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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곡 시사

운곡시사 전문 2

작성자오운 이봉재|작성시간14.05.23|조회수3,666 목록 댓글 0

書月谷名師卷

谷深山月更分明 永夜寥寥氣自淸

此是上人傳性處 塵沙世界致昇平

Ⅲ-090) 명봉월사(明峯月師)의 시권에 씀

달 바퀴가 바다 문 동쪽에 솟아오르니

천 길 높은 봉우리가 푸른 하늘에 우뚝하네.

이곳이 스님께서 깨달은 곳이니

시원하게 옛 가풍을 모두 깨뜨리셨네.

 

書明峯月師卷

氷輪湧出海門東 千仞高峯聳碧空

知有上人叅得了 豁然打破古家風

Ⅲ-091) 조암경사(照菴鏡師)의 시권에 씀

때 벗기고 빛을 닦아 티끌 하나 없으니

때때로 털고 닦은 이가 바로 이 사람일세.

얼굴 보면 두 눈썹이 있는 곳에

한현(漢現)과 호래(胡來)가 나날이 새롭네.

 

書照菴鏡師卷

刮垢磨光絶點塵 時時拂拭有斯人

看形剔起眉毛處 漢現胡來日日新

Ⅲ-092) 고암(杲巖)의 운(韻)을 빌려 또 씀 (스님이 창수 唱首임)

사자후(獅子吼)를 외쳐 마왕(魔王)의 궁전에 떨치니

마왕과 외도(外道)가 모습을 감추었네.

수없는 천룡(天龍)들이 함께 기뻐하니

청정한 여섯 신통을 갖추셨겠지.

 

借杲巖韻又書(師爲唱首)

作獅子吼振魔宮 魔外藏形指顧中

無數天龍共忻悅 必應淸淨六神通

Ⅲ-093) 요암영사(療菴瑛師)의 시권에 씀

스스로 값진 보배를 지니시고

언제나 갈고 닦으시네.

그 쓰임이 끝내 다함없으니

수많은 중생들을 다 이롭게 하네.

 

書療菴瑛師卷

自有珍無價 尋常琢復磨

終應用無盡 利物遍恒沙

Ⅲ-094) 유방(遊方) 가는 지희(志曦) 스님을 배웅함

서북에 또 동남에 뜻을 두고서

푸른 바랑 먹물 옷에 행전을 둘렀네.

강물 위를 갈대 줄기로 넘기도 하고

뜰 앞의 잣나무와 이야기도 나누시겠지.

둘이 아니면서도 둘이 없음을 늘 닦으셨으니

앞의 셋과 뒤의 셋을 묻지 마시게.

나도 언젠가 찾아가고 싶건만

어느 곳에 구름 암자를 정하실지 알 수가 없네.

 

送志曦上人遊方

志于西北又東南 靑布行縢緇布衫

江上葦莖將欲跨 庭前栢樹已曾叅

恒修不二兼無二 莫問前三與後三

我亦他年尋訪去 不知何處結雲菴

Ⅲ-095) 스스로 읊음

어젯밤에 비가 쓸쓸히 내리더니

오늘 새벽에 산 안개가 짙게 끼었네.

조용히 옷깃을 바로 하고 앉았더니

나도 모르게 긴 시가 읊어지네.

동쪽 울타리에 가을빛이 있어

국화꽃이 황금처럼 찬란하구나.

국화꽃 떨기를 즐기다 보니

맑은 향내가 흰 옷깃에 스며드네.

외로운 꽃이 차가운 서리도 깔보니

군자의 마음이 꿋꿋하구나.

어루만지며 두세 번 감탄하다 보니

아침볕이 먼 숲에 비쳐 오네.

 

自詠

昨夜雨蕭蕭 曉來山霧深

脩然正衣坐 不覺發長吟

東籬有秋色 菊蘂粲黃金

繞叢自怡悅 淸香熏素襟

孤芳傲霜冷 苦哉君子心

撫已再三嘆 朝陽輝遠林

Ⅲ-096) 형(泂)에게 악창(惡瘡)이 나다

부모는 오직 병을 걱정한다는 말이 진실하니

옛 성인도 제자들에게 그런 말씀을 하셨지.

비록 돌봐주진 못해도 편히 자기 어려우니

사사로운 뜻이 오히려 제오륜(第五倫) 같네.

 

泂發惡瘡

惟疾之憂語甚眞 聖人言此誨門人

雖無省視難安寢 私意還同第五倫

Ⅲ-097) 10월 초하루. 총지(摠持) 어머니가 작은 술자리를 베풀다

어제 신륵사를 떠나 멀리서 왔기에

기운이 나른해져 피곤을 견디기 어려웠지.

새로 걸른 술에다 산나물 볶음까지

나를 위로한다고 이 술잔을 권하네.

 

十月初一日。摠持母設小酌

昨日遠從神勒來 難堪困憊氣全衰

新篘栢酒山梁炙 專慰勞神勸此盃

Ⅲ-098) 이튿날 아침. 묘음(妙音)의 부모가 또 작은 술자리를 베풀다

이른 새벽에 부부가 서리를 밟고 오더니

향그런 술을 손수 데워 이 늙은이를 위로해 주네.

효도하고 공경하는 것이 하늘이 정하신 뜻이니

이불 껴안고 일어나 앉아 잔을 멈추지 않네.

 

明晨。妙音父母設小酌

淸晨夫婦踏霜來 手煖香醪慰老衰

孝敬正孚天定意 擁衾起坐不停杯

Ⅲ-099) 이날 빗속에 곡성(谷城)이 찾아오다

비를 무릅쓰고 찾아와 소나무 아래 문 두드리는데

만두가 합에 가득하고 술은 항아리에 가득하네.

취하고 취해 하늘과 땅이 넓어지니

얼굴에 벌써 붉은 빛 떠오른 줄 알겠네.

 

是日雨中。谷城來訪

冒雨來敲松下門 饅頭滿榼酒盈樽

酣酣兀兀乾坤豁 始覺天和已露痕

Ⅲ-100) 환희당(歡喜堂) 대로(大老)의 시에 차운함

Ⅲ-100-01)

우리 형이 푸른 산에서 날 찾아 오셨으니

걸음걸음 지팡이 바람에 구름이 날리네.

한 평생 친한 뜻이 너무나 고마워

만나는 곳마다 같이 웃고 이야기하네.

Ⅲ-100-02)

지난날 벼슬길은 한바탕 꿈이었지.

얼굴엔 먼지 가득하고 서울 거리에선 바람만 맞았지.

이제 늙어서 연하(烟霞)의 손님 되었으니

허수아비같이 덧없는 인생들을 우습게 보리라.

Ⅲ-100-03)

내 몸이 쇠약해져 초가집 속에 누워 있으니

세상 맛은 전혀 없어도 도(道)의 바람은 있네.

형께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지 않았더라면

그 누구와 함께 붓 휘두르며 시를 읊으랴.

 

次歡喜堂大老詩韻

吾兄來自碧山中 步步雲飛一錫風

多感平生親厚意 每相逢處笑談同

 

宦路前遊一夢中 塵埃滿面九街風

如今老作烟霞客 應笑浮生幻化同

 

我衰閑臥草廬中 世味全無有道風

不是大兄居近處 揮毫朗詠與誰同

Ⅲ-101) 중덕(中德) 벽봉((璧峰) 스님(별호 성규 性圭)의 시권에 씀

우러러보면 매우 높아 허공에 닿으니

갈고 닦지 않아도 저절로 영롱하네.

화엄(華嚴)의 바닷물에 환하게 담궈 냈으니

체(體)와 상(相)을 말하기 어렵고 쓰임도 끝이 없네.

 

題璧峯性圭中德卷

仰則彌高接太空 不因磨琢自玲瓏

瑩然浸得華嚴海 體相難言用莫窮

Ⅲ-102) 중덕(中德) 가능(可能) 스님이 시를 구함

단비(斷臂)와 용미(舂麋) 두 조옹(祖翁)께서

법등(法燈)을 서로 이어 종풍(宗風)을 퍼뜨렸으니,

각기 한 곳을 이어받아 명호(名號)를 삼고

세 마음을 갖추고자 성품이 공(空)함을 깨달았네.

푸른 바다는 다시 밝은 달 속에 해맑고

푸른 산은 흰 구름 속에 움직이지 않네.

이러한 경계를 사람마다 갖췄으니

모름지기 참 근원을 찾아 공력을 기울이세.

 

可能中德求詩

斷臂舂麋兩祖翁 法燈相纔播宗風

各承一處爲名號 欲備三心了性空

碧海更澄明月裏 靑山不動白雲中

如斯境界人皆具 須覓眞源要着功

Ⅲ-103) 생각나는 대로 읊음

오래 앉았노라니 해가 벌써 기울었는데

오가는 사람 없어 사립문이 적막하네.

물가 누각에 따오기 나는 글귀를 읊조리다가

비오는 마을에 소먹이는 그림을 한가롭게 구경하네.

소나무 차가운 시냇가에 한 해가 저물어

국화 시든 울타리에서 가을을 보내네.

늙어갈수록 느낌이 많고 병도 많으니

나가고 들어오는 것이 명(命)인 줄 알겠네.

 

卽事

坐久依然日已晡 柴扉寂寂往來無

淸吟水閣騖飛句 閑覽雨村牛牧圖

松冷澗邊驚歲暮 菊殘籬畔送秋徂

老來多感仍多病 信矣行藏命矣夫

Ⅲ-104) 조(趙) 봉선(奉善)이 짓고 계모임에서 함께 발원한 십영(十詠) 시권 뒤에 씀 (두 수)

Ⅲ-104-01)

그대들은 자세히 들으시게.

십영(十詠)은 불경을 추린 것일세.

젊은 시절도 보전하기 어려운데

세월이 어찌 날 위해 머물랴.

Ⅲ-104-02)

육진(六塵)이 망녕된 생각을 일으키고

삼독(三毒)이 참된 심령을 덮어 버리니,

양 잡는 도살장에 함께 들어가서도

아아! 취해서 깨어나질 못하네.

 

능엄소(楞嚴疏)에 이르기를, “마치 양이 도살장에 들어갈 때에 한 걸음 한 걸음 죽을 자리에 나아가는 것과도 같다”고 하였다.】

 

題趙奉善所述契內同發願十詠卷後(二首)

群公須諦聽 十詠摭諸經

少壯猶難保 居諸況不停

 

六塵撩妄想 三毒蔽眞靈

共入屠羊肆 嗚呼醉未醒

(楞嚴疏云。如羊入屠肆 步步趨死地)

Ⅲ-105) 또 짓다

나도 이제 십영시(十詠詩)를 보고

같이 보리(菩提)의 마음을 내려 하네.

지옥(地獄) 가는 길을 누가 열었던가

천당(天堂) 가는 다리도 스스로 만들었네.

나의 조작인 줄 이미 알았으니

모름지기 저 미혹을 버려야 하네.

안양(安養)이 어찌 분수가 아니랴

여러분께서 마땅히 힘쓰시게.

 

我今看十詠 同欲發菩提

地獄誰開路 天堂自作梯

旣能知我造 須要指他迷

安養豈非分 諸公當勉今

Ⅲ-106) 형(泂)의 시에 차운함 (네 수)

Ⅲ-106-01)

네게 어쩌다 액운이 거듭 닥치나.

평상 위에 또 평상을 얹는 듯 위태롭구나.

어느 하루 염려되지 않는 날이 없으니

천 오리(天莖) 귀밑 털에 서리(霜)가 더하네.

Ⅲ-106-02)

모나고 둥근 것이 본래 맞지 않으니

달팽이 껍질이 어찌 코끼리 평상을 본받으랴.

온갖 차별된 모양이 다 이러하니

서리(霜)를 업신여기는 푸른 소나무만 사랑스럽네.

Ⅲ-106-03)

세상일에 하나도 적당한 것이 없어

산 속 절간을 찾아가 선상(禪床)을 빌리려네.

지난날 더러운 티끌을 하나도 씻지 못한 채

누추한 골목에서 가을을 만나 또 서리(霜)를 밟네.

Ⅲ-106-04)

세상 업신여기는 희황씨(羲皇氏)야 어찌 감당하랴

다만 병이 많아서 평상을 떠나지 않을 뿐일세.

호연지기(浩然之氣)가 천지에 가득해

맑고 차가운 하룻밤 서리(霜)가 되려네.

 

次泂韻(四首)

汝厄重重甚不當 危如床上又安床

一秋無日無思慮 添得千莖鬂上霜

 

方圓本自不相當 蝸殼何能効象床

差別萬端皆此類 獨憐松翠巧凌霜

 

世事都無一適當 欲尋山寺借禪床

未湔舊染塵埃累 陋巷逢秋又踏霜

 

寄傲羲皇何敢當 只緣多病不離床

浩然壯氣充天地 疑作淸寒一夜霜

Ⅲ-107) 15일. 빗속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든 몸으로 먹고 살 길을 찾아보아도

찬거리 될 만한 게 하나도 없네.

아침 내내 궁색한 골목에 앉았노라니

꼬르륵 오장 육부에서 소리가 났네.

답답한 가슴을 견딜 수 없는데

겨울비는 왜 이리 지리하게 내리나.

갑자기 어떤 사람이 문을 두드리더니

술병과 찬그릇을 가지고 왔네.

화로에 마주앉아 한 잔 따르며

내 마음 기쁘게 만들어 주니,

성현의 가르침을 어겨 부끄러워라

배부르길 구하고 편안하길 구하다니.

술에 취해 저절로 흥겨워지자

탄환처럼 시 구절이 쏟아져 나오네.

읊다보니 해는 이미 기울었건만

처마 끝에 낙숫물 소리는 그치지 않네.

 

十五日雨中卽事

病夫謀口腹 無物可供湌

終朝坐窮巷 鍧然鳴肺肝

鬱鬱懷抱惡 冬雨何漫漫

忽有人扣戶 把壼幷少簞

擁爐開小酌 使我心欣歡

慙予違聖訓 求飽又求安

陶然乘逸興 吐句如彈丸

吟哦日已側 簷溜聲未殘

Ⅲ-108) 조(趙) 봉선(奉善)이 노래 여덟 절을 지어서 제목을 구하다

노래는 사람의 폐(肺)와 간(肝)을 그린 것이니

기쁨과 슬픔이 여러 가지 있네.

속마음을 읊은 여덟 절 노래 보고는

멍하니 어루만지며 두세 번 감탄했네.

 

趙奉善作八節歌。求題目

大抵歌詞寫肺肝 歡娛感慨有多端

今看八節陳情曲 撫已茫然三復歎

Ⅲ-109) 월암(越菴) 초(超) 스님의 시권에 쓰다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아

모든 소리와 빛을 초월하였네.

육처(六處)에 모두 그러해

이미 참된 소식을 깨달아 얻었네.

강에 달이 비추고 소나무에 바람 부는데

도(道)는 함이 없고 즐거움은 끝이 없으니,

이 암자의 주인이 누구던가

스님이 바로 선지식(善知識)일세.

 

書越菴超上人卷

眼不見耳不聞 超諸聲越諸色

於六處皆亦然 已領敢眞消息

江月照松風吹 道無爲樂無極

此菴中誰主人 是上人善知識

Ⅲ-110) 느낀 바가 있어 (이때 농민들의 토지를 빼앗으려는 무리들이 벌떼처럼 일어났다, 여덟 수)

Ⅲ-110-01)

나라의 명맥이 끊어져 가니 정치를 보살펴야 하고

인륜의 기강이 무너져 가니 교화를 펼쳐야 하건만,

임금의 문은 깊게 잠겨서 아홉 겹으로 막혔으니

아뢸 곳 없는 백성들이 저 푸른 하늘에 호소하네.

Ⅲ-110-02)

지초와 난초 밭에는 향내가 퍼지지 않고

아름다운 그늘에 가시덤불이 한창일세.

그 향내 물리치고 싸늘한 기운까지 더하니

태양 빛이 담 그늘을 비춰주지 못하네.

Ⅲ-110-03)

자리를 말 듯이 온 산천을 독차지하고

주머니를 뒤지듯이 노비까지 다 수색하네.

닭과 벌레를 얻고 잃음이 어느 때에야 다하려나

하늘 끝을 바라보니 어느새 석양일세.

Ⅲ-110-04)

의장(儀仗)의 말(馬)이 울지 않아 말(言)의 길이 막히고

울타리의 파리가 뜻을 얻으니 해괴한 일이 많네.

헌사(憲司)가 밝은 교화는 펴지 않고서

의관(衣冠)을 바꾸라고 날마다 독촉하네.

 

【이 무렵 의복제도를 바꾼다는 통첩이 자주 있었기 때문이다.】

Ⅲ-110-05)

쟁탈하는 바람이 일어나니 귀신의 지역인가

염치의 도를 잃었으니 사람 세상이 아닐세.

머리를 돌려 홀연히 옛 왕조 일을 생각하다가

멀리 창오산 바라보며 눈물이 얼굴에 가득해지네.

Ⅲ-110-06)

은하수가 가을되면서 한결 깨끗한데

고운 물결 밤 깊으면 더욱 맑아지네.

바라건대 하늘이 이 물을 인간 세상에 퍼부셔서

탐람하고 의롭지 못한 마음을 다 씻어 주소서.

Ⅲ-110-07)

사막(沙漠)의 건곤(乾坤)인지, 어찌 이리 적막한가.

금릉(金陵) 가는 길이 정말 아득하구나.

아침 저녁 머리 들고서 남북을 바라보건만

풍교(風敎)가 어느 때에야 이 지방에 불어오려나.

Ⅲ-110-08)

적송자(赤松子)를 따르려 해도 단사(丹砂)가 이뤄지지 않고

황벽(黃檗)을 찾으려 해도 그 도를 감당하기 어렵네.

도도히 흐르는 사방 바다에 발 디딜 곳도 없으니

다섯 자 병든 몸을 어디에 감추려나.

 

有感(時田民兼幷之徒蜂起, 八首)

國脉將頹當輔治 人綱欲廢要開張

君門深鎖九重隔 無告嗷嗷籲彼蒼

 

淸芬不播芝蘭圃 美蔭方深枳棘林

減却馨香添爽氣 大陽偏不照墻陰

 

奮占山川如卷席 窮搜奴婢似探囊

鷄虫得失何時了 注目天涯已夕陽

 

伏馬不鳴言路澁 樊蠅得意駭機多

憲司非欲宣明化 糾察衣冠日更加

(梁衣服改制之牒數故反之)

 

爭奪風興非鬼域 廉恭道喪不人寰

回頭忽起前朝念 遙望蒼梧淚滿顔

 

銀漢逢秋添晈潔 練波終夜更澄淸

願天挽向人間注 洗盡貪婪不義情

 

沙漠乾坤何寂寞 金陵道里政微茫

暮朝翹首望南北 風敎何時扇此方

 

欲訪赤松丹未就 擬尋黃檗道難當

滔滔四海無容足 五尺病軀何處藏

Ⅲ-111) 동짓날. 감회를 쓰다

지난해 동짓날에

감회 시를 지었지.

작은 창문 앞에서 펼쳐 읽으며

망연히 슬픈 마음을 달랬는데,

올해 동짓날엔

염려를 걷잡을 수 없네.

해마다 이 날을 지나건만

두 귀밑에는 온통 서리가 내렸고,

병까지 그만 깊어져

기력이 지난 해와 아주 달라졌네.

태평성대에 태어나 자랐고

늙어서도 태평성대를 만났건만,

조정이 황제 명령을 받들어

의관제도를 바꿔야 한다니,

높건 낮건, 귀하건 천하건

중하(中夏) 사람이지 동이(東夷)가 아닐세.

예법과 제도가 이미 이러한데

정치와 교화는 왜 베풀지 않나.

백성들 살림은 더욱 쓸쓸해져

밭갈기도 누에치기도 다 틀렸으니,

문에는 언제나 거적자리를 내려뜨리고

땅이라곤 송곳 세울 자리도 없네.

세금도 다 못 냈는데

가을마당에 벌써 남은 게 없어,

아무리 애쓴들 어디로 가며

헤매는 사정을 그 누가 걱정하랴.

이익을 다투는 무리들은

채찍과 몽둥이를 마구 휘두른다니,

어려서 배웠지만 쓸 모 없이 늙어

이러한 꼴을 보고 부질없이 탄식만 하네.

이제 양기(陽氣)가 생기는 날이 되었으니

찡그렸던 눈썹도 조금 펴지겠지.

군자도(君子道)가 곧 자라면

너희들도 할 일이 있으리라.

부디 농사 짓기에 힘써

나라의 터전을 굳게 하거라.

나는 비록 노쇠한 몸이지만

너희들 보면 즐거움이 넘치네.

이렇게 생각하면서도 나 혼자 우습네

백성 일을 알아야 할 자는 따로 있으니,

자기 몸도 돌보지 못하는 터에

남의 처지를 어찌 생각하나.

이 날을 보내는 게 참으로 아쉬우니

만물이 다 자연의 모습을 지녔네.

술잔 들고서 남산을 향해

님의 수명 끝 없기를 비노라니,

묵은 터가 다시 훤해지고

화기가 아침 볕에 떠오르네.

 

冬至日寓懷

去年冬至日 題作感懷詩

披向小窗讀 茫然撫已悲

今年冬至日 念慮不能持

年年過此日 兩鬢垂霜絲

蹉跎抱沈疾 氣力殊昔時

生長大平日 老値大平期

朝廷承帝命 改制冠服儀

尊卑幷貴賤 中夏非東夷

禮度旣如此 政刑何不施

民居轉蕭索 耕桑俱失宜

門戶常懸席 土田無立錐

未充貢賦額 浚盡無餘脂

勞勞不遑處 誰肯嘆流離

忍看征利徒 鞭朴及肌膚

幼學壯無用 對此空嗟咨

今遇一陽生 聊可以伸眉

君子道方長 爾生當有爲

勉爾穩耕鑿 以固我邦基

我雖衰也甚 看汝藥凞凞

念玆還自笑 民事非汝知

己身不自恤 餘復何思惟

是日足可惜 品彙含天姿

擧酒對南山 祝君壽無涯

桑墟更平遠 和氣浮朝曦

Ⅲ-112) 도령(都令) 원립(元立)이 술을 가지고 멀리 찾아와 고마워하다 (두 수)

Ⅲ-112-01)

온갖 시름이 술을 만나면 달아나니

술 들고 초가집 찾아와 준 그 마음 깊구려.

평소의 은혜도 늘 고마웠는데

이 추운 날 오시다니 더욱 고맙구려.

Ⅲ-112-02)

내 병은 이제 헤어날 수도 없어

신세가 마치 쑥 한 다발 같네.

얼음 눈 산길에 멀리 찾아오느라 애썼으니

그 은혜와 정이 태산보다도 무겁고 높네.

 

謝元都領立携酒遠訪(二首)

滿恨千愁遇酒逃 意深携到小蓬蒿

尋常尙感陶然惠 況此天寒價更高

 

我今衰病未能逃 身世還同一束蒿

氷雪山程勞遠訪 恩情重興泰山高

Ⅲ-113) 정(鄭) 예안(禮安)이 큰형 판서(判書)를 모시고 어머니를 뵈러 초계(草溪)로 돌아간다기에 배웅하다 (두 수)

Ⅲ-113-01)

날씨 추운데 먼 길 나그네 되었으니

늙으신 어머님을 뵙기 위해서일세.

색동옷 입고 어머니 즐겁게 해드릴 걸 생각하니

십분 봄빛이 천륜(天倫)을 비추리라.

Ⅲ-113-02)

나도 도촌(桃村)의 문하인(門下人)인데

늙어가며 교제 끊은 게 몹시 부끄럽네.

십 년 동안 고개 너머서 그리워하던 뜻을

동년(同年)인 정숙륜(鄭淑倫)과 이야기하네.

 

送鄭禮安陪大兄判書歸覲草溪(二首)

天寒遠路作行人 只要萱庭拜老親

遙想綵衣堂上喜 十分春色照天倫

 

我是桃村門下人 老來深愧絶交親

十年嶺北相思意 說與同年鄭淑倫

Ⅲ-114) 조위(趙瑋) 선생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하다

고맙게도 얼음 눈 부딪치며

산길을 밤중에 찾아오다니!

초 심지를 자르며 긴 시간을 보내고

술항아리를 여니 봄 기운이 따뜻하구나.

맑은 이야기에 바닷물이 출렁거리고

남 모르는 흥이 은하수를 움직이네.

두터운 뜻을 잊기 어려워

한 곡조 노래를 읊어 보았네.

 

謝趙先生瑋見訪

多君觸氷雪 山路夜相過

剪燭更籌永 開樽春氣和

淸談飜海水 逸興動星河

厚意誠難忽 吟成一曲歌

Ⅲ-115) 병 때문에 경신(庚申, 1380년)의 약속을 지키지 못함을 생원(生員) 김조(金祖)에게 알리고, 아울러 좌상(座上) 여러분께 드리다 (두 수)

Ⅲ-115-01)

겨울 추위가 날이 갈수록 더하니

병든 몸이 더욱 시큰거리네.

걸어갈 수도 타고 갈 수도 없어

멍하니 혼자서 탄식한다오.

 

因病未赴庚申之期。寄金生員祖。兼簡座上諸公 (二首)

冬寒連日甚 病骨益辛酸

步騎俱難得 茫然獨自歎

Ⅲ-116) 또 짓다

누구누구 모인 곳을 멀리서 생각하니

송장 같은 몸이 어찌 감히 참여하랴만,

술항아리 앞에는 우스개 소리가 많은 법이니

이야기와 웃음이 맘껏 즐거웠겠지.

 

遙想盍簪處 三尸豈敢干

樽前多戱謔 談笑盡淸歡

Ⅲ-117) 아이들에게 묵은 세배와 설상을 받고

아이들이 둘러앉아 술잔을 올리니

늙은이 마음 든든해지며 웃음꽃이 피네.

귀밑에 서릿발이 삼천장(三千丈)이지만

눈앞에 난초 같은 손자들 예닐곱이나 된다네.

이런 세상에 살면서 조상의 업을 어찌 빛내랴만

너희들은 마땅히 우리 가문을 빛내야지.

잊으려 해도 잊기 어려운 한이 있으니

너희들 어머니가 먼저 가고 나 홀로 남은 것일세.

 

兒女輩餽歲

兒女團圝列酒樽 老懷强壯笑談溫

鬂邊霜雪三千丈 眼底蘭蓀六七孫

世俗豈能光祖業 爾曺當以慶吾門

可忘恨處難忘恨 汝母先歸我獨存

Ⅲ-118) 섣달 그믐밤

Ⅲ-118-01)

해시(亥時)를 마지막으로 정묘년(1387)이 끝나고

자시(子時) 초부터는 무진년(1388) 봄일세.

북소리 그치지 않고 푸득거리 한창이니

온갖 사귀 물리치고 복된 경사가 몰려드소서.

Ⅲ-118-02)

등잔불이 다해 가니 밤이 얼마나 깊었나.

병든 가슴 무료해 아홉 번 일어나 한숨 쉬었네.

귀밑에 서리 늘어날까 걱정되어

자주 처마 끝으로 은하수를 바라보았네.

 

除夜

亥末已終丁卯臘 子初方啓戊辰春

鼓聲不絶鄕儺盛 驅逐精邪福慶臻

 

一燈垂燼夜如何 病肺無聊九起嗟

却恐霜絲添兩鬂 數從簷隙望星河

Ⅲ-119) 1388년(무진) 설날

나 어릴 적에 새해를 만나면

늘 선배들 따라 돌아다니길 좋아했지.

늙은 나이에 젊은 시절 즐거움을 생각하니

젊은 시절 기쁨이 늙은 시절 슬픔일세.

눈 덮인 물가 부들은 움이 트려 하고

바람에 흔들리는 시냇가 버들은 줄이 늘어지는데,

해를 보내고 맞으며 유달리 생각이 많아

억지로 붓 적셔서 이 시를 쓰네.

 

戊辰元日

我昔爲兒遇歲時 每隨前輩競奔馳

衰年紀憶芳年樂 少日歡娛老日悲

帶雪渚蒲芽欲動 颺風溪柳線初垂

履新思舊偏多感 强自濡毫寫此詩

Ⅲ-120) 7일. 유변(劉辨)의 방문을 받고

작은 서재에 인일(人日)인데도 발자국 소리가 끊어져

눈 덮인 성긴 울타리에 들바람 소리만 들려왔었지.

흰 옷 입은 이가 술 메고 찾아와 문 두드리니

쓸쓸하던 마음이 다 풀어졌네.

 

七日。劉辨見訪

小齋人日絶跫音 殘雪疎籬動野吟

擔酒白衣來扣戶 豁然消釋寂寥心

Ⅲ-121) 명(明)․헌(憲)․식(湜) 세 사람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하다

개 한 마리가 문 앞에서 짖더니

세 사람이 고개를 넘어 왔네.

풀 덮인 길이라 찾아오기 힘든데

저마다 술병까지 가져 왔네.

좋은 술에 안주까지 갖췄으니

시름 찬 눈썹 병든 눈이 활짝 열렸네.

취한 끝에 지난해를 생각하면서

눈을 마주하고 깊은 술잔을 따르네.

【지난해 봄눈이 내렸을 때에도 세 사람이 함께 찾아왔으므로 이렇게 말했다.】

 

謝明․憲․湜三人見訪

一犬當門吠 三人過嶺來

區區尋草徑 各各把山壘

旨酒嘉肴雜 愁眉病眼開

醉餘思去歲 對雪倒深盃

(去年春雪。三人同訪故云)

Ⅲ-122) 고달사(高達寺) 이의징(李義澄) 대선사(大禪師)에게 부침

머리를 돌려 멀리 혜목산(慧目山)을 바라보니

흰 구름 사이에 한 덩어리 푸른빛이 있네.

그 가운데 천태(天台) 늙은이가 계셔서

백세의 한가로움을 굳건히 차지하셨네.

 

奉寄高達寺李大禪師(義澄)

回首遙看慧目山 一堆蒼翠白雲間

就中知有天台老 籯得强剛百歲閑

Ⅲ-123) 육도(六道) 도통사(都統使) 최영(최상 崔相)이 꿈에 명(明) 나라 황제를 알현하자, 황제께서 각색 의복을 하사하시면서 운자(韻字)를 불러 시를 지으라고 명하시니 상국(相國)이 그 운에 따라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바쳤다고 한다. 내가 그 소식을 듣고 삼가 차운하여 절구 두 수를 지어 비망(備忘)으로 삼으려 한다.

◎ 최영

색색 비단옷을 제 어깨에 걸치니

은혜에 감격하고 흥에 겨워 쓰러질 듯하옵니다.

백천 만세에 백성의 어버이 되셨으니

온 천하 백성 집에 자자손손 전하리다.

Ⅲ-123-01)

조정에 뛰어나 어깨 견줄 이 없으시니

붉은 뺨에 빛이 떠올라 이마까지 비추네.

한 몸의 충담(忠膽)이 바다같이 넓고 장해

천자의 은혜 빛이 꿈속까지 전했네.

Ⅲ-123-02)

칼은 허리에 활은 어깨에

한 나라 운명을 혼자 짊어지셨네.

하룻밤 꿈이 천년 왕업에 응했으니

지극한 덕과 훌륭한 공을 사필(史筆)로 전하리라.

 

六道都統使崔相夢謁大明皇帝。皇帝以各色衣服賜之。仍呼韻命製。相國隨韻奏呈云

色色羅衫着我肩 感恩狂興醉如顚

百千萬載爲民父 四海民巢子子傳

聞之奉次韻。作二絶以備忘云。

特立朝端絶幷肩 光浮紅頰照華顚

一身忠膽洪河壯 天子恩光夢褢傳

 

釰在腰間弓在肩 邦家陧机卽扶顚

一宵夢應千年業 至德膚功史筆傳

Ⅲ-124) 상국(相國) 조반(趙胖)을 찬양함 (이때 상국이 의롭게 강포한 무리들을 제압하다가 그들에게 욕을 당했는데, 곧 임금의 은혜를 입어 화를 면했다.)

일찍이 천하를 맑게 할 뜻이 있어

흉악하고 간사한 자들을 소탕하려 했었지.

충성은 해와 달 위에 빛나니

기운이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하네.

처음엔 분을 내며 전갈 꼬리(蠆尾)에 부딪치다가

다시 은혜를 느끼며 용의 얼굴(龍顔)에 절하였네.

사신(史臣)의 삼천 붓이 다 닳아 없어지리니

나라 보전한 그 공이 태산보다도 무겁네.

 

贊趙相國胖 (時相國以義制强暴之徒。被其所辱。尋蒙上恩免禍)

旱有澄淸天下志 慨然將欲掃凶姦

忠懸兎走鳥飛上 氣塞鳶飛魚躍間

發憤初經觸蠆尾 感恩時復拜龍顔

史臣應禿三千筆 保國功名重泰山

Ⅲ-125) 삼가 들으니 주상(主上) 전하께서 (백성들의) 토지를 겸병(兼幷)하는 포학한 무리들을 정의롭게 다 소탕하여 사방이 평안해졌다고 하기에 시를 지어 하례함

Ⅲ-125-01)

어진 정치 베풀며 호령이 새로워지니

영단(英斷)을 내려 천신(天神)을 움직이시네.

날뛰던 무리들을 하루 아침에 다 소탕하니

발가벗은 백성이 하나도 없어졌네.

늠름한 위엄이 강포한 자들을 놀라게 하고

화목한 즐거움이 곤궁한 자들에게 흘러넘쳐,

높은 기상과 빛나는 문장을 우러러보고

나라의 터전이 억만년 봄인 줄 비로소 깨닫겠네.

Ⅲ-125-02)

순(舜) 임금이 사흉(四兇)을 제거한 것처럼

사방 백성들이 함께 즐거워했네.

온 나라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히 하고

힘 자랑하던 시랑(豺狼)들은 벌써 자취를 감추었네.

물결 고요하고 바람 잠잠해 바다 빛을 너그럽게 하고

구름 걷히고 해가 떠올라 하늘 얼굴도 숙연해졌네.

이제부터 성한 덕이 멀리까지 흘러가

화하(華夏)와 만이(蠻夷)가 다 함께 복종하리.

Ⅲ-125-03)

벼슬 바다에 뜨고 가라앉는 것도 반드시 원인이 있으니

밝고 밝은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네.

가련하구나! 간사한 권력배와 토호의 무리들

망령되게도 충량(忠良)한 사직의 신하라고 자처하다니.

영화로운 이름 얻고도 목숨을 보전하기 어려우니

많은 이익 탐내다가 자기 몸을 잊었네.

논과 밭이 바로 집을 망치는 화근이니

남의 땅을 빼앗자마자 사람을 빠뜨리네.

Ⅲ-125-04)

하늘이 이 백성을 마음대로 살게 하려면

간사하고 흉악한 무리들을 모두 처형해야 하리.

예전엔 노략질하는 구름 속의 새매였지만

지금은 물 속에 잠겨 헤엄치는 고기를 부러워하겠지.

하루 아침에 심신이 취해 어리어리하니

백년의 영화와 부귀가 한낱 꿈일세.

헐뜯고 기리는 것이 임천(林泉)에는 이르지 않으니

두어 자 낚싯대와 한 상자의 책 뿐일세.

Ⅲ-125-05)

돌고 도는 것이 하늘의 운수인데

이 이치를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네.

상제(上帝)께서 형감(衡鑒)을 여시고

우리 임금께선 기강을 펼치시니,

강퍅한 무리들은 모두 죄를 받고

백성들은 함께 빛을 보네.

다른 나라까지 위풍이 떨치고

동방에 교화의 날이 길어지니,

가시 숲에는 묵은 독기가 걷히고

난초 밭에는 아름다운 향기 퍼지네.

포악한 자를 막으니 나라의 운이 영원하고

쓰러진 곳을 바로잡으니 도업이 번창하네.

아아! 늙고 병든 이 몸도

강개한 마음으로 충성되기를 사모하니,

태평곡을 한가롭게 부르며

장수 비는 술잔을 임금께 올리네.

 

伏聞主上殿下奮義掃盡。兼幷暴虐之徒。四方晏然。詩以賀之

奮義施仁號令新 慨然英斷動天神

一朝淸掃白拈賊 四海渾無赤脫民

凜澟威加强暴類 凞凞樂洽困窮倫

仰看星斗文章煥 方覺皇基億萬春

 

正似虞時去四兇 四方咸樂變時雍

率濱民俗應安業 當道豺狼已絶蹤

浪靜風恬寬海色 雲收日杲肅天容

自今盛德流諸遠 華夏蠻夷盡服從

 

宦海浮沈必有因 明明頭上在蒼旻

可憐比儻權豪輩 妄謂忠良社稷臣

旣得榮名難保命 專征厚利頓忘身

土田眞是侯家崇 纔得兼幷卽陷人

 

天使斯民得意居 姦凶儻輩盡登車

昔爲標掠雲間鶻 今羨潛游水底魚

一朝心神醉兀兀 百年榮貴夢遽遽

毁譽不到林泉下 數尺漁竿一笈書

 

循環是天運 此理固難量

上帝開衝鑒 吾王布紀綱

豪强皆伏罪 黎庶共瞻光

異域威風振 東方化日長

棘林收瘴毒 蘭圃播馨香

禁暴謀猷遠 扶顚道業昌

嗚呼抱衰疾 慷慨慕忠良

閑放太平曲 祝君擎壽觴

Ⅲ-126) 상국(相國) 이유(李宥)에게 삼가 부침

서로 헤어진 지 벌써 구 년이 지났건만

눈 속엔 언제나 옛 모습이 남아 있네.

금부처(金佛)는 아직도 영수사(靈樹寺)에 새롭고

은두꺼비(銀蟾)는 월송정(月松亭)에 그대로 있네.

산 얼굴도 언제나 보는 그대로인데

세상일만은 모두 예전에 듣던 것과 달라,

이 못난 들판 늙은이는 별다른 생각 없이

백세 넘도록 강녕하시길 빌 뿐이라오.

 

奉寄李相國(宥)

相違已變九年星 眼裡常存古典刑

金佛尙新靈樹寺 銀蟾依舊月松亭

山容只是常時見 世事俱非昔日聽

甲末野人無別念 但祈百歲保康寧

Ⅲ-127) 봄날 우연히 씀 (두 수)

Ⅲ-127-01)

세월은 빨라 어느새 봄인데

세상일은 끝이 없어 모래처럼 많구나.

백년 한 평생이 그 얼마인가

사철 가운데 삼월이 가장 좋구나.

서울에 문물(文物)이 흥성하다는 말을 반갑게 듣고

마을 거리를 향해 술집을 물어보네.

태평성대에 같이 즐거운 날을 만났으니

이 아름다운 철에 꽃구경을 해야겠네.

Ⅲ-127-02)

병든 나그네가 흰 귀밑 털을 견디기 어려우니

출세를 꾀하는 술업(術業)은 찐 모래 같네.

늙어 가는 마음이 이토록 쓸쓸하니

젊은 시절 풍류를 어찌 다시 자랑하랴.

실 모자와 베 적삼이 속된 모습이지만

차 끓이는 화로와 불경 책은 스님의 집일세.

고맙게도 봄빛은 사사로운 뜻이 없어

산에는 살구꽃이고 숲에는 복사꽃일세.

 

春日偶書(二首)

光陰焂忽又春華 世事無涯數似沙

百歲一生能幾許 四時三月最堪誇

喜聞京國興文物 且向鄕閭問酒家

幸値太平同樂日 要當佳節賞群花

 

病客難勝鬂上華 謀身術業似蒸沙

老衰情興何微薄 少壯風流豈復誇

紗帽布衫雖俗貌 茗爐經卷是僧家

感他靑帝無私意 山杏林桃又欲花

Ⅲ-128) 내가 2월 하순에 병을 얻어 3월 그믐에 무너져 가는 무진사(無盡寺)에 옮겨와서 여름 두 달을 지냈으니, 날짜는 5월 24일이고 철은 유월이다. 이제 거처를 옮기면서 시 한 수를 쓴다.

이월 봄바람에 병상에 누워

여름 늦도록 아직 강건해지지 않았네.

눈 어둡고 귀 멍멍해 미친 개 같고

다리 지치고 정신 피곤해 절름발이 염소 같네.

산 속 낡은 암자에서 소서(小暑)를 지내니

창 서쪽 늙은 나무가 서늘한 바람을 보내 주네.

더위 피하는 소나무 그늘 아래

누가 술 한 항아리를 마련해 주려나.

 

予二月下旬得疾。三月晦。移接無盡廢寺。經夏二朔。五月二十四日。乃六月節也。將欲遷居。偶書一詩

二月春風臥蟻床 夏闌猶未得彊康

眼昏耳聵同狂犬 脚困神疲似跛牂

山畔廢菴經小署 窓西老樹送微凉

却思逃署松陰下 誰辦花(玆+瓦)白雪漿

Ⅲ-129) 거처를 옮기면서 (두 수)

Ⅲ-129-01)

그 누가 병을 안고 옮겨 다니게 하나.

도(道)의 뿌리가 미약해서 세상 정에 끌리기 때문일세.

소나무 그늘 아래 풀 깔고 앉아

돌돌(咄咄) 두 글자를 공중에 쓰고는 하루 종일 졸았네.

Ⅲ-129-02)

말을 알고 호연지기(浩然之氣)를 배우려 해도

근심과 질병에 얽매여 견딜 수 없네.

늙어 가며 세상맛이라곤 다 없어졌으니

길고 짧거나 잘 살고 못 사는 걸 낮잠에 부치리.

 

遷居(二首)

抱疾遷居誰使然 道根微劣世情牽

無聊藉草松陰下 咄咄書空盡日眼

 

欲學知言養浩然 不堪憂病共纏牽

老來世味消磨盡 長短榮枯付一眼

Ⅲ-130) 6월 초이틀. 생각나는 대로 읊음

가뭄에 더위까지 겹쳐

온 천지가 불타는 것 같네.

유심히 녹수곡(綠水曲)을 타다가

이마를 찌푸리고 붉은 구름을 바라보네.

짹짹 지저귀는 산새 소리를

병든 나그네 하염없이 듣고 있는데,

이웃 스님이 찾아와 술잔 권하니

붓을 잡고 은근한 마음을 고마워하네.

 

六月初二日卽事

挾旱炎威盛 乾坤正似焚

有心彈綠水 蹙頞望彤雲

磔磔幽禽噪 悠悠病客聞

隣僧來把酒 援筆謝殷勤

Ⅲ-131) 안(安) 도령(都令)의안정(安鼎)이 벼 섬을 보내 왔다

병든 몸이 어리석고 둔해 마른 나무토막 같은데

움막이라도 편안코 즐거우니 자랑할 만하네.

바구니 밥이 안회(顔回)의 골목보다 나으니

시루에 먼지 낀들 범단(范丹)의 집을 부러워하랴.

지난날 은혜를 이미 많이 받았는데

오늘의 이 은혜는 갑절이나 더하니,

내 생애를 누가 고단하다고 말하랴

마음이 배부르니 거짓없이 지낸다오.

 

安都領兄鼎惠稻石

病軀癡鈍類枯槎 安樂窩居只可誇

簞食有餘顔子巷 甑塵何愧范丹家

在前惠澤連連下 况此恩光倍倍加

誰道吾生多齟齬 飽飡方寸正無邪

Ⅲ-132) 새벽에 일어나

새벽 기운이 좀 서늘하고 산 안개가 짙은데

구슬 같은 이슬이 나뭇잎 끝에서 솔숲까지 이어졌네.

밤비가 앞산 기슭을 지나갔나 했더니

갑자기 아침 햇살이 북쪽 봉우리를 비추네.

바깥 나그네가 어찌 이 초가집까지 찾아오랴

들새가 거문고 소리를 알아듣는구나.

아름다운 구절을 찾아 아름다운 경치를 갚으려 했건만

병든 뒤의 시정(詩情)을 찾을 수 없네.

 

曉起

曉氣微凉山霧深 葉端珠露綴松林

卽疑夜雨樓前麓 忽見朝陽照北岑

外客何曾過草幕 野禽能解奏瑤琴

欲搜佳句酬佳景 病後詩情杳莫尋

Ⅲ-133) 병중에 들은 대로 기록함

병든 사내는 즐거움이 적으니

풀이나 나무같이 썩어 가는 몸일세.

봄부터 여름이 끝날 때까지

끙끙 앓으면서 외로움을 지켜왔네.

요즘 들으니 조정에서 명령을 내려

연호를 없애고 의복도 고쳤다더니,

장정(壯丁) 숫자대로 군사를 다 뽑아

위아래가 모두 바쁘게 뛰어달리며,

장차 십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려 한다네.

이제 요해(遼海)의 길을 건너면

씩씩한 기운으로 깃발을 날리고,

무서운 위엄이 중국(中原)에 떨쳐

감히 두려워 복종치 않는 자가 없겠지.

응당 개선하는 날이 이르리니

사방 오랑캐(四夷)가 다 귀속되고,

성스런 임금(聖主)께서 무궁한 수명 누리시며

주나라 무왕(周武)의 발자취를 이어 밟으시리라.

내 비록 늙고 병들었지만

함께 태평곡(太平曲)을 부르려 했는데,

어이 압록강을 건너지 않고

갑자기 말고삐를 조국으로 돌리나.

서도(西都)에 계시던 임금님 수레도

어이 그리 바쁘게 돌아오시나.

안타깝구나! 우리 도통공(都統公)이시여!

홀로 서서 원망을 듣게 되었네.

기둥과 주춧돌이 이미 기울었으니

크나큰 집을 그 누가 지탱하랴.

처음과 끝이 한결 같지 않으니

부끄러워 볼 면목도 없네.

머리 위에 푸른 하늘이 있건만

화(禍)와 복(福)을 제 어찌 알랴.

 

病中記聞

病夫少歡趣 衰朽同草水

自春至夏末 呻吟守幽獨

近聞有朝旨 除年號改服

抽兵盡丁數 上下事馳逐

貔貅十餘萬 欲渡鴨江綠

方期遼海路 壯氣浮旗纛

虎威振中原 誰敢不畏伏

應當凱旋日 四夷皆附屬

聖主壽無疆 繼踐周武躅

我雖老且病 與唱太平曲

乃何不渡江 奮然回轡速

翠華在西都 反駕何跼促

可憐都統公 獨立招怨讟

柱石旣傾危 將何支厦屋

終始不如一 靦然無面目

頭上有蒼蒼 焉知禍與福

Ⅲ-134) 엎드려 들으니, 주상(主上) 전하께서 강화(江華)로 옮기고 원자(元子)께서 즉위하셨다기에 감회를 읊음 (두 수)

Ⅲ-134-01)

성(聖)과 현(賢) 서로 만나 교대하는 것도 알맞은 때가 있으니

천운이 돌고 도는 것을 이제야 알겠네.

초야에 묻힌 백성이라고 어찌 나라 걱정이 없으랴

더욱 충성을 다해서 나라의 안위(安危)를 염려한다네.

Ⅲ-134-02)

새 임금이 즉위하고 옛 임금은 옮기시니

쓸쓸한 바다 고을에 바람과 연기뿐일세.

하늘 문 바른 길을 그 누가 열고 닫으랴.

밝고 밝은 거울이 눈앞에 있는 것을 보아야겠네.

 

伏聞。主上殿下遷于江華。元子卽位。有感(二首)

聖賢相遇適當時 天運循環自此知

畎畝豈無憂國意 更殫忠懇念安危.

新主臨朝舊主遷 蕭條海郡但風烟

天關正路誰開閉 要見明明鑑在前

Ⅲ-135) 느낌

흉포한 자들을 소탕하자 정치가 새로워져

해외까지 위엄 떨치니 한창 봄날일세.

온 나라 군사 일으켜 싸움터로 몰고 나가

성 쌓고 곡식 옮기며 인민들을 동원했으니,

어찌 그 수고가 끝내 무익하랴

기만당할 걸 두려워하지만 반드시 이웃 있으리라.

숲 속에선 세상 이야기할 수 없으니

하루 종일 산 바라보며 입을 다물고 있네.

 

感事

掃除兇暴政惟新 海外聲華白日春

擧國興兵驅士卒 築城移粟動人民

豈徒辛苦終無益 還恐欺謾必有隣

林下不堪談世事 對山終日莫搖唇

Ⅲ-136) 7월 7일

삼베옷으로 가을 맞기가 정말 겁나니

병든 뼈는 쓰라리고 머리는 희어졌네.

겨울 석 달 동안은 내내 등불에 지치고

십 년 동안 숲과 샘에서 맑고 그윽하게 살았건만,

천년 학(千年鶴)은 아직도 돌아오지 않고

만리 갈매기(萬里䲭)도 길들이기 어렵네.

직녀를 향해 재주를 빌리려 하지만

내 마음 거리낌없으니 다시 무얼 구하랴.

 

七月七日

麻衣正㥘又逢秋 病骨酸辛已白頭

燈火三冬嘗困勉 林泉十載飽淸幽

悠悠不返千年鶴 浩浩難馴萬里䲭

欲向天孫乞新巧 寸心無累更何求

Ⅲ-137)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든 뒤라서 생각마저 아득하니

유유한 내 신세가 정말 가엽구나.

붕새와 메추리 노니는 것도 다 분수가 있으니

용과 뱀의 회합이 어찌 인연 없으랴.

시내와 산의 나무들은 참으로 그림 같고

눈과 달, 바람과 꽃은 돈에 팔리지 않네.

게으른 내가 이 취미를 얻으니 참으로 기뻐

이 소식을 가벼이 전하지 말게나.

 

卽事

病餘情思更茫然 身世悠悠儘可憐

鵬鷃逍遙皆有分 龍蛇會合豈無綠

溪山樹木眞如畵 雪月風花不着錢

政喜疎慵還得趣 箇中消息莫輕傳

Ⅲ-138) 10일. 여러 서생들의 방문함 (세 수)

Ⅲ-138-01)

푸성귀 과일에다 맛있는 안주와 술

만두 속에는 삶은 돼지고기까지,

병 뒤의 입과 배를 보탤 만하니

깊은 잔을 사양치 않고 맘껏 마시네.

Ⅲ-138-02)

자리에 누워 앓은 지 넉 달이 넘었건만

외진 곳의 내 집을 그 누가 찾아 왔으랴.

먼 길 마다 않고 찾아와 위로하니

그대들 성의가 고맙고 또 고마워라.

Ⅲ-138-03)

소나무 그늘이 차츰 옮겨지고 해는 서남쪽으로 기우니

맑은 이야기 높은 웃음소리에 반쯤 취했네.

정자 위의 저녁 바람이 짧은 모자에 불어오니

분에 넘치는 맑은 흥을 달래기 어렵네.

 

十日。諸生來訪(三首)

菜果嘉肴雜酒盆 饅頭褢面褢蒸豚

病餘口腹堪爲養 不讓深盃盡意呑

 

臥榻呻吟四朔餘 地偏誰復訪吾盧

不辭遠路尋來慰 多感諸生意不踈

 

松陰漸轉日西南 談笑淸高倚半酣

亭上晩凉生短帽 十分淸興定難戡

Ⅲ-139) 산 속의 정자(山亭)

나 혼자 산 속 정자에 날마다 오르는 것은

서늘한 바람 더위를 식혀 주는 게 좋아서라네

늙은이 적막한 회포를 무엇으로 달래랴

쓸쓸한 귀밑 털을 차츰 걷잡을 수 없네.

물 건너 먼 봉우리가 점점이 푸르고

연기 속 높은 나무는 층층이 푸른데,

멍하니 앉았노라면 돌아갈 것도 잊어

소나무 가지엔 달이 뜨고 잎에는 이슬 엉기네.

 

山亭

獨向山亭日日登 爲憐凉吹掃煩蒸

老懷寂寞殊無賴 衰鬂蕭疎漸不勝

隔水遠峯靑點點 帶烟喬木綠層層

忘機靜坐仍忘返 月上松梢葉露凝

Ⅲ-140) 계모임 여러분의 방문을 받고 고마워 함 (두 수)

Ⅲ-140-01)

몇 년 사이에 온갖 병이

이 작은 몸에 모여드니,

강장(强壯)한 이가 몇 사람 있으랴만

나같이 쇠약한 자는 없으리라.

좋은 벗들이 안부만 물어도

이 늙은이 끝없이 기쁜데,

친하게 사귀자는 뜻이 너무 진중해

시골길에 술병까지 가져 오셨네.

Ⅲ-140-02)

구름이 서산에 기운 해를 보내고

바람이 반쯤 지난 가을을 재촉하는데,

항아리마다 맛 좋은 술이 가득하고

식탁마다 진수성찬이 차려졌네.

실컷 마시고 맘껏 취하세

좋은 날은 물 따라 흘러가 버린다네.

흥에 겨워 초연히 앉았노라니

마음이 마치 물에 뜬 빈 배 같네.

 

謝契內諸公見訪(二首)

年來百般病 叢集一微軀

强壯幾人在 衰遲如我無

良朋問辛苦 老叟極歡娛

珎重交親意 村程各佩壺

 

雲送將西日 風催欲半秋

樽樽盈美酒 案案列珎羞

痛飮須泥醉 良辰逐水流

飄然乘逸興 心若泛虛舟

Ⅲ-141) 또 두 수를 지어 계장(契長) 원립(元立)에게 보임

Ⅲ-141-01)

오늘 저녁이 어떤 저녁인지

이 병든 사내도 호기(豪氣)가 더하네.

아름다운 손님들이 세속 사람 아닌데다

고요하기는 마치 산 속 스님의 집 같구나.

Ⅲ-141-02)

정자 앞 잣나무에는 옥 이슬이 맺히고

언덕 위 등 넝쿨에는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데,

가난한 집이라 촛불도 없으니

달 떠오르길 기다려 등불 삼으세.

 

又賦二首。示元契長立

今夕定何夕 病夫豪氣增

佳賓非世俗 靜者有山僧

 

玉露棲亭栢 金風動岸藤

貧居無燭火 須待月爲燈

Ⅲ-142) 또 짓다

올 봄엔 병무(兵務)가 급했으니

술자리 같이할 줄이야 어찌 생각했으랴.

그대가 한가한 손님이 되어

나를 취하게 만들어 주니 고맙군 그래.

풍정은 아직도 소년 시절인데

흰 머리털이 가을 하늘을 비추니,

세상에 관심 가졌던 일들이

하나도 이곳엔 찾아오질 않네.

 

今春兵務急 豈意酒樽同

感子爲閑客 令吾作醉翁

風情敵年少 雪髮照秋空

世上關心事 一無來此中

Ⅲ-143) 가을 집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음

외로이 살면서 무엇을 걱정하랴만

가을이 되자 더욱 쓸쓸해지네.

기러기 너머 개인 빛이 먼데

귀뚜라미 옆에 밤 꿈이 길구나.

시냇가 소나무는 푸른 빛을 띠고

울타리 국화는 누런 빛을 내니,

여기서 맑은 절조를 가다듬고

맑은 향내도 이웃할 수 있네.

 

秋居卽事

幽居何悄悄 秋思轉悲凉

雁外晴光遠 蛩邊夜夢長

澗松含晩翠 籬菊吐新黃

對此礪淸操 馨香可比方

Ⅲ-144) 도경사(道境寺)에 가서 당두(堂頭)의 시에 차운함

그림같이 좋은 산이 가을을 뽐내는데

선옹(禪翁)과 함께 와서 세상 밖에 노니네.

도경(道境)과 도인(道人)이 다 도가 있으니

함께 머물면서 함께 기뻐하네.

 

遊道境寺。次堂頭韻

好山如畵正矜秋 來伴禪翁物外遊

道境道人俱有道 得堪留處喜相留

Ⅲ-145) 총림(叢林)으로 가는 천태(天台) 달의(達義) 스님을 배웅하다

거룩하구나! 우리 천태 선자는

지혜있는 자의 행(行)을 행하여,

마음은 시냇물 따라 맑고

몸은 고개 구름같이 가볍네.

보내는 정이야 끝이 없지만

돌아올 때엔 눈 더욱 밝아지겠지.

총림이 응당 무성하겠지만

한 가지 영화를 더 얻게 되겠군.

