없는 손, 또 그 얼굴. 그것이 가져다주는 감동을 나로서는 표현할 길이 없다.

19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가로 낭만주의 회화의 창시자.짧은 생애동안 줄곧 죽음과 폭력, 절망과 같은 극적인 장면에 몰두하였다. 이러한 기질은 고야의 음울한 상상력과도 통하는 점이 있다.

잘린머리(1818년. 스톡홀름, 스웨덴 국립박물관)

광녀(1822년. 리옹미술관)
정신과 의사의 요청으로 편집광 환자들의 임상적인 표정을 포착한 초상화(도23)를 그리기도 하였는데, 이러한 작업들에서 제리코가 일찍이 역사나 신화보다는 현실적인 것과 눈에 보이는 것에 더욱 집착하는 실증주의적인 태도를 지녔음을 보게된다.  

메뒤즈의 뗏목(1819년. 루브르미술관)
그가 몇 년을 두고 몰두하였던 야심작으로, 낭만주의의 선언이 되었던 작품다. 1816년 당시 있었던 사건을 기초로 하였다. 프랑스의 범선 메두사호는 군인과 이주민들을 포함한 수백명의 승객을 태우고 세네갈로 향하고 있었다. 이 배는 아프리카의 해안에서 난파되어 12일 동안의 표류 끝에 겨우 15명만이 살아 돌아올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 이 사고는 프랑스 정부의 무능과 부조리 때문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제리코가 이사건을 장엄한 역사화의 스케일로 제작한 것에는 어떤 정치적인 의도가 있다고 보는 해석도 있다. 전경의 널부러진 시체들을 더욱 실감나게 묘사하기 위해서 시체보관소에 가서 절단된 사지나 참수된 두상을 관찰하여 그리기도 하였다.

근위병사관  살인광.  들라크르와의초상 에프손의경마 사후

들라크르와 (Eugene Delacoix 1799 ~ 1863)

"그림은 눈을 위함이 아니라 마음을 위해서 창작하는 것"
"100년 뒤에 다시 이 세상에 살아 돌아와 나의 일을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다"고 하며 독신으로 65세의 생을 마감했다.

명문가 외교관의 아들로 명석하며 정열적인 상상력을 타고나 밝은 색채감.
회화 기법에 대담한 혁신을 가져온 선구자(인상파와 현대 표현주의의 선구자)
자신의 시적 감흥을 전달코자 형태와 빛, 마치 교향곡과도 같은 채색이 창조이다.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 화가. 감성과 개성, 상상력으로 인간의 내면세계를 새롭게 승화시킨 들라크르와는 강렬한 색채와 명암의 대비를 표현하면서 신고전주의 회화에 정면으로 도전한 화가이다. 들라크르와는 8살 때부터 고전에 심취하여 세익스피어, 바이런, 괴테 등의 작품을 가까이하였고, 이는 후에 화가가 된 그에게 격조 높은 지성과 인격 형성, 심지어는 상상력의 나래를 펼칠 수 있게 해 주었던 경험의 원천이었다. 풍부한 재능과 환경으로 인해 그는 회화 작품뿐만 아니라 미술사에 있어 중요한 문헌으로 높이 평가되는 예술론이나 일기를 집필하기도 했다.

단테의 배(1822년. 루브르미술관)
제리코의 죽음에 경의를 표현하였다.

키오스섬의 학살(1822-24년. 루브르미술관)
제리코의 작품은 들라크르와에게 깊은 영감을 주었다. 자신은 결코 낭만주의자가 아니라고 하였지만 들라크르와에게서 19세기 프랑스 낭만주의의 미술은 가장 만발하였다.중경이 없이 급격하게 멀어지는 화면의 공간이나, 원색적인 붉은 색의 과격한 병치, 스케치처럼 그대로 남아 있는 붓자국 때문에 미완성의 작품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다 .

