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색의 마술사, 앙리 마티스 (Henri Matisse)
피카소가 현대 미술가 중에서 유일하게 인정했던 화가가 바로 앙리 마티스라는 얘기를 했다고 한다. 그는 '마티스의 배 속에는 태양이 들어있다'라는 표현으로 마티스의 뛰어난 색채 감각을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마티스는 곡물 상인이었던 아버지와 아마추어 화가였던 어머니 밑에서 20살 때까지는 그의 천재성을 모른채 지낸 프랑스 시골 마을의 평범한 청년에 불과했다.
그는 1887년 파리에서 법률을 공부했으며 자격시험에 합격. 법률 사무실 서기로 일했다. 그러나 건강상의 이유로 입원을 하게 되는데 같은 병실의 남자가 가끔 그림을 그리는것을 보고 그림에 관심을 가지게 되어, 그때 부터 마티스는 마을어귀의 경치를 담은 풍경화를 그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아버지의 반대를 무렵쓰고 그는 법률을 포기하고 파리로 가서 아카데미 줄리앙에 들어갔다. 그는 푸생과 샤르댕 등의 작품을 모사하는 인습적 보수적 경향의 그림을 따라 했었고, 이듬해 에콜 데 보자르에 등록하였다. 거기서 '귀스타브 모로'의 주의을 끌게되어 그의 화실에서 작업을 하게 된다. 여기서 루오 마르케 등과 교우, 모로의 자유로운 지도 아래 색채화가로서의 천부적 자질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삶의 기쁨 1906
1906년에 제작된 [삶의 기쁨]은 다른 어떤 작품보다도 야수주의의 정신을 요약하고 있으며, 그의 기나긴 화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단조로운 색면, 심한 굴곡을 보이는 윤곽선, 그리고 원시적인 형태는 분명히 고갱의 영향을 받은것으로, 그 주제까지도 고갱이 타히티섬에서 추구한<자연 상태 그대로의 인간> 모습을 암시하고 있다.
마티스의 그림은 <고전>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인체에 대한 깊은 지식이 깔려 있음을 알아 볼 수 있는데, 이는 그가 아카데믹한 전통속에서 화가 교육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예라 하겠다. 하지만 그의 작품에는 결정적으로 혁명적인요소가 들어있으며 뛰어난 직관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본능적인 충동이나 영감의 원천을 흐려 버리지 않으면서 객관적인 사물을 구상화했다. 모로가 " 그는 회화를 단순화 시킬 것이다." 라고 예언한 것처럼 훗날 [생략의 천재] 라고 일컬어지는 마티스의 철저한 단순화 , 즉 불필요한 것은 일체 생략하든가 아니면 암시적으로 표현하면서 화면에는 조소적 형태와 공간의 깊이의 본질적 요소가 보유 되어 있었다.
회화란 평면 위에 선과 색채를 리드미컬하게 배치하는 것이라고 마티스는 말하고 있는 것처럼보이나, 사실은 자연의 기본적인 특성을 파괴하지 않고 그 특성을 평면적인 장식으로 환원함이 없이, 자연의 이미지를 어느 정도까지 단순화할 수 있는가를 문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찍이 이렇게 말한적이 있다.
" 내가 탐구하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도 표현이다. 그러나 표현은 인간의 얼굴에 반영된 정열로써 구성되어지는 것은 아니다. 화면의 회화적 질서 그 전체가 표현이다. 인물이라던가 대상의 위치, 그것들을 둘러싼 여백의 공간, 비례,이들 모두가 하나의 역활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서 그의 고유색을 부정하는 주관적인 색채와 거친 붓놀림 등은 그의 작품 세계가 기본적으로 사물자체에 대한 관찰과 발견, 느낌과 경험에서 출발한다는 걸 보여주고 있다.
비설명적이면서 주관적인 강렬한 색채(튜브에서 바로 짜낸 강렬한 원색 ), 붓자국에 심취한것은 인상주의의 지대한 영향을 받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그의 작품에서 색채가 차지하는 비중은 거의 절대적이며 이는 야수파의 전형적인 특징으로 볼수 있다.