 

送天台達義禪者赴叢林

偉我天台士 能行智者行

心隨溪水淨 身與嶺雲輕

此去情無極 重來眼更明

叢林應茂盛 添得一枝榮

Ⅲ-146) 지난번 변암(弁巖) 남쪽 봉우리 아래 새로 초가집 한 간을 지었다. 지형이 가파르고 외진데다가 집 모양까지 아름답지 못하고, 앞뒤와 오가는 것이 다 마땅치 않은데다 몹시 누추하고 옹졸하였다. 그 주인은 몸가짐이 도에 어긋나고 뜻을 세운 것이 세상과 맞지 않았으며, 또 모든 처사가 세상 물정을 모른 데다 거처마저 썰렁하였으니, 그 누추하고 옹졸함이 더욱 심했다. 이 집의 누추하고 옹졸함이 주인의 누추하고 옹졸함과 들어맞았으므로, 집 이름을 누졸재(陋拙齋)라고 하였다. 이에 장구(長句) 여섯 수를 지어 스스로 읊어 본다.

Ⅲ-146-01)

북으로 깊은 시내를 마주보며 초가집을 세우고

내 여생을 이곳에서 보내려 하네.

처세하는 지모(智謀)도 옹졸하거니와

수신(修身)하는 사업도 좋은 게 없어 부끄러워라.

창 열면 우연히 푸른 소나무와 마주하고

땅 쓸고 사르면 백출(白朮) 향기가 풍기네.

이 경계의 이 사람이 향배(向背)를 어겼으니

길가는 사람도 아마 방향 모른다고 비웃겠지.

Ⅲ-146-02)

서리 뒤에 산초는 푸른 빛이 짙어가니

한 그루 전나무와 두어 그루 소나무일세.

천년을 겪은 그대들의 쓸쓸한 지조가

십 년 늙어 가는 내 얼굴을 친구해 주니 고마워라.

멀리선 마을의 피리 소리가 들려오고

가까이선 이웃 절의 아침 저녁 종소리가 들려와,

이 사이에서 띠를 벨 생각이 간절하니

일없는 사람에게 소식 전하지 마시게.

Ⅲ-146-03)

도(道) 있는 나라에 항상 사는 것이 기뻐서

늙은 몸을 끌고 밝은 창에 기대어,

가슴 헤치고 날마다 책을 읽거나

때로는 술항아리 마주하고 번민을 달래네.

조각조각 일어나는 골짜기 구름을 누워 바라보고

쌍쌍이 우는 산새 소리를 앉아서 듣노라니,

세상 정과 티끌 일들은 다 잊었지만

오직 시마(詩魔)만은 아직도 항복하지 않네.

Ⅲ-146-04)

자갈밭 초가집에 광문(廣文)이 살았건만

누추하고 옹졸함이 어찌 운곡(耘谷)의 오두막 같으랴.

그래도 몸은 들여놓으니 마음이 만족하고

지혜가 넘치지 못하니 어찌 세상을 업신여기랴.

시냇가 바람과 달이 어찌 정을 그치게 하랴

십리의 구름과 연기도 그림을 그릴 수 없네.

길이 막히고 땅이 외져 늙고 병든 이에게 알맞건만

찾는 친구 드물어 마음 서운하네.

Ⅲ-146-05)

세상 어디건 한가한 몸 붙여 살기는 무방하니

원래 하늘과 땅 사이의 한 산민(散民)이라,

초라한 초가집이 산기슭에 의지하고

쓸쓸한 옛 절을 이웃 삼아 지내네.

바위틈에 우물 파서 늘 갈증을 풀고

산나물 뜯어다가 가난을 달래네.

백년의 영고성쇠가 눈 깜짝할 사이이니

고금에 죽고 산 사람을 세어 보시게.

Ⅲ-146-06)

붉고 푸른 천 봉우리 속에 자취를 붙였으니

한 평생 드나듦이 스님같이 한가롭구나.

산허리에 비낀 해는 몸을 기울여 보내고

지붕 위로 날아가는 구름은 손을 뻗어 잡네.

허술한 울타리는 틈나는 대로 손질하고

예전에 지은 시를 다시 고치네.

바깥 사람은 오지 않아 사립문이 고요하니

책을 낀 아이들만 자주 오가네.

 

頃者於弁巖南峯之下。新作一茅齋。其地勢也危僻。締構也不巧。且向背往復。俱不適宜。陋而拙者甚矣。其主人。行已也違於道。立志也違於世。又處事之迂闊。居止之淸凉。其爲陋拙。又有甚焉者矣。以其齋之陋拙。合於主人之陋拙。名之曰陋拙齋。因成長句六首以自詠

北臨深澗搆茅堂 斷送餘生庶可望

處世智謀誠有拙 修身事業愧無良

開窓偶對蒼松翠 掃地仍燒白朮香

此境此人違向背 路人應笑不知方

 

霜後山椒翠色濃 一株蒼檜數株松

憐渠冷落千年操 伴我衰遲十載容

遠聽村墟長短笛 近聞隣寺暮朝鍾

此間深有誅茅意 莫向閑人道所從

 

喜我恒居有道邦 老將身計寄明窓

放懷日日開書帙 排悶時時對酒缸

臥盾洞雲生片片 坐聞山鳥語雙雙

世情塵事都忘了 惟有詩魔尙未降

 

石田茅屋廣文居 陋拙那同耘谷廬

尙可容身心已足 豈堪慠世智無餘

一溪風月情何極 十里雲烟畵不如

路隔地偏宜老病 但嫌稀少故人車

 

無妨彼此寄閑身 元是乾坤一散民

草草草堂依斷麓 蕭蕭蕭寺作比隣

開穿石井常澆渴 收拾山蔬且慰貧

百歲榮枯駒過隙 存亡黙數古今人

 

迹寄千峯紫翠間 一生行止似僧閑

半山斜日傾身送 過屋飛雲引手攀

新作蕃籬頻補理 舊題詩句更追刪

外人不到柴扉靜 把冊兒童數往還

Ⅲ-147) 첫 눈

풍년이 들 조짐이라 빛이 더욱 새로우니

집집마다 사람들이 경사롭다고 말하네.

개인 뒤 우연히 동산을 바라보다가

나무마다 매화 꽃 피어 봄인가 했네.

 

新雪

瑞應豐年色更新 嗷嗷相慶幾家人

晩晴偶向林園望 誤認梅花萬樹春

Ⅲ-148) 나무에 눈이 얼어붙어

무진년(1388) 동짓날 뒤

병술일(1389) 이른 아침에

안개가 모이고 찬 기운이 엉켜

한낮이 되도록 눈이 그치지 않았네.

소나무와 전나무는 다 늘어지고

밭고랑의 싹들을 다 덮어버려,

이 눈이 아름다운 곡식이라면

내 바가지에 가득 담겠네.

산마다 은세계이고

나무마다 옥가지이니,

이 모습 바라보며 깊은 생각이 들어

혼자 읊조리니 그 소리 놀랍구나.

 

木稼

戊辰冬至后 丙戌日晨朝

霧合氣凝結 日高猶未消

糢糊松檜上 偃亞枯禾苗

若使爲嘉穀 可能盛我瓢

山山銀世界 樹樹玉枝條

對此有深念 獨詠聲曉曉

Ⅲ-149) 이틀 뒤. 또 큰 눈이 내리다

음기가 차갑게 엉켜 새벽 안개 짙으니

겨울이 일 만들어 눈 농사를 지었네.

들풀에 두텁게 붙어 줄기마다 고개 숙이고

숲 가지에 가볍게 붙어 이삭마다 늘어졌네.

흰 가루 땅에 가득해도 쓰는 사람이 없으니

떨기에 옥가루 쌓인들 그 누가 찧으랴.

음양의 신기한 변화를 헤아리기 어려우니

그 누가 천공(天公)을 향해 길흉을 물으랴.

 

後二日又大作

陰氣寒凝曉霧濃 玄英用事作爲農

厚粘野草莖莖亞 輕着林枝穗穗重

滿地粉塵人不掃 縈叢玉糝孰爲舂

陰陽神變誠難測 誰向天公問吉凶

Ⅲ-150) 11월 23일. 비가 내리다

겨울비가 부슬거려 사방 산이 어두우니

그윽한 회포 답답하고 쓸쓸하구나.

한가롭게 하는 일없어 성정은 고요하지만

병들어 나가지 않으니 허리와 다리가 굳어졌네.

아득한 빗줄기는 바라보는 눈을 가리고

급한 빗소리는 늙어 가는 얼굴을 재촉해,

음양의 이치가 하늘 뜻인 줄 알겠으니

때아닌 비를 퍼부어 아끼질 않네.

 

十一月二十三日有雨

冬雨紛紛暗四山 幽懷鬱鬱寂寥間

閑無幹事性情靜 病不出行腰脚頑

迢遰色添遮望眼 蕭踈急促衰顔

定知燮理符天意 律外滂沱故不慳

Ⅲ-151) 이튿날 눈이 내리는데 우곡(牛谷)에 사는 부부가 음식을 베풀다

밤에는 등불에 비 뿌리는 소리를 들었는데

아침엔 한 자나 쌓인 눈에 놀랐네.

온갖 새들도 자취를 감췄는데

갑자기 두어 사람 오는 게 보였네.

나무엔 주렁주렁 구슬이 달리고

산들은 첩첩이 은으로 둘렸는데,

고맙게도 하늘이 날 도와 주셔

아름다운 경치에 깊은 잔을 기울였네.

 

明日有雪。牛谷夫婦設食

夜聽侵燈雨 朝驚尺雪堆

惟看百鳥戢 忽見數人來

瓊樹重重匝 銀巒疊疊廻

感知天厚我 嘉景侑深盃

Ⅲ-152) 섣달(臘月) 스무 이렛날(念七). 정(鄭) 예안(禮安)이 찾아오다

반갑게 만나 한 번 웃는 것도 어려운데

하물며 술항아리 열고 맘껏 기뻐하다니.

취흥은 무르익고 이야기는 부드러워

하지 못한 이야기가 하나도 없었네.

 

臘月念七。鄭禮安來訪

欣逢一笑尙爲難 何况開樽共盡歡

醉興方濃談話軟 也無非意敢相干

Ⅲ-153) 그 이튿날엔 이(李) 저곡(楮谷)이 찾아오다 (두 수)

Ⅲ-153-01)

들사람의 풍미가 스님보다도 담백해

세밑의 시름을 견디기 어려웠는데,

눈 밟고 찾아오다니 그 뜻이 두터워라

바라건대 병 없으시고 산같이 장수하시게.

Ⅲ-153-02)

병들어 쇠한 몸에다 백발까지 되었으니

뜻과 기백이 젊은 시절과는 다르건만,

술항아리 기울이면 미친 흥이 일어나

죽은 재에도 불이 다시 붙을 때가 있다네.

 

明日。李楮谷來訪(二首)

野人風味淡於僧 歲暮愁懷未可勝

踏雪相過知厚意 願言無恙壽如陵

 

病軀衰甚已華顚 志氣全非少壯年

倒盡淸樽發狂興 死灰猶有火重燃

Ⅲ-154) 손녀 묘음동(妙音童)이 준 버선(足巾)을 읊음

베 버선이 눈같이 희어

이것을 이름하여 보신(保身)이라 하네.

네가 가져다 준 뜻이 정말 고마우니

새 봄을 밟고 싶은 내 마음을 알았구나.

 

詠足巾(孫女妙音童所贈)

布襪白如雪 是名爲保身

憐渠持贈意 知我履新春

Ⅲ-155) 섣달 그믐밤

내일 아침이면 나이가 예순인데도

아직 웅혼한 마음은 스러지지 않아,

청주(靑州)가 어디 있는가 물어보고

그곳에 종사하면서 오늘밤을 보내려네.

 

除夜

年逢耳順在明朝 尙有雄心未靈消

且問靑州在何許 擬從從事送今宵

Ⅳ-001) 1389년(기사) 정월 설날 아침에 (두 수)

Ⅳ-001-01)

내 나이 이제 예순이 되고 보니

성인의 말씀이 스스로 부끄럽네.

아직 이순(耳順)이 되기도 어려우니

마음이 통한다고 어찌 말하랴.

아름다운 수석과 함께 살면서

태평스런 하늘 땅에 깊이 고마워하네.

봄이 이른 것을 벌써 알겠으니

새벽빛이 내 집 문을 비추는구나.

Ⅳ-001-02)

또 봄을 맞이하는 나그네가 되어

새벽 알리는 까마귀 소리에 놀라 깨어났네.

사람들이 다투어 절하고 하례하며

말끝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시라네.

형제 자매의 은정은 갈수록 무겁고

아이 손자들의 효성과 공경도 더하니,

멀리 벼슬길에 노는 아이만 가엽군

여관방에서 얻어먹으며 서울에 머물고 있네.

【이때 형(泂)이 서울에 있었다】

 

己巳正朝(二首)

身年當六十 自愧聖人言

耳順誠難得 心通豈敢論

寓居佳水石 深謝泰乾坤

已覺東君至 晨光照我門

 

又作逢春客 偏驚報曉▒ ▒ : 亞+鳥

人人爭拜賀 口口共稱嘉

弟妹恩情重 兒孫孝敬加

遙憐宦遊者 旅食滯京華

(時泂在京師)

Ⅳ-002) 춘주(春州)에 양전관(量田官)으로 부임하는 아우 부정(副正)을 보내면서

자네가 떠나갈 먼 길을 생각하니

시내와 산 곳곳에 또 봄이 오겠지.

가벼운 바람은 말고삐에 불고

빛나는 해가 오건(烏巾)을 비추겠지.

경계(經界)는 밭도랑부터 바르게 하고

공가(公家)의 부역(賦役)도 고르게 하라.

모름지기 이 뜻을 잘 알고

우리 백성들을 잘 살게 하라.

 

送弟副正赴春州量田

念子歸程遠 溪山又欲春

輕風吹馬轡 麗日照烏巾

經界溝塗正 公家賦役均

要須知此意 先使阜吾民

Ⅳ-003) 최(崔) 순흥(順興)에게 부침(이때 최순흥이 춘주 양전관으로 있었다)

춘성(春城)은 아득히 먼 곳이어서

다락에 기대 멀리서 그대를 바라보네.

백성 살림은 괴로움 면하게 하고

나라 일에는 부지런하길 사양치 말게.

치악(雉嶽)은 푸른 허공에 뜨고

아산(鵝山)은 흰 구름 너머 있으니,

언제나 그대 말고삐 돌려

술잔 들고 함께 문장을 이야기할까.

 

寄崔順興((時在春州量田)

杳杳春城遠 倚樓遙望君

民生應免苦 王事不辭勤

雉岳浮蒼翠 鵝山隔白雲

何時廻玉轡 把酒共論文

Ⅳ-004) 정초(正初) 서재에서 (네 수)

Ⅳ-004-01)

새해 정월이 반 넘어 지나가니

병에서 일어나 심기(心機)를 살펴보네.

발을 씻다가 몸 여윈 줄 알고

머리를 빗다가 털이 드문 걸 느꼈네.

풍광은 차츰 부드러운데

차가운 기운이 아직도 남아 있어,

머리를 돌려 먼 숲 석양을 바라보니

사람은 돌아가는데 구름은 돌아가질 않네.

Ⅳ-004-02)

두(斗)․소(筲)를 어찌 헤아리랴

종(鍾)․정(鼎)을 이미 잊어버렸네.

함께 이야기할 사람도 적은데

마음대로 되는 일도 또한 드무네.

시절이 맑아 찬 맛은 멀건만

날이 갈수록 세상 인정은 각박해지니,

하늘과 땅 은혜에 감사할 뿐일세

가난한 집에도 봄은 또 돌아왔네.

Ⅳ-004-03)

요로(要路)에 앉기를 바라지 않으리니

위기를 만날까 두려워서라네.

옛 법은 풍속 따라 변해 가는데

옛 사람 닮은 이는 드물구나.

도(道)의 정은 언제나 고요하고

시 지을 생각은 현묘한 경지에 들어가,

욕심 떠난 게 바로 참다운 즐거움인데

도연명(陶淵明)은 어찌 돌아오질 않나.

Ⅳ-004-04)

날씨가 따뜻해져 물성(物性)이 돌아오고

천기(天機)도 빠르게 돌아가니,

그윽한 골짜기에 새 소리 부드럽고

작은 서재엔 이야기 소리 드무네.

눈이 녹아 봄 물이 불어나고

구름이 머물자 저녁 바람 잠잠한데,

동쪽 봉우리 길을 앉아서 바라보니

해 기우는데 스님이 혼자 돌아가네.

 

正初齋居(四首)

新正將欲半 病起省心機

洗足知身瘦 梳頭感髮稀

風光初婉娧 寒色尙熹微

回首遠林晩 人歸雲未歸

 

斗筲何足筭 鍾鼎已忘機

可語人猶少 如心事亦稀

時淸寒味遠 日漸世情微

弟感乾坤惠 窮居春又歸

 

莫希當要路 還恐有危機

古法從今變 今人似古稀

道情恒寂靜 詩思入玄微

恬惔是眞樂 淵明何不歸

 

凞凞廻物性 冉冉轉天機

幽谷鳥聲軟 小齋人語稀

雲消春水漲 雲定晩風微

坐看東峯路 日斜僧獨歸

Ⅳ-005) 도통사(都統使) 최영(崔瑩) 장군이 사형 당했다는 말을 듣고 탄식함 (세 수)

Ⅳ-005-01)

수경의 빛이 묻히고 기둥과 주춧돌이 무너져

사방의 백성과 만물이 모두 슬퍼하네.

빛나는 공업은 끝내 썩고 말았지만

굳센 충성이야 죽었다고 사라지랴.

사적을 기록한 푸른 역사책이 일찍 가득했건만

가엾게도 누른 흙이 이미 무덤을 이뤘네.

생각컨대 아득한 황천 밑에서도

눈을 도려내어 동문에 걸고 분을 풀지 못하시겠지.

Ⅳ-005-02)

조정에 홀로 섰을 때 감히 덤빌 자 없었으나

충성과 의리 때문에 온갖 어려움을 겪었네.

육도(六道) 백성들의 소망을 따라

삼한(三韓)의 사직을 편안케 했네.

동렬의 영웅들은 얼굴 더욱 두터워지고

아직 죽지 않은 간사한 자들은 뼈가 서늘해졌으리.

어지러운 때를 다시 만나면 누가 꾀를 내려는지

이 시대 사람들 간사하게 일하는 것이 가소롭기만 하네.

Ⅳ-005-03)

내 이제 부음 듣고 애도하는 시를 지었으니

공을 위해 슬픈 게 아니라 나라 위해 슬픈 거라오.

하늘 운수가 통할지 막힐지를 알기 어렵고

나라 터전이 편안할지 위태할지도 정해질 수가 없네.

날카로운 칼날이 이미 꺾였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랴

충성스러운 신하 항상 외롭다가 끝내 견디지 못했네.

홀로 산하를 바라보며 이 노래를 부르니

흰 구름과 흐르는 물도 모두들 슬퍼하네.

 

聞都統使崔公被刑。寓歎(三首)

水鏡埋光柱石頹 四方民物盡悲哀

赫然功業終歸朽 確爾忠誠死不灰

紀事靑篇曾滿帙 可憐黃壤已成堆

想應杳杳重泉下 抉眼東門憤未開

 

獨立朝端無敢干 直將忠義試諸難

爲從六道黔黎望 能致三韓社稷安

同列英雄顔更厚 未亡邪侫骨猶寒

更逢亂日誰爲計 可笑時人用事姦

 

我今聞計作哀詩 不爲公悲爲國悲

天運難能知否泰 邦基未可定安危

銛鋒已折嗟何及 忠膽常孤恨不支

獨對山河歌此曲 白雲流水㧾噫嘻

Ⅳ-006) 외당형(外堂兄) 이(李) 부령(副令)이 선군(先君)을 추봉(追封)했기에 그 묘소에 참배하고 절구 두 수를 지어 드림

Ⅳ-006-01)

무덤이 푸른 기슭 앞에 석 자나 높아졌으니

아들이 일찍이 대부(大夫) 반렬에 뛰어올랐네.

추봉한 지위가 막중한 홍추사(鴻樞使)이니

아마도 이 영광이 구천(九泉)에서 빛나리라.

Ⅳ-006-02)

무덤 앞에다 정성껏 음식 차려 놓고

아들 손자들이 두어 줄 늘어섰네.

두 번 절하고 생전의 일 생각하니

부질없이 감격스런 눈물이 샘처럼 흘러나오네.

 

外堂兄李副令追封先君。拜其塋。作二節以呈似

塚尺三高翠麓前 子曾超躡大夫聯

追封位重鴻樞使 應是榮旡耀九泉

 

庶羞羅列墓門前 子侄成行僅數聯

再拜忽思平昔事 空將感淚灑如泉

Ⅳ-007) 수은(袖隱) 추(椎) 스님의 시권에 씀

굳센 방망이의 오묘한 쓰임이 어떤 것인지

오랫동안 손을 떼고 자취를 드러내지 않네.

조사(祖師)의 관문을 부수고도 아무 일 없었으니

사위의(四威儀) 안에 신기한 칼날 감추었으리.

 

書袖隱椎上人卷

剛槌妙用是何容 縮手多時不露蹤

打碎祖關無一事 四威儀內韞奇鋒

Ⅳ-008) 명암(鳴巖)의 시권에 쓰다

한 번 내려치는 방망이 소리가 멀리 떨치니

법고(法鼔)를 두드려 하늘까지 울리네.

맑은 우뢰가 손길 따라 일어나니

육합(六合)이 모두 화평하고 맑아지리라.

 

書鳴巖卷

一下槌聲遠 訇天法鼓鳴

晴雷隨手起 六合晏然淸

Ⅳ-009) 소나무를 심는 것을 보고 쓴 시와 서문

당인(唐人)

노인의 집을 지나면서도

노인의 마음은 알 수가 없네.

무엇 때문에 늙은 나이에

소나무 심어 그늘을 기다리나.

 

【서문】당나라의 어떤 사람이 이웃집 늙은이가 소나무 심는 것을 보고 위와 같은 시를 지었다. 이 시는 그 노인을 비웃으며 지은 것이다. 내 나이 올해 예순이 되었는데, 산 위의 정자 옆에 어린 소나무 수십 그루를 심다가 갑자기 당나라 사람의 그 마음을 생각하고, 절구 3수를 지어 응답한다.

Ⅳ-009-01)

살고 죽는 데에는 늙은이도 젊은이도 없으니

자라나는 것은 소나무의 마음에 있을 뿐이네.

혹시 백세의 수명을 기약할 수 있다면

푸른 그늘 기다리는 게 어찌 어려우랴.

Ⅳ-009-02)

이다지도 심하게 노쇠했으니

길게 바란다고 어찌 내 마음대로 되랴.

푸르고 푸른 빛을 사랑할 뿐이지

우거진 그늘이야 어찌 기대하랴.

Ⅳ-009-03)

대부라는 이름은 부끄럽지만

군자의 마음만은 굳게 지녔네.

내 뜻을 알고서 지켜준다면

뒷날 이 뜨락에 그늘이 가득하리라.

 

栽松(幷序)

唐人觀隣老栽松詩云

雖過老人宅 不解老人心

何事殘陽裏 栽松欲待陰

此給其老人而作也。我今年當六十。於山亭之畔。種稚松數十株。忽憶唐人之意。作三節以答之曰。

 

存亡無老少 生長在松心

倘保期頤壽 何難待綠陰

 

衰遲何大甚 長遠豈吾心

但愛靑靑色 何期鬱鬱陰

 

應耻大夫號 固特君子心

故人如見憶 他日滿庭陰

Ⅳ-010) 적음연사(寂音演師)의 시권에 씀

침묵으로 말씀한다고 일찍이 들었더니

그 사람을 이제 비로소 보게 되었네.

도(道)가 커지니 말이 끊어지고

마음이 맑아지니 온 세상 티끌이 빛나네.

천룡(天龍)도 어렵게 귀를 기울이고

온갖 악마들도 이미 몸을 감추었네.

어느 곳에다 이 소식 전할까

영축산에서 봄날 한 번 웃네.

 

書寂音演師卷

曾聞說時黙 今得見其人

道大絶言語 心淸輝刹塵

天龍難側耳 魔衆已藏身

甚處傳消息 靈山一笑春

Ⅳ-011) 배웅

적음연(寂音演) 선사가 사립문을 찾아와

참방(參方)하러 떠난다고 하직을 알리네.

머리엔 채양 넓고 둥근 삿갓을 쓴데다

몸에는 긴 소매에 넓은 장삼을 입었네.

푸른 산이 걸음을 맞으니 행장이 평온하고

맑은 달이 마음을 비추니 도용(道用)이 미묘하겠지.

묻노니, 그 짚신 값이 얼마던가

높은 발자취 가볍게 고개 구름 따라 날아가네.

 

送行

寂音禪德到柴扉 意慾叅方告曰歸

頭戴廣簷圓頂笠 身披長袖濶腰衣

翠嵐迎步行裝穩 明月當心道用微

且問草鞋錢幾隻 高踪輕遂嶺雲飛

Ⅳ-012) 설암(說菴)의 시권에 쓰다

진종(眞宗)을 부연(敷演)할 때에 혀뿌리를 휘두르면.

우뢰 소리 진동하여 자비스런 구름 퍼뜨리네.

때로는 무생곡(無生曲)을 가리켜 보이니

천룡(天龍) 팔부(八部) 중생이 귀를 모아 듣네.

 

書說菴卷

敷演眞宗掉舌根 雷音振動布慈雲

有時指擧無生曲 八部天龍攝耳聞

Ⅳ-013) 선달(先達) 김초(金貂)의 시에 차운함 (다섯 수)

Ⅳ-013-01)

원래 닭과 학은 같이 살지 않으니

삼동(三冬) 내내 글만 읽는 그대가 부럽구려.

금방(金榜)의 아원(亞元)이라 이름 참으로 높았으니

아마도 언젠가는 금어(金魚)를 차시겠지.

Ⅳ-013-02)

십 년 동안 천석(泉石)에서 혼자 가난하게 사니

바둑판 하나에다 책이 한 권일세.

재주가 변변찮아 세상 쓰임에 어긋났을 뿐

동쪽으로 온 것이 농어 때문은 아닐세.

Ⅳ-013-03)

평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한가롭게 사는데 있어

날마다 도(道) 실린 책을 펼쳐 보았네.

이미 한 마음을 잡았으니 물아(物我)가 한가지라

자네는 나를 알고 나는 고기를 아네.

Ⅳ-013-04)

누추한 골목이라 안부를 묻는 사람도 없는데

창가에 산속 햇빛이 도서를 비추네.

앉으면 꽃 층계에 벗 부르는 꾀꼴새 소리를 듣고

다니면 부들 시내에 수달이 물고기 좇는 걸 보네.

Ⅳ-013-05)

두어 이랑 쑥대밭 고즈넉한 집에서

병이 많아 시서(詩書)를 뒤적이지 않았네.

오늘 아침에야 임천(林泉)의 글귀를 보내려고

쌍잉어 흰 종이의 편지를 봉하네.

 

次金先達貂詩韻(五首)

由來鷄鶴不同居 羨子三冬苦讀書

金榜亞元名信美 定應明日佩金魚

 

十年泉石獨貧居 一局碁邊一卷書

但以才疎違世用 東來不是爲鱸魚

 

平生至樂在閑居 日日披看載道書

已把一心齊物我 子能知我我知魚

 

陋巷無人問起居 半窓山日映圖書

坐聞花塢鸎呼友 行見蒲溪獺趂魚

 

閒寂蓬蒿數畝居 病多元不考詩書

今朝欲寄林泉句 尺素裁封雙鯉魚

Ⅳ-014) 토산(兎山)으로 부임하는 승봉(承奉) 신성안(辛成安)을 보내면서(당시 감무 監務 임용은 참 參 이상이기 때문에 이렇게 썼다)

토산은 경기(京畿)에 가까운 산 고을이라

감무(監務)의 푸른 적삼을 자주 빛 옷으로 갈아입었네.

어진 임금 위해서 병폐를 제거할 뿐이지

가고 멈춤(行止)이 뜻대로 안 된다고 탄식하지는 마시게.

닭을 잡는다고 소 잡는 칼을 쓰지 않으랴

풍속을 어루만지면 조서(鳳詔)를 받들어 돌아가리라.

노래 마치고 술 얼근해지자 손잡고 헤어지니

방초 어울어진 강가에 말이 날아가는 것 같네.

 

送辛承奉(成安)赴兎山(時監務之任 用叅以上故云)

兎山山郡接京畿 監務靑衫換紫衣

但爲聖明除弊瘼 莫將行止嘆乖違

割鷄不是牛刀用 撫俗還承鳳詔歸

歌闋酒闌分袖去 草芳江路馬如飛

Ⅳ-015) 조대(措大) 원문질(元文質)을 곡(哭)함 (두 수)

Ⅳ-015-01)

어릴 적부터 글읽기에 마음 간절해

나도 그 당시 한 편을 가르쳤었지.

나보다 나중 온 사람이 먼저 가다니

슬픔을 이기지 못해 푸른 하늘에 하소연하네.

Ⅳ-015-02)

눈앞에서 잘 살고 못 사는 것은 물거품이니

백년의 사귐도 잠시에 지나지 않네.

가엽구나! 이십사년 동안의 일이야말로

꿈속 거품 중에도 꿈속 거품일세.

 

哭元措大(文質)(二首)

讀書心切自童年 我亦當時敎一聯

後我來人先我去 不勝怊悵籲蒼天

 

過眼榮枯水上爻 百年猶是暫時交

可憐四六年間事 夢幻泡中夢幻泡

Ⅳ-016) 단오날. 빙정(氷亭) 아우에게 (다섯 수)

Ⅳ-016-01)

산 속 서재에 고요히 앉았노라니 해가 참으로 길건만

한 잔 창포 술에는 향기가 남았네.

고을 사람들의 풍악 소리가 귀에 들리니

조상님 끼친 풍속이 우리 고향에 있네.

Ⅳ-016-02)

살구에 씨가 생기고 버들 실도 길어졌네.

물 건너 산다화(山茶花)가 그윽한 향내를 보내네.

산 바라보며 새로운 시구를 찾으려 하다

나도 모르게 가물가물 수향(睡鄕)에 들어가네.

Ⅳ-016-03)

잠 깨고 나니 시 생각이 더욱 그리운데

차 항아리 향기로우니 더욱 기뻐라.

내 평생 몇 번 째 단오날인가 손 꼽아보니

비단옷 한 번 못 입고 시골에서 늙었네.

Ⅳ-016-04)

아름다운 천중절(天中節)에 흥이 더욱 솟네.

소나무엔 맑은 그늘 풀에는 향기가 나네.

잎 우거진 버들 숲은 꾀꼴새 장막이고

꽃 활짝 핀 채소밭은 나비들의 고향일세.

Ⅳ-016-05)

사람은 노을 속에 늙어가고 세월은 길기만 한데

재주가 없는 데다 향기마저 모자라 탄식하네.

형제의 모임을 자주 마련하고

좋은 철 만날 때마다 취향(醉鄕)에 놀기를 바랄 뿐일세.

 

端午。贈氷亭弟(五首)

靜坐山齋日正長 一巵菖歜有餘香

郡人鼓樂聲來耳 祖聖遺風在我鄕

 

杏子生人柳線(☆)長 酴醾(☆)隔水送幽香

對山擬欲搜新句 不覺昏昏入睡鄕

 

睡餘詩思轉悠長 且喜茶甌深更香

屈指吾生幾端午 身無綵縷老於鄕

 

天中佳節興偏長 松有淸陰草有香

葉密柳林鸎幕府 花繁菜圃蝶家鄕

 

人老烟霞歲月長 自嘆才薄乏馨香

但思屢辨鴒原會 每遇良辰樂醉鄕

Ⅳ-017) 육순을 맞아 (두 수)

Ⅳ-017-01)

내 생애는 흩날리고 또 미친 듯했지.

병 많은 몸이나마 쉰까지는 지나왔지.

이 세상의 바람과 천둥을 이미 면했건만

어찌 얼음과 숯불이 다시 마음을 괴롭히나.

끝없는 세월은 붙들기 어려우니

유한한 몸으로 다치지나 말아야지,

공자께서 말씀하신 이순(耳順)이 부끄러우니

요즘 들어 듣고 본 것을 다 잊어버리네.

Ⅳ-017-02)

도를 배웠건만 이루지 못하고 들은 것도 적으니

무슨 일을 빙자해 임금 은혜를 갚으려나.

한 평생 수석(水石)이 내 분수인 줄 알면서도

두 시대 티끌 속에 세상 어지러움을 겪었네.

내 기질을 어찌 거원(籧瑗)처럼 되기를 바라랴만

성정(性情)은 언제나 소옹(邵雍)의 말씀 본받으려 했네.

만사에 이미 통발을 잊은 지 오래이니

마음 편히 하면 흰 구름에 누울 만하네.

강절집(康節集)에 성정음(性情吟)이 있음】

 

六十吟(二首)

我生飄蕩又疎狂 多病筋骸五紀强

已免風雷於世上 更何氷炭到心腸

無窮歲月難留滯 有限肥膚莫毁傷

但媿宣尼言耳順 邇來聞見摠相忘

 

學道無成寡所聞 欲憑何事報明君

一涯水石知涯分 二世塵埃混世紛

氣質敢希蘧瑗化 性情常效邵雍云

已於萬務忘筌久 足以安心臥白雲

(康節集。有性情吟)

Ⅳ-018) 소강절(邵康節) 선생의 춘교십영시(春郊十詠詩)에 차운한 시와 서문

【서문】옛사람의 시를 읽고 옛사람의 뜻을 보면, 고금(古今)이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부귀(富貴)와 빈천(貧賤), 영고(榮枯)와 득실(得失)에 따라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슬퍼하고 답답하게 여기는데, 그 까닭은 정(情)이 감발(感發)하여 일어나기 때문이다. 아! 안타깝구나, 정(情)이여! 어찌 사람을 이렇게까지 만드는가. 내가 선생의 격양집(擊壤集)을 읽다가 공성십음(共城十吟)에 이르러 보니, 그 자서(自序)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내 몸이 궁하게 사는 것을 슬퍼하여 춘교시(春郊詩) 열 수를 지었는데, 비록 고상하지는 못하지만 정(情)을 끌어냈다고 할 만하다.” 그 시의 뜻이 내 마음을 깊이 감동시켰다. 그렇다면 하늘이 준 성품은 예나 지금이나 다름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 풍미(風味)를 생각하며 각기 그 운에 차운하여 시 열 수를 지었다.

Ⅳ-018-01)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살다 春郊閑居

교외에 살다보니 고요하고도 한가로워

푸른 아지랑이가 산시(山市)에 이어졌네.

시냇물은 대밭을 꿰뚫고 흐르며

사립문은 지는 꽃을 마주하고 닫혔네.

붓을 들어 길게 읊조리다가

난간에 기대 얼핏 잠도 들었네.

누가 이 들나물을 캐어 왔나

잘게 씹을수록 봄 맛이 나네.

 

 

Ⅳ-018-02) 봄날 교외에 한가롭게 거닐다 春郊閑步

사심이 없는 천지의 봄이라

바람이 맑고 햇빛이 산뜻하네.

물 건너 날아가는 새를 바라보고

다리 건너 들사람도 만났네.

풍성한 물상(物像)들을 가만히 살피다가

내 생애 가난함을 잊어버리고,

꽃다운 풀밭 위에 우연히 앉아

도탄에 허덕이는 백성을 생각했네.

Ⅳ-018-03) 봄날 교외의 꽃다운 풀밭 春郊芳草

교외 들판에 비가 한 번 지나가

풀빛이 멀리까지 끊어지지 않았네.

누가 저 녹색 비단을 가져다가

하나하나 솜씨있게 잘 마름질했나.

눈에 가득한 연기와 빛이 아득하니

봄날의 흥취가 유유히 일어나네.

그 옛날 선생께서도 맛있는 술이 있었으면

이 경치를 바라보며 술잔을 따르셨겠지.

Ⅳ-018-04) 봄날 교외에 꽃이 피다 春郊花開

교외에는 봄 그늘이 엷어

온갖 꽃이 이 초가집을 비추네.

무성한 가지는 꺾어도 되지만

부드러운 잎을 따면 안 되네.

해가 기울자 그림자도 바뀌어지고

부슬비 지난 뒤라 향기가 떠오르네.

이 아름다운 꽃이 열흘을 못 가다니

장차 마음 쓸쓸해질까 염려가 되네.

Ⅳ-018-05) 봄날 교외의 한식날 春郊寒食

아름다운 이 계절을 맘껏 즐겨야지

아름다운 이 계절을 놓치면 안 되네.

가는 곳마다 이름난 동산이 있어

철 따라 나는 산물에 깜짝 놀랍네.

꽃이 피려다 미처 못 피고

얼핏 따스하다가 어느새 추워지네.

성을 에워싼 사람이 얼마나 될까

준마들도 모두 한가롭게 나왔네.

Ⅳ-018-05) 봄날 교외에서 저녁에 바라보다 春郊晩望

그윽한 새들은 서로 지저귀고

시냇가 나무에 그늘이 지려 하네.

지는 해는 믿음이 없어 보이지만

돌아오는 구름은 무슨 마음이 있는 듯하네.

천리 저 멀리 눈길이 끊어지지만

흥취는 다시 한 번 더 깊어지네.

저 건너 언덕에 매화 핀 것을 알았으니

그윽한 향기 따라 찾아갈 수 있겠네.

Ⅳ-018-06) 봄날 교외에 빗속에서 春郊雨中

구름 기운이 제대로 모여들더니

하늘과 땅 사이에 빗발이 어둡네.

골고루 뿌려 만물을 적시면서

어두컴컴해져 산들을 가리네.

밭둑 위에 기뻐하는 사람이 많아

시냇가에는 해오라기 혼자 한가롭네.

연기 덮인 풀 길을 이따금 바라보니

도롱이 젖은 목동들이 돌아오네.

Ⅳ-018-07) 봄날 교외에서 비 내린 뒤에 春郊雨後

한 줄기 비가 남은 봄을 씻어 주니

산천의 면목이 참다워졌네.

흐드러지게 붉던 꽃도 차츰 예전과 달라지고

부드러운 녹색 잎은 더욱 새로워졌네.

소나무 고개에는 아지랑이 걸려 있고

채마밭 이랑에는 푸른빛이 가지런해,

시를 지어 개인 날씨에 감사드리니

좋은 시절 저버린다고 그 누가 말했던가.

Ⅳ-018-08) 봄날 교외에서 묵은 술을 마시며 春郊舊酒

춘교십영(春郊十詠)의 시를 읊어 보니

옥돌을 갈고 또 닦는 것 같아,

새로 지은 시도 맛이 이러하니

일찍 거른 술이야 그 맛이 어떠하랴.

술병 속에는 해와 달이 길고

세상 밖에는 구름과 연기가 많으니,

꽃을 대하면 마실 뿐이지

광음(光陰)은 지나가라고 내버려두어야겠네.

Ⅳ-018-09) 봄날 교외에서 떨어지는 꽃을 보고 春郊花落

비단 방석이 땅에 가득 깔렸으니

온갖 꽃 피던 동산에 봄이 떠났네.

어제 밤엔 붉은 가지가 찬란했는데

오늘 아침엔 푸른 잎이 돋아나네.

이제부턴 봄 놀이가 차츰 적어질 테니

노래와 피리 소리도 어찌 들리랴.

사람의 일이 모두 이와 같으니

뜬 삶을 어찌 말할 게 있으랴.

 

次康節邵先生春郊十詠詩(幷序)

讀古人詩。看古人意。今古雖殊。其意不異。人於富貴․貧賤․榮枯․得失。皆有懽忻․快樂․哀戚․鬱陶。其所以然者。情所感發而興起也。惜哉情乎。夫何使人至於斯也。予讀先生擊壤集。至共城十吟。其自敍云。悼身之窮處。故有春郊詩一什。雖不合於雅焉。抑亦導于情耳。其詩意深有感於予心者。若然則天之所賦之性。固無古今之異者歟。故想其風味。各以其韻次成一什云。

 

春郊閑居

郊居靜且閒 嵐翠連山市

溪穿脩竹流 門對落花閉

操筆發長吟 倚欄成假寐

誰桃野菜來 細嚼嘗春味

 

春郊閒步

無私天地春 風日更淸新

隔水看飛鳥 渡橋逢野人

冥搜物像富 卽忘生涯貧

遇勝籍芳草 却思塗炭民

 

春郊芳草

郊原雨已過 草色無間斷

誰將綠綺羅 一一巧裁剪

滿眼烟光遠 悠悠春意生

先生有美酒 對此宜閑傾

 

春郊花開

郊外春陰簿 群花映草廬

繁枝聊可折 嫩葉不須除

影轉斜暉畔 香浮小雨餘

穠華無十日 將恐意蕭疎

 

春郊寒食

努力賞佳辰 佳辰不可失

到處有名園 慘然驚節物

欲開未開花 乍暖不暖日

多少遶城人 駿馬俱閑出

 

春郊晩望

間關呼暝禽 溪樹欲成陰

日落似無信 雲歸如有心

日窮千里遠 興復一番深

隔岸知梅發 幽香從可尋

 

春郊雨中

雲氣政彌漫 雨昏天地間

空蒙能潤物 暗淡巧遮山

壟上人多喜 溪邊鷺獨閑

時看烟草路 簑濕牧童還

春郊雨後

一雨洗殘春 山川面目眞

爛紅纔減昔 嫩綠又增新

松嶺嵐猶礙 蔬畦碧已匂

裁詩報晴霽 誰道負良辰

 

春郊舊酒

春郊一十詠 如琢復如磨

新作詩如此 曾蒭酒若何

壺中日月永 物外雲烟多

聊以對花飮 光陰一任過

 

春郊花落

錦菌鋪滿地 春去百花園

昨暮紅枝爛 今朝綠葉飜

遊觀從此少 歌吹豈爲繁

人事摠如是 浮生何足言

Ⅳ-019) 24일. 빗속에 홀로 앉아

산 속 서재에 하루 종일 비가 내리니

쓸쓸한 생각에 부질없이 괴롭네.

물이 넘치니 시냇물 소리가 커지고

구름이 쌓이니 산 모습도 높아지는데,

그 누가 불우한 심정을 알아 주랴

혼자 빗소리 듣노라니 처량하구나.

기뻐할 만한 일이 하나도 없어

시나 지어 답답한 마음 그려본다네.

 

二十四日 雨中獨坐

山齋終日雨 寥落思空勞

水漲川聲壯 雲籠峀勢高

誰能知坎坷 獨自聽蕭疎

無事可怡悅 裁詩寫鬱陶

Ⅳ-020) 도원량(陶元亮)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읽고

백년 종정(鍾鼎)도 한낱 기러기 털이라

일찍이 귀거래사(歸去來辭) 지은 도연명(陶淵明)을 사랑하네.

날씨 좋으면 놀러 다니면서 앞길을 물어보고

이따금 동쪽 언덕에 올라 휘파람도 불어보네.

짧은 지팡이 이르는 곳에는 산이 가로막고

작은 배 타고 돌아오면 물이 반 삿대가 되니,

한가롭고 바쁜 것 가지고 득실(得失)을 따진다면

푸른 구름(靑雲)이 흰 구름(白雲) 높이에 미치지 못하리라.

 

讀陶元亮歸去來辭

百年鍾鼎一鴻毛 早賦歸來我愛陶

涉日遊觀問前路 有時舒嘯上東皐

短笻到處山橫障 小艇乘來水半篙

若把閑忙論得失 靑雲莫及白雲高

Ⅳ-021) 간추린 귀거래사(歸去來辭)

고향으로 돌아오는 게 내 구하는 바니

거문고와 책을 즐기며 시름을 잊네.

창에 기대 세상을 업신여기며 옳고 그름을 따지고

소나무 어루만지며 거닐고 떠날지 머물지를 내맡기네.

밭 갈고 김매기를 일삼으며 지팡이를 세워 두고

시 짓고 읊다가 또한 배도 타네.

하늘의 뜻 즐기고 운명을 아니 무엇을 걱정하랴

천고에 끼친 바람이 높아서 따를 사람이 없네.

 

節歸去來辭

歸去來兮適所求 琴書之樂實消憂

倚窓(☆)寄傲論非是 撫樹盤桓任去留

或事耘耔而植杖 還將賦詠亦乘舟

樂天知命奚疑慮 千古遺風夐絶儔

Ⅳ-022) 생각나는 대로 읊음

한가롭게 사는 맛을 함부로 전하지 마세.

사람들이 그 까닭을 비웃을까 두렵다네.

쑥대를 쳐내 오솔길을 만들고

자갈을 헤쳐 맑은 샘을 팠네.

시골 막걸리에 반쯤 취해 바람 앞에서 시를 읊고

산나물에 배 부르면 빗소리 듣다가 잠을 자네.

소부(巢父)와 허유(許由)의 높은 이름도 태평성대 때문이니

대궐에 마음 쏟아 천년 장수를 비네.

 

卽事

閒居氣味莫輕傳 却恐人譏所以然

剪伐蓬蒿通小徑 撥開沙石鑿淸泉

半酣村醑臨風詠 全飽山蔬聽雨眠

巢許名高由盛代 溱心丹陛禱千年

Ⅳ-023) 오랜 비에 향학(鄕學)에 홀로 앉아 있다가 절구 다섯 수를 지어 여러 서생들에게 보임

Ⅳ-023-01)

뜰에 가득한 푸른 이끼에 빗발이 어지러운데

처마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를 밤낮으로 듣네.

잠깐 사이에 천만 가지 모습으로 변하니

기이한 구경거리는 치악산(雉岳山) 구름뿐일세.

Ⅳ-023-02)

그대들은 어지러운 세태를 부디 일삼지 말게.

부지런히 배우면 좋은 명성이 따르기 마련이라네.

문장이 내 자신을 붙들어 준다고 굳게 믿을지니

하루 아침 돌아오는 길이 청운(靑雲)에 있다네.

Ⅳ-023-03)

재주가 옅은데 세상 시끄러움을 벗어난다고 어찌 말하랴.

고루하고도 들은 게 적어 스스로 부끄럽구나.

제각기 노력해 부디 공업(功業)을 이루고

우부(愚夫)가 흰 구름에 누운 것을 본받지 말게.

Ⅳ-023-04)

세상의 어지러운 일을 다 알려고 하면

모름지기 널리 보고 또 많이 들어야 하네.

요즘 사람들은 참으로 우스우니

번복이 무상해 비도 많고 구름도 많네.

Ⅳ-023-05)

이 늙은이가 어찌 세상일을 풀 수 있으랴.

옛날에 들은 것을 다시 찾아 익히지도 못하네.

스승 되기에 알맞지 않은 줄 내가 알기에

병든 몸 부질없이 구름 바라보는 게 부끄럽구나.

 

久雨獨坐鄕學。書五絶以示諸生

滿庭蒼蘇雨紛紛 浙瀝簷聲日夜聞

頃刻變成千萬狀 奇觀只有雉山雲

 

諸生愼莫事繽紛 勤學由來有令聞

篤信文章扶自己 一朝歸路在靑雲

 

才簿何言釋世紛 自慙孤陋寡攸聞

各須努力成功業 莫効愚夫臥白雲

 

若欲硏窮世務紛 要須慱覽又多聞

比來人事還堪笑 飜覆無常多雨雲

 

老夫何敢解時紛 無復尋溫舊所聞

可以爲師知未稱 愧將衰病謾看雲

Ⅳ-024) 한천청사(寒泉淸師)의 시권에 씀

맑고 맑은 한 줄기 물결이 조계(曺溪)에 닿았는데

그 환한 그림자의 광명이 밝고도 서늘하네.

다섯 가지 혼탁한 세상 티끌을 모두 씻어 버리니

끝없이 묘한 쓰임이 통발과 올무를 끊었네.

 

書寒泉淸師卷

澄澄一波接曺溪 影澈涵虛冷且凄

五濁世塵俱滌盡 無窮妙用絶筌蹄

Ⅳ-025) 정암욱사(晶菴旭師)의 시권에 씀 (진사 進士 장자의 張子儀의 운에 따라 쓴 것이다)

일찍이 사자후(獅子吼)를 들었으니

이것이 참으로 무외(無畏)의 말씀일세.

스님께선 오직 이것만 생각하시며

오똑하게 앉아서 많은 세월을 보내셨네.

산빛은 푸르러 허공에 닿고

시냇물 소리는 저절로 흐느끼네.

흰 구름은 이따금 뭉쳤다가 흩어지니

이 모습 바라보며 얼마나 기뻤으랴.

소나무와 바위 사이에 한 암자가 맑으니

북으론 높은 산이 껴안고,

동쪽 바다엔 불 바퀴가 떠올라

맑고 빛나는 모습이 기이하고 절묘하네.

그 맑은 빛에 거리낄 게 하나도 없어

동서남북 위아래가 다시 한 번 통하니,

원융(圓融)한 가운데 그림자가 나타나

삼라만상이 여기저기 벌려 있네.

아래로 세상 사람 내려다보면

하루살이와 서캐에다 이까지 뒤섞였네.

이 암자 안에 즐거운 일이 많아

쓸 데 없이 밖으로 나간 적이 없다네.

나 역시 은자(隱者)를 사모한

천지(天地)간에 한가로운 한 존재인데,

오늘에야 스님을 만나고 보니

십 년 묵은 시름이 모두 풀리네.

 

書晶菴旭師卷(昔張進士子儀韻)

曾聞獄子吼 眞是無畏說

上人念在玆 兀兀經歲月

山色翠磨空 溪聲自鳴咽

白雲時卷舒 對此可怡悅

松石一菴淸 北擁崗巒屹

火輪昇東溟 晃郞景奇絶

無物礙澄光 六合更通徹

圓融影現中 萬像森羅列

下視世間人 蠛蠓雜蟣蝨

菴中所樂多 曾不虛浪出

我亦慕隱倫 天地一閑物

今日逢上人 十年愁可歇

Ⅳ-026) 무암공사(無菴空師)의 시권에 (목은 牧隱의 운을 빌려 씀)

참으로 진공(眞空)을 얻은 한 장부(丈夫)이니

분명히 조주(趙州)의 무(無)자를 들어 보이시네.

닦음도 없고 깨달음도 없고 생각도 없는데

이따금 맑은 바람이 벽오동(碧梧桐)을 흔드네.

 

書無菴空師卷(借牧隱韻)

信得眞空一丈夫 單單提擧趙州無

無修無訂仍無念 時有淸風動碧梧

Ⅳ-027) 지암철사(智巖哲師)의 시권에 씀

푸른 바위가 선명하게 하늘에 솟았으니

네 가지 지혜가 몸 속에 원만한 줄 비로소 알겠네.

스님께선 진여(眞如)의 경지에 고요히 앉아 계시니

시냇가 달과 소나무 바람이 밤마다 선정(禪定)일세.

 

書智巖哲師卷

巖翠鮮明直聳天 方知四智體中圓

上人燕坐眞如境 溪月松風夜夜禪

Ⅳ-028) 봉일신산사(峯日信山師)의 시권에 씀

푸른 봉우리에 구름 걷히고 아침해가 비치니

청정한 그 광명이 시방을 다 비추네.

그곳에서 무슨 사업을 닦으시는지

물가 숲 밑에서 낮에 향을 사르시네.

 

書峯日信山師卷

碧峯雲捲映朝陽 淸淨光明照十方

是處所修何事業 水邊林下晝焚香

Ⅳ-029) 평암균사(平巖均師)의 시권에 씀

원래 등급이 없으니 모두가 평등이라

구름 속의 밝은 빛이 달빛을 띠었네.

옛부터 지금까지 같은 본체이니

스님의 두 눈동자가 더욱 맑고도 깨끗하네.

 

書平巖均師卷

元無等級一般平 雲裏晴光帶月明

亙古亙今同本體 上人雙眼更澄淸

Ⅳ-030) 강남(江南) 가는 신원(信圓) 스님을 보내면서 쓴 시와 서문

【서문】 청풍헌(淸風軒) 신원 스님은 계월헌(溪月軒) 무학(無學)의 문도(門徒)인데 호는 적봉(寂峰)이니, 뜻이 있는 사람이다. 그가 어느 날 나를 찾아와 말했다. “우리들이 하는 일은 오로지 강해(江海)에 노닐고 산천(山川)에 다니면서 스승을 찾아 도(道)를 묻는 것입니다. 그래서 행각(行脚)이라는 말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 스승께서 나옹(懶翁)에게 법을 이어받았으니, 저는 나옹에게 손자벌이 되는 제자입니다. 우리 선조사(先祖師) 보제존자(普濟尊者)께선 지정(至正) 무자년(1348)에 연경(燕京)에 들어가 지공(指空)을 찾아뵈었고, 경인년(1350) 가을에는 강절(江浙)로 가서 평산(平山)을 찾아 뵈었으며, 임진년(1352) 여름에는 무주(婺州)로 가서 천암(千巖)을 찾아 뵙고 그 비밀의 부촉(付囑)을 전수해 왔습니다. 오륙년 동안 두루 돌아다니면서 법을 물은 곳이 매우 많았는데, 사람은 비록 떠나셨지만 행각(行脚)의 남은 자취는 뚜렷합니다. 저도 남방에 노닐면서 선사(先師)들께서 유람하시던 자취를 한 번 보고 평생의 뜻을 이뤄볼까 하여 지금 떠납니다.”

내가 이 말을 듣고 대답하였다. “신원 스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러나 그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나옹(懶翁)은 대도(大道)에 뜻을 두었기 때문에 그 험한 길을 꺼리지 않고 홀로 만리를 유람하면서 밝은 스승을 찾아 뵙고 종지(宗旨)를 밝혔으니, 이와 같이 한다면 스님의 뜻이 곧 나옹의 뜻입니다. 스님은 부디 노력하십시오. 우리 동방이 중국과 비록 멀리 떨어져 있지만, 지금 성천자(聖天子)의 풍화(風化)는 (온 천하 백성을) 한 가지로 어질게 보기 때문에 사해(四海) 의관(衣冠)과 문궤(文軌)가 하나가 되었습니다. 게다가 전쟁까지 그쳐, 여행길에 나서도 아무런 어려움이 없습니다. 스님께선 도(道)와 행(行)에 여력이 있어 삼관(三觀)의 이치와 반야(般若)의 작용이 자신에게 충족하여 남에게 의지할 것이 없으니, 참으로 석문(釋門)의 한 법기(法器)이십니다. 그렇다면 천하(天下) 총림(叢林)에 어디를 간들 용납되지 않겠습니까. 그 교(敎)를 끝까지 연구하고 도(道)를 사모하는 마음이 깊은 사람이 아니라면, 이러한 일은 할 수가 없습니다. 스님의 이번 유람은 오직 선사(先師)가 깨달은 곳에 귀경(歸敬)하는 것만 아니라, 참으로 승려의 뜻을 이루는 행각입니다. 헤어지는 마당에 나의 구구한 정이야 어찌 다 말할 수 있겠습니까?” (신원 스님의) 그 뜻을 아름답게 생각하고 그 행각(行脚)을 장하게 여겨, 시 한 수를 써서 노자로 드린다.

 

헌출하고 깨끗한 그 모습과 몸가짐에다

크고도 넓은 학식과 도량으로,

바리때 하나이니 살림살이 가벼운데다

만리에 노닐러 가니 그 마음 장하시네.

일찍이 티끌 세상 다 떠나시어

소금과 장이 적다고 말한 적이 없었네.

민(閩)과 오(吳)에서 맘껏 노닐고

초(楚)와 월(越)에서도 한가롭게 다니며,

강을 건너려면 갈대를 타기도 하고

길에선 언제나 지팡이를 짚으시겠지.

종풍(宗風)을 누구에게서 받으셨나

보제대화상(普濟大和尙) 바로 그 분일세.