사르다나팔루스의죽음(1827년. 루브르미술관)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이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된다.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야곱과천사의싸움
고전 양식의 생 쉴피스 교회당의 벽화로 구약성서의 이야기이다. 이삭과 레베카사이에 태어난 쌍둥이 동생 야곱이 아내와 11명의 자식을 데리고 야포크를 건널 무렵, 맨 뒤에 남은 그는 상대가 천사인지도 모르고 밤새 결투를 벌인다. 끝내는 무기를 버리고 맨주먹으로 달려드는 야곱의 허벅지에 천사의 손이 닿자, 그의 관절이 빠져 승부가 결판난다.
화면 중앙에 울창한 거목이 있고, 그 왼쪽에는 저돌적으로 천사에게 덤비고 있는 야곱, 오른쪽에는 형 에사우에게 보낼 선물을 실은 말의 행렬이 보인다. 이 작품은 벽화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색채가 어둡지만, 터치에 의해 대상의 질감을 묘사하고 다채로운 색조의 배합으로 공간 분위기를 살리고 있다.
이 벽화는 1849에 주문을 받았지만, 지병인 결핵으로 인해 작업이 여의치 않아 죽기 2년 전인 1861년에야 완성을 보았다. 완성에 즈음한 안내장에서 들라크루아는 벽화의 테마는 선택받은 사람들에 대해 신이 내리는 시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조르주 상드의 초상
원래 쇼팽과 함께 그려진 "쇼팽과 조르주 상드의 상"에서 상드의 부분이다. 들라크루아는 애당초 두 사람을 한 캔버스에 넣어서 구도를 잡았는데 뒤에 둘로 나누어 독립된 초상화로 만든 것이다. 쇼팽은 피아노를 향해 있고, 상드는 좀 떨어져서 뒤의 어두운 곳에 있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상드는 피아노를 치고 있는 쇼팽 쪽을 보고 있는 모습으로 매우 중후한 느낌으로 그려져 있다. 상드와 쇼팽의 사랑은 열렬했지만 결국 비극으로 끝나고 말았다.

알제리여인(1834년. 루브르미술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을 계기로, 19세기 전반의 유럽에서는 오리엔탈리즘이 유행하였다. 회화를 비롯한 의상이나 기호품등에 동양적인 장식이 들어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1832년 프랑스 왕실 사절단 자격으로 북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거기에서 수많은 동양적 물품들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책 등을 통한 지식이 아니라 수많은 동양적 물품들을 보고 큰 영향을 받았다. 다른 많은 화가들처럼 책등을 통한 지식이 아니라 실제로 자기 눈으로 보고 피부로 느낀 지식이었기 때문에 그의 작품에 나타난 오리엔탈리즘은 생기발랄하면서 때로는 드라마틱하기까지 하다.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이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이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이다.  

자화상. 민중을이끈자유의여신. 지옥의 단테와 베르길리우스 .뗏목.쇼팽  묘지의고아

독일 낭만주의

풍경화, 상징주의, 민족적 중세주의의 세가지 양식으로 표현

더 엄숙한 성격을 띠고 뚜렷하게 종교적 주제 다루었다.

프리드리히 Friedrich, Caspar David (1774.9.5~1840.5.7)

자연에 대한 인간의 열망을 소외감, 고독으로 표현. 주로 종교적 주제를 다룸. 색채의 미묘한 농담으로 자연을 섬세하게 표현함.

자작나무 숲의 성당(1809-1810년. 베를린, 슐로스 칼로트부르그)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어서 우주적인 고독까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그림이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이 드러난다.

바닷가의 수도승(1809년. 베를린, 국립미술관)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이다. 탁트인 검은 바닷가의 수도승은 마치 점처럼 표현되어 있어 자연의 불가사의 한 힘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무한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비극적인 슬픔, 고립감은 낭만주의 시대의 미학인 '숭고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까마귀있는나무. 고독한나무. 안개 위의 방랑자(1818년. 함부르그, 국립박물관)

영국 낭만주의

풍경화는 유행(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루소와 영국 호반시인의 영향)

윌리엄 블레이크 (William Blake, 1757-1827)
영국의 낭만주의 화가, 판화가, 시인. 1767년부터 런던에서 그림 교육을 받기 시작하면서 12살부터는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는 판화가 밑에서 도제 생활을 했으며, 1779년에 왕립 미술원에 입학했다. 1780년대부터 블레이크는 상업 판화가와 시인으로 활동했으며, 1784년 아버지가 죽은 뒤 판화 가게를 열기도 하였다.그는 '내면에 있는 눈'을 가장 중요시했으며 신비롭고 초자연적인 것에 물든 신비한 광경에 몰두했다.  그의 작품의 기반이 된 개성과 직관은 극히 개인적인 것이었지만, 현대미술이 추구해 나가게 되는 길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자적인 것이었다.

쾌락의 원형(1824년. 런던, 테이트 갤러리 )
영국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는 단테의 『지옥편』의 한 장면의 그림으로 남녀의 결합을 휘몰아치는 소용돌이로 표현하였다.

태고(1794. 대영박물관)
창조주의 모습은 그 영웅적인 신체에서 미켈란젤로를 연상시킨다. 블레이크는 자신의 꿈에서 독특한 장면의 영감을 얻었다고 하는데 내면의 무의식을 중시했다는 점에서 낭만주의 미술가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것 같다.