1908년부터 1917년 까진 여러곳을 여행하면서 그는 더욱 리듬감 있고 유연한 선의 형태와 더욱 강렬한 색채의 장식예술(세라믹, 성화, 옷감)을 발견해 그의 작품에 도입한 [푸른색 누드]는 큰 물의를 일으킨다. 1919년부터 십년여동안에는 니스에 머물면서 오달리스크, 실내 풍경의 여인, 창문으로 본 풍경 등의 소재를 다루는 작품 활동을 했다. 색채의 효과, 선명한 구도적 의도, 장식 요소의 극대화, 복잡한 공간 구성 연구 등이 이 시기의 작품특징이다.
Blue Nude
"내가 화면에 놓는 모든 색조로부터 마치 음악의 화음과도 같은, 색의 살아있는 화음이 연주되지 않으면 안된다.
다양한 색채는 서로를 약화시키기 때문에 색들이 서로를 파괴하지 않도록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마티스는 어느날 토마토를 파랗게 그렸는데, 왜 그랬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내가 토마토를 파랗게 본 유일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유감스럽다. 나는 이런 사람들을 보면 항상 같은 생각에 잠기게 되곤 한다. 내가 생을 마친 후, 다른 사람들의 기억에 남을 나는 어떤 이미지일까?'
말년에 접어든 마티스가 몸의 거동이 힘들어지자 새로운 기법으로 색종이 그림을 그리게 되는데, 이작업은 8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둘 때가지 계속되었다. 생략의 천재인 마티스가 여기에서도 작동하고 있어. 색채수를 최소한으로 감소시킴으로써 색채를 독립된 구성 요소로 만들고 있다.
달팽이
마티스의 색종이 그림은 작품 세계의 완결이라고 표현될 만큼 평면적이고 자유로운 색채가 강조되었다. 그는 색채도 혼합하여 마치 가위를 연필처럼 사용해서 색종이 위에 그림을 그렸다. 그효과는 방법의 단순함에도 불구하고 강하고 직접적이었다. 마티스는 색종이 그림을 통해 간결하고 명확한, 그리고 대범한 구획 속에서 고전적이라 할 만큼의 질서감과 절도감을 보여준다. 어쩌면 선과 리듬, 색채와 공간의 자율적인 세계 속에서 마티스는 우리에게 존재의 의미를 확증시켜 주고 있는 것인지 모른다.
대표적으로 [재즈씨리즈]는 참으로 경쾌하고 고뇌의 색조을 띄지않는 비상한의지의 집중과 감각의 직집적인 표현이였다.
Jazz 1947
Red Studio 1948
이 작품은 마티스가 말년에 그린 작품중 가장 유명한 작품이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서로 다른 형태의 테이블 위에 꽃이며 과일들이 가득 놓여져 있는 등 모든 것들이 꽉 차게 배치되어 있다. 이렇게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선들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잡하거나 어지러워보이지 않고 어우러지는 것은 바로 이 모든 것들이 주조색인 빵강 속에 융합되어 흡수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외적세계에 대한 감정적 반발 다시말해 반 아카데미즘형태로 나타나는 Fauvism 성격을 야수파의 모든 화가들 가운데서도 오로지 마티스만이 치열하면서도 단순화된 색채 조화와 세련된 소묘력을 보다 높은 차원에서 성취해 나가는 위업을 이어갈 수 있었다.
그의 생애에 있어 조심스레 우정을 지키고 서로의 작품에 깊은 경의를 품고 있었으며 비교 되기도하는 예술가는 '피카소'뿐이다. 이 두거장의 교류는 1945년 합동 작품전을 열기까지 했는데 , 매우 뜻깊은 일이 아닐수 없다.
마티스는 1954년 심장발작으로 사망했다. 마티스에게는 너무나 많은 찬사가 주어져 있는데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켄버스라는 한정된 투기장위에서 마티스 만큼 훌륭하게 색채를 보다 표현적으로 구조적으로 사용한 화가는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