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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공부 생활수행

허망한 분별세계가 아닌 본성을 곧바로 보라

작성자小百合|작성시간24.05.17|조회수14 목록 댓글 0

우리 뇌 속에는 가상현실을 만들어내는 영화상영관이 있습니다. 그 우리 뇌 속의 시뮬레이터는 끊임없이 온갖 영화를 찍고, 다큐를 찍어댑니다. 그런데 뇌과학에서 말하는 것을 들어보면, 이 뇌 속 영화관은 주로 부정적인 영상을 주로 만들어낸다고 합니다. 뇌 자체가 위험천만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부정적 정보에 민감하도록 진화해 왔기 때문이라고 하네요. 그렇기 때문에 그냥 가만히 있으면 저절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과거 좋지 않은 기억들을 조합해서 악몽과 같은 영화를 찍어대기 때문에 매 순간 깨어있는 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머릿속에는 온갖 생각과 번뇌 망상들이, 그것도 주로 부정적인 생각들이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렇게 일어난 생각과 망상들을 나와 동일시를 한다는 점입니다. 생각이 일어나면 그 생각을 ‘내 생각’이라고 굳게 믿는 것이지요.



사실 그 생각들은 내 생각이 아닙니다. 과거에 비슷한 경험과 기억들에서 끌어와 이리저리 조합함으로써 만들어낸 허망한 망상일 뿐, 지금 여기에서의 생생한 나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것입니다. 생각과 망상은 그저 인연 따라 손님처럼 왔다가 가는 것일 뿐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니에요.



생각이 내가 아닌 것처럼, 이 몸도 진짜 나는 아닙니다. 변해가는 것일 뿐이지요. 우리 몸은 끊임없이 세포분열을 일으켜, 세포의 차원에서는 7년에 한 번씩 모든 세포가 전혀 다른 세포로 바뀌고, 미립자의 차원에서는 찰나지간에 미립자들이 태어나고 소멸된다고 합니다.



감정이나 느낌 또한 인연 따라 오고 가는 것일 뿐, 진짜 나는 아닙니다. 의도나 욕망 또한 진짜 나는 아니지요. 상황에 따라, 조건이 바뀌면 우리의 욕망이나 의도도 끊임없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량분별을 통해, 생각을 통해 허황된 상을 만들어 놓고, 그렇게 스스로 만든 허상을 실재라 생각하며 거기에 집착하고 애착하며 그것이 ‘나’고, ‘내 것’이라고 생각하며 살아왔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날 갑자기 이상형에 가까운 한 여인이 나타납니다. 마음 속에서 그녀를 내 이상형에 끼워 맞추고는, 있는 그대로의 그 여인 자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 속에서 이상형의 그녀라고 이름을 붙입니다. 상을 만드는 것이지요.



그렇게 상을 만들어놓고 그녀를 내 목숨보다 더 사랑한다고 여기며, 그녀를 얻기 위해서라면 그 무슨 일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집착하고 애착하게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우리는 진짜 있는 그대로의 그녀를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속에서 조작해 낸 ‘그녀’를 보고 있는 것에 불과합니다.



이뿐이 아닙니다. 우리 마음속에서 ‘나’라고 여기는 모든 것이 이와 같이 만들어진 것일 뿐입니다. 나와 너, 사람들, 종교, 도덕, 진리, 세계, 우주에 이르기까지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세계 자체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들이 내 안에 들어와 내식대로 조합하고 만들어진 생각 속의 대상을 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진짜 나라고 할 수 없는 것들일 뿐입니다.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우리의 삶 자체가 이처럼 하나의 거대한 환영이고, 의식이 만들어낸 꿈과도 같은 허망한 착각의 세계인 것이지요. 그것은 진짜의 세계도 아니고, 그 세계 속에 살고 있는 ‘나’라고 여기던 그 나도 진짜 내가 아닙니다.

그러면 도대체 진짜 ‘나’는 누구일까요?