 

送信圓禪者遊江南詩(幷序)

淸嵐軒圓禪者。溪月軒無學之門徒。號曰寂峯。盖有志者也。一日過予曰。吾輩之所業。專以遊江海涉山川。尋師訪道爲事。故有行脚之說焉。吾師嗣法於懶翁。吾於懶翁。義當爲孫。惟我先祖師普濟尊者。越至正戊子。入燕都叅見指空。庚寅秋。到江浙叅見平山。壬辰夏。到婺州叅見千巖。皆傳密付而來。其五六年間。遍叅需語之處甚多。人雖逝矣。行脚之遺躅完然。吾欲南遊。一觀先師遊覽之跡。以償平生之志。卽今行矣。予應之曰。圓之言也是矣。然其志則何哉。切惟懶翁。志于大道。不憚道里之險阻。單遊萬里。叅訪明師。契明宗旨。苟以是求之。上人之志卽懶翁之志也。上人眞勉之哉。吾東方與中國相距道途雖遠。方今聖天子之風化。一視同仁。四海衣冠文軌混一無間。又復干戈已定。一無道途之艱梗。且上人之道與行俱有餘力。三觀之理。般若之用。足乎已無待於外。眞釋門之一法器也。然則其於天下叢林。到處何所不容乎。若非窮究其敎深於慕道者。不能也。此去也非惟歸敬先師契悟之處。實釋子得意行脚之秋也。予所區區臨分之意。安足盡言。乃嘉其志壯其行。書一詩以贐之。

簫灑乎客儀 恢弘乎識量

一盂生計輕 萬里歸心壯

㝡早離塵埃 不曾少鹽醬

閩吳爲浪遊 楚越亦閑放

欲跨渡江蘆 常携扶路杖

宗風嗣阿誰 普濟大和尙

Ⅳ-031) 이천(伊川) 감무(監務)로 부임하는 원(元) 승봉(承奉)을 보내면서 쓴 시와 서문

【서문】 홍무(洪武) 20년(1387) 9월 19일에 이천의 새 수령이 된 원군(元君)이 장차 부임하려고 나를 찾아와 말했다.“백성을 다스리는 직책이 무거워, 저같이 불초한 자가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는 본래 재덕(才德)과 지술(智術)이 없으니, 어찌 그 자리를 감히 맡을 수 있겠습니까? 사양하고 가지 않는 것이 옳지만, 피하기 어려운 형편이어서 부득이 가게 되었습니다.”

내가 그 뜻을 알아듣고 대답하였다. “감무(監務)란 직책은 우리 나라에서 관청을 설치해서 직분을 나눈 것인데, 옛날부터 각사(各司)에 속해 있었다. 본래는 백성과 아전들이 받는 것을 파악하는 게 일이었지. 그러나 그 성(城)을 도맡아 백성을 기르고 아전을 통솔하는 법에 있어서는 주(州)나 목(牧)의 대관(大官)들과 한가지였는데, 다만 지위가 낮고 책임은 막중해서 이따금 폐단이 있었다. 그러므로 지금 경화(更化)하는 초기에 헌사(憲司)가 나라에 아뢰어 감무(監務)와 현령(縣令)의 지위를 참관(叅官)의 계위(階位)에 올려, 현량하고 공정하여 수령이 될 만한 자를 가려 뽑아서 (감무로) 보내는 것이다. 지금 그대가 감무에 선발된 것은 반드시 까닭이 있으니, 세상에 아첨하여 얻은 것은 아니다. 관찰사가 임금께 천거하고 임금께서 채용하셨으니, 소중하게 여기신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그대의 도덕이 집안에 행해져서 밖에까지 퍼지는 것을 여러 사람들이 바라는 바이다. 또 한 고을을 먼저해서 온 천하에까지 이르게 하는 것이 우리 임금과 관찰사의 마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뒷날 어떻게 성취될 것인지 헤아릴 수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그대의 매부와 사위가 먼저 이 직책을 맡았을 때에 모두 재덕이 있다는 칭찬을 받아, 위로는 임금을 섬기고 아래로는 백성을 다스려 정치를 잘 했다는 명성이 알려졌다. 이제 한 집안의 세 사람이 한꺼번에 고을을 다스리게 되었으니, 그야말로 태평성대의 명예가 아니겠는가. 어질고 슬기로운 이가 아니면 이렇게 되겠는가. 그대는 이 일에 힘쓰라.” 그리고 나서 시 2수를 지어 노자로 주었다.

Ⅳ-031-01)

세 읍(邑)의 수령이 한 집안에서 나왔으니

빛나는 그 이름에 더할 게 없네.

이름 있는 가문의 경사를 이미 이어받았으니

태평성대의 아름다움을 더욱 빛내리라.

송사하는 뜨락(訟庭)에 목색(木索)이 한가롭고

인수의 경역(壽域)엔 뽕나무와 삼이 풍부해지겠지.

바라건대 백성들의 아픔을 잘 고쳐 주어

임기를 기다리지 말고 상주고 벌줌이 있기를

Ⅳ-031-02)

이천(伊川)은 옛 고을이라 경계가 황량하니

한 도(道)에서도 산과 시내가 가장 끝일세.

붉은 해가 저물어가며 가는 길을 재촉하고

푸른 구름의 가을빛이 행장을 비춰 주리라.

사군(使君)이 펼치는 교화에 편당(偏黨) 없으면

백성들도 은혜를 느껴 더욱 분발하리니,

무리들의 마음을 내 마음으로 삼는다면

오늘의 원자(元子)가 옛날의 공(龔)․황(黃)이리라.

 

送元承奉赴伊川監務詩(幷序)

洪武二十年九月十九日。伊川新守令元君將赴官。謂予曰。臨民之任重矣。非愚不肖之所當也。而吾本無才德智術。何敢守其職乎。辭而不去哿矣。勢難能免。不得已而行矣。予解其意而答之曰。監務之職以我國家設官分職之制。從古以來各司攸屬。本把人吏之所受也。然專其城而牧民御吏之法。與州牧大官一也。但以位卑任重。間有其弊 故方今更化之初。憲司奏聞以監務․縣令之任。陞其階於叅官。揀擇賢良公正堪爲守令者以遣之。今君亦膺是選。必有所以。非求媚於世而得之。觀察使之所薦聞。聖明君之所選用。其不輕而重也明矣。夫然則君之道德行乎中而溥於外。衆所望也。且先一縣而後四海。豈非吾君與觀察使之心乎。他日所就。其可量哉。抑又君之妹夫。若婿先赴是任。俱有才德之稱。有以事乎上。有以臨乎下。政聲藹然。一家三人。爲郡一時。盛朝聲譽何如也。若非賢且智者。其能如是乎。君其勉哉。因書二詩以贐行云。

三邑分憂出一家 赫然聲譽更無加

已能承襲高門慶 將欲增輝盛代華

應是訟庭閑木索 方期壽域富桑麻

要須用盡醫治術 當有襃懲不待瓜

 

伊川古縣境荒凉 一道山川欲盡方

紅日暮痕催去路 碧雲秋色照行裝

使君宣化無偏黨 民俗懷恩有激揚

若以衆心爲已用 卽今元子古龔黃

Ⅳ-032)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든 사내가 게으른데다 잘하는 게 없어

그저 시나 읊고 술잔을 들 뿐일세.

세상 일이 옳다 그르다 어찌 관계하랴

사람의 마음 드나드는 건 방향을 알 수가 없네.

난간에 가득한 가을 그림자가 시흥을 일으키고

온 성에 가득한 맑은 빛은 취광(醉狂)을 뒤흔드네.

만고(萬古)도 한 순간임을 일찍이 알았으니

백년 가지고 부질없이 슬퍼하지 않으리라.

 

卽事

病夫疎懶頗無良 只愛吟哦把酒觴

世事是非何敢處 人心出入莫知鄕

一軒秋影牽詩興 滿郭晴光攪醉狂

萬古曾知同一瞬 休將百歲浪悲傷

Ⅳ-033) 9월 9일 중양절

이(李) 박사(博士)가 원(元) 조대(措大)와 함께

술병에 국화 꺾어 들고 산 속 서재를 찾아왔네.

노란 꽃 띄워 술잔 드는 것도 해롭지 않은데

흰 털 뽑으며 꽃을 보니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즐겁게 놀 때가 왔으니 모름지기 흥을 내야지

아무리 바빠도 회포는 풀어야 하네.

반쯤 취한 마음은 하늘 땅 밖으로 달리는데

붉게 물든 가을 산이 작은 섬돌을 비추네.

 

重九

李博士同元措大 携壺折菊訪山齋

泛黃擧酒殊無害 鑷白看花豈不佳

行樂及時須遣興 奔忙底處可開懷

半酣心遠乾坤外 紅樹秋山映小階

Ⅳ-034) 이 달 15일. 나라에서 정창군(定昌君)을 세워 왕위(王位)에 올리고 전왕(前王) 부자는 신돈(辛旽)의 자손이라 하여 폐위시켜 서인(庶人)으로 만들었다는 말을 듣고

Ⅳ-034-01)

전왕 부자가 각기 헤어져

만리 동쪽과 서쪽 끝으로 갔네.

몸 하나야 서인(庶人)으로 만들 수 있지만

올바른 이름은 천고에 바꾸지 못하리라.

Ⅳ-034-02)

할아비 왕의 믿음직한 맹세가 하늘에 감응했기에

그 끼친 은택이 수백년을 흘러 전했었네.

어찌 참과 거짓을 일찍이 가리지 않았던가

저 푸른 하늘만은 거울처럼 밝게 비추리라.

 

聞今月十五日。國枝家以定昌君立王位。前王父子。以爲辛旽子孫。廢爲庶人

前王父子各分離 萬里東西天一涯

可使一身爲庶類 正名千古不遷移

 

祖王信誓應乎天 餘澤流傳數百年

分揀假眞何不早 彼蒼之鑑照明然

Ⅳ-035) 매섭게 추운 밤에 읊음 (두 수)

Ⅳ-035-01)

하늘을 뒤흔드는 겨울 바람이 성내며 숲에 외치니

햇빛이 희미해져 자주 그늘이 지네.

토끼 굴과 여우 언덕이 어찌 이리도 군색해졌나

붕새와 고니 날아가는 길에도 부침(浮沈)이 있겠네.

벼룻물마저 얼어붙으니 서리 심한 줄 알겠고

화롯불마저 꺼지니 밤 깊은 줄 알겠네.

얼음과 눈 험한 길에 곡식 나르는 사람들

힘든 일에 마음까지 괴롭히니 어찌 견디랴.

Ⅳ-035-02)

시장 바닥에 살면서 산 속 산다고 비웃지 마소

산에는 맑은 빛 있고 나무에는 그늘 있다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구름과 연기를 사랑하고

해와 달을 따라서 뜨고 잠길 뿐일세.

삭풍과 삭설이 차가운 위엄을 떨치니

강가 고을에 분한 기운이 깊어져,

걱정이 많다보니 잠도 오지 않고

깜박깜박 외로운 등불만 붉은 마음을 비추네.

 

【이때 전왕(前王)은 강릉에 있고, 아들 왕은 강화에 있었다】

 

苦寒夜吟(二首)

掀天朔吹怒號林 日色熹微屢作陰

兎窟狐邱何窘迫 鵬程鵠路有浮沉

硯池始動知霜重 爐火初殘覺夜深

氷雪險途移粟輩 不堪勞力又勞心

 

休將朝市笑山林 山有淸光樹有陰

但愛雲烟亙今古 從敎日月自升沉

朔風朔雪寒威重 江郡江都憤氣深

耿耿不眠多念慮 一燈明暗照丹心

(時前王在江陵。子王在江華)

Ⅳ-036) 나라의 명령으로 전왕(前王) 부자에게 죽음을 내리다

지위가 종정(鍾鼎)까지 높아진 것도 임금의 은혜건만

도리어 원수가 되어 한 집안을 멸망시켰네.

한 나라에 큰 복을 누려 마땅하건만

구원(九原)에서도 그 원한을 씻기 어렵게 되었네.

옛 풍속은 없어져도 때는 되돌아오니

새 법이 맑아야 도가 더욱 높아지리.

오로지 대궐을 향해 만세 부르니

두터운 은혜 산 마을까지 미치게 하소서.

 

國有令。以前王父子賜死

位高鍾鼎是君恩 反自含讐已滅門

一國必應流景祚 九原難可雪幽寃

古風淪喪時還肅 新法淸平道益尊

專向玉墀呼萬歲 願施優渥及山村

Ⅳ-037) 1390년(경오) 설날 (두 수)

Ⅳ-037-01)

닭소리에 일어나 옷깃 바로잡고 앉으니

북두성은 기울고 새벽 안개 자욱하네.

때 맞춰 손자 아이들이 들어와 세배하니

장년(壯年) 시절 내 마음이 뭉클 일어나네.

Ⅳ-037-02)

동군(東君)이 새벽에 동쪽에서 돌아와

나를 향해 따뜻한 웃음을 보내 주었네.

“이미 늙었다고 한탄하지 말게.

그대 위해 일부러 봄빛을 가지고 왔네.”

 

庚午元正(二首)

鷄鳴起坐整衣襟 星斗闌干曉霧深

時有兒孫來再拜 油然發動壯年心

 

東君犯曉自東回 向我溫溫一笑開

且道莫嗟身已老 故將春色爲君來

Ⅳ-038) 12일. 입춘(立春)

세월은 날아가는 새와 같고

넓은 들판에는 또 토우(土牛)가 있네.

인생은 손으로 뒤집는 구름이고

세상일은 머리에 가득한 눈일세.

 

十二日立春

歲月如飛鳥 郊原又土牛

人生雲覆手 世事雪渾頭

Ⅳ-039) 문수사(文殊寺)에 가서

Ⅳ-039-01)

가파른 길에 끊어진 돌다리를 지나니

높은 누각이 오똑하게 보이네.

눈이 쌓여서 시냇물 아직 못 흐르고

구름이 밀려와 골짜기 더욱 깊숙하네.

연기와 노을은 예나 이제나 같고

세월은 저절로 봄 되었다 가을 되네.

선문(禪門)의 일을 배우려고 하면

마음을 꼭 잡고 화두(話頭)를 물어야 하네.

Ⅳ-039-02)

바람 부는 난간에 향내가 흩어지고

범패(梵唄) 소리가 종루(鍾樓)를 흔드네.

나그네 생각이 고요해지고

스님 이야기는 맑고도 그윽해라.

산은 비어도 구름은 만고에 그대로이고

소나무는 늙어도 달은 천추에 새롭네.

길이 미끄러워 발 디디기 어려운데

당두(堂頭)가 바로 석두(石頭)일세.

 

遊文殊寺

崎嶇過絶磴 突兀見危樓

雪溺溪猶澁 雲來谷更幽

烟霞亙今古 歲月自春秋

欲學禪門事 將心問話頭

 

風檽散香穗 梵唄動鍾樓

客慮靜還寂 僧談淸且幽

山空雲萬古 松老月千秋

路滑難容足 堂頭是石頭

Ⅳ-040) 느낌이 있어

뜬 구름(浮雲)은 언제나 일어났다 스러지고

소장(消長)하는 이치도 때를 따라 그러하네.

세상 일(世故)만은 사람을 빠뜨리고 끝내 건지지 않으니

머리 들자 하늘과 땅이 스스로 검고 누렇구나.

 

有感

浮雲起滅是尋常 消長隨時理亦當

世故溺人終不弭 擧頭天地自玄黃

Ⅳ-041) 중서(中書) 조박(趙璞)에게 삼가 부침

내 생애가 산만하고 들은 것이 적어

곡구(谷口)에서 여러 해 동안 김매기를 배웠네.

홀로 섬포(蟾浦)의 달도 바라보다가

천리 곡봉(鵠峰)의 구름도 바라보았네.

소유(巢由)처럼 되기를 감히 기대하랴만

요순(堯舜) 같은 임금 만난 것을 기뻐했네.

자제 몇 사람이 문하에서 놀고 있으니

인술(仁術)을 베푸시어 닭 떼에서 벗어나게 해주소서.

 

奉寄趙中書璞

我生疎散寡攸聞 谷口多年便學耘

獨對一輪蟾浦月 每瞻千里鵠峯雲

敢期竊比巢由輩 自喜生逢高舜君

子侄數人遊輦下 願將仁術出雞群

Ⅳ-042) 23일 아침. 눈이 내리는데 총지(摠持) 어머니가 술자리를 베풀다

어젯밤에 봄을 재촉하는 보슬비가 내리더니

새벽엔 가랑눈이 하얗게 깔렸네.

소박한 정취와 한가한 생각을 그려내기 어려운데

뜻을 읊고 회포를 푸는 것도 잘 되지 않네.

언덕에 흩날리는 것이 버들개지 아닌가

떨기에 붙은 것은 참매화인 듯하구나.

이 가운데 아이들 하는 말을 들을 만하군.

날씨가 차가우니 이 술잔을 드시라네.

 

二十三日朝雪。摠持母設酒

昨夜催春小雨來 曉看微雪灑皚皚

野情閒思殊難寫 嘯志吟懷亦未裁

飄岸只這非亂絮 惹叢那箇是眞梅

就中兒子言堪用 天氣淒寒飮此盃

Ⅳ-043) 꿈을 적음

요즘 한산군(韓山君)이 억울하게 참소를 당해 장단(長湍)으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그곳을 바라보며 그리움을 달랜 지 오래되었다. 이 달 20일 이후 이틀 밤이나 꿈에 그를 뵈었는데, 어젯밤 꿈에는 손님과 함께 어떤 동네 어귀에서 놀다가 우연히 한 초막에 들어갔다. 그런데 공이 마루 위에서 세수하고 있었다. 나는 두 번 절하고 그 앞에 나아가 섰는데, 공이 아들 판서(判書)를 불러 말했다.

양언(揚彦)아! 너는 저 집에 가서 먼저 알려라. 내가 내일 새벽에 운암(雲巖)으로 갈 테니, 신씨 댁에서 만나자고 하라. 만일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후회할 것이라고 하라.”

판서는 곧 떠나고, 공은 방에 들어가 행장을 꾸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 기둥 구멍에 끼어 있는 흰 종이 한 장을 보고 곧 끄집어내어 펼쳐보았는데, 공이 손수 쓴 글이었다. 반쯤 읽다가 깨었는데, 거기 무슨 말이 쓰여 있었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장차 어떤 징조가 있을는지 모르겠다. 때는 정월 25일밤 3경이었다. 그래서 두 편의 시를 써서 기록한다.

Ⅳ-043-01)

지극한 보배는 빛을 감추고 정치는 가혹한데

누가 그 보배를 갈고 닦으며 새롭게 하려나.

요즘 사흘 밤이나 잇따라 꿈에 뵙고서

혼과 놀던 일 기억하며 한 노래를 짓네.

나라의 경륜은 화택(火澤)으로 돌아가고

강하의 큰 배는 풍파에 시달리니,

하늘이 만일 사문(斯文)을 없애려 하지 않으신다면

비록 광(匡) 사람들이 있단들 날 어찌하랴.

Ⅳ-043-02)

옥에는 티 없건만 일이 이미 글렀으니

형(荊) 사람이 두 발 벤 게 남의 일 아닐세.

해동의 바람과 달이 분노를 머금고

천하의 영웅들이 모두 다 슬퍼하네.

만 백성들이 다 같이 새로운 해와 달을 우러르니

삼한은 언제나 옛 산하 그대로일세.

그릇되고 올바른 것을 바로 분별할 분 계시니

자나 깨나 기체 편안하시길 빌 뿐일세.

 

記夢

近聞韓山君謬被讒喙。遷居長湍。向方馳慕已久。是月念後。夢謁者兩宵矣。又昨夢與客遊一洞口。偶入一茅舍。公立于廳上。如盥漱狀 予再拜進前而立。公卽呼男判書曰。揚言(如名)。汝往彼處。先使知之。我明晨將往雲巖。可期會於申家宅。若不爾。彼必有悔嘆。判書卽去。公入室如理裝。予見柱間鑿孔中有一張白紙。取而披之。乃公之手寫書也。讀之半。未終而覺。忘其辭意。不知將有何祥乎。正月二十五日夜三更也。書二詩以誌之。

至寶韜光政令苛 有誰如琢復如磨

邇來夢謁連三夜 記取魂遊作一歌

邦國經綸歸火澤 (睽 卦也) 江河舟楫困風波

天如未喪斯文也 縱有匡人乃我何

 

玉自無瑕事已訛 荊人兩刖定非他

海東風月應含憤 天下英雄所共嗟

萬姓同瞻新日月 三韓自固舊山河

明分枉正蒼蒼在 寤寐祈傾體氣和

Ⅳ-044) 2월 3일. 눈 내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 읊음 (세 수)

Ⅳ-044-01)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이 하늘에 가득하니

병든 나그네 무료해서 온갖 생각이 들끓네.

이빨이 아파오니 견디기 어렵고

정신이 혼미해지니 잠만 쉽게 드네.

은빛 성(城)과 분칠한 가퀴는 높고 낮게 이어졌고

옥 나무와 구슬 가지는 앞뒤로 벌려 섰네.

아름다운 경치를 함께 즐길 사람이 없어

홀로 읊조리며 부질없이 섬계(剡溪)의 배를 그리워하네.

Ⅳ-044-02)

내 평생 어느 일인들 때와 어긋나지 않았던가.

성기고도 산만해 일찍 세상에 버림받았네.

비웃고 나무라도 땅처럼 참았고

홀로 있어도 삼가며 하늘이 알까 두려워했네.

이른 봄이라 시흥(詩興)이 한가롭게 일어나는데

만년(晩年)의 풍정(風情)은 쓸쓸하기만 하네.

남쪽 창에 옮겨 기댔지만 하는 일 없어

산의 눈이 솔가지 누르는 것만 바라보았네.

Ⅳ-044-03)

유유한 내 신세를 괴롭게 읊어 왔지만

요즘 세상일은 눈으로 못 보겠네.

시와 글씨로는 이 질탕한 정을 다 적기 어려운데

근력마저 쓰라리니 병을 막을 수 없네.

세월이 백발을 재촉하는 줄 깨달았는데

꽃 숲에 온 봄소식에 또 놀랐네.

태평성대를 만회할 사람이 그 누구랴

옛날을 느끼고 지금을 슬퍼하면서 푸른 산을 마주하였네.

 

二月三日。雪中自詠(三首)

從朝至暮雪漫天 病客無聊百慮煎

牙齒痛來難得人 精神損盡易成眠

銀城粉堞連高下 玉樹瓊枝列後前

佳景無人共牢落 獨吟空憶剡溪船

 

吾生何事不違時 疎散曾爲世所麾

任却譏呵須地忍 謹於幽獨畏天知

早春詩興悠然起 晩歲風情颯爾衰

徙倚南窓無一事 只看山雪壓松枝

 

身世悠悠入苦吟 眼看時事不堪任

詩書跌宕情難述 筋力酸辛病未禁

頗覺年光催雪髮 又驚春信到花林

挽回盛世誰爲術 感古悲今對碧岑

Ⅳ-045) 이튿날. 또 절구 두 수를 읊다

Ⅳ-045-01)

아침에서 밤까지 밤에서 아침까지

아침에도 개이지 않고 낮에도 흩날리네.

마치 소림(少林)에서 성품을 전할 때에

조사(祖師)의 허리까지 눈이 쌓인 것 같네.

Ⅳ-045-02)

부엌 불은 쓸쓸하고 눈이 문을 감싸안았네.

숲 속의 새들도 날개를 접고 소리가 없네.

고을 사람이 정번육(丁膰肉)을 보내와

배불리 먹고 향 피워 성인(聖人) 은혜에 절하였네.

 

明日又吟二絶

從朝至夜夜連朝 朝不晴仍晝亦飄

還似少林傳性日 滿庭堆及祖師腰

 

廚火蕭疎雪雍門 林烏戢翼寂無喧

鄕人送至丁膰肉 飽食燒香拜聖恩

Ⅳ-046) 12일. 비가 오는데 정(鄭) 예안(禮安)이 찾아 왔다

산 비가 정녕 쓸쓸히 내리니

봄바람 부는 이월 초일세.

그 소리가 외로운 나그네의 베개를 괴롭히고

차가운 기운이 친구의 수레를 적셨네.

항아리 속엔 청주와 탁주가 가득하고

소반 가로질러 잉어가 놓여 있네

반쯤 취한 술기운 따라

심경이 더욱 맑고 깨끗해지네.

 

十二日雨中。鄭禮安來訪

山雨正踈疎 東風二月初

聲侵幽客枕 寒濕故人車

尊滿聖賢酒 槃橫天子魚

陶然乘半醉 心境更淸虛

Ⅳ-047) 느낌이 있어

제도(制度)와 강상(綱常)이 해동(海東)에 있었는데

미친 물결이 덮쳐와 그 유풍(遺風)이 없어졌네.

천둥과 번개는 언어(言語) 밖에 일어났다 사라지고

해와 달은 손바닥 안에 떴다가 잠기네.

소상강(瀟湘江) 가에서 국화 먹으며 마음 괴롭고

상산(商山)에서 지초를 먹으며 생각 끝 없었지.

서글피 머리 돌리니 창오산((蒼梧山)은 먼데

저녁볕 비추는 곳에 풀빛만 아득하네.

 

有感

制度綱常在海東 狂瀾旣倒沒遺風

雷霆起滅言辭表 日月昇沉掌握中

餐菊湘濱心更苦 茹芝商嶺念無窮

悵然回首蒼梧遠 斜照微茫草色空

Ⅳ-048) 스스로 읊음

병든 사내가 지팡이에 기대 연기와 노을 바라보며

동풍(東風)을 향해 여러 사물들을 구경하네.

진눈깨비 열흘 내리니 봄은 아직 차가운데

산과 시내 십리에 해가 막 비꼈네.

요즘 세상 일들을 어찌 다 이야기하랴

늙어가는 생애라 자랑할 것이 없네.

남들은 사치하게 꾸미며 기운 내는데

나 혼자 계획 세우고 말 많다고 웃었네.

 

自詠

病夫扶杖對烟霞 欲向東風檢物華

雨雪一旬春且冷 山川十里日初斜

年來世故那容說 老去生涯豈足誇

盡愛紛奢增意氣 獨將身計笑周遮

Ⅳ-049) 생각나는 대로 읊음 (두 수)

Ⅳ-049-01)

외진 곳에 숨어 살면서 늙고 병드니

푸른 이끼 골목에 발길이 끊어졌네.

산새가 울어 고요한 생각 깨뜨리고

남은 눈에 저녁볕이 먼 숲을 비추네.

Ⅳ-049-02)

산 마을에 봄이 들어 해가 차츰 길어졌는데

남은 추위가 아직도 꽃가지를 억누르네.

병든 사내라 정(情)과 흥(興)이 다 스러졌건만

아픈 몸 추스리며 시 한 수를 읊어보네.

 

卽事(二首)

地僻幽棲老病深 綠苔門巷絶跫音

暝禽啼破寥寥思 殘雪斜陽照遠林

 

春入山村日漸遲 餘寒尙勒百花枝

病夫情興消磨甚 槩栝吟成一首詩

Ⅳ-050) 천원해림사(川源海琳師)의 시권에 씀

고요하고 맑은 영원(靈源)이 얼마나 깊을까.

깊은 그곳에 언제나 값진 보배를 간직했으리.

달빛이 스며들어 안팎을 통했으니

이를 일컬어 청정한 본래 마음이라 하네.

 

書川源海琳師卷

靈源湛湛幾何深 深處恒藏無價琛

月浸波光通內外 是爲淸淨本來心

Ⅳ-051) 봄날의 느낌 (세 수)

Ⅳ-051-01)

모든 나무들이 해를 바라고 자라며

온갖 꽃들도 한창 피어나니,

늙은 소나무가 비록 지조 있지만

병든 줄기는 이미 생각이 없어졌네.

낮잠을 자다가 새가 불러 깼는데

봄 놀이를 누구와 약속할까.

나 혼자 구경 가려다가

부질없이 사수시(四愁詩)를 읊조리네.

Ⅳ-051-02)

임금과 어버이의 은의(恩義)가 중하건만

어느 때에야 보답하려나.

젊었을 때에는 세 번 반성 하지 않았고

늙어서는 아홉 가지 생각 마저 끊어 버렸네.

세상 인연은 모두 이치에 어긋나고

마음과 일도 으레 기대에 어긋나,

충성과 공경(忠敬)이 끝내 보람없으니

부질없이 망극(罔極)의 시만 노래하네.

Ⅳ-051-03)

내 생애가 참으로 떠돌이 같아

시세(時世)를 따르며 살았을 뿐일세.

허물이 있으면 서슴없이 고치고

마음을 다잡을 땐 생각하는 듯이 했네.

위기를 만나면 마땅히 삼가면서

탄탄한 큰 길을 기약했건만,

백두(白頭)의 시를 읊조리게 되니

미친 노래가 시 같기도 하네.

 

春感(三首)

萬木向榮日 羣花正發時

老松雖有操 病幹已無思

晝寢鳥呼起 春遊誰與期

獨懷觀物志 空詠四愁詩

 

君親恩義重 酬荅定何時

小少不三省 衰遲絶九思

世緣俱背理 心事例違期

忠敬終無效 徒歌罔極詩

 

吾生眞漫浪 兀兀强隨時

遇過飜然改 操心儼若思

危機當所愼 坦道要須期

吟得白頭詠 狂歌或似詩

Ⅳ-052) 비 내리는 것을 보고 생각나는 대로 읊음

산 꽃들은 울긋불긋 새들은 서로 부르는데

혼자 앉아 하염없이 술꾼들을 생각하네.

꿈에 동선(洞仙)과 함께 이슬을 마셨으니

비오는 창가에서 낮잠 자면서도 공부를 했네.

 

雨中卽事

山花紅紫鳥相呼 獨坐無端憶酒徒

夢與洞仙傾露液 雨牕春睡有工夫

Ⅳ-053) 4월 초엿새. 별감(別監) 부부가 음식을 차림 (6언 4수)

Ⅳ-053-01)

구불구불 시골길에 풀이 거친데

효성스런 부부가 함께 찾아왔네.

봄 막걸리 새로 걸러 향기로우니

두어 잔만 마셔도 큰 도에 통하겠네.

Ⅳ-053-02)

부드러운 떡 맛있는 안주에 가느다란 국수까지

배불리 먹고 나자 모든 시름이 없어졌네.

너희들이 이렇게 받들고 공경하니

나도 이 어려움을 잘 견디며 살리라.

Ⅳ-053-03)

자녀들이 눈 앞에 단란하게 있으니

이 늙은이 정과 흥도 유유하건만,

옛 사람은 한 번 간 뒤에 소식 없으니

아득한 황천(黃泉) 길이 아홉 겹일세.

Ⅳ-053-04)

울긋불긋 꽃과 나무가 봄을 붙들고

남산과 북산에 두루 들어왔네.

반쯤 취해서 기대노라니 마음 느긋한데

그윽한 새들까지 가까이 와서 노래 부르네.

 

四月初六日。別監夫婦設食(六言四首)

村逕崎嶇蕪綠 義夫孝婦同來

新篘春釀香釅 大道通於數杯

 

細餠嘉肴細麵 飽來萬慮皆空

爾曺能養能敬 我亦猶能固窮

 

子女團圝眼下 老夫情興從容

昔人一去無信 杳杳黃泉九重

 

萬般紅綠扶春 遍入南山北山

政倚半酣心遠 幽禽近我間關

Ⅳ-055) 이 달 23일, 관찰사도부사(觀察使道副使) 정사의(鄭士毅) 공이 누추한 서재에 찾아 왔다 (다섯 수)

Ⅳ-055-01)

풀이 깊은 산길이라 지나는 사람도 끊어지고

저녁볕이 비추는 먼 물결만 바라볼 뿐인데,

갑자기 높은 행차가 옥 발굽을 괴롭혔으니

삼라만상이 참으로 새로운 빛을 내네.

Ⅳ-055-02)

봄 일이 어느새 앓는 사이에 지나가 버려

가련케도 모든 광경이 달리는 물결을 따르네.

지팡이 짚고 억지로 일어나 꽃나무를 바라보니

두 눈이 몽롱해서 그물이라도 친 듯하네.

Ⅳ-055-03)

명공(明公)의 오늘 행차를 깊이 감사하노니

마른 못의 고기가 은혜 물결을 만난 듯하네.

한 평생 무엇으로 이 소중한 덕을 갚으랴

내 재주가 비단같이 엷어 부끄럽구려.

Ⅳ-055-04)

강호에 십년 살다보니 누가 즐겨 찾으랴

바람 연기 만리에 흰 갈매기 물결 뿐일세.

요즘 들으니 난새와 봉새가 대각(臺閣)에 가득 찼다는데

모래밭 갈매기가 어찌 그 찬란함을 볼 수 있으랴.

Ⅳ-055-05)

세상일은 구름 같고 세월은 지나가는데

방어의 붉은 꼬리가 풍파에 시달리네.

가난을 구제하며 인술(仁術)을 베푸시니

성탕(成湯)의 한쪽 그물보다 훨씬 훌륭하셔라.

 

是月念三。觀察使道副使鄭公(士毅)垂訪陋齋(五首)

草深山路絶經過 只看斜暉明遠波

忽有高軒勞玉趾 光生物像政森羅

 

春事堂堂病裡過 可憐光景逐奔波

扶笻强起看花樹 兩眼朦朧如隔羅

 

深感明公此日過 涸鱗方得霈恩波

一生重德將何報 反愧才能薄似羅

 

十載江湖誰肯過 風烟萬里白鷗波

近聞鸞鳳盈臺閣 焉得沙鷗見(罒+廚)羅

 

世事如雲歲月過 魴魚赬尾困風波

賑窮今日施仁術 大勝成湯一面羅

Ⅳ-056) 정사의(鄭士毅) 공의 화답을 보고 다시 차운함 (다섯 수)

Ⅳ-056-01)

도(道)가 못 미침도 없고 지나침도 없으니

어찌 복파장군(伏波將軍)의 공업(功業)을 부러워하랴.

은혜의 빛이 천하에 뒤덮인 것을 보니

젊은 시절 명성이 신라(新羅)를 흔들었으리.

Ⅳ-056-02)

채색 구름 신선이 날마다 찾아오니

축수의 술잔 가득 부어 푸른 물결 넘치네.

달의 액운 해의 재앙을 모두 다 피했으니

어찌 땅 그물과 하늘 그물을 걱정하랴.

Ⅳ-056-03)

채색 구름 신선이 날마다 찾아오니

축수의 술잔 가득 부어 푸른 물결 넘치네.

달의 액운 해의 재앙을 모두 다 피했으니

어찌 땅 그물과 하늘 그물을 걱정하랴.

Ⅳ-056-04)

도문(桃門)의 최호(崔顥)는 두 번이나 지나면서

정든 사람 보지 못해 눈길을 돌렸지만,

어찌 상군(相君)께서 다시 찾아오신 날만 같으랴

흘러내리는 첩 눈물이 붉은 적삼을 적시네.

Ⅳ-056-05)

내 나이 예순을 이미 지났건만

몸은 아직도 사람 바다 물결에 부대끼네.

전조(前朝)의 밝은 교화를 이제야 느끼면서

꽃 심을 때는 먼저 만다라(曼多羅)부터 심네.

 

【병신년(1356)에 나라에서 전국의 사원(寺院)과 인가(人家)에 명령을 내려 모두 이 꽃을 심으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구절을 썼다.】

 

鄭公見和。復次韻(五首)

道無不及亦無過 功業何曾慕伏波

方覽恩光被天下 妙年聲價動新羅

 

彩雲仙子日相過 壽酒盈巵瀲綠波

月厄年災俱避去 何憂地網與天羅

 

草長郊原新雨過 嬌雲濃暖水生波

此時進謁歡情極 盡意頻傾金叵羅

 

桃門崔顥昔重過 不見情人廻眼波

何似相君重到日 闌干妾淚濕紅羅

 

身年六十已曾過 兀兀相隨人海波

追感前朝明敎化 種花先種曼多羅

(丙申年。宣旨勅內外寺院人家皆種此花。故云)

Ⅳ-057) 다시 앞의 운을 썼다. 풍악(楓岳) 관동(關東)으로 향하는 정공(鄭公)을 보내며

Ⅳ-057-01)

이제 관동으로 향하면서 헤어지는 곳을 지나면

해당화 핀 모랫길 맑은 물결을 돌아가리니,

공께선 평생의 뜻을 활짝 펼치시어

누정에서 풍류 즐기며 비단옷에 취하소서.

Ⅳ-057-02)

가는 길에 아마도 풍악(楓岳)을 지나실테니

장양(長陽)의 산 빛이 회양(淮陽) 물결에 비추리다.

말에 내맡기고 한가롭게 시 읊으시면

채찍 끝 맑은 강에 푸른 비단 일렁이리다.

 

復用前韻。送鄭公向楓岳關東

今向關東別境過 海棠沙路繞淸波

知公豁展平生志 絃管樓臺醉綺羅

 

去路應從楓岳過 長陽山色照淮波

想知信馬閑吟處 鞭末淸江漾碧羅

Ⅳ-058) 옛 일을 통해 느낀 일

Ⅳ-058-01)

소남(召南)의 시인들은 감당(甘棠)을 읊었고

단보(單父)의 금옹(琴翁)은 마루에서 안 내려왔지.

형주(荊州)의 양호(羊祜)는 그 이름 만고에 전해

이끼 낀 비석이 아직도 현산(峴山) 언덕에 있네.

Ⅳ-058-02)

방참(方叅)이 그 옛날 임당(任棠)을 보면

포자(抱子)가 해수당(薤水堂)을 활짝 열었지.

이 도가 폐지되자 사람들이 예(禮)가 없어져

곤강(崑崗)에 불이 나자 옥(玉)과 돌을 함께 태웠네.

 

感古

召南詩客詠甘棠 單父琴翁不下堂

羊祜荊州名萬古 苔碑尙在峴山崗

 

方叅昔日見任棠 抱子旁開薤水堂

此道廢來人不禮 俱焚玉石火崑崗

Ⅳ-059) 과거 보러 가는 유관(有寬) 원고옥(元高沃)을 보내면서

깊은 골짜기에 봄바람이 지나니

어린 꾀꼬리가 나는 연습을 마쳤네.

교목(喬木)으로 옮겨 갈 마음 참을 수 없어

꽃나무 숲을 향해 일어나려고 하네.

잘 나고 못난 것은 사람의 공이지만

나가고 들어오는 것은 하늘이 시키시니,

다리 기둥에 글쓴 늙은이가

촉(蜀) 나라에서 혼자 훌륭하게 만들지 말게.

 

送元有寬高沃赴試

幽谷過春風 鸎兒調羽已

遷喬意不勝 欲向花林起

巧拙人之功 行藏天所使

毋令題柱翁 於蜀獨專美

Ⅳ-060) 향학(鄕學)에 들어가 성인을 배알하고

전당(殿堂)이 쓸쓸하게 남쪽을 향해 열렸는데

비 지나간 뜨락에 푸른 이끼 가득하네.

늙고 병든 이 문인(門人)이 두 번 절하건만

성인께선 재량할 줄 모른다고 생각하시겠지.

 

到鄕學謁聖

殿堂寥落向南開 雨過庭除滿綠苔

老病門人來再拜 聖心應念不知裁

Ⅳ-061) 여러 서생들에게 보임 (세 수)

Ⅳ-061-01)

남에게 문학을 가르치자니 내가 먼저 부끄러워

옛 것 익히고 새 것 알기에 모두 능하지 못했네.

재업(才業)은 본래 자유(子游)와 자하(子夏)와 같지 못하니

이곳에 온 부끄러움을 견딜 수 없네.

Ⅳ-061-02)

배우는 사람은 혐의(嫌疑)를 멀리 하게나.

한갓 문장만 외운다면 어찌 안다고 하랴.

부디 군자(君子)의 뜻을 굳게 지키고

반드시 예의 염치를 먼저 기약하라.

Ⅳ-061-03)

비 걷힌 천지에 서늘한 기운 들었으니

책 펼쳐 읽기에 가장 좋은 철일세.

등불을 친하는 거야 사람들 모두 하지만

저마다 부지런히 문장(文場)을 밟아야 하리.

 

示諸生(三首)

誨人文學愧吾曾 溫故知新㧾未能

才業本非游夏輩 此來羞恥重難勝

 

學人須要遠嫌疑 徒誦文詞豈曰知

但願堅持君子志 禮儀廉恥必先期

 

雨收天地入新凉 編簡披看此㝡良

燈火可親人可共 各須勤力踐文揚

Ⅳ-062) 7월 8일. 느낌이 있어 (이날이 내 생일이다)

내 나이 벌써 예순 하나에

오늘이 바로 내 생일일세.

간은 떨어지고 마음은 재와 같은데다

머리도 희어지고 얼굴은 칠한 듯하네.

몸가짐이 어찌 이리도 고달픈지

남보다 뛰어나길 이제는 단념했네.

형제는 모두 흩어져 살고

아내와 자식마저 한 집에 있지 않네.

어버이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랴

자식 도리를 잘못한 게 너무 많네.

이러한 생각하며 소나무를 어루만지니

슬픈 바람이 소슬하게 일어나네.

 

七月八日有感(是予生日)

身年六十一 今日是生日

謄落心如灰 鬂衰顔似漆

持身何苦辛 絶念於超逸

兄弟其違行 妻孥不在室

親恩何以酬 予職尤多失

念此蕪孤松 悲風起蕭瑟

Ⅳ-063) 정(鄭) 부사(副使)의 행헌(行軒)에 수박(西瓜)을 드리면서

수박밭이라야 겨우 몇 이랑이건만

줄기가 뻗어 서재를 둘러쌌네.

올망졸망 꽃들은 다 떨어지고

주렁주렁 낱낱이 달려 있구나.

그 속이 익은 걸 비로소 알고

맛이 더욱 좋은 것도 이제야 알았네.

따서 바치노니 더위 식히시고

바라건대 이 마음 살펴 주소서.

 

以西瓜獻鄭副使行軒

瓜田纔數畝 成蔓繞山齋

灼灼花花盡 纍纍箇箇排

始知瓤已熟 方覺味尤佳

摘獻爲消熱 恭惟諒此懷

Ⅳ-064) 유지(宥旨)를 읽고

열 줄의 유지가 이 산골에 내리니

사해(四海) 백성들이 모두들 만세 부르네.

효를 세우고 명분 바로잡아 옛 법을 따르고

어버이 공경하고 조상 높이며 큰 터전을 지키라셨네.

상(喪)을 치르고 제사 받들 땐 정성이 간절하고

허물 용서하고 어진 마음 미루어 덕과 의를 갖추라셨네.

읽고 나니 이 마음이 몹시 감격해

크나큰 왕업이 당우(唐虞)보다 뛰어남을 알겠네.

 

讀宥旨

十行寬敎下綿區 四海民同萬歲呼

立孝正名遵古典 敬親尊祖守丕圖

愼終追遠誠心切 赦過推仁德義俱

讀罷寸懷多感激 須知景業邁唐虞

Ⅳ-065) 대간(大諫) 최사(崔嗣)에게 부침

빙함(氷銜) 벼슬을 지녀 아름다운 이름 얻었으니

어진 신하 알아 주는 어진 임금을 만났네.

간쟁(諫諍)하는 직책 맡았으니 하늘 위엄에 가깝고

세상에서 신선이라 부르니 지위도 맑구나.

손으로 금화로를 당기니 향 연기가 가늘고

문채가 은 화살을 이루니 물시계 소리 들리네.

조회가 끝나 순지(荀池)에 달 떠 오르면

황봉(黃封)을 펼쳐보며 이 늙은이를 기억하시게.

 

寄崔大諫(嗣)

官帶氷銜得美名 正逢仁主識賢明

職司諍議天威近 世號神仙地位淸

手惹金爐香細細 章成銀箭漏丁丁

想應朝罷荀池月 斟酌黃封憶老生

Ⅳ-066) 최(崔) 대간(大諫)이 부친 시에 차운함

Ⅳ-066-01)

경사스런 소식을 반갑게 듣고 고문(高門)을 축하하니

이 마음은 서쪽으로 날아가는 한 조각 구름을 따라가네.

늙은이의 두 줄기 눈물이 먼저 떨어지니

즐거운 마음이 술에 취한 듯 훈훈하다오.

Ⅳ-066-02)

사나이 사업이 유문(儒門)에서 날리다가

금마문(金馬門) 대궐에 들어가 숙직하는 것일세.

두 대부(大夫)의 관함이 조정 반렬에 비치니

그 덕성에 훈도(熏陶)되었음을 이제 알겠네.

Ⅳ-066-03)

어리석은 아이를 문하에 두라고 이미 허락하셨건만

번잡한 구름처럼 방해될까 걱정되었네.

어진 마을에 사는 것이 아름답다는 말씀을 성인에게 들었으니

그 버릇없는 아이를 가르쳐 주시지 않으랴.

 

次大諫所寄詩韻

欣聞慶事賀高門 心逐西飛一片雲

老淚數行先自墮 喜情深似醉熏熏

 

男兒事業擅儒門 入直金扉紫闕雲

雙大夫銜照朝列 方知德性所陶熏

 

已許愚兒接貴門 恐煩閑雜鬧如雲

里仁爲美聞夫子 其所凌夷可不熏

Ⅳ-067) 보봉림사(寶峰琳師)의 시권에 씀

우뚝 솟아서 묘한 빛을 이루어

천고에 온 천지를 비추니,

구슬 나무는 푸른 바다에 잠겼고

얼음 바퀴는 파란 하늘에 밝구나.

생사 없는 광명이 늘 빛나는데

움직이지 않는 본체는 언제나 마찬가질세.

그 꼭대기에 올라오는 이 적으니

참으로 스님이 살만한 곳일세.

 

書寶峯琳師卷

崔嵬成妙色 千古照堪輿

玉樹涵蒼海 氷輪郞碧虛

無生光炯炯 不動體如如

絶頂躋攀少 眞爲釋子居

Ⅳ-068) 명암주사(明菴珠師)의 시권에 씀

원래 안팎이 없어 두루 포함했으니

앞의 셋과 뒤의 셋을 묻지 마시게.

한 알의 둥근 광명이 밝게 트이면

우주의 삼라만상이 이 암자에 나타나리.

 

書明菴珠師卷

元無內外遍包含 莫問前三與後三

一顆圓光通瑩澈 森羅萬像現于菴

Ⅳ-069) 청유해생(淸裕海生) 스님의 시권에 씀

강(江)․회(淮)․하(河)․락(洛)이 모두 이곳으로 흘러드니

끝없이 깊고 넓은 바다가 몇만 겹이나 되랴.

지식 물결과 경계 바람에도 원래 흔들리지 않아

맑고도 고요하게 모든 것을 받아들이네.

 

書淸裕海生上人卷

江淮河落盡朝宗 深廣無涯幾萬重

識浪境風元不動 澄澄湛湛且寬容

Ⅳ-070) 기봉해보(琦峰海普) 스님의 시권에 씀

깎은 듯 흰 구름 속에 외롭게 솟아

푸른 옥 소라 무늬가 허공을 비추네.

만고의 신령스런 빛이 깨달음 바다에 이어졌으니

스님이 원래 그 주인이시네.

 

書琦峯海普禪者卷

截然孤立白雲中 碧玉螺紋映太空

萬古靈光連覺海 上人元是主人公

Ⅳ-071) 변죽강(邊竹岡)의 오리명(慠利名) 시에 차운하여 그 책 뒤에 씀

Ⅳ-071-01)

군자(君子)는 원래 스스로 빈궁한 법이라

명예와 이익을 업신여기고 신선과 짝하네.

재주와 모략으로 빛나는 벼슬에 오르지 않고

다만 문장에 힘써 깨끗한 바람을 떨칠 뿐일세.

연기와 구름 덮인 산과 물은 각가지 모습 이루고

기이한 꽃과 풀은 줄지어 떨기를 이루었네.

이 가운데 행락(行樂)을 누가 바꾸랴

평생에 명리(名利) 저버린 분이 바로 우리 공일세.

Ⅳ-071-02)

이미 천석(泉石)에 편안한 거처를 붙였으니

어찌 승명전(承明殿)을 향해 임금의 옷자락을 끌랴.

오정(五鼎)도 천종(千鍾)도 돌아보지 않고

거문고 하나 책 세 권밖엔 가진 것이 없네.

늘 바다에 들어가 악어 쫓을 생각을 하고

언제나 산에서 놀기 위해 나귀를 타네.

도(道)가 아니라 이름 구하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니

지금 나도 내 오두막을 사랑하네.

 

次韻邊竹岡慠利名詩書于卷後

君子由來自固窮 慠於名利伴仙翁

不將才略登華秩 但把文章振素風

烟水雲山多作態 奇芳異卉列成叢

此間行樂誰能換 辜負平生是我公

 

已於泉石寄安居 豈向承明引帝裾

五鼎千鍾都不顧 一琴三卷外無儲

每思入海先驅鰐 常爲遊山穩跨驢

非道求名是閑事 卽今吾亦愛吾廬

Ⅳ-072) 다시 차운함

Ⅳ-072-01)

인간의 부귀와 빈궁은 그대로 맡겨 두고

수양산에서 고사리 캐던 늙은이를 본받으니,

산을 보는 흥취가 세속에 얽매이지 않고

세상을 업신여기는 마음이 높아 도풍(道風)이 있네.

물에 다다른 뽕밭 삼밭이 시오리나 뻗치고

동산에 가득한 매화나무 대나무도 떨기를 이뤘네.

굳센 그 지조를 무엇에 비하랴

무성하고 헌칠한 풍도가 십팔공(十八公)일세.

 

Ⅳ-072-02)

높은 기상 깊은 충성으로 임금을 받드니

조정에 가득한 이윤(伊尹)과 여상(呂尙)들 옷자락이 이어졌네.

사방 집집마다 잔학한 폐단이 없고

팔도(八道)의 창고에는 쌓은 곡식이 넉넉하네.

그대 풍모는 요동(遼東)의 학 같은데

부끄럽게도 내 재주는 검주의 나귀 같구나.

다행히도 어진 사람 찾는 밝은 시대를 만났으니

공명(功名)을 업신여겨 오두막에 누워 있지 마소

 

復次

也任人間富與窮 首陽方效採薇翁

看山興逸無塵累 傲世心高有道風

趂水桑麻三五里 滿園梅竹幾多叢

勁然志操將何比 鬱鬱軒車十八公

 

岳瀆高深奉帝居 滿朝伊呂共聯裾

四方家戶無殘弊 八道囷倉有畜儲

知子風儀比遼鶴 愧予才智似黔驢

幸逢佋代搜賢日 莫傲功名臥一廬

Ⅳ-073) 다시 차운함

Ⅳ-073-01)

남북으로 오가며 발이 하도 시달려

상산(商山)의 네 늙은이를 본받으려 하네.

세상일은 결국 만(蠻)․촉(蜀)의 싸움 같고

사람의 정은 모두 마(馬)․우(牛)의 바람 같네.

봄 지난 언덕의 대나무는 새 죽순이 돋아나고

여름 겪은 산다화(山茶花)는 옛 떨기가 자랐네.

이 모습 바라보며 사물 이치를 살펴보니

한 평생 삼공(三公)을 부러워하지 않으리라.

Ⅳ-073-02)

당대 부귀한 집들을 살펴보니

살진 말 다투어 타고 가벼운 옷을 입었네.

그대는 일없으니 무슨 걱정 있으랴

스스로 한가하니 저축한 것도 없으리.

오랫동안 세상에 섞여 뭇 사람 사귀었으니

여러 나귀 가운데 있는 천기(天驥) 같았네.

만 가지 다른 것이 하나의 이치인 줄 일찍이 알았으니

화려한 집이 내 오두막 비웃어도 내버려두리.

 

復次

往來南北足遐窮 且學商山四老翁

世事竟如蠻蜀戰 人情㧾似馬牛風

經春崗竹抽新笋 過夏山茶長舊叢

對此悠然觀物理 一生終不羨三公

 

看取當時富貴居 競乘肥馬衣輕裾

惟君無事有何慮 獨自有閑無所儲

久混世人交衆士 恰如天驥在群驢

萬殊一理嘗應了 也任華堂笑弊廬

Ⅳ-074) 다시 차운함

Ⅳ-074-01)

다들 보살(菩薩)이라 일컬으니 은혜가 어찌 다하랴

원래 하늘과 땅 사이에 방랑하는 늙은이일세.

영욕(榮辱)도 외로운 산속 달에는 오지 않고

행장(行藏)은 이미 작은 난간 바람에 부쳤네.

일찍이 세상의 오경(五經) 책상자가 되어

인간의 만 가지 일을 능히 알았으니,

바라건대 이 창생(蒼生)을 위해 한 번 일어나소서

지금의 물망(物望)은 공에게 있다오.

 

오대(五代) 때에 담주(潭州) 변호극(邊鎬克)은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기에, 사람들이 그를 변보살(邊菩薩)이라고 불렀다. 후한(後漢) 때에 변효선(邊孝先)은 세상 사람들이 오경사(五經笥)라고 하였다. 그래서 이 시에 언급하였다.

Ⅳ-074-02)

나는 이미 노쇠해서 고요하게 살아가니

세상 길의 티끌 먼지가 옷자락을 더럽히지 않네.

삼 년 동안 배울 경사(經史)가 없어 한스럽고

일년 먹을 양식을 쌓아 놓지 못해 부끄러워라.

연기 엷은 모래밭에는 해오라기 한 쌍이 서 있고

부슬비 내리는 들판에선 나귀에게 꼴을 먹이네.

이러한 정회(情懷)가 한가로우니

천지가 마치 작은 오두막같이 비좁네.

 

復次

盡稱菩薩惠何窮 元是乾坤放浪翁

榮辱不來孤嶠月 行藏已付小軒風

旣爲世上五經笥 能解人間萬事叢

願爲蒼生須一起 如今物望屬於公

(五代邊鎬克潭州。不殺一人。人稱邊菩薩。後漢邊孝先世謂之五經笥。故及之)

 

我今衰老寂寥居 世路塵埃不染裾

經史恨無三載學 貲粮愧乏一年儲

淡烟沙觜翹雙鷺 踈雨原頭秣隻驢

此是情懷閑遠處 乾坤窄若小蓬廬

Ⅳ-075) 다시 차운함

Ⅳ-075-01)

완적(阮籍)이 길이 끝난 데서 울었다는 이야길 듣고

마음속으로 말 잃은 늙은이가 되자고 기약했네.

양왕(襄王)의 무협(巫峽) 운우(雲雨)는 웃음거리고

증점(曾點)의 무우(舞雩) 바람은 자랑할 만하네.

시 잘 지은 화정(和靖)은 매화나무를 어여삐 여겼고

술 사랑한 도연명(陶淵明)은 국화 떨기를 마주했지.

나 역시 그 때문에 노포(魯褒)의 논(論)을 보니

장차 녹문(鹿門)으로 방공(龐公)을 찾아가리라.

Ⅳ-075-02)

그대는 상여(相如)같이 우거(右居)에 손님 되었는데

나는 매복(梅福)같이 잠거(簪裾)를 그리워하네.

상앙(商鞅)이 처음으로 진나라 법을 고치고

기리계(綺里季)는 와서 한나라 태자를 도왔지.

왕자진(王子晉)은 일찍이 구름 밖에서 학(鶴)을 탔고

맹호연(孟浩然)은 한가롭게 눈 속에 나귀를 탔지.

맹가(孟軻)는 먹는 것과 예법의 경중을 따졌으니

임(任)나라 사람이 옥려자(屋廬子)에게 물은 것을 위해서였네.

 

【위의 두 수는 재시거체(載屍車體)이니, 구절마다 모두 귀록(鬼錄)이다.

 

復次

曾聞阮籍泣途窮 擬欲心期失馬翁

堪笑襄王巫峽雨 可誇曾點舞雩風

能詩和靖憐梅樹 愛酒淵明對菊叢

我亦因看魯褒論 鹿門將訪老龐公

 

君似相如客右居 我如梅福戀簪裾

商鞅始變秦邦法 綺季來扶漢室儲

子晋嘗騎雲表鶴 浩然閒跨雪中驢

孟軻食禮論輕重 專爲任人問屋廬

(右二首載屍車體。句句皆鬼錄)

Ⅳ-076) 편암해미(遍菴海彌) 스님의 시권에 씀

의천(義天)이 비고도 넓은데다 스스로 맑아서

지식과 감정의 물결 일체가 평등일세.

하늘과 땅은 본래 삼킬 수 없으니

해와 달의 광명이 다할 때가 없네.

 

書遍菴海彌上人卷

義天虛濶自澄淸 識浪情波一切平

本是兩儀呑不盡 方知二耀未窮明

Ⅳ-077) 원(元) 장흥(長興)의 어머니 조부인(趙夫人) 만사(挽詞)

Ⅳ-077-01)

어머니의 몸가짐과 아내의 덕이 모두 뛰어났으니

훤실(萱室)에 자녀들 늘어서 늘 웃음꽃 핀 봄날이었네.

자손들이 번성해질 날 되었건만

어찌 먼저 구천(九泉)의 사람이 되셨나.

Ⅳ-077-02)

아들이 충성하고 효성스런데다 딸까지 현숙해

이 모든 게 세 번 옮긴 훈계를 힘입은 보람일세.

색동옷이 변하여 상복(喪服)이 되었으니

보고 듣는 사람 모두가 하늘 향해 부르짖네.

Ⅳ-077-03)

길쌈하고 짚신 삼아 옛날 어진이를 본받았으니

한 평생 정결함을 그 누가 견줄 수 있으랴.

마을의 눈 있는 사람들 모두 눈물 흘리니

방울방울 흘러서 구천(九泉)에 넘치리라.

Ⅳ-077-04)

상엿줄과 운아삽이 뒤엉켜 슬픈 바람 일으키니

한바탕 꿈같은 인생 만사가 공(空)일세.

해로가(薤露歌) 끊어지고 수레와 말도 흩어지면

높다란 무덤만이 달빛 속에 남아 있으리.

 

元長興母趙夫人挽詞

母儀婦德並離倫 萱室森然一笑春

當是子孫將盛日 乃何先作九泉人

 

子爲忠孝女爲賢 賴是三遷訓誡專

綵服化爲縗絰服 見聞遐邇競呼天

 

織屨稱觴効古賢 一生貞潔孰能肩

鄕閭有眼皆揮淚 滴滴潺湲漲九泉

 

交橫紼翣動悲風 一夢浮生萬事空

薤露歌殘車馬散 高墳應獨月明中

Ⅳ-078) 원(元) 이천(伊川)이 보여준 시권 뒤에 씀

이 시축(詩軸)은 목암선생(木菴先生) 박동우(朴東雨)간보선생(簡甫先生) 김곤(金坤)․ 승려 염헌(恬軒) 우공(愚公)․회헌(晦軒) 고경(古鏡) 등이 서로 주고받은 시를 모아서 한 축(軸)을 이룬 것인데, 또 이천(伊川)의 어은선생(漁隱先生) 한자룡(韓子龍)과 태수(太守)인 소당(素堂) 원공(元公)이 서로 주고받아 38수를 이루었다.

Ⅳ-078-01)

유교와 불교의 마음 같은 벗님들이

시를 지어 시름을 흩어 버렸네.

앵무(鸚鵡)의 술잔을 같이 들고서

숙상(鷫鷞)의 갖옷을 늘 전당잡혔지.

기운이 뛰어나 구름 재단하는 붓이었고

마음이 맑아 달 실은 배였으니,

염헌과 회헌이 습득(拾得)처럼 앞장을 섰고

여러 시인들이 여구(閭丘)같이 그 뒤를 따랐네.

Ⅳ-078-02)

시를 짓는 것은 뜻을 말하기 위해서이고

술잔을 드는 건 시름을 없애기 위해서일세.

아황(鵝黃)의 술잔을 사랑할 뿐이지

어찌 흰여우의 갖옷을 생각하랴.

산을 돌아보려 한가히 지팡이를 짚기도 하고

물을 보려 천천히 배를 돌리기도 했네.

머리 돌려 육조(六朝)의 일을 바라보니

여우와 토끼 언덕이 쓸쓸한 연기에 싸여 있네.

 

題元伊川所示詩卷後

此軸乃木菴先生朴東雨․簡甫先生金坤釋․恬軒․愚公․晦軒․古鏡互相𢉼和。成一軸。又伊川․漁隱․韓先生子龍․與太守素堂元公相和。成三十八首也。

儒釋同心友 賦詩聊散憂

共持鸚鵡盞 每典鷫鷞裘

氣逸裁雲筆 心淸載月舟

兩軒前拾得 諸子後閭丘

 

題詩爲言志 把酒要寬憂

但愛鵝黃斝 何思狐白裘

循山閑策杖 觀水緩廻舟

回首六朝事 荒烟狐兎丘

Ⅳ-079) 다시 위의 운(韻)을 따라 옛 시를 모방함

Ⅳ-079-01)

황학루(黃鶴樓)에 시를 쓴 나그네여!

흰 구름은 바로 천고의 시름일세.

옛 사람은 가고 돌아오지 않으니

눈물이 흘러 검은 갖옷을 적시네.

백년 한 평생의 일이

물 위에 뜬 배와 같아,

친한 벗들은 반이나 죽었으니

묵은 풀만 가을 언덕에 쓸쓸하구나.

Ⅳ-079-02)

누추한 골목에 살았던 안회(顔回)의 즐거움을

남들은 걱정스러워 견디지 못하건만,

나도 이제 즐거울 뿐이니

해진 무명 갖옷을 아직도 입네.

푸른 구름 속에는 큰 집이 있고

푸른 바다 위에는 조각배가 있는데,

그대여! 마지막 일을 보게나

모두가 하나의 쓰레기 더미일세.

Ⅳ-079-03)

내 이제 이 시축(詩軸)을 얻어 보고

화답하려 하면서도 새삼 걱정일세.

한 글자 온당치 않은 곳은

겨울 부채와 여름 갖옷 같아,

흐르는 강물 밟고 걸어갈 수 없으니

산 길에 어찌 배를 띄울 수 있으랴.

두어 편 시를 겨우 짓고 나니

내버린 원고 뭉치가 언덕을 이루었네.

 

再用韻擬古

黃鶴題詩客 白雲千古憂

昔人去不返 淚滴緇羔裘

百歲平生事 浮如水上舟

親交半凋喪 宿草荒秋丘

 

回之陋巷樂 人不堪斯憂

我今聊樂耳 衣弊木綿裘

靑雲有甲第 滄海惟小舟

君看畢竟事 都是一堆丘

 

吾今得此軸 欲和憂還憂

一字未安處 如冬扇夏裘

江流難接履 山逕豈行舟

數篇纔寫出 遺藁堆成丘

Ⅳ-080) 옥주(沃州) 최윤하(崔允河)가 다음과 같은 시를 보내왔으므로, 이에 차운하여 삼가 답함

◎ 최윤하(崔允河)

한 번 평량(平凉)을 지나간 게 한바탕 꿈 같은데

헤어진 십 년 동안 어찌 소식이 없었나.

선생께서 만약 내 모습 물으신다면

나귀 등에도 차지 않는 책 뿐이라 하겠소.

Ⅳ-080-01)

이천태수(伊川太守)가 여여(如如)를 찾아왔는데

뜻밖에 선생의 편지를 받게 되었네.

한 번 읽고 마음속 일을 이미 알았으니

나귀 타고 산수(山水)에 취한 모습이 떠오르네.

Ⅳ-080-02)

세상일은 공에게 모두 안되니

마치 나무에 올라 물고기 구하는 것 같네.

바람과 물결이 큰 배를 용납하지 않아

말달리던 도중에 혼자 나귀를 탔네.

 

崔沃州(允河)寄詩云

一過平凉一夢如 十年別裏甚無魚

先生若問吾行樣 只是圖書不滿驢

次韻奉答

伊川太守訪如如(居士) 忽得先生雙鯉魚

一讀已知心裡事 想看山水醉騎驢

 

世事於公百不如 實猶緣木欲求魚

風濤未可容舟楫 走馬途中獨跨驢

Ⅳ-081) 동년(同年)인 영공(令公) 이숭인(李崇仁)이 참소를 당해 충주(忠州)에 있으면서 다음과 같은 시를 부쳐왔으므로, 이에 차운하여 삼가 답함

◎ 이숭인(李崇仁)

벼슬 바다에서 잇달아 세 번이나 쫓겨났으니

나그네 살이가 이미 다 떨어졌네.

누구에게 물어야 능히 감격하랴

북쪽을 바라보니 원공(元公)이 있네.

 

한간 오두막이 맑고도 차가운데

아무런 계책 없음이 부끄러워라.

자고 먹는 것을 부디 편히 하시게

밝으신 임금의 도는 지극히 공평하다네.

 

同年李令公(崇仁)。被讒在忠州寄詩云

宦海連三黜 羇棲已屢空

問誰能感激 北望有元公

次韻奉答

單棲淸且冷 束手愧不空

但願安眠食 明君道至公

Ⅳ-082) 반자(半刺) 선생(先生)이 보여 준 회양(淮陽) 부사(府使) 이항(李恒)의 시운에 차운함 (아홉 수)

Ⅳ-082-01)

다행히 아름다운 손님과 함께 앉아

옛 친구와 함께 술잔을 들었네.

대모(玳瑁)의 술자리가 끝나자 마자

주옥(珠玉) 같은 시가 홀연히 왔네.

Ⅳ-082-02)

아침 햇빛이 조악(祖幄)을 밝히고

북방의 눈은 이별의 술잔을 비추네.

취하길 권하는 건 다른 뜻이 아니라오

추운데다 눈까지 내리기 때문이라오.

Ⅳ-082-03)

각기 남북의 길에 나서면서

두세 잔 술을 함께 드네.

깃발 돌리는 게 어찌 그리 빠르신가

사모하는 사람을 위로하러 왔건만.

Ⅳ-082-04)

뛰어난 현인은 틀에 박히지 않으니

큰 악어를 어찌 물 한 잔에 담으랴.

닭 잡는데 소 칼 쓴다고 어찌 부끄러우랴

내일이면 응당 크게 쓰일 때 오리라.

Ⅳ-082-05)

송사가 간단하니 합문(閤門) 열기 드물고

즐거움 멀리하니 술잔도 들지 않네.

산을 바라보며 늘 홀(笏)을 잡았는데

서늘한 기운이 아침마다 불어오네.

Ⅳ-082-06)

눈과 달은 시 짓는 붓에 이바지하고

구름과 연기는 술잔을 둘러쌌네.

세상 길 위험한 일들이

아마도 이 가운데 들어오기 어려우리라.

Ⅳ-082-07)

술 속을 풀기엔 유령(劉伶)의 닷 말 술이고

큰 도에 통하려면 이백(李白)의 석 잔 술일세.

이것이 바로 취중의 흥취이건만

그 사람들 한 번 가서는 돌아오지 않네.

Ⅳ-082-08)

거문고를 타고 또 다시 탔네.

술잔을 따르고 또 다시 따랐네.

모름지기 취흥을 즐겨야지

젊은 시절이 다시 오지는 않으리라.

Ⅳ-082-09)

이제 다 끝났구나! 내 한 평생의 일이

모두 다 한 잔 술에 붙이리라.

황하의 용은 다시 나오지 않고

요동의 학도 돌아오지 않네.

 

次半刺先生所示淮陽府使李恒詩韻(九首)

幸同佳客坐 聊共故人盃

玳瑁筵初罷 珠璣句忽來

其二

朝暾明祖幄 朔雪照離杯

勸醉非他意 天寒雪復來

其三

各臨南北路 同把兩三杯

返旆知何速 慰他向慕來

其四

上賢元不器 脩鰐豈容杯

何愧割鷄小 明當大用來

其五

訟簡稀開閤 歡疎不擧杯

看山常拄笏 爽氣朝朝來

其六

雪月供詩筆 雲烟繞酒杯

世途危險事 難入此中來

其七

解醒劉五斗 通道李三杯

此是醉中趣 斯人去不來

其八

彈琴復彈琴 倒盃仍倒盃

要須謀醉興 少壯不重來

其九

已矣吾生事 都將付一杯

河龍無復出 遼鶴不歸來

Ⅳ-083) 11월 28일. 계장(契長) 원숙로(元叔老)가 요제원(要濟院)에서 잔치를 베풀고 계모임의 여러분들을 초청했기에, 나도 끝자리에 참석하여 시 한 수를 지어 바쳤다

새 집이 시냇물에 마주해

물빛이 아름다운 자리를 비추네.

여기서 귀한 손님들을 보니

주인이 어지신 줄 깊이 믿겠네.

소나무 푸르름은 술항아리에 이어지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 타고 퍼지네.

노래 그치고 잔치 가락이 끝나자

눈 속의 달밤이 한 해 같구나.

 

十一月二十八日。元契長叔老設宴于要濟院。招契內諸公。予亦參于席末。作一首以呈似

新舘臨溪水 溪光照綺筵

卽看賓客貴 深信主人賢

松翠連樽俎 梅香動管絃

休歌罷宴曲 雪月夜如年

Ⅳ-084) 12월 초하룻날

빠르고 빠른 세월이 백세를 재촉해

짧은 볕이 잠시에 지나지 않네.

세밑이 되면서 슬픈 느낌이 많고

늙어가니 근력도 쇠약해졌네.

산까마귀가 연하(煙霞)의 꿈을 불러 일으키고

소나무와 학은 설월(雪月)의 시를 이뤘네.

한 세상 천지에 날 알아주는 친구 적은데

귀밑에 몇 줄기 흰 실이 더 늘어나네.

 

十二月初一日

流光冉冉促期頤 短景三分亦暫時

歲暮心懷多慘感 晩年筋力甚衰遲

山鴉喚起烟霞夢 松鶴催成雪月詩

一世乾坤知己少 鬂邊添得幾莖絲

Ⅳ-085) 겨울밤

화롯불은 꺼지고 잠 맛은 아득한데

솔바람 소리가 밤새도록 쓸쓸히 들려오네.

꿈 깨어 베개 밀치고 초로초롱 앉았노라니

달은 서남쪽으로 기울고 먼동이 트려 하네.

 

冬夜

火陷爐灰睡味幽 松風終夜響颼颼

夢廻推枕惺惺着 月側西南欲曉頭

Ⅳ-086) 28일. 입춘(立春)인데 눈이 내렸다 (두 수)

Ⅳ-086-01)

봄소식이 추위를 깔보며 살구나무 숲에 들고

토우(土牛) 다니는 곳에 그윽한 새들이 지저귀는데,

현영(玄英)이 장난쳐서 하늘에 눈이 가득해지니

만물 내려는 구망(句芒)의 마음을 애타게 하네.

Ⅳ-086-02)

한 간 초가집이 소나무 숲에 닿았는데

문에는 손님 끊어지고 기이한 새들만 있네.

철 바뀌자 놀라는 이 늙은이 위해

난간 가까이서 울어 적막한 마음을 깨뜨리네.

 

二十三日立春有雪(二首)

春信凌寒入杏林 土牛行處囀幽禽

玄英戱作漫天雪 惱殺句芒生物心

 

一間茅舍接松林 門絶遊人有異禽

爲感衰翁驚節換 近軒啼破寂廖心

Ⅳ-087) 각지(角之) 스님의 시에 차운함 (네 수)

Ⅳ-087-01)

새로운 시를 갑자기 얻어 뜻이 더욱 깊은데

오대산(五臺山) 선객(禪客)이 우연히 찾아오셨네.

연하(煙霞)의 꿈에서 느긋하게 깨어 일어나니

티끌 세상 마음을 잊은 듯하네.

기염(氣焰)은 높고 높아 만 길 무지개이고

사원(詞源)은 넓고 넓어 천 길 바다일세.

내 어찌 정자(程子) 주자(朱子)와 말고삐를 나란히 하랴

어리석음을 스스로 부끄러워하며 덕음(德音)에 감사하네.

 

【그가 보내온 시에 “정자 주자와 말고삐를 나란히 한다(程朱幷轡)”라는 구절이 있으므로, 내가 이렇게 말했다.】

Ⅳ-087-02)

도(道)의 맛이 얕은지 깊은지를 물어서 무엇하랴

일찍이 남악(南岳)에 홀로 올라갔었지.

서쪽에서 온 뜻을 연구한 스님이 부럽고

위로 통달하는 마음을 지니지 못한 내가 부끄러워라.

흰 머리로 티끌 속에 즐거워할 것이 무엇이랴

푸른 산 물과 돌을 찾아 다니려 하네.

시를 지어 무생곡(無生曲)을 이어받으려 하지만

이미 거문고 줄을 끊어 지극한 소리마저 끊어졌네.

 

【그가 보내온 시에 “무생일곡(無生一曲)”이란 구절이 있기 때문에 이렇게 말했다.】

Ⅳ-087-03)

고요한 여악(廬岳)에 흰 구름이 깊었으니

정절선생(靖節先生)이 언제나 여기 찾아 오셨네.

몇 번이나 세 사람이 서로 만나 웃었던가

칠언(七言) 팔구(八句)에 이미 마음을 알았네.

돌밭 초가집에 이 몸 부질없이 늙었고

시내 달과 솔 바람에 꿈이 자주 찾아갔네.

우리 스님께선 맑고 고요한 이 곳에서

불경 베끼는 틈틈이 관음(觀音)께 예배하시겠지.

Ⅳ-087-04)

유불(儒佛)은 옛부터 사귐이 깊었으니

부디 한가한 틈을 타서 잠시 찾아와 주소.

지둔(支遁)과 허순(許詢)도 마음이 잘 맞았고

태전(太顚)과 한유(韓愈)는 마음을 전했네.

말씀하신 이 한 편을 훈계 삼을 만하니

천년에 끼친 유풍(遺風)을 찾아볼 수 있네.

선옹(禪翁)의 간곡한 정에 몹시 고마워하며

삼가 이 시를 지어 소식을 전하외다.

 

次山人角之詩韻(四首)

忽得新詩意轉深 五臺禪客偶來臨

悠然驚斷烟霞夢 怳若都忘塵土心

氣焰高高虹萬丈 詞源浩浩海千尋

程朱並轡吾何敢 自愧愚蒙荷德音

(來詩有程朱幷轡之語 故云)

 

道味何勞間淺深 早年南岳獨登臨

羨師能究西來意 愧我難專上達心

白首塵埃何所樂 靑山水石擬追尋

裁詩欲繼無生曲 已斷琴絃絶至音

(來詩有無生一曲之句故云)

 

○然廬岳白雲深 靖節先生每到臨

三笑幾時相會面 七言八句已知心

石田茅屋身空老 溪月松風夢屢尋

想得我師淸燕處 寫經餘暇禮觀音

 

釋儒交契古來深 須要乘閑肯暫臨

支遁許詢能合意 太顚韓愈亦傳心

一篇所說堪爲誡 千載遺風可復尋

多感禪翁情懇疑 敬將詩律以傳音

Ⅳ-088) 다시 차운함 (세 수)

Ⅳ-088-01)

맑은 시를 두 번 받고 감격스런 마음이 깊어

눈앞에 삼삼한 얼굴이 친히 오신 듯하네.

스님께선 도를 통하고 이치를 깨달았건만

나는 말도 알지 못하고 마음도 걷잡지 못하네.

부질없는 속세 인연이 잇달아 일어나니

그 언제 선정(禪定)의 맛을 구할 수 있으랴.

봄이 오면 천유실(天遊室)에 찾아가

구름 속의 낮 범음(梵音)을 함께 들으려 하네.

Ⅳ-088-02)

시골살이 쓸쓸한 경계가 그윽하고 깊어

벗님들의 수레와 말이 즐겨 오지를 않네.

구름 길 날아오르기엔 일찍이 기약을 잃었고

세상 길 명예와 이익에는 마음 없은 지 오래니,

지금의 세상일을 어찌 차마 들을 수 있으랴

옛날의 순박한 풍습을 찾아볼 길이 없네.

스님의 삼매(三昧) 붓을 얻고 나니

두 귀의 불평(不平) 소리를 씻어낼 수 있겠네.

Ⅳ-088-03)

자리 걸친 문 앞에 섣달 눈이 깊었으니

새해 소식이 이미 내 앞에 다가왔네.

몸가짐 삼가지 못해 남의 비웃음 뒤따르고

도를 배우고도 이루지 못해 내 마음을 그르쳤네.

산 가의 문정(門庭)은 가난하고 적막한데

머리 위의 세월은 늙음이 스며들어,

스님께서 아름다운 시를 전해 주지 않았다면

어디 가서 금옥(金玉) 같은 소리를 들을 수 있었으랴.

 

復次(三首)

再奉淸詩感更深 森如面目又親臨

師能達道能窮理 我不知言不攝心

無賴俗緣相續起 何當禪味得求尋

春來欲訪天遊室 共聽雲間午梵音

 

村居蕭索境幽深 車馬賓朋不肯臨

雲路飛騰曾失約 世途名利久無心

卽今時事那堪聽 上古淳風未可尋

得見上人三昧筆 洗湔兩耳不平音

 

掛席門前臘雪深 新年消息已當臨

持身不謹從他笑 學道無成誤自心

山畔門庭貧寂寞 頭邊歲月老侵尋

上人若不傳佳句 何處得聞金玉音

Ⅳ-089) 다시 차운함 (두 수)

Ⅳ-089-01)

육안으로 어찌 법기(法器)의 깊이를 엿볼 수 있으랴

이름만 듣고도 모두 부처님 오셨다고 말하네.

좌선(坐禪)하고 도를 행하기에 다른 생각 없으니

계율 지키고 불경 읽기에 이미 마음을 다했네.

혼탁한 세상 인연을 일찍이 떨쳐버렸으니

뜬 구름 같은 자취를 찾을 길이 없네.

가련하구나! 시끌벅적한 인생 만사여.

우주는 넓고 거칠어서 소식 부치기 어렵다오.

Ⅳ-089-02)

장경(藏經)의 바다는 문이 많고 이치가 깊어

도인(道人)이 날마다 그곳에 나아가네.

일승(一乘)에서 삼승(三乘)이 나눠지는 걸 알고

마음(三心)이마음(一心)에 포섭되는 걸 알아야 하네.

세속의 이치가 어지러우니 장차 무엇으로 풀랴

진실의 근원은 공적(空寂)하니 어디 가서 찾으랴.

바라건대 스님이시여! 생사 없는 이치를 연설하시고

어리석은 이들을 이끌어 주는 덕음(德音)을 퍼뜨리소서.

 

復次(二首)

肉眼寧窺法器深 聞名皆謂佛陀臨

坐禪行道無餘念 持律看經已盡心

濁世因緣曾抖擻 浮雲蹤跡未推尋

可憐擾擾人生事 宇宙洪荒難寄音

 

藏海多門義甚深 道人於此日常臨

要知一乘分三乘 須會三心攝一心

世諦紛紜將底解 眞源空寂向何尋

願師演說無生理 指導愚蒙播德音

Ⅳ-090) 설봉연사(說峰演師)의 시권에 씀

넓고 긴 혀를 움직이지도 않고

둘 아닌 법문을 널리 떨치시니,

우뚝한 저 묘고산(竗高山) 꼭대기가

지극히 고요하여 이름과 말을 끊었네.

 

書說峯演師卷

不動廣長舌 宣揚不二門

巍然竗高頂 至靜絶名言

Ⅳ-091) 배웅

배움을 끊고 행위도 없는 운수승(雲水僧)이여.

짚신과 베버선에 지팡이 하나 뿐일세.

온 몸이 다만 하늘 찌르는 뜻 뿐이니

이제 가면 반드시 다하지 않는 등불을 켜리라.

 

送行

絶學無爲雲水僧 芒鞋布襪一烏藤

渾身只是衝天志 此去應燃不盡燈

Ⅳ-092) 섣달 그믐날 새벽에 일어나

삼성(參星)은 기울고 북두성도 돌아 새벽이 되니

귀신 쫓는 사람들 소리가 사방을 뒤흔드네.

오늘밤에는 등불 켜서 가는 해를 지키고

날이 밝으면 연기 꽃에 또 봄을 맞으리.

빨리 흐르는 세월에 누가 강건하랴만

때와 세상이 번화하니 내 가난이 부끄럽구나.

성긴 수염 어루만지며 나 혼자 생각하니

오는 아침엔 예순 두 살일세.

 

除日曉起

參橫斗轉夜將晨 逐鬼人聲動四隣

燈火今宵堪守歲 烟花明日又逢春

流光荏苒知誰健 時世奢華愧自貧

撚斷疎髥還撫已 來朝六十二年人

Ⅴ-001) 1391년 설날. 강릉(江陵)에 있는 동년(同年) 최윤하(崔允河)의 편지를 받음 (두 수)

Ⅴ-001-01)

삼양(三陽)이 밤에 북극성을 따라 돌아와

새벽부터 사립문을 열고 경사를 맞이하였네.

먼 곳의 편지가 뜻밖에도 봄빛 따라 도착하니

새해 맞으며 기쁜 기운이 구름처럼 일어나네.

Ⅴ-001-02)

아름다운 선물이 동해 바다에서 날아와

바다 속의 새 맛을 때 맞춰 얻었네.

봉함 열어서 하늘과 땅의 은혜에 감사드리고

멀리 풍파 속의 조각배를 생각해보네.

 

辛未元正。得江陵崔同年允河書信(二首)

三陽夜逐斗標廻 納慶柴門向曉開

遠信忽隨春色到 迎新喜氣藹然來

 

喜貺來從東海頭 海中新味及時求

開緘感謝乾坤惠 遙想風波一葉舟

Ⅴ-002) 목암미월사(目庵眉月師)의 시권에 씀

두 눈을 뜨면 사방이 큰 바다이고

두 눈썹을 치키면 수미산(須彌山)이 다섯일세.

그 사이 하나의 원만한 얼굴이 있으니

백호(白毫)의 광채가 맑고도 기이하네.

 

題目菴眉月師卷

兩目開四大海 雙眉秀五須彌

間有一輪圓滿 白毫光彩淸奇

Ⅴ-003) 초봄의 느낌 (네 수)

Ⅴ-003-01)

늘그막에 봄날을 맞으니

홀연 예전에 놀던 일이 기억나네.

세월은 이리도 빠르건만

내 신세는 더욱 유유(悠悠)하구나.

무엇을 얻고 잃었는지 생각하지도 않으니

나고 드는 것을 구할 필요 있으랴.

하늘에는 아무 것도 없고

산 빛만 푸를 뿐이네.

Ⅴ-003-02) 또

왕성하던 일들이 구름과 함께 흩어지니

늘그막에 부질없이 스스로 노니네.

성현(聖賢)도 가고 나니 그만인데

천지는 아직도 유유(悠悠)하구나.

배움은 마음속에서 얻고

도(道)도 몸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건만,

아!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헛되이 한 평생을 보냈구나.

Ⅴ-003-03) 또

그 누구와 미리 약속해 놓고

꽃 아래 물가에서 놀랴.

세상 사람들은 다투어 사치하는데

내 생애는 외로운 세월만 길구나.

좋은 시절이 철 따라 오건만

즐거운 일을 어찌 다시 구하랴.

일어나 남쪽 들녘을 바라보니

아련한 봄기운이 떠오르는구나.

Ⅴ-003-04) 또

해동(海東)의 천지가 고요한데

법가(法駕)가 남쪽으로 거둥하시니,

옥새(玉塞)의 서신이 끊어지고

금릉(金陵)의 길이 길어졌구나.

보필하는 신하는 모두 직(稷)과 설(挈)이고

정사(政事)엔 다들 자로(子路)와 염구(冉求)라.

덕이 양춘(陽春)의 힘을 합해

아름답게도 그 기운이 멀리 떠오르네.

 

【지난 가을에 대가(大駕)가 남도(南都)로 옮겼다가, 2월에 송경(松京)으로 돌아왔다.】

 

春初有感(四首)

老境逢春日 翛然念昔遊

光陰何忽忽 身世轉悠悠

得喪休關念 行藏不足求

太虛無一物 山色碧浮浮

 

盛事雲俱散 殘年浪自遊

聖賢空寂寂 天地儘悠悠

學是心中得 道非身外求

嗟哉昩此理 虛送一生浮

 

有誰曾有約 花下水邊遊

人世爭奢靡 吾生獨謬悠

良辰當此至 樂事更何求

起看南郊外 藹然和氣浮

 

海東天地靜 法駕動南遊

玉塞音書絶 金陵道里悠

弼諧皆稷挈 政事盡由求

德合陽和力 佳哉氣遠浮

(前秋。大駕至南都。二月。還松京)

Ⅴ-004) 생각나는 대로 읊음

눈 녹고 얼음 풀리자 시냇물 넘쳐

산 속의 일마다 그윽함을 알겠네.

새들은 봄바람에 집 모퉁이까지 오고

까마귀는 저녁볕에 번득이며 봉우리를 지나네.

세상 인연은 갈수록 어지러워 풀기 어려운데

들판의 흥취는 언제나 넓어 거둬지지 않네.

가장 사랑하는 건 나옹(懶翁)의 시 한 구절이니

아름다움을 얻는 그 자리가 또한 아름답네.

 

卽事

雪消氷釋漲溪流 方覺山居事事幽

鳥語春風來屋角 鴉飜暮景過峯頭

世綠漸漸紛難解 野興陶陶浩未收

最愛懶翁詩一句 得休休處且休休

Ⅴ-005) 두보(杜甫)의 시집을 읽고

두릉 늙은이의 풍류 뛰어난데다

자기 멋대로 사는 경지가 더욱 그윽해라.

손바닥을 뒤집으면 구름도 되고 비도 되건만

오가며 탄식하다 머리에 서리 내렸네.

뛰어난 글 솜씨는 한 시대 견줄 이 없었고

천고(千古)의 성화(聲華)는 아직도 남아 있는데,

운곡(耘谷)의 이 사내는 우습기만 해

황당하게 시 읊기를 쉴 줄 모르네.

 

讀杜集

杜陵野老不庸流 自是無營地轉幽

翻覆直嗟雲雨手 往來嘗歎雪霜頭

一時才藻元無比 千古聲華尙未收

耘谷鄙夫還獨笑 荒唐嘯詠不能休

Ⅴ-006) 화암영(華巖英) 스님의 시권에 씀

순수하고 웅혼한 정기를 받고 태어났으니

밖으로 드러난 그 영화(英華)가 사람을 밝게 비추네.

도(道)는 반야(般若)의 마음 속으로부터 얻고

걸음은 비로(毗盧) 꼭대기를 밟고 다니네.

두 눈은 언제나 시냇물 따라 맑아

한 몸이 늘 고갯마루 구름과 함께 가볍네.

고요히 앉아 함이 없는 그곳엔

담쟁이 달과 소나무 바람이 한껏 맑으리다.

 

書華巖英上人卷

粹氣雄精自禀生 英華發外照人明

道從船若心中得 步踏毗盧頂上行

兩眼恒隨溪水淨 一身長與嶺雲輕

想知燕坐無爲處 蘿月松風盡意淸

Ⅴ-007) 정월헌(汀月軒) 야옹전(野翁田) 스님의 시권에 씀

평평한 흙 언덕이 숲 들판에 닿고

긴 밤 맑은 하늘엔 달이 물가에 가득하네.

이곳이 바로 스님께서 도를 행하시는 곳이니

푸른 산 오두막에 밝은 별이 비추네.

 

書野翁田上人卷(汀月軒)

土坡平漫接林坰 永夜淸宵月滿汀

此是上人行道處 碧山茅屋照明星

Ⅴ-008) 정주(定州) 수령을 역임한 정사의((鄭士毅)에게 부침

그곳 향해 사모하는 마음이 날로 어찌 새로운지

진중하신 선생께서도 이 늙은이를 기억하리라.

지난해 서로 만난 것이 한낱 꿈 같은데

적막한 산 속 집에 또 푸른 봄이 왔다오.

 

寄鄭定州(士毅)

向方思慕日何新 珎重先生記老人

去歲相從如一夢 寂寥山郭又靑春

Ⅴ-009) 우가(右街) 설봉(雪峰) 구(丘) 승통(僧統)에게 부침

맑은 모습을 헤어진 지 몇 해가 지났던가

요즘 어떻게 지내시는지 알고 싶다오.

서로 그리워하며 한 번도 만나지 못했는데

세월은 북(梭)처럼 어느새 지나갔네.

 

寄右街雪峰丘僧統

自別淸儀歲屢過 年來動止問如何

相思未得一相見 其乃光陰如擲梭

Ⅴ-010) 이암도(履菴道) 스님의 시권에 씀

오솔길 없이 평탄하면서도 또한 현묘하네.

너무 커서 이름짓기 어려워 깨닫는 자도 드무네.

거룩하구나! 우리 스님께서 그 자취를 밟았는데

푸른 하늘은 끝이 없고 흰 구름만 오가네.

 

書履菴道上人卷

坦無蹊逕且玄徵 至大難名訂者稀

偉我上人能踐迹 碧空無際白雲飛

Ⅴ-011) 3월 초아흐렛날. 도령(都領) 이을생(李乙生)이 자당(慈堂)을 위해 수석(壽席)을 베풀고자 사람을 보내 초청했는데 병 때문에 가지 못해 시를 지어 축하함

Ⅴ-011-01)

수연(壽宴)의 풍류가 동선(洞仙) 같아

지극한 효성에 하늘도 감동하셨네.

북당(北堂) 원추리 꽃에 봄빛이 기니

반도(蟠桃)가 다시 익는 것을 정녕 보시리라.

Ⅴ-011-02)

병든 몸이라 추운 날씨가 걱정되어

빛나는 자리 참석치 못해 한스런 생각 깊으외다.

꽃 다 진 산 남쪽에서 외로움 지키면서

채색 옷 마루 위로 마음만 달려가네.

 

三月初九日。李都領(乙生)開慈堂壽席。走价見招。以病不赴。詩以賀之

壽席風流卽洞仙 孝誠應是感皇天

北堂萱草長春色 定見蟠桃再熟年

 

負薪憂重畏天陰 阻侍華筵恨思深

花盡山南守幽獨 綵衣堂上謾馳心

Ⅴ-012) 빗속에 술을 보낸 영천사(靈泉寺) 당두(堂頭)에게 고마워하며 (당시 나는 각림사 覺林寺에 머물고 있었다)

Ⅴ-012-01)

꽃 지는 봄 난간에 부슬비 내리는데

병든 나그네 쓸쓸히 사립문을 닫았네.

여악(廬岳)의 술 한 병이 고즈넉한 마음 달래주어

즐겁게 몸과 세상을 다 잊어 버렸네.

Ⅴ-012-02)

미친 바람이 불더니 붉은 꽃 다 쓸어 버리고

가랑비 지나가자 부드럽게 푸르러지네.

이 술을 힘입어 만 가지 시름 물리치고

봄 아끼는 새 시를 한가롭게 지어보리라.

 

雨中。謝靈泉堂頭送酒(覺林住時也)

落花春檻雨霏微 病客無聊獨掩扉

廬岳一壼來慰寂 陶然身世摠忘機

 

嫣紅掃盡狂風際 嫩綠初均小雨餘

賴此麯生攻萬恨 惜春新句等閑書

Ⅴ-013) 16일. 계장(契長) 원천부(元天富)의 계모임 자리에 나아가 여러 계원들에게 지어 보이다

Ⅴ-013-01)

높은 마루에 흰 머리털이 다시 푸르러지고

한 계(契)의 여러 사람이 뜨락에서 절하네.

치악산(雉岳山)이 높직하게 자리 옆에 솟았으니

이 어른 목숨을 산신령께 맡기네.

Ⅴ-013-02)

세상 길의 명예와 이익이 나날이 바쁜데

하늘이 우리로 하여금 취한 세상을 지키게 하셨네.

오늘 깊고 두터운 뜻을 새삼 알았으니

한 봄에 세 번이나 즐거운 자리 마련하였네.

Ⅴ-013-03)

피리 소리 맑은 가운데 하루가 한 해 같아

주인과 손님 풍류가 땅 위의 신선일세.

세월 화살이 사람을 쏘아 백발을 재촉하니

깊은 술잔에 항아리 기울이기를 사양치 마시게.

 

十六日。赴元契長(天富)契內莚。呈諸公

高堂雪髮更還靑 一契諸公拜鯉庭

雉岳巍然橫座右 嚴君壽筭付山靈

 

世途名利日奔忙 天使吾儕守醉鄕

今日更知深厚意 一春三度闢歡場

 

笙歌寥亮日如年 主客風流地上仙

歲箭射人催白髮 莫辭深酌倒觥船

Ⅴ-014) 천태(天台) 의원(義圓) 장로(長老)의 시권에 차운하여 씀

선(禪)을 배우고 또 교(敎)를 배웠으며

글씨에 능한데다 시까지 능하네.

뜻을 지녀 삼요(三要)에 통하고

함이 없는지라 백 가지 그릇됨을 끊었네.

창문을 열어 달을 맞아들이고

지팡이 짚고 돌아가는 구름을 보니,

이게 바로 맑고 한가한 취미라

공부야 이르건 늦건 내버려 두세.

 

次韻書天台義圓長老詩卷

學禪仍學敎 能筆又能詩

有志通三要 無爲絶百非

開窓迎月出 倚杖看雲歸

此是淸閑趣 工夫任早遲

Ⅴ-015) 일암고사(日菴杲師)의 시권에 씀

삼천 대천 세계를 비추니

중천(中天)이 밝고도 깨끗하네.

나타나지 않는 광명이 없으니

이게 바로 스님이 수행한 행(行)일세.

 

書日菴杲師卷

照破大千界 中天朗且淸

容光無不現 此是上人行

Ⅴ-016) 남봉사우(南峰師友)의 시권에 씀

남쪽은 허명(虛明)한 곳이니

묘고산(竗高山) 푸른 빛이 늘 새롭구나.

어진 벗들이 곳곳마다 있으니

쉰이 넘는 사람들일세.

 

書南峯師友師

南是虛明地 竗高蒼翠新

良朋隨處在 五十有餘人

Ⅴ-017) 계장(契長) 이자성(李子成)이 술자리에서 여러 계모임 여러분들에게 드림

구름 맑고 바람 가벼운 날

꽃 밝고 버들 우거진 곳에

주고받는 술잔 차츰 널려지니

시절도 웃고 이야기하기 좋구나.

황금 항아리엔 노을이 떠오르고

푸른 가야금에는 향기가 나네.

이곳에 모인 이들이 모두 어른들이라

태평스런 시대인 줄 이제 믿겠네.

 

李契長席上。呈契內諸公(子成)

雲淡風輕日 花明柳暗天

杯盤漸狼籍 時節政暄姸

霞瀲黃金斝 香生綵綺絃

座中皆父老 方信大平年

Ⅴ-018) 산 꽃

하늘 끝 붉은 노을이 백 겹으로 맺혔고

구름 사이 비추는 해는 빛이 더욱 짙어졌네.

동군(東君)이 일 만들길 좋아하고 잘 수습하니

앞 봉우리 단장하고 뒷 봉우리도 단장하네.

 

山花

天未丹霞鏁百重 籠雲映日色彌濃

東君好事能收拾 粧點前峯與後峯

Ⅴ-019) 순암옥사(珣巖玉師)의 시권에 씀

따뜻하고 윤택하여 빛이 나니

흠이 없는 좋은 구슬일세.

높고 높아 움직이지 않으니

이것을 일러 곤강(崑崗)이라 하네.

 

書珣巖玉師卷

溫潤而光 無瑕有良

巍巍不動 此曰崑崗

Ⅴ-020) 무암운사(霧巖雲師)의 시권에 씀

구름과 안개로 에워싸 기이한 모습 숨겼으니

이 가운데 한 개의 영(靈)이 있는 줄 그 누가 알랴.

지혜의 햇빛이 비쳐 구름 안개가 흩어지면

돌연히 그 참된 본체가 우뚝 드러나리라.

 

書霧巖雲師卷

雲籠霧鎖隱奇形 誰識中藏一箇靈

慧日照來雲霧散 突然眞體露亭亭

Ⅴ-021) 형(泂)의 편지를 받고

Ⅴ-021-01)

오늘 아침에 서울 소식이 내 책상에 닿으니

건시(乾柿)와 후추(胡椒)가 다 향기롭네.

게다가 한 알 약으로 목숨을 보전하니

씹자마자 마음자리가 새삼 시원하네.

Ⅴ-021-02)

어버이 늙고 집이 가난하면 벼슬하는 게 마땅하니

너는 부디 충성과 효성을 다해야 한다.

성실하고 공경스런 마음으로 노력을 더하거라.

잘 되고 못 되는 것은 다 명에 달렸단다.

 

得泂書信

今朝京信到吾床 乾柿胡椒摠有香

又有一丹能保名 陷餘心地更淸凉

 

親老家貧仕不迂 願渠忠孝可雙輪

要將誠敬加勤謹 窮達皆關命矣夫

Ⅴ-022) 흡곡(歙谷) 수령으로 부임하는 아우 자성(子誠)을 보내면서

금성(金城)의 옛 현령이

흡곡(歙谷)의 새 태수일세.

종사(從事)와 통직(通直)을 거쳐

앞뒤로 낭관(郎官)이 되었으니,

지위가 앞에는 낮고 뒤에는 높았건만

고을살이는 예나 이제나 마찬가질세.

그 까닭이 무엇이던가

이치에 조금도 어긋남이 없기 때문일세.

아아! 우리 조정에서

백성들의 병폐를 깊이 생각하여,

지위 높은 이들 가운데 가려뽑아

현량하고 준수한 이들에게

각기 조그만 고을을 맡겨

잘못된 정치를 살피게 하셨네.

그대가 오품 행직을 받은 것도

교화의 능력을 발휘하게 하려는 걸세.

측은히 여기는 마음(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서이고

시비를 가리는 마음(是非之心)은 의(義)의 판단이니,

이 두 가지에 중용을 얻는다면

정치에 종사하면서 무슨 어려움 있으랴.

다섯 마리 말이 끄는 봄바람 길에

짙은 구름과 연기가 소매에 가득하리니,

무엇으로써 이 벼슬길에 노자 삼으랴

석 잔 술과 시 한 수일세.

헤어지는 마당에 다른 뜻 없으니

오래오래 살기를 부디 비노라.

 

送舍弟子誠赴歙谷令

金城舊縣令 歙谷新太守

從事與通直 爲郞在前後

位前卑後高 縣卽今猶舊

其所以然者 於理不差謬

於戱我朝廷 深念民弊久

遴選位高者 賢良而俊秀

各使莅小官 省察其休咎

子受五品行 欲抽持板手

惻隱仁之端 是非義所取

二者得其中 從政乎何有

五馬春風程 雲烟濃滿袖

何以贐此行 三盃一短句

臨別意無他 祝高千萬壽

Ⅴ-023) 4월 8일 저녁 영천사(靈泉寺)에서 관등(觀燈) 놀이를 하다

Ⅴ-023-01)

푸른 하늘에 장대 하나를 높이 세우고

찬란한 구슬들이 하늘 한가운데 걸렸네.

하나하나 변하여 끝없는 불꽃 이루니

다함없는 그 빛이 삼천(三千) 세계를 비추네.

Ⅴ-023-02)

시방(十方) 부처님과 스님께 두루 공양하는

그 많은 복을 다 헤아리기 어렵네.

밤이 깊어갈수록 더욱 찬란해지니

이즈러진 달과 성긴 별들이 광명을 사양하네.

Ⅴ-023-03)

남은 빛이 철위산(鐵圍山)까지 비치고

아득히 어둡던 거리에 새벽이 밝아오네.

이제부터 공덕의 바다가 더욱 깊어지리니

인간 세상 재앙을 다 씻어 버릴진저.

 

四月八夕。觀靈泉寺燈

一竿高揷翠微顚 燦爛連珠掛半天

一一變成無盡焰 盡爲無盡照三千

 

供佛供僧遍十方 福如塵數固難量

夜深點點尤增潔 缺月踈星共讓光

 

餘光照及鐵圍山 杳杳昏衢曉色還

從此更深功德海 盡禳災殄世人間

Ⅴ-024) 단오날 선영(先塋)에 참배하다

Ⅴ-024-01)

경건한 마음으로 석 잔 술 따르고 무덤에 절하니

무덤 위의 구름 그림자가 슬픔을 불러 일으키네.

황천(黃泉)에 소식 전할 길도 없으니

답답한 마음이 길고도 기네.

Ⅴ-024-02)

해마다 세 번씩 여기 왔건만

오늘 시름은 예전보다 더하네.

입신양명(立身揚名) 못하고 흰머리 되었으니

처음부터 끝까지 불효한 내 마음 시름겹구나.

Ⅴ-024-03)

봉우리에 토만두(土饅頭)가 많이도 쌓였는데

눈앞에 널려진 무덤들이 모두가 시름일세.

사람마다 하나씩 가지게 되겠건만

백년 동안의 세상일이 부질없이 길구나.

 

端午。拜先塋

三酹虔心拜隴頭 隴頭雲影喚悲愁

黃泉未可達音信 鬱鬱情懷何謬悠

 

年年三到此岡頭 今日愁加昔日愁

未得立揚成白首 孝無終始我心悠

 

峯頭多積土饅頭 滿眼纍纍摠是愁

旣信人人呑一箇 百年間事謾悠悠

Ⅴ-025) 버들부채

등 넝쿨로 단장했으니 세상에 드문데다

버들가지로 만들며 사람과 몹시 어긋났네.

이 천한 물건이 시대의 쓰임이야 되랴만

맑은 바람은 있어 뜨거운 티끌을 씻어 주네.

 

柳扇

藤縷粧成世所珎 柳技裁作甚違人

物卑豈敢爲時用 亦有淸風滌熱塵

Ⅴ-026) 만세사(萬歲寺)의 새 대나무

옛 떨기는 북쪽 섬돌에 기댔고

새 가지는 동쪽 담을 비추는데,

그 잎새에 슬기로운 바람이 불고

그 가지엔 언제나 단 이슬이 내리네.

밤에는 달 그림자 일렁이고

낮에는 연기 빛에 잠기는데,

한가롭게 보면서 사랑스런 모습은

맑은 그늘에 흩어지는 저녁 서늘함일세.

 

萬歲寺新竹

舊叢依北砌 新篠暎東墻

葉帶慧風振 枝承甘露長

踈踈篩月影 鬱鬱鎖煙光

㝡愛閑看處 淸陰散晩凉

Ⅴ-027) 각이사(覺怡師)의 시권에 씀 (각이사의 호는 열봉 悅峰인데, 또는 열도 悅道라고도 한다)

뾰족 솟은 산에 몸을 의탁하고

큰 도의 연원을 헤아리네.

이제부터 기쁘게 웃기를 쉬지 않으리니

즐겁구나! 어떤 즐거움이 이 즐거움 만하랴.

 

書覺怡師卷(号悅峯。或悅道)

尖山突兀堪依托 大道淵源能忖度

從此怡然笑不休 樂哉何樂如斯樂

Ⅴ-028) 8월 초이튿날. 큰 바람이 불다

구름이 갑자기 몰려들며 그 기세 웅혼하더니

산 동쪽에서 큰 바람이 불어왔네.

늙은 소나무가 뽑혀 숲이 앙상해지고

이른 벼가 쓰러져 밭이랑이 비었네.

빗발이 미친 듯 자주 쏟아지고

하늘 모습이 별안간 아득하게 변하네.

못 들은 척 문 닫고 책을 읽으니

운곡(耘谷) 늙은이 마음이 육방옹(陸放翁) 같구나.

 

八月初二日有大風

雲陣奔騰勢氣雄 大風來震自山東

老松拔落林巒瘦 早穀摧殘畎畝空

雨脚顚狂頻點滴 天容㪍鬱變溟濛

不聞閉戶看經卷 (耒+員?)叟心如陸放翁

Ⅴ-029) 초이렛날. 서리가 내리다

농작물이 다 마르고 나뭇잎도 엉성하네.

익어가던 벼이삭은 빗물에 나부끼고

한창이던 메밀꽃도 언덕에 쓰러졌네.

가을되면서 천지의 은혜가 줄었는지

명년에는 쌀 한 섬 쌓아 놓은 집이 없으리.

그 누가 무슨 술법으로 이 어려운 때를 구제하려나

하늘 우러러 긴 한숨이나 한 번 쉴 밖에.

 

初七日有霜

新霜早降烈風餘 禾稼凋零樹木疎

全穗稻秔飄雨水 垂花木麥臥丘墟

逢秋旣減乾坤惠 來歲應無斗斛儲

康濟時難誰有術 仰天長歎一欷歔

Ⅴ-030) 밤중에 읊음

산 구름이 비되어 난간 가까이 뿌리자

창 너머 귀뚜라미가 그윽하게 하소연하네.

꿈 깨어 베개 밀치고 오랫동안 읊조려

시 세 수 이루자 벌써 새벽닭이 우네.

 

夜吟

雨暗山雲近檻低 隔窓蛩唱吊幽棲

夢廻推枕吟哦久 三首詩成已曉鷄

Ⅴ-031) 생각나는 대로 읊음

가을빛이 가득해 자리가 서늘해지니

시 지을 생각이 어느새 아득해지네.

구름 끝 봉우리는 겨우 보이고

서리 뒤 풀과 나무는 아직도 푸르구나.

이미 내 마음은 세상 밖에서 노니니

인간 세상 세월이 바쁜들 무슨 상관이랴.

가슴이 더욱 맑아져 티끌 하나 없는데

물가의 산 빛이 초가집 마루를 비추네.

 

卽事

秋光滿座席生凉 詩思飄然入渺茫

雲際峯巒才隱約 霜餘草樹尙靑蒼

旣知物表心神放 且任人間歲月忙

方寸更澄塵累絶 水邊山色暎茅堂

Ⅴ-032) 한가윗날(中秋節). 어머님 무덤(慈瑩)에 절하고

Ⅴ-032-01)

초롱초롱 흰 이슬이 거친 언덕에 가득한데

가래나무 슬픈 바람이 또 가을일세.

그리운 마음 깊은데 몸은 벌써 늙었으니

세월이 물같이 빠른 것을 혼자서 탄식하네.

Ⅴ-032-02)

시든 풀 거친 연기 흙 한 더미

이제 벌써 스물다섯 번째 가을일세.

학은 날아가 돌아오지 않고 사람만 길이 탄식하는데

구름은 무심하게 지나가고 물도 절로 흐르네.

Ⅴ-032-03)

사실 때 같은 마음이더니 돌아가셔도 같은 언덕이라

같은 마음 서로 비춰 달 밝은 가을일세.

형제들이 줄 지어 같이 절하니

저승에서도 우리와 함께 기뻐하시겠지.

 

【(어머님 무덤) 옆에 숙모(叔母) 원부인(元夫人) 무덤이 있어, 어머니의 자손들이 명절 때마다 이곳에서 같이 제사를 드린다. 그래서 이렇게 말했다.】

 

中秋。拜慈塋

瀤瀤白露溝荒丘 梓樹悲風又一秋

追遠意深身已老 自嗟光景疾如流

 

衰草荒烟土一丘 于今二十五年秋

鶴飛不返人長歎 雲去無心水自流

 

生同一意死同丘 相照同心月正秋

兄弟數行同此拜 九原同喜我同流

(傍有叔母元夫人之墳。母之子孫每於名旦。同此祭事故云)

Ⅴ-033) 한가위 달

한가위 날씨가 차츰 맑고 서늘해져

저녁 되면 뜨락 가지에 흰 이슬이 엉기네.

구름은 하늘 한가운데서 구슬 잎을 거두고

달은 산꼭대기서 은 쟁반으로 솟아오르네.

피리 소리와 노래 소리 곳곳에 사람들은 춤추고

시를 읊조리며 나 혼자 달을 보네.

적막한 곳이건 번화한 곳이건 한가지 빛이니

어찌 사사로운 뜻이 감히 끼어 들랴.

 

仲秋月

中秋氣候稍淸寒 向夕庭柯白露團

雲自天心收王葉 月從山頂湧銀槃

笙歌幾處人爭舞 嘯詠當時我獨看

寂寞繁華同一色 有何私意敢相干

Ⅴ-034) 16일 밤의 달

가을 하늘은 푸르고 광한전(廣寒殿)은 차가운데

오늘 밤 둥근 빛이 어제 밤 둥근 빛일세.

은하수는 운모(雲母)의 장막을 가로 펼치고

금물결은 수정 쟁반을 곧바로 부으니,

달빛이 하룻밤 사이에 줄어들지는 않아

보는 사람 정취가 만리에 같으리라.

흰 빛이 차츰 옮겨지고 바람 이슬이 내리자

뜨락의 솔 그림자가 난간에 일렁이네.

 

十六野月

秋天碧遠廣寒寒 今夜團如昨夜團

銀漢橫鋪雲母帳 金波直注水精槃

光輝未必一宵減 精興應同萬里看

皓彩漸移風露冷 半庭松影轉欄干

Ⅴ-035) 눈떡(雪餻)을 읊음

눈 국수가 부슬부슬 하늘에서 내리니

물과 불이 서로 부딪친 기운으로 만들어졌네.

사람의 손을 거치지 않아 정결한데다

혀 맛을 도와 부드럽고도 가볍네.

떨어진 매화 버들 꽃처럼 부서진데다

가득 쌓인 구슬같이 둥글기도 해,

바람 부는 난간에 기대어 배불리 먹으니

울긋불긋 가을 산 빛이 눈앞에 펼쳐지네.

 

賦雪餻

重羅雪麵是天生 水火相煎氣所成

本絶手痕精且潔 能供舌味脆仍輕

碎如梅蘂楊花落 團似瓊膏玉屑盈

飽倚風軒舒一嘯 秋山紫翠眼前橫

Ⅴ-036) 백성들을 대신해 읊음

생애(生涯)는 물같이 차갑고

부역(賦役)은 구름처럼 어지러워,

갑자기 성 쌓는 군졸(築城卒)이 되었다가

또 쇠 다루는 일꾼(鍛鐵軍)까지 겸하기도 하네.

바람과 서리에 농사까지 그르치고

끝없는 눈발에 누더기 옷 다 떨어졌네.

처자 부양할 걱정 잊지를 못해

마음이 끓어 불 타는 듯하네.

 

代民吟

生涯寒似水 賦役亂如雲

急抄築城卒 兼抽鍛鐵軍

風霜損禾稼 縷雪弊衣裙

未忘妻孥養 心煎火欲焚

Ⅴ-037) 명암조사(明菴照師)의 시권에 씀

원융(圓融)한 성품 바다가 시방(十方)에 두루 펼쳐져

스님이 여기에서 진상(眞常)을 깨달았으리.

여섯 창문이 활짝 트여 원래 걸림이 없으니

예도 없고 이제도 없는 본래의 광명일세.

 

書明菴照師卷

性海圓融遍十方 上人於此訂眞常

六窓虛豁元無礙 無古無今本分光

Ⅴ-038) 기러기 소리를 듣고

옥새(玉塞)의 삼춘(三春) 길이고

은하수의 구월(九月) 길일세.

드문 별이 몇 개 있는데

밝은 달에 몇 줄이 가로 지나네.

퍼득이는 그 날개는 구름을 넘어가고

끼륵끼륵 울음소리가 베개까지 들리니,

부럽구나! 너희들은 형제가 함께 있건만

아아! 나는 언제나 외롭구나.

 

聞鴈

玉塞三春路 銀河九月程

殘星幾點在 明月數行橫

翽翽凌雲翮 嗷嗷到枕聲

羨渠兄弟具 嗟我每孤鳴

Ⅴ-039) 스스로를 달램

힘줄과 뼈는 쇠약해 가는데

살림살이는 언제나 비어 있어,

난간 앞의 산은 약속을 지키건만

칼집 속의 칼은 쓸 데가 없네.

영화롭고 욕됨을 어찌 상관하랴

깨끗하고 더러운 것이 절로 뒤섞였네.

살아온 세월이 이제 얼마던가

예순 두 해째 가을 바람일세.

 

自遣

筋骨知衰甚 生涯任屢空

檻前山有約 匣裏釰無功

榮辱何交涉 光塵自混同

行年今幾許 六十二秋風

Ⅴ-040) 9월 10일 (네 수)

Ⅴ-040-01)

지난 날 고을 누각에 즐거운 잔치 베풀면

넘치는 술잔에 국화 향기 넘쳤지.

취한 춤과 미친 노래로 오랫동안 방랑하다 보니

이 몸이 어디 있는지도 알지 못했네.

Ⅴ-040-02)

사방 산들이 비단 병풍을 펼쳤는데

하루 종일 비가 내려 기이한 모습을 숨기네.

음관(陰官)이 노니는 사람 마음을 괴롭히려고

짐짓 구름과 아지랑이를 보내 어둡게 했네.

Ⅴ-040-03)

붉은 단풍과 노란 국화 철이 찾아올 때마다

그리움이 푸른 버들 봄보다 갑절 더하네.

올해에도 높은 곳에 오르자던 약속을 저버렸으니

가고 머무는 것이 남에게 달려 있지 않음을 깊이 알겠네.

Ⅴ-040-04)

울타리 국화는 아직 다 피지 않았는데

가을 장마가 높은 언덕에 오르는 것을 가로막네.

비 개이고 꽃 피는 날을 다시 기다렸다가

한가위(重陽節) 놀이를 다시 하는 것도 무방하리라.

 

九月十日(四首)

郡樓前日闢歡場 酒瀲盃心菊蘂香

醉舞狂歌多放浪 不知身世在何鄕

 

四面諸山展錦屛 雨昏終日遁奇形

陰官惱殺遊人意 故遣雲嵐作晦冥

 

每到丹楓黃菊辰 思量倍勝綠楊春

今年又負登高約 行止深知不在人

 

籬菊猶今未吐黃 秋霖防却上高岡

雨晴更待花開日 重作重陽也不妨

Ⅴ-041) 12일. 눈이 내리다

작은 서재가 고요한데 마음은 설레이니

가을 장마에 지쳐 일마다 어긋나네.

조물주가 사람을 희롱하는지 참으로 이상하네.

먼저 서리가 내리더니 또 눈발이 흩날리네.

 

十二日有雪

小齋寥落思依依 苦厭秋霖事事違

造物戲人良可怪 卽先霜降雪霏霏

Ⅴ-042) 목은(牧隱) 상국(相國)이 국화를 보고 느낌이 있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어 보이므로 이에 차운함

◎ 목은(牧隱)

인정이 어찌 무정한 사물과 같으랴

요즘은 부딪치는 곳마다 모두가 편치 않네.

우연히 동쪽 울타리를 보다가 얼굴 가득 부끄러웠지

참된 국화가 거짓 도연명(陶淵明)을 바라보고 있기에.

 

무정(無情)을 믿고 유정(有情)을 웃어야 하니

유정은 바로 한 평생 뿐이라오.

도연명(陶淵明) 죽은 뒤 천여 년 지나도록

동쪽 울타리 국화는 옛 그대로 환하게 피었네.

 

牧隱相國對菊有感詩云

人情那似物無情 觸境年來漸不平

偶向東籬羞滿面 眞黃花對僞淵明

次韻

須信無情笑有情 有情惟是一生平

陶公死後千餘載 依舊東籬粲粲明

Ⅴ-043) 우연히 읊음

젊은 시절에 시를 읊으면 기운이 호방했는데

늙고 병드니 생각하기도 부질없이 괴로워라.

적막한 천지에 알아주는 친구도 적어

가을 산이 흰 머리를 비춰줄 뿐이네.

 

偶吟

少日吟哦氣自豪 老年衰疾思空勞

寂寥天地知音少 只有秋山照二毛

Ⅴ-044) 18일 장난 삼아 읊음

오늘 날씨가 음산한데다

차가운 기운이 엉켜 풀리지 않네.

조각조각 눈 조각이 많은데다

줄줄이 빗줄기가 어지럽구나.

병든 사내가 난간에 기대기 두려워

쭈그려 앉아 혼자서 한숨 쉬었네.

손꼽아 좋은 시절을 헤아려보니

늦가을도 벌써 반이나 지났네.

가난한 집이라 오가는 이도 없으니

그 누구와 더불어 술친구를 삼으랴.

빈 창자에서 천둥 소리가 나기에

며느리 불러 밥 지으라 재촉했네.

 

十八日戱詠

今日天陰重 冷氣凝不散

片片雪片多 絲絲雨絲亂

病夫㤼倚欄 縮坐獨興歎

屈指數良辰 季秋又過半

寒門絶往來 誰與爲酒伴

虛腸如轉雷 喚婦促炊爨

Ⅴ-045) 이날 생각나는 대로 읊음

아침엔 미친 바람 불면서 눈비 뿌리더니

저녁엔 우박 내리고 무지개가 섰네.

오늘은 무슨 상서(祥瑞)가 있을는지도 모르겠군

조화(造化)의 공용(功用)이 갖가지로 나타났으니.

 

是日卽事

朝見風狂雨雪低 暮看霰雹連虹霓

不如今日有何瑞 造化功用無不齊

Ⅴ-046) 옛 시를 모방함

곡구(谷口)의 정자진(鄭子眞)이

몸소 김 매고 밭을 갈았었지.

십 년 동안 바윗돌 밑에서

누구와 더불어 이웃하고 살았던가.

영특하다는 이름이 서울에 날렸으니

꽃다운 그 자취를 천고(千古)에 사모하네.

연기와 노을 속에 늙어 가는 한 선비는

새나 짐승과 벗삼고 지내네.

마음 한가해 얻고 잃을 것도 없는데다

도가 곧으니 어찌 굽히고 펴랴.

때때로 바람과 달이나 즐기면서

글쓰기가 끝내면 맑은 시가 새롭네.

 

擬古

谷口鄭子眞 耕耘躬自親

十年巖石下 誰與爲其隣

英名動京洛 千古慕芳塵

烟霞老一士 鳥獸可同倫

心閑無得失 道直何屈伸

時時弄風月 脫槀淸詩新

Ⅴ-047) 밤에 앉아 느낌이 있어 (두 수)

Ⅴ-047-01)

올해 가난은 지난해 가난보다 더해

문 앞에 세금 독촉하는 사람이 끊이지 않네.

글 읽어서 보람없는 게 가엽기는 하지만

바구니 밥에 바가지 국을 즐겁게 견딜 만하네.

곤강(崑崗)에 불이 붙어 옥석(玉石)이 함께 탔건만

여산(廬山)의 구름과 물은 풍진(風塵)을 끊었네.

남은 생애 처세를 마무리짓기 어려운데

가물거리는 푸른 등불이 병든 몸을 비춰 주네.

Ⅴ-047-02)

긴 밤은 끝이 없는데 내 한(恨)도 금할 수 없어

소 먹이던 사람이 늙자 친구들도 끊어졌네.

쑥대밭 세 이랑에 세금은 더 무거워지니

오호(五湖)의 연기와 달에 정이 더욱 깊어지네.

값어치 안 나가던 공자(孔子)의 구슬을 이제야 알겠으니

줄 끊어진 백아(伯牙)의 거문고가 문득 슬프구나.

마음에 가득한 만 가지 한을 누구에게 말할 수 있으랴

혼자 읊조리는 걸 친구해 준 귀뚜라미가 고마워라.

 

夜坐有感(二首)

今歲貧加去歲貧 門前不絶督租人

可憐鈆槧功無効 堪任簞瓢樂是眞

崑嶺火炎焚玉石 廬山雲水息風塵

餘生出處終難決 耿耿靑燈照病身

 

長夜漫漫恨未禁 飯牛人老絶知音

蓬蒿三畝稅尤重 烟月五湖情更深

始信價低尼父玉 却嗟絃斷伯牙琴

一心萬恨憑誰說 多謝寒蛬伴獨吟

Ⅴ-048) 천태(天台) 연(演) 스님이 총림(叢林)에 가는 길에 각림사(覺林寺)를 지나게되어 나를 찾아왔다. 그의 말이 묵묵하고 움직임이 고요함(語黙動靜)을 보니 매우 범상치 않았다. 비록 절간(釋苑)이 쇠락해 가는 지경(晩秋)에 이르렀지만 장차 그 도를 다시 일으킬 것이므로, 이별하는 마당에 시 한 수를 지어 붓을 적셔서 노자로 드린다.

선문(禪門)에선 이름과 모습을 다 끊었으니

그 문턱이 본래 그윽하고 깊었네.

조사(祖師)의 맥은 태령(台嶺)에서 전했고

종단의 바람은 소림(少林)을 격했네.

구멍 없는 피리를 불기도 하고

줄 없는 거문고를 타기도 했으니,

이 이별을 어찌 서운케 생각하랴

티끌 세상의 마음과 같지 않네.

 

天台演禪者將赴叢林。自覺林寺來過余。觀其語黙動靜。甚是不凡 雖當釋苑晩秋。將是以復興其道。臨別需語。泚筆以贐行云

禪門絶名相 閫閾本幽深

祖脉傳台嶺 宗風隔少林

應吹無孔笛 閑弄沒絃琴

此別何須恨 不同塵土心

Ⅴ-049) 의원(義圓) 장로(長老)를 보내면서

Ⅴ-049-01)

푸른 바랑에 대 지팡이로 시내와 산을 돌아다니니

그 몸이 뜬 구름과 더불어 한가지로 한가하시리.

이번에 가는 총림(叢林)이 응당 무성하겠지만

전단(栴檀) 나무 한 그루가 그 사이를 덮으리.

Ⅴ-049-02)

뜻과 기운이 씩씩해 바다와 산을 흔들건만

떠돌아다니는 발자취는 언제나 한가하시리.

강 남쪽 강 북쪽 물과 구름 길에

맑고 고요한 그 행장이 온 세상을 비추시리.

 

送義圓長老

靑箱竹杖驀溪山 身與浮雲一樣閒

此去叢林應茂盛 栴檀一樹蔭其間

 

志氣洋洋動海山 萍蓬蹤跡是長閑

水雲江北江南路 淸淨行裝照世間

Ⅴ-050) 심자(深字) 운의 시를 지어 각림사(覺林寺)의 장실(丈室)에 드림

지혜의 바다는 너그럽고도 크며

인자한 문은 넓고도 깊네.

분잡한 성시(城市)를 비웃으시고

고요한 산과 숲을 사랑하시네.

아침마다 담쟁이 달을 거울 삼고

밤마다 솔바람을 거문고 삼으시니,

스님이 언제나 선정에 들어 있는

그곳이 바로 마음 전하는 곳일세.

 

用深字韻呈覺林室

智海寬仍大 慈門廣且深

紛華笑城市 寂靜愛山林

蘿月朝朝鏡 松風夜夜琴

上人常燕坐 是處豁傳心

Ⅴ-051) 헌납(獻納) 송우(宋愚)가 흥법사(興法寺) 장실(丈室)에 올린 시에 차운함

생각함도 없고 집착함도 없는

대자(大慈)이시고 대웅(大雄)이시네.

불경을 베껴 묘한 법을 일으키시고

총채를 휘둘러 참된 바람을 퍼뜨리시니,

세상에 드문 선옹(禪翁)이시며

시대에 뛰어난 시객(詩客)이시네.

서로 만나서 회포를 나누는 곳에

차 연기가 바람에 날아가네.

 

次宋獻納(愚)上興法丈室詩韻

無念亦無證 大慈仍大雄

寫經興妙法 揮塵播眞風

禪翁稀世彦 詩客間時雄

相對論懷處 茶烟颺竹風

Ⅴ-052) 헌납(獻納) 송우(宋愚)가 목백(牧伯)에게 올린 시에 차운함

뭇 사람이 다 취했는데 홀로 깨어나

소상강(瀟湘江)에 서린 답답한 심정을 견딜 수 없었네.

이제 큰 날개가 다시 은하수 길을 만났으니

한 몸으로 가볍게 흰 구름을 따라가리라.

 

次宋獻納上牧伯詩韻

衆人皆醉獨能醒 不忍湘壘鬱鬱情

大翼更當霄漢路 一身輕逐白雲征

Ⅴ-053) 강소성과 절강성(江浙)으로 유학 가는 죽계헌(竹溪軒) 신회(信廻) 스님를 배웅하며 쓴 시(자고천 鷓鴣天)와 서문

【서문】우리 나라의 무학(無學)과 본적(本寂) 두 스님은 다 나옹(懶翁) 문하의 뛰어난 분들이다. 나옹이 이 두 스님을 믿어 남달리 대했고, 나옹이 입적한 뒤에는 온 나라의 스님들이 이들을 더없이 공경하며 예의를 차렸다. 신회 스님은 두 스님을 따라 제자가 되었으니, 나옹 문하에는 문손(門孫) 벌이다. 그러니 그 문하의 도학을 이어받아 닦았음을 알 수 있다.

스님이 이제 멀리 강(江)․절(浙) 방면을 유람하려고 석장(錫杖)을 날려서 길 떠나려 한다. 다른 뜻에서가 아니라, 현명한 스승을 참방(參訪)하고, 또 나옹이 옛날 노닐던 곳에 귀경(歸敬)하려는 것이다. 만약 여력이 있는 지혜로써 천하의 선지식(善知識)들을 두루 참방(參方)한다면, 소득이 없는 곳에서도 반드시 소득이 있을 것이다. 이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이에 단가(短歌) 한 수를 지어 길 떠나는 노자로 드린다.

 

베버선 푸른 행전에 그 뜻이 깊어

천하의 큰 총림(叢林)을 참방(參方)하려고,

외가지 지팡이로 천 봉우리 그림자 밟고

한 조각 구름에다 만리의 마음 실었네.

구멍 없는 피리에 줄 끊어진 거문고로

아마도 이번 걸음에 지음(知音)을 만나리라.

바라건대 보제(普濟)의 일찍 노니시던 곳 보고

평산(平山) 향해서 옛 길을 찾으시라.

 

送竹溪軒信廻禪者遊江浙詞(鷓鵠天, 幷序)

三韓無學․本寂二師皆懶翁門之秀者也。翁信而待之異於衆。及懶翁示寂之後。一國禪流敬而致禮。尊榮無對。上人投於二師爲弟子。而於懶翁。義當門孫也。盖其學道修習。從可知矣。今欲遠遊江浙。飛錫而去。其意無他。切欲叅訪明師。亦歸敬懶翁舊遊之地也。若用其有餘力之智行。歷叅天下善知識。則必於無所得處有所得矣。作短歌以贐行云。

布襪靑縢意趣深 欲叅天下大叢林

隻條杖抹千峯影 一片雲含萬里心

無孔笛沒絃琴○ 必應今去遇知音

要看普濟曾遊處 須向平山古道尋

Ⅴ-054) 세상을 탄식함 (세 수)

Ⅴ-054-01)

눈앞의 시끄러움이 몇 번이나 떴다 잠겼나

헐뜯고 칭찬하는 은혜와 원수가 각각 요구가 있어서라네.

옳고 그름도 분별할 수 없으니

먼지 일고 물러나 쉼을 내 어찌 알랴.

얼음을 뚫는 토끼의 기술은 어찌나 날랜지

밥을 짓는 원숭이의 꾀는 지루하기만 하구나.

세태와 인정이 다 이러하니

다락에 기대 한참 동안 흐르는 강물만 바라보네.

Ⅴ-054-02)

공명과 부귀는 뜬구름 같으니

어찌 구차하게 억지로 구하랴.

세상의 온갖 시끄러움이야 누가 해석하랴

한 평생 내 몸의 일은 내가 하리라.

바람과 꽃, 눈과 달은 때가 돌아오는데

물과 나무 구름과 노을은 경계가 늘 그대로일세.

소박한 흥이 한 구석에 남아 있어서

산 빛을 맞이하고 흐르는 물을 바라보네.

Ⅴ-054-03)

만사가 뜻대로 안돼 모두가 뜬구름이니

작은 몸 하나밖에 또 무엇을 구하랴.

망녕되게 자기를 높여도 끝내 이로움 없고

함부로 남을 헐뜯으면 아름답지 못하네.

하늘의 도는 착한 자에게 복을 악한 자에게 화를 주건만

세상 사람들은 어찌 거짓을 믿고 바른 걸 의심하나.

순후한 옛 풍속을 참으로 회복하기 어려우니

공자(孔子)께서도 시냇가에서 흐르는 물 보며 탄식하셨네.

 

嘆世(三首)

眼前紛擾幾沉浮 毁譽恩讐各有求

未可非非還是是 焉知莫莫且休休

鑿氷兎術何飄颯 炊飯猿謨亦謬悠

世態人情皆此類 倚樓良久目江流

 

功名富貴似雲浮 何用區區强自求

萬種世紛誰解釋 一生身計我能休

風花雪月時還泰 水木雲霞境轉悠

逸興起從興廢外 坐邀山色對川流

 

萬事依依惚是浮 一微軀外更何求

妄尊自己終無益 謀毁他人甚不休

福善禍淫天道近 信邪疑正世情悠

古風淳厚誠難復 川上宣尼歎水流

Ⅴ-055) 토산(兎山) 수령이 보여준 시에 차운함 (이때 군수가 향학 鄕學을 중수하고 석전제 釋奠祭를 지내는데 여러분이 시를 지었다)

Ⅴ-055-01)

내 들으니 토산 고을에

거문고 타고 노래 부르는 소리가 예전보다 더해,

덕(德)은 풀 위의 바람 같고

정치는 시내에 비추는 달 같다네.

감화된 사람이 얼마나 많기에

그 이름 일컫는 자(稱名者)가 만이 되고 천이 되었나.

생각건대 시비 밝히려는 송사가 적어졌으니

정원에 푸른 풀만 가득하리라.

Ⅴ-055-02)

옛 고을에 풍속을 바꾸는 날이고

여러 서생들이 배우길 좋아하는 해일세.

성전(盛典)을 일으키는데 어려움 없으리니

흐르는 시냇물처럼 쉬지 않으리.

평소의 뜻이 항상 한결같으니

푸른 옷깃 선비들이 반드시 천은 되리라.

문선왕(文宣王)의 도가 크기도 하니

이제부터 끝없이 이어지리라.

 

次兎山守所示詩韻(郡守重修鄕學。有事釋奠。諸公作詩)

聞說兎山郡 絃歌勝昔年

德如風偃草 政若月臨川

感化人多少 稱名者萬千

想應詞訟簡 庭院綠芊綿

 

古郡移風日 諸生好學年

無難興盛典 不息似流川

素志恒專一 靑襟必有千

大哉宣聖道 從此亙綿綿

Ⅴ-056) 군수를 대신해

변변찮은 재주로 고을을 맡아

삼 년 세월을 이미 허비했건만

은혜를 비처럼 못 내려 부끄럽고

정사를 시냇물같이 해결 못해 겸연쩍네.

일은 만 가지로 생기는데

시름은 천 가지로 어지러워,

언제나 동남쪽을 바라보건만

고향 산천은 아득히 멀기만 하네.

 

代郡守

不才爲郡寄 光景費三年

愧乏恩如雨 慙無決若川

事機生萬萬 愁緖亂千千

每向東南望 家山邈以綿

Ⅴ-057) 느끼는 일이 있어 목백(牧伯)에게 지어 드림

초왕(楚王)은 비록 총명한 군주지만

형인(荊人)의 운명은 어찌 그리 기박한지,

통곡이 끝나기 전에 두 발을 베었으니

아무리 값진 구슬인들 어찌 흠이 없으랴.

 

感事呈牧伯

楚王雖是聰明主 其乃荊人薄命何

痛哭未終逢兩刖 直饒良玉豈無瑕

Ⅴ-058) 1392년(임신) 정월 6일. 목백(牧伯)이 조정의 명을 받고 떠나게 되었기에 시를 지어 송별함

Ⅴ-058-01)

헤어지는 자리는 옛부터 슬픈 법

이번의 이별이 더욱 슬프지만 어쩔 수 없네.

중후한 덕과 가득한 은혜를 갚을 길 없어

두 줄기 눈물로 평안하시길 빌 뿐일세.

Ⅴ-058-02)

한미한 집안의 아우와 조카 두세 사람이

서울에서 벼슬산지 이미 여러 해인데

삼천이나 되는 문객(門客)을 어찌 다 기억하시랴만

바라건대 남은 덕택으로 그 궁한 자들을 교화해 주소서.

 

壬申正月六日。牧伯被召朝天。詩以拜送

離筵非一古猶多 此別尤增叵乃何

重德盛恩無計報 但將雙淚祝調和

 

寒門弟姪二三人 遊宦京塵巳數春

門客三千何備數 願將餘澤化窮鱗

Ⅴ-059) 붓

모족(毛族) 출신으로 현천(玄泉)에 목욕하니

둥글고 곧으며 뾰족하고 가지런한 네 가지가 다 아름답네.

판판하고 미끄러운 종이 위를 취한 기분에 달리며

가벼운 바람 걸음마다 구름과 연기를 일으키네.

 

中書君

出身毛族沐玄泉 圓勁尖齊四美全

醉走楮生平滑地 風輕步步起雲烟

Ⅴ-060) 강(姜) 주부(主簿)를 곡(哭)함

거듭 중원에 가서 옛날 놀던 곳을 찾았더니

놀랍게도 몸과 세상이 뜬 구름으로 화했네.

당시 즐거움을 흡족히 못 느끼고

이곳의 시름만 부질없이 더했네.

소식 끊어진 청루(靑樓)엔 사람들 서글프고

꿈 날아간 황천(黃泉)엔 나비만 유유한데,

뜻밖에 이미 타향 귀신이 되었으니

꽃다운 풀 어느 해에야 그 한(恨)이 그치랴.

 

哭姜主簿

重到平原訪舊遊 忽驚身世似雲浮

歡娛未足當時樂 怊悵空添是處愁

信斷靑樓人悄悄 夢飛黃壤蝶悠悠

不期巳作他鄕鬼 芳草何年恨卽休

Ⅴ-061) 화광훈사(和光熏師)의 시권에 씀

맑은 매화와 눈빛 달빛이

한데 섞여진 봄바람이라,

여기가 바로 원융(圓融)한 곳이니

맑게 비었는데도 비지 않았네.

 

書和光熏師卷

淸梅雪月色 混合一春風

此是圓融處 湛然空不空

Ⅴ-062) 배웅 (목은 牧隱 시의 운을 빌려)

진경(眞經)을 읽지 않고 좌선(坐禪)하지도 않았건만

구름 자취와 학의 몸짓이 하늘을 찌르네.

훨훨 날아가는 외그림자 일 천 산 속에

시내 달과 솔바람이 성품을 전하네.

 

送行(借牧隱韻)

不讀眞經不坐禪 雲蹤鶴態氣衝天

翩翩隻影千山裏 溪月松風性可傳

Ⅴ-063) 대소원사(大素圓師)의 시권에 씀무명(無明)의 혼돈 덩어리를 타파하니

넓고도 고요해 추구할 수가 없네.

활짝 트인 경계에는 하늘과 땅이 열렸고

한가롭게 놓여진 허공에는 해와 달이 흐르네.

예나 이제나 어찌 변하랴

늘지도 않고 줄지도 않아 두루 원만하네.

삼라만상(森羅萬象)이 다 그 가운데 나타나니

묘한 쓰임이 가로 세로 항상 자유롭네.

 

 

書大素圓師卷

打破無明混沌肧 廓然寂滅絶追求

能開境界乾坤闢 閑放虛空日月流

亙古亙今何變易 不增不減遍圓周

森羅萬像於中現 妙用縱橫且自由

Ⅴ-064) 영공(令公) 이숭인(李崇仁)에게 드림 (두 수)

Ⅴ-064-01)

산 숲과 하늘이 구름과 진흙만큼 떨어져 있으니

나가고 들어오는데 어찌 학과 닭이 다르랴.

오래 살기 비는 마음은 용수(龍峀) 북쪽으로 달리는데

고사리 캐는 몸은 치악(雉岳) 서쪽에 있다오.

Ⅴ-064-02)

남은 여생 만사를 다 잊어버리고

부질없이 연하(煙霞)에 늙으면서 시비를 끊었건만,

사모하는 마음은 아직도 남아 있어

흰 구름 서북쪽으로 꿈이 날아간다오.

 

奉寄李令公崇仁(二首)

山林霄漢隔雲泥 出處何殊鶴與雞

祝壽心歸龍峀北 採薇身在雉峯西

 

殘生萬事已忘機 空老烟霞絶是非

跪履相從心尙在 白雲西北夢勞飛

Ⅴ-065) 영공(令公) 이유(李宥)에게 드림 (두 수)

Ⅴ-065-01)

덕은 더욱 두터워지고 도는 나날이 높아져

노를 젓지 않고도 바람 물결에 떴네.

세상길이 평탄하건 험하건 잘 건너니

아마도 천종(千鍾)의 녹을 한 터럭처럼 보시겠지.

Ⅴ-065-02)

큰 날개로 일찍이 만리 길에 높았으니

그 형세가 미친 물결 가로막은 지주(砥柱)와 같으셨네.

동갑인 촌 늙은이가 무슨 소원 있으랴만

창생(蒼生)들 위해 깃털을 떨쳐 주소서.

 

奉寄李公令(宥, 二首)

德益尊而道益高 不將舟楫泛風濤

世途夷險經過熟 應視千鍾若一毛

 

大翼曾當萬里高 勢如砥柱峙狂濤

同庚野叟無餘願 且爲蒼生拂羽毛

Ⅴ-066) 예각(藝閣) 조박(趙璞)에게 드림

Ⅴ-066-01)

맑은 모습 오래 못 뵈어 하루에도 세 번 그리운데

희어지는 귀밑 털 세월을 차츰 이길 수 없네.

지난해 봄날 밝은 달밤에

여관집 등불 아래서 함께 나눈 이야기가 늘 생각나네.

Ⅴ-066-02)

작은 조카가 시를 지어 두세번 부쳤네.

남달리 사랑받았다니 기쁨을 이길 수 없네.

가볍게 날아갈 날개가 없어

문하에 나아가 웃음 이야기 못 나누는 게 한스럽구나.

 

奉寄趙藝閣(璞)

久違淸範日思三 鬂上年華漸不戡

每憶去年春夜月 旅窓燈下共情談

 

小姪裁詩寄再三 厚承情眷喜難戡

恨無羽翼飄輕擧 卽進門屛奉笑談

Ⅴ-067) 봉복군(奉福君)에게 부침(신조대선사 神照大禪師)

Ⅴ-067-01)

오로지 인자한 문을 향해 열 번이나 봄을 보냈으니

축지법(縮地法) 배우지 못해 늘 마음만 괴로웠네.

각림사(覺林寺) 팔부(八部) 중생이 위덕(威德)을 더하여

옛 주인 경영하기를 못내 기다리네.

Ⅴ-067-02)

동국(東國)이 중흥하는 첫 번째 봄이니

농사와 누에치기가 뜻대로 되어 천신(天神)께 감사하네.

스님도 역시 풍운이 만남을 느껴

예사롭게 복을 받들어 한 사람에게 바치네.

 

寄奉福君(神照大禪師)

專嚮慈門十過春 無因縮地每勞神

覺林八部增威德 忙待經營舊主人

 

東國中興第一春 農桑得意謝天神

沙門亦感風雲會 奉福尋常獻一人

Ⅴ-068) 비 내리는 가을 서재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음

빈 서재에 가을이 이미 깊어져

오두막 작은 평상이 서늘하네.

갈대 언덕에는 처음 문이 흔들리고

국화 울타리에는 아직 서리가 내리지 않았네.

까마귀는 산 빛 속으로 날아가고

사람은 빗소리 곁에서 조는데,

이슬 맞으며 금 꽃잎을 주우니

진주에 차가운 향기가 엉키네.

 

秋齋雨中卽事

空齋秋已晩 矬屋小床凉

葦岸初搖雪 菊籬猶未霜

鴉飛山色裏 人睡雨聲傍

帶露掇金蘂 眞珠凝冷香

Ⅴ-069) 아우 선차(宣差) 이사백(李師伯)이 차를 보내주어 고마워하다

반가운 서울 소식이 숲 속 집에 이르니

가는 풀로 새로 봉한 작설차(雀舌茶)일세.

식사 뒤에 한 잔은 유달리 맛있고

취한 뒤에 석 잔도 자랑할 만하네.

마른 창자를 축이니 찌끼가 남지 않고

병든 눈까지 열려 앞이 환해졌네.

이 물건의 신기한 공을 헤아리기 어려우니

시마(詩魔)가 다가오고 수마(睡魔)도 따라오네.

 

謝弟李宣差(師伯)惠茶

惠然京信到林家 細草新封雀舌茶

食罷一甌偏有味 醉餘三椀最堪誇

枯腸潤處無査滓 病眼開時絶眩花

此物神功誠莫測 詩魔近至睡魔賖

Ⅴ-070) 송화사(松花寺)에 갔는데 마침 주지 스님(主師)이 밖에 나갔으므로 기다리면서 짓다

아침 이슬에 숲을 헤치며 이 언덕에 올라왔더니

주인은 어디 가고 선당(禪堂)이 닫혀 있나.

솔바람만이 놀러온 사람의 뜻을 알고서

손님의 자리 향해 서늘한 바람을 보내 주네.

 

遊松花寺。適主師出外。待之而作

朝露披榛陟此岡 主人何處鎖禪堂

松風只解遊人意 偏向賓筵送晩凉

Ⅴ-071) 전 목백(牧伯) 정공(鄭公)에게 드림 (네 수)

Ⅴ-071-01)

아전은 공손하고 백성은 평안하며 정사도 평온해

반년 동안 맑은 이름에 칭찬이 자자했네.

갑자기 깃발을 돌려 조정으로 떠나시니

어머니 잃은 아이같이 어쩔 줄을 모르네.

Ⅴ-071-02)

내 생애에 평화스러운 시대를 보게 되어

일하는 백성들 노래 듣기를 항상 즐거워했건만,

하늘이 낳은 백성들을 하늘이 돕지 않으시니

하늘의 뜻이 어디 있는지 알 수가 없네.

Ⅴ-071-03)

십 년 동안 강호(江湖)에서 화합하기를 배워

도롱이에 삿갓 차림으로 고기잡이 노래나 불렀네.

태산같이 무거운 은혜 갚은 길이 없으니

이별하는 자리에서 어찌 눈물 흘리지 않으랴.

Ⅴ-071-04)

자하동(紫霞洞)은 편안하고 온화하니

아마도 신선이 노래 부르며 놀았으리.

따라가 모시고 싶은 생각 간절하건만

긴 날개가 없으니 내 어찌하랴.

 

奉寄前牧伯鄭公(四首)

吏肅民安庶政和 半年淸譽動絃歌

飜然返旆朝天去 失母群兒回乃何

 

吾生得見致中和 且喜恒聞樂職歌

民是天民天不佑 不知天意乃云何

 

十載江湖學志和 但攜蓑笠放漁歌

重恩未必酬山岳 卽到離筵不淚何

 

紫霞仙洞有安和 應是神仙奏浩歌

切欲攀緣陪釰履 諒無脩翼若爲何

Ⅴ-072) 시자(詩字)를 차운해 지음 (세 수)

Ⅴ-072-01)

얼음 언 시내와 눈 내린 산에 한 해가 저무는데

먼 길에 그 누가 적막한 마음을 달래 주랴.

나그네 길의 정황을 아는 이 없어

갖가지 한(恨)을 한데 모아 일곱 자 시(七字詩)를 짓네.

Ⅴ-072-02)

구름같이 몰려든 공사(公事)에 쉴 틈이 없어서

남북으로 말달리며 몸과 맘이 바쁘네.

아전과 백성들은 백성 걱정하는 뜻을 알지 못하고

시내와 산 찾아다니며 시만 짓는다고 말하네.

Ⅴ-072-03)

옛날 어진 수령이었던 공(龔)․황(黃) 이야기를 들은 적 있어

천년 지난 오늘에도 그를 사모하네.

이제 내 평생 일을 스스로 치하하노니

태평시대 낙직시(樂職詩)를 얻어 보겠네.

 

次詩字韻(三首)

氷雪溪山歲暮時 路長誰慰寂寥思

客中情况無人識 萬恨聊題七字詩

 

公事如雲無歇時 馬蹄南北費勞思

吏民不識憂民意 誤道溪山覓好詩

 

聞說龔黃在昔時 寥寥千載謾追思

于今自賀吾生事 得見中和樂職詩

Ⅴ-073) 관찰사(按節) 정공(鄭公)이 홍천(洪川) 객관(客館)에 쓴 시를 반자(半刺) 양선생(楊先生)이 보여주어 차운함

Ⅴ-073-1) 조정에 치하함(賀朝)

성스러운 임금(聖神)께서 나라를 개화(開化)하시니

이윤(伊尹)과 여상(呂尙) 같은 신하들이 이웃해 있네.

세상은 다시 복희(伏羲)․헌원씨(軒轅氏) 세상 되었고

백성들은 요(堯)․순(舜)의 백성 되었네.

사방이 모두 태평성대에

다른 나라도 다들 화친 맺으니,

천자께서 유지(諭旨)를 내리셔

삼한(三韓)의 즐거움이 다시금 새롭네.

Ⅴ-073-2) 관찰사(按節)의 행적을 기록함 (記按節行)

은혜와 위엄을 두 도에 베푸니

덕스런 정치가 여러 이웃에 으뜸일세.

바다를 횡행하던 악어도 자취 감추고

산림에 숨어 살던 선비도 일으켰건만,

훌륭한 공은 모두 사직(社稷)에 돌리고

임금과 어버이에게 충효로 보답할 뿐일세.

천리에 태평스런 노래가 두루 퍼졌으니

맑은 바람 나날이 새로우리라.

Ⅴ-073-3) 반자(半刺)의 행적을 기록함 (記半刺行)

피폐한 고을에 거문고와 노래 소리 들리고

밥 짓는 연기가 이웃에 이어졌네.

정사가 청백해서 송아지 남긴 이 같아

교화를 베풀어 온 백성을 감화시켰네.

부드러운 덕은 어머니 같아

모두들 어버이처럼 우러러 사모하니,

옛날 더러워진 여러 풍속들이

이제부터 하나하나 새로워지리.

Ⅴ-073-4) 진정(陳情)

우물쭈물하는 행동이 나 보기에도 우스우니

쓸쓸한 이 신세를 누구와 이웃하랴.

마음이 티끌 세상과 멀어졌으니

밭고랑 백성으로 이 몸이 한가하네.

들판의 스님이 와서 친구가 되고

숲속의 새가 다가와 서로 친해지니,

붓 잡고 구름 달을 희롱하면서

성스런 덕 새로워졌음을 노래한다네.

 

次半刺楊先生所示按節鄭公題洪川客舘詩韻

聖神開化國 伊呂在臣隣

世復羲軒世 民爲堯舜民

多方皆帖泰 異域盡和親

天子下宣諭 三韓樂更新 (右賀朝)

 

恩威施兩道 德政冠諸隣

溟海潛橫鰐 山林起逸民

功庸歸社稷 忠孝報君親

千里謳謠遍 淸風澈日新 (右記按節行)

 

絃歌喧獘邑 烟火接比隣

莅政同留犢 移風化爲民

母臨綏似德 嬰慕仰如親

舊染群汚俗 從今一一新 (右記半刺行)

 

棲棲還自笑 踽踽與誰隣

心阻塵埃世 身閑畎畝民

野僧來作伴 林鳥近相親

操筆弄雲月 聊歌聖德新 (右陳情)

Ⅴ-074) 두부

말 콩을 먼저 맷돌에 갈아

통에 가득 흰 눈 쌓이면 물과 섞는다네.

흔들어 즙을 내면 거품이 사라지고

걸러서 거품 가라앉히면 찌끼가 갑절 많아지네.

솥 안에 엉키면 우유처럼 진해지고

소반에 가득 담으면 구슬 빛이 되네.

우엉과 토란 한데 삶아 향기로운 밥을 지으니

서산에 고사리 캐는 노래가 우습기도 해라.

 

豆腐

斗豆先將石磨磨 盈槽白雪水相和

攪成汴處漚還滅 漉取泡來滓倍多

凝結釜中濃似酪 滿盛盤上色如瑳

雜烹芋夗炊香飯 笑彼西山採蕨歌

Ⅴ-075) 동지 날 팥죽

음기가 사라지고 양기가 되돌아오는 날

붉은 팥죽 향내가 푸른 항아리에서 떠오르네.

한창 솥에서 끓을 때 처음 소금을 넣고

다시 새알심을 넣은 뒤에 주걱으로 뒤적이네.

호타(滹沲)의 보리밥보다 품이 더 들고

금곡(金谷)의 나물보다 맛이 더 기이하니,

나 역시 가난한 살림이 갑자기 더하건만

아! 만들고 보니 동지가 된 걸 알겠네.

 

冬至(豆粥)

陰消陽復正當期 紅雪香浮碧玉(瓦+玆)

始下鹽時方沸鼎 更投蜜處正翻匙

滹沲麥飯功兼重 金谷萍莖味㝡奇

我亦窮居倉卒甚 咄嗟成辦要須知

Ⅴ-076) 반자(半刺) 선생이 산성(山城) 창고를 돌아보고 느낌이 있어 지은 시에 차운함 (여섯 수)

Ⅴ-076-01)

구름 뚫고 눈을 헤치며 높은 성에 오르니

험한 길에 말(馬)이 지쳐 견디기 어렵구나.

창고 지은 당시에야 오늘의 폐단 어찌 생각했으랴

양식 운반하는 계획이라 민생(民生)을 염려했겠지.

Ⅴ-076-02)

전성(專城)을 맡아 그 이름 책임이 무거워

오늘 이 걸음에 노고가 많네.

세상일은 어렵고도 끝이 없으니

해 뜨면 언제나 일이 따라 생기네.

Ⅴ-076-03)

어사(御使)의 맑은 이름이 낙성(洛城)을 흔들어

홀(笏)과 관(冠) 차림으로 준마를 타고 버들 둑을 오가네.

이제 멀리 와서 백성 다스리는 기술을 퍼뜨리니

공(龔)․황(黃)이 다시 태어났다고 사람들이 말하네.

Ⅴ-076-04)

추운 날씨에 저녁볕이 외로운 성을 비추는데

병든 나그네 무료하게도 나다니지 못하네.

억지로 일어나 지팡이에 기대 잠깐 서 있노라니

다리는 떨리고 눈도 흐려 어지럽구나.

Ⅴ-076-05)

메마른 밭은 거칠어가고 시름의 성만 둘러싸

어려서 배운 것 없으니 커서도 행하지 못하네.

일마다 시대에 어긋나 쓰일 곳 없으니

우직한 내 평생을 웃을 뿐일세.

Ⅴ-076-06)

얼음은 앞 시내를 합치고 눈은 성을 눌렀는데

오가는 사람 끊어져 빈 평상만 썰렁하네.

시름 창자의 온갖 느낌이 가난 때문에 일어나고

귀밑의 천 오리 시든 털은 늙음 때문에 생겨나네.

 

次半官先生山城反庫次有感詩韻(六首)

穿雲撥雪上高城 馬困難堪冒險行

當日豈思今日弊 轉粮謀計慮民生

 

名途重任是專城 我獨賢勞在此行

世故多艱無了極 日將還出事還生

 

御使淸名動洛城 笏冠驄馬柳提行

今來遠播醫民術 人道龔黃復此生

 

天寒夕照淡孤城 病客無聊不出行

强起扶笻還小立 脚筋酸澁眼花生

 

瘠田荒廢疊愁城 幼學無成壯未行

事事違時何所用 只將愚直笑吾生

 

氷合前溪雪壓城 蟻床凄冷絶人行

愁腸萬緖因貧起 衰鬢千絲爲老生

Ⅴ-077) 비 내리는 밤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썰렁한 초가집에 중처럼 사노라니

겨울밤이 유난히 길어 한 잠 자고도 남네.

벽에 비추는 등불 꽃은 부질없이 가물거리고

창 너머 바람과 비는 참으로 쓸쓸하네.

미친 꾀와 그릇된 셈을 어찌 다 말하랴만

소박한 흥과 한가한 생각은 그대로일세.

낙숫물이 차츰 그치고 닭이 새벽을 알리자

눈꽃이 휘날리어 온 뜰에 가득하네.

 

夜雨卽事

草廬牢落類僧居 冬夜偏長一睡餘

照壁燈花空點綴 隔窓風雨正蕭疎

狂謨謬筭那堪托 野興閑思却自如

簷溜漸收鷄已曉 雪華飄蕩滿庭除

Ⅴ-078) 문을 닫은 채 옛것을 들쳐보거나 사물에 부쳐 회포를 푸는 것은 때를 만나지 못한 자들이 하는 일이다. 옛 기물을 가지고 절구 네 수를 지어 나 자신을 탄식한다

Ⅴ-078-1) 오래된 거울

예전엔 고운 눈썹과 화장한 얼굴을 비추었는데

십 년 동안 경대 밑에서 먼지에 묻혀 있었네.

밝은 본바탕은 원래 줄지 않으니

먼지 털고 빛 내지 않는 사람 하나 뿐일세.

Ⅴ-078-2) 오래된 칼

한 고조(漢 高祖)가 삼척검(三尺劍)으로 천하를 평정하니

기름과 피가 엉켜 초(楚)나라 깨뜨린 흔적 되었네.

사해(四海)가 고요해진 후 오래 동안 쓰이지 않아

칼집 속에서 울부짖으며 원통함을 품었네.

Ⅴ-078-3) 오래된 거문고

태고 적부터 시원한 소리 그 운치가 기이하건만

백아(伯牙)의 유수곡(流水曲)을 아는 이가 드물었네.

종자기(鍾子期)가 죽은 뒤에 줄을 끊고는

먼지 덮인 마루에 버려 두었으니 슬프기도 하구나.

Ⅴ-078-4) 오래된 솥

구주(九州)의 쇠로 만든 비상한 물건이니

삼대(三代)부터 성왕(聖王)을 위해 옮겨 왔었네.

사해(四海) 백성들이 홍무(洪武) 성군(聖君)을 노래하니

굳이 분음(汾陰)에 깊이 잠겨 있지 않으리.

 

杜門覽(☆)古。寓物興懷。此不遇時者之所爲也。因賦古器。作四絶以寓歎

古鏡

曾照蛾眉粉面新 十年奩底久理塵

皎然本質元無損 刮垢磨光欠一人

 

古釰

漢皇三尺定乾坤 膏血凝成破楚痕

四海晏淸長不用 匣中龍吼政含寃

 

古琴

太古冷冷韻技奇 伯牙流水少人知

子期死後絃初絶 棄置虛堂良可悲

 

古鼎

九金之鑄特非常 三代遷移爲聖王

洪武聖君歌四海 不應汾右固深藏

Ⅴ-079) 판사(判事) 이을림(李乙琳)을 곡함

Ⅴ-079-01)

지위는 높아 재상에 올랐고

일흔 세 살 되도록 강건하셨으니,

큰 꿈에 놀랐다고 어찌 말하랴만

맑은 말씀을 다시는 들을 수 없게 되었네.

자녀들의 정을 다하기 어렵고

형제들의 한도 견딜 수 없는데,

한 평생 한가롭게 사시던 이곳

낚시터 남쪽에 가을달이 비추네.

Ⅴ-079-02)

함께 나이를 잊고 친구 되었는데

아아! 공께선 수기(壽器)를 만드셨네.

마음이야 어찌 황토에 가로막히랴만

혼은 절로 붉은 명정(銘旌) 따라 가시리.

꽃밭에는 봄이 부질없이 늦어가고

거문고 평상에는 달이 홀로 밝은데,

처절한 만가(輓歌)도 이미 그치니

서글픈 이 곡소리는 부생(浮生)을 곡하는 것일세.

 

哭李判事(乙琳)

位高台階上 年强七十三

何言驚大夢 無復聽淸談

兒列情難極 鴒原恨不堪

平生散盧處 秋月釣臺南

 

共結忘年契 嗟嗟壽器成

心何隔黃土 魂自逐丹㫌

花砌春空晩 琴床月獨明

挽歌凄已斷 冷哭哭浮生

Ⅴ-080) 환희사(歡喜寺) 당두((堂頭) 장로(長老)를 대신해 관찰사 정탁(鄭擢)에게 올린 시 (네 수)

Ⅴ-080-01)

남다른 풍채가 공문(孔門)에 빛나

관동(關東) 두 도에 홀로 높았네.

순찰한 지 며칠만에 백성들 노래하니

방외(方外)의 선승(禪僧)도 그 은혜에 감동하네.

Ⅴ-080-02)

일찍부터 다행히 상종할 인연 있었건만

물로 나뉘고 구름에 막힌 지 십여년 되었네.

뜻밖에 오늘 다시 만나니

반갑기도 하고, 놀랍기도 하네

Ⅴ-080-03)

푸른 산(靑山)과 시끄러운 거리(紫陌)라 찾기 어려웠으니

한번 웃으며 만나는 값이 만금이나 되었네.

기쁨에 넘쳐 말없이 감개무량하니

한 평생 오로지 친근한 마음뿐일세.

Ⅴ-080-04)

몇 년 사이 액운이 선방(禪房)까지 이르러

밥 짓는 불이 자주 꺼지고 바리도 썰렁해졌네.

도도 못 닦고 증(證)도 없는 중을 누가 먹여 주랴

공덕을 따진다면 헤아리기 어렵네.

 

代歡喜堂頭長老。上按部公鄭(擢)詩(四首)

風彩離倫照孔門 關東兩道獨爲尊

巡宣不日謳謠遠 方外禪僧亦感恩

 

早歲相從幸有緣 水分雲隔十餘年

不期今日重相會 一則欣然二愕然

 

靑山紫陌隔難尋 一笑相逢直萬金

喜極無言多感慨 一生專一是親心

 

年來陳厄到禪坊 廚火蕭疎齋鉢凉

誰飯無修無證者 若論功德固難量

Ⅴ-081) 반자(半刺) 선생의 시에 차운함

Ⅴ-081-01)

절기가 동지에 가까워지자

밤이 길어져 만 길이나 되네.

이때에 시름겨워 잠들지 못하니

어찌 나 홀로 무심하랴.

붕로(鵬路)는 천리에 통하고

용만(龍巒)은 두어 봉우리에 가렸네.

공이여! 좌천되었다고 한탄하지 마오

가는 곳마다 지음(知音)을 귀하게 여긴다오.

Ⅴ-081-02)

한 수의 시가 참으로 좋아

다시 보고 또 다시 찾으니,

언제나 나라 위한 걱정이고

절절이 임금 보좌하는 마음일세.

탑 자리 걸어 놓으니 벽에 먼지가 나고

거문고 울리면 달이 봉우리에 뜨네.

바라건대 노래를 들어 고요히 하고

이치를 살펴 백성들 말을 들으소서.

Ⅴ-081-03)

언제나 공무가 막중해

험난한 길을 몸소 찾아 다니시니,

한 평생 지닌 뜻이 넓고 넓으신데다

온갖 일에 마음을 아끼지 않으시네.

삭풍은 짧은 해에 불어오고

높은 봉우리에 눈은 가득 쌓였는데,

이 모습 마주하여 율시를 짓노라니

양춘(陽春) 소식이 곧 다가오네.

Ⅴ-081-04)

세상 뒤집히는 걸 헤아리기 어렵지만

흥망의 자취를 찾아볼 수는 있네.

대체로 좋지 않은 상황에

모두들 불평스런 마음 뿐일세.

세상 길은 위험하기만 한데

하늘 밖에 봉우리가 우뚝 솟아,

이 모습 마주하여 옛나라를 생각하니

푸른 소나무가 슬픈 소리를 보내 주네.

Ⅴ-081-05)

한 자를 굽히는 것도 내 일이 아니니

그 누가 한 길을 펴랴

산은 예나 이제나 한 모습인데

사람은 아침 저녁으로 다른 마음일세.

이익 다투는 길엔 바람 물결이 많고

그윽한 집엔 달 봉우리만 있어,

한 구역 구름과 물 속에 사는 나에게

영화와 치욕이 아무 소리 없네.

Ⅴ-081-06)

얼굴은 차츰 시들어 가고

늙음과 병은 다투어 찾아 오네.

벼루를 갈아도 끝내 효험 없건만

지초 캐는 건 일찍 마음에 있었네.

서재 난간엔 옛 시내가 마주 흐르고

바둑 두는 곳엔 맑은 봉우리가 비치니,

이곳이 내 한 평생 생각하던 곳이라

머물면서 덕스런 소리를 사모한다오.

 

次半刺先生韻

節近陽生日 更長直萬尋

此時愁不寐 何事獨無心

鵬路通千里 龍巒隔幾岑

左遷公莫恨 隨處貴知音

 

其二

一首詩正好 重看又復尋

忡忡憂國慮 切切補君心

掛榻塵生璧 鳴琴月湧岑

請聞歌靜化 察理在聆音

 

其三

迺因公務重 行觸險途尋

蕩蕩一生志 勞勞千事心

朔風吹短日 積雪滿高岑

對此題詩律 陽春有至音

 

其四

飜覆固難測 興亡從可尋

大凡無善狀 都是不平心

危險世間路 孤高天外岑

對此思古國 松翠送悲音

 

其五

枉尺非吾事 誰能且直尋

山亙今古態 人有暮朝心

利路多風浪 幽居只月岑

一區雲水裏 榮辱寂無音

 

其六

容顔漸衰變 老病競侵尋

磨硯竟無効 採芝曾有心

書軒臨古澗 碁局照晴岑

是處吾生念 淹留慕德音

Ⅴ-082) 위 운(韻)에 따라 시를 지어 강릉(江陵) 생원(生員) 최안린(崔安獜)에게 드림

원성(原城)은 그윽하고도 외진 곳인데

최자(崔子)가 우연히 찾아 오니,

뜻밖의 만남이라 새삼 기뻐서

반갑게 옛 일을 이야기하네.

맑은 항아리는 북쪽 바다에 이어졌고

비낀 해는 서쪽 봉우리에 걸려,

길게 읊조리며 아름다운 구절 내어 놓으니

금옥 같은 소리가 낭랑하게 퍼지네.

 

用前韻呈江陵崔生員(安獜)

原城幽且僻 崔子偶來尋

邂逅發新喜 怡愉論舊心

淸樽連北海 斜日掛西岑

長嘯吐佳句 琤然金玉音

Ⅴ-083) 병중에 읊음 (세 수)

Ⅴ-083-01)

늙어 가면서 병 많은데다 추운 겨울을 지나니

사람마다 옛 모습 아니라고 웃고들 있네.

귀가 멍하고 눈이 어두워 보고 듣기 힘든데다

힘줄 땅기고 숨이 가빠져 시큰거리네.

음식 량이 해마다 줄어드니

생활하기도 나날이 어려워지네.

이제 와서 지난 일을 생각해 무엇하랴

마음 끝에 걸린 남은 생각이라곤 하나도 없네.

Ⅴ-083-02)

돈과 절교한 지 오래 되어서

병들어도 좋은 약 없어 가난한 둥지만 지키네.

신묘한 방술을 어디 가서 얻으랴

효험 없는 단방(單方)은 내던져 버려야겠네.

의원(醫員)의 치료라고 어찌 믿으랴

이미 노쇠한 몸이라 어쩔 수 없네.

이제부터 마음 편안히 가질 비결을 배우려

구구하게 남의 조롱을 변명하지 않으리라.

Ⅴ-083-03)

바람 소리가 숲을 흔들고 눈은 문에 걸려

차가운 구름 지는 해에 마을 더욱 쓸쓸하네.

어질러진 책들이 마음을 끌건만

병 뿌리가 달라붙어 몸이 지치네.

거울 속 향해 늙은 얼굴 슬퍼한들 무엇하랴

옷 위의 먼지를 털지도 못하는데.

흰 머리라도 인간 세상에 머물고 싶어

하늘의 화육(化育) 은혜를 가만히 감사드리네.

 

病中吟(三首)

老仍多病過冬寒 人笑形非昔日看

耳聵眼昏妨視聽 筋衰氣縮轉辛酸

乃因飮食年來減 頗覺興居日漸難

已矣乎今思往事 一無餘念掛心端

 

早與錢兄久絶交 病無良藥守寒巢

有神妙術從何得 無効單方可以抛

縱使醫治那足恃 巳當衰朽不可包

自今欲究安心訣 且莫區區學解嘲

 

風吼踈林雪掛門 凍雲殘日淡孤村

圖書跌宕牽心緖 體氣支離帶病根

休向鏡中悲老色 未能衣上拂塵㾗

白頭尙肯留人世 黙謝皇天化育恩

Ⅴ-084) 생각나는 대로 읊어서 향학(鄕學)의 여러 서생들에게 부침

이른 아침에 어떤 사람이 문 앞에 이르러

부끄러운 얼굴로 땀 흘리면서 사유를 아뢰네.

그 말 묻고 다시 생각하니 웃음이 나네.

공부 안 해도 되면 하지 말게나.

 

卽事。寄鄕學諸生

晨朝有客到門頭 汗赩含羞告事由

問語更思含一笑 可爲休則可爲休

Ⅴ-085) 세모(歲暮)에 쓴 회포

광주리 밥 바가지 국도 즐길 만해서

늙음이 다가오는 것도 알지 못했네.

거울 속에 갑자기 희끗한 머리털 보고

육십삼년 지난 걸 깜짝 놀랐네.

 

歲暮書懷

廓落簞瓢樂可堪 老之將至不曾諳

鏡中忽見渾頭雪 驚却年過六十三

Ⅴ-086) 향학(鄕學)의 여러 서생들이 눈(雪)을 가지고 시를 지었다고 하기에 그 시에 차운하여 부침

쏟아지다 뜸하고 바로 내리다 옆으로 비껴

나무 떨기에 붙으면 매화꽃 같네.

몇 군데선 피리와 거문고를 다투어 즐기고

술 파는 집에선 술값 높아지겠지.

 

聞鄕學諸生賦雪。次韻寄似

密復踈仍整復斜 惹叢聊自學梅花

管絃幾處爭相看 酒價應高賣酒家

Ⅴ-087) 주천(酒泉) 공관(公舘)에 홀로 앉아 있다가 느낌이 있어 지은 시에 차운함 (두수)

Ⅴ-087-01)

사람 드물어 외로운 공관이 고요한데

나무 흔드는 바람소리(風樹)는 용처럼 울부짖네

들판의 학은 높은 봉우리로 날아가고

굶주린 까마귀는 가까운 숲에 모여 드네.

쓸쓸한 마을엔 밥 짓는 연기 드물고

빽빽한 산엔 물과 구름 깊으니,

만약 시를 짓지 않으면

답답한 마음을 그 누가 알아 주랴.

 

次酒泉公舘獨坐有感詩韻(二首)

人稀孤舘靜 風樹似龍吟

野鶴投高峀 飢烏集近林

村寒烟火索 山密水雲深

若不題詩句 誰知鬱鬱心

Ⅴ-088) 또 짓다

삼가 새 시축(詩軸)을 펼치고

세 번 다시 읊으니,

문장은 사람 바다에 두루 비추고

기상은 온 유림(儒林)에 으뜸일세.

필진(筆陣)은 신기하고도 묘한데다

사원(詞源)은 넓고도 깊어,

높이 부르다가 운을 잇기 어려우니

광간(狂簡)한 내 마음이 부끄럽네.

 

奉閱新詩軸 凝然三復吟

文章照人海 氣像冠儒林

筆陣神仍妙 詞源廣復深

唱高難繼韻 狂簡愧予心

Ⅴ-089) 동짓날 영춘(永春)에 도착했는데 밤에 찾아온 비마라(毘麽羅) 스님의 시에 차운함

강물이 황량한 마을을 감싸 흐르니

이웃이 드물어 시끄럽지가 않네.

시골 풍속이 본래 순박한데다

경치가 아름다우니 바로 선경(仙境)일세.

계절은 바야흐로 차례를 바꾸려 하고

구름과 연기는 절로 그림을 그려,

어지신 스님께서 찾아오시지 않았더라면

기나긴 밤이 응당 외로웠겠네.

 

次冬至日到永春。夜毘麽羅僧來訪詩韻

江抱荒村僻 隣稀絶噪呼

鄕風雖俗朴 地勝卽仙壼

時節方更序 雲烟自作圖

若無賢釋子 長夜必應孤

Ⅴ-090) 조카 흡곡(歙谷) 수령에게 부침 (조카 이름은 식 湜인데, 조카가 숙부(叔父)의 일을 이어 맡았기 때문에 쓴 것이다)

옛 고을이 동해 가에 있어

밥 짓는 연기가 해문(海門)에 닿았구나.

숙부께서 먼저 은혜와 사랑을 베풀었으니

조카도 역시 맑은 향기를 퍼뜨려야지.

풍속을 이롭게 하려면 폐단을 없애고

백성을 편히 하려면 분쟁을 풀어야 한단다.

청렴과 공정을 으뜸으로 삼고

그 다음엔 삼가고 부지런하거라.

 

寄姪歙谷令(湜 姪繼叔之任故云)

古縣東溟畔 人煙接海門

叔先施惠愛 姪亦播淸芬

利俗要蠲弊 願渠宜釋紛

廉公爲第一 其次謹而勤

Ⅴ-091) 병을 앓고 있는데 목백(牧伯)이 사람을 시켜 약을 보냈기에 시를 지어 사례함 (두 수)

Ⅴ-091-01)

산 속 서재에 달포 드러누웠으니

바깥 사람 그 누가 가난한 집을 찾아오기 좋아하랴.

게다가 약까지 보내 쓰라린 병을 고쳐 주시니

바퀴자국의 물고기 신세를 면한 듯 감사하구나.

Ⅴ-091-02)

늙고 못난 몸이라 도울 만한 재덕(才德)은 없지만

웃는 얼굴 받들 생각만은 언제나 간절하네.

병든 뒤부터 뜰 아래 나아가지 못하니

다만 강건하여 안락하시길 빌 뿐이네.

 

病中。牧伯使人惠藥。詩以謝之(二首)

伏枕山齋僅月餘 外人誰肯到窮居

特分良藥醫辛苦 情興還如免轍魚

 

老拙雖無補德才 意將恒奉笑顔開

病來未敢趍庭下 但祝康哉又樂哉

Ⅴ-092) 생각나는 대로 읊음

새벽빛이 훤하게 동창을 비추노라니

계집아이가 술 한 항아리를 들고 오는구나.

취해서 봉성(鳳城) 쌍궐(雙闕) 아래를 생각하니

눈 속에 칼날들이 흔들리겠지.

 

卽事

瞳瞳曉日照東窓 兒女携來酒一缸

醉憶鳳城雙闕下 雪中兵刃擁摐摐

Ⅴ-093) 윤12월 9일(입춘 7일전). 눈이 내리다.

한밤중에 빗소리가 요란하더니

아침 느지막이 눈발 되었네.

울타리는 세 갑절이나 눌리고

뜨락 섬돌도 모두 평평해졌네.

다가오는 봄을 시샘하는지

훤한 새벽빛을 먼저 가져와,

풍년 들 조짐을 먼저 알게 되었으니

민생(民生)을 위해서 축하하리라.

 

閏臘月九日雪(立春前 七日)

半夜雨聲亂 終朝雪勢成

藩籬三倍壓 庭砌一般平

妬殺春輝近 先將曙色明

須知豐瑞應 賀意爲民生

Ⅴ-094) 또 짓다

서재에 기이한 경치가 많아져

온 천지를 눈앞에서 찾아 보네.

사람은 은(銀)세계로 돌아가고

까마귀는 구슬 숲을 점찍네.

새들은 쉴 만한 가지를 서로 다투고

벌레는 땅 속 깊숙이 들어가네.

어느새 이 해도 저물었으니

기둥에 기대 한번 길게 읊조리네.

 

齋景多奇絶 寰區眼前尋

人歸銀境界 鴉點玉山林

鳥雀爭枝穩 蝗虫入地深

蕭然驚歲暮 倚柱一長吟

Ⅴ-095) 입춘날 반자(半刺) 선생에게 드림

임신년(1392) 광경이 오늘 아침으로 다해

남은 눈과 부드런 바람이 새해와 묵은해를 가름하네.

죽마(竹馬) 탄 아이들은 때가 차츰 멀어지고

토우(土牛)를 맞이한 해는 따스해지기 시작하네.

피어나는 구름은 아름다운 기운을 띠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좋은 철을 알려 주니,

동군(東君)의 진중한 뜻을 이제 알겠구나

꽃다운 소식을 초가집 사람에게 먼저 전하다니.

 

立春日呈半刺

壬申光景盡今晨 殘雪和風代舊新

竹馬少年時漸遠 土牛迎日暖初均

雲容蕩蕩浮佳氣 鳥語喃喃報令辰

須會東君珍重意 芳菲先付苃棠人

Ⅴ-096) 입춘날 우곡(牛谷) 부부가 음식을 차리다

봄이 화창한 기운을 몰아 동쪽 들판으로 들어오는데

오래 살길 비는 사람이 때마침 술자리를 베푸네.

암담한 연기는 버드나무 길에 비끼고

흐릿한 잔설(殘雪)은 소나무 가지에 남아 있네.

얼큰히 취한 흥에 마음이 다시 트여서

새 시를 읊조리며 종이에 적어 두었네.

오래 엎드렸던 동물들이 봄 소리에 깨어난 걸 알겠구나

붓 끝에 이따금 도롱뇽이 달리네.

 

立春日。牛谷夫婦設食

陽和馭氣入東郊 薦壽人來設酒餚

暗淡輕煙橫柳陌 糢糊殘雪在松梢

醉憑逸興心還暢 吟得新詩手自抄

始信春雷驚久蟄 筆端時見走蒼蛟

Ⅴ-097) 섣달 그믐날 밤

빠르디 빠른 세월이 흰 머리털을 재촉해

나이가 예순을 지나고 또 세 돌일세.

젊은 시절 마음은 그대로건만

늙어가며 근력은 이미 쇠하였네.

올해 겨울은 이제 끝에 다달았고

내일은 아직 오기 전이니,

지금 내 마음을 그 누가 알랴

가물거리는 등잔불 다시 켜고서 시 한 수를 쓰네.

 

除夜

鼎鼎流光入白髭 年過六十又三朞

妙齡心志雖然在 晩歲筋骸甚已衰

直到今冬將盡處 正當明日未來時

此間方寸誰能料 更點殘燈寫一詩

Ⅴ-098) 1393년(계유) 설날

Ⅴ-098-01)

짙은 구름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하늘이 음침해지고

눈비가 내리려 하니 그윽한 생각이 깊어지네.

저녁 들며 스산하게 싸락눈이 내리니

조화(造化)의 공(功)이 무슨 마음인지 알 수 없구나.

Ⅴ-098-02)

서글프게 앉아서 귀밑 털을 만지노라니

소년시절 노닐던 일이 불현듯 생각나네.

마침 산새들이 봄소식을 알리느라고

두어 마디 정답게 솔가지에서 지저귀네.

 

癸酉元日

密雲四合天陰沉 雨雪欲零幽思深

向夕蕭踈微霰下 不知造化功何心

 

悄然端坐撚霜鬂 忽憶少年簪盍時

惟有山禽報春事 數聲款款啼松梢

Ⅴ-099) 7일.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Ⅴ-099-01)

봄빛이 추위를 무릅쓰고 산 마을에 들어오니

허술한 울타리에 눈이 남아 지난해 자취를 보여 주네.

오늘은 인일(人日)이라 뜻이 있으니

억지로 풍습을 따라 술항아리를 대하네.

Ⅴ-099-02)

서울에서 국록(國祿)을 받는 집들 생각해보니

아홉 거리에 수레와 말들이 먼지를 일으키겠지.

지초(芝草)를 캐는 운곡(耘谷)에는 나라 창고가 없으니

구름과 연기나 마주하여 호탕한 노래를 부르네.

 

七日卽事

 

犯寒春色入山村 殘雪踈籬舊歲痕

是日屬人良有意 强隨時事對匏樽

 

遙想京都受祿家 九街車馬動奔波

採芝耘谷無公廩 爲對雲煙放浩歌

Ⅴ-100) 반자(半刺) 선생이 시를 보냈기에 차운하여 드림 (여덟 수)

Ⅴ-100-01)

악와(渥洼)의 신기한 준마가 큰 이름을 얻었으니

굳센 뼈와 기이한 털을 일찍이 이루었네.

날랜 발굽이 잠시 미끄러진들 무슨 상관이랴

푸른 구름 만리 길이 바로 그 평생일세.

Ⅴ-100-02)

영화롭고 욕됨이 본래 이익과 명예에 달렸으니

그 누가 끝까지 공업(功業)을 온전히 하랴.

이러한 차질은 으레 있으니

내일이면 경사가 생길 것을 곧 알게 되리.

Ⅴ-100-03)

복파장군(伏波將軍)이 일찍이 큰 공을 세웠지만

율무를 가져왔다고 헐뜯는 말이 곧바로 생겼네.

세상 길이 기구해서 모두 그러니

부질없는 일 가지고 인생을 한탄하지 마시게.

Ⅴ-100-04)

삼가는 태도로 형명(刑名)을 다스리니

세상을 구제하는 큰 공을 이루셨네.

나아가고 그치는 것도 하늘이 시킨 것이라지만

구름 골짜기 십 년 동안 내 생애가 부끄럽구나.

Ⅴ-100-05)

문장과 행실이 온전한데다 힘까지 남아 있어

무공(武功)을 겸했으니 인상여(藺相如)을 닮으셨네.

천하에 덕을 베푸는 것이 사내 대장부의 일이니

전원의 오두막만 사랑하던 도연명(陶淵明)을 배우지 마시게.

Ⅴ-100-06)

한 몸이 천년 살아도 여가가 없어

반나절 편안함을 얻기 어렵네.

백성들에게 덕을 베푸는 공은 나라에 있으니

어찌 인끈을 던져버리고 전원 오두막으로 물러나려나.

Ⅴ-100-07)

굴원(屈原)과 도연명(陶淵明)은 재주가 뛰어났건만

물에 빠지고 벼슬을 사양한 것은 같지 않았네.

어찌 홀로 깨어 못 가에서 읊조리는 것만 하랴만

삼경(三徑)에 구름 오두막 지은 것만은 자랑할 만하네.

Ⅴ-100-08)

두어 해 동안 내 몹시 쇠해져

병 많이 앓다보니 마음 언제나 답답하네.

갑자기 새 시를 받고 보니 감개 무량해

공의 집에 나아가지 못하는 신세 스스로 가엽다오.

 

半刺先生寄詩。次韻奉呈(八首)

渥洼神駿得雄名 壯骨奇毛(條+火)已成

蹔蹶霜蹄何足怪(☆) 靑雲萬里是平生

 

榮辱由來在利名 始終功業孰全成

如玆蹇滯尋常理 明日方知慶事生

 

伏波曾樹大功名 讒說俄從薏苡成

世路崎嶇皆此類 莫將閑事歎人生

 

能持敬謹治刑名 濟世膚功可以成

行止古來天所使 十年雲壑愧吾生

 

文行俱全力有餘 武功兼効藺相如

德施天下男兒事 莫學陶潛獨愛廬

 

一身千載暇無餘 半日猶難得晏如

德被斯民功在國 豈能投紱退園廬

 

屈陶才智有優餘 投水辭官兩不如

何若獨醒吟澤畔 可誇三徑結雲廬

 

吾衰甚矣數年餘 多病心懷每鬱(☆)如

忽牽新詩多感慨 自笑身未進公廬

Ⅴ-101) 삼월 삼짇날. 생각나는 대로 읊음

옅은 연기와 가벼운 바람에 하늘 기운이 맑아

붉은 복사꽃 푸른 버들 속에서 새가 봄을 부르네.

올해 풍물이 바로 지난해 그대로건만

옛 나라 사람들은 모두 새 나라 사람 되었네.

꽃향기 끌어온 자리엔 지는 꽃잎 흩날리고

구름 그림자 닿은 난간엔 티끌 하나도 없네.

상에 가득한 푸른 떡이 새 맛을 알게 해주니

이웃 가까이 사는 아이들이 무척 기쁘구나.

 

三月三日卽事

烟淡風輕天氣淳 桃紅柳綠鳥呼春

今年物是去年物 古國人爲新國人

席惹花香飄落艶 檻連雲影絶浮塵

飣盤靑餠供新味 多喜兒孫在近隣

Ⅴ-102) 봄 들판을 거닐면서 (배율 排律)

꾀꼬리 우는 언덕 위에 봄날이 개어

바람 곱고 햇빛 따뜻하니 걸음걸이 가볍네.

시내 북쪽 시내 서쪽에 시내 버들이 어둡고

산 앞과 산 뒤엔 산 꽃이 환하네.

소와 나귀 풀 뜯는 저 너머 들밭이 넓고

갈매기와 해오라기 날아가는 아래 모래와 물이 맑아라.

언덕 옆에선 제호조(提壺鳥)가 술 사 오라 권하고

숲 너머선 포곡조(布穀鳥)가 밭 갈라 재촉하네.

푸른 들판 밟는 놀이야 이만하면 즐겁건만

술잔 잡는 즐거움은 그 누구와 함께 하랴.

풍물을 느껴 거닐면서 차마 못 돌아가니

맑은 연기 꽃다운 풀에 저녁 해가 기울었네.

 

春夜行(排律)

鶬鶊陌上春初晴 風日暄姸步武輕

溪北溪西溪柳暗 山前山後山花明

牛驢牧外野田濶 鷗鷺飛邊沙水淸

傍岸提壺勸沽酒 隔林布穀催農耕

踏靑游戱自知樂 浮白相歡誰與成

感物盤桓不忍返 淡煙芳草斜暉傾

Ⅴ-103) 빗속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서늘한 바람이 그쳤다 이어지면서

찌는 듯한 무더위가 씻겨져 한결 상쾌하네.

꽃이 지자 붉은 점은 잎 속에 감춰지고

섬돌 위의 이끼는 푸른 자취로 덮였네.

주룩주룩 빗소리는 누워 듣기에 알맞고

산뜻한 산 빛은 술잔 들라고 권하는데,

세상 만사 아득해 끝내 기약할 수 없으니

하루 종일 다락에 기대 생각은 그지 없네.

 

雨中卽事

凉風陣陣颯然來 掃却煩蒸一快哉

紅點己空藏葉蘂 綠痕初長上階苔

雨聲淅瀝宜欹枕 山色鮮明勸擧盃

萬事悠悠終未必 倚樓終日思難裁

Ⅴ-104) 조(曺) 진사(進士)를 배웅하기 위해 송(宋) 헌납(獻納)의 시에 차운하여 씀

쇠약하기로는 내가 가장 심하고

단아하기로는 그대 만한 사람 없는데

헤어지기 아쉬워 온갖 시름 끝없건만

길 떠나는 마당이라 한번 웃어보네

석양이 길을 밝히니

가을빛이 옷깃을 비추네.

낮에 비단옷 입고 고향에 돌아오면

영광이 마을에 가득하리라.

 

曺進士餞行。次宋獻納詩韻

衰遲惟我甚 (忄+博)雅莫君如

惜別千愁極 臨行一笑舒

夕陽明道路 秋色映衿裾

畫錦還鄕日 榮光萬里閭

Ⅴ-105) 또 짓다

국화꽃 피고 단풍잎 붉은 길에

그대의 행색을 그리기 어렵네.

떠나는 뜻이야 멀고 가까울 게 없지만

마음가짐은 거두고 펼 줄을 알아야지.

지금 소매 붙잡기 어려우니

언제 다시 옷자락을 맞대랴.

공업(功業)은 젊은 시절에 이뤄야 하니

옛 집에 돌아올 생각 마시게.

 

黃花紅樹路 行色畵難如

去意通遐邇 操心識卷舒

卽時難挽袖 何日更連裾

功業在年少 休思返舊閭

Ⅴ-106) 생각나는 대로 읊음

늙어가면서 봄이 와도 흥미가 없어

몇 년 사이 병만 늘었네.

내 사업 돌아보니 부끄럽기만 해

세상의 시샘에만 내어맡겼네.

천종(千鍾)의 국록은 내 분수 아니니

광주리 밥에 나물 반찬인들 물리지 않네.

산 꽃이 흰 머리털을 기다리면서

초가집 추녀 밑에서 웃음 머금네.

 

卽事

老至春無味 年來病復添

多慚吾事業 一任世猜嫌

鍾祿元非分 簞蔬固不厭

山花期白髮 含笑傍茅簷

Ⅴ-107) 반자(半刺) 선생이 부친 시에 차운함

Ⅴ-107-01)

까치가 지저귀며 반가운 소식 알리더니

고마운 편지가 사립문에 이르렀네.

얼음 눈이 더위를 씻어주니

아름다운 구슬에 티 한 점 없네.

봄 구름이 비끼며 뭉게뭉게 일더니

아침해가 저물며 어두워지네.

백 번이나 읽으면서 음미하노라니

마치 사군(使君)을 마주 대한 듯 반갑기 그지없네.

Ⅴ-107-02)

탑(榻)을 걸어 두니 먼지가 벽에서 일고

거문고를 타니 달이 창에 비치네.

산천은 무사한 모습이고

연화(烟火)도 태평스런 흔적이니,

지금의 치화(治化)가 옛날보다 뛰어나

아침 저녁 노래 소리가 이어지네.

어진 정치에 백성들 편안하니

밝은 임금을 밤낮 사모하네.

Ⅴ-107-03)

산 빛이 초가집을 둘러싸고

솔 그늘이 쑥대 문에 가득하네.

나는 새가 구름 그림자를 뚫고

뻗친 무지개는 비 흔적을 띠었네.

거닐며 노래하니 저녁에 바람 고요해지고

앉아서 웃노라니 황혼에 달 떠오르네.

소부(巢父) 허유(許由)가 세상을 피해 살았지만

그 이름 높아진 건 어진 임금 덕분일세.

Ⅴ-107-04)

여름비가 열흘이나 이어져

아무도 내 집 문을 두드리지 않네.

꽃 난간엔 풀빛이 스며들고

솔 길에는 이끼가 자라네.

병이 오래 되면서 얼굴빛이 먼저 바뀌고

나이 많아지면서 눈도 쉬 어두워지네.

이 회포를 쓰면서 누구의 힘을 빌리랴

한 자루가 있을 뿐일세.

Ⅴ-107-05)

겹겹이 푸른 산 속에

유유히 홀로 문 닫고 있네.

거울 속의 흰 머리털 슬퍼하고

옷 위의 먼지를 털어 내네.

구름이 엷어지자 비가 차츰 개이고

연기가 비끼자 해가 아직 환하구나.

칡 베가 내 늙음을 받아들이니

두터운 은혜를 어진 임금께 감사드리네.

 

次半刺先生所寄詩韻

喃喃鵲報喜 華札到柴門

氷雲濯炎熟 珠璣絶點痕

春雲橫靄靄 朝日晩昏昏

百讀仍詳味 欣然對使君

 

其二

掛榻塵生璧 鳴琴月照門

山川無事態 烟火太平痕

治化今超古 謳歌朝復昏

民安仁術內 宵旰緩明君

 

其三

山光圍草屋 松翠滿蓬門

飛鳥穿雲影 騰虹帶雨痕

行歌風靜晩 坐笑月黃昏

巢許雖逃世 名高賴聖君

 

其四

暑雨連旬日 無人扣我門

花軒侵草色 松逕長苔痕

病久顔先變 年衰眼易昏

書懷誰借力 一箇中書君

 

其五

疊疊靑山裏 悠悠獨掩門

鏡中悲白髮 衣上拂塵痕

雲薄雨初霽 煙橫日未昏

薛蘿容我老 厚澤謝仁君

Ⅴ-108) 적용암(寂用菴)에 가다

Ⅴ-108-01)

시냇가 돌길이 절을 가리키니

풀 싹이 신발 따라 향기 풍기네.

갑자기 기이한 꽃이 나그네 눈을 놀라게 하니

바위에 기댄 나무가 봄꽃으로 맞이한 걸세.

Ⅴ-108-02)

적용(寂用)의 공부가 바로 선(禪)이니

선문(禪門)의 기미(氣味)야말로 천연 그대로일세.

감실(龕室) 등불이 희미한 잠자리에서

맑은 이야기 나누며 아쉬워 잠 못 이뤘네.

 

遊寂用菴

臨溪石路指僧家 屐齒惹香生草茅

忽有奇芳驚客眼 倚巖一樹迎春花

 

寂用功夫是曰禪 禪門氣味政天然

一龕燈火蒲團上 取共淸談耿不眠

Ⅴ-109) 국호(國號)를 새로 고쳐 조선(朝鮮)이라 하였다

Ⅴ-109-01)

왕씨 집 사업이 문득 티끌이 되어

산천은 그대로지만 나라 이름은 새로워졌네.

풍물만은 사람 일 따라서 변하지 않아

한가한 사람을 마음 상하게 하네.

Ⅴ-109-02)

천자께서 동방을 소중히 여겨

조선이란 이름이 이치에 알맞다고 하셨네.

기자(箕子)께서 끼친 바람이 장차 일어난다면

반드시 중하(中夏) 사람들과 관광(觀光)을 경쟁하리라.

 

改新國號爲朝鮮

王家事業便成塵 依舊山河國號新

雲物不隨人事變 尙令閑客暗傷神

 

恭惟天子重東方 命號朝鮮理適當

箕子遺風將復振 必應諸夏競觀光

Ⅴ-110) 4월 19일(이 날은 5월 절기이다).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Ⅴ-110-01)

솔 그늘 산 집의 작은 난간이 맑고

함박꽃 꽃 빛이 자리를 밝게 비추네.

하루 종일 눈앞에 속된 일이 없으니

내 가슴 담담하게 세상일을 다 끊었네.

Ⅴ-110-02)

바람이 짙은 향기를 풍겨 마음속까지 맑고

몇 송이 꽃이 뜨락에서 흔들리며 발(簾)을 환하게 비추네.

떼 지은 나비들이 바삐 오가니

무정(無情)한 것들이 유정(有情)을 괴롭히는 줄 이제 알겠네.

Ⅴ-110-03)

꾀꼴새 울고 비둘기 우니 경치가 더욱 맑아져

떠오르는 푸른 산빛이 참으로 선명하구나.

망종(芒種)이 되었는데도 농사가 늦어지니

비 바라는 집집마다 마음을 다 녹이네.

Ⅴ-110-04)

한 마음 부끄럼 없어 옥호(玉壺)같이 맑으니

어찌 구차스럽게 밝음을 물어 보랴.

헐뜯는 것은 본래 우리들 일이 아니니

물가나 숲 속에서 진정(眞情)을 기르리라.

Ⅴ-110-05)

하늘이 높게 트여 물같이 맑으니

벌려 있는 뭇 별들이 그 광명을 사양하네.

서늘한 밤에 앉아서 내 평생 일 생각하니

한 생각이 끝내 성정(性情)을 움직이지 못하네.

 

四月十九日卽事(是日五月節也)

松陰山室小軒淸 芍藥花光照座明

盡日眼前無俗事 湛然方寸絶塵情

 

風散穠香滿意淸 翻階數朶透簾明

作團粉蝶爭來往 須信無情惱有情

 

鸎囀鳩呼景氣淸 好山浮翠政鮮明

節當芒種農將晩 望雨家家更盡情

 

一心無愧玉壺淸 何用區區更問明

讚愬本非吾輩事 水邊林下養眞情

 

天字澄深似水淸 衆星排列讓光明

夜凉坐憶吾生事 一念終無動性情

Ⅴ-111) 단오날 우연히 읊음

Ⅴ-111-01)

신라에서는 이 날을 수리(車)라 불렀는데

주군(州郡)마다 풍속이 한결 같지 않았다

이 고을에선 올해 들어 옛 풍속을 없앴으니

왕가의 오랜 은택 그 여파가 끊어졌네.

Ⅴ-111-02)

지난해 동루(東樓)에서 풍악 볼 적엔

관리들의 술자리가 어지러웠지.

오늘 이 집 문에는 사람 발자취 적막하니

정 머금고 괴롭게 정(鄭) 오두(遨頭)를 생각하네.

Ⅴ-111-03)

천중가절(天中佳節)이 바로 오늘 아침인데

어느 곳 누대(樓臺)이고 모두 쓸쓸하네.

홀로 쑥 사람을 마주해 한바탕 웃노라니

문 지키는 효험을 칭찬할 만하네.

Ⅴ-111-04)

새 법에 따라 고을 백성들을 보살피려는데

노여움 풀 훈훈한 바람은 없나.

놀음에서 이미 누른빛 일산(日傘)을 금하니

난리를 피하려면 으레 적령부(赤靈符)를 차야 하리라.

 

【고을 풍속에 놀음을 벌릴 때에는 언제나 누른빛 일산을 썼으며, 옛사람의 말에 의하면 “5월 5일(단오날)에는 적령부(赤靈符)를 찼다”고 한다. 난리를 피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Ⅴ-111-05)

모두 난초를 차고 술항아리를 가져오는데

창포 김치 짙은 향내가 술잔에 가득하네.

지금부터 이 좋은 철을 저버리지 않으리니

술에 취하자 호연(浩然)한 시흥(詩興)을 달랠 길이 없네.

 

端午偶吟

新羅是日號爲車 州郡鄕風不一科

此邑今年除古格 王家舊澤絶餘波

 

去年看樂郡東樓 官席杯盤散不收

今日此門人寂寞 含情苦憶鄭遨頭

 

天中令節是今朝 何處樓臺有寂寥

獨對艾翁成一笑 守門功効可能饒

 

欲從新法保民區 且問熏風解慍無

呈戱己禁黃色盖 避兵宜佩赤靈符

(鄕風。伎會尙黃盖。古云五月五日。佩赤靈符避兵。故云)

 

摠持蓀佩酒壺來 菖歜濃香自滿杯

從此良辰不辜負 倚酣詩興浩難栽

Ⅴ-112) 외진 집(幽居)에 비가 내리는데

뜨락 나무에 새 소리 들리고

마을길에는 나다니는 사람도 없네.

흰 빗줄기가 서쪽에서 오는가 하면

검은 구름이 북쪽에서 몰려오네.

물소리가 베개 자리에 시끄럽고

산 기운이 난간 기둥에 다가오니,

때마침 해 질 무렵이라

모름지기 내 성정(性情)을 길러야 하리.

 

幽居雨中

庭柯聞鳥語 村逕絶人行

白雨自西至 黑雲從北征

水聲喧枕席 山氣逼軒楹

適値桑楡晩 還須養性情

Ⅴ-113) 또 짓다

소나무 언덕이 버드나무 둑에 닿고

오이 시렁은 가지 이랑에 닿았네.

꽃 심은 섬돌을 깨끗이 쓸고

약 캐러 가는 길을 자주 찾아가네.

연기와 아지랑이는 예나 이제나 마찬가지

해와 달은 동에서 서로 움직이네.

천명(天命)을 즐거워할 뿐인데

뜨락 나뭇가지에서 낮닭이 우네.

 

松岡臨柳岸 苽架接茄畦

淨掃栽花砌 頻尋採藥蹊

烟嵐亙今古 日月自東西

所欲樂天耳 庭柯已午鷄

Ⅴ-114) 비 내리는 밤

잠 오지 않아 짧은 시를 읊조리느라

단정히 앉았노라니 밤이 깊었네.

사람 그림자는 등불 그림자에 기대고

벌레 소리는 비 소리와 함께 들리네.

나아가고 물러나는 걸 어찌 탄식하랴만

아직도 사업을 이루지 못 했구나.

잠 못 이루고 바람 소리를 듣노라니

이웃집 닭이 그치지 않고 우네.

 

雨夜

不眠吟短律 危坐到深更

人影依燈影 蛩聲連雨聲

行藏何足歎 事業未能成

耿耿聞蕭瑟 隣雞不廢鳴

Ⅴ-115) 병중에 읊다

Ⅴ-115-01)

더위도 괴로운데 병까지 날 괴롭혀

온갖 아픔을 금하기 어렵네.

슬픔과 기쁨에 이미 관심 없으니

살고 죽음에 어찌 마음을 움직이랴.

효험 없는 옛 방문 따위는 시름 속에 던져 버리고

쓸 만한 새 시를 고요한 가운데 읊어보니,

산새만이 유유한 내 뜻을 알아

솔숲 너머에서 아름다운 소리를 보내 오네.

Ⅴ-115-02)

성긴 흰 머리털에 세월이 스며들어

이제야 세상 만사를 다 잊게 되었네.

한가할 때 흥겨우면 걷기도 하고

병들면 마음 어지러울까 봐 많이 말하지 않네.

일찍이 길한 시운을 만나지 못하고

해마다 신음하는 재앙 만났네.

보문(普門)으로 나타나는 건 영감에 달렸다기에

가만히 나무관세음(南無觀世音)을 외우네.

 

病中吟

苦熱仍逢苦病侵 百船疼痛㧾難禁

悲歡旣已休關念 生死猶能不動心

無效古方愁裡擲 可題新律靜中吟

山禽只解悠悠意 啼隔松林送好音

 

霜鬂蕭蕭歲月侵 如今萬事盡能禁

閑來信步綠乘興 病不多言恐亂心

時運未曾逢吉利 年災恒是値呻吟

普門爾現依靈感 黙念南無觀世音

Ⅴ-116) 생각나는 대로 읊음 (입추. 이때 형 泂이 서울에 있었다. 세 수)

Ⅴ-116-01)

여름이 다하고 가을이 왔는데도 초가집에 누워

한 해 농사가 어떤지 물어보았네.

사람들 말로는 “이랑마다 학(鶴)을 깊이 감췄다”지만

나는 “집집마다 고기를 꿈꿨다”고 생각하네.

만물이 성하고 쇠함에 따라 사람도 늙어 가는데

하늘이 높고도 멀어 제비는 돌아가네.

벼슬길에 오른 서울 나그네는

지금쯤 고향 소식 드물다고 생각하겠지.

Ⅴ-116-02)

백년 인간 세상이 한낱 여관이라

천휴(天休)를 얻어야만 스스로 거리낌 없네.

아아! 틀렸구나. 채색털 봉황새가 없으니.

안타깝게도 붉은 꼬리 방어만 있네.

늙어 가면서 다만 산을 마주할 뿐

외로운 밤에는 유난히 달을 사랑하네.

어제는 서풍이 뜨락 나무에 들더니

작은 평상에 가을 생각이 더욱 쓸쓸하네.

Ⅴ-116-03)

산을 등지고 물을 마주한 초가집인데

아침 저녁 구름과 안개는 그림보다도 낫네.

일찍이 소나무 정자(松亭)를 지어 들판의 학을 부르고

이따금 이끼 낀 바위에 올라 시냇가 고기를 낚네.

이익과 명예를 바라는 건 뭇 사람들 마음이지만

밭 갈아먹고 우물 파 마시는데 어찌 임금의 힘을 알랴.

홀로 앉아 홀로 읊조리는 건 내 뜻 아니니

병이 많아서 찾는 벗 드물기 때문이라네.

 

卽事((立秋日。時泂在京師, 三首)

夏盡秋來臥草廬 一年農事問何如

人言畝畝心藏鶴 我信家家盡夢魚

物盛物衰人老矣 天高天遠鷰歸歟

心知游宦京華客 應念于今鄕信踈

 

百年人世一遽廬 以得天休自廓如

已矣彩毛無鳳鳥 惜哉赬尾有魴魚

晩年只對山而已 獨夜偏憐月也歟

昨日西風入庭樹 蟻床秋思轉蕭疎

 

據山臨水一茅廬 朝夕煙嵐畵不如

早築松亭招野鶴 偶登苔石釣溪魚

利名旣是群心也 耕鑿何知帝力歟

獨坐獨吟非我意 乃緣多病故人踈

Ⅴ-117) 외진 집(幽居)에서 생각나는 대로 읊음

수레와 말이 드물고 땅도 외져서

아침 저녁으로 다만 푸른 산 빛을 마주할 뿐일세.

논둑에 개구리 엎드려 가을도 거반 되었는데

이끼 낀 섬돌에 귀뚜라미 우니 밤이 차츰 길어지네.

안개 걷힌 시내와 산에는 하늘이 더욱 맑고

비 지난 문과 골목엔 서늘한 기운 더한데,

느지막하게 개이면서 갑자기 산천을 즐기고 싶어

서쪽 동산을 밟으면서 시 한 장을 지어 보네.

 

幽居卽事

車馬稀踈地僻荒 暮朝惟對翠微光

稻畦伏蛤秋將半 苔砌鳴蛬夜漸長

嵐捲溪山天更淨 雨過門巷氣添凉

晩晴忽起樊川興 細履西園賦一章

Ⅴ-118) 수파선(水波扇)을 보낸 목백(牧伯)에게 감사함 (두 수)

Ⅴ-118-01)

얼굴에 흩뿌리는 가벼운 바람이 잇달아 차가워져

손끝으로 만 겹의 물결을 흔들어 대네.

찌는 듯한 무더위가 서늘한 세계로 변하니

영각(鈴閣)의 넓은 은혜를 보답하기 어렵네.

Ⅴ-118-02)

찬 데서 생긴 냉병(冷病)에 살림마저 썰렁해

끓는 물 같은 더위를 겪어야 하건만,

어진 바람 부는 곳에 맑은 바람도 이르니

불평 푸는 공부 치고 더 나은 게 없네.

 

謝牧伯惠水波扇(二首)

 

灑面輕颷陣陣寒 手端搖動萬重瀾

煩蒸卽變淸凉界 鈴閣洪恩欲報難

 

冷疾寒生計活寒 也宜炎溽似湯瀾

仁風吹處淸風至 解慍工夫較量難

Ⅴ-119) 오얏을 보내 준 김(金) 선생(先生)에게 감사함

과일 가운데 오얏이 보배라고 일찍이 들었는데

누른빛과 자줏빛이 서로 섞여 기품이 새롭구나.

한번 씹자 산뜻해져 병골(病骨)이 되살아나니

이 늙은이를 못내 사랑하는 그대에게 감사하네.

 

謝金先生惠李

曾聞李是果中珎 黃紫相交品氣新

一嚼酒然蘇病骨 感君偏惠老衰人

Ⅴ-120) 원습(原習)이 진사(進士)가 되었다는 말을 듣고 시를 지어 축하함

Ⅴ-120-01)

일찍이 높은 과거에 올라 아름다운 이름 날리니

이미 자신의 계획을 유림(儒林)에 부쳤네.

고을 사람들이 다 기뻐하고 내 먼저 축하하니

하물며 훤당(萱堂)의 늙은 어머님 마음이랴.

Ⅴ-120-02)

글 읽은 사람이라면 아름다운 이름 있는데

하물며 맑은 이름으로 사림(士林)을 움직임에랴.

이미 좋은 재질을 펼쳐 평소의 뜻을 이뤘으니

경사(經史)에 마음을 오로지 하시게.

 

聞原習登進士。詩以賀之

早占高科播美音 巳將身計寄儒林

邑人擧喜吾先賀 何况萱堂老母心

 

讀書人必有徽音 又况淸名動士林

旣展良才償素志 更於經史要專心

Ⅴ-121) 6월 15일. 반자(半刺) 선생의 시에 차운함

Ⅴ-121-01)

솔 고개 어두운 구름을 늘 보았고

초가집 추녀 지루한 빗소리가 듣기 싫었지.

어젯밤 맑은 바람이 모두 씻어 버리니

맑은 창에 기운까지 서늘해 정말 기쁘네.

Ⅴ-121-02)

동으로 흐르는 푸른 물줄기 구경하기 좋고

바다같이 깊은 항아리 흥미 더욱 깊어라.

좋은 철에 마침 선친의 휘일(諱日)이니

해마다 오늘이 되면 홀로 슬퍼하시네.

Ⅴ-121-03)

비 개인 산 빛이 문지방을 비추는데

다행히 아름다운 시를 얻어 병든 얼굴을 풀어 보네.

물가에 모시고서 이야기 나누려 했건만

이 몸이 한가롭지 못해 스스로 탄식한다오.

Ⅴ-121-04)

비 개였다고 산새들이 정답게 지저귀는데

소나무와 잣나무는 원래 복사 오얏 얼굴이 아닐세.

연기와 달 바람과 꽃이 모두 값진 것이니

푸른 구름이 어찌 흰 구름의 한가함에 미치랴.

 

六月十五日。次半刺先生詩韻

每看松嶺雲頭暗 厭聽茅簷雨脚長

昨夜淸風吹掃盡 晴窓且喜産微凉

 

東流水綠游觀好 北海樽深興味長

佳節適當先子諱 年年是日獨悲凉

 

雨晴山色照門關 幸得佳章解病顔

切欲臨流陪笑語 自嗟身世不曾閑

 

報晴山鳥語間關 松柏元非桃李顔

煙月風花各無價 靑雲那及白雲閑

Ⅴ-122) 작은 서재에서의 새벽 흥취

구름이 맑아 새벽빛이 산뜻하니

정신을 어지럽히는 다른 뜻은 하나도 없네.

죽 솥이나 찻잔은 스님의 격식 같고

연기 골목과 바람 기둥엔 속세 티끌이 끊어졌네.

푸른 전나무 한 그루로 유익한 벗을 삼고

푸른 산 두어 봉우리로 가까운 이웃 삼으니,

그윽이 사는 이야기를 들새만이 알아서

노쇠하고 옹졸한 나를 불어 일으켜 주네.

 

小齋晨興

雲物凄淸曙色新 湛無非意攪精神

粥鐺茶椀如僧格 煙巷風楹絶俗塵

蒼檜一株爲益友 靑山數朶作比隣

野禽能解幽居事 喚起衰遲陋拙人

Ⅴ-123) 새벽 흥취의 시운을 써서 다시 씀

Ⅴ-123-01)

일찍 일어나 머리 빗으니 백발이 새롭고

책 읽다 크게 웃으니 심신(心神)이 상쾌하네.

빈 창에는 해가 이미 두어 장대나 올랐는데

탑(榻) 자리가 깨끗하여 한 점 티끌도 침범 못하네.

솔과 국화 대나무로 세 길을 만들고

구름과 노을 나무들로 사방의 이웃을 삼았네.

다 늙은 이 몸이 어디로 가랴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만히 세어 보네.

Ⅴ-123-02)

가을되자 뜨락 나무에 새벽 기운이 서늘하고

맑은 구절 지어내니 신(神)이 나는구나.

책상 앞을 볼 때마다 항아리에 술이 찼는데

부엌 안 시루에는 먼지가 그대로일세.

취하건 깨건 간에 함께 즐길 벗이 어찌 없으랴

기쁘건 슬프건 간에 서로 돕는 이가 바로 이웃에 있네.

예전에 남지 않았으니 지금 어찌 넉넉하랴

백년 천지에 미치광이 하나가 있네.

Ⅴ-123-03)

가을 장마 그치지 않아 온갖 시름 새로우니

풍신(風神)과 우신(雨神)에게 가만히 빌어 보네.

땅이 젖어 문 앞 골목의 풀도 벨 수 없고

진흙탕 깊어 길바닥 먼지도 이미 없어졌네.

해는 동쪽 고개에 올랐다 서쪽 고개로 지고

비는 남쪽 이웃을 거쳐 북쪽 이웃으로 가는데,

저녁 맑기를 기다려 시 한 수 지으려고

갓을 거꾸로 쓰고 두릉(杜陵) 사람을 본받네.

 

復用晨興詩韻

早起梳頭白髮新 偶書長笑放心神

蔥虛已上雙竿日 榻淨難侵一點塵

松菊竹篁三作逕 雲霞樹木四爲隣

老來身世知何處 黙數存亡今古人

 

秋來庭樹曉凉新 吐句淸佳氣若神

每見案前樽滿酒 任從庖內甑生塵

醉醒同樂寧無伴 休戚相扶亦在隣

昔未有餘今豈足 百年天地一狂人

 

秋霖不止百愁新 黙禱風神與雨神

土潤不芟門巷草 泥深巳絶路岐塵

日昇東嶺沉西嶺 雨過南隣去北隣

欲待晩晴書一賦 倒冠嘗效社陵人

Ⅴ-124) 병중에 장난 삼아 짓다 (이때 형 泂이 서울에서 벼슬에 종사하고 있었다. 네 수)

Ⅴ-124-01)

병중이라 아이 보고픈 마음 금할 수 없어

관문(官文)을 받으려고 소지(所志)를 올렸건만,

취한 글씨 어지러운 글이 곧바로 거절되었으니

어설픈 관리의 처결이 신명을 움직였네.

Ⅴ-124-02)

마음에서 움직이는 것이 바로 정(情)이니

말에 의탁해서 밖으로 나타나네.

비록 병중이라서 얼굴로 만나진 못해도

이 말의 미묘함이야 누군가 밝혀 주리.

Ⅴ-124-03)

관리된 자는 그 정을 감출 수 없으니

가볍고 무거운 일들이 백성들 눈에 다 드러나네.

비유컨대 어떤 사람이 지붕 위를 걸어다닐 때

머리에서 발꿈치까지 분명히 보이는 것 같네.

Ⅴ-124-04)

사람으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음 모두 같기에

자리 가져다 펴고서 멀리 소지를 올렸네.

병든 늙은이가 이제는 자식 보기 어려우니

떳떳한 윤리가 밝지 않아 탄식하노라.

 

病中戱書(時泂在京師從事, 四首)

病中難禁見兒情 欲受官文所志呈

醉筆亂書時卽退 半官決事動神明

 

動於中者是爲情 憑仗言辭外露呈

雖是病中顔未會 此言微妙孰申明

 

爲官未可遁其情 輕重愚民眼裏呈

譬若有人行屋上 從頭至踵見分明

 

人類皆同孝父情 載持筵席遠投呈

病夫見子今難得 却歎彝倫甚不明

Ⅴ-125) 7월 초나흗날. 진사(進士) 원습(原習)이 술을 가지고 찾아 오다

병중에도 세월은 물결 따라 흘러

희끗희끗 눈발 머리에 또 슬픈 가을일세.

좋은 사업이 없어 끝내 효험 없으니

속되지 않은 시를 읊느라고 늙어도 쉬지 않네.

약속한 푸른 산은 언제나 눈에 가득한데

지극히 공정한 흰 태양(白日)은 바로 머리 위에 있네.

애써 찾아준 그대 후의에 감사하노니

마음속 쏟아내어 잠시 시름을 풀어 보네.

 

七月初四日。原進士習携酒來訪

病裏年光逐水流 星星雪髮又悲秋

無良事業終無效 不俗吟哦老不休

有約靑山常滿眼 至公白日正臨頭

感君厚意勞相訪 吐出心肝暫解愁

Ⅴ-126) 7월 7일 칠석.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Ⅴ-126-01)

들에 가득한 가을빛이 상서로운 조짐인지

비가 지나자 남은 더위가 서늘하게 바뀌었네.

서생(書生)이 찾아와 󰡔맹자(孟子)󰡕의 뜻을 묻기에

등문공(滕文公) 상․하장을 강독해 주었네.

Ⅴ-126-02)

누구네 집에서 걸교(乞巧)하여 길상(吉祥)을 얻으려나.

이슬 꽃이 막 내려 밤이면 서늘해지네.

옹졸한 사내라서 시속을 따르지 못해

부질없이 한문공(韓文公)의 칠자장(七字章)을 읊조리네.

Ⅴ-126-03)

아득한 하늘 거리에 상서로운 기운이 어리어

은하수는 물결 없고 밤 빛은 서늘하네.

천상에서 하룻밤 기쁘게 만나는데

인간 세상에서 몇 군데 시를 읊고 있으려나.

Ⅴ-126-04)

내 생애가 질탕하니 무슨 상서(祥瑞)가 있으랴

재주와 학식이 모자라니 생계도 처량하네.

작은 서재에 홀로 앉아 누구와 이야기하랴

하늘 무늬 터 놓은 직녀(織女)나 생각하네.

 

七月七日卽事

滿野秋光天降祥 雨過餘熱遆新凉

書生來問軻書意 講讀滕君上下章

 

乞巧誰家得吉祥 露華初重夜生凉

拙夫未敢隨時俗 空詠韓公七字章

 

天衢漂渺氣凝祥 河漢無波夜色凉

天上一宵歡會遇 人間幾處詠詞章

 

吾生跌宕有何祥 才識迂踈計活凉

獨坐小齋誰與語 空思織女決天章

Ⅴ-127) 낮과 밤으로 읊다

초가을 열 나흗날 낮까지도

남은 더위가 난간을 핍박하건만,

비단 부채의 은혜는 엷어지고

갈포 옷 사랑도 이미 가벼워졌네.

햇빛은 자주 가렸다 나왔다 하고

구름 그림자는 흐렸다 개였다 하는데,

애오라지 석 줄 글자를 쓰고는

가만히 읊노라니 나직한 소리가 나네.

 

晝夜吟

初秋十四晝 殘暑逼軒楹

紈扇恩將薄 絺衣寵巳輕

日光頻翳吐 雲影弄陰晴

聊寫三行字 微吟細有聲

Ⅴ-128) 또 짓다

초가을 열 나흗날 밤에

달을 기다리면서 바람부는 기둥에 기대었네.

흐르는 물엔 성정(性情)이 맑고

뜬 구름엔 부귀(富貴)가 가볍네.

술잔 멈추고 둥근 그림자에게 물어 보고

시 구절 생각하다가 개인 하늘에 답하니,

이때의 마음을 그 누가 알랴

책상머리 귀뚜라미만 울어대는구나.

 

初秋十四夜 待月倚風楹

流水性情淡 浮雲富貴輕

停杯問圓影 覓句答新晴

誰識此時意 床頭蟋蟀聲

Ⅴ-129) 18일

바람과 달이 내 집을 윤택케 하고

시내와 산은 넘치고 높구나.

임천(林泉)에 십 년 살다가 보니

헌면(軒冕) 따위는 가을 터럭으로 보이네.

물을 희롱하니 맑아서 더러움 없고

구름을 바라보니 기운이 절로 호탕해,

천지의 화기가 마음속에 일어나니

늙은 몸 보양키 위해 솔 술을 따르네.

 

十八日

風月潤吾屋 溪山浮且高

林泉十年志 軒冕一秋毫

弄水淸無累 看雲氣自毫

天和起心上 頣養酌松醪

Ⅴ-130) 이날 밤. 이(李)․안(安) 두 서생(書生)이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산이 빽빽해 가을 기운이 빠르고

구름이 흩어져 달빛 높구나.

귀뚜라미 소리는 피리처럼 급한데

내 시름은 털같이 어지럽구나.

이익이나 영달을 구할 마음은 없고

권력가와 부자들을 가까이할 뜻도 없네.

두어 사람 그대들에게만 고마울 따름이니

맑은 술 가져다가 내게 권하시는군.

 

是日夜。李․安二生携酒來訪

山稠秋氣早 雲散月華高

蛬韻急如管 我愁紛若毫

無心求利達 不意近權豪

多感二三子 惠然携白醪

Ⅴ-131) 22일. 신전(申詮)이 술을 가지고 찾아오다

꼬불꼬불 산길이 먼데다

쓸쓸한 산 집이 높기도 한데,

친한 사이라고 술병까지 메고 오니

이 늙은이도 취해서 붓을 휘둘렀네.

정다운 이야기 두런두런 나누고

호탕한 기운이 흘러 넘치네.

고맙게도 나를 아버지처럼 공경해

하루 종일 향그런 술을 권하네.

 

二十二日。有申詮携訪

屈曲山程遠 蕭條山室高

親交來挈榼 老叟醉揮毫

欸欸談鋒穩 洋洋氣焰豪

多君敬父執 終日勸芳醪

Ⅴ-132) 스스로 읊다

Ⅴ-132-01)

한 사람이 남양(南陽) 땅에 오래 누워 있었건만

쓸쓸한 초가집에 찾아오는 이 없었네.

천둥소리와 빗소리가 어찌 그리 늦었는지

벽에 걸린 뇌택(雷澤)의 북(梭)이 오래 한가했네.

Ⅴ-132-02)

푸른 산 마주앉아 취한 노래를 부르니

흰 갈매기 만리 물결에 마음이 너그럽네.

호탕해서 길들이기 어려운 곳을 알려는가.

육합(六合)이 텅 비어 그물 끊어진 그곳일세.

 

自詠

仁臥南陽歲月多 草廬牢落絶經過

一聲雷雨來何晩 壁上長閒雷澤梭

 

坐對靑山放醉歌 心寬萬里白(丘+鳥)波

欲知浩蕩難馴處 六合空空絶網羅

Ⅴ-133) 9월 9일 중양절. 생각나는 대로 읊음

병중이라 새 서리 밟기가 몹시 두려워

아침 늦도록 겹이불 속에서 잠자는 맛이 길었네.

딸아이가 국화 띄운 술을 가져 왔기에

오늘이 중양절(重陽節)인 줄 알고 깜짝 놀랐네.

 

重九卽事

病餘深㥘覆新霜 日晏重衾睡昧長

中女將來浮菊釀 忽驚今日是重陽

Ⅴ-134) 국화를 읊음

Ⅴ-134-01)

동쪽 울타리의 고운 국화가 첫 서리를 견뎌

중양절 지난 뒤에 노란 꽃을 피웠네.

금 꽃송이 어여쁘건만 술친구가 없어

꽃 떨기 감돌며 부질없이 차가운 향기만 맡네.

Ⅴ-134-02)

사흘 밤 내린 서리가 꽃 떨기를 덮었는데

두 빛깔로 활짝 피어 자색 황색이 섞였네.

꽃 따서 저녁상 차리던 그 사람은 멀리 떠나

바람결에 흩어지는 맑은 향기를 홀로 사랑하네.

 

詠菊

東籬菊艶耐新霜 已過重陽盡吐黃

金蘂可憐無酒客 繞叢空自齅寒香

 

覆叢三夜淡飛霜 兩色繁開間紫黃

採備夕餐人已遠 獨憐風際散淸香

Ⅴ-135) 회포를 적음

Ⅴ-135-01)

더위가 물러가 노곤함이 풀리고

서늘해지니 답답함이 씻겨지네.

시 구절에 따라 흥취가 일어나고

술잔을 맞자 시름이 달아나네.

산 눈썹은 푸릇푸릇 멀어지고

구름 머리는 희끗희끗 높아졌는데,

고요한 이 맛을 그 누가 알랴

바람맞는 귀밑에 흰 털이 어지럽네.

Ⅴ-135-02)

헛된 이름에 어이 그리 분주한가.

참다운 즐거움에 도도히 취하리라.

반가운 사람은 만나기 드물고

흰 머리도 피하기 어렵네.

가을빛은 맑고도 먼데다

하늘빛은 푸르고도 높구나.

이따금 숲속으로 날아드는 새를 보니

훨훨 날면서 깃털을 단련하네.

Ⅴ-135-03)

사람들은 난초 찬 굴원(屈原)을 가엽게 여기건만

나는 전원을 사랑한 도연명(陶淵明)을 본받으리라.

의로운 길(義路)을 어찌 버리랴

명리(名利)의 마당에서 일찍이 도망했네.

산천과 함께 깨끗하게 살아가고

구름 달을 벗삼아 고고하게 지내리.

가난하자던 약속을 어찌 감히 사양하랴

해마다 집에는 풀도 나지 않네.

 

述懷

熱去解勞困 凉來洗鬱陶

興憑詩句逸 愁遇酒杯逃

山黛靑靑遠 雲頭白白高

誰知靜中味 風鬂亂霜毛

 

其二

虛名勞擾擾 眞樂醉陶陶

靑眼罕相遇 白頭難可逃

秋光晴且遠 天色碧彌高

時見投林鳥 翩翩養羽毛

 

其三

人憐紉佩屈 我效愛廬陶

義路何曾舍 名場早已逃

山川共蕭灑 雲月伴孤高

豈敢辭窮約 年年宅不毛

Ⅴ-136) 다시 앞 운을 사용하여 지음

Ⅴ-136-01)

순(舜)임금도 측미(側微)하던 시절엔

밭 갈고 고기 낚으며 질그릇 만들었네.

지극한 효성은 누구나 감동시키고

거룩한 공업은 달아날 바가 없어,

그 명성 해와 함께 빛나고

그 도덕 하늘같이 높구나.

만고에서 천추에 이르기까지

문명(文明)이 봉(鳳)의 털 같네.

Ⅴ-136-02)

가난하게 사느라 솥도 시루도 없어

풀무를 구하고 질그릇을 구하지 않네.

벼슬은 언제나 모자라고

돈도 오래 있으면 달아나네.

양식이 끊어지면 긴 날이 괴롭고

옷이 없으면 바람만 높아도 겁나지만,

인간 세상에 그 누가 기억하랴

소 아홉 마리에 털 하나 잃는 셈일세.

Ⅴ-136-03)

이웃 어진 것이 어찌 아름답지 않으랴

덕성(德性)을 저절로 닮아가리라.

내 몸의 욕됨을 내 스스로 없애야지

누구를 위해 버리지 않겠는가.

붓을 휘두르면 새 구절이 빼어나고

칼을 뽑으면 호탕한 노래 높아져,

이미 다 그렇게 되었건만

머리에 검은 털이라곤 하나도 없네.

 

復用前韻

舜之側微日 耕稼且漁陶

孝感有攸動 聖功無所逃

聲名俱日煥 道德與天高

萬古千秋下 文明若鳳毛

 

其二

貧居無釜甑 求治不求陶

鍾子時常乏 錢兄久在逃

絶粮嫌日永 無褐㤼風高

人世誰能記 九牛遺一毛

 

其三

里仁何不美 德性自熏陶

我欲無身辱 誰爲不自逃

揮毫新句秀 引釰浩歌高

已矣乎然矣 頭無一黑毛

Ⅴ-137) 스스로 읊음

Ⅴ-137-01)

머리털은 흩날리는 쑥대 같고 얼굴엔 주름이 져

옛날 모습이 전혀 없다고 사람들은 말하건만,

근력은 위태롭기가 담장 아래 풀 같아도

지조(志操)는 시냇가 솔처럼 진실하다네.

저문 그림자 훨훨 하늘 너머 새 날아가고

가을 소리 찌릭 찌릭 베개 맡에 귀뚜라미 우네.

만물 변하는 걸 고요히 보니 느낌 많은데

연기 낀 나무와 맑은 시내에 저녁 빛이 짙어지네.

Ⅴ-137-02)

늙어 가면서 자꾸만 불평이 많아지는데

몸이 땅에 가까우니 결국 무엇을 이루랴.

눈앞의 물색(物色)들은 쇠잔해 가고

머리털 위의 세월도 여러 차례 변하였네.

구름 사이로 햇빛이 조금씩 새어 나오니

비온 뒤의 가을 공기가 더욱 맑구나.

마침 좋은 철을 만나 마음 씩씩하지만

천하에 가장 여윈 한낱 서생일세.

Ⅴ-137-03)

답답한 회포가 언제나 풀리려나

젊어서부터 이룬 사업이 원래 없었네.

엎치락뒤치락 사람의 마음은 늘 어긋나고

얼기설기 세상 모습은 갈수록 많이 바뀌네.

뜬구름이 일었다 사라지니 하늘 더욱 푸르고

밝은 달이 이즈러졌다 다시 차니 물빛 더욱 맑구나.

세상 밖의 연기와 노을을 어찌 다 말하랴

고사리나 캐어 먹으며 여생을 보내리라.

 

自詠

鬢似飛蓬面皺重 人言無復昔時容

筋骸危若墻頭草 志操眞如澗底松

暮影翩翩天外鳥 秋聲喞喞枕邊蛩

靜觀物變偏多感 烟樹晴川晩色濃

 

老去情懷漸不平 身當地近竟何成

眼前物色將衰颯 鬂上年華屢變更

雲罅日光微漏洩 雨邊秋氣正凄淸

適逢佳節心猶壯 一箇乾坤太瘦生

 

幽懷鬱悒幾時平 少壯元無事業成

飜覆人情每相反 縱橫世態漸多更

浮雲起滅天彌碧 明月虧盈水自淸

物外煙霞那足道 但將薇蕨送餘生

Ⅴ-138) 감회(感懷)

흥하고 망하는 것이 참으로 성정(性情) 가운데 있으니

옛부터 지금까지 한(恨)이 끝없네.

사막(沙漠)의 하늘과 땅은 어찌 그리 아득한지

금릉(金陵)의 해와 달은 절로 환하네.

바다 동쪽에선 고려(高麗)라는 이름을 이미 고치고

한수(漢水) 북쪽에선 창제(創制)의 공을 새로 열었으니,

유유한 세상일을 누구와 함께 이야기하랴

흰 구름 떠가는 그림자에 맑은 하늘이 돌아가네.

 

感懷

興亡正在性情中 往古來今恨不窮

沙漠乾坤何杳杳 金陵日月自曈曈

海東已革高麗號 漢北新開創制功

世事悠悠誰共說 白雲行影轉晴空

Ⅴ-139) 빗속에 소먹이는 그림

Ⅴ-139-01)

소 놓아먹이는 봄 언덕에 풀이 무성하고

차가운 바람 속에 저녁 가랑비 내리네.

나무뿌리에 쭈그리고 앉았건만 잠은 더욱 편안해

가지 이슬에 옷자락이 젖어도 내버려두네.

Ⅴ-139-02)

언덕 편편하고 풀도 부드러운 강기슭에

연기는 엷은 비단을 끌고 비는 실을 흩날리네.

소 허리에 편안히 앉아 부들 삿갓에 기대니

태평스러운 그 신세 그 누가 저만 하랴.

 

雨中牧牛圖

放牛春岸草菲菲 料峭輕寒間夕霏

縮坐樹根眼更穩 任從枝露滴矮衣

 

坡平草軟一江眉 煙曳輕紈雨散絲

穩跨牛腰欹蒻笠 太平身世孰如斯

Ⅴ-140) 막 개임

천리 들판에 가을 비가 막 개여

숲에 닭소리 개소리 들리고 사람들도 다니네.

연기 흐르는 골짜기에는 까마귀가 멀리 날아가고

서늘한 기운 흩어진 허공에는 새가 가볍게 지나가네.

늘어선 여러 산들은 하늘 너머 푸르고

흐르는 한 줄기 물은 들 가에 밝은데,

서쪽 봉우리 그림자에 희미한 자취가 모여들어

가끔 소나무 가지에 이즈러진 달 뜨는 게 보이네.

 

新晴

千里郊原秋雨晴 傍林雞犬有人行

煙流洞壑飛鴉遠 凉散虛空過鳥輕

羅列衆山天外碧 縱橫一水野邊明

暝痕政集西峯影 時見松梢缺月生

Ⅴ-141) 과거에 급제한 변처후(邊處厚)를 축하함

도(道)에 뜻을 두고 예(藝)에도 놀았는데

뛰어난 재주에다 나이까지도 젊구나.

유림(儒林)에선 공업(功業)을 기대하는 바 크고

안탑(鴈塔)에도 그 이름 어질었으니,

집을 옮기면서 기르신 어머니 마음 간절하고

뜨락에 나아가면 아버지께서 오롯하게 가르치셨네.

소매는 단계(丹桂)의 동산에 향기롭고

걸음은 대라천(大羅天)에 안온하네.

여러 아우들도 그 뒤를 이어받겠지만

형도 빨리 앞길을 열었으니,

영광이 마을까지 비추고

기쁜 빛이 산천을 뒤흔드네.

옛부터 깊이 사귄 교분이 있어

지금 두터운 인연을 느끼노니,

오랫동안 선행을 쌓은 효험이

이제부터 영원히 흘러 전하리라.

 

賀邊處厚登第

志道仍游藝 雄才又少年

儒林功望重 鴈塔姓名賢

遷舍母心切 趍庭父敎專

袖香丹桂苑 步穩大羅天

諸季當承後 惟元㝡捷先

榮光照閭里 喜色動山川

自昔深交分 於今感厚緣

方期積善效 從此遠流傳

Ⅴ-142) 가을 회포

Ⅴ-142-01)

걱정 많고 병이 많아 몹시 쇠약해졌으니

남은 생애가 얼마나 될른지 스스로 한탄하네.

눈으로는 인간 세상 숱하게 변하는 것 보았고

마음으로는 천하에 의심스러운 일 다 알려 했건만,

곤산(崑山)의 아름다운 옥을 알아 주는 사람이 없고

여수(麗水)의 참다운 금을 엿보지 못하네.

한 치 마음을 형용하기 어려운데

푸른 봉우리가 여전히 치킨 눈썹으로 들어오네.

Ⅴ-142-02)

섬돌 귀뚜라미 우는 소리에 밤은 더디기만 한데

바람 이슬 막 개이니 제비가 떠나갈 때일세.

사물 보고 마음 살피면 느낌 많으니

하늘 즐기고 명을 안다면 다시 무엇을 의심하랴.

산 곁의 작은 난간에서 구름을 벗 삼고

빈 창가에서 베개를 베노라니 달이 절로 엿보네.

만고의 연기와 아지랑이 낀 운곡 속에서

아름다운 철을 또 만나 눈썹을 다시 폈네.

 

秋懷

多憂多病甚衰遲 自恨餘生獨不時

眼見人間多變事 心知天下盡生疑

崑山美玉無人識 麗水眞金世莫窺

有箇寸心難狀處 碧峯依舊入軒眉

 

砌蛬啾喞夜遲遲 風露初晴鷰去時

觀物省心猶有感 樂天知命復奚疑

傍山小檻雲爲伴 欹枕疎窓月自窺

萬古烟嵐耘谷裡 又逢佳節更伸眉

Ⅴ-143) 여러 서생들이 지은 ‘가을날(秋日)’이란 시에 차운함

Ⅴ-143-01)

산 빛과 물소리 가운데 이 몸이 한가로워

조촐한 거처에 옛 풍치가 남아 있네.

풀과 나무 한 구석에는 좁은 길이 비껴 있고

작은 평상은 텅 비어 그림과 책 두어 질 뿐일세.

은하수에 구름이 걷혀 하늘 더욱 푸르고

동산 숲에 서리가 내려 나뭇잎이 다 붉은데,

아름다운 철을 맞아 어찌 헛되이 보내랴

인간 세상에 백년 살았던 늙은이가 아직 없었으니.

Ⅴ-143-02)

누가 알랴! 뱁새가 사는 덤불 속에

가지 하나 천지에 또 가을 바람이 부는 것을.

젊은 나이에 배우지 않았으니 슬퍼한들 무엇하며

늙은 나이에도 이룬 게 없으니 가난한 게 부끄럽구나.

푸른 산에 물까지 푸른 곳을 나는 좋아하건만

사람들은 흰 머리에 붉은 얼굴 시든다고 속이네.

가난하게 살아도 편안할 계획은 있으니

말 잃은 늙은이의 화복(禍福)을 그 누가 알랴.

 

次諸生秋日詩韻

身閑山色水聲中 蕭酒幽居有古風

草樹一區斜路窄 圖書數帙小床空

雲收河漢天彌碧 霜落園林葉盡紅

佳節不須虛過涉 人生未有百年翁

 

誰記鷦鷯草莽中 一枝天地又秋風

早年不學嗟何及 晩歲無成愧屢空

自樂山靑兼水綠 人欺髮白減顔紅

貧居亦有平康計 禍福焉知失馬翁

Ⅴ-144) 진사(進士) 세 사람이 서울에서 보낸 편지를 받고

한 조(趙)씨와 두 원(元)씨 세 사람의 진사가

함께 편지를 써서 내게 부쳐 왔네.

봉함 열어서 조정의 일을 살펴보고

조정에 많은 인재 얻은 것을 치하하노라.

 

得見三進士京書

一趙兩元三進士 共修書札寄呈來

開緘考閱東堂事 多賀朝廷得衆才

Ⅴ-145) 수월담사(水月潭師)의 시권에 씀

일찍이 들으니 천태산(天台山)의 한산자(寒山子)가

달을 가리키며 한가롭게 시 한 수를 지었다더니,

이른바 푸른 못의 가을달이란 뜻을

이제 스님 덕분에 바로소 알았네.

 

書水月潭師卷

曾聞台嶺寒山子 指月閑題一首詩

所謂碧潭秋月意 卽今憑此上人知

Ⅴ-146) 닭우는 소리를 듣고

헛되이 세월 보내어 내 스스로 부끄러우니

시간 알리길 그치지 않는 저 닭이 사랑스럽네.

한 소리로 마디를 고치지 않고

세 번 울면서 그 때를 어기지 않네.

하늘은 어찌 그리 어두운지

은하수는 차츰 자리를 옮기네.

애써 우느라고 수고 많은데

새벽빛은 참으로 더디기만 하구나.

 

聞雞

愧我虛消日 憐渠不廢時

一聲無改節 三唱莫違期

天字何冥晦 星河漸轉移

謾勞鳴呌苦 曉色政遲遲

Ⅴ-147) 또 짓다

슬프다! 나는 도를 배우지 못했건만

우습게도 너는 능히 때를 아는구나.

캄캄한 밤이 장차 깊어가면

“꼬끼요!” 하고 미리 시간을 알리네.

쓸쓸한 비바람은 급하고

빠른 천기(天機)는 옮겨 가는데,

잘 울고 못 우는 걸 내 어찌 생각하랴

이르고 늦게 우는 걸 네게 맡길 뿐일세.

 

嗟矛不學道 笑汝强知時

闇闇將闌夜 嘐嘐預報期

蕭蕭風雨急 苒苒天機移

善惡吾無念 渠鳴任早遲

Ⅴ-148) 새로 급제한 변처후(邊處厚)가 부친 시에 차운함

Ⅴ-148-01)

그대 생각하며 서쪽을 바라보느라 눈이 시린데

맑은 시를 받아 보니 기쁘기 그지없네.

이미 안탑(雁塔)에 오르게 되었으니

고기 낚던 여울을 이제는 생각 말게나.

과장(科場)의 사업(事業)을 이룬 것이 어찌 그리 빠른지

대각(臺閣)의 공명(功名)을 취하기도 어렵지는 않으리라.

무릇 위험스런 기회가 벼슬길에 많으니

부디 부지런하고 삼가면서 날마다 조심하게나.

Ⅴ-148-02)

아름다운 구절을 낭랑하게 읊노라니 이가 시리어

얼음과 눈 구슬들이 혀끝에 움직이네.

붕새가 구만리 하늘에 날면 큰 은하수를 업신여기고

고기가 세 급에 오르면 맑은 여울을 떠난다네.

너그럽기는 부디 진천(秦川)의 넓음을 본받고

위험할 때엔 반드시 촉도(蜀道)의 험난함을 알지니,

고향 바라보며 너무 생각하지 말게나

고당(高堂) 두 어른은 모두 평안하시다네.

Ⅴ-148-03)

내 한 평생 좋아한 것이 바로 청한(淸寒)함이니

홀로 󰡔맹자(孟子)󰡕를 붙들고 사단(四端)을 생각하네.

병풍과 족자 그림은 연기에 덮인 봉우리를 이루고

피리와 거문고 소리는 달 밝은 여울을 부숴뜨리네.

몸을 지니고도 몸 지닐 걱정을 면치 못하고

일을 만나야 비로소 일 처리하기 어려움을 깨닫네.

사람 세상의 옳고 그름을 모두 눈으로 보니

백년이 잠간인데 무엇이 편안함보다 나으랴.

Ⅴ-148-04)

사람 가운데 어찌 나만 쓸쓸하랴

흥이 나면 때때로 붓을 휘둘러 보네.

소나무와 국화는 아직도 원량(元亮)의 집에 있고

구름과 연기는 부질없이 자릉(子陵)의 여울에 둘렸네.

이웃 불러 술 사다 마셔도 석 잔이면 알맞건만

새 시를 읊노라면 한 자가 어려우니,

대라천(大羅天) 위를 높이 걸어가는 그대는

한가롭게 살아가는 나를 조롱할 테지.

Ⅴ-148-05)

소나무 아래 바람이 불어와 절로 찬 기운이 생기니

세상일이 어슴프레 마음 구석에 걸리네.

구름 너머 봉우리들은 창을 벌려 세운 듯하고

인간 세상의 세월은 달려가는 여울 같구나.

꿈속에서 꿈을 말하니 허망한 가운데 허망하고

마음 위에서 마음을 찾으니 어려움 위의 어려움일세.

천하에 호걸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배부르고 편안함을 나는 구하지 않으리라.

Ⅴ-148-06)

부모를 뵈러올 때에는 추워지기를 기다리지 말라

세상 인연은 날마다 많아지기 마련일세.

뒷 고개에 대(臺)를 만드니 구름이 난간에 닿고

흥법사(興法寺) 앞 강물은 여울에 가득 차네.

계수나무 노와 난초 배가 이미 준비되었으니

국화 오솔길과 향그런 술 마련하기야 어찌 어려우랴.

채색 옷 입은 경사스런 자리에 누가 손님이 되랴

아마도 동산(東山)의 늙은 사안(謝安)을 부를 테지.

Ⅴ-148-07)

부지런히 배우면서 겨울밤 추위를 견뎠기에

훌륭한 이름 널리 퍼져 온 조정에 가득하네.

세 차례나 방(榜)에 붙어 그대 큰 공을 세웠으니

칠리탄(七里灘)만 지키고 있던 내가 부끄러워라.

부귀 공명을 사양하기는 쉬운 일이지만

명성과 도덕을 감추기는 참으로 어렵다네.

거룩한 임금께서 백성 걱정하시는 마음 항상 간절하시니

부디 훌륭한 재주를 펼쳐 나라를 편안케 하시게.

 

次新及第邊(處厚)所寄詩韻

戀君西望眼空寒 得見淸詩喜百端

旣已旱圖登鴈塔 且休先憶釣魚灘

科場事業成何速 臺閣功名取不難

大抵危機多宦路 要須勤謹日思安

 

朗吟佳句齒牙寒 氷雪珠璣動舌端

鵬擘九霄凌大漢 魚登三級離淸灘

寬平要體秦川濶 危險須知蜀道難

莫向家山勞念慮 高堂兩位共平安

 

吾生嗜好是淸寒 獨把鄒書念四端

屛簇畫成烟暗峀 管絃聲碎月明灘

有身未免持身患 遇事方知處事難

人世是非皆眼見 百年間隙莫如安

 

人中惟我獨酸寒 情興時時發筆端

松菊猶存元亮宅 雲烟空鎖子陵灘

喚沽隣酒三盃穩 吟得新詩一字難

高步大羅天上客 必應欺我轉閑安

 

風來松下自生寒 世事依依掛念端

雲外峯巒如列戟 人間歲月似奔灘

夢中言夢妄中妄 心上覓(☆)心難上難

天下幾多豪傑士 我無求飽不求安

 

覲省來期莫待寒 世緣隨日漸多端

作臺後嶺雲連檻 興法前江水滿灘

桂棹蘭舟修已備 菊徑香醞辦何難

彩衣慶席誰爲客 須喚東山老謝安

 

勤學三冬守夜寒 藹然淸譽滿朝端

多君卓占三場榜 愧我恒居七里灘

富貴功勳辭卽易 聲名道德隱爲難

聖君常切憂民念 須展良才補國安

Ⅴ-149) 동지(冬至) 지나 이레째 되는 날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얼음 정자에 두 아들 데리고

걸어서 산을 지나 왔구나.

합에는 온갖 음식이 가득하고

항아리엔 새로 빚은 술이 찼네.

돼지 대가리도 부드럽게 잘 삶았으니

내 배가 갑절이나 불러,

정성어린 너희 뜻에 감동해

답답하던 내 마음이 활짝 열리네.

 

冬至後七日卽事

氷亭携二子 徒步過山來

滿榼多般物 盈樽新造醅

猪頭烹熟軟 人腹飽增培

感此勤渠意 鬱(☆)陶心豁開

Ⅴ-150) 배웅

계월헌(溪月軒) 문하에 빼어난 사람이라

그 뜻이 무리 가운데 뛰어났었네.

마음은 언제나 달같이 맑고

말 꺼내면 구름같이 담담하였네.

장삼 하나에 지팡이 하나로 떠나가니

숱한 산 넘고 숱한 물 건너시겠지.

이번 걸음에 유쾌한 일 많으리니

듣지 못한 것 듣고 와서 전하시게.

 

送行

溪月軒門秀 飄然志不群

視心淸似月 出語淡如雲

一衲一笻去 千山千水分

此行多快活 應得不聞聞

Ⅴ-151) 새벽에 일어나 머리를 빗으면서

쓸쓸한 머리털이 눈같이 희끗해

파르스름한 등불을 짧은 빗에 비추었네.

달빛이 차츰 옮겨 천 길이나 높았고

닭소리도 처음 들리며 세 번이나 보내네.

도(道)는 추(鄒)나라에만 순수한 것이 아니고

마음은 문원(文園)의 병든 사나이라.

밤 기운이 자라게 한 것이 얼마나 되려는지

있는 듯도 하고 없는 듯도 하네.

 

曉起梳頭

蕭蕭鬂髮雪糢糊 燈火靑熒照短梳

兎影漸移高千丈 鷄聲初起送三呼

道非鄒國醇乎者 心是文園病也夫

夜氣滋生能幾許 檢來如有亦如無

Ⅴ-152) 12월 15일 밤. 하늘은 맑게 개이고 눈빛과 달빛이 서로 맑게 어울려 참으로 사랑스러웠으므로 한 장을 읊음

눈빛이 달빛에 맑게 비쳐서

산성(山城)과 강 마을(江村)이 불야성(不夜城)을 이루니,

뜰에 거니는 사람은 쾌활하기 그지없고

은하수 드문 별도 그 광명을 사양하네.

섬계(剡溪)에서 배 띄우면 흥겹다고 들었는데

운곡(耘谷)에서 붓 잡는 심정을 금하기 어렵네.

달 그림자가 차츰 옮겨 더욱 절묘하기에

골똘히 시 읊느라고 삼경(三更)이 지나는 것도 몰랐네.

 

十二月十五夜。天宇澄霽。雪月交淸絶可愛。吟得一章

雪華淸映月華淸 山郭江村不夜城

人步庭除多快活 星稀河漢讓光明

剡溪聞有浮舟興 耘谷難禁援筆情

蟾影漸移尤絶妙 沉吟不覺過三更

Ⅴ-153) 12월 26일 입춘.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Ⅴ-153-01)

동쪽 거리에서 봄맞이 제사가 한창이고

토우(土牛)도 새벽부터 첫 밭 갈기를 시작하네.

구망(句芒)은 감농사(監農使)를 보지 못하고

사람들이 이름만 훔친다고 비웃으리라.

Ⅴ-153-02)

근본을 다스리려면 농정(農政)부터 먼저 해야 하니

거룩한 임금도 쟁기 잡고 몸소 밭에서 갈았네.

그 누가 나라 운명과 백성 목숨을 걱정하랴

저 하늘만은 속이기 어려우리라.

 

十二月二十六日立春。卽事

東陌迎春祀事明 土牛乘曉起初耕

句芒不見監農使 應笑時人浪竊名

 

治本於農政所先 聖君躬秉耒耕田

誰憂國命兼民命 雖復難欺是上天

Ⅴ-154) 이촌(泥村) 이(李) 거사(居士)의 시에 차운함

Ⅴ-154-01)

하루 아침 잠깐 만나고 또 한 해가 지났으니

지척(呎尺)에서도 만나보기가 초(楚)․월(越) 같구나.

고마운 편지가 뜻밖에 찾아와 조그만 창을 비추니

낮잠에서 놀라 일어나 정신이 산뜻해지네.

Ⅴ-154-02)

내가 그대보다 사 년 위건만

머리 위에 흰 털 어지럽기는 마찬가질세.

봄이 오면 꽃 핀 언덕을 또 찾아가려고

비바람 부는 침상 머리에서 잠을 잔다네.

Ⅴ-154-03)

선촌(仙村)에 집 지은 지 몇 해나 되었던가.

맑은 시내 동쪽 푸른 산기슭이었지.

봄바람 가을 달빛에 시 지을 생각이 나면

술 마시고 읊다가 취하면 잠을 자리라.

Ⅴ-154-04)

홀로 앉으면 시간이 한없어 하루 밤이 한 해 같으니

외로운 등불 앞에 온갖 그리움이 떠오르네.

천 가지 만 가지 인생 일들을

이리저리 헤아리다가 잠들고 마네.

Ⅴ-154-05)

죽마(竹馬) 타고 달리던 그 옛날을 생각하니

목암(沐岩) 시냇가 길과 봉산(鳳山) 기슭이었지.

그 시절 여러 친구들은 모두 귀신 되었으니

손꼽으며 헤아리다가 잠들지 못하네.

Ⅴ-154-06)

섣달이 다 간 선동(仙洞)에 새해가 가까워

좋은 경사가 집집마다 사방에서 모여드네.

바라건대 귀한 몸 보전하고 수(壽)와 복을 누리시어

태평스런 봄날에 태평하게 지내시게.

 

次泥村李居士詩韻

一朝相逢又經年 咫尺看如楚越邊

華札忽來光甕牖 灑然驚起牛窓眠

 

我長君年只四年 一般華髮亂頭邊

春來又欲尋花塢 風雨床頭一夜眠

 

卜宅仙村幾許年 碧溪東畔翠微邊

春風秋月撩詩思 對酒淸哦醉後眠

 

獨坐悠悠夜似年 百般思戀一燈邊

千嗟萬別人生事 筭去收來付一眠

 

憶昔驅馳竹馬年 沐巖溪路鳳山邊

當時群彦皆爲鬼 屈指思量耿不眠

 

臘殘仙洞近新年 吉慶咸臻宅四邊

願保金軀膺壽福 太平春日太平眠

Ⅴ-155) 12월 30일

아내가 떠난 날이 바로 오늘 새벽인데

오늘이 다시 왔어도 사람은 보이지 않네.

이십팔년 동안 한결같이 한스러웠는데

그 당시 어린아이가 모두 어른 되었네.

 

十二月三十日

細君歸日是今晨 今日依然不見人

二十八年猶一恨 當時襁褓盡成身

Ⅴ-156) 1394년(갑술) 설날

저물어 가면서 구름이 모여들더니

오늘 새벽엔 눈이 쏟아져,

나무에 붙어 봄빛을 단장하고

하늘에 퍼져 햇빛을 가리네.

노래하는 누각에는 술값이 높아 가고

꽃 탑에는 매화 향기가 퍼지는데,

안타깝구나! 성을 쌓는 군사들은

달려가는 길이 얼마나 바쁠까.

 

甲戌新正

晩來雲自合 曉至雪其(雲+滂)

惹樹粧春色 漫天掩日光

歌樓高酒價 花塔澁梅香

可惜築城卒 奔馳行路忙

Ⅴ-157) 또 짓다

새해 정월이 반 너머 지나가니

상서로운 조짐이 어긋나지 않아,

아득한 하늘에는 아무런 빛도 없고

하얀 땅에는 꽃이 피었네.

벼루가 얼어 붓 잡기 어려운데

화롯불은 차를 다릴 만하네.

부슬부슬 내리는 소리를 누워 들으니

반가워하는 내 마음을 그 누가 알랴.

 

新正將欲半 瑞應不爲差

慘慘天無色 皚皚地有華

硯氷難援筆 爐火可煎茶

臥聽蕭蕭響 誰知自意嘉

Ⅴ-158) 또 짓다

조물주(造物主)의 뜻을 알기 어려우니

사람을 희롱해도 때가 있어야 하네.

언젠가는 세밑의 풍경을 재촉하더니

어느새 봄 모습을 나타내는구나.

참 매화가 피는지 알아채지 못했는데

버들개지 어지럽게 펼쳐지는구나.

한 잔 술을 기울인 덕분에

오언시 한 수를 한가롭게 읊조리네.

 

造物難知意 戱人當以時

故應催暮景 早已放春姿

未辨眞梅發 還成亂絮披

憑傾一盃酒 閑寫五言詩

Ⅴ-159) 27일. 눈 속에 이주(李椆)가 술을 가지고 찾아 옴

Ⅴ-159-01)

봄 맞아 상서로운 눈이 처마에 날아들어

노래하고 춤추는 누대(樓臺)에 술값이 더해 가네.

술병 가지고 온 그대의 뜻을 알겠으니

풍년 축하하며 심심풀이 삼아 가져 왔겠지.

Ⅴ-159-02)

지는 매화와 흩날리는 버들개지가 처마 끝에 뿌리니

봄 뜻이 한창 무르녹아 취한 흥을 더해 주네.

이 늙은이의 오늘 일을 축하하는지

좋은 날씨와 아름다운 경치가 한꺼번에 겸했네.

Ⅴ-159-03)

처마 끝에 날아드는 새를 앉아서 보노라니

차가운 기운이 한층 더한 줄 알겠구나.

잠자다 일어나 도도한 흥이 솟아나니

싸늘한 가운데 난만한 정을 겸해 갖췄네.

Ⅴ-159-04)

반쯤 취해 처마 곁에서 크게 읊조리니

촌스런 정과 한가한 생각이 함께 더해 가네.

저녁나절에 눈이 그쳐 멀리 들판을 바라보니

봄 일이 한창 일어나 기상을 겸했네.

Ⅴ-159-05)

술잔 속을 굽어보니 모자가 비쳐

호연(浩然)한 정이 일어나 이내 더해 가네.

바라건대 그대는 평생의 뜻을 일찍 이루시게

충효와 훌륭한 재주를 한 몸에 겸했으니.

 

二十七日。雪中李(椆)携酒來訪

當春瑞雪亂飄簷 歌舞樓臺酒價添

知子携尊深適意 賀豐破寂可能兼

 

落梅飄絮灑虛簷 春意方濃醉興添

堪賀老夫今日事 良辰美景一時兼

 

坐見飛禽入屋簷 定知寒氣更增添

睡餘忽發陶然興 冷淡中間瀾漫兼

 

半醉高吟傍短簷 野情閑思兩俱添

晩晴送目郊園外 春事方興氣像兼

 

俯看杯心暎帽簷 浩然情興遠仍添

願渠早遂平生志 忠孝良才一已兼

Ⅴ-160) 2월 초이틀. 비속에 여러 가지를 읊음

Ⅴ-160-01)

봄을 재촉하는 어젯밤 비가 아침까지 내려

구름에 가린 앞산이 아직도 개지 않았네.

창문을 열어봐도 아무 것 보이지 않고

남산 기슭에 비둘기 한 마리 우는 소리만 들리네.

Ⅴ-160-02)

효성스런 조카가 수륙재(水陸齋)를 베풀어

오늘 그 어미 위해 명복(冥福)을 빈다네.

훌륭한 모임에 참예하여 같이 귀경(歸敬)하려 하지만

약한 말이 진흙탕을 견뎌내기 어렵겠네.

Ⅴ-160-03)

산길이 굽은데다 비까지 쏟아지는데

내 아들 내 아우가 높은 산을 올라가네.

구름이 가린 옛 절을 찾아가려면

진흙이 짚신에 묻고 이슬이 옷을 적실 테지.

Ⅴ-160-04)

진(眞)을 품고 선(選)에 든 그 모습 씩씩하니

비 무릅쓰고 산길을 등지팡이 짚으며 걸어가네.

바랑에 밤 넣어 주고 붓까지 주던

그 은혜와 정의가 고마워 어쩔 줄 모르겠네.

 

二月初二日雨中雜詠

催春一雨夜連明 雲暗前山尙未晴

掛起小窓無少見 但聞南麓一鳩鳴

 

孝姪開張水陸儀 今辰爲母賁冥禧

欲叅勝會同歸敬 泥水難堪弱馬騎

 

山路崎嶇雨不微 吾兒吾弟上崔嵬

雲遮古寺尋歸處 泥濺芒鞋露濕衣

 

懷眞入選貌稜稜 冒雨山程偶策藤

盛栗鉢囊兼贈筆 感恩情意重難勝

Ⅴ-161) 청명일(淸明日). 비속에 생각나는 대로 읊음

Ⅴ-161-01)

때 맞춰 내리는 비가 사사로운 마음 없어

온갖 풀과 꽃들이 저마다 한때를 만났네.

부끄럽게도 그 푸른 봄이 내게만은 무정해

눈같이 흰 귀밑 털이 여전히 드리워 있네.

Ⅴ-161-02)

머리 위의 흰 머리가 반 넘어 빠지고

장하던 마음도 병중에 다 사라졌네.

시 읊조릴 필요 없다고 말하지 말게

그윽한 회포를 그려 쓸쓸한 마음 달랜다네.

Ⅴ-161-03)

우곡(牛谷) 아이가 오면서 북만(北巒)을 거쳤는데

새로 걸른 술에다 안주까지 소반에다 차렸네.

빗속에 마시는 것도 자못 괜찮아

늙은이의 마른 혀를 부드럽게 적셔 주네.

 

淸明日雨中卽事

沛然時雨潤無私 百草千花各一時

却愧靑春於我薄 雪莖依舊鬂邊垂

 

頭上霜絲半已凋 壯心全向病中消

吟哦不必渾無謂 寫出幽懷慰寂寥

 

牛谷兒來過北巒 新篘醅釀鴈橫盤

雨中酬酢殊無害 軟飽仍沾老舌乾

Ⅴ-162) 3월 초하루. 직현(直峴)에서 온 사람이 말하였다. “지난 달 27, 8일에 비가 내려 예전엔 보지 못했던, 나무에 눈이 얼어붙는 일이 생겼습니다. 지금 (오면서) 보니 모든 나무들은 무겁게 짓눌려서 가지가 꺾어지고, 길에는 나다니는 사람도 끊어졌으니, 그 길흉의 징험이 어찌 없겠습니까?” 내가 그 말을 듣고 시험삼아 적어 둔다.

비와 눈이 섞이면서 모든 나무 가지가 얼어붙어

크게 쪼개지거나 또는 바가지 같네.

그 덕분에 깊은 산 나무들이 다 꺾어졌건만

사흘이 지나도록 아직도 녹지 않았네.

 

三月初一日。自直峴來人曰。前月二十七八日之雨。木稼異於古。今所見重壓萬木。枝條折落。行路絶人。其吉凶豈無所驗。予聞而記其語試之

雨雪交凝萬樹梢 大如斫析又如瓢

因玆折落深山木 過盡三朝尙未鎖

Ⅴ-163) 초엿새. 생각나는 대로 읊음

안개도 아니고 연기도 아닌데 사방이 어두워

햇빛마저 어둑한데다 대낮에 미친 바람이 부네.

산사람이 창망한 가운데 혼자 앉았노라니

하늘이 땅에 닿을까 문득 두렵네.

 

初六日卽事

非霧非烟暗四方 日光昏翳晝風狂

山人獨坐蒼茫裏 却恐天玄接地黃

Ⅴ-164) 적용암(寂用菴)에 다시 찾아가서

이 절을 창건할 때 선류(禪類)를 모았으니

적용(寂用)의 공부가 성품을 구하는 걸세.

붉은 난간에 저녁 되니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푸른 못에 가을 되니 외로운 바퀴 달빛 밝구나.

예전에 처음 보고 맑은 구경 다했는데

오늘 다시 와서 훌륭한 놀이를 즐기네.

새로 칠한 단청이 빛깔 찬란해

환암(幻菴)도 탑 속에서 머리를 끄덕이시리.

 

重遊寂用菴

刱成蘭若集禪流 寂用工夫性所求

滿洞白雲丹檻暮 孤輪皎月碧潭秋

昔年初見窮淸賞 今日重來得勝遊

新着丹靑光燦爛 幻菴應點塔中頭

Ⅴ-165) 13일. 동아산(銅鵝山) 집에 작은 술자리를 마련하고 돌아가신 형님을 생각하다

지난 여름 산 속 서재에서 술잔을 들고

두 사람이 함께 마시며 돌아갈 줄 몰랐지.

귓가에는 은근한 이야기가 아직도 남아 있고

가슴속에는 뼈아픈 슬픔이 더욱 늘었네.

서산의 해와 물과 구름은 나그네 한(恨)을 얽는데

동풍에 복사꽃과 오얏꽃은 누굴 위해 피었나.

자리에 가득한 자손들은 모두들 옛날 그대로이니

마주앉아 술잔 기울이셨더라면 정말 즐거웠으리.

 

十三日。銅鵝山宅開小酌。懷失兄

去夏山齋把酒盃 兩人同酌不知廻

耳邊猶在綢繆語 胸次尤增痛切哀

西日水雲縈客恨 東風桃李爲誰開

滿堂蘭玉皆依舊 相對傾樽可快哉

Ⅴ-166) 15일. 조(趙) 총랑(摠郞)이 좋은 술을 보내와서

해묵은 병객(病客)이 홀로 무심한데

봄은 어느새 저물어 가고 벌써 녹음(綠陰)일세.

고맙게도 이 술이 두터운 뜻을 전해 주어

지는 꽃 밑에 한번 취하니 그 값이 천금일세.

 

十五日。趙摠郞見惠名醞

悠悠病客獨無心 春事將闌已綠陰

賴有麵生傳厚意 殘花一醉直千金

Ⅴ-167) 이실(李實) 형의 장사(葬事)를 지냈는데, 나는 병으로 상여 앞에 나아가지 못하고 시 두 수를 지었다

Ⅴ-167-01)

기쁜 일에는 반드시 걱정스런 일이 따른다던

옛사람의 이 말씀이 황당하구나.

나는 이를 앓는 데다 가슴까지 앓고 있으니

상엿줄 잡고 참예하지 못하겠네.

Ⅴ-167-02)

빠른 세월은 흘러가는 물 보며 알고

유유한 세상일은 뜬 구름 보며 느끼네.

난간에 기대 곰곰히 살고 죽은 사람들 헤아려보노라니

말없는 봄 산이 저녁볕을 보내 주네.

 

李實兄葬送。僕因病未詣輛車之前。作二首

喜事須幷憂事競 故人斯語有荒唐

乃緣齒疾兼心痛 未得隨叅執紼行

 

冉冉天機看逝水 悠悠世事感浮雲

倚欄細數存亡輩 黙黙春山送夕曛

Ⅴ-168) 4월 초하루

Ⅴ-168-01)

곡우(穀雨)가 기름을 보탠 뒤에

훈훈한 바람이 뜻을 내기 시작해,

이제부터 녹음이 우거지고

아름다운 꽃들이 벌써 드물어지네.

고운 풍광이 드러나고

맑은 경치가 퍼져,

어느새 여름 뜻이 움직이니

누런 꾀꼴새가 뽕나무 언덕에 지저귀네.

Ⅴ-168-02)

사람은 늙고 석 달 봄은 저무는데

꾀꼴새 울면서 사월이 시작되네.

산들바람에 버들개지 흩날리고

보슬비에 연기 맑아라.

만물을 살펴보며 성쇠(盛衰)를 느끼고

마음을 다잡아 거두고 펼 줄을 아니,

인생 백년에 천 가지 변하는 일들이

결국은 한 줌 흙으로 돌아간다네.

Ⅴ-168-03)

솔솔 부는 봄바람 뒤에

평화스런 여름 경치가 시작되니,

흐르는 세월이 어찌 그리 빠른지

내 자신의 계획은 갈수록 허술해지네.

담 모퉁이에 꽃 그늘이 엷어 가고

책상머리에 나무 그림자 펼쳐지니,

좋은 바람이 맑은 기운을 몰아

남쪽 언덕에서 불어오네.

 

四月初一日

穀雨添膏後 熏風用意初

綠陰當鬱密 紅艶已稀疎

婉軟風光轉 淸和景氣舒

悠然動夏意 黃鳥囀桑墟

 

其二

人老三春晩 鶯呼四月初

絮飛風細細 煙淡雨踈疎

觀物感衰盛 秉心知卷舒

百年千變事 終始一丘墟

 

其三

嫋嫋春風後 融融夏景初

流光何荏苒 身計轉蕭踈

墻角花陰淺 床頭樹影舒

好風將淑氣 吹到自南墟

Ⅴ-169) 복(服)을 마치고 조정(朝廷)으로 돌아가는 최(崔) 전서(典書)를 보내면서

Ⅴ-169-01)

가족 이끌고 봄날 고향에 돌아와

살고 죽은 이들 공경하며 섬겨 어버이께 효성 다했네.

복(服)을 벗고 다시 조정으로 돌아가니

참으로 충효를 한 몸에 온전히 했네.

Ⅴ-169-02)

관산(關山)이 까마득히 멀어 흰 구름 나는데

책과 칼 단출한 차림으로 말 타고 돌아가네.

멀리서 생각하노니 한강(漢江) 가 길에는

들꽃과 아름다운 풀들이 나그네 옷을 비추겠지.

Ⅴ-169-03)

도촌(桃村)의 문객(門客)들이 다 훌륭하지만

구름 길 빛나는 영화를 몇 사람이나 누렸던가.

이 산 사람을 묻거든 이렇게 대답하시게

홀로 빈 배 부등켜 안고 연하(煙霞)에 누웠노라고.

Ⅴ-169-04)

오래 전에 고향 떠난 작은 아이가

육 년 동안 낮은 벼슬로 연(輦)을 모시고 있네.

부탁하노니 내 마음을 대신해 말씀해 주소

충량(忠良)을 다해 거룩한 임금 보좌하라고.

 

奉送崔典書服盡還朝

挈家來到故園春 敬事存亡盡孝親

服盡飜然朝鳳闕 實維忠孝兩全身

 

關山迢遞白雲飛 書釰單裝信馬歸

遙想漢江江上路 野花芳草照征衣

 

桃村門客盡英華 雲路蜚榮有幾家

若問山人須報道 獨將空腹臥煙霞

 

久別家鄕有小兒 六年○輦一官卑

請公代說吾心事 宜盡忠良佐聖時

Ⅴ-170) 장덕지(張德至) 선생이 이질(痢疾) 고치는 노액(露液) 한 병을 주기에 시를 지어 감사함

늙어 가면서 병까지 많아

너무 심하게 쇠했는데,

하성(霞誠)이 큰 바다 같으시어

노액(露液)이 깊은 잔에 가득 찼네.

한번 마시자 오장(五臟)이 왕성해지고

다시 맛보니 두 눈이 열려,

경괴(瓊瑰)에 견줄 만한 물건 없으니

이 막중한 은혜를 무엇으로 갚으랴.

 

張先生(德至)惠治痢露液一罌。詩以謝之

老去仍多病 衰遲已甚哉

霞誠同大海 露液滿深杯

一服五臟旺 拜嘗雙眼開

重恩何以報 無物當瓊瑰

Ⅴ-171) 다시 이(李) 거사(居士)가 보낸 시에 차운함

Ⅴ-171-01)

농서(隴西)의 시격(詩格)이 늙은 소나무 같아

넓고 넓은 사원(詞源)이 끝이 없구나.

어진 아들 시랑(侍郞)이 아름다운 시를 보내

한바탕 잠자다가 작은 창가에서 놀라 깨었네.

Ⅴ-171-02)

오늘 저녁이 몇 해 만인지 모르겠구나

술항아리 둘러싸고 서너 사람이 마주앉았네.

시는 맑고 술은 시원해 넉넉히 즐기고는

취한 채로 돌아가 저마다 편안히 잠들었네.

Ⅴ-171-03)

아우와 형이 함께 늙어 이미 죽을 나이건만

그 동안 이룬 공명(功名)은 어디 있는가.

헤어져 지낸 적이 많고 모인 적은 적으니

평상 맞대고 잠자던 일이 늘 생각나네.

Ⅴ-171-04)

옛 사람과 지금 사람이 천년이나 떨어졌지만

그 취향은 피차 다름이 없네.

국화 길의 늙은 서생은 정절(靖節)만이 아니고

소나무 바위 숨은 선비는 바로 용면(龍眠)일세.

Ⅴ-171-05)

맑고 화창한 사월이라 하루가 한 해 같은데

옛 언덕 가 버드나무가 솜털을 불어 대네.

남쪽 논의 모내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는데

잠박의 누에는 벌써 세 잠이 지났네.

Ⅴ-171-06)

올해에도 지난해같이 꽃이 피었건만

지난번 꽃구경하던 사람들이 자리에 많이 없네.

꽃은 다시 피었건만 사람은 돌아오지 않아

홀로 긴 한숨 쉬며 잠 이루지 못하네.

 

復次李居士所贈詩

隴西詩格似松年 浩浩詞源莫有邊

賢嗣侍郞傳麗句 小窓(☆)驚覺一場眠

 

今夕不知何歲年 數人同坐一罍邊

詩淸酒冽歡娛足 乘醉歸來各穩眠

 

弟兄俱老已殘年 畢景功名在那邊

離別尙多團會少 每思相對雨床眠

 

古今人縱隔千年 趣尙無分彼此邊

菊徑老生非靖節 松巖居士是龍眠

 

淸和四月日如年 楊柳吹綿古岸邊

南畝揷秧猶未盡 箔蠶今已過三眠

 

今年花發似前年 前賞花人減坐邊

花有重開人未返 獨興長嘆不成眠

Ⅴ-172) 스스로 읊음

올 한 해 봄일이 어떻게 되었나.

절반이나 지났건만 추위가 가시지 않네.

한식(寒食) 뒤라서 바람과 비가 어지럽고

몸이 늙어서 시(詩)와 서(書)도 잘 안되네.

시름겨운 허파를 씻으려고 촌 술을 사 마시고

주린 창자를 달래느라 들나물을 캐 왔네.

낮잠에서 깨어났더니 처마에 낙숫물도 그쳐

조각 구름만 저 멀리 살구꽃 언덕에 떠 있네.

 

自詠

一年春事定何如 過半餘寒尙未除

風雨紛紜寒食後 詩書跌宕老年餘

欲澆愁肺沽村釀 爲療飢腸拾野蔬

牛睡罷來簷溜歇 殘雲遠傍杏花墟

Ⅴ-173) 원양윤(元良胤) 형을 곡함

참다운 정은 천고에 으뜸이고

나이는 여든 하고도 셋이라,

뛰어난 기운은 골짜기에 일어나는 구름이고

맑은 풍채는 못을 비추는 달이었네.

사귄 도가 옛부터 깊었으니

애사(哀辭)를 짓기가 너무 괴롭네.

길이 황천(黃泉) 아래 막히고

무덤은 푸른 산 남쪽에 높았으니,

쓸 데 없이 눈물 흘리지 마세

끝없는 이야기 말로 다 못하겠네.

줄 이은 최마(縗麻)의 유족들이 대견하게 보이니

당당한 그 모습 아들이 다섯일세.

 

哭元良胤兄

眞情千古一 年齒八旬三

逸氣雲興壑 淸儀月照潭

哀辭今更苦 交道昔曾諳

路隔黃泉下 墳高翠巘南

莫垂無益淚 休說不窮談

偉見縗麻列 堂堂有五男

Ⅴ-174) 또 짓다

누른 흙이 충효의 몸을 덮었으니

우리들이 세 차례나 탄식했네.

옛날 술자리를 같이 했을 적에

함께 놀던 즐거움이 못물에 넘쳤었지.

세상 돌아가는 건 그대가 걱정했고

그대의 양심은 뭇 사람들이 알았는데,

북망산에 누웠다는 소식을 갑자기 듣고는

남쪽 난간에 기대 걱정스레 바라보았네.

나 혼자 마음 아파할 뿐이지

함께 웃으며 이야기할 길 없으니,

내 일찍부터 아버지의 친구였기에

이 시를 지어 여러 아들들에게 조문하네.

 

黃土盖忠孝 吾儕歎息三

與偕開酒席 遊樂溢溪潭

世態君應誚 良心衆所諳

忽然聞枕北 惕若倚軒南

徒自傷懷抱 無因共笑談

我曾爲父執 題此吊諸男

Ⅴ-175) 조카 원인(元認)이 보낸 우모회(牛毛膾)를 노래함

바다 나물을 말려 털처럼 가늘구나.

물과 불로 삶느라 수고 많았네.

아주 맑은 체질이 그릇에 가득 엉켰으니

물에서 건진 귀한 것을 거룻배에 실었네.

취할 때 먹으면 몸에도 좋고

날씨가 더워지면 그 값이 더욱 높아지네.

손수 들고 온 그 정성이 고마워

시 한 수를 지어 붓을 휘두르네.

 

詠牛毛膾(侄元認所贈)

枯乾海菜細如毛 水火烹煎也有勞

品㝡澄淸凝滿器 貴從波浪載輕舠

每逢醉日呑何害 始信炎天價更高

手把重來誠意重 卽成詩律一揮毫

Ⅴ-176) 인봉의사(仁峰義師)의 시권에 씀

연민(憐憫)을 느끼는 정은 성품을 베푸는 것이니

유교에선 인(仁)이라 하고 불교에선 자(慈)라 하네.

스님께서 중생을 구제하시려

방편문(方便門) 가운데서도 알맞음을 택하셨네.

 

題仁峯義師卷

憐憫之情性所施 儒言仁也釋言慈

上人用濟諸含識 方便門中制以宜

Ⅴ-177) 남행(南行)

Ⅴ-177-01)

임금 수레가 황성(皇城)을 떠났다는 소식 들은 듯한데

여러 날 동안 계룡산(鷄龍山)을 순수(巡狩)하셨다네.

강과 산도 반드시 왕업을 도우리니

어느 곳에다 새 서울을 정하시려나.

Ⅴ-177-02)

왕실에서 처음 곡봉성(鵠峯城)을 정한 까닭은

조회(朝會)에 수륙(水陸) 길이 고르기 때문일세.

서른 넘는 임금들이 왕업을 전한 뒤까지

크나큰 영기(英氣)가 송경(松京)을 옹호하네.

 

南行

似聞鑾輅出皇城 巡狩鷄龍數日程

河岳必應扶盛業 定從何處作新京

 

皇家初定鵠峯城 朝會均調水陸程

三十餘君傳業後 蕩然英氣擁松京

Ⅴ-178) 배웅

내 한 몸이 한가로워 고개 위 구름처럼 가볍기에

산과 물 모든 길들을 마음대로 다니네.

공(空)의 성품 자리를 서로 전하니

푸른 소나무 난간 밖에 달이 막 떠오르네.

 

送行

一身閑與嶺雲輕 遮莫千山萬水程

料得相傳空性處 碧松軒外月初生

Ⅴ-179) 새 나라

해동 천지에 큰 터전을 마련하고

강상(綱常)을 정돈해 마침 때를 만났네.

사대(四代)의 왕손이 지금의 태조이고

삼한(三韓)의 국토가 고려(高麗) 뒤를 이었네.

능침(陵寢)을 깨끗이 쓸고 새 명령 내렸으며

조반(朝班)을 바로 정해 옛 제도를 고쳤으니,

이로부터 다른 나라들이 큰 교화에 따라와

산에 오르고 바다 건너면서 피곤한 줄 몰랐네.

 

【사대(四代)를 추존하여 왕으로 보하였기에】

 

新國

海東天地啓鴻基 整頓網常適値期

四代王孫今太祖 三韓國土後高麗

掃淸陵寢敷新命 刪定朝班改舊儀

從此異邦投盛化 梯山航海不知疲

(四代追封爲王)

Ⅴ-180) 새벽 흥취에 관한 시(晨興詩)의 운을 씀

조정의 기강을 고치고 호령이 새로우니

우리 임금의 공덕이 거룩하고도 신기하네.

해방(海邦)에서 조근(朝覲)하며 방물(方物)을 실어 오고

변경이 평안하여 적(賊)의 티끌을 다 쓸어 버렸네.

북쪽 변방 십 년에 누가 편지를 부쳤던가

강 남쪽 만리에 스스로 이웃과 통했으니,

가엽구나! 옛날과 지금 흥하고 망한 일들이

얼마나 뒷사람으로 하여금 뒷사람을 슬프게 하려나.

 

用晨興詩韻

革整朝網號令新 我君功德聖之神

海邦朝覲輸方物 邊境安寧掃賦塵

塞北十年誰寄信 江南萬里自通隣

可憐今古興亡事 幾使後人哀後人

Ⅴ-181) 감회(感懷)

소나무 그늘이 차츰 옮겨 해가 한낮인데

느끼는 대로 시를 쓰자니 뜻이 끝 없네.

한(漢)나라 하늘 트이는 빛을 기쁘게 보고

요(堯)임금 해가 비추는 빛을 우러러 보니,

비와 이슬 공평하게 베풀어 편파가 없고

하늘과 땅을 다시 지어 커다란 공이 있네.

다행히 밝은 시절을 힘입어 옹졸함을 기르면서

흰 머리털 가을 하늘에 비추며 부질없이 슬퍼하네.

 

感懷

松陰漸轉日方中 感事題詩意莫窮

喜覩漢天開晃朗 更瞻堯日照曨曈

方施雨路公無黨 再造乾坤大有功

幸賴明時專養拙 空嗟雪髮照秋空

Ⅴ-182) 반자(半刺) 양(梁) 선생의 대규음(對葵吟)에 차운함

Ⅴ-182-01)

난간 동쪽 가까이 피어 홀로 꽃다움을 간직하며

꽃 마음이 오로지 맑은 해를 향했네.

안개비 뜰에 가득해 어슴프레한 속에서

시선(詩仙)과 짝해 그윽한 향기 풍기네.

Ⅴ-182-02)

훈훈한 바람 일으켜 향기를 멀리 퍼뜨리며

복사꽃 오얏꽃 따라 봄빛을 다투지 않네.

어여쁜 모습 아침저녁으로 시흥(詩興)에 이바지하니

아가위 그늘의 비와 이슬 향기를 느꼈으리라.

Ⅴ-182-03)

관아가 한가해 고요히 앉아 기이한 꽃을 마주하니

지난 해 낙양(洛陽)에서 놀던 일이 문득 생각나네.

부쳐 보낸 시 두 장을 읽으니 맑고도 절묘해

구슬 꿴 글자마다 절로 향기가 나네.

Ⅴ-182-04)

백년 인간 세상이 참으로 꿈속인데

밤새도록 흐르는 시냇물은 동쪽을 향해 달리네.

꽃 바라보며 지난 일들을 생각하지 말게나

회포 풀려면 모름지기 술항아리에 맡겨야 하리.

Ⅴ-182-05)

늙어 가면서 뜻과 생각이 차츰 혼몽해져

세상과 더불어 동쪽으로 향한 게 못내 부끄러워라.

새 시를 펼쳐보고 스스로 치하(致賀)하노니

오두막까지 넓은 은총이 흘러 미쳤네.

Ⅴ-182-06)

언제나 담 그늘에 있어 어둡게 지내는데

태양이 빛을 띄우며 하늘 동쪽에 떠오르네.

그 누가 마음 기울여 기꺼이 생각해 주랴

산 연기와 산 비 속에 영락한 이 사람을.

 

次韻楊半刺對葵吟

開近軒東獨貯芳 花心全欲向昭陽

滿庭煙雨空濛裏 長伴詩仙噀暗香

 

趁得熏風遠播芳 不隨桃李競春陽

嫣然朝暮供詩興 應感棠陰雨露香

 

官閑靜坐對奇芳 忽憶年前戱洛陽

吟寄二章淸更絶 連珠字字自生香

 

百年人世正懜懜 盡夜流川注向東

不用對花思往事 聞懷要寄酒樽中

 

老年情思漸昏懜 深愧疎狂與世東

奉閱新詩還自賀 洪恩流及草廬中

 

長在墻陰可不懜 太陽浮彩出天東

有誰歡取傾心苦 零落山烟山雨中

Ⅴ-183) 삼가 금척을 받든 글(奉金尺詞)과 보록을 받는 어록(受寶籙致語)을 읽고 경사롭게 여겨 찬양함

Ⅴ-183-01)

꿈에 금척(金尺)이 현관(玄關)에 내려오고

지리산(智異山)에서 보록(寶籙)이 왔으니,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은 덕 있는 이에게 돌아가는 법

새롭게 개혁한 공이 하루 아침에 들렸네.

Ⅴ-183-02)

하도((河圖)와 낙서(洛書)는 성인에 관계되니

산보다 높은 공덕에 부합되네.

지금 우리 나라의 상서가 옛날과 같으니

온 천하가 마땅히 손바닥 안으로 돌아오리라.

Ⅴ-183-03)

큰 붕새가 날개를 펴니 하늘 문을 덮네.

성스러운 덕이 태산(泰山)이나 화산(華山)보다도 높아라.

작은 뱁새도 은혜의 비와 이슬을 받아

한 가지의 천지가 옛 숲 그대로일세.

 

【위의 한 수는 정이상(鄭二相)에게 올린 시이다.】

 

伏覩奉金尺詞受寶籙致語。慶而贊之

夢中金尺降玄關 寶籙來從智異山

天命人心歸有德 鼎新功在一朝間

 

河洛圖書聖所關 應符功德重丘山

我邦祥瑞今猶古 天下當歸掌握間

 

大鵬舒翼蔭天關 德聖高於泰華山

斥鷃亦承恩雨露 一枝天地舊林間

(右一首。上鄭二相)

Ⅴ-184) 정도전(鄭二相)이 지은 네 곡의 노래 개언로(開言路)․보상공신(保相功臣)․정경계(正經界)․정예악(定禮樂) 등을 악부(樂府)에 붙이고, 그 가사를 관현(管絃)에 올린 것을 찬양함.

Ⅴ-184-01)

언로(言路)를 크게 열고 공신들을 태자의 스승으로 삼으며

경계를 바르게 하고 예악을 새롭게 했네.

이 네 곡의 맑은 노래가 성대의 교화를 찬송했으니

천년의 큰 업이 밝은 시대를 열었네.

가락은 아송(雅頌)처럼 높아 풍속을 바꾸고

소리는 궁상(宮商)에 맞아 귀신을 감동시키네.

이로써 백성을 모두 고무시키면

세상이 잘 다스려져 태평세월 되리라.

Ⅴ-184-02)

해동 천지가 다시 맑고 평안해져

백성들은 변하고 시절이 좋아 태평을 즐기네.

기자(箕子)의 순박한 바람은 더욱 떨치고

조선(朝鮮)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이 다시 펼쳐졌네.

산하의 웅장한 기운이 왕기를 붙들고

해와 달의 두 빛이 성명에 합하네.

덕을 기리는 많은 이들이 이 곡을 노래부르니

너무도 높고 넓어 찬양하기 어렵네.

 

贊鄭二相所製四歌(二相製開言路。保相功臣。正經界。定禮樂四曲。付于樂府。被于管絃)

大開言路保功臣 經界均平禮樂新

四曲淸歌稱盛化 千年景業啓昌辰

調高雅訟移風俗 聲協宮商感鬼神

以此庶民咸鼓舞 太平煙火入陶鈞

 

海東天地更淸寧 民變時雍樂太平

箕子淳風將益振 朝鮮雅號復頒行

山河氣壯扶王氣 日月明重合聖明

頌德幾人歌此曲 巍乎蕩也固難名

 

Ⅴ-185) 이촌(泥村) 이(李) 거사(居士)에게 익은 대추를 구했다가 도리어 날밤을 얻었다

Ⅴ-185-01)

이를 잡던 사람이 벼룩을 잡았으니

원래 본 뜻이 아니고 우연한 까닭일세.

지금 사람이라고 어찌 옛 사람과 다르랴

날밤을 얻은 것도 대추를 구했기 때문일세.

Ⅴ-185-02)

주렁주렁 자주빛 열매가 절로 생겼지만

자루에 담아 멀리 보낸 정성이 가볍지 않네.

삶아 먹거나 구워 먹거나 모두 입에 맞으니

노쇠한 형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그대가 고맙구려.

Ⅴ-185-03)

껍질을 벗기느라 손이 바쁘다가

천둥소리가 갑자기 이빨 사이에서 일어나네.

다 먹고 난 뒤에 훌륭한 선물 갚을 길이 없어

변변찮은 시나 부치노라니 얼굴이 두껍구나.

 

從泥村李居士求丹棗。反得生栗

捫蝨之人方得蚤 元非本意偶然故

今人何異古人哉 得栗乃緣求大棗

 

纍纍紫實自天生 路遠盈囊惠不輕

煮食煨呑皆適口 感君深慰老衰兄

 

削去皮來手不閑 雷聲忽起齒牙間

啖終無以瓊琚報 空寄蕪詞是厚顔

Ⅴ-186) 여러 서생들이 찾아오다

병으로 추위가 겁나 난간에 기댔는데

그대들이 술 가지고 오니 너무나 고맙구려.

그윽한 길을 멀리 찾아온 그 정이 두텁고

가득 찬 잔을 사양 말라는 그 말도 간절하네.

산 빛은 고요히 맑은 모습을 나타내고

연기가 어려 태평세월 자취를 이뤘는데,

취해서 베개에 기대니 사람들도 다 흩어져

봄 비 소리 속에 신선 세계를 꿈꾸네.

 

諸生來訪

病㤼天寒懶倚軒 感他諸子共携尊

遠尋幽徑情非淺 莫讓深鍾語不煩

山色靜開淸淨態 煙光凝作太平痕

醉來欹枕人初散 春雨聲中夢帝閽

Ⅴ-187) 밤에 일어나

가난을 하늘이 주신 건 알지만

거처는 땅이 평안한 곳을 골랐네.

병이 들면서 몸이 몹시 여위고

늙어 가면서 머리털도 희어졌네.

구름이 옅어지며 가을빛도 저물더니

서리가 내려 밤 기운이 차가워졌네.

내 마음은 언제나 깨끗해

시끄러운 티끌 세상과 상관하지 않네.

 

夜興

窮困知天賦 樓遲擇地安

病來身瘦盡 老去鬂衰殘

雲薄秋光眠 霜飛夜氣寒

寸心淸淨了 塵擾不相干

Ⅴ-188) 김(金) 교수(敎授)의 구호(口號) 시(詩)에 차운함

Ⅴ-188-01)

연하(煙霞) 속에 자취를 맡긴 한 늙은이가

아름다운 구절만 들으면 눈이 밝아지네.

시 가운데 절로 깊이 사귄 뜻이 있으니

어진 그대의 진중하고 간곡한 정 때문일세.

Ⅴ-188-02)

머리 들고 동쪽을 바라보니 흰 구름이 일어나는데

허공에 뜬 푸른 산 빛이 비쳐 눈이 밝아지네.

우리 언제 소나무 바위 시냇가에서

마음 속 일을 이야기하며 한껏 즐겨보려나.

Ⅴ-188-03)

혼자 유유히 앉았노라니 소탈한 뜻이 생기는데

비 개인 뒤 구름과 햇빛이 유난히 맑고 밝구나.

난간에 기대 꾀꼴새 소리를 듣고 있노라니

온갖 지저귐이 벗을 구하는 정이었네.

Ⅴ-188-04)

구름이 하늘가에서 뭉게뭉게 일어나

푸른 허공 밝은 햇빛을 먼저 가렸네.

기름진 비가 되어 말라버린 뭇 생명 살린다면서

백성들의 목숨 따르지 않으니 이 무슨 마음인가.

Ⅴ-188-05)

궁달(窮達) 가지고 내 삶을 탄식하거나 괴로워 않으리라.

고기는 못에 뛰놀고 솔개는 하늘에 나는 그 도(道)가 분명하네.

하늘의 이치 나타내고 사람의 할 일 다하면

그때에야 비로소 참된 정을 보리라.

Ⅴ-188-06)

나 또한 평생 동안 몹시 파리한 사람이니

시 한 구절 쓰려 해도 그 뜻을 밝히기 어렵네.

굳이 속된 말로써 맑은 운에 화답하려니

문장이 이뤄져도 속마음 나타내지는 못했네.

Ⅴ-188-07)

산을 보며 고요히 앉아 부생(浮生)을 웃고

한가한 구름 늘 짝하며 밝은 달을 희롱하네.

거울 보면 흰 털 뿐이라 부끄럽지만

꽃 대하면 풍정(風情)을 금하기 어렵네.

 

次金敎授口號詩韻

寄迹烟霞一老生 耳聞佳句眠還明

詩中自有深交意 珍重賢公懇疑情

 

擧頭東望白雲生 山翠浮空照眼明

何日松巖溪水畔 共論心事盡歡情

 

獨坐悠悠野意生 雨餘雲日淡還明

倚欄聽取綿蠻鳥 百囀皆然求友情

 

雲從天際蔚然生 先掩靑空白日明

謂作膏霖蘇衆槁 不從民命是何情

 

莫將窮達歎勞生 魚躍鳶飛道自明

天理顯來人事盡 此時方得見眞情

 

我亦平生大瘦生 欲題詩句意難明

强將俚語賡淸韻 不是成章達寸情

 

看山靜坐笑浮生 長伴閑雲弄月明

臨鏡可慚惟雪髮 對花難禁是風情

Ⅴ-189) 설봉(雪峯) 구(丘) 승통(僧統)에게 부침

법왕당(法王堂)의 주인이 모든 법의 왕이니

뛰어난 풍도가 온 세상을 비추네.

청정한 본 마음은 걸림이 없고

원융(圓融)한 도체(道體)도 생각을 끊었네.

흰 구름의 행락(行樂)은 맡길 만한데

서울 거리를 바삐 달리는 건 기대할 수가 없어,

세상 일 잊어버리는 걸 부끄러워 마시게

널리 퍼진 그 성예(聲譽)를 감추기 어렵다오.

 

寄雪峯丘僧統

法王堂首法中王 卓落高標照世光

淸淨本心無碍罣 圓融道體絶思量

白雲行樂眞堪託 紫陌奔馳未必當

莫愧忽忘嬰世故 藹然聲譽固難藏

事蹟-001) 칠봉서원(七峯書院) 사적(事蹟)

대명(大明) 만력(萬曆) 40년 임자(1612, 광해군5)에 여러 사람들의 의견을 합하고 함께 모여 (운곡의) 사우(祠宇)를 원주 북쪽 30리 칠봉(七峯)에 창건하였으며, 13년 뒤인 갑자년(1624, 인조2)에 고려(高麗) 국자진사(國子進士) 운곡(耘谷) 원선생(元先生) 위판(位版)을 봉안하였다.

 

七峯書院事蹟

大明萬曆四十年壬子。合辭齊會。刱建祠宇於原州北三十里七峯。越十三年甲子。奉安高麗國子進士耘谷元先生位版。

事蹟-002) 춘추제향(春秋祭享) 축문(祝文)

삼가 아뢰오니 (선생의) 학문은 수사(洙泗)를 전해 받고, 도(道)는 수양(首陽)에 자리를 두었습니다. 1부 시사(詩史)가 만고의 강상(綱常)이니, 사문(斯文)의 제향(祭享)이 영세토록 끝 없으리다. 삼가 생폐(牲幣)와 자성(粢盛)의 여러 제물을 갖추어 정성껏 바치나이다.

 

春秋祭享祝文

伏以學傳洙泗。道屯首陽。一部詩史。萬古綱常。斯文之享。永世無彊。謹以牲幣粢盛庶品。式陳明薦。

事蹟-003) 현종대왕(顯宗大王) 14년 계축(1673) 12월에 특명으로 칠봉서원(七峯書院)이라고 사액(賜額)하다

사액 제문(賜額祭文)

국왕은 신하 예조정랑 송정렴(宋挺濂)을 보내 원양도(原襄道) 원주목(原州牧) 고려 국자진사(高麗國子進士) 원천석(元天錫)의 영전에 제사를 받드노라.

백성들이 고려왕조의 덕을 싫어하므로 하늘이 성조(聖祖)에게 계시하사 어둠과 더러움을 한번에 씻으시니, 만물이 다 같이 보았다. 그러나 이 사람만은 홀로 가면서 돌아보지 않고 치악산에 숨어 영원히 고반(考槃)을 맹세하였다.

삼사 생각건대 헌묘(獻廟)께선 감반(甘盤)을 간절히 생각하셨으므로 이미 역마(驛馬)를 보내셨고, 또 화란(和鑾)을 굽히셨다. 그러나 (운곡은) 그 뜻이 굳어 몸을 피하였으니, 필부의 뜻을 빼앗기 어려웠다. 그래서 (태종께서) 예를 갖춰 자신을 낮추시고, (운곡의) 높은 절개를 이루게 하셨다. 서산(西山)에서 고사를 캔 것이 어찌 주(周)나라 덕에 손상되겠는가. 동강(桐江)에 낚시를 드리운 것도 실은 한(漢)나라 풍속을 붙든 것이니, 그 성취한 바를 살펴보면 어찌 미리 수양한 것이 없었으랴.

(운곡은) 젊어서 학문을 좋아했으며, 장성해서는 더욱 힘써 닦았다. 차분히 탐구하여 깊이 체득했으며, 의리를 깊이 깨달았다. 혼탁하고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 그 동안 쌓은 경륜을 시험하지 못했으니, 잠시 국자(國子)에 노닐었지만 벼슬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세상을 피해 살면서도 번민하지 않았으니, 그 일을 높이 숭상할 만하다. 그의 풍모와 이름이 알려지는 곳마다 다른 시대 사람들을 흥기(興起)시켰다.

이에 예관(禮官)을 보내 삼가 맑은 술잔을 올리노니, 몇 글자 빛나는 액(額)이 만고의 자랑스런 법이 될진저.

 

顯宗大王十四年癸丑十二月。特命賜額七峯書院。

賜額祭文

國王遣臣禮曺正郞宋挺濂。諭祭于原襄道原州牧高麗國子進士元天錫之靈。民厭麗德。天啓聖祖。一掃昏穢。萬物咸覩。展如之人。獨行不顧。隱居雉嶽。永矢考槃。恭惟獻廟念切甘盤。旣勤馹召。亦屈和鑾。志堅踰垣。匹夫難奪。能以禮下。俾遂高節。採薇西山。何損周德。垂釣桐江。實扶漢俗。究厥所就。豈無預養。少也好學。長益勉强。優游涵泳。深諭義理。遭時濁亂。蘊而莫試。暫遊國子。非爲筮仕。遯世無悶。高尙其事。風聲所及。異代興起。玆遣禮官。敬奠泂酌。數字華額。萬古矜式。

事蹟-004)칠봉서원(七峯書院) 제영(題詠)

004-01) 오숙(吳䎘)

고려왕조의 벼슬아치들은 모두 다 사라지고

운곡(耘谷)의 남은 풍모가 해동에 떨치네.

우주의 동량(棟梁)으로 사당을 이룩하니

봄 가을 향화(香火) 때엔 촌 늙은이도 달려가네.

한 갈래 흐르는 냇물은 근원이 멀고

천 층 우뚝 선 벼랑은 기상이 웅건해,

한가한 날 술병 들고 다투어 덕에 취한 뒤

어지러운 봉우리 부슬비 속에 시 읊으며 돌아오네.

 

七峯書院題詠

吳䎘

麗朝冠冕摠煙空 耘谷餘風振海東

宇宙棟樑成廟貌 春秋香火走村翁

川流一派淵源逈 壁立千層氣像雄

暇日壺觴爭醉德 亂峯微雨詠歸中

004-02) 윤지복(尹之復)

운곡의 사당이 반공(半空)에 솟았으니

높은 자취가 우리 해동에 으뜸임을 알겠네.

책 속의 깊은 뜻을 부지런히 탐구하고

다시 맑은 정신으로 나라 주인을 깨우쳤네.

군신(君臣)의 도리에 익숙한 모습이 바로 의열(義烈)이고

고관 대작을 업신여기는 자세가 바로 호웅(豪雄)이니,

문 앞에 우뚝 선 천 길 벼랑을

우러러보는 가운데 그 모습 완연하구나.

 

尹之復

耘谷祠堂架半空 從知高躅冠吾東

已將矻矻探書奧 更喚惺惺警主翁

講熟君臣眞義烈 志輕軒冕是豪雄

門前特立千尋壁 宛爾儀形俯仰中

004-03) 황경중(黃敬中)

큰 선비의 가슴 속은 수월(水月)처럼 텅 비어

모든 냇물을 돌려서 동쪽으로 흐르게 했네.

임금 되기 전에 일찍이 사는 곳을 찾아왔건만

표은(豹隱)처럼 즐겨 세상 피하는 늙은이가 되었네.

시냇물이 묘정(廟庭)을 지키며 흘러 넘치지 않고

산이 기둥을 부축해 그 형세 웅혼하네.

천 길 철벽이 얼어붙은 듯 서 있으니

선생의 기개 가운데서 온 모습일세.

 

黃敬中

碩士胸襟水月空 回瀾能使百川東

龍潛早卜棲身地 豹隱甘爲遯世翁

溪護廟庭流不溢 山扶棟宇勢多雄

千尋鐵壁凝然立 來自先生氣槩中

004-04) 이식(李植)

강상(綱常)이 하늘의 해같이 만고에 빛나

붙들어 심은 것이 해동의 도(道)임을 바로 알겠네.

사당 모습이 옛날의 백록동(白鹿洞)이니

유풍(儒風)이 어찌 문옹(文翁)을 기다려야만 하랴.

맑은 구름은 골짜기에 가득하고 시냇물 소리는 먼데다

처마에 늘어선 여러 봉우리들은 바위 형세가 웅장해,

서재(西齋)에 하룻밤 자고 난 나그네 뼈 속까지 맑아지니

여기가 바로 무이산(武夷山) 구곡(九曲)일세.

 

李植

綱常萬古日麗空 扶植方知此道東

廟貌卽今追白鹿 儒風何必待文翁

晴雲滿壑溪聲遠 列峀排簷石勢雄

一宿西齋淸瀅骨 依然九曲武夷中

004-05) 이원진(李元鎭)

높이 달린 해와 달이 맑은 하늘을 비추듯

홀로 이륜(彛倫)을 잡았으니 도가 동에 있었네.

홍범의 아홉 원칙을 세운 이는 맥수(麥秀)를 노래한 사람이고

맑은 바람(淸風)을 백세(百世)에 전한 이는 고사리 캔 늙은이일세.

우레 같은 시냇물 소리가 골짜기에 굴러 소리가 함께 멀어지고

바위 칼이 구름을 뚫어 기운이 웅혼하니,

두 가지 즐거움이야 지금도 상상할 수 있지만

흰 거문고가 말랐는지 젖었는지 그 누가 분간하랴.

 

李元鎭

高懸日月照晴空 獨秉彛倫道已東

洪範九疇歌麥子 淸風百世採薇翁

川雷轉壑聲俱遠 石釰攢雲氣倂雄

二樂卽今猶可想 誰分燥濕素琴中

事蹟-005) 산붕암(山棚巖)

005-01) 이식(李植)

화공(化工)이 연극 배우가 아닌데도

현기(玄機)를 가끔 묘하게 나타내네.

붕암(棚巖)은 사람들이 부르는 이름이니

귀신이 어찌 손수 만든 것이랴만,

일곱 봉우리가 마치 깎아서 이뤄진 듯

천 길이나 우뚝 서 있네.

용문(龍門)은 기둥을 뽑았고

오수(鰲峀)는 서리 뼈를 남겼네.

사관(史官)의 붓도 휘두르고

사대부의 홀(笏)도 들었건만,

높은 절개로 견준다면

만고에 그 누가 비기랴.

여기 운곡 늙은이의 사당이 있어

향기 속에 언제나 뵙네.

이 분이 일찍이 강상(綱常)을 심어

그 말씀이 일월(日月)과 함께 영원하니,

어떻게 하면 한원(翰苑)의 붓을 얻어

선생의 비갈(碑碣)을 새길 수 있으랴.

 

山掤巖

李植

化工非劇俳 玄機或巧發

掤巖是俗名 鬼神豈手○

七峯類削成 千尋立突兀

龍門擢砥柱 鰲峀留霜骨

或卓史臣筆 或擧卿士笏

特以比高節 萬古誰擬抗

此有耘老祠 馨香常對越

斯人樹綱常 有言垂日月

焉得翰苑筆 鑱作先生碣

005-02) 정희기(鄭熙夔)

감반(甘盤)의 옛 학문에 백이(伯夷)의 지조가 있어

임금의 발자취가 산에 다달아 한숨 쉬었네.

천 길 우뚝한 칠봉을 우러러보니

날을 듯한 사당이 마주 서 있네.

 

鄭熙夔

甘盤舊學伯夷操 駐蹕山臨舒嘯皐

瞻彼七峯千丈崒 翼然祠屋兩相高

事蹟-006) 해동악부(海東樂府) 사(詞)

006-01) 정홍익(鄭弘翼)

흰 옷으로 초야에서 와

자색 도포로 앉아 왕좌를 폈지만,

옛 스승의 은혜를 볼 뿐이지

천승(千乘)의 높음을 보지 않았네.

이 어찌된 일인가

응대(應對)가 한 마디 뿐이었네.

그대는 보지 못했던가! 궤 속의 책이 재가 되고 티끌 된 것을.

자손에 성인이 태어났으니

당시의 저술이 정신만 괴롭혔네.

 

海東樂府詞

鄭弘翼

白衣來自草菜 紫袍坐開王座 但見故舊恩 不見千乘尊 此何竟何事 應對惟一言 君不見櫝中之書成灰塵 子孫生聖人 當時著述空勞神

 

006-02) 정홍익(鄭弘翼)

선생께선 한미한 선비로 밑에 계셨지만, 당시의 명공(名公) 거경(巨卿) 가운데 공경하고 사모하는 이가 많았다. 그 자제를 보내어 배우게 한 이도 많았으니, 선생의 도덕과 명망을 짐작할 수 있다.

세상이 바뀐 뒤에 절개를 지키고 정의를 지닌 이가 한두 사람이 아니었지만, 그들은 모두 (고려) 조정에 벼슬하고 임금에게 녹(祿)을 먹은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선생만은 포의(布衣)로 암혈(巖穴)에 살면서 처음부터 끝까지 한마음으로 말과 행실을 아울러 닦아, 천만세 강상(綱常)의 특절(特節)이 되셨다. 또 왕씨(王氏) 부자는 선생의 붓 덕분에 후세의 의혹을 바로 밝히고 씻었으니, 아아! 선생의 충군(忠君) 애국하는 마음이 어찌 나라 위해 몸을 바치면서 두 성(姓)을 섬기지 않는 무리들과 같을 뿐이랴.

퇴계(退溪) 선생은 “원성(原城)에 믿을 만한 역사가 있다” 하셨고, 한강(寒岡) 선생도 역시 “원성에 믿을 만한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다. 택당(澤堂)은 그 시에서 “이 분이 강상(綱常)을 심어 그 말씀이 일월(日月)과 함께 영원하다 斯人樹綱常, 有言垂日月.”라고 하였다. “믿을 만한 역사”라고 한 말이나 “일월(日月)과 함께 영원하다”는 말은 모두 왕씨(王氏) 부자의 일을 가리킨 말이다.

포옹(圃翁)의 한 죽음은 시대가 그러했고 형세가 그러했으니 떳떳하고 당연하였다. 우주에 떨칠 만한 행동이었으니, 아무도 나무랄 수 없었다. 그러나 서장령(徐掌令)이 한 절구 시에서 겨우 “전조(前朝)의 왕업이 길지 못해 한스럽구나(却恨前朝業不長)” 하였고, 태종대왕께서 “백이 숙제와 같은 류이다(夷齊之流)”라고 칭찬하셨을 뿐이다.

길주서(吉注書)는 무너지는 파도 속에서 용감하게 물러났으니, 탁월하고 고상하였다. 고을 관리에게서 (새 나라에 참여하라고) 독촉을 받게 되자, 서울에 올라와 상소했다. “신(臣)은 전조(前朝)에 과거에 올라 벼슬했습니다. 신은 ‘여자에게 두 남편이 없고, 신하에게 두 임금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신을 고향으로 돌려보내시어, 두 성(姓)을 섬기지 않으려는 뜻을 이루게 해 주소서.” 그러자 임금께서 그 의(義)를 가상히 여겨 후한 예를 베풀어 보내셨다. 남재(南在)를 비롯한 여러분들이 시를 지어 주며 전송했고, 권양촌(權陽村)은 그 첩(帖)에 쓰기를, “고려 오백년 동안 교화를 배양하여 선비들의 풍조를 격려한 보람이 모두 선생의 한 몸에 있었고, 조선 억만년의 강상(綱常)을 부식하여 신절(臣節)의 근본을 밝힌 것도 선생의 한 몸에 기초하였으니, 명교(名敎)에 있어서 그 공이 아주 크다”고 하였다. 유서애(柳西厓)는 지주비(砥柱碑)에 기(記)를 쓰면서 이렇게 말했다. “해와 달이 새로 빛나고 산과 시내가 모습을 바꾸자, 지난날 왕씨의 문 앞에서 밥을 빌며 아양을 떨던 자들이 (새 정권 참여에) 뒤질세라 앞장서서 달려왔다. 그러나 선생만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의리로써 형문(衡門)에 자취를 감췄으니, 참으로 충렬(忠烈)스럽도다. 천하의 큰 어려움을 무릅쓰고 천하의 큰 절개를 세우며 천하 사람들이 행할 수 없는 일을 행하여, 능히 오산(烏山) 한 구역에 수십년 뒤까지도 왕씨의 연대를 머물게 하였으니, 아아! 참으로 지주(砥柱)로다.

아아! 양촌(陽村)이 쓴 글이나 서애(西厓)의 기(記)를 읽어보면, 야은(冶隱)의 높은 풍모가 천년 뒤까지도 완악한 자를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자를 일어나게 할 만한다. 만약 문장과 덕행을 갖춘 군자로 하여금 운곡 선생의 찬전(贊傳)을 짓게 했더라면, 그 입언(立言) 수사(修辭)가 과연 어떠했을까.

태종대왕께서 태상(太常) 박사(博士)의 벼슬로써 야은(冶隱)을 부르셨는데, 사신이 이르자 선생이 국화를 꺾어 백이(伯夷)를 제사지냈다. 태종대왕께서 오산(烏山) 토지를 야은(冶隱)에게 하사하셨는데, 조명(詔命)이 내려오자 선생이 국화를 가져다가 그 밭에 심었다. 이는 물건에다 뜻을 붙여서 그 정조(貞操)를 보인 것이니, 선생의 풍모를 듣고 사모한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그 이야기를 한다.

태종대왕께서 감반(甘盤)의 옛 은혜를 생각하여 운곡(耘谷)을 찾아오자, 선생은 피하고 보지 않았다. 태종대왕께서 각림사(覺林寺)의 전원(田園)을 운곡에게 하사하셨을 때에도 선생은 끝내 보지 않았으니, 선생이 평생 지킨 지조는 털끝만치도 움직인 적이 없었다. 비록 붉은 마음에서 일어난 충의의 큰 절조를 붓으로 책에 썼더라도 자기를 숨겨 남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으니, 선생의 뜻을 아는 사람이 그 누구겠는가. 수백년 뒤에 역사의 의논과 판단만이 선생을 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先生以寒儒在下。一時名公巨卿敬慕者多。多有送子弟受學。先生之道德重望。可以想見。革世後伏節仗義之人亦非一二。而皆是仕宦於朝。食祿於君也。獨先生布衣巖穴。終始一心。言行並修。爲千萬世綱常之特節。又王氏父子因先生之筆。而明正洗滌來後之疑惑。噫。先生之忠愛。豈啻如許身殉國不事二姓而已之徒也哉。退溪先生曰。 原城有信史。寒岡先生亦曰。原城有信史。澤堂詩曰。斯人樹綱常。有言垂日月。其曰信史與垂日月云者。皆指王氏父子事也。圃翁一死 時也勢也。尙矣至矣。振宇宙而人無間然。徐掌令一絶詩。不過曰却恨前朝業不長。太宗大王褒之以夷齊之流。吉注書頹彼勇退。卓乎高矣。被州官督令。如京上疏曰。臣於前朝。登科筮仕。臣聞女無二夫。臣無二君。乞放鄕里。以遂不事二姓之志。上嘉其義。優禮遣之。南在諸公贈詩送行。權陽村題其帖曰。有高麗五百年培養敎化以勵士風之效。萃先生一身而收之。有朝鮮億萬年扶植綱常以明臣節之本。自先生一身而基之。其有功於名敎大矣。柳西厓砥柱碑記曰。日月新輝。山川改觀。向之飮食。煦煦於王氏之門者。奔走恐後。而先生以不事二君之義。屛迹衡門。其忠烈矣。夫犯天下之大難。立天下之大節。行天下人之所不能爲。能使烏山一區。獨留王氏甲子於數十年之久。嗚呼。眞砥柱也。噫。讀陽村之題․西厓之記。冶隱高風。千載之下。可以廉頑立懦矣。若使文德君子作述耘谷先生贊傳。則其立言修辭。倘復如何乎。太宗大王以太常博士徵冶隱。使官至而先生折菊祭伯夷。太宗大王以烏山土地賜冶隱。詔命下而先生取以種其田。盖托物寓志。以見其貞操者也。聞風起慕。人到于今稱之。太宗大王以甘盤舊恩訪耘谷。而先生避不見。太宗大王以覺林田園命賜耘谷。而先生終不視。先生平生所守。未嘗有一毫之或動。雖丹心所激。忠義大節之筆之於書者。惟欲晦藏。不使人知之。則先生之志。人孰有識之者耶。數百年後。史篡論斷。可謂知先生矣。

事蹟-007) 석경묘소(石逕墓所) 사적(事蹟)

고려 국자진사 운곡선생 묘갈전(高麗國子進士耘谷先生墓碣篆)

양천(陽川) 허목(許穆)

선생은 원주 사람이니 성은 원씨(元氏)요 휘는 천석(天錫)이며 자는 자정(子正)인데, 고려 국자진사이다.

(선생은) 고려의 정치가 어지러워지는 것을 보자 홀로 숨어살면서 호를 운곡(耘谷)이라 하였는데, 고려가 망하자 치악산에 들어가 끝내 나오지 않았다. 태종대왕께서 여러 차례 불렀지만 나아가지 않자, 대왕께서 그 의리를 높이 여기셨다. 일찍이 동쪽에 노니시다가 그 오두막을 찾아가신 적이 있는데, 선생이 피하고 보지 않았다. 대왕께서 시냇가 바위에 내려앉아 집 지키는 할미를 불러 두텁게 사례하고, (선생의) 아들 형(泂)에게 기천현감(基川縣監) 벼슬을 내리셨다. 후세 사람들이 그 바위를 이름하여 태종대(太宗臺)라 하였는데, 태종대는 치악산 각림사 옆에 있다. 지금 원주 동쪽 10리 되는 석경(石逕)에 운곡선생의 묘가 있으며, 그 앞에 있는 무덤은 부인의 묘라고 한다.

처음에 선생의 장서(藏書) 여섯 권이 있었는데, 망국(亡國)의 고사를 기록한 것이었다. 그래서 자손들에게 경계하여, “함부로 열지 말라”고 하였다. 여러 대가 지난 뒤에 어떤 자손이 몰래 열어 보고는 크게 두려워하면서, “우리 문중이 (화를 입겠다)” 하고는 모두 불살라 버려, 그 책은 전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고도 남은 시집이 있으니, 그것이 이른바 󰡔시사(詩史)󰡕라는 것이다.

내가 들으니, “군자는 숨어살아도 세상을 버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선생도 비록 세상을 피해 스스로 숨어살았지만, 세상을 잊은 것은 아니다. 도를 지키며 두 마음을 가지지 않음으로써 그 몸을 깨끗이 한 것이다. 백이(伯夷)가 말하길, “옛 선비가 치세(治世)를 만나면 그 소임을 피하지 않고, 난세(亂世)를 만나면 구차히 살지 않는다. 지금 천하가 어두우니, (난세를) 피해 내 행실을 깨끗이 하는 것만 못하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그의 전(傳)에서도,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다른 나무들보다) 나중에 시드는 것을 알게 되고, 온 세상이 어지러워져야 청백한 선비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맹자는 “백이는 그 임금이 아니면 섬기지 않고, 그 백성이 아니면 부리지 않았다. 세상이 잘 다스려지면 나아가고 어지러우면 물러났으니, 백이는 성인으로서 맑은 분이다”라고 하였으니, (운곡) 선생은 백이(伯夷)의 짝이라고 할 만하다. 고을 사람들이 선생을 위해 사당을 세우고 제사를 받드니, 사당은 원주 북쪽 30리 칠봉(七峯)에 있다.

세첩(世牒)을 살펴보면 시조는 호장(戶長) 극부(克富)이다. 극부가 종유(宗儒)를 낳고, 종유는 창정(倉正) 보령(寶齡)을 낳았으며, 보령이 창정(倉正) 시준(時俊)을 낳았다. 시준이 정용별장(精勇別將) 열(悅)을 낳고, 열이 종부시령(宗簿寺令) 윤적(允迪)을 낳았으며, 윤적이 천상(天常)․천석(天錫)․천우(天祐)를 낳았다. 천상은 진사인데, “본조(本朝)에 와서도 벼슬했다”는 말이 있지만 살펴볼 길이 없다. 천우는 현령이다.

(선생의) 부인은 원씨(元氏)인데, 종부령(宗簿令) 광명(廣明)의 딸이다. 그러나 같은 원씨는 아니니, “원주에 두 원씨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것이다. 장남 지(沚)는 직장동정(直長同正)이고, 차남 형(泂)은 기천현감(基川縣監)이다. 선생의 후세 자손이 매우 많은데, 기천현감의 뒤가 가장 많다.

이에 선생을 찬(贊)한다.

암혈(巖穴)에 사는 선비는 나아가고 물러나는 때가 있으니, 비록 세상에 참예하지 않아도 그 뜻을 굽히지 않고, 그 몸을 욕되게 하지 않는다. 가르침을 후세에 세우는 것은 우(禹)․직(稷)이나 백이․숙제가 한가지이다. 선생은 백대의 스승이라고 말할 만하다.

 

石逕墓所事蹟 - 陽川 許穆

高麗國子進士耘谷先生墓碣(篆)

先生原州人。姓元氏。諱天錫。字子正。高麗國子進士。見麗氏政亂 隱居獨行。號曰耘谷。先生及麗亡。入雉嶽山。終身不出。太宗累召不至。上高其義。嘗東遊幸其廬。先生避不見。上下谿石上。召守廬嫗厚賜之。官其子泂爲基川縣監。後人名其石曰太宗臺。臺在雉嶽覺林寺傍。今原州治東十里石逕。有耘谷先生墓。又前一墓。孺人之葬云。初。先生有藏書六卷。言亡國古事。戒子孫勿妄開。傳之累世。有子孫一人竊開之。大懼曰。吾家族矣。擧而燒之。其書不傳。猶有餘遺詩什。此所謂詩史者也。吾聞君子隱不遺世。先生雖逃世自隱 非忘世者也。守道不貳以潔其身者也。伯夷之言曰。古之士。遭治世不避其任。遇亂世不爲苟存。天下暗矣。不如避之以潔吾行。故其傳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擧世泯亂。淸士迺見。孟子曰。伯夷。非其君不事。非其民不使。治則進。亂則退。伯夷。聖人之淸者也。先生盖伯夷之倫也。鄕人爲之立祠以祀之。祠在州北三十里七峯。稽其世牒。始祖戶長克富。克富生宗儒。宗儒生倉正寶齡。寶齡生倉正時俊。時俊生精勇別將悅。悅生宗簿寺令允迪。允迪生天常․天錫․天祐。天常進士。或曰仕顯於本朝。無所攷。天祐縣令。孺人元氏。宗簿令廣明之女。非一元族氏。以爲原有兩元是也。長男沚。直長同正。次男泂。基川縣監。先生後世子孫甚衆。基川之世㝡大。其贊曰巖穴之士趣舍有時。縱不列於世。能不降其志。不辱其身。敎立於後世。則禹․稷․夷․齊一也。先生可謂百代之師者也。

事蹟-008) 제문(祭文)

008-01) 정구(鄭逑)

산에는 고사리 있으니

굶주림을 달랠 만하고,

방에는 거문고와 책이 있어

스스로 즐길 만하네.

탕(湯)임금의 폐백이 은근하고

별자리의 거동이 간절했건만,

하늘 끝까지 돌아보지 않았으니

기개가 홀로 가슴에 가득했네.

천고의 빈 산에

한 오라기 맑은 바람이라,

얕은 정성을 바치오니

이 충정을 살펴 주소서.

 

祭文

鄭逑

山有蕨薇 可以療飢

室有琴書 可以自怡

湯幣慇懃 星宿雍容

窮天不顧 獨槩于胸

千古空山 一縷淸風

聊薦鄙誠 尙監玆衷

008-02) 김창흡(金昌翕)

백이(伯夷)․숙제(叔齊) 굶어 죽은 지 천년이 지났건만

그 임금 아니면 섬기지 않은 이가 몇 사람이었던가.

오늘 우연히 운곡의 자취 찾았으니

이 산이 수양산과 이웃한 듯하네.

 

金昌翕

夷齊餓死歷千春 不事非君有幾人

今日偶尋耘谷蹟 玆山應與首陽隣

事蹟-009) 계사년 중춘(仲春)에 운곡선생의 묘를 수축하면서 외람되게 감동(監董)의 끝에 이름을 곁들이게 되었으므로 느낌이 있어 율시 한 수를 읊다

009-01) 홍희조(洪羲祖)

푸른 산 붉은 해가 해동에 밝아

아득한 기운이 아침에 생기니 뜻과 기운이 맑아지네.

운곡의 유택(幽宅)을 오늘 참배하니

은대(銀臺)로 돌아가는 꿈 속에 흰 구름이 걷히네.

옛 어진이의 큰 절개가 오직 인의 뿐이었으니

말세의 미약한 양기가 그 이정(利貞)에 힘입었네.

한 평생 이름 없음이 도리어 다행스러워

덧없이 빠른 부생(浮生)에 태평스레 늙으셨네.

 

癸巳仲春。修耘谷先生墓。猥側名於監董之末。感吟一律。

洪羲祖

碧山紅旭海東明 灝氣朝生志氣淸

耘谷幽堂今日拜 銀臺歸夢白雲耕

昔賢大節惟仁義 衰李微陽賴利貞

沒世無名還自幸 浮生滾滾老昇平

009-02) 권수(權晬)

낡은 비석의 이끼 글자가 아직도 분명하니

선생의 맑은 생애를 우러러 사모하네.

고죽(孤竹)의 바람은 수양산 고사리 캐는데 높고

소미(少微)의 별은 부춘산 밭 가는데 비추네.

변암(弁巖)이 우뚝 서서 이름 전한 지 오랜데다

시사(詩史)가 길이 남아 곧은 절개를 볼 수 있네.

뜻 있는 선비들은 천추에 느낌이 많아

태종대 아랫길이 평평해졌네.

 

權晬

古碑苔字尙分明 景仰先生素履淸

孤竹風高首陽採 少微星照富春耕

弁巖特立傳名久 詩史長留見節貞

志士千秋多曠感 太宗臺下路猶平

009-03) 김낙수(金洛受)

명교(名敎)를 동방에 그 누가 밝혔던가

촌교(寸膠)의 힘이 많아 황하수가 맑아졌네.

은나라 하늘에선 서산에 고사리 캔 사람을 받들었고

한나라 조정에선 부춘에 밭가는 이를 모셔왔네.

대로(大老)의 비석을 세워 그 절조를 높이고

선왕께서 발걸음 옮겨 충정(忠貞)을 권장했네.

백년 무덤을 우러러보니 그 모습 옛날과 같구나.

그 누가 구릉(邱陵)이 겁(劫)을 겪어 평평하다고 말하랴.

 

金洛受

名敎東方孰使明 寸膠多力一河淸

殷天擎得西山採 漢鼎扶來富野耕

大老竪碑崇氣節 先生移蹕獎忠貞

百年墓貌瞻依舊 誰謂邱陵閱劫平

009-04) 정홍경(鄭鴻慶)

은나라 해와 달이 마음을 밝게 비추니

만고에 끼친 바람이 고죽국에 맑구나.

그 당시 임금 발자취가 부질없이 서글펐으니

치악산 어느 곳에서 밭 갈다 늦게 돌아왔던가.

구름에 덮힌 작은 비석은 느낌을 더해 주고

서리맞은 겨울 소나무는 홀로 절개를 지키는데,

우거진 푸른 산에 쑥대와 가시덤불 쳐내고

무덤을 다시 손질해 창평(昌平)을 사모하네.

 

鄭鴻慶

殷商日月照心明 萬古遺風孤竹淸

鳳蹕當年空悵望 雉岑何處晩歸耕

雲凄短碣偏增感 霜逼寒松獨葆貞

綿邈靑山蓬棘剪 重修堂斧慕昌平

009-05) 이치진(李治進)

전조(前朝)의 일을 분별한 말씀 홀로 분명했기에

별과 해가 지금까지도 가장 맑게 빛나네.

외로운 신하의 눈물은 섬강(蟾江) 나루에 목메고

처사의 이름은 치악산 밭갈이에 높았네.

포은(圃隱)이 간 뒤에 혼이 함께 매섭더니

목은(牧隱)이 올 때엔 절개가 함께 곧았네.

가엾게도 높은 무덤이 반나마 평평하더니

후손들이 져날라 봄 잔디가 푸르렀네.

 

李治進

前朝辨說獨分明 星日至今耀太淸

孤臣淚咽蟾江渡 處士名高雉嶽耕

圃翁去後魂俱烈 牧老來時節共貞

遺孫負去春莎綠 爲惜蓬科半已平

009-06) 허엄(許儼)

한 손으로 동쪽 하늘의 해를 받들었으니

육안으로도 그 빛이 맑음을 알겠네.

슬픈 노래 부르던 의로운 선비는 산에 올라 고사리 캐고

옛 스승 감반(甘盤)은 들에 숨어 밭을 가네.

임금 발자취 방황하며 예의 갖춰 찾아왔고

비석 글자는 떨어졌건만 충정(忠貞)을 표창했네.

병들어 감동(監董)에 달려가지 못하고

서글피 묘소를 바라보니 마음이 편치 않네.

 

許儼

隻手東天捧日明 滔滔肉眼亦知淸

悲歌義士登山採 舊學甘盤遯野耕

鳳蹕彷徨勤禮訪 龜頭剝落表忠貞

薪憂未克趍監蕫 悵望封塋志不平

009-07) 정약선(丁若璿)

무덤의 새 잔디가 눈에 비쳐 밝으니

한 낚싯줄 맑은 몸가짐 부춘산을 거듭 기억하네.

충신의 눈물은 심주(沁洲)에 다하지 않고

처사의 밭갈이는 일찍이 목은(牧隱)과 함께 했네.

금우(金牛)를 분간할 때에는 곧은 붓을 기다렸고

옥백(玉帛)을 길이 사양하니 그윽한 정조에 이로웠네.

흰 구름 흐르는 물 거친 대(臺) 굽이에

연로(輦路)는 옛 그대로에다 풀빛이 평평하구나.

 

丁若璿

堂斧新莎照眼明 富春重憶一絲淸

沁洲不盡忠臣淚 牧老曾同處士耕

分揀金牛須直筆 長辭玉帛利幽貞

白雲流水荒臺曲 輦路依然草色平

009-08) 이규채(李圭采)

아름다운 성 두어 자 흙에 꽃이 밝은데

백세의 맑은 풍모 선생을 우러러보네.

송악(松嶽)의 벌레 먹은 누런 잎을 차마 볼 수 없어

치악산에서 흰 구름 벗삼아 밭을 갈았네.

잔디는 비 맞으며 산뜻한 빛을 더하고

잣나무는 추위 겪으며 절개를 변하지 않아,

골짜기 어구 봄 고사리에다 팥을 보태어

해마다 제사 받들며 평안하기를 점치네.

 

李圭采

佳城數尺土花明 仰止先生百世淸

松嶽忍看黃葉蝕 雉峯堪伴白雲耕

原莎帶雨新添色 磵柏經寒不改貞

谷口春薇加豆實 烝嘗歲歲卜安平

009-09) 심동익(沈東翼)

치악산 높고 높아 고운 해가 밝았는데

한 오리 맑은 바람을 멀리 이어받았네.

하늘과 땅이 넓다 한들 장차 어디로 가랴

숲 골짜기 깊은 이곳에 스스로 밭 갈았네.

백이 숙제와 더불어 맞서는데다

포은(圃隱) 목은과 함께 충정을 나란히 했네.

후손들이 유택을 다시 수축하니

연하고 푸른 새 잔디가 성을 둘러 평평하구나.

 

沈東翼

雉嶽崢嶸麗日明 遺風遙挹一絲淸

乾坤雖廣將安適 林壑此深仍自耕

可與夷齊相上下 遂從圃牧並忠貞

雲孫重改幽堂築 軟綠新莎繞域平

009-10) 정홍순(鄭鴻順)

한 손으로 해동의 밝은 해를 받들었으니

선생의 뜻이 바로 성인의 맑은 마음일세.

천승(千乘)의 수레가 스승을 높여 빛냈건만

두어 이랑 밭 갈며 자취 감추고 살았네.

백세의 고결한 풍모 모두 우러러 사모하니

당시의 외로운 절개가 홀로 그윽히 곧았구나.

고을 동쪽 한 기슭 바라보이는 땅에

그 가운데 구연(嫗淵)이 있어 불평을 쏟을 만하네.

 

鄭鴻順

隻手擎攀海日明 先生之志聖之淸

尊師賁趾千乘駕 罔僕藏蹤數畝耕

百世高風皆仰慕 當時苦節獨幽貞

府東一麓逌瞻地 中有嫗淵瀉不平

009-11) 심계우(沈啓宇)

삼한(三韓)에 우뚝 의리를 밝혔으니

선생의 명망과 절개는 성인의 맑음일세.

고결한 품격으로 동강(桐江)에 낚시질하고

늘그막에 소요하며 율리(栗里)에 밭 갈려 했네.

백세 후에도 풍모를 들으면 공경스런 마음 더하고

천봉(千峯)에 자취 감추니 그윽한 정절에 이롭구나.

하늘이 아끼고 귀신이 감춘 깨끗한 땅에

무덤을 다시 손질하니 석경(石逕)이 평평해졌네.

 

沈啓宇

卓冠三韓義理明 先生名節聖之淸

高標宛轉桐江釣 晩計逍遙栗里耕

百世聞風增肅敬 千峯晦迹利幽貞

天慳鬼秘精禋地 塋城重新石逕平

009-12) 홍희승(洪羲升)

시냇물 돌아 흐르고 산이 둘러싸 골짜기 하늘 밝으니

운곡의 끼친 바람이 바다 동쪽에 맑구나.

붉은 봉우리는 기수(箕峀)의 소유라 하고

흰 구름은 부춘산 밭갈이 같네.

고려(高麗) 두 글자를 전자(篆字)로 크게 썼으니

홀로 빼어난 소나무가 늦게까지 정절 지녔네.

하루 종일 무덤을 우러러보노라니

돌아가는 길 저녁 연기가 시름겹지 않네.

 

洪羲升

澗回山拱洞天明 耘谷遺風左海淸

赤嶽盖云箕峀有 白雲猶似富春耕

特書篆古高麗字 獨秀松含晩節貞

鎭日堂封瞻仰久 不愁歸路夕烟平

009-13) 한치긍(韓致兢)

우뚝 선 치악산이 아름답고도 밝은데

동쪽 바다 바라보면 기운 더욱 맑구나.

푸른 잣나무는 다시 봄 이슬에 젖었는데

흰 구름은 아직도 옛날 밭 갈던 시절 같네.

손길이 석함(石函)에 남았으니 바로 시사(詩史)이고

괘는 천산돈(天山遯)을 얻었으니 곧기도 해라.

우뚝한 저 칠봉(七峯)을 더욱 사모하노니

어느 해에야 이 땅이 태평세월 누리려나.

 

韓致兢

巖巖雉嶽際休明 左海攸瞻淑氣淸

翠栢重封春雨露 白雲猶似舊耘耕

澤存函石詩之史 卦得天山遯用貞

屹彼七峯尤感慕 何年肇域享升平

事蹟-10) 계사년 사초(莎草) 때의 위안제문(慰安祭文)

우리 선조 깨끗하시어

주나라 곡식 부끄럽게 여기시고,

우리 선조 고상하시어

한나라 조정 믿으셨네.

사초(莎草) 하고 제사 받드는 일은

자손들의 직분이니,

잘 모시고 제물 바침이

이치에 어찌 어긋나랴.

비와 이슬이 내릴 때마다

무덤 보며 슬퍼하고,

좋은 철 맞이하면

멀리서 흠모하였네.

사림들이 역사를 도와

삼태기와 삽이 달리니,

이 작은 정성 살피시어

놀라지 마소서.

 

癸巳 改莎草時 慰安祭文

我祖耿介 周粟是恥

我朝高尙 漢鼎攸恃

衣履籩豆 子孫之職

迺厝迺歆 厥理靡忒

雨露浸濡 俅愓封樹

諏辰啓閉 緬惟興慕

衿紳相役 畚鍤如趍

監此微虔 毋震其虞

事蹟-11) 산신 제문(山神祭文)

11-01) 홍희조(洪羲祖)

치악이 높고 높아

해동이 다 우러러보니,

운곡의 유택(幽宅)을

영원히 지키시리.

신령님의 도움 받아

우리에게 두터운 은혜 내리시니,

묘소를 손질하면서

변변찮은 제물을 바치옵니다.

 

山神祭文

洪羲祖

赤嶽巖巖 海東維瞻

耘谷幽宅 萬祀無斁

賴靈拱衛 貽我裕惠

堂斧恭修 用薦菲羞 (右洪羲祖製)

11-02) 한익상(韓益相)

병신년 시월 신해삭(辛亥朔) 임자일(壬子日)에 선생의 묘표를 다시 세우면서 후학 관찰사 서원(西原) 한익상(韓益相)은 개연히 느낌이 일어났다. 그래서 이날 묘를 찾아가 참배하고, 선생이 숨어사시던 곳에 나아가서 고사리 한 묶음을 캐고 물 한 잔을 떠서 제사를 받들었다. 이는 선생의 시에서

 

밝은 달은 찼다 기우는데 물은 절로 맑구나.

다만 고사리를 캐면서 여생을 보내리라.

 

라고 한 뜻을 취한 것이다. 감히 선생의 영전에 아뢴다.

 

산이 그윽하고 깊은 것은 선생의 마음이고,

산이 높고 깎아지른 것은 선생의 절개로다.

만고에 푸른 산은 무너지지 않고 변하지 않으리다.

삼가 변변찮은 제물을 갖춰 흠모하는 마음을 펼치옵니다.

 

가을 빛은 높고 뜨거운 해는 내려 쬐는데

뒷사람들이 찾아와 작은 비석 앞에 절하네.

고려 진사 글씨가 어찌 크랴

운곡 선생이 아름다움을 독차지했네.

산 같은 명성 우러러 옛 집을 바라보고

고사리로 제사 받들어 당시를 생각하네.

주나라 어짐과 상나라 포악함을 모르지 않으셨건만

이 땅에 신하 도리를 굳게 심기 위해서였네.

 

歲丙申十月辛亥之朔壬子之日。改竪先生墓表。後學觀察使西原韓益相慨然興感。以是日往拜于墓。就先生隱居之地。採蕨一束。取水一盃。于以奠之。盖取先生詩中明月盈虧水自淸。但將薇蕨送餘生之意也。敢告于先生之靈曰。山窈面深。先生之心。山高而截。先生之節。萬古靑山。不崩不騫。謹將薄具。用伸逈慕。秋色崢嶸烈日懸。後人來拜短碑前。高麗進士書何大。耘谷先生美自專。山仰聲名瞻舊隱。豆盛薇蕨想當年。周仁商暴應非昧。臣道固然樹益堅。

事蹟-12) 운곡선생(耘谷先生) 사적록(事蹟錄) 뒤에 부침(後語).

12-01) 팔계(八溪) 정양흠(鄭亮欽)은 삼가 쓰다(謹識)

나는 일찍이 고려가 망할 때의 일을 논하다가 삼은(三隱)의 행적을 혼자 슬퍼하며, 그들의 의리를 믿었다. 그래서 “포은(圃隱)은 큰 일로 책임졌고, 목은(牧隱)은 바른 몸가짐으로 화합했으며, 야은(冶隱)은 엄정하게 숨었다. 모두 자신을 깨끗이 하여 (나라에) 바침으로써 만고에 우뚝 섰으니, 이에서 더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당시의 의리와 착잡한 사정을 알기는 어렵고 의심하기는 쉬운 법이니, 비록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유감스러운 점이 있다.”고 생각하였다. 그 뒤에 운곡 선생의 유사(遺事)를 읽어보고 일어나 탄식하며, “선생도 삼은(三隱) 선생과 마음이 하나였다. 행적은 다르지만 의를 겸했으니, 오히려 삼은(三隱)보다 더 빛나는 점이 있지 않은가”라고 하였다.

오백년 왕업의 존망을 한 몸에 지고서 함께 인(仁)을 이루고 의(義)를 취하며 사직을 중하게 여겨 두 임금의 폐위까지도 참아야 했으니, 이는 포은(圃隱) 선생이 큰 일을 책임진 것이다. 왕자를 세우는 한 마디 말은 거스르기 어려운 법이니, 임금의 기강이 이에 힘입어 정해졌다. 전조(前朝)의 훌륭한 명망으로 봉백(封伯)의 새 명령을 온화하게 받들었으니, 목은 선생은 바른 행실로 화합한 것이다. 초연히 두 성(姓)을 섬기지 않겠다는 뜻을 지녔으니, 그 선택이 정확하면서도 그 말씀이 부드러웠다. 망녕된 무리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방자하게 헐뜯었으니, 이를 보아서도 야은(冶隱) 선생이 엄정하게 숨어 버렸음을 알 수 있다. 앞사람들의 논술이 이렇게 갖춰졌다.

대개 그 처지가 같지 않기 때문에 (논자들이 삼은 三隱의 행위에 대하여) 병으로 여기지 않고 유감스런 일이라 했는데, 운곡 선생 경우에는 그 기미를 미리 알고 황야에 자취를 감추셨다. 그래서 (고려왕조의) 작록(爵祿)이 몸에 더하지 않고, 권위(權位)가 손에 이르지 않았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고 시대에 책임이 없는, 산림의 한 진사(進士)일 뿐이셨다. 그러나 하늘이 주신 것을 공경하고 사람이 금수(禽獸)가 될까 염려하셨으니, 그 마음에 이렇게 생각하신 듯하다. “나라가 망하고 윤리가 무너지면, 내가 이 시대 사람을 어떻게 하랴. 망하지 않고 무너지지 않게 할 수 있다면, 내가 그 일을 하지 않고 그 누가 하랴.” 이미 세우신 바가 광명하고도 탁월했으니, 행록(行錄)에 쓰신 바와 같다.

아아! 필부(匹夫)가 지위는 없어도 강상(綱常)이 이에 힘입었으며, 천승(千乘)의 임금이 절(節)을 굽혀(찾아왔어)도 신하가 되지 않았다. 선생은 숨어 사는 선비로 백세에 믿을 만한 역사를 기록했다. 이야말로 큰 일을 책임지고, 바른 행실로써 화합하며, 엄정하게 숨어버렸다고 말할 만하다. 그러므로 삼은(三隱)을 겸하고도 유감이 없는 분은 선생 한 분 뿐임을 알 수 있다. (선생이 그렇게 사셨던 것은) 그 처지가 (고려왕조에 벼슬했던 삼은 三隱과는)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선생의) 시(詩)만 전하고 사(史)가 없어진 것을 논자들은 아쉽게 여긴다. 그러나 퇴계(退溪) 선생께서 선생의 시를 읽고 “역사이다(史也)”라고 하셨으니, 역사가 시에 담겨 있다면 시가 전하면서 역사도 없어지지 않으리니, (역사를) 잃었다고 해서 어찌 아쉬울 게 있으랴. 그러나 선생의 시에 지금도 휘(諱)할 만한 부분이 있으니, 하물며 사(史)이겠는가. 천추만세에 반드시 깊이 아쉬워하는 자들이 있으리니, 내가 아쉽게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도 이 때문이다.

 

耘谷先生事蹟錄 後語

八溪 鄭亮欽 謹識

余嘗尙論麗亡時事。竊悲三隱之迹而信其義。以爲圃隱大而任。牧隱正而和。冶隱嚴而晦。是皆自靖以獻。特立萬古。莫或尙之。顧時義錯盭。難知而易疑。雖不以病。亦足以憾。乃歸考耘谷元先生遺事。作而歎曰。先生之與三隱先生。其心一也。迹舛而義兼。抑有光于三隱者非耶。夫身佩五百年王業。存亡與俱。成仁取義。而社稷爲重地。忍二王之騈首者。圃隱先生之大而任也立子一言。毅然難犯。王綱賴延。而前朝雅望。雍容封伯之新命者。牧隱先生之正而和也。超然遠引。不事二姓。其擇益精。其辭益婉。而彼哉妄男不知。則敢肆詆誣。此以知冶隱先生之嚴而晦也。前人之論述備矣。槩言所遇不同。故曰不以病而以憾。若耘谷先生。見幾玄陵。遯迹荒野。爵祿不加於身。權位不到於手。不拘不係。無責於時。山林一進士耳。乃敬天降裏。憂人爲禽。其心若曰亡國斁倫。吾無如時人何。猶有不亡不斁者。非我扶之而誰也。旣所立光明卓絶。一如錄中所記。噫。匹夫無位。綱常是賴矣。千乘屈節。罔敢臣僕矣。短什巾衍。百世信筆矣。玆可謂任其大和其正而晦其嚴矣。故知兼三隱而無遺憾者。先生一人而已。亦曰所遇不同耳。惟其詩傳而史佚。論者惜之。然陶山李夫子讀先生詩曰。史也。史寓於詩。詩傳而史不亡。何佚之惜乎。然先生之詩。今猶有可諱。況史哉。千秋萬歲。終必有深惜之者。顧余不得不爲是惜也。

12-02) 원은(元檃) ; 숭정 기원후(崇禎紀元後) 4년 무오(1858) 5월 상한에 16대손 은(檃)은 삼가 쓰다

시에다 역사라는 이름을 붙인 것은 그 시가 정직함을 뜻한다. 옛 성인도 “도를 믿음이 독실하고 스스로 아는 것이 밝기 때문에, 세상에 숨어살며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답답하지 않다”고 했다. 이는 순강지정(純剛至正)한 기운과 고명광대(高明光大)한 학문이 말로 나와서 문장을 이루는 것이 경(經)이 아니면 사(史)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 운곡 선생은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자 홀로 이륜(彛倫)을 잡고 숨어살면서 시(詩)와 문(文)을 저술하셨다. 그 문(文)이 바로 사(史)였는데, 불에 타 버리고 전하는 것이 없다. 「해동악부사(海東樂府詞)」에서 “당시의 저술이 부질없이 정신만 괴롭혔네(當時著述空勞神)”라는 구절이 바로 그것이다. 오직 시(詩) 두 권만이 아직도 500년 동안 우리 문중에 전해 오는 종정(鍾鼎)이니, 퇴계(退溪)와 한강(寒岡) 두 선생께서 “원성(原城)에 믿을 만한 역사가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 바로 이것이다.

고려 말엽의 시사(時事)를 상고해보면 왕씨(王氏) 부자의 원통함과 정비(定妃)가 공양왕에게 명령한 사실 등이 홍무(洪武) 22년 기사(己巳 1389)에 지은 두세 편 시에 실려 있는데, 사실에 의거하여 솔직하게 쓴 것들이 대개 이때의 일이다. “금화(金火)가 처천(處遷)된 뒤에 남행(南行)이 있었다”라든가 “새 나라”, “「몽금척(夢金尺)」과 「수보록(受寶籙)」을 받들어 읽고 경사롭게 여겨 찬양한 시” 등에서 휘(諱)하는 바가 시에 있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선조께서는 고려 충숙왕 17년 경오(1330) 7월 8일에 태어나셨는데, 시를 지은 연도는 신묘(1351)에서 시작하여 갑술(1394)에 마쳤으니, 그 기간이 44년이다. 만 섬이나 되던 구슬 가운데 어찌 잃어버린 것이 없으랴. 석실(石室)에 간직하는 동안 종이가 문드러지고 벌레가 먹어, 이따금 받들어 읽노라면 모르는 사이에 눈물이 흘러 내렸다.

아아! 오랫동안 신묘한 열쇠가 뽑히지도 못하고 전하지도 못하다가 이제 인쇄에 부치려 하니, 모두들 이렇게 말했다. “여수(廬水)에서 거문고 탄 것이 하(夏)나라 바꾸는데 어찌 해로우며, 서산(西山)에서 고사리 캔 것이 상(商)나라 무찌르는데 무슨 손실인가. 그렇다고 해서 무광(務光)의 곡조와 백이의 노래를 은(殷)나라나 주(周)나라 세상에서 기휘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으니, 하물며 한 부 시사(詩史)가 만고 강상(綱常)에 소중함에랴.”

(운곡선생이) 도(道)에 나아가고 덕(德)을 이룩한 것과 역사를 논단한 것은 지언(知言)이라 하겠다. (선생의) 큰 절개에 관해서도 금계(錦溪) 박공(朴公)이 지은 서문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니, 무슨 말을 덧붙이겠는가.

아아! (선생의) 묘는 관아 동쪽 10리 석경산(石逕山), 고을 북쪽 30리 칠봉(七峯)에 있으니, 사액(賜額)하여 영을 모신 곳이다. (선생의) 풍모와 성예(聲譽)가 미친 바 우러러 사모하며 읊은 시들을 많이 수집했는데, 책 끝에 붙여 두었다. 원고는 모두 두 책이고, 두 책은 세 편(編)인데, 모두 1,144수이다. 원고에 빠지고 등본에 있는 것도 역시 이 숫자에 들어 있다. 그러나 등본에서 인쇄된 부분 가운데 의심스런 곳이 있었지만 질문할 곳이 없었다. 분량이 너무 크기 때문에 두 책을 세 책으로 나누고, 세 편을 다시 다섯 편으로 나눴다. 그 사이에 다른 뜻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아아! 모년월일(某年月日)이 제목에 따라 기록된 것과 오언(五言)․육언(六言)․칠언(七言)을 분류하지 않은 것은 친필의 차례에 의지한 것이라 감히 바꿀 수 없기 때문이었다. 약간 질(帙)을 출간하여 인몰(湮沒)될 것에 대비하면서, 또한 옛것을 좋아하는 군자가 뒷날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바이다.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4년 무오(四戊午) 5월 상한에 16대손 은(檃)은 삼가 쓰다.

 

元檃

詩以史名。志其直也。從古聖人之徒。信道篤而自知明。故遯世不見是而旡悶。是知純剛至正之氣。高明光大之學。發於言而成章者。非經則史也。吾先祖耘谷先生遭時板蕩。獨秉彛倫。隱居而著詩與文。文則史也。失火無傳。卽海東樂府詞所謂當時著述空勞神者是也。惟詩二卷。尙爲我五百年承家之鍾鼎。卽退溪․寒岡兩先生所謂原城有信史者是也。若稽麗末時事。王氏父子之寃。定妃所命恭讓之令。事在洪武二十二年已已詩中數三首據實直書者。盖此時事也。金火處遷之後有南行新國奉金尺受寶籙。慶贊之詩。可見所諱之不在詩也。先祖以高麗忠肅王十七年庚午七月初八日嶽降。而詩中所係年月。始於辛卯。終于甲戌。其間爲四十四年。萬斛珠璣。豈無遺漏。藏之石室。紙爛蠹蝕。有時擎讀。不覺涕隕。嗚呼。淹中妙鍵。不抽不傳。今也將付剞劂。皆言盧水鼓琴。不害於華夏之功。西山採薇。無損於戎商之德。故務光之操。伯夷之歌。未聞諱之於殷周之世。况一部詩史爲萬古綱常之重者哉。盖其造道成德。史纂論斷。可謂知言。至若大節所寓。錦溪朴公序之詳矣。何容贅說。嗚呼。衣冠之藏。在於冶東十里石逕之山。州北三十里七峯。卽賜額妥靈之所也。風聲所及爲之仰慕而歌詠者。亦頗蒐輯。附于卷末。原稿凡二冊。二冊凡三編。摠一千一百有四十有四首。佚於原稿而存乎謄本者。亦在此數。然謄本之入榟者。雖有疑難處。從何質訛。以其簡秩重大。故二冊則分而三之。三編則釐而五之。非有意於其間也。嗚呼。某年月日之逐題縣錄。五六七言之不以彙分。一依親筆次序。不敢改易。刊出若干帙。以備湮沒之歸。亦以竢日後好古之君子。

崇禎紀元後四戊午五月上澣。十六代孫。檃。敬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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