컨스터블 (John Constable 1776 ~ 1837)

밝은 색감으로 자연을 섬세하게 관찰
초록색의 발견자로서 근대 풍경화에 큰 영향(들라크루아를 비롯한 프랑스 에 영향)

컨스터블은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했다. 그러나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면 화가의 관심이 눈에 포착되는 시각적인 표면 그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다. 컨스터블 이전의 어떤 화가도 실제 자연에서 풍기는 싱싱한 초록색의 느낌을 그렇게 풍부하게 그려내지는 못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관례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갈색톤을 사용하고 뒤로 멀어지는 배경에는 푸른색을 사용하였다. 컨스터블은 눈에 보이는 대로의 원색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빛이 반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초록색과 병치되는 붉은색과 흰색의 반점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된다.

구름습작(1822년. 런던, 코톨드 미술관)
변화가 심한 영국의 구름의 변화를 관찰한 그의 스케치를 대하자면 마치 기상관이 날씨를 관찰하는 듯다.

건초마차(1821년. 런던, 국립미술관)
컨스터블은 그림의 마지막 작업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하였다. 이 그림은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갈색톤의 고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들르크르와가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이미 완성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에 붉은색의 덧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이다. 

스톤헨지(1820-30년 사이. 윌트셔)

"황량하고 끝없는 히스가 펼쳐진 들에 서 있는 스톤헨지의 신비스런 유물은 이것이 현재 쓰이지 않는 것과 똑같이 과거의 사건과도 관계가 없으며 일체의 역사적 기록을 초월해서 전혀 미지인 신비의 세계로 사람들을 유인하다."라고 말한 콘스터블은 마아도 희망의 허무함 같은 상징적인 무지개를 그렸고, 왼족 앞에는 천둥에 놀라 달아나려고 갈팡질팡하는 토끼를 그리고 오른쪽 뒤에는 달아나는 짐마차를 점경으로 첨가하였다. "하늘은 감정의 주요한 표현 수단이다."라고 한 그의 말을 입증하는 작품 중의 하나다.

솔즈버리대성당. 플랫퍼드물레방앗간 수문과물레방앗간 .

터너 (William Turner 1775 ~ 1851)

낭만주의적 완성. 인상파에 커다란 영향. 터너는 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장엄함이나 숭고함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다. 빛과 대기를 재현하기 위해 색채와 격투를 벌린 격정을 품은 자연주의 화가임.

우연한 효과를 이용 : 감정이 이끄는 대로 칠한 색채, 물감자국. 지문. 긁힌 자국등을 살려 모든 감정을 있는 그대로 구현.

대자연의 영감을 추구 : 추상화처럼 보일 만큼 독특한 세계로 표현.단순 풍경이 아니라 대자연의 영감과의 사투.

배에서떨어지는 죽(1840년. 보스턴 미술관)
이 그림은 보험을 노리고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노예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주제로 다룬 것이지만, 이 같은 주제는 크게 원형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는 색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버린 것 같다. 즉 터너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사건을 담아낼 전체적인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비.증기.속도(1844년. 런던, 국립미술관)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터너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한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비, 증기, 속도>에서 보듯이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간다. 그 효과는 모네의 인상주의와 흡사하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다.  

전함터메레르

역동적이고 강력한 자연의 힘을 즐겨 그렸다. 자연의 변화가 민감하게 나타나는 강과 바다의 세계가 그의 영감의 원천이다. 이 작품은 트라팔까 해전에서 맹활약한 전함이 수명이 다하여 현대 증기서에 예인되어 선박 해체장으로 끌려가는 모습을 그린 것이다. 영고성쇠의 무상한 운명을 시로 읊고 그림으로 표현해 온 터너로서는 매우 흥미있는 주제였다. 수평선 너머로 침잠하는 석양이 하늘과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따뜻한 느낌의 붉은새과는 반대로 차가운 느낌의 청색이 수평선에서 나와 왼쪽으로 확산되어 간다. 석양 속에서 힘을 지닌 자와 다 써 버린 자의 상징인 두 척의 배가 조용히 움직이고 있다. 왼쪽 위에는 이미 달이 보이기 시작하며 그 희미하 ㄴ빛을 물 위에 던지고 있다. 장대한 일몰과 낡은 전함의 조화는 향수와 상실의 분위기를 연출하며, 그 속에서 전함은 자연의 일부로 승화한다.

자화상   카르타고를건설하는디도 평화.수장  태양앞에선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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