생각이나 개념으로 만들어지지 않은, 그 어떤 것으로도 조작되거나 허망하게 부풀려지지 않은 있는 그대로의 존재는 과연 무엇일까요? 금강경에서는 이렇게 개념과 관념으로 만들어진 모든 것들을 ‘상’이라고 하면서, 그 모든 상을 타파할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마음 속에 생각이나 개념, 관념이 아닌 것은 무엇이 있을까요? 상으로 개념화되거나 훼손되어지지 않는 어떤 것이 있습니다. 대상을 보자마자 바로 아는 그것이 있습니다. 대상을 보고 연이어 과거의 기억 속에서 그 대상과 비슷한 것을 가져와 대상과 비교 대조함으로써 그것이 무엇이라고 이름 짓고, 개념화하는 것은 생각이 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개념화 짓기 이전에 그 대상을 바로 아는 놈이 있습니다. 그것을 앎이라고 할 수도 있고, 본래면목, 본성, 마음자리, 불성, 주인공 등 수없이 많은 이름으로 불러왔지만 그 자리는 그 어떤 이름이나 개념이 붙을 수 없는 자리입니다. 개념화될 수 없고, 생각으로 헤아려지지 않으며, 그렇기에 생각과의 동일시가 일어나지 않는 자리입니다.



보통 우리는 대상을 볼 때 보는 그 대상을 쫓아가게 되고, 그것이 좋고 싫음에 따라 집착하거나 미워하게 됩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에도 그 생각을 좇아가면서 그 생각이 나라고 여기는 동일시를 일으키게 됩니다. 그러나 소소영령하게 아는 자리는 대상이나 생각을 좇아가지 않고, 언제나 그것들이 일어나고 사라짐을 알 뿐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순수한 본성이며 참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참나며 본성이라는 것 또한 하나의 말에 불과합니다.



눈으로 꽃 한 송이를 볼 때 무슨 꽃이라느니, 어떤 색이라느니, 좋아한다느니, 다른 꽃보다 덜 아름답다느니, 꺾고 싶다느니 하는 그 모든 대상을 좇는 분별망상들을 일으키기 이전에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그것을 돌이켜 보게 될 때 우리는 참된 본성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회광반조라고 합니다.



눈으로 볼 때 보이는 대상의 빛깔과 모양에 사로잡히지 않고 보면 그저 보는 성품, 본성만 남게 됩니다. 귀로 소리를 들을 때도 그 소리의 뜻이나 해석에 가로막히지 않은 채 듣게 되면 그 듣는 놈을 알아차릴 수 있게 됩니다.



이렇게 설명하면 보통 사람들은 그 본성자리를 어떤 특별한 체험의 상태로 또 다른 상을 지어 헤아립니다. 그러나 이 자리는 특별히 체험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애써 찾아야 하는 것도 아닙니다. 죽비 소리가 ‘탁’하고 일어날 때 바로 그 소리를 듣는 것을 애써서 귀를 기울이거나, 특별한 노력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이처럼 언제나 드러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늘 쓰면서 함께하고 있는 것이지만, 그것이 본성인 줄 모를 뿐입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하지 마시고, 다만 이처럼 공부해 보시기 바랍니다. 무언가를 볼 때 생각과 개념을 덮씌우지 말고 있는 그대로 보고, 어떤 소리를 들을 때 해석 없이 그저 소리의 파동 그 자체로써 들어 보는 것입니다. 생각이 일어날 때는 그저 생각이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면 됩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렵다고 하겠지만, 사실 있는 그대로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쉽지, 우리가 지금까지 하듯이 있는 그대로를 해석하고 판단하고 비교 분석하고 사량분별해서 아는 것이야말로 더욱 어려운 것입니다. 그러니 쉽게 보라는 것입니다. 분별해서 보지 말고, 그저 쉽게, 있는 그대로 본다면 그것이 바로 본성을 바로 보는 것입니다.





글쓴이:법